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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연원
동래정씨(東萊鄭氏)는 고려안일호장(高麗安逸戶長) 정회문(鄭繪文)을 시조(始祖)로 보윤호장(補尹戶長) 정지원(鄭之遠)을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있다.
보윤호장(甫尹戶長)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으로부터 3세조(三世祖)인 정목(鄭穆)이 과거(科擧)를 통해 조정(朝廷)로 진출(進出)하게 된 이후 계속 과거(科擧)를 통해 중앙정계(中央政界)로 나아가 성장한 가문이다.
[편집] 정묘전설
동래정씨(東萊鄭氏) 대대로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보윤호장 지원의 아들 문도(文道)는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냈는데 부산(釜山) 화지산에 있는 그의 묘에 얽힌 전설이 지금껏 전해진다.
그가 죽어 정목,정선조형제가 지금의 묘터에 아버지의 시신을 묻고 돌아오자 그날 밤 도깨비들이 나타나 "대인(大人)이 들어올 자리에 다른사람이 들어왔다." 하며 묘를 파헤쳐 버려 이틑날 이를 본 두 형제들이 영문도 모른체 아버지의 시신을 다시 모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였다.
이렇게 묻고 파헤치는 실랑이가 몇 차례 계속되던 끝에 이를 이상히 여긴 두 형제들이 백발 노인을 찾아가 기묘한 사실을 이야기하자 노인은 그 자리는 임금이나 정승이 묻힐 자리이기 때문이라며 금으로 관을 만들어 묻으면 되나 그럴 수는 없으니 관을 보릿짚으로 싸서 묻으면 도깨비들이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노인이 시키는 데로 하고 몰래 숨어서 봤더니 도깨비들이 그 날밤 다시 돌아와서 과연 주인이 들어 왔구나 하며 되돌아 갔다는 이야기이다.
[편집] 성장
동래정씨(東萊鄭氏)는 대대로 호장이었으나 중시조로부터 3세조(三世祖)인 정목(鄭穆)이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르고, 정목(鄭穆)의 아들로 정제(鄭濟)․ 정점(鄭漸)․ 정택(鄭澤)․ 정항(鄭沆)그의 네 아들이 모두 문과(文科)에 오름으로써 명족(名族)이 되기 시작(始作)하였다.
이중에서 정항(鄭沆)은 청백(淸白)함으로 이름이 높아 "고려사(高麗史)"에 입전(入傳)된 인물(人物)이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집에는 초상(初喪)을 치를 한 섬의 곡식(穀食)조차 없었는데, 왕(王)이 그의 청빈(淸貧)함에 놀라 "30년 동안 근시(近侍)의 직(職)에 있었고, 11년 동안 승지(承旨)로 있었으면서도 가난함이 이 정도이니 가상하다" 고 하며 부미(賻米)로 쌀 100섬(一百섬)과 배 200필(二百畢)을 하사(下賜)하고, 친필(親筆)로 시호(諡號)를 문안(文安)이라 내렸다.
그의 아들 정서(鄭叙)는 임금을 그리는 노래 "정과정곡(鄭瓜亭曲)" 을 남긴 인물(人物)로 국문학사(國文學史)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고려(高麗) 인종(仁宗)과 동서간(同壻間)으로 내시낭중(內侍郞中) 벼슬까지 지냈으나 의종(毅宗)이 즉위(卽位)한 뒤 모함(謀陷)으로 인하여 동래(東萊)로 귀양길에 오르는데, 그때 왕(王)이 곧 다시 부르겠다고 약속(約束)했으나, 오래도록 부름이 없자 그곳에서 임금을 그리는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후대(後代) 사람들이 이 노래에 그의 호(號)를 붙여서 "정과정곡(鄭瓜亭曲)" 이라 불렀다.
중시조로부터 11세손(十一世孫)인 정양생(鄭良生)은 단성보리 찬화공신(端誠輔理贊化功臣)에 책록되고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그 뒤 고려에 충절을 바쳤으나 공양왕 4년(1392년) 4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편집] 과거급제자 수
고려조(高麗朝)에 이미 대족(大族)으로 성장(成長)할 수 있었던 동래정씨(東萊鄭氏)는 조선조(朝鮮朝) 전 기간(全期間)에 걸쳐서 17명(十七名)의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였는데, 이는 전주이씨(全州李氏) 22명(二十二名)․안동김씨(安東金氏) 19명(十九名)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것이다.
그 외에 대제학(大提學) 2명(二名)․호당(湖堂) 6명(六名)․공신(功臣) 4명(四名)․판서(判書)가 20여명(二十餘名)이 나왔고, 198명(一百九十八名)의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를 배출(輩出)하였다.
왕족(王族)인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대명사(代名詞)인 안동김씨(安東金氏) 다음으로 많은 상신(相臣)을 배출(輩出)하면서도 외척(外戚)으로 세력(勢力)을 얻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직(特徵的)이다.
[편집] 파(派)
동래정씨(東萊鄭氏)의 분파(分派)는 중시조로부터 6세손으로 부터 크게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첨사공파(詹事公派)․호장공파(戶長公派)의 세 개파(三個派)로 나누어졌다.
이 중 2개파(二個派)는 3세조(三世祖) 좌복야 정목(鄭穆)의 후손으로 이루어 졌고, 정문도(鄭文道)의 둘째 아들로 동래(東萊)에 남아 호장직(戶長職)을 계속(繼續)한 정선조(鄭先祚)의 후손들은 호장공파(戶長公派)로 분파하였다.
[편집] 집성촌(세거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우망리
경남 거창군 남하면 일원
경북 청도군 화양읍 삼신리
경북 군위군 효령면 금매리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경북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
경북 안동시 송천동, 임하면 임하리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리
경남 산청군 생초면 일원
강원 이천군 판교면
서울 중랑구 망우1동 양원마을
제주도 북제주군 애월면 고성리
[편집] 동래정씨 전국 인구 분포지역
동래정씨는 대구광역시,경상북도,경상남도,부산광역시 등 영남지방과 전라북도 지역에 상대적으로 많이 살고 있는게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