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은 백두산 천지의 벅찬 감동
- 찬란했던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보다 -
o 여행일자 : 2013. 9. 5(목) ~ 9. 8(일)
o 여행지 : 중국 백두산 서파 일원
o 여행참석자 : 9명(장봉조, 박재수, 손우기, 정옥희, 김운섭, 홍성억, 안순화, 이용월, 오창수)
□ 첫째 날(2013. 9. 5. 목) 북릉공원
면목동 집에서 04:30분에 출발하여 인천국제공원에 05:30에 도착한다. 05.30까지 공항에 도착하느라 좀 바빴지만 무사히 모두 제시간에 인천국제 공항에서 모였다. 곧바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면세점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면서 햄버거로 간단하게 시장기를 해결한다. 07:40분 티켓팅을 시작하고 08.10에 비행기(KE831)에 탑승 완료하여 08:35에 이륙하여 선양공항에 08:55 도착(중국 현지시간) 했다.
10.00am쯤에 짐을 찾아 중국에서 입국 수속을 마치고 선양공항을 빠져 나왔다. 도착하여 짐을 찾는데만 1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완전히 만만디(기계가 돌다가 자다가)이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데 소요된 시간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선양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시간보다 더 많이 소요되었다. 역시나 우리나라가 뭐든지 빨라요.
10:10분경 가이드(전 선녀)와 미팅 후 곧바로 미니버스를 이용하여 북릉공원(北陵公院)관광에 나섰다. 북릉은 선양공항에서 30분이 소요되어 10:40에 공원에 도착했다. 10:40~12:10분까지 1시간 30여 분간 북릉공원을 관광하였다.
북릉공원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에 있는 청(淸) 태종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능(陵)으로 1643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651년에 완성하였으며, 당시에는 '소릉(昭陵)'으로 불렸고, 현재는 '북릉공원[北陵公園]'으로 불리고 있다. 선양고궁, 동릉(東陵)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북릉공원은 소릉(昭陵) 주변에 조성된 공원으로 선양시 북쪽에 위치하며 면적이 330만 ㎢로 그 규모가 크다. 청나라 때인 1643년(順治 원년)에 짓기 시작해서 1651년(順治, 8년)에 1차로 완성되었으며 그 후인 1927년에 공원으로 조성해서 북릉이란 명칭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북릉공원의 입구인 정홍문, 대리석으로 깔아 놓은 신도(神道), 태종의 제사를 모시는 육은전, 육은전을 지키고 있는 육은문 등의 건물이 줄지어 서 있다. 정홍문을 지나면 황성을 지키고 왕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석상들이 길 양편으로 줄지어 서 있다. 석상은 사자상, 해태상, 기린상, 말상, 낙타상, 코끼리상이 한쌍씩이 배치되어 있다. 소릉은 청나라 2대 홍타이지(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와 황후의 무덤이라 했다.(출처 : 인터넷 백과사전)
<북릉공원 앞 광장>
북릉공원 내부 이곳저곳에 소나무와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루고 아마도 꽃이 피는 여름이었으면 만은 꽃길이 우리들을 반겼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북릉은 성곽, 전각, 조형물 그리고 호수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긴 거리를 걸어 새로운 건물에 도착하기 전 장군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누르하치 아들의 상이라고 한다.
<홍타이지 동상>
이곳의 지붕의 구조와 색은 황색과 노란색이 혼합된 선한 밝은 색으로 중국특유의 색상인 듯 인상적이었다. 고색창연하단 말이 적당할까?
<특이한 문양의 건축물>
<소릉 안내판>
소릉 안으로 들어서도 이런 문을 몇 번을 지나야 한다. 소릉안에도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단단하게 보이는 건물들이 계속 연이어 이어진다. 약 1시간 30여분의 북릉 곳곳을 둘러보며 기념 및 증명사진을 담아 둔다. 소릉을 들어가기 전 길 양편으론 석상들이 조각되어 서 있다. 말석상을 보니 다리가 짧아 달리는 말은 아닌 듯하다. 코끼리상도 그러하고…….
<길 양편의 석상들 >
<소릉을 둘러싼 성곽>
<성곽위에서 본 전각들>
왕릉을 돌아 나와 30여분을 이동하여 조선족이 많이 산다는 서탑거리에 있는 한원식당에서 김치찌개와 한국에서 매번 먹는 식재료로 만든 감자무침, 콩나물무침, 오이무침 등으로 간단한 상을 차린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 한다. 서탑거리는 우리나라 글씨의 간판이 많다.
<서탑거리>
13:10분 서탑거리에서 식사를 마치고는 다음날 백두산 서파를 오르기 위해 약 8시간의 예정으로 백산시 송강하로 이동한다. 이동 중 17:30분 통화시에서 저녁식사를 한다. 송강하의 목적지에 도착하려면 앞으로도 버스로 몇 시간을 더 가야하기 때문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18:00 송강하로 출발하여 오늘의 목적지인 천사관광호텔(0439-659-8555)에 도착한 시간은 22:40분경이다. 점심을 마치고 9시간 30분이 소요되어 천사관광호텔에 도착하면서 중국에서의 1일차의 관광을 마친다.
호텔에 표시되어 있는 영문 명칭을 직역하면 천시관광마을이다. 이 호텔은 장백산 가까이에 위치하여서인지는 모르나 내부가 상당히 오래된 듯 하고 지난 관광객들이 묵고간 흔적들이 거의 청소가 되어있지 않았다. 또한,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느 방은 따뜻한 물이 너무 적게 나와 뜨겁고 어떤 방은 아예 물이 나오지 않아 변기의 물도 내릴 수가 없었다. 아침에서야 샤워와 지난밤의 악몽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 둘째 날(2013. 9. 6. 금) : 백두산 서백두(서파)
천사관광호텔에서 06:30에 조식을 마치고 07:30호텔을 나와 10여분이 소요되어 백두산 서파산문에 도착한다.
<서파 산문>
여기서 입장료, 셔틀버스표를 사고 버스로 40여분을 이동하여 서파로 오르는 1,442개의 계단이 보이는 백두산천지의 6부 능선 서파주차장에 도착한다. 나무 및 돌계단마다 번호가 붙여져 있어 숫자를 굳이 셈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정표에도 그 숫자가 표기되어 있다.
<버스를 타고 서파 주차장으로 이동중 한 컷>
<서파 주자창>
<5호경계비 까지 1,442개 계단>
<5호경계비가 있는 천지 오르기 시작>
백두산(최고봉 2,750m)의 동남쪽은 북한지역이며 북서쪽은 중국지역이다. 북한지역은 갈수가 없기 때문에 북서쪽만 관광과 산행이 가능하다. 백두산 중국지역 여행코스는 크게 서파(서백두)와 북파(북백두) 2코스이다. 파(坡)는 중국말로 언덕이란 뜻으로 서파코스라고 하면 백두산 서쪽(2,470m)에서 오르는 길을 의미한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민족의 영산으로서 단군신화와 함께 한다. 해발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백두산에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백두(白頭)는 ’머리가 희다’는 뜻처럼 백두산의 꼭대기는 1년 중에서 8개월 정도가 흰 눈으로 덮여 있다고 한다.
백두산은 흐린 날이 많아서 깨끗한 천지를 보기가 어렵다지만 날씨에 상관없이 백두산 천지 자체가 지닌 의미는 특별하다.
정상에 위치한 천지(天池)는 면적 9.165㎢에 이르는 칼데라호로서 백두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천지를 중심으로 북파는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며 서파는 해발 2,000m 이상의 완만한 고산지대를 이루고 있다. 여름이면 광활한 초원지대와 지천에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다고 한다. 백두산 관광은 7월(7월 말이 고산화원의 절정기)부터 8월이 날씨가 좋아 여행 적기로 꼽힌단다.
중국 측은 백두산 서쪽지역을 관리하는 중국길림성 장백산국가급자연보호구인 서파여유국이 이곳을 세계적인 생태관광지역으로 보호하고 있단다. 백두산 서편에서 즐기는 트레킹의 묘미는 천지 봉우리에서 뻗은 완만한 초원의 꽃대궐 구릉을 걸어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청석봉 능선까지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을 보며 걷는 것이고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며 계단이 잘 정비되어 있다.
서파는 서파산문으로 들어가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도로가 포장되어 있어 많은 버스들이 관광객을 열심히 실어 나른다. 5호경계비 오르는 길에 나무계단과 돌계단이 설치되는 등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서파산문 안은 셔틀버스로만 40여분 정도가 소요되고 최근에 지린성에서 범정부적으로 중국 방송에 많이 홍보하고 있어 중국인들도 많이 찾는 관광코스란다. 많은 중국인들과 함께 천지에 올랐다.
이번 서파트래킹 코스로는 천지의 5호경계비, 들꽃 군락지인 왕지와 고산화원, 제자하, 금강대협곡이다. 그러나 이시기에는 이미 전날 눈이 오는 등 기후의 변화로 고산화원의 멋진 모습은 볼 수 없었고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쳐야 했다. 기온이 많이 내려가 모든 꽃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버스로 천지를 오르면서 웅장한 능선들의 모습에 가슴이 탁 트이는 듯 하고…….
백두산 정상의 천지에 오르니 바다같이 넓은 칼데라호가 아름답게 펼쳐진다. 하늘 끝과 맞닿아 있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푸른빛의 맑은 물과 하늘의 구름과 조화로움에 감탄의 찬사가 절로 나온다. 두 번 백두산에 올랐으나 하루 종일 이렇게 구름이나 운무가 없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때가 맑고 깨끗한 천지를 보기에는 최대의 안성맞춤의 시기인 것 같다.
<서파의 해발은 2,470m>
<5호 경계비>
<드디어 천지가>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올라보고 싶은 곳으로 ’백두산’을 점찍어 뒀을지도 모르겠다. 백두산을 한번 올랐던 경험이 있더라도 백두산을 또다시 오르고픈 희망을 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멋진 풍경을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름다운 풍경과 천지에서 느끼는 남다른 감동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백두산이 또 그리워지는 것이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백두산으로 벅찬 감동을 오늘 만끽하였다.
5호경계비가 있는 정상의 나무테크에는 전날 내리 눈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일행은 천지에서 정상주를 나누며 즐거움과 환희로 둥둥 날고 있는 듯 했으며 우리 일행은 시리도록 푸른 천지의 물과 조화를 이룬 하늘금에 반하여 한참을 떠날 줄을 모른다.
<전날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다.>
<정상주를 마시며 이 기쁨을!>
백두산 관광은 7월부터 8월이 날씨가 좋아 여행 적기로 꼽히고 있다. 이번 시기에서는 능선을 따라서 피었을 신비한 모습의 야생화를 볼 수 없었다. 반면 장점은 하루 종일 푸르고 맑은 깨끗한 천지를 아무 방해 없이 마음껏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천지의 중앙부를 카메라에 담을라치면 기본적으로 중국인이 찍어 주는 사진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1인 4장의 범위에서 4명이 1조로 4만원을 주고 그네들이 찍어준 것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각각 1인 독사진 기념사진을 남길 때에 재빠르게 가지고간 카메라로 전체 천지를 담을 수 있었다.
<중국인이 찍은 단체사진>
트레킹의 적기도 7월부터 8월이란다. 그러나 현재는 트레킹을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위험하지 않은 코스를 새로 개발 중이라고 가이드가 전한다. 2,000m가 넘는 산의 높이로 7~8월이 쾌적한 날씨에 걷기에도 좋고 맑은 날이 많아 백두산의 자연을 맘껏 즐길 수 있단다. 트레킹은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좀 힘들긴 하지만 백두산의 야생화와 능선을 비롯해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단다.
백두산을 오르는 방법은 트레킹을 하면서 정상까지 올라갈 수도 있고 차를 타고 좀 더 편안하게 오르는 방법도 있다. 백두산을 트레킹할때는 서파에서 북파까지 이어지는 코스를 보통 추천한다. 코스의 약 3분의 2는 능선과 내리막으로 구성돼 있고 나머지 3분의 1은 오르막으로 무난하게 백두산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단다.
또한 중간에 쉬면서 풍경을 감상하는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10시간 정도가 소요된단다.(지도상 서파에서 북파까지 10시간 소요)
차를 이용한다면 보통 버스(서파)와 4륜구동 지프차(북파)를 이용해 입구에서 백두산 정상까지 가게 된다. 북파의 경우는 지프차에서 내려 약 200여m 걸어 올라가면 꿈에 그리던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사진 또는 영상을 통해 보았던 어렴풋한 기억들이 선명해지는 순간이다.
필자가 몇 년 전에 다녀온 북파코스(천문봉은 지프차로, 다음날 장백폭포가 있는 곳으로는 도보로)에 있는 장백폭포는 높이 60m가 넘어 중국 동북지역에서 가장 큰 폭포로 알려져 있다. 비룡폭포라고도 불리며 폭포는 아래로 곧게 떨어지다가 암벽에 부딪히면서 물보라를 일으켜 장관을 이룬다. 맑은 날이든 흐린 날이든 나름의 멋이 있다.
또한 장백폭포 주변에는 온천수가 김을 내며 흐르고 있는데 흐린 날에는 안개와 온천수의 연기가 어우러져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 바닥의 천지의 물을 만져보기 위해 달문으로 오르면 장백폭포에 이르기 전 마을 어귀에서는 땅에서 솟아 나온 온천수를 이용해서 익힌 계란과 옥수수를 판매하고 있었다. 이글을 쓰는 지금 문덕 그것이 다시금 맛보고 싶어진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백두산을 찾을 것을 뒤로하고 천지를 하산한다. 내려오면서 버스가 1차로 멈춘 곳이 제자하(10:46)라는 안내표시판이다. 제자하는 거대한 용암이 지하로 흘러 생겨난 물이 흐르는 좁은 지하 통로 같은 것으로 작은 다리위에서 내려다본다.
<제자하 안내판과 제자하>
제자하를 카메라에 담았으나 웅장하거나 특별히 멋지거나 그러한 것은 아니다. 금강분지에는 높이 80m의 금강폭포, 계곡물에서 솟아오르는 진주온천 등이 있다고 한다. 제자하의 안내판이 있는 계곡은 아주 작은 곳이나 이곳이 협곡의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는 듯하다.
이어서 두 번째로 버스가 멈춘 곳은 금강대협곡(10:50)으로 대협곡산문이 하나 서 있다. 일행은 여기서 기념사진을 한 장 남기고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의 오른쪽으로는 출구의 표식이 보인다. 한 바퀴를 돌아 이곳으로 원위치 하는 것으로 짐작이 된다.
<금강대협곡 산문>
금강대협곡의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나무데크 길이 연결된다. 입구를 통과하여 50여m를 들어가니 산불이 난 자리를 중심으로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나무테크 길을 따라 개방을 하여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빼곡히 우거진 밀림 숲들의 사이로 데크 길을 따라 약 1km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 원위치하여 대협곡 산문으로 나온다. 산문으로 되돌아는 입구 부분에 소원을 비는 나무가 붉은색의 리본을 두르고 있다.
<소원 나무 ?>
금강대협곡은 계곡의 길이가 약15km, 골의 깊이는 70-100m, 넓이는 100-200m로 경사가 급하며 V자 형상의 협곡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거대한 협곡이란다. 위치상으로는 금강대협곡은 천지와 중국 서파매표소 사이의 지린성(길림성)에 자리 잡고 있다. 천지를 내려서면서 제자하, 금강대협곡을 관광하도록 코스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해 용암이 분출되고 또 오랜 시간 풍화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협곡으로 기암괴석과 계곡수가 어우러져 멋진 볼거리를 선사한다. 동양의 그랜드 캐넌이라고 하여야 할까?
<금강대협곡의 모습들>
산문 대협곡의 물은 천지에서 발원 중국쪽 송화강을 이룬다고 한다. 최대폭 100여m, 최대깊이 200여m, 총길이 70여km로 참으로 어머 어마한 대협곡이다. 1997년 산불로 타버린 고송을 베어 내고 원줄기에 나이테를 표기하여 관광 상품화하고 있다. 수령 262년 된 소나무라는 것을 나이테에 표식을 붙여 증명하고 있다.
<산불로 발견된 곳이라는 안내 표지판>
다음으로 버스가 멈춘 곳이 청나라(만주족)의 성지인 왕지이다. 기사가 우리 관광객에게 왕지를 둘러볼 것인가 묻는다. 버스안 일행 중 중국인 1명이 그냥 통과하잖다. 여기에는 확트인 드넓은 야생화 꽃천지가 펼쳐진다고 한다.
그냥 통과하자는 뜻은 아마도 이번 관광시기는 내려오면서 고산화원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꽃들이 이미진 상태라 습지밖에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7~8월(7월말이 절정기라고)에 오면 절정기라고 한다. 특히 여기는 붓꽃이 군락을 이룬다고 한다. 약40분 정도 가로지르면 꽃밭이 끝날 무렵 호수가 나타난다고 하며 청을 세운 누루하치의 탄생신화가 얽힌 곳이란다.
산문 안에는 두어 곳에 건물이 있다. 한곳은 겨울철이 등 차량이 많을 경우를 대비하여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만든 곳으로 보인다. 즉 환승장의 개념일 듯.
금강대협곡의 관광을 마치고(12:08) 내려오면서 또 다른 건물에 도착한다. 여기에서 일행은 점심식사를 한다.
<장백산문내 식당>
식사를 마치고(12:40) 늘상 중국인들이 하듯이 담배를 하나 빼들었다. 그러나 식당 밖에서는 담배를 피울 수가 없단다. 식당내 한켠에 흡연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다.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내에는 흡연장소와 화장실과 같이 장백산의 4계를 담은 멋진 사진을 상시 전시하고 있었다.
백두산 서파 관광을 마치고 13:20분에 통화로 출발한다. 통화시로 이동 중에 14:20분경에 송강하의 조선족이 농사를 지어 판매하는 곳에 잠시 들러 잡곡 등을 구입한다. 다시 통화시로 이동할 즈음 17:30분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다음 여행에 지장이 있을 것이나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를 모두 관광하였으니 이제는 별 걱정이 없다.
약 4시간여를 이동하여 18:20분에 통화시에 도착하여 강씨식육식당에서 삼겹살로 18:50분경 저녁식사를 마치고 발마사지를 받기 위해 5분 정도 이동한다.
이 도시의 생활상이 궁금하여 필자를 포함한 2명은 발마사지를 포기하고 근처 실내 포장마차에서 양꼬치와 중국술(이름 모름)을 시켜 맛을 본다. 1코치에 2元이란다. 그런 대로 먹을 만하나 약간의 중국식 향이 있다. 발마사지를 끝으로 20:00경 통화시에 있는 맨포드호텔(0435-511-5299)에 투숙하면서 2일차의 중국관광을 마친다.
맨포드호텔은 시설은 좋으편이나 앞에 역이 있어서 밤새도록 열차의 요란한 경적 소리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중국은 특이하게도 열차가 들어올 때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꼭 3번씩이나 울려 된다. 그래서 호텔이 비싸지 않은 것인지 중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그러나 다음날 토?일요일 아침 관광을 나서며 보니 결혼식이 있다. 그러면 그렇게 레벨 낮은 곳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맨포드호텔에서의 2일간을 어렵게 보냈다.
□ 셋째 날(2013. 9. 7. 토) : 광개토대왕릉비와 왕릉, 장수왕릉, 국내성, 환도산성, 압록강
맨포드호텔에서 1박과 조식을 마치고(06:30) 짐은 호텔에 그대로 두고 07:30분에 고구려 유적이 있는 집안으로 출발한다. 오늘의 일정은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장수왕릉(장수총), 환도산성을 둘러보는 것이다.
우리 버스가 간 길은 단동 - 통화간 고속도로를 1시간가량 타다가 통화 - 집안간 국도를 따라가는 북로길로써 집안까지 약 3시간이 소요되어 10:40분경 광개토왕비 앞 주차장에 도착했다.
(1)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와 장수왕릉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중국에서는 '호태왕비'라고 부른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이중 마모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자에 이른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으며,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했으며,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단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단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인데,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출처 : 인터넷 백과사전)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이곳도 중국 길림성 국가급문화재보호구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마크 AAAA>
광개토대왕비는 자연석에다가 4면에 글을 새겼는데(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알아보기 어려웠다.), 지금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 집으로 싸여있다. 본래는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 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중공 당국이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호태왕 비>
광개토왕비를 보고나서 광개토왕릉으로 가기 전 전시관이 하나 있다. 여기에 누각으로 둘러싸기 전의 모습과 기재된 내용들을 풀이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때 세운 비석으로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한다.
<전시관>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 이중 마모되어 전혀 판독할 수 없는 것이 약 140자에 이른다. 이를 □로 표기하고 있다.
<비문 글자>
다음으로 찾은 곳이 광개토대왕릉으로 자연석을 이용한 양식의 형태도 주변국에는 없는 양식이라고 한다. 광개토대왕릉은 지금은 허물어져 돌무더기와 무덤 실이 남아 있으며 받침돌도 20개중에 13개만 남아 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보다 길이는 2배 넓이는 4배가 넘는 규모라고 한다.
<호태왕릉>
앞쪽의 압록강 너머에 있는 북한쪽에 가파른 산세위에 화력발전소인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굴뚝모양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는 개간을 한 것인지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으나 산세는 압록강으로 인해 가파르게 느껴진다. 무덤석실 정면 방향으로는 국내성으로 짐작이 되나 우리들이 국내성벽을 방문을 하지 못했다. 이곳에는 아파트와 집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장수총을 바라보면서>
<아파트와 집이 들어선 모습>
호태왕릉에서 바라보이는 장수총은 약 5분을 이동한 거리에 있다. 장수총을 들어서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장군총은 맨 위의 지붕부분은 유실되고 없지만, 아래 기단은 계단식 7단이며 무덤이 무너지지 않도록 큰 돌로 기단을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지금은 기울어짐을 막기 위해 돌을 바치고 있고 관광객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장군총을 보호하기 위해 올라갈 수가 없었다.
장수총은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무덤중 가장 원형으로 잘 남아 있다고 한다. 고구려 무덤의 특징은 횡혈식 적석총으로 아래 기단을 계단식 1-7단으로 쌓은 것인데, 이러한 양식은 주변 어느 나라에서도 보이지 않고 이러한 양식은 요하문명의 유물에서 발견되고 있단다.
<장군총>
<장수총 뒷편의 고인돌>
그 시대에는 찬란하고 웅장했을 고구려가 이제 유적지에서 보니 지금에 와서는 다른 나라에 속해 있다 보니 너무나 비교되고 시대의 명성은 어디로 갔는지 약간의 쓸쓸함이 밀려온다. 일행은 11:10까지 고구려 유적지를 뒤로하고 압록강으로 향했다.
(2) 집안(集安)에서 만난 압록강(鴨綠江)
압록강(鴨綠江)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부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강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강으로 알려져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는 총 길이가 약 925.502Km로 나와 있다.
백두산 장군봉 남서계곡에서 발원한 백두산 물이 압록강을 이루어 황해로 흘러들어 간다. 압록강이란 이름은 신당서(新唐書)에서 "물빛이 오리 머리색과 같다고 해서 압록수(鴨綠水)로 불렀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으면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阿利水)라 표시되어 있다.(출처 : 인터넷 백과사전)
우리일행은 11:10분 장수총을 출발하여 11:40분경 북한 땅이 그런대로 잘 보이는 압록 강변에 도착 한다. 표지석의 압록강 글씨처럼 강물은 녹색으로 닮아있다. 그러나 오늘은 비가 와서인지 햇빛이 없어서 인지 진한 오리색녹색이 되어 사진상으로는 붉은 흙탕물에 가깝다.
집안은 압록강의 중류쯤 되는 것 같은데 두만강보다는 강폭이 훨씬 넓은 듯하다. 비가 와서 물이 많이 불어나 강폭이 더 넓어 보인 것인가? 강 건너는 바로 북한 땅이다. 중국 쪽 강가에서 보트를 타고 북한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북한을 가까이 보고 싶어 보트를 탔으나 비로 인하여 사진은 대충 몇 장만 남겼다.
<보트 선착장>
비가 와서 모터보트가 강을 가로질러 한 바퀴 돌아오는데는 채 10분도 안 걸린 듯 했다. 비가 오는 중에도 이 북쪽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고 들고서 삼삼오오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자전거도 지나가고, 소도 보이고…….
비를 맞으며 한 바퀴를 쏜살같이 돌아오니 비가 그친다. 조금만 늦게 보트를 탔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쉬운 마음과 북한 땅을 보라보면서 압록강 표지석을 배경으로 단체사진과 개인사진을 남겨 본다.
<압록강 표지석 앞에서 한 장>
저 멀리 북한쪽 화력발전소인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굴뚝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산세가 험하다. 그럼에도 개간이 되어 있는 듯하다. 북한의 경제난을 반영하듯 산이 제법 높아 보이는데도 중턱까지 개간이 되어 작물을 심어 놓았다. 중국쪽 압록강 안에는 관광객들이 북적이는데 북한쪽은 인적이 거의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모터보트를 타고 가면서 찍은 북한땅>
<압록강에서 바라본 북한쪽 마을의 모습>
압록강 보트타기와 기념사진을 마치고 12:10분 압록 강변에 있는 한식당에서 소고기 구이로 점심을 먹는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도 왔다 갔다 하건만 불친절이 극치를 이룬다. 불러도 돌아보지도 않는다. 가이드가 어떻게 사전에 주문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도무지 우리들이 하는 말에는 안중에도 없다. 인상으로 봐서는 가이드가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는데 원인이 있을 것으로 판단이 되지만. 말이라도 시원하게 통하면 억울한 것을 서로 해소하게 될 텐데…….
<압록강 앞의 식당에서 점심식사>
12:40분경 점심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서니 식당 앞에 조선족이 장사를 하기 위해 모여 있다. 옥수수, 과일, 장뇌삼 등등. 우리 일행 중 모 분이 장뇌삼을 싸서 같이 나눠먹었다. 오랜만에 장뇌삼으로 몸보신 하는 기분.
이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천연요세 환도산성으로 향한다. 30여분이 소요되어 13:00에 환도산성에 도착한다.
(3) 420여 연간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과 천연요새 환도산성[丸都山城]
지안은 현재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시와 마주보고 있는 인구 22만의 소도시로 광개토대왕비를 비롯하여 국내성터, 환도산성 등이 있고 이외에 크고 작은 1만2천여기의 장군총 무용총 등 고분이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고 고구려 400년 도읍지의 자취를 전해주는 곳이다.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지역은 고구려의 옛 수도로, 국내성(國內城)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는 도성의 경우, 평상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비상시에 인근의 산성으로 피난하는 평지성·산성의 방어체계를 구축하였는데, 환도산성(丸都山城)은 비상시에 거처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평지성인 국내성은 왕궁과 관청이 있고 귀족들과 일부 평민들이 거주하는 도성이었고 환도산성은 위급할 때 피난하는 방어성으로, 험준한 산세에 의지한 산성 안에는 궁궐터가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환도산성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山上王· 재위 197∼227) 즉위 2년(198)에 처음으로 쌓았다가 같은 왕 재위 13년(209)에 천도한 후 서기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왕성(王城)으로 기능했다고 한다.
환도산성은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 북쪽 2.5km 지점에 있는 산성으로 옛 고구려 왕성으로 고구려는 이 지역을 수도로 하였던 당시 적군이 침입하면 국내성에서 환도산성으로 거처를 옮겨 전투를 하면서 방어한 곳이란다. 국내성에서 걸으면 1시간 이내에 위치해 있단다.
우리 일행은 국내성은 가지 않았으나, 국내성은 약 425년간 수도로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데, 유네스코에 문화유산으로 등록되면서 30년 안에 이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고 발굴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쪽 성벽은 완전히 허물어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서쪽 벽이 그나마 가장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원 성벽은 약 12미터 높이라고 하는데, 서쪽 벽은 5미터 정도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남쪽 성벽은 압록 강변을 따라 이어져 있단다.
환도산성 앞에는 산성하 무덤 떼라고 불리는 고구려인들의 무덤들인 돌 기단을 그대로 가지고 윗부분이 허물어진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고구려 특유의 무덤형식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계단식 기단을 쌓고 그 안은 강돌로 채우고 그 위는 집을 설치했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계급에 따라 돌 기단이 높아진다고 하는데 현재까지는 7단이 최대로 높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고 한다.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여러 번 공격을 받았으나 건재하다가 전연(후연이 있기 전 : 선비족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337∼370)과 후연(後燕·384∼409)으로 구분됨)이 쳐들어왔을 때 완전히 대패당하여 산성은 물론 궁궐도 파괴되어 터전만 남아 있단다.
궁궐은 서기 198년에 남북으로 95.5미터 동서로 75미터의 지어졌데, 342년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역사적으로는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재위 331∼371)은 342년 전연의 침공을 받아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고 왕모와 왕비를 비롯한 5만 명의 주민이 포로가 되는 대참패를 당했다. '- destroyed in the war in A. D.342'(출처 : 인터넷 백과사전)
환도산성에 도착하여 산성내로 들어갈 즈음에 사무실 쪽에서 난리다. 아마도 판단 컨데 입장료가 있나보다. 그러나 가이드는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다. 그냥 시간상 적당히 돌고 입장료도 아끼고 싶은 것인지?
3일째가 되니 점점 가이드의 하는 행동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 아니 여행사에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꼭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언제까지나 할 것인지?
환도산성은 국내성이 위협을 당할 때 등 비상시에 임금이 피신하거나 군사들이 방어를 하던 곳으로, 자연지세가 워낙 견고해서 적의공격을 막기에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성벽이 남아 있으며 지형을 보면 환도산성은 3면이 산세를 이루어 막아주고 있어 한 면만 방어하면 되는 지형적 유리함을 가지고 있었다.
3면은 산으로 험악하여 침공하기 힘든 모양새이고 하단면의 왼쪽 동그란 곳은 물이 흐르는 아주 작은 냇가로 가운데에 배수로가 있다. 그리고 성내의 동그란 큰 점은 망루이고 오른편의 네모는 궁궐터로 지금은 돌 기단만 남아 있다.
<환도산성>
비록 내부 안으로는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밖으로 한 바퀴를 돌면서 카메라에 남아 있는 돌 기단 등을 담을 수 있었다.
성문은 항아리형 성문으로 성문 앞에 서면 양옆의 공격에 위압감과 성안이나 성 밖에서 바라보면 웅장한 산의 위력에 주눅이 들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환도산성 앞에 서니 고구려인들의 거대한 위상과 웅장함이 느껴진다.
이제 고구려 유적지를 모두 돌아보고 13:30분에 맨포드호텔이 있는 통화시로 출발한다. 도중 통화시에 있는 죽탄제품과 라텍스 제품을 판매하는 곳 2곳을 들린다고 한다. 여행일정에 들어 있단다. 제품 판매하는 곳을 들르면서 말로는 가이드에게는 아무 이득이 없다고 하나 인상에서 풍기는 모습은 그것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말로는 회사에서 필수로 하여야 하는 숙제란다. 머리수, 결국 금액일테지…….
그래도 우리 일행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인지 그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적은 인원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있는데…….
오는 길에 저녁식사의 메뉴를 물어보니 첫날 점심을 먹었던, 마치 먹은 것을 재탕하여 내어 놓는 듯한 곳. 맛도, 친절도 영 아닌 그곳으로 다시 간다기에 강씨식육식당으로 변경할 것을 주문한다. 그래도 우리 입에 잘 맞고 덜 불친절한 강씨식육식당에서 연 이틀 삼결살로 저녁을 해결한다.
저녁자리에서 가이드를 불러 술을 건하며 이러저런 불만을 우회적으로 토로하면서 얼마간을 챙겨주었더니 금세 기분이 전환되는 듯하다. 가이드가 필요로 하는 숙제를 제대로 못 채운 것 같았다.
이에 저녁을 마치고 19:30분에 호텔에 투숙하면서 오늘 쫑파티를 위하여 기사, 가이드를 포함하여 모두 807호에 모이기로 한다. 저녁을 마치면서 얼마간을 챙겨주었고 그런 내용이 잘 전달되었던 것 같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칭다오 맥주 1박스를 사줄 것을 부탁하며 별도로 돈(160元)을 주었는데 기대가 큰만큼 실망도 컸다. 맥주 외에 안주 하나 정도는 사올 줄 알았는데 적당한 안주가 없다며 부탁한 맥주만을 들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남은 멋진 여행이 내일까지 계속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멋지게 건빠이 외치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 했다.
□ 넷째 날(2013. 9. 8 일) : 요녕성박물관
07:20분에 통화시의 그 시끄러운 맨포드호텔(0435-511-5299)을 출발하여 11:20경 선양시에 있는 요녕성박물관에 도착한다. 요녕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요녕성박물관을 1시간 관람하였다. 요녕성박물관은 13. 9. 6 ~ 11. 3.까지 미주특별전시전을 가지고 있었다. 1층 첫 번째 전시방에서는 페루를 비롯한 남미의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요녕성박물관 앞에서>
관람중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예전의 고구려 영토가 그려진 지도였으며, 화폐 전시 공간에는 우리나라의 상평통보도 있었다.
<공손씨의 지형도>
<상평통보>
관람을 마치고 나와 12:20분경 출발하여 선양의 서탑거리에 있는 첫째 날 점심식사를 하던 한원식당에서 다시 점심식사를 했다. 오늘의 메뉴는 버섯전골로 4일간 여행 중 가장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13:50분경에 식당을 나와 선양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14:00으로 국제선 타는 곳에서 내리면서 착하고 선하게 생긴 기사 왕다끄와 악수로 이별을 하고 가이드와는 공항 내에서 짐을 처리하고 4일간의 중국에서의 일정을 마쳤다.
우리 일행은 바로 수속을 받기 위해 세관,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고 38번 게이트 앞에서 1시간 30여분의 지루한 보냈다. 휴게시설도 변변찮고 담배 피는 곳도 없으니 얼마나 시간보내기가 지루한지?
탑승예정 시간이 16:20이었으나 연착으로 인하여 40여분이 더 늦어져 17:00경에 비행기 탑승을 시작하여 대한항공 KE834편으로 1시간 30여분이 소요되어 무사히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4일간 함께한 모든 분들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함께하여 즐거웠습니다.
(oo 따끄, 니하오, 신꼴라)
2013.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