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지역 동학관련 구술자료 수집과 그 의의
-나주시, 세계적 동학 명소를 위한 試論 -
羅千洙
(羅州牧鄕土文化硏究會 會長)
차례
1. 머리말 2. 동학농민운동 희생자 및 후손 찾기의 실상 3. 동학 구전 찾기: 나주지역 사례로 본 동학 희생자 찾기 문제점 4. 동학 구전자료 수집의 현실적 문제점과 대책 5. 맺음말 |
1. 머리말
지금부터 15년 전인 2006년부터 ‘한일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필자와 이 여행단과의 인연은 2018년 제13회 행사에서 맺어졌다. 당시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교수를 대표로 하는 일본측과 한국측의 원광대학교 박맹수 교수가 동반하여 한일 답사단 20여명이 전라우영 터를 방문했을 때 필자가 현장을 안내한 인연이었다. 그날 만찬 간담회 자리에서 필자와 일본측 단장 간에 다음과 같은 대화가 오고 갔다.
○ 필자 : 일본 측은 동학관련하여 가해자 측인데 가해자 측에서 일본군인의 살육했던 역사를 왜 발굴하려 하는가?
-일본 측 단장 : 1894년 일본군이 가해했던 역사를 덮어놓는다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 위배 된다. 반드시 밝혀 일본에 알려야 한다.
○ 필자 : 가해 역사를 밝힌 후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일본 측 단장 : 나주에 위령탑을 건립하고자 한다.
○ 필자 : 현 아베 수상은 한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있는데, 소위 일본측 양심 있는 학자는 억울하게 죽은 자를 위한 위령탑을 세운다 하니, 이는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을 만한 획기적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인으로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사람은 궁삼면 사건 때 조선인을 변호해준 ‘후세 다쓰지(布施辰治)’란 분 한사람뿐이다.
과거 필자는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태평양전쟁 전몰자 위령탑〔沖縄の戦跡・慰霊塔 平和祈念公園〕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동학 위령탑 건립에 대한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의 위령탑은 일본 측 전몰자는 물론 미국, 한국, 필리핀 등 각국에서 태평양 전쟁 때 전몰된 자의 20만 명의 이름을 빗돌에 새겨, 관광 필수코스로 연중 방문객이 오고 있다.
오키나와 위령탑(慰靈塔)과 비군(碑群)은 20만 명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그 위용은 거의 세계적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관광객으로 하여금 전쟁의 참상(慘狀)을 전한다거나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한(恨)의 목소리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메시지가 들리지 않았다. 공원 조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사례라고 본다.
2018년 가을, 나주시를 찾은 한일 대표단의 동학 위령탑 나주 건립의 의지 표명은 마침내 나주시의 미래전략 사업으로 채택되어 2019년 10월 30일 나주 시민의 날에 나주시, 원광대, 일본측 3자가 MOU를 체결하고 제1회 한일 학술대회에 앞서 일본측 대표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 교수가 1894년 동학과 관련된 일본군의 만행을 사죄하고 그것을 문서화 하여 발표하고 기자회견도 하였다. 이는 당일 학술대회보다 더 주요한 뉴스로 전파 되었다.
분명 슬픈 동학역사에 대해 양심 있는 일본 측 학자들이 주동하여 나주에 건립하려고 하는 위령탑은 동학을 바라보는 사관(史觀)의 재정립이라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위령탑을 통해 나주가 세계적 명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칭 ‘동학 세계화 프로젝트(Donghak Globalization Project)’가 꾸준히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주가 동학을 통해 세계적인 명소로 부각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넘어서야할 문제점이 있다.
첫째, 지금까지 발굴된 동학 참여자 명단은 겨우 3,670명 정도이고 그들 각각의 후손을 발굴치 않은 상황에서 다만 이름을 빗돌에 새겨 넣는다고 해서 나주가 세계적인 명소로 발돋움하겠는가? 3,670명은 아마도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 동학관련 기록문서에 언급된 동학도 인물을 집대성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중에 가승도나 후손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 것인가? 3,670명 이외의 동학도는 현재로는 무명(無名)의 동학도일 뿐이다. 1894년 동학 농민운동에 참여한 자가 몇 만 또는 몇 십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겨우 3,670명만 확인된 것은 문제가 있다.
둘째, 제1회 한일 동학 학술대회 지향 방향이 ‘한(恨)에서 흥(興)으로 승화하다’였으니,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한(恨)이 흥(興)으로 승화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나주 동학 위령탑이 세워지는 곳을 가칭 <나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이라 명명(命名)하고, 그 위령탑은 나주시를 상징하는 심볼 마크가 될 것이다. 여기에 소위 희생자를 모두 발굴하여 나라별, 출신지역별로 분류 하여 각자의 한(恨)의 소리를 새긴 편석판(片石板)을 모아 그것을 쌓은 비군(碑群)을 가칭 <나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에 디자인하여 배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반드시 희생자 후손의 참여가 필요하다. 한(恨)을 흥(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민족은 오로지 우리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恨)을 가슴에 품지 말고 밖으로 모두 뱉어 내도록 하는 틀을 만들면, 그 틀이 마침내 흥(興)으로 승화되고, 그렇게 승화되는 장소는 명소로 바뀐다는 것이 필자의 지론이다.
다른 한편, 동학의 피해자가 오로지 동학 농민군만 있겠는가? 당시 많은 식자층의 유림들도 벼슬아치들의 농민 수탈에 반대하여 농민군을 지지하고 응원하였다. 농민군의 기세가 날로 커지자 정부는 의병(義兵)이란 이름으로 민병(民兵)을 모집하여 동학군을 타도케 하였으니, 이들도 어찌 보면 피해자이다. 어떤 벼슬아치 또는 유명 유림인사는 자결을 통해 정부의 부패를 막고자 했다. 이들도 피해자이다.
또한 당시 일본군 후비보병(後備步兵) 부대로 동학군을 진압하러 왔던 그들도 사람을 죽이는 진압에 동원 되었는데,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 쿠스노키 비요카치(楠美代吉) 상등병이 쓴 진중일지(陣中日誌)가 120여년이 지난 근년에 발견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원되어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하는 것이 왜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겠는가? 아마 그 사람은 물론 그 후손들도 살인이라는 한(恨)의 멍에를 벗고 싶었을 것이다. 분명 가해자 측에서도 뱉어 내고 싶은 한(恨)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그 일본측 한(恨)의 목소리를 편석판(片石板)으로 모아 비군을 세워놓으면 후세에 교훈이 되지 않을까? 즉, 어찌 보면 동학 가해자 측인 일본군 후손들도 자신들의 선조가 동학농민군을 학살했다는 멍에를 벗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들도 그들 나름의 한(恨)의 소리를 뱉어내고 싶을 것이다.
그러한 한(恨)의 소리를 모아 나주에 새롭게 조성되는 가칭 <나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에 탑비(塔碑)로 세워놓으면 그 후손들이 반드시 가서 예(禮)를 드리는 성지 순례 코스가 되어 나주시는 저절로 명소로 떠오를 것이다. 아울러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지구촌에서 사라지게 하는 교훈의 장소로 알려질 것이다.
셋째, 지방자치단체가 일방적으로 재정 투자하여 만든 관광조성물은 성공하지 못한 사례가 많다. 그러나 일반 국민이 참여하는 관광조성물이 성공하였음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대전의 <뿌리공원>이다. 대전시는 전국 성씨 공원을 조성하면서 분명 나주의 <성향공원>을 벤치마킹 했을 것으로 본다. 대전시는 도로 등 기반 조성을 부담하고, 해당 성씨 종중에서 입비(立碑)에 대한 재정 부담을 하였다. 입비의 숫자가 현 공원에 넘치자 제2의 성씨공원을 조성한다는 뉴스도 보았다. 우리나라는 혈통에 연민의 정(情)을 가진 민족이다. 필자도 오래 전에 방문하여 유료 입장을 하였는데, 요즈음은 연중 무휴 관광객이 마치 성지 순례지를 찾듯 방문하니 입장료가 무료인데, 왜래 방문객이 많아져서 대전시 음식점 경기가 살아난다고 하였다.
따라서 나주시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가칭 <나주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은 나주시가 재정 부담하여 기반 조성을 하겠지만, 피해자 측 후손들을 참여하는 길을 터놓고 그들의 한(恨)의 목소리를 새긴 편석판(片石板)을 만들어 그들이 찾아 오게 하고, 나주시가 취합하여 나라별, 지역별, 또는 성씨별 비군(碑群)을 만들어야 한다. 문제는 1894년경에 이름 없이 죽어간 희생자는 누구이며, 그 희생자의 후손을 어떻게 찾아내야 하는가라는 방법의 모색에 있다.
나주시는 1896년 천년 나주목(羅州牧)의 위상인 관찰부(觀察府)가 패하여지고 낙후를 면치 못하였다. 그런데 나비효과의 최초 발상지가 될 수 있는 전환점을 맞이하여 나주시, 원광대학교, ‘일본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이란 삼자가 삼위일체가 되어 나주를 세계적 명소로 탈바꿈시키려는 미풍이 나주에서 시작하였으니, 장차 이 바람이 세계 곳곳으로 불어갈 태풍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또한 그러한 결실을 맺도록 총력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이상, 본 발표는 나주 동학농민혁명의 과거 실상은 어떠했고,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점검하여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보완해 나가야 나주시가 동학의 세계적 명소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동학농민운동 희생자 및 후손 찾기의 실상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1894년 당시의 동학에 가담한 농민들의 숫자를 조사한 적이 없다. 또한 당시에 죽임을 당한 자의 숫자도 조사한 적이 없다. 과거 정부에서 조사를 할 수 없었던 이유는 1894년 이후 조선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마침내 1910년 일제강점기의 한일 늑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살아남은 자는 초야에 숨어 살면서 동학의 흔적을 지우고, 동학 활동을 외부로 발설치 못하는 분위기에서 거의 죽음을 맞아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1894년 2차 농민봉기부터 반일운동(反日運動)을 시작하였기에 농민군을 단순히 폭도 진압차원을 넘어 일본군과 관군은 집단 학살을 자행했다. 그러나 관군 측이 살상자를 기록해 놓지 않아 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다만 몇 군데 특별한 전투지역에서만의 살상자를 기록한 정도였다.
예를 들어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은 최신 무기인 스나이더(Snyder) 총과 무라타(村田)총 그리고 개틀링 건(Gatling gun/기관총)으로 무장하여 체포보다는 학살을 자행하였다.
당시 조선군 3,200명, 일본군 200명이 진압군으로 참여하였고 동학농민군은 남접군 1만명, 북접군 1만 명으로 대략 2만 명이 접전하였으나 생존자는 겨우 3천명이란 설이 있으니 거의 1만 7천명이 죽은 셈이다. 농민군 대 진압군의 대비를 500대1로 보기도 하고 250대 1로 보기도 한다.
동학농민군 전시관 소개 글에서는 장흥 석대들 전투 등 장흥지역 사상자도 실명 확인전사자 357명, 무명전사자 1,165명이라고 한다. 대체로 이 두 개소의 전투에서만 거의 2만8천명 이상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전국적 동학 참여자 수를 파악한 기록은 없으므로 필자가 옛 기록을 근거로 전국 동학 참여자 수를 추정해 보고자 한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참여자 수를 산출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산출해 내지 않으면 동학 농민운동을 수치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세 사람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필자가 과거 동학관련 기록을 먼저 발췌하고 발췌된 근거로 전국에 과연 몇 개의 접(接)이 있었으며, 1개 접당 인원은 몇 명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전국 접(接)을 X라 하고, 접(接)당 인원을 Y라 하여 X와 Y값을 산출해 보았다. 전국단위 인원을 산출해 낼 수 있는 기록은 관찬(官撰)의 전봉준 공초록(供草錄)이 있고, 사찬(私撰)의 기록으로 금성정의록, 김낙봉 이력, 김낙철 역사 등 기타 역사기록에서 추출하여 아래의 표를 작성하였다.
<표1>‘키워드’로 본 전국 동학 농민군 수 추정
X값 | Y값 | 수치 고정 | 내용 | 출처 |
수천명 ? | 불가 | 문 : 기포(起包)시에 무엇 때문에 주모하였는가? 답 : 중민(衆民)이 나를 추대하여 주모로 삼은 고로 민언(民言)을 따랐다. 문 : 수천 명 중민이 무엇 때문에 너를 추대하여 주모로 하였는가? 답 : 중민은 비록 수천 명이나 모두가 어리석은 농민으로 나는 문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전봉준 공초록」 1895.2.9 | |
동학은 적고 원민은 많다 ? | 불가 | 문 : 고부 기포(起包)시에는 동학(東學)이 많았는가? 원민(冤民)이 많았는가? 답 : 기포시에는 원민·동학이 비록 합하였으나 동학은 적고 원민이 많았다. | 「전봉준 공초록」 1895.2.9 | |
70 | 70 | 1894넌 갑오농민운동은 1862년 임술민란의 재현이다. 1862년 임술민란 전국70개소 발생 | ||
53 | 53 | 1894년 갑오농민운동으로 전국53개소 집강소 설치 | ||
전적지 110 | 110 | 전국 도별 동학농민혁명사 개관 및 사적지 현황 <출처>http://blog.daum.net/muaedongcheon/1372 (2020년8월2일 검색) | 인터넷 무애동천 | |
6임 첩지 4천장 | 4000/6 = 667 | 대신사 최제우께서 분부하신 말씀 가운데 “이것도 시운(時運)이어서 금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너는 형과 상의하여 접(接)의 내부를 정중히 단속하고 숨어 지내는 것을 위주로 하라”고 하시며, 형에게 답장을 내려주시고, 6임(六任)의 첩지(牒紙/임명장) 4,000여 장을 내어 주셨다. | 김낙봉이력 1894년 봄 | |
6임 체지 4천장 | 4000/6 = 667 | 장수군의 김숙여(金淑汝)가 예우(禮遇)로서 체지(帖紙)를 낼 때에 4,000명이 넘는 명단을 가져와서 대신사가 계신 곳의 40리 밖에 머물렀다. 그래서 대신사〔최시형〕께서 대교주〔김연국〕와 손의암에게 명하시기를, “너희 두 사람이 가서 사람의 숫자가 어떻든 간에 반만 내어주고 나머지는 나중에 내어주라”고 하셨다. 대교주〔김연국〕께서 마침 그 때에 돌아볼 곳이 있어 10리가량 돌아가셔야 했기 때문에 송암(松菴, 孫天民) 어른을 먼저 보내며 말씀하시기를, “내가〔김연국〕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체지(帖紙)를 내어주라”고 하였다. 대교주께서 볼 일을 보고 돌아오셨는데, 자연히 몇 시간 늦게 도착하였다. 송암 어른은 침석에 누워있고, 숙여가 도장을 찍은 것이 이미 4,000장이 넘었다. | 김낙봉 이력 1897넌 2월 | |
6임 체지 7천장 | 7000/6=1,167 | 「정유년(丁酉年,1897) 2월에 내려가서 각 처에 포교(布敎)를 하니 날로 널리 전파되었다. 3월에 화항(火項) 이철우의 집에 올라가니 해월선생님은 이천(伊川) 앵선동(鶯先洞)으로 옮기시고 구암(龜菴) 어른도 이천 보통리(保通里)로 이사를 하셨다. 이덕현(李德賢)의 하는 말에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고, 선생님이 하신 분부에 “낙철이 올라오거든 몰래 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덕현에게 천도교의 체지(帖紙/임명장) 7,000여장을 지워 보통리 구암 어른의 집에 갔더니 주인 권성좌(權聖佐)가 앉아있었다.」라 하였다. | 김낙철 역사 1897년 2월 | |
소접 5-6백명 | 550 | 대접(大接)이 통솔한 인원이 수천명이고 소접(小接)은 5-6백 명이 넘지 않았다. | 금성정의록 |
위 <표1>에서 보면, 전국단위로 몇 개의 접(接) 그리고 접(接)당 인원수를 파악할 수 있는 경우를 중심으로 산출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➀ 1894넌 갑오민란은 1862년 임술민란의 연장선 또는 재현이라고 보면 1862년 임술민란 전국70개소가 발생하였다. 따라서 70을 고정 수치로 하였다.
➁ 1894년 갑오민란은 전국53개소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따라서 53을 고정 수치로 하였다.
➂ 전국 도별 동학농민혁명사 개관 및 사적지 현황은 인터넷 ‘무애동천’이라는 사이트에서 내려 받았다. 여기에 전적지로 판단되는 110개소를 본 필자가 추출해 냈다.
➃ 김낙봉 이력 1894년 봄 기록에 ‘6임(六任)의 첩지(牒紙/임명장) 4,000여 장’이라는 말은 임명장을 4천장 발급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6임은 천도교의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대중(大中)·중정(中正)의 여섯 가지 직책으로, 교장(敎長)·교수(敎授)·교집(敎執)·교강(敎綱)은 지역단위 지휘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6임을 한 접(接)으로 보면 4,000/6=667개소가 산출된다.
➄ 김낙봉 이력 1897년 2월 기록과 그의 형인 김낙철이 1897년 2월에 쓴 김낙철 역사에 보면 체지(帖紙/임명장) 7,000여장을 발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수치는 1894년 동학란 진압 후에 살아남은 농민들이 천도교로 재집결하는 수치를 보여 주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수치이다. 이경우도 6임을 한 접(接)으로 보고 7,000/6=1,167개소가 산출된다.
➅ 이병수의 금성정의록에서는 ‘대접(大接)이 통솔한 인원이 수천 명이고 소접(小接)은 5-6백 명이 넘지 않았다.’라 하였으므로 소접의 수치 5-6백명의 중간이 550명으로 수치를 고정시켰다.
이상의 함수와 변수에서 고정 수치를 논리에 맞게 환산해 내었으므로 전국 농학농민 수를 산출해 보자.
◯ 첫 번째 환산 방법
1894년 갑오민란은 1862년 임술민란의 재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임술민란 당시 전국 70개 고을이 참여 하였으니 여기에 소접 수치 550명을 곱하여 보면, 이 경우 38,500명이 민란에 가담한 수치로 나온다. 1894년 나주 지역의 전투만 보아도 거의 2만여 명의 넘으니 이 수치는 타당치 않은 것 같다.
◯ 두 번째 환산 방법
1894년 갑오농민 운동은 전국 53개 고을에서 집강소를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니 집강소 설치한 고을을 1개 접(接)으로 볼 경우 대략 29천여 명의 수치가 환산된다. 그러나 나주는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구역이지만 8전(戰)을 치른 곳이니, 집강소 설치로 동학도를 환산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본다.
◯ 세 번째 환산 방법
인터넷 검색을 통해 「전국 도별 동학농민혁명사 개관 및 사적지 현황」을 <표2>와 같이 작성해 보았다.
<표2> 전국 도별 동학농민혁명사 개관 및 사적지 현황
시도별 | 사적지 지정 | 사적지 중 위령탑 등 | 전적지 주둔지 |
강원도 | 21개소 | 홍천군/동학혁명위령탑 | 3 |
충청북도 | 67개소 | 보은군/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보은군/동학농민혁명기념탑 보은군/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조형물 옥천/동학농민군재기포기념비 옥천군/갑오 동학농민혁명전적지비 옥천군/동학농민혁명재기포기념비 충주시/일본군 위령비(日本軍慰靈碑) | 26 |
충청남도 | 76개소 | 공주/ 동학농민혁명군위령탑 태안/갑오 동학혁명군추모탑 태안/태안지역동학전래비 태안/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 29 |
서울,경기 | 24개소 | 파고다 공원/의암 손병희동상 | 6 |
경상북도 | 56개소 | 구미/쌍암고택 갑오농민전쟁전적비 상주/상주 동학농민기념상 선산/갑오 전쟁선산창의비 선산/항일선산갑오농민군 선산읍성 전적비 | 16 |
경상남도 | 15개소 | 하동군/동학혁명군위령탑 | 13 |
전라북도 | 75개소 | 고창/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고창/동학농민혁명포고문조형물 고창군/무장 창의포고비 남원/동학농민혁명유적지요천표지석 남원/갑오 토비사적비 부안/동학농민혁명백산창의비 부안/무명(無名)동학농민군위령탑 부안/동학혁명백산창의비 전주/동학혁명기념관 정읍/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탑 정읍/동학농민혁명기념관 정읍/동학농민혁명모의탑 정읍/무명(無名)동학농민군위령탑 | 17 |
전라남도 | 25개소 | 장성/황룡촌기념탑 장흥/석대(石臺) 뜰 전투지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탑 | 8 |
합계 | 357개소 | 34 | 110 |
※전적지, 주둔지는 필자가 사적지 목록에서 발췌한 것임.
이상과 같이 전국 사적지(史蹟地) 지정현황은 총 357개소로 동학관련 탑(塔)과 비(碑)가 건립된 현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또한 전국 357개소 중에 110개소가 전적지 또는 농민군 주둔지로 파악되었기에 여기에 변수 550을 곱해보니 대략 6만 명이 환산되었다.
◯ 네 번째 환산 방법
김낙봉은 1894년 봄에 전국 천도교 육임(六任)의 첩지(牒紙/임명장)을 4천장 발급하였다고 하였다. 육임을 한 접(接)으로 볼 경우 667×550명=366,850명이다. 이 경우 전국 동학농민 수는 36만6천명으로 추산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시위 군중 중 1/10 정도가 살상되었다 하면 전국적으로 3만6천여 명이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 다섯 번째 환산 방법
<표1>에서 본바와 같이 동학란이 진압되고 3년 후인 1897년 2월에 천도교에서 육임의 체지(帖紙/임명장) 발급상황을 살펴보자.
김낙봉 이력 에는 4,000명의 임명장을 발급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형인 김낙철은 천도교 7,000여장을 발급하였다고 하였다. 육임을 한 접(接)으로 볼 경우 김낙봉은 4,000/6=667이니 여기에 550을 곱하면 전국 36만7천명이 천도교로 재집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낙봉의 형인 김낙철은 체지 7,000장을 발급하였다 했으니 그 두 배이다. 따라서 73만3천명이 동학이 진압되고 천도교로 재집결하고 있음이 파악된다.
이 수치는 1894년 이후 살아남은 동학도가 천도교로 재집결하는 수치라고 보아야 한다. 거꾸로 말하면 살아남은 동학도가 천도교에 가담하여 인내천(人乃天)의 세상을 꿈꾸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적게는 36만7천명에서 많게는 73만3천명의 동학도들의 한(恨)의 목소리 중에서 1-2만개를 채증(採證)하는 것은 결코 많은 수치가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목표수치의 2배 정도 채증 할 수 있어야 한다.
1897년경에 천도교로 재집결하는 인원수가 거의 70만 명을 넘어선다는 것은 당시 민중들은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기대하고 따랐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3. 동학 구전 찾기: 나주지역 사례로 본 동학 희생자 찾기 문제점
나주의 구전 찾기는 두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하겠다. 첫번째 사례는 현재 발견된 동학관련 문서에는 가록이 없지만 가전(家傳)되어 오는 근거기록이 있는 사례인 나주 동학접주 나동환(羅東煥)과 그의 부인 진주정씨(晉州鄭氏)의 이야기이며, 두번째 사례는 전혀 기록이 없고 오로지 구전(口傳)만 남아 있는 사례이다.
나주지역도 비록 나주읍성을 거점으로 동학의 나주침공을 막아내었지만 나주지역 동학과의 전투를 보면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난와 오계수(難窩 吳繼洙)는 묘갈명(墓碣銘)에서 6전(戰)이라 하였고,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은 정장군전(鄭將軍傳)에서 7전(戰)이라 하였고, 겸산 이병수(謙山 李炳壽)의 금성정의록에서는 8전(戰)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나주를 비록 읍성 때문에 침공해 들어올 수는 없었으나 6∼8전의 전투를 한 것은 사실이다.
금성정의록으로 본 동학농민군 숫자를 보면, ‘서성문 전투에 농민군 수천 명’, ‘침산전투에 농민군 7백 명’, ‘고막포 전투에 농민군 5∼6만 명’, ‘남산촌 전투에 농민군 수만 명’이라 하였다. 변만기의 봉남일기(鳳南日記) 1894년 11월 24일자에 보면 ‘나주(羅州)의 오중문(吳重文)도 패진하여 남산촌(南山村)에서 거의 몰살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나주지역의 동학 농민군을 적게 잡아도 5천∼1만명 정도로 파악되지만 동학 관련 인물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려 동학과 관군과의 접전이라는 사실만 남고 접전하여 죽은 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 나아가 우리나라 전체의 동학 가담자를 조사해본적도 없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왜 동학 가담자나 피해자 조사가 어렵게 되었는지를 나주지역 사례를 들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의열각 주인공 일암 나동환(日菴 羅東煥)과 부인 진주정씨 사례
동학농민혁명 종합정보시스템(http://www.e-donghak.or.kr/) ‘유적지-나주편’을 보면 유적지 총7건 중에 「나동환 의적비·진주정씨 행적비(의열각)」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나주의 접주 나동환(羅東煥, 1849~1937)은 본관이 나주이며 영암 택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자는 도경(道卿), 호는 일암(日庵)으며,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1월에는 교단으로부터 교수 겸 교장 직책을 받았다. 농민군의 1차 기포 때는 나주의 접주로서 활동하였다. 농민군이 나주성을 공격할 때도 5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싸웠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전봉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그의 부인 진주정씨와 함께 함평군 월야면 연암리 다라실에 있는 나동환의 처가로 은신했다. 관군이 들이닥쳤으나, 부인 진주정씨(晋州鄭氏)는 남편과 아들을 다른 곳으로 피신시켰고, 자신은 관군들에게 잡혀 압슬형(壓膝刑) 등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나, 끝내 남편의 행방에 대해 함구하다가 사망했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의열각(義烈閣) 안에 <나주나공동환의적비(羅州羅公東煥義蹟碑)>와 <효열부진주정씨행적비(孝烈婦晋州鄭氏行蹟碑)>가 함께 세워졌다.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나동환과 그 부인 진주정씨에 대한 기록은 비문에 남아 있었으나, 비 뒷면에 새겨진 비문 내용까지 조사한 적은 없었다.
원래 의열각은 나주시 과원동 121-10에 건립되었는데 2019년 나주시측이 나주 관아 일원 지표 발굴조사 등을 이유로 나주시 남내동의 금호사(錦湖祠) 경내로 이설하는 과정에서 대들보에 숨겨진 상량문이 45년 만에 발견되자, 그 때 후손 측에서 필자를 불러 해설을 부탁하였다. 그래서 필자가 나동환과 진주정씨 스토리를 연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먼저 나동환의 가승도와 족보기록을 살펴보자.
<표3> 나동환의 가승도
구분 | 생몰년 | 비고 | |
6대조 언필(彦弼) | |||
고조부 수철(壽澈)/언필의 차자 | ※언필의 장자 수장(壽章) | ||
증조부 동환(東煥) | 1849-1937(향년88세) | 나주 동학접주 | |
증조모 진주정씨(晉州鄭氏) | 1848-1913(향년65세) | ||
조부 | 장남 상집(相集) | 1870-1942(향년73세) | ※壽章에게 出系 |
차남 영집(玲集) | 1873-1938(향년66세) | ||
부 도산(燾山) | 1900-1991(향년92세) | ||
구술자 태균(泰均) 구술자 이영기(李英紀) | 나주 거주 도산의 제3자 태균(현69세)의 증언 태균의 형 화균(和均)의 부인이 이영기의 여동생임 |
필자에게 구술을 해준 자가 나동환의 증손자 나태균(羅泰均/현69세)과 겸산 이병수의 방손이며 나태균과는 사돈관계가 되는 이영기(李英紀/전 나주시 의원)이다. 증언자 나태균을 기준으로 가승도를 재구성한 것이 <표3> ‘나동환의 가승도’이다.
먼저 나태균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려서부터 아버지[燾山]로부터 ‘진주정씨 할머니가 일본 군인에게 고문당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아 할아버지가 살아났고, 결국 자식들이 살아나서 후세에 너희들도 태어났다.’라고 자주 말씀했다는 점.
둘째,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동학 관련 서지류(書紙類)가 상당히 많이 있어서 자신도 보았다고 하며, 접시모양이 그려진 작은 병풍도 있었고, 위촉장 같은 문서도 있었는데, 1972년과 1974년 나동환과 진주정씨 추모비 건립 즈음에 집안에 귀중한 동학 관련 자료가 있다고 소문이 나자 어느 학계인사가 찾아와 연구를 위해 잠시 빌려간 뒤에 잠적해 버려 모두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맡겨놓은 신분증도 모두 가짜였다고 하였다. 다행히 비전되는 자료로 1972년도에 족후손 나평집(羅平集)은 진주정씨 효열부 비문을 짓고, 유림 대표 최남구(崔南九)는 1974년도에 나동환의 의적비문을 지은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같은 해 말에 비(碑) 보호각인 의열각(義烈閣)을 건립하였다.
셋째, 비전(祕傳)된 집안의 보물을 잃어버린 도산(燾山)은 조부께서 농민운동 때 지녔던 검(劍)을 집안에 두면 또다시 잃어버릴까 두려워하여 1987년도에 천안의 독립기념관에 기탁해 버렸다. 독립기념관에 수장된 이 검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고부지역에서 활동한 나동환이 사용하던 칼’이라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상은 증언자 나태균과 이영기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동환이 1894년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비문과 의열각 상량문을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최남구(崔南九)가 지은 비문을 보면 다음은 같은 주요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첫째, “공의 이름은 동환(東煥)이요 자는 도경(道卿)이며 호는 일암(日菴)이다”하였으니, 그의 호가 일암(日菴)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암(菴)자 도호(道號)를 쓴다는 것은 동학과 관련이 있고 천도교와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둘째, “공이 어렸을 때 지행(志行)이 고결하고 경사(經史)에 숙달하여 관작(官爵)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라 하였는데, 이는 비문 쓰는 격식에 맞지 않는 벼슬을 써넣은 것이다.
셋째, “당시 국정이 어지럽고 시끄러워 권력과 세력을 가진 간신들이 권세를 부리고 왕비들이 제 마음대로 행동함으로 삼정(三政)이 문란하고 부정과 부패가 점점 배어들어가자 농민이 제멋대로 날뛰고 백성은 어육이 됨은 물론 이른바 고관(高官)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자기편의 세력 심기에 급급할 뿐 국가 존망(存亡)과 백성의 안위(安危)에는 털끝만큼도 생각조차 엿보아 알 수 없는지라 기아에 허덕이는 유랑민은 삼남(三南)을 중심으로 각처에 벌떼처럼 일어나 관아(官衙)에 방화 또는 관곡(官穀)을 탈취하는 등 민란이 잇달아 나서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답지 못하는 혼란 속에 국가는 존망(存亡)의 위기에 처하였다”라 하였다.
넷째, “그러하므로 공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충의와 폐정개혁의 열렬한 뜻 아래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과 의기(義氣)가 서로 맞아 동국대전(東國大全/經國大典)을 남김없이 읽고 인내천(人乃天)의 도(道)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학(學)을 연구 터득한 후 동학접주(東學接主)라는 중책(重責)을 지고 나주에 부임하야 동지규합과 교세확장에 마음과 힘을 다하는 중에 1894년(갑오) 2월15일 고부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鋒準)으로부터 의거(義擧)한다는 통보를 받고 나주 교도(敎徒) 5백여 명을 인솔 합세(合勢)하여 제폭구민(除暴救民) 권귀진멸(權貴盡滅) 왜이축멸(倭夷逐滅) 폐정개혁(弊政改革) 삼정확립(三政確立) 등의 기치(旗幟)를 높이 들고 분전고투(奮戰苦鬪)하야 불과 며칠 만에 좌우도(左右道) 10여군이 바람을 타고 향응하여 장성(長城)을 점령한 후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전주(全州)를 점령하고 대승(大勝)의 여세로 나주(羅州)를 격파하고자 대장 전봉준(全鋒準)의 지휘로 고창접주(高敞接主) 신정옥(申正玉)과 5천여 병력을 인솔 어등산(魚登山)에 포진하고 공(公)이 선봉(先鋒)으로 서 수 십차 성을 공격하였으나 수성군(守城軍)의 반격으로 승산이 없음을 간파하고 어등산에서 해산(魚登山解散)하였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나동환의 족보기록에도 없는 내용을 동학농민운동이 지난 80년 후에 최남구는 어떻게 이런 내용의 비문을 썼을까? 분명 최남구는 당시 비전된 나동환 집안에 소장된 동학관련 문서를 보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문장가 최남구는 경주최씨로 나주 토박이였으며 광주학생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나주독립운동사 책자의 기록에 의하면 최남구는 학생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24년 나주 노농공영회’의 위원, ‘1928년 나주 흥농주식회사 발기인’ ‘1929년 신간회 나주지역 간사’, ‘1929년 나주청년동맹 연락조직부장’ 등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나주에서 한때 서당을 운영했다 하였으니 한학(漢學)에 조예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문 중에 맞지 않은 글을 써넣었다. 그것은 나동환의 벼슬명칭이다. 비문 앞면에 보면 나동환의 벼슬을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새겨놓았다. 우리나라 과거시험제도는 1894년에 막을 내렸다. 족보에도 이조참판을 지냈다는 기록도 없다. 왜 비문에 동학 접주(接主)란 말을 못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1894년 당시 벼슬아치의 수탈이라는 부패한 정치행태를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니 정부는 이들을 ‘비적(匪賊)’ 또는 ‘동비(東匪)’라 폄하하였다. 당시 얼마나 썩은 정치풍토였는지 조병갑의 벼슬 상황을 살펴보면 더욱 실감이 난다.
<표4> 고부민란 전후 조병갑의 벼슬 변동사항(승정원일기 참조)
1892년 4.28 | 조병갑을 고부군수로 삼다 |
1892년 7.6 | 고부군수 조병갑 부임 ○ 11. 15 전봉준이 농민 40여명과 함께 조병갑에게 진정 ○ 조병갑 거부하자 농민봉기 준비 및 사발통문 작성 |
1893년 11.30 | 조병갑 익산군수로 전근 조치. 농민 봉기는 취소 |
1894년 1.9 | 고부군수 조병갑 다시 임명 ○ 1. 11 고부민란 봉기, 관아습격 |
1894년 4.20 | 조병갑을 본부의 도사를 보내어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와 남간(南間/의금부 남쪽에 있는 옥)에 가둠 |
1894년 4.24 | 전 군수 조병갑이 백성들에게 못되게 굴어 소요가 일어나게 된 데 대해서는 古今島에 안치 |
1895년 3.12 | 조병갑을 서울로 압송 |
1895년 7.3 | 조병갑을 석방 |
1897년 12.10 | 법부 민사국장에 조병갑을 임용 |
1898년 5.23 | 법부 민사국장 조병갑을 겸임 고등재판소판사에 임용 |
1904년 5.9 | 조병갑 비서승(秘書丞) 임명 |
<표4> ‘고부민란 전후 조병갑의 벼슬 변동사항’에서 본바, 1894년 고부 백성 수탈로 처벌을 하였으면 다시는 벼슬길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3년 후인 1897년에 법부 민사국장이 되고 1898년 겸임으로 고등재판소 판사에 임용되어 동학인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재판하였다고 한다. 더더욱 1910년 한일 병탄이 되어 일제강점기가 되어 버리니 살아남은 동학도와 그 후손들은 숨어 살아야 했으며 동학의 흔적을 모두 지웠다고 하였다.
<표3> ‘나동환의 가승도’에서 보듯이 나동환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도에 졸하였으니, 죽는 날까지 큰소리 한번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또한 부인 진주정씨도 1913년도에 졸하였으니 일제강점기 초를 경험하였다. 또한 나동환의 손자 도산은 1900년에 태어나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던 해가 무려 37년이나 되니 할아버지가 겪은 이야기를 구전(口傳)으로 손자 도산에게 전해졌을 것이며,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내내 숨어 지내는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다시 친일파가 정권을 쥔 바람에 동학 후손들은 1970년 초까지 기(氣)가 죽어 살아야 했다. 그런데 1970년 중반 즈음부터 동학관련 학술 논문이 세상에 발표되면서 마침내 1972년과 1974년도에 한(恨)에 맺힌 나동환과 부인 진주정씨를 추모하는 입비와 의열각을 나동환의 손자에 의해서 건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비문을 지은 최남구 자신도 일본 순경에게 쫓긴 경험이 있기에 과연 1974년도에 나동환의 직함을 「나주 동학접주(羅州 東學接主)」라 새길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전혀 무관한 「이조참의(吏曹參議)」란 직함으로 새긴 것은 나동환의 업적이 그 정도쯤 평가 받아야 맞다는 자신의 뜻을 표현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러나 훗날 개비(改碑)할 적에는 나주동학 접주 나동환으로 새기는 것이 역사에 맞다고 생각된다.
이어서 진주정씨 비문을 살펴보자. 앞서 나화균이 증언한데로 일본군이 위협함에도 끝내 남편이 숨은 곳을 실토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정씨 비문> (발췌)
일군(日軍)과 관군(官軍)의 수색을 피하여 함평군 해보면 연암리 처가에 은신하며 동지들과 은밀히 재기를 모색하던 중 수색대들은 공을 체포하려고 나주 택촌(澤村) 본가를 포위 수색하였으나 공이 있지 않으므로 그 집에 방화하고 다시 함평 해보에 가 공의 은신처를 포위 수색하였으나 역시 공을 발견치 못하고 그 부인 정씨(鄭氏)를 잔인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였으나 죽기를 작정하고 입을 다문 채 저항하면서 자기 생명을 죽여 남편을 구출하였으니.
<의열각 상량문> (발췌)
“죽음을 무릅쓰고 절개를 지킨 정씨 부인은 진주 정씨 성대한 가문으로 정태원(鄭泰源)의 따님이라네.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효(孝)가 출중하였는데 비녀를 꽂는 나이 15세에 나씨(羅氏) 집으로 시집갔네.”라 하였다. “저들의 노여움을 사면 잔인하게 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어찌 말로 써 드러내 보이겠는가? 그리하였기에 남편과 아내 둘이 온전히 살아났네.”라 하였다. 여기서 저들은 바로 일군(日軍)을 지칭한 말이다.
상량문을 지은 나평집(羅平集)은 나동환의 재종질이고, 글쓴이 나관규(羅瓘奎)는 하촌 나동륜의 손자이다. 비문과 상량문을 지으면서 분명 비전(祕傳)되는 동학관련 문서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일군(日軍)과 관군(官軍)에게 쫓기는 몸이 되었으며, 비밀리 체포하러 온다는 소식을 어떻게 사전에 알고 피신하였을까? 일군(日軍)의 추적을 받은 나동환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사(祕史)를 자세히 기록한 문건은 없다. 그래서 그 답변을 본 필자가 상황논리에 맞게 풀어보고자 한다.
1894년 당시에 지방 수령의 수탈에 저항운동을 하는 농민군을 무조건 비적(匪賊) 또는 동비(東匪)라 하였으니 농민군을 도적떼로 폄하해버렸다. 그런데 동학 농민군은 다만 농사꾼만 참여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 깨어있는 식자층인 유림들도 참여하였다. 그 사례가 바로 서당훈장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농사가 전업이 아니지만 농민에 의해서 동학 농민군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활동을 한사람이다. 소위 식자층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고부 농민저항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아마 나주의 오권선(吳權善)과 나동환(羅東煥)도 비록 농사꾼은 아니나 당시 지방 수령의 수탈하는 폐정을 좌시하지 않으려는 의협심이 그들을 농민군에 가담케 하였을 것이다.
오권선은 나주오씨 나성군 오자치(羅城君 吳自治)의 후손으로 나주 삼가면 세동마을 출신으로 대대로 유학의 전통을 지닌 가문에서 태어나 동학 접주가 되어 나주지역 농민활동을 하였으며 1894년 11월 용진산 전투에서 패배한 후 몸만 빠져 도망쳐 잠적하여 그 후의 기록을 찾을 수 없기에 살아남은 것으로 추정한다.
나동환은 나성군 나공언(羅城君 羅公彦)의 후손이요 금남 최부(錦南 崔溥)의 둘째 사위 나질(羅晊)의 후손이니, 가문으로 보면 보수성향이 강한 유림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민군은 거의 죽창을 들거나 하였는데 선비의 복장에 검(劍)을 차고 다니는 동학접주 나동환을 발견한 일군(日軍)은 나동환의 인적사항을 은밀히 내사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군이 나동환을 체포하려면 그 정보를 어디에 통보했겠는가? 그 정보를 하달 받은 하부 기관은 호적을 관리하는 나주 목사였을 것이다. 조선조 호구단자(戶口單子)는 3년마다 호주가 지방 수령에게 신고하기에 지방 수령에게만 백성의 인적사항 기록부가 있기 때문이다.
1893년 12월경에 남원부사에서 나주목사로 부임해온 민종열은 향약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나주에 도향악소(都鄕約所)를 설치하고 도향약장(都鄕約長)으로 소과에 합격한 나동륜(羅東綸, 1833-1905)를 초빙하고, 직월(直月)에 이병수(李炳壽)를 위촉하였다. 그리고 1894년 1월부터 향약으로 백성을 다스리다가 동년 4월에 동학농민군이 나주를 공략해 온다고 하니 민종열 목사는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나동륜과 이병수를 좌우에 두고 자문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동학농민군을 회유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나주목사에게 하달되는 다양한 정보를 나동륜과 이병수는 가장 먼저 간파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나동륜은 바로 나동환의 집안 형이 되고, 이병수는 나주나씨와의 혼맥을 가진 양성이씨 측이니 나동환이 체포되도록 그냥 놓아둘 사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동환의 체포 사실을 사전에 알아낸 나동륜과 이병수는 나동환 측에게 은밀히 연락을 하여 일군이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알리니, 나동환은 아들들을 데리고 함평군 해보면의 처가마을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나동환과 나동륜가의 가승을 <표5> ‘나주나씨 금암공파 후손 나동환과 나동륜의 가계도’와 같이 도표로 작성해 보았다.
<표5> 나주나씨 금암공파 후손 나동환과 나동륜의 가계도
나동환과 나동륜은 금남 최부(錦南 崔溥)의 둘째 사위인 나질(羅晊)의 후손으로 나주나씨 14세에서 사침(士忱)의 6형제가 소파조가 되면서 덕준은 금암공파 파조가 되었으니, 나동환과 나동륜은 같은 파에 나주나씨 22세의 같은 항열(行列)인 것이다.
나동환은 대대로 나주 삼영동의 택촌 부락에서 살았으며, 나동륜은 택촌부락 영산강 건너 남쪽 편인 방하촌에 대대로 살았으며, 소위 오늘날 금사정(錦社亭)을 중수했던 인물이다. 다만 나이로 보면 나동륜이 나동환보다 16년 연상이다.
나동환이 1894년 동학도에 가담하여 봉기할 때는 46세로 그야말로 혈기왕성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미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의 시기를 추정해 보면 의열각의 상량문 중에 열부정씨(烈婦鄭氏)를 기록하는 것 중에 ‘비녀를 꽂는 나이 15세에 나씨(羅氏) 집으로 시집갔네.’ 란 구절이 있다. 진주정씨는 나주나씨 대동보에 1848년[무신]생-1913년[계축] 5월5일 졸로 기록되어 1862년에 결혼하였을 것으로 추산되니, 나동환은 겨우 14살이고 진주정씨는 15살이었다. 1870년[경오]에 큰아들 상집(相集)을 낳았으니 진주정씨가 22세 때였으며 다시 3년 후〔1873년〕에 둘째아들 영집(玲集)을 낳았다.
그리하여 1894년 갑오 농민운동이 일어날 때 진주정씨는 47세로 남편이 쫓기는 몸이 되자 아들과 함께 처가인 함평군 해보면 연암리로 은신 시켰다. 그래서 일군(日軍)은 진주정씨 부인 붙잡아 문초하였으나 끝내 남편의 은신처를 발설치 않았다고 하였다.
이상은 필자가 상황논리에 맞게 풀어본 것이니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다.
한편, 필자는 진주정씨 대동보도 찾아 마침내 나동환의 장인 정태원(鄭泰源)을 찾아냈다. 1976년 진주정씨제학공파대보편찬회에서 발간한 대동보 곤(坤)편 606쪽에 정문원(鄭文源)의 큰사위로 나동환이 등재되었음을 발견하고 아울러 대동보 족보에 「손도산건의열각(孫燾山建義烈閣)」이란 기록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아마 호적명(戶籍名)과 족보명(族譜名)이 다른 것 같았다.
의열각의 현판 글을 춘강(春岡)이란 호를 가진 자가 썼는데, 당시 나주군청에 근무하였고, 훗날 나주부군수를 역임한 최상익(崔相益/본 경주)의 호가 춘강(春岡)임을 확인하였다.
2) 구전(口傳)만 있는 충혼비 주인공 박양규(朴良圭)의 아버지 박병국 사례
나동환의 사례는 근거기록이 있는 사례라면 동학농민군 박병국은 근거기록이 없는 사례이다. 나동환의 사례에서처럼 반일운동으로 죽임을 당했고, 혹여 살아났다 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동학농민 운동했던 흔적을 숨기거나 흔적을 지우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집안 비전(祕傳)의 구전만만 남은 사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례는 발설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의 사례를 소개해본다.
박병국은 본래 보성군 겸백면에서 거주하였으며 18세에 동학농민운동을 했었다. 당시 보성 접주는 박태로(朴泰潞/또는 朴泰吉)와 웅치면의 구교철(具敎轍)이 있었다. 1895년 이후 살아남은 는 동학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당시 유림에게 천대를 받았고, 마침내 문중에서도 천대를 받게 되었는데, 박병국도 고향 보성에서는 도저히 살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몰래 나주로 도망쳐 나주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주에서 김씨 부인을 만나고 딸과 아들을 낳아 이들이 자라 마침내 딸이 결혼할 즈음에 문중에 알리지 아니할 수 없어 보성 고향에 가서 집안 어르신을 뵙고 그동안 살아온 사연을 말씀드리며, 딸 혼사도 말했다고 한다. 그때서야 박병국의 고향이 보성이고 동학농민운동하다가 나주로 숨어들어와 살았다 것이 알려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런 이야기는 그저 아는 사람 몇 사람만 아는 이야기이다.
박병국은 1녀2남을 두었는데 큰아들 양규(良圭)가 경찰로 들어가 나주경찰서에 근무하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주에 북한군 탱크가 진입하자 치안을 담당했던 나주경찰서도 모두 후퇴하였는데, 나주의 동향을 살피고자 박양규 단신으로 나주로 잠입해 들어와 나주시 교동 폐허된 벽돌공장 굴뚝 아래 굴속에 은신하면서 나주상황을 정탐하던 중에 발각되어 소위 빨치산군과 교전 중에 전사하였다.
그 충(忠)의 공(功)이 인정되어 충혼비가 최초로 나주 남고문 옛터에 건립되었는데, 남고문 복원 문제로 나주 사격장 부지내로 충혼비를 옮겼다. 그러나 훗날 사격장 확장 문제로 나주 역사공원내로 이설하여 현존하고 있다.
박양규는 아들 용남(현73세)을 두었는데 용남이 장성한 후에 할아버지 박병국이 동학농민운동을 보성에서 하다가 나주로 숨어들어와 살았다는 말을 할머니로부터 들어 알았다고 한다. 박병국의 동학농민운동 이야기는 나주에서 일부 나이든 분들은 알고 있는 일이다.
4. 동학 구전자료 수집의 현실적 문제점과 대책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서 조사한 증언록은 전국적으로 겨우 97건뿐이다.(<표6>) 그러므로 지금까지 발굴된 동학 참여자 3,670명과 구전으로 발견된 97건을 합해도 3,767명뿐이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측에서 위령탑(또는 위령비)를 건립한다하면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상징물은 될 수 있으나 <표2>에서처럼 기존에 건립된 전국적 위령탑 10개소, 위령비 12개소와 별반 차이가 없다면 나주는 결코 세계적 명소로 거듭날 수 없게 된다.
<표6> 기존의 증언록
전국 | 지역별 | 건수 |
전라도 | 전주권, 남원/운봉권, 광주/나주권, 순천/광양권, 장흥/강진권 | 62 |
충청도 | 목천/천안권 에산/홍성/서산/당진/태안권, 충주/단양/제천권 부여/한산/서천권, 청주/옥천/보은/영동/논산권, 회덕/진산권 | 16 |
경기도 | 경기북부권, 경기남부권 | 0 |
강원도 | 강원도 | 2 |
경상도 | 상주/예천/금산권, 고성.진주/하동권 | 15 |
기타 | 황해도, 함경도 | 2 |
계 | 97 |
출처: 동학농민혁명 종합정보시스템에서 발췌
그러므로 반드시 구전(口傳) 수집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동학농민과 그 후손 모두를 찾아서 그들의 한(恨)의 소리를 모두 편석판(片石板)에 새겨 이를 모아 위령탑 주변에 비군(碑群)으로 세워야만 사람의 심금(心琴)을 울리게 하여 소위 「동학(東學)의 한(恨)을 흥(興)으로 승화하다」라는 문사철(文史哲)이 하나 되는 위령탑과 비군(碑群)이 되어 세계적 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나주 동학농민 위령탑 건립을 계기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을 모두 찾아 그들의 한(恨)의 소리를 편석판(片石板)에 새겨 가칭 「나주동학혁명 역사공원」에 비군으로 세워 놓으면 나주는 동학농민군 후손의 성지순례코스가 될 것이며, 민주화 열사의 세계적 성지순례코스가 될 것이다.
2018년 가을에 ‘한일 시민이 함께 하는 동학농민군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을 빌미로 나주에 온 일본 측 대표단이 “나주에 위령탑을 세우겠다”는 한마디가 마침내 나주시 발전 미래전략에 반영 되고 ‘한일 학술대회’를 4년간 개최하는 MOU도 한일 간에 체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한(恨)의 목소리 1∼2만개의 편석판(片石板)을 모아 위령탑 주변에 비군(碑群)으로 건립하면 마침내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일본 측을 이끄는 칠순의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교수와 구순의 나카츠가 아키라(中塚 明)교수가 일으킨 미풍(微風)이 몇 년 내에 태풍이 되어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에 몰아칠 것이다.
구전 수집에 있어 일본측도 동학진압군으로 왔던 군인의 후손을 어떻게 찾아내야 하며, 그들의 한(恨)의 소리를 채증하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진중일지를 쓴 일본군 쿠스노키 비요카치(楠美代吉)상등병 뿐만 아니라 동학군 진압에 참여했던 일본군 모두 살인(殺人)이라는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해자 자신의 가슴에 한(恨)이 맺혀 있었고 혹여 그 한(恨)이 핏줄을 타고 후손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 그러한 한(恨)의 소리를 밖으로 다 쏟아내어 마음의 짐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일본 측 편석판(片石板)도 수집되어 비군(碑群)으로 수립되어야 한(恨)을 흥(興)으로 승화 시키는 상징적 의미를 갖게 한다.
한국측인 나주시와 원광대학측이 담당하여 전국 구전 찾기를 해야 하는데, 나주시가 직접 담당키 어려우니 외부 동학 관련단체에 위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다만 본 논문 3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증언자에게 근거서류, 증빙자료를 제출하라고 하면 제출할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동학 농민군 진압 후 125년이 지난 2020년 현재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피해자를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으며, 그들로부터 한(恨)의 목소리를 채증(採證)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전 수집은 2-3년의 단기 사업으로는 끝낼 수 없으니 2022년까지 1단계 사업으로 마무리하고 2023년부터는 오로지 동학 구전 수집을 중장기 프로젝트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한(恨)의 목소리는 동학농민군 당사자의 목소리는 가슴을 감동케 하는 언어들이 많다. 예를 들어 당시 동학도를 체포하여 심문하는 공초록을 보면, 전봉준(全琫準) 등의 한(恨)의 소리를 찾아낼 수 있다.
<시안1> 전봉준의 경우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천안전씨, 고부출신- 세상사가 날로 그릇되어 가는 고로 개연히 한번 세상을 구제하는 의(義)를 보이고자 하였다. 世事日非故慨然欲一番濟世義見 - 1895년 2월11일(음) 공초록에서 |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천안전씨, 고부출신- 나는 바른 길을 걷다가 죽는 사람인데 대역죄를 적용한 것은 실로 천고의 유감이다. -재판부 선고문에 대한 응답 |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 천안전씨, 고부출신- 다른 할 말은 없다. 그러나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리라. 어찌 이 깜깜한 적굴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 사형 직전 전봉준의 최후 말 - |
<시안2> 손화중의 경우
-손화중(1861-1895) 백성을 위해 힘을 다한 것인데 어찌 사형에 처하느냐 -손화중의 사형선고에 대한 최후 진술에서 |
<시안3> 나동환과 진주정씨
-동학 접주 나동환(1849-1937)나주나씨22세 호日菴- 나라의 운명이 장차 어지러워질 때 진실로 성대(聖代)의 다스림을 바랬으며 나라의 일이 날로 그릇되어 갈 때 권력을 가진 간신(奸臣)들의 세력을 막으려고, 드디어 이처럼 의병을 일으켰으나 동비(東匪)라는 조롱을 면치 못하였네. - 國事日非 欲拒權奸之勢, 肆此起義 未免東匪之嘲。 |
<시안4> 보성 동학으로 나주에 숨어 살았던 박병국 한(恨)의 소리
보성 농민군으로 나주에 숨어 들어와 살았던 박병국의 손자 용남(73세)의 한의 소리를 채증해 후손의 한(恨)의 목소리를 글로 지었다.
-동학도 박병국, 본 밀양, -자 양규, 손자 용남 1894년 농민수탈에 항거하는 우리 할아버지 박병국은 보성에서 농민활동하시다가 일제강점기 때에 보성에서 살 수 없어 나주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아들 양규(良圭)는 나주역사 공원에 「朴公良圭忠魂碑」가 서 있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습니다. 이름 없이 살다 가신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 민주화의 초석을 놓으셨다고 나주시에서 할아버지를 기리는 표석을 나주 동학 공원에 문패처럼 붙였으니 지난날의 恨을 興으로 승화하시어 부디 저 세상에서 우리나라를 지켜주소서. 2022년 0월 0일 - 손자 용남 삼가 할아버지 영전에 글을 올립니다 - |
위와 같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던 자의 한(恨)의 목소리 1∼2만개 편석판을 모아서 위령탑 주변에 비군(碑群)으로 조성해 놓으면 그 목소리가 한국과 일본을 울릴 것이며, 장차는 세계 각국을 울릴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역사의 가장 슬픈 한(恨)을 흥(興)으로 승화 시키는 것 일이 될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라는 세상을 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어갔는가? 그 백성의 한(恨)의 소리를 다 모으니 마침내 대한민국은 백성이 주인 되는 시대를 열고 장차는 세계민주화의 씨앗이 될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역사의 가장 슬픈 한(恨)을 흥(興)으로 승화 시키는 것 일이 될 것이다.
편석판 견본을 사전에 알려 주어 견본 글에 한의 소리를 추가토록 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이 되겠다.
5. 맺음말
지금까지 동학 구전(口傳) 수집의 이유와 구전 수집의 문제점을 살펴보면서, 그에 대한 대책으로 동학 후손측은 다만 구전을 구술(口述)하는 정도로만 수집한다고 하면 전국적으로 많은 구술이 답지할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구술 수집 목표를 적어도 1∼2만 건으로 하고, 만약에 구술 수집 중에 집안에 비전(祕傳)되는 기록물을 발견하게 되면 마치 일본에서 진중일지가 발견된 것처럼 톱 뉴스감 임은 물론 동학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구술 수집과 채증을 나주시가 모두 담당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채증작업은 외부 동학관련 단체에 위탁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다만 나주시는 전문가와 시민의 의견을 모아 나주를 세계 명소로 만드는 그곳의 명명(命名)을 어떻게 정할지 등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뜻을 수용해 낼 수 있는 장소 선정이 가장 시급한 일이다.
2022년∼2023년에는 먼저 일본측에서 위령탑을 세울 것이며, 이 위령탑은 가칭 「나주 동학혁명 역사공원」의 심볼 마크가 될 것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동학이 당시 서성문을 중심으로 4대문과 인연이 있으므로 사적지 나주읍성을 가칭 「나주 동학혁명 역사공원」으로 지정하여 읍성 발굴과 복원과정에서 조성되는 「빈 공간 터」에 위령탑과 1∼2만개 편석판 비군(碑群)을 배치하는 것이 나주를 세계명소로 만드는 최선의 방법일 것 같다. 이는 동학 전문가와 시민들의 공감대를 조성하여 시급히 정해야할 일이다. 다만 1∼2만개 편석판(片石板) 수집을 목표로 하였는데, 이는 단기사업으로 완성할 수 없음으로 적어도 중장기 사업을 전개되기를 희망한다.
또 하나 문제는 앞서 언급하였지만 1894년 가해자 측인 일본군이과 우리나라 관군도 어찌 보면 인간의 양심에 반하는 살인을 하게 되었음으로 평생 멍에를 지고 살았을 것이다. 진중일지를 쓴 일본군 쿠스노키 비요카치(楠美代吉)상등병도 죽을 때까지 인간적 양신의 가책을 멍에로 지고 살았을 것이며, 관군에 소속되었기에 명령에 따라 동학군을 진압한 그들과 후손들도 잘못된 역사의 멍에를 벗어나고자 할 것이기에, 이들도 가칭 「나주 동학혁명 역사공원」에 한(恨)의 목소리를 새겨 넣는 기회를 주는 것도 나주가 민주화의 세계화 중심으로 발돋움하는 차원에서 필요한 사항이니, 이 문제도 전문가와 시민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야 할 것이다.
나주의 위령탑은 일본인이 사죄의 의미를 담아 세우니 분명 여타 위령탑과는 다른 점이 있다. 여기에 동학관련 피해자 모두를 발굴하여 그들의 한(恨)의 목소리를 편석판(片石板)의 돌에 새겨 이 모두를 모아 비군(碑群)을 조성해야 한다. 편석판(片石板)의 비군(碑群)은 피해자 가족 후손들이 참여하고, 이러한 뜻에 동참하고자하는 일반 백성〔문학가, 화가, 조각가, 독지가 등〕들이 참여하여 그들로부터 모아진 한(恨)이 새겨진 편석판(片石板)을 모아 스토리텔링을 엮어 내면 세계적 명소가 될 것이다.
한(恨)이 새겨진 편석판(片石板)을 제작 목표를 1∼2만개 하여도 전체 동학농민 70여만명에 비하면 결코 많은 목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1만개의 한(恨)의 목소리를 모으면 한국과 일본을 흔들 것이다. 2만개의 한(恨)의 목소리를 모으면 아시아를 흔들 것이고, 2만개 이상의 한(恨)의 목소리를 모으면 세계 각국을 흔들 것이다. 여기에 ‘나주 국제 동학상(Naju Internatioanal Donghak Prize)’을 정례적으로 수여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가 될 것 같다.
일본 측 대표인 이노우에 가츠오(井上勝生)교수의 작은 몸짓, 즉 나주에 동학 위령탑을 세우겠다는 미풍이 점점 강풍으로 형성되어 가고 있어 장차는 전 세계에 태풍으로 몰아치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를 상상하면서 혹여 일본에서 나주 동학 접주 나동환(接主 羅東煥)에 관한 기록이나 아울러 1894년 동학관련 기록물 발견에 도움 줄 것을 건의 한다.
<참고문헌>
1. 단행본
나주시, 나주독립운동사, 윤선자 외, 전남대학교출판부, 2015.
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국역)금성정의록, 광주아가페문화, 1991.
나주나씨대동보소, 나주나씨 (임술)대동보권5, 1958.
2. 논문류
나천수, 「동학농민군의 나주지역 공략과 민종열 초토사의 방어를 다시보다」, 원불교 사상과 종교문화 제82집,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9.
박형모, 「장흥동학농민혁명의 기억의 장소연구」, 전남대 석사논문, 2019.
3. 기타
1) 인터넷 사이트
동학농민혁명 종합정보시스템(http://www.e-donghak.or.kr)
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main.do)
2) 碑文 및 상량문
진주정씨효열부비(1972년 건립)
나동환의 의적비(1974년 건립)
의열각 상량문(1974년 건립)
첫댓글 澤村은 영산강변 삼영동에 있어서 가보았는데 (정보시스템)에서는 영암 택촌으로 ,,/
당시에는 영암땅이였나요??
당초 조사시에 틀리게 조사하여 오기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