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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동 덕장골, 효죽동, 소태굴 일대는 동래정씨 임당공파(林塘公派)가 오랫동안 세거하였다.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계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서울시 사당동과 화성시, 광명시 일대에 관련 인물의 흔적이 찾아지는 것으로 보아 서울과 가깝기 때문에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46) 덕장골에 22세 정탁(鄭逴)의 묘소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후 후손들이 묘역을 따라 입향을 하였거나, 정탁 대에 들어서부터 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1687년 경부터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아들 재숭(載嵩)이 광주 의곡면 석우천(石隅村, 현 포일리 주변으로 추정)에서 우거하고 지속적으로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실제로는 더 이른 시기부터 이 지역과 관계를 맺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래정씨 임당공파 계보도
20세 |
太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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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 |
載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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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세 |
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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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
義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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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
如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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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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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 |
元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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宅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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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
奎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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奎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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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
鶴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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鳳壽 |
龜壽 |
德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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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
命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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莘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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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朝 |
延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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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
寅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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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一 |
寅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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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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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彰 |
寅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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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
元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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俊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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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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應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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益謨 |
建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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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鎭道 |
鎭旭 |
進沼 |
鎭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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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亮 |
鎭宅 |
鎭有 |
鎭松 |
鎭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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鎭玉 |
鎭完 |
鎭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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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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必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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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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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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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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寅箕 |
30세 |
亨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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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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憲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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完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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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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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謨 |
31세 |
鎭東 |
鎭洙 |
鎭邦 |
鎭民 |
鎭午 |
鎭海 |
鎭溪 |
鎭洪 |
鎭夏 |
鎭奭 |
鎭國 |
鎭賀 |
鎭泰 |
鎭說 |
鎭文 |
鎭性 | 17세기 중반 입향 한 이후 의집의 후손들이 청계동 덕장골, 옥박골, 효죽동 일대에서 동족마을을 형성하였다. 이후 꾸준하게 동래정씨 집성촌으로 기능하였으나 일제시기에는 약 7~8집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1930년 조사단계에서도 청계동의 동족마을로 조사되지 않은 이유도 당시에는 이미 동족마을이 해체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1950년대 종손 진도(鎭道)와 그 후손들이 모두 타지로 이사가고, 1980년대 서울구치소가 생기면서 땅이 수용되어 그나마 남아 있던 문중들도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구치소가 생기면서 여은(如誾) 계열의 정건모·정성모·정형모 집안이 떠났고, 현재 양지편에는 준모(俊謨)계만이 지키고 있다. 동래정씨 묘역은 덕장굴, 무재봉 왼쪽, 소태굴 일대에 퍼져 있다. 임당공파 종친회는 사당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인천·서울·경인지역의 화수회(花樹會)를 만들어 주기적으로 모이고 있다. 현재 회장은 정호영이 맡고 있다. 사당동 일대의 동래정씨 문중위토는 개발이 되면서 각 문중별로 나눠서 가졌으나, 임당공파의 경우는 이 기금을 모아서 선조묘역 현양사업에 사용하였다. 신도비에 비각을 새로 세우고 묘역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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