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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지도 생각지도 말고
이른 아침 총총걸음으로 전철역을 향해가는 대포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서로먼저 가겠다고 순서 없이 뒤집어지고 있습니다. 급기야 인내심을 잃어버린 대열은 끼어들기와 급차선 변경 신호위반에 맞물린 회전위반 급정거 등 할 수 있는 위법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고약한 상황을 차례대로 끄집어 내 분류하기 시작하는데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자세로 잘못을 반성하고 다소곳이 머리 숙여 처분만기다리면 주의계고장을 무덤덤하지만 점잖게 경고를 받아들이며 수긍하는 자세를 보이면 벌점 없는 일만 원짜리 범칙금통지서를 조금이라도 예의가 어긋나는 인상이 보이면 즉시 육 만원 과태료에 벌점20점을 얹어 발부하기 시작합니다. 나오는 족족 불러 세워 족치기 시작하자 암암리에 상호간 교류를 통하여 골 아픈 잡새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머릿속교차로와 간선도로는 여기저기 번쩍거리는 불빛 속에 원활한 교통흐름이 이루어집니다.
식전댓바람에 끌려나온 고깃덩어리는 판로가 급해서도 아니고 촌각을 다투는 특별한 용무가 있어서도 아니며 부지런히 사지육신 놀리는 것이 몸에 배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어이없는 상황은 잘나가던 직장을 퇴사한 지 5개월째이며 그동안 봉급을 고용보험으로 대치하며 정처 없이 떠돌다 기진맥진하여 앞으로 나갈 길은 진퇴양난 입니다. 혹여 집에서 눈치 챌까 가슴 졸인지 어느덧 백 여일이 지났건만 새로운 직장문턱은 아스라이 멀기만 합니다. 판로가 막힌 고깃덩어리를 끌고 여태 해왔던 대로 단련 된 심신으로 꿋꿋이 버티고 나갈 것인지 외로운 진열장을 포기하고 사실을 고백한 후 마음이라도 홀가분해질 수 있도록 가부간 결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매불망 대포를 바라보는 아내와 고등학교 입학준비를 하고 있는 공주에게 자칫 실망을 줄까 두려워 본의 아닌 자작극을 하는 것입니다. 마침 손꼽아 기다리던 오늘은 돈을 만져 볼 수 있는 고용보험 받는 날이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초조해지고 급해지는 것입니다.
아내 몰래 퇴직금을 정기예금으로 넣던 날 설마 구차한 실업자는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현실은 전혀 생각대로 흐르지 않았고 막상 길거리를 헤매다보니 같은 차림새와 동급부류들이 차차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마주치는 겸연쩍은 눈빛들은 항상 같은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각각의병기로 무장한 아군이며 적군이었습니다.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물러나는 패잔병은 수두룩하였고 누가누구를 쏘지도 않았는데 가슴 아린 상처를 감싸 안고 치유하는 것은 능수능란하였으며 맨손으로 덤벼도 패배를 두려워않는 자존심은 세상을 거꾸로 보며 익히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 절규하며 통곡하던 선배의 아픔을 눈가에 이슬 맺힐 때 느껴보았고 식당에 홀로 앉아 밥숟가락 쥐었을 때 입안에서 맴도는 밥알의 반항에 목 줄기가 젖어드는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목메어도 큰기침으로 누르고 가슴 치며 두 주먹으로 허공을 두들겨 패는 것이 배우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것도 감정의 기복이 들고날 때 배웠습니다.
아침 일찍 서두른 수고로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선두에서 돈을 수령한 대포는 잠깐 여유로움을 간직하며 무작정 큰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작심하고 끊었던 담배를 빼어 물고 불을 붙이려는 순간 삼십대 후반정도 되는 여인들과 눈길이 마주치고 그들 체구에 비해 커다란 보따리와 무거운 가방으로 눈길이 옮겨집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던 여인들이 죄송하지만 역전광장 근처까지 들어다 줄 수 없겠느냐고 예의바르게 간청하자 말없이 곁으로 다가섭니다. 가방을 잡으려는 순간 작업복차림의 사내가 나타나 커다란 보따리를 번쩍 들어 어깨에메고 대포에게 눈짓으로 가방을 가리키며 조그만 미소를 던집니다. 여인들은 뛸 뜻이 기뻐하며 오늘 참 재수가 좋은 날인가보다 여기저기서 고마운 분들이 나타나는걸 봐서 날을 잘 잡은 것 같구나, 하는 웃음소리에 맞춰 요염하게 허리를 흔들며 두세 걸음 앞서 걸어 나갑니다.
광장구석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무리 지어 얘기를 나누고 있으며 그들을 태우기 위한 늘씬한 관광버스에서 간간히 흘러나오는 흥겨운 가락은 막힌 통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여인들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오늘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이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는데 마침 남은 좌석이 있으니 함께 동행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면서 장소는 경기도 소요산이라고 일러줍니다. 대포가 머뭇거리며 망설이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친목계원들과 동네 선후배, 살면서 이런저런 인연이 되어 만난 사람들인데 서로 잠깐시간 동안 즐거운 여행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고 왕복차비와 경비를 포함한 금액이 삼 만원이라며 눈웃음칩니다. 그 때 작업복 입은 사내가 저도 함께 동참하고 싶지만 가진 돈이 이만 원밖에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하며 발길 돌리는데 대포 곁에 있던 여인이 멋진 오빠가 만원을 보태주면 되겠네, 하면서 팔을 잡아당깁니다. 순식간 이루어지는 상황과 맘 설레는 분위기에 쉽사리 돌아서지 못한 체 결국 대포는 사 만원을 여인에게 쥐어주고 사내 역시 대포에게 공손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버스에 오르게 됩니다.
예상과는 달리 음주가무를 기본사양으로 탑재한 사람들은 좁은 통로에서도 유연한 동작으로 민첩하게 움직이며 차체가 흔들리고 멈칫대는 것과 상관없는 복원력이 탁월하고 지극히 균형적인몸가짐이 생활화되어 있습니다. 한바탕 이어지는 소란에 대포는 감히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아 곁에 앉은 사내와 눈 맞춘 후 개인 신상보고서와 호구조사 등 지극히 일상적인 주민사생활을 상호간 전달하게 됩니다. 사내나이는 스물여덟이니 한참 아래 막내동생뻘이라 별다른 수식어 없이 반말을 사용하고 사내 역시 적극 부응하여 형님으로 부르길 마다하지 않습니다. 대포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자 일용직으로 여기저기 떠돌며 일하고 있는데 오늘은 작업현장에 자재가 도착하지 않아 출근과동시에 퇴근이 되었다며 씁쓸히 웃습니다. 보수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자 하루에 팔만원이라고 하면서 야간작업을 하면 사만 원을 더 받는데 요즘엔 정시에 끝나는 게 일반화 되어 예전처럼 벌이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혹시 하는 궁금증에 아무라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사지육신 놀리는데 부담 없으면 누구라도 할 수 있으며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몸 팔아 돈 먹는 일이기 때문에 약간의 신체적 고통은 참아야한다며 빙그레 웃습니다.
대포는 요즈음 할 일 없이 방황하는 신세라고 하며 나도 일을 한번 해보고 싶은데 자리를 알아봐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사내는 처음 하는 사람은 칠 만원이고 인력회사에서 수수료 칠천 원을 제하는 것인데 역전 오른쪽에 있는 인력사무소 앞 공터에서 모여 각자 팔리는 데로 찢어지는 것이니 늦어도 새벽 5시30분까지 도착해야 한다고 합니다. 매일아침 저는 그 곳에 있으니 미친개를 찾으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며 세상에서 남의 돈 먹는 게 가장 힘든 것이니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작업복과안전화는 반드시 구비해 오라고 합니다. 알겠으니 내일 아침 만나자고 흔쾌히 대답한 대포는 미친개라는 야릇한 별명이 참 인상적이라 다시 한 번 사내를 쳐다봅니다. 서로는 겸연쩍은 눈빛을 피해 잠시 숨을 고르고 대포는 갈 때까지 가버린 줌마렐라의 흐느적거림과 어느 누구의 삶을 눈물로 채운다는 가사를 귀에 담으며 영원히 뜨지 않는 짝퉁 삼류의 안타까움을 뭉뚱그려 창밖으로 패대기칩니다. 졸지에 버림받은 엉성한 그림책은 초가을바람에 매서운 귀싸대기를 맞으며 방황하고 언뜻언뜻 스치는 퇴색한 나뭇잎이 서둘러 달아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차안풍경은 각개전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고지를 탈환한 무리는 개체 간 상황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나 홀로 여행을 기치로 한 독야청청의 고지인데 힘차게 나부끼는 깃발을 잠재우기위해서 이곳저곳 나타나는 적군은 상당히 많습니다. 시장경제 원리는 이곳에서도 벌어지는바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음으로 하나의 상품을 건져가기 위해서 진열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으며 아우성치는 인파를 둘러보는 상품은 시간이 갈수록 가치가 높아집니다. 우습기도하고 웃기지도 않는 상황은 성별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며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케케묵은 사고를 들이대기도 합니다. 약간 상식 있는 선수는 찍은데 또 찍고 바로 옆을 찍은 후 안 찍은데 골라 찍는 상당히 지능적인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도도한 콧대와 수많은 작전세력을 감당한 고수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엎어집니다. 안타까움을 뒤로 한 체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간단한 도시락과 음료수를 받아든 일행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간밤내린 가을비가 채 가시지 않은 산은 갖가지 색감을 베어 물고 제법 운치를 더해 줍니다. 뿔뿔이 흩어진 인파는 형체가 묘연하고 먹먹한 나무기둥만이 계절이동을 한 몸에 받으며 버티고 있을 때 대포는 맥주 한 병을 사들고 나무 밑에 대충 자리 잡은 후 미친개와 함께 조촐한 점심식사를 합니다.
약속된 시간에 버스로 돌아오니 예정된 인원은 오간데 없고 처음 만났던 여인 둘과 육십 초반의 어르신 몇몇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시간을 잘 못 안 것일까? 하는 의아한마음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병 밑바닥에 남아 찰랑거리는 맥주를 마저 마십니다. 잠깐시간 흐르고 운전기사가 돌아오더니 주위를 한번 휙 둘러본 후 거침없이 시동을 걸며 차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대포는 당황하여 아저씨 아직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차를 출발시키면 어떡합니까? 하며 다급한 소리를 지릅니다. 기사는 묵묵히 하던 일을 계속하고 대포는 황망한 사태에 어리둥절 하는데 점잖은 어르신이 다가와 여보게 그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 찾아간 거야, 아마 이번여행이 처음인 것 같은데 어쩌다 짜고 치는 판에서 나가리 패를 쥐었는지 참 안타깝구먼, 하며 빙그레 웃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시끄럽게 구는 사람도 없고 먹을 것은 많이 남았으며 가야할 길은 멀었으니 남은 시간이나 죽여 보자고! 호탕한 웃음소리를 싣고 버스는 유원지를 돌아 나와 번듯한 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눈 얘기로 인하여 대포는 묻지 마 관광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여인과 어르신 운전기사는 한 팀이 되어 기상천외한 영업 전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있던 자리로 돌아온 일행은 조촐한 뒤풀이를 하기위해 역전근처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어차피 저녁을 먹어야함으로 식사를 할 수 있는 감자탕을 시키고 소주를 겻들이며 화기애애한 세상 살아가는 얘기를 나눕니다. 어르신 세분은 경로당과 근린공원 역전 등을 오가며 정보를 얻어 사람을 모집하고 육 만원씩을 지급 받으며 여인 둘은 아파트 부녀회장과 동 대표 산악회 등에서 정보를 얻어 사람을 모집하고 먹을거리와 분위기조성 및 승객 상호간 어우를 수 있는 바람잡이 역할을 하며 십 만원씩을 지급 받는다고 합니다. 오늘같이 사람이 많고 돌아오는 길이 편하면 운전기사수입과 차량유지비를 제외한 금액에서 얼마간의 돈을 수고비로 책정해 나누어 가진다고 합니다. 옆에 있는 미친개는 일없어 쉬는 날 가끔 동행하고 있으며 일단유사시 본인 몫을 단단히 하기 때문에 수고비는 지급하지 않지만 무료입장의 특혜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어느새 어둠은 갈길 잃은 낙엽을 밟으며 도움닫기를 하고 황급히 놀란 가로등은 눈가에 다가오는 검은 장막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제법 쌀쌀한 기운을 옆구리에 끼고 대포일행이 식당 문을 나서는 순간 낯익은 사내 세 명이 손짓을 하며 험악한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앞을 막아선 사내 중 한명이 여인을 바라보며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되는구나, 당신 때문에 오늘 완전히 망가졌으니 같이 놀던 사람들을 찾아내던지 차비와 털린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합니다. 여인은 싸늘한 표정으로 사내를 쳐다보며 어디서 뺨맞고 여기 와서 행패를 부리느냐고 하면서 주제가 이 모양이니 막판에 개털된 것 아니냐고 당당히 맞섭니다. 취기가 오른 다른 사내는 쉬발년이 어디서 뻐꾸기를 날리고 지랄이야, 네가 찍어준 년들이 오십 만원을 받아 쥐고 우리에게 모텔 열쇠를 맡긴 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말이야! 너희들 다 한패로 뭉쳐 짜고 치는 판 아니냐? 이것들이 사람 어떻게 보고 장난질이야! 하면서 파리채가 들락거리기 시작합니다. 여인은 꼿꼿한 자세로 누가누구를 찍었는지 모르겠고 당신들 눈 맞아 자빠트리고 엎어지는 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남자가 오죽하면 모텔에서 나가리가 됐을까? 굴러온 호박을 간수하지 못하고 깨뜨렸으니 나 같음 쪽팔려서 얼굴도 못 들겠다! 하면서 거침없는 웃음소리로 응수합니다.
험악한 상황은 일촉즉발 전운감도는 사태로 진행되는데 어느새 택시를 세운 미친개가 누님 어서 갑시다, 하는 소리를 남기며 차도로 내려서서 여인과 어르신들을 급하게 밀어 넣은 후 택시를 출발시킵니다. 그리고 대포 손을 이끌며 형님 우리도 갑시다, 하며 발길을 재촉합니다. 택시는 떠나고 대포역시 자리를 떠나는 순간 분이 안 풀린 나가리패가 엉뚱하게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런 쉬발 개당나귀를 봤나? 어디 쌀집아저씨가 난장에서 쌀을 팔고 지랄이야? 하고 소리 지르며 대포의 팔을 잡아당깁니다. 화들짝 놀란 대포는 걱정도 되고 한편 무섭기도 하여 슬금슬금 뒷걸음을 칩니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뒤로 빼고 주춤거리는데 옆에 서있던 미친개가 번개 같은 동작으로 일행에게 달려들며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상대를 눈덩이와 옆구리 겨드랑이를 교묘하게 골라 때려 쓰러뜨린 후 다음 상대는 정강이를 걷어차고 무릎으로 허벅지를 찍어 균형을 흩뜨린 후 발뒤꿈치로 엄지발가락을 사정없이 찍어 내립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땅바닥에 엎어져 신음하고 남은 한명은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데 발러! 하는 소리를 공중에 띄우고 바람 가르듯 달려 나갑니다.
대포는 꿈을 꾼 듯 멍한 상태로 미친개 뒤를 따라 죽을힘 다해 달리기 시작합니다. 옆구리가 끊어지듯 아프고 숨이 턱밑에 차 도저히 뛸 수가 없는데 미친개는 계속 앞만 보고 달리고 있습니다. 대포는 후미진 골목을 빠져나와 조그만 공원 겸 놀이터가 있는 곳에 다다르자 털썩 주저앉으며 도저히 더 이상 못갈 것 같으니 잠시 쉬었다가자고 한 후 주위를 돌아봅니다. 미친개는 주저앉은 대포를 내려다보며 이젠 안정권에 들어왔으니 더 이상 뛸 필요도 없고 지금상황에 다른 그림도 생각나지 않으니 내일아침 역전 옆에서 만나자는 얘기를 남긴 후 가볍게 손 흔들며 어둠속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잠시 허탈한 기운을 추스르고 주위를 둘러보자 희뿌연 가로등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포를 흘겨보고 있으며 앙증스런 그네는 팔을 축 늘어뜨린 체 역시 동감이라는 표정으로 멀뚱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지나치는 몇몇의 인적이 쏘아대는 눈빛은 대포의 등을 꿰뚫고 살같이 달려 나가고 언젠가 보았던 추격자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눈가에 펼쳐지는 순간 대포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땀에 젖은 저고리는 흐트러져 너풀너풀 거리고 사정없이 헝클어진 머리칼은 핀 꽂으면 제대로 된 각본이라며 쌍수를 들어 반기는데 급기야 다리마저 풀려 갈지자로 땅을 훑어대는 상황에 이르자 꿈인지 생시인지 도통 걷잡을 수 없습니다.
대포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청바지와 운동화를 찾자 아내는 회사에서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봅니다.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족구대회를 한다는 변명을 둘러대며 서둘러 집을 나서는 대포를 아내는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역전에 도착한 대포가 주위를 둘러보며 걸음을 옮기는데 멀찌감치 미친개가 손을 흔들며 다가옵니다. 미친개는 대포와 함께 인력회사 소장에게 다가가 상호간소개를 시킵니다. 대학졸업 후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근무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소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일하다보면 각자 주특기를 찾아 보다 나은 곳으로 가는 경우도 있으니 힘들더라도 이겨내 보라고 어깨를 두들겨 줍니다. 그리고 미친개가 맡은 일이 있으니 당분간 일머리도 익힐 겸 같은 팀으로 뭉치라고한 후 모여 있는 사람들의 작업배치를 위해 인파속으로 사라져갑니다. 목수, 미장, 조적, 아시바, 하스리, 철거, 곰빵, 도비, 잡철, 용접, 샷시, 잡부! 우렁차게 외치는 소장의 부름에 삼삼오오 대열을 이룬 무리가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하며 대기한 승합차와 트럭 승용차에 몸을 싣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합니다. 5명이 함께하는 미친개의 잡철 팀은 아파트계단 옆의 난간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계단 옆 바닥에 먹줄을 띄운 후 칸칸이 동자(지지대)를 세울 위치를 찾아 구멍을 뚫고 앵커(고정)볼트를 고정시킨 후 동자와 고정 볼트를 수직, 수평을 맞춰 용접한 후 위쪽으로 덮개(손잡이)부분에 평 철을 덧씌워 재차 용접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내릴 때 사용하는 것이라 조금이라도 치수가 맞지 않거나 각각의 이음새를 단단히 용접하지 않으면 커다란 불상사를 초래할 수 있기에 감독이 철저하다고 하며 새삼 주의를 시킵니다. 대충상황을 인지한 대포는 동자를 들어다 각각의 위치에 갖다 놓고 앵커볼트를 콘크리트 속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것을 병행하는 작업을 맡았습니다. 정해진 위치에 드릴로 구멍을 뚫고 지나는 사이 볼트를 체결하면 뒤이어 동자를 세우고 덮개가 씌워지는 용접을 한 후 재차 먹줄 띄우는 실측이 이루어지는데 순식간 이루어지는 일은 눈 돌릴 시간 없으며 허리를 펼 기회조차 없습니다. 아파트 25층 끝에서 시작하여 1층까지 같은 방법으로 병행하며 내려오는 작업은 4명의 수고로 하루에 끝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순간순간 허리 펴고 숨 돌리며 작업하다 보니 쉬는 시간이 따로 없어 소변보는 것도 제각각 정해 놓은 구석을 찾아 돌아선 체 팻트 병을 들고 서서 쏴로 급히 이루어집니다. 하루일 마치고 현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안전모를 벗으니 지끈거리는 머리가 날아갈 듯 상쾌해 집니다.
인력사무소로 돌아오니 소장은 첫 날 부터 고생이 많았다고 하면서 밥이나 먹고 들어가라며 일행에게 근처에 있는 식당 식권을 나누어줍니다. 대포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밖으로 나와 식권을 미친개에게 돌려주고 너무 피곤하니 일단 집으로 가야겠다며 내일 보자는 말과 함께 후줄근한 모습으로 역전을 빠져 나옵니다. 파김치가 되서 들어온 대포를 쳐다보며 아내는 매우 안쓰러운 표정으로 무슨 운동을 사생결단으로 했기에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하며 팔다리를 주무릅니다. 대포는 빙그레 웃으며 아마 내가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고 둘러댑니다. 밥숟갈 놓자마자 쓰러져 잠을 청한 대포는 그래도 이제는 일할 수 있다는 기쁨이 더없이 좋아 조그만 미소가 입가에 번집니다.
아침을 준비하던 아내얼굴에 근심가득하고 평소와 다른 모습이 보여 대포는 무슨 일 있느냐고 조심스레 아내표정을 살핍니다. 아내는 집주인이 집세를 천만 원이나 올렸으며 있는 돈을 모두 합치고 적금을 해약해도 삼백만원이 모자라는데 어떡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세입자들에게 돌아갈 임대아파트 분양권이 턱없이 부족하고 별다른 보상도 해 줄 수 없으니 재개발조합에서는 세입자들과 껄끄러운 상황이 되기 전에 집주인을 내세워 계약을 해지하거나 집세를 올리는 방법으로 모두 내쫓으려는 속셈인데 지금 계약을 하지 않으면 다른 곳에 가서 집구하기도 힘들고 임대아파트 분양권도 날아가는 것이니 어떡하든 돈을 마련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라며 한숨을 쉽니다. 대포는 회사에 부탁해서 대출을 받던지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 당신은 걱정 말라고 안심시킨 후 출근준비를 서두릅니다.
말 그대로 몸 팔아 돈 먹는 뼈 빠지게 힘든 육체노동이지만 서서히 몸에 배고 조금씩 여유로움이 생겨 일하는 도중 간간이 농담을 곁들이는 재미가 붙어 대포는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마침 비가 오는 관계로 하루 일을 쉬게 되어 모두는 출근과동시에 식당으로 모였습니다. 소장은 식권을 나눠주다 대포를 쳐다보며 오늘 그동안 일한 공수를 합해서 봉급을 지급하는데 생각보다 열심히 일했고 남보다 뒤처지지 않았으니 소개비를 뺀 시급 만원으로 책정해서 주겠다고 합니다. 순간 미친개가 일한날짜는 이십오일정도 되고 간간히 야근을 했음으로 이백 오십 만 원정도 될 것이라며 대포를 쳐다보고 웃습니다. 그리고 형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곳 현장에서는 만만치 않은 금액이니 당분간 다른 사람들에게 일당이나 봉급을 절대 알려주지 말라고 주의를 줍니다. 이력서를 제출했던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고 딱히 다른 일을 할 수도 없어 대포는 갈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을 굳히며 소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봉급을 받아 든 대포는 은행에 들려 정기예금으로 들었던 퇴직금을 찾아 일찌감치 집으로 향합니다. 내리는 빗줄기가 쉴 새 없이 들락거리며 몸을 적시지만 만만치 않은 노가다의 삶은 결코 젖어 흐르지 않는다, 일과 돈 이외에는 묻지도, 생각지도 말고 시간만 깨라! 는 말을 되씹으며 눈가에 맺힌 물방울을 훔쳐냅니다.
깃 발
입심 좋은 차림새 공중에 두둥실
처발라 밀어낸 얼굴 박수소리 당연하지
소통하는 자세로 드문드문 바람구멍
아무라도 볼 수 있는 네거리 복판에서
이게 바로 탁상행정 잘사는 길이라고
누군가 뱉은 말을 수없이 되뇐다.
좁다란 고샅길도 샅샅이 훑어
담벼락 등짝에 연판장을 붙이고
땅 놓고 돈 먹기는 따 놓은 당상
돌아온 재개발은 판쓸이라네.
깨우치지 못하면 대세에 넘어가니 딱지치기 배워봐라.
버틴다고 별수 있나 헌집주고 새집 갖는 돈 두꺼비 잡아봐라.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인다, 아파트가 하늘높이 올라간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대포는 아내에게 두툼한 돈 봉투를 건넵니다. 아내는 눈물을 글썽이며 돈을 받아들고 말 없이 책상서랍 안에서 편지봉투를 꺼낸 후 대포얼굴을 번갈아 쳐다봅니다. 편지봉투 겉면에 발신자로 표시 된 회사명판과 수신자는 눈에 익은 직책과 이름이 적혀있어 소스라치게 놀란 대포는 황급히 내용을 꺼내 들여다봅니다. 내용인 즉 회사의 일시적인 어려움으로 본의 아니게 회사를 떠난 여러분에게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힘겨운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해 죄송하다는 내용입니다. 아울러 구조조정의 혁신 아래 회사는 점차 정상회복을 찾아가는 중이며 공격적인 경영을 위해 사세를 확장하기로 하였으니 뜻이 있는 사람은 본사 총무과를 경유하여 연수원으로 집결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대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읽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읽어 내려가자 아내는 그 동안 어디서 뭘 하고 다녔으며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느냐고 눈물을 훔치며 조용히 밖으로 나갑니다.
대포는 아침 일찍 역전으로 나가 미친개에게 당분간 일이 있어 출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후 소장과 몇몇의 사람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짧게 전하고 서둘러 회사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낯익은 얼굴들이 손을 마주잡고 안부를 전하며 기뻐하기도 잠시 모두는 굳은 표정으로 연수원 버스를 타고 출발합니다. 단합대회 겸 새로 시작하는 일과 경영의 어려움 기타 여러 가지 제반사항을 열거하고 토론한 후 각각 정해진 부서를 찾아 떠나는데 대포는 한사코 현장근무를 고집하며 움직이지 않습니다. 생산부서가 아니면 절대 가지 않을 것이며 부득이 영업부로 발령 낸다면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단단히 버팁니다. 결국 총무부에서 의견조율이 다시 이루어지고 대포의 고집대로 생산 1과 과장으로 변경되어 발령이 납니다. 총무부장은 왜 사서 고생을 하려드느냐? 현장에 가면 부품조립 라인을 들여다봐야 하고 허구한 날 야근이나 특근을 밥 먹듯 해야 되는데 괜찮겠느냐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고 단단히 이릅니다. 대포는 빙그레 웃으며 제가 이번 기회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듯 조금 전까지 저는 역전을 발판삼아 맨발로 뛰었습니다, 라고 말하자 총무부장은 도통 알 수 없는 뜻에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암튼 잘 해보게, 라는 말과 씁쓸한 웃음을 남기고 돌아섭니다.
생산현장으로 돌아온 대포는 500톤이라는 유압프레스의 웅장한위용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기계의 요소와 금형 등을 세세히 훑어봅니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현장근로자와 호흡을 맞추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갖가지기능을 익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합니다. 철판에 커다랗게 구멍을 뚫고 암나사를 내는 레디알 머신과 고열의 가스용접기 및 절단기 금형의 면과 홈을 절삭하는 밀링 머시인, 갖가지 핀과 축, 나사, 프렌치와 베어링커버를 가공하는 선반 등 다채로운 기계원리와 작동 법을 세세히 들여다보고 익힙니다. 제품이 흘러나가는 컨베이어의 작동원리를 터득하고 그 앞에서 쉬지 않고 불량품을 찾아내는 숨은 고수의 눈빛을 어깨너머로 훔쳐보기에는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이 짧기만 합니다. 현장 직원들은 때 아닌 불청객에게 가끔 눈치와 통박을 주기도 하지만 도통 아랑곳 하지 않고 덤벼드는 대포에게 결국 마음을 열어주고 맙니다. 기름 묻은 작업복과 무거운 안전화가 넥타이와 구두보다 좋아 보이고 현장 일에 책상과 펜이 반드시 필요치 않다는 것을 깨우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투박하고 싸늘한 강판을 두들기고 비틀며 접어서 하나의제품이 완성되듯 시급제근로자의 삶도 굴곡 많은 세상통로를 따라 하염없이 줄달음치고 있습니다. 행여 불량품으로 낙인찍혀 고통스러운 고철 통에 쑤셔 박힌 체 용광로에 들어가 재생산 과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될까 두려워 반듯하게 선 자세로 매서운 주위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오롯이 컨베이어 라인을 따라 정해진 공간을 빈틈없이 채워갑니다. 쉴 새 없는 기계작동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인간의 손을 비웃으며 앵무새입버릇을 버릴 줄 모르고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줄기차게 맴돌고 있습니다. 인간의 필요로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는 것인지 기계를 위해 인간이 필요한 것인지를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제품은 쏟아져 나오고 급하게 수습하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달려들어 제각각 위치를 선점하며 고수합니다. 생산에 중독되어 이끌려가는 시간은 어느덧 계절을 성큼성큼 옮겨다 놓았습니다. 창밖에 매달린 고드름이 맥없이 떨어지고 산등성 초록은 차츰 가깝게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날이 풀리자 동네에는 이사하는 집이 무척 늘었습니다. 아래동내에는 어느새 중장비가 들어서서 건물을 무너뜨리고 널브러진 가재도구와 재개발현수막이 뒤엉켜 서로를 노려보며 눈을 홉뜨고 있습니다. 머리를 풀어헤친 먼지바람은 황사를 감싸 안으며 제멋에 취해 공중을 방황하다 작업인부가 쏘아대는 물줄기를 피해 달아나며 대찬 욕지거리를 퍼부어댑니다. 나이 많은 노인 몇몇은 현장 인부들 감시감독의 눈을 피해 헌옷가지와 종이박스 쇠붙이 등을 끌어내며 헛헛한 웃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백년도 살지 못하는 삶인데 백년이상을 버틸 것같이 집을 장만해 살아야 되는 것이며 죽고 나면 필요 없는 것을 주야장창 살 것같이 붙들고 매달려야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남들은 하는데 가만 있으면 껄끄럽고 이유 없이 손해 보는 것 같아 악착같이 달라붙어 씨름하다 보니 상대의 뒤집기와 배지기의 혼미한 상황을 틈타 마지막 승부수 잡채기한판승으로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받아든 대포는 당분간 친척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완연한 봄기운이 돌자 회사에서는 봄맞이야유회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모두 한꺼번에 움직이면 생산에 지장이 있어 각 부서별로 날짜를 정해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생산1과 대표인 대포는 소요산을 추천했고 직원들은 무조건 재미있게 지내다온다면 어디라도 좋다는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에 대포는 여러분이 저를 믿고 뜻을 한 곳에 모아준다면 이한 몸 바쳐 흥겨운 오락을 목표로 서슴없이 설레발이 치겠으며 타고난 저마다의 끼를 이끌어내는 버벅거림을 주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반신반의했으나 자신만만한 대포의 표정을 보고 힘을 실어줍니다.
휴일저녁 역전광장에 발을 들여놓은 대포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발길을 재촉합니다. 어둠을 먹어치운 역전광장은 제각각 발길들이 급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간간이 서성대는 인파는 높다란 곳에서 양팔 벌려 춤추는 시계탑을 쳐다보고 대책 없는 어둠의 독백을 뇌까리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 속에 한정된 몸부림을 주고받으며 인파를 헤쳐 나가는데 낯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찹니다. 다름 아닌 미친개가 역전 옆 공원풀밭에서 노숙자들과 붙어 앉아 앙증스런 술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대포는 성큼 다가가 누가 남의자리에 침 바르고 있어 궁금했는데 역시 우리식구 아닌가? 하며 일행을 비집고 쪼그려 앉습니다. 졸지에 황망한 세수 대를 맞닥뜨린 일행은 주춤거리며 가재도구를 수습합니다. 순간 대포의 차림새를 알아챈 미친개가 반갑게 맞으며 어정쩡한 일행들에게 잘 아는 형님이라고 소개를 하자 잠시 긴장된 눈빛은 이내 풀려 축 늘어집니다. 대포는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어디 가서 식사라도 하자며 일행을 일으켜 세우고 넉넉하게 망가진 몇몇은 느긋한 걸음으로 앞장서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동안 행적을 자세하게 설명한 대포는 미친개에게 소요산관광버스 예약을 부탁하고 시간이 있으면 함께 동행 하자고 제의합니다. 미친개는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아침 일찍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인력사무소 소장에게도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뒤로 먼저 일어난 대포는 술안주를 비롯한 음식계산을 끝낸 후 식당 문을 나섭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예의를 표한 미친개일행은 남아있는 음식을 포박한 체 몽롱한 쥐약의고문을 거듭 이어갑니다. 이마를 들이받은 전봇대를 욕하며 한잔을 마시고 벌떡 일어나 싸대기를 갈기던 아스팔트를 꾸짖으며 또 한잔을 비우고 덩달아 함께 덤빈 간판을 노려보며 또 한잔을 넘기고 긴박한 상황에 혼자 살겠다고 도망간 신발짝을 두드리며 또 한잔을 재낍니다. 고문에 힘겨운 쥐약은 쥐를 버리고 약만 남아 돌아다니고 헐렁한 눈동자에 갇힌 약발은 설움에 맺힌 각각의 눈자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회사야유회에 부득불 동행하겠다는 아내고집을 꺾지 못한 대포는 불편한 심정으로 역전을 향해 걸어갑니다. 발길 가는 데로 툴툴거리며 역전을 돌아서자 약속한인파가 눈에 들어오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늘씬한 관광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막힌 통로를 두들기고 있습니다. 순간 낯익은 젊은 여인 둘이 아내에게 손짓을 하자 어느새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서있던 아내가 이것 좀 들어 주실래요, 짐이 무거워서... 대포는 뒤엉키는 필름을 수습하다 한 쪽에 숨어있는 미친개가 눈에 띄자 허리를 쥐고 쓰러지는데 대포에게 보따리를 넘긴 아내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여러분 모두 묻지도 생각지도 말고 시간만 깨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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