이번 주 강의의 핵심은 4가지이다. 과연 메이킹 포토에 대한 인식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떤 의도로 출현하게 되었나 하는 점이다. 사진의 역사는 그 시점을 80년대 중반, 빨라도 70년대 후반 뉴 웨이브 사진의 움직임에서 찾고 있으나 이것은 사진이 메이킹 포토에 대해 갖는 불편한 감정으로서 전통사진의 보수성과 편협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메이킹 포토가 현대사진의 새로운 방법론이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관심을 두어야 할 사안은 "누가 왜 스트레이트 사진을 포기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는가", 혹은 "사진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메이킹 포토의 존재이유이자 당위성은 찍어서는 나올 수 없는 사진, 만들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는 주제, 혹은 만드는 사진이 스트레이트 사진보다 메시지 증폭이 뛰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잘 헤아려야 하는 데는 뒤집어 생각할 때, 표현 가능하다면 스트레이트 하게 찍는 것이 좋다는 뜻이 되고, 메이킹 포토의 존재이유이자 당위성이라는 것은 도저히 찍을 수 없는 사진 혹은 찍어서는 표현할 수 없는 주제여야 하는 데 있다. 단순히 막연한 동경에서, 유행하는 스타일로서, 그저 이해 없이 한번 만들어보는 메이킹 포토는 위험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60년대의 개념사진에서 사진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다.
개념사진은 곧 개념미술(Conceptual Art)이다. 개념미술에 해프닝이 있고, 퍼포먼스가 있고, 대지예술이 있지만 60-70년대 예술을 주도했던 이와 같은 개념미술은 표현의 근간을 사진으로 삼았다. 그래서 60년대 개념미술에서 아직 채 무르익지 않은, 개념미술가들이 사진에 대해 생각하고 활용하려 했던 메이킹 포토의 초기 조짐과 현상을 알 수 있다. 사진은 사진인데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진 부류가 60년대에 등장했다. 똑같이 카메라에 필름을 넣고 대상에 대해 노출을 주고 현상하고 인화하는데 사진에 대한 생각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머지않아 이 두 부류가 서로 반목하든지, 서로 섞이든지, 아니면 반목하다가 곧 하나로 뒤섞이든지 하는, 크로스-오버 시나리오를 갖게 되었다.
사진을 오로지 사진 안에서, 사진가로서, 사진으로 세상을 말하려는 부류는 사진가이고, 예술로서 표현하려는 부류는 사진작가로서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순수사진의 계보이다. 반면 사진을 자신이 갖고 있는 개념을 위해 프로세스의 하나로서, 혹은 아이디어를 확실히 드러내주는 언어적 텍스트(text)로서 일종의 정보를 위한 코드로서 자료(document)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는 부류는 미술에서 건너온 아티스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60년대에 일어났을까. 왜 50년대가 아니고 60년대이며, 왜 70년대가 아니고 60년대인가. 이 문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사진이나 미술이나 1960년대는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60년대 사진은 공적 다큐멘터리에서 사적 다큐멘터리로 바뀐 시대. 소위 퍼스널 다큐멘터리 사진이 유행했을 때이다. 60년대의 미술은 팝아트와 미니멀 아트, 개념미술이 혼재되어 예술의 대상성에 대해 고민에 빠질 때였다. 이 시기의 현대미술은 "죽어도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서", "오로지 캔버스라는 이젤 회화에 대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표현주의에 대해서" 반성과 자각과 혼란에 빠져 있을 때였다.
60년대 개념사진에서 메이킹 포토의 조짐이 나타나다.
60년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상황은 20세기 현대사에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불온하고,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음은 역사가 말한다. 냉전 이데올로기가 극에 달했고, 쿠바미사일 위기, 케네디 암살, 말콤X 암살, 마르틴 루터 킹 암살, 베트남 전쟁, 흑인폭동, 우먼파워, 반전데모(스튜던트 파워), 워터게이트 사건, 히피, 펑크, 마약으로 이어지는 극도로 무질서한 상황이 이 시기에 연출되었고, 여기에 엄청나게 빠른 산업화, 공업화, 도시화에 따른 사회적 아노미, 극심한 계층간의 빈부격차, 무자비한 생산현장에서 노동력 착취와 인권 유린 등등, 현대사의 질곡이 60년대였음을 상기한다면, 과연 예술이 이러한 시대에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는 미술계의 당연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올 만 했다. 앤디 워흘의 팝 아트는 당연히 이 시기에 등장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소비적 양태, 대중주의, 상업주의 시대의 예술의 모습과 태도를 반영한 혁신적인 예술의 모습이었다. 또 캔버스에서 벗어나, 이러이러한 것만 예술의 소재이고 대상이라고 하는 기존 예술의 고장관념을 무너트리고자 나타난 게 개념미술이다. 생각(Idea)하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고, 이제 예술은 이런 것, 이렇게 하는 것은 없어져야 하며, 모든 것이 예술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디어도 예술이 되며, 어떤 프로세스도 표현을 위해 거리낌없이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 개념미술이었다.
캔버스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 예술을 위한 예술을 벗어 던지겠다는 생각, 예술을 위해서는 물질들이 필요하다는 예술적 물질성,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예술적 대상성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고답적 표현성에서 벗어나고자 개념미술가들이 시도했던 방법(그들은 프로세스라는 말을 즐겨했다)은 신체로서 표현하는 퍼포먼스,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순전히 아이디어만으로 이미지를 출현시키거나 프로세스를 수행하는 해프닝, 땅, 바다, 건물, 섬, 언덕과 같은 특정지역을 헤집거나 뒤덮어버리는 대지예술, 이미지를 오로지 시각적 텍스트(language)로 이해하여 코드화 시키는 오브제 아트(Object Art) 등등이 있었다. 이 모든 행위의 중심, 근간 혹은 결과에 사진이 버티고 있었는데 언어적 텍스트로서 혹은 시각적 정보로서 다큐멘트(다큐멘터리가 아니다)였다.
60년대 개념사진에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진을 만들려고 했나.
그렇다면 60년대 개념사진에서 메이킹 사진의 조짐과 현상을 맨 먼저 알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에드 루샤(Ed Ruscha)이다. 미니멀 아티스트 에드 루샤가 개념사진의 선구자격이다. 그의 사진에서, 그의 사진적 행위에서 메이킹 포토의 출발점으로 삼을 만한 아주 놀라울 정도의 개념적이고, 해프닝적이고, 퍼포먼스적인 사진의 새로운 방법론이 읽혀진다. 루샤는 1963년 어느 날 아침 커피 한잔을 마시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한다. "LA에서 오클라호마까지 자동차로 달리면서 그 길가에 있는 주유소를 한번 카메라로 다큐멘트하면 어떨까. 그리고 나서 그 주유소 이미지들을 일렬로 나열하여 책으로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바로 여기에 개념사진의 요체가 있고, 메이킹의 근거가 있다. 맨 먼저 아이디어에 의한 시간성과 공간성이 선택된다. 이것은 LA-오클라호마의 국도이다. 그 다음은 대상성. 이것은 전혀 예술적 소재가 아닌 "주유소"이다. 그 다음은 상징 혹은 기호성이다. 이것은 "암코(Armco)", "텍사코(Texaco)", 칼텍스(Caltex)", "유니언(Union)"과 같은 주유소마다 있는 정유회사의 로고와 엠블렘이다. 마지막으로 언어성. 이것은 그가 국도 상에서 만났던 "26개의 주유소"이다. 여기서 "26", "주유소"가 가지고 있는 기호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60년대 개념미술은 시간이동, 공간이동 혹은 반복에 따라, 그리고 대상들의 수리적, 산술적 비교, 대응, 조응하는 코드 때문에 상징적, 언어적 기호와 기표(고유명사, 혹은 비교적 짧은 텍스트)가 있다. 60년대 유행했던 개념사진의 제목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에드 루샤의 <26개의 주유소>(1963), <34개의 주차장>(1967), <10401 윌셔가 아파트>(1965), 앨리노아 앤틴의 <직업으로서 100켤레의 부츠>(1972), 온 카와라의 <1백만 년의 책들>(1969), 더글러스 휴블러의 (1969), 베허부부의 <9개의 물탱크>(1972), 조셉 코주드의 <블루램프에 5개의 단어들>(1965), 솔 르잇의 <벽 드로잉 #46>(1972), 리차드 롱 <2 1/2 마일 걷는 조각>(1969), 브루스 노만의 <11개의 컬러사진으로부터>(1966), 윌리엄 웨그먼의 <2개의 릴로부터 키스, 3개의 릴로부터 만 레이>(1972) 등등 60-70년대를 풍미했던 개념미술가들이 사진을 통해 이야기하는 언어적 텍스트에는 수치는 물론이고, 사진의 낱말, 거리표지판을 그대로 작품으로, 제목으로 단다 거나 아예 "무제(Untitled)"로 했던 것이 유행이었다.(작품 제목을 무제로 했던 것도 60년대 개념미술에서 일반화된 것이다)
60년대 개념사진은 사진에서 무엇을 얻으려 했나.
60년대 개념미술이 끝까지 사진을 주요 수단으로 움켜지었던 이유는 무얼까? 사진 아니면 아이디어와 그에 따른 프로세스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해프닝은 영원히 고정되는 것이 아닌, 한시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프로세스이기에, 퍼포먼스는 신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프로세스이기에, 또한 대지예술은 아주 큰 스케일로서 움직이는 프로세스이기에 당연히 다큐멘트를 위해서, 시각적 언어성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대중들에게 정보(information)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진이라는 시각적 기호가 필요했다. 개념미술가들은 그 때문에 사진사용을 당연시했고, 사진에 의해 정보와 기호 그리고 텍스트간의 비교, 분석, 통계, 수치, 차이를 나타낼 수 있었다.
60년대 개념미술가 중에는 훗날 사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사진사에 언급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서 에드 루샤, 베허부부, 조셉 코주드, 리차드 롱, 데니스 오펜하임, 브루스 노만, 존 발데사리, 윌리엄 웨그먼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이 70년대 개념사진가들에게 예술의 개념, 예술에 대한 태도, 오브제에 대한 인식, 언어와 정보, 기호가 주는 소통의 힘 그리고 사진이 표현매체로서 얼마나 막강하고 중요한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사진사에 자리할 뿐만 아니라 현대사진의 장르로서 편입되어 있다.(개념미술을 개념사진이라고 말하는 것은 70년대에 이르면 개념미술가들이 개념사진가라고 불릴 만큼 사진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신디 셔먼, 바바라 크루거, 세리 래빈, 아드리안 파이퍼, 리차드 롱고, 리차드 프린스 등 70년대 등장하여 80년대 포스트모더니스트로서 화려하게 꽃피우는 이들 작가들은 60년대 이들 개념미술가들에게서 절대적으로 영향받는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개념미술에서 개념사진으로, 개념사진에서 현대사진으로 모습을 바꾼다. 60년대 개념사진이 메이킹 포토의 현상과 움직임에 직간접적으로 연계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만드는 사진의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할 만큼 사진의 새로운 인식과 색다른 접근방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