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호의 걸어서 고향까지
오래전부터 해야하고 하고싶었든 일 중의 하나가 6.25사변때 서울서 걸어서 시골고향까지 갔든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간 학교다니고 사회에 나와서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또 자식들 교육시키고 나름대로 사회의 일원으로 일하다 보니 벌써 세월은 흘러서 6.25 60주년이 되었습니다. 60주년에 결행치 못하면 70주년에는 저도 83세의 늙고 힘든 노인이 되어있을것이고 그 나이에는 도저히 서울서 고향까지 갈수가 없습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언제 틈을 내서 그길을 가봐야 할텐데, 할텐데”하면서도 이제껏 실천에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미 같이 내려가든 일행중 어머니와 형님은 고인이 되셨고 이제 남은사람은 큰 누님과 저 두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큰 누님은 83세의 고령이니 가고싶어 하시지만 갈수가 없습니다.
66세 까지 약국을 경영했고 금년(2010년) 6월 까지 약계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7월 부터는 명실공히 자유의 몸이 되었고 마침 6.25 6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더욱더 의의있는 해이기도 할뿐 아니라 금년(2010년) 8월 13일은 우리가 정확히 60년전 이날 서울을 출발해서 고향을 바라보고 피난길을 떠났든 잊지못할 날입니다.
그때 출발하면서부터 그날 그날 몇리를 걷고 어디서 잤으며 특이한점은 무엇인지를 작은 쪽지에나마 기록(기록 담당은 제가 했습니다)을 해서 간직하고 있었지만 고향의 사정은 9.28 수복후에도 공비의 출몰이 잦아 귀중(?)한 물건들을 대청 마루밑에 숨겨놓았는데 그곳도 안전하지는 못했고 이리저리 장소를 옮겨 보관하다가 그 쪽지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아쉬워하면서 세월을 보냈지만 해결책은 없으니 어이 하리요. 할수없이 지금 살아 있는 큰 누님과 저의 머리를 짜 내어 60년 전 기억을 더듬으며 서울서 고향까지 13일간 걸었든 길을 드덤으며 가급적이면 그 때의 기억에 따라 길을 걷기로 하고 드디어 정확히 60년이 지난 2010년 8월 13일 우리가 살든 이태원을 출발했습니다.
1.첫번째날 : 8월 13일 오후 1시에 잠실출발. 2시쯤에 우리가 살든 이태원에 도착했습니다. 이태원초등학교와 동회가 우리 집옆에 있었지요. 지금은 경리단이 되어있는 부대가 한눈에 내려다 볼수있는 적산가옥 민씨네 집 2층에 세를 들어 어머니 형님 큰 누님 옥봉누님
그리고 저 이렇게 다섯식구가 살았는데 그때 어머니께선 임파선염으로 고생을 하고 계셨으며 6.25직전에 서울 시립병원(현재의 을지로 6가에 있는 국립의료원자리)에서 수술을 받으셨고 평소에도 병약하셨습니다.형님은 서울법대 3학년에 재학중이었고, 큰누님은 한남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옥봉누님은 동구여상(당시는 중학교는 여중 고등학교는 여상이 아니고 5학년제로 되어 있었으며 중 1과정부터 상업학교 혹은 공업학교 이런식으로 불렀습니다.)에 재학중이었고 저는 보성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당시 만 12세). 그리고 둘째 점순누님은 시립간호고등학교 재학중이어서 기숙사생활을 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생활하고 있지 않았고 일요일되면 외출을 나오곤 했습니다. 여담으로 그때 우리 서하에서 서울에 와 계시든분은 정말 몇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6식구, 은행부락출신 김상곤 선생님, 송계의정균식씨, 송계에서 강의록으로 공부하다 면학에 열을 태우다 상경하여서 한양중학교(옛 동대문 운동장 뒤편에 있었든걸로 기억됨)에 다니셨든 전병호(별명이 호야인데 그분의 정확한 이름은 병철인것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지금 외환은행에 근무하는 전순익씨의 삼촌임)씨 그리고 송계 가운데 부락 최또만씨 옆집이 자기집인 김영환(?)씨(이분은 다리를 약간씩 절었습니다) 이렇게가 전부였습니다. 정말 격세지감이 있지요.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60년! 강산이 여섯 번이나 바뀌었으니----.어쨌든 당시 서울서는 우리집이 자연히 고향사람 집합소가 되었었답니다. 힘든 타향살이의 괴로움을 서로위로하고 달래었습니다. 단 전균식씨(현 서하면장의 백부)는 잘 몰라 서울서 교분이 없었습니다.
쐬고 있기에 내가 60년전에 이곳에서 배로 서울을 탈출했다는 얘기를 했드니 모두 놀라시드군요. 그때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쫏기듯이 배를타고 떠났고 전송나온 옥봉누나가 울부짖으며 서있든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어쩝니까 배가없으니 나루터를 확인만하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구름이 끼어 더위가 조금은 덜한 오후 4시 반쯤되는 시각에 혼자 타박 타박 걸어서 잠수교를 건넜습니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잠수교를 건너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잠수교 이쪽 끜에서 저쪽 끝까지 꼭 12분이 걸리드군요. 잠수교 남쪽나루터 즉 반포지구 고수부지를 밟으며 다시 한남대교 쪽을 걸어갔습니다. 60년전에 보광나루터나 이쪽 건너 나루터는 모래사장이 제법있었는데 지금은 남쪽은 2-3M정도의 사장이 있고 낙씨군들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보광동 쪽은 전혀 물과 콘크리트사이에 모래사장이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한남대교쪽으로 걸어오다보니 잠원 수영장도 있고 한강 나룻배가 접안할수있는 ,Terminal도 있드군요. 조금더 한남대교 쪽으로 올라오니 남쪽의 88고속도로를 빠져나갈수 있는 잠원 나들목이 있드군요. 아 참 출발지 이태원초등학교 보광치안센터 보광나룻터 잠원나룻터 잠수교등을 서툰솜씨지만 Camera에 담아 두엇습니다. 17시30분쯤에 잠원 나들목을 빠져나오자 마자 조그만한 매점이 있길래 막걸리 한병사서 쏘세지로 안주삼아 목을 추겼지요. 꿀맛이 따로 있나요. 다행이 볓이 엷고 구름이 끼여 그래도 걷기에한결 수월했습니다. 그때는 햋볓이 강열했고 강을 건너와서 백사장을 디딜때 제법 따가왔습니다. 그때 강을 중간쯤 건널때까지 울며 서있든 옥봉누님 생각이 뚜렷이 떠오르는군요. 강을 다 건넛을때는 사실상 건너편의 옥봉누나 얼굴을 알아볼수는 없었습니다.
[옆 위 사진은 보광나루터가 있든자리이고 옆 아래 사진은 옛날 보광나루에서 배타고 와서 강남쪽에 배를 대었든 나루터 자리에 현재는 오가는 한강의 배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선착장 즉 Terminal이다]
남으로 가지 못하면 인민군들에게 또 붙들릴까봐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자식들을 위하여 이를 악물고 걸어셨으리라는 생각이 이 불효자에게 인제사 생각이 나는군요. 예상보다 길은 멀고 더위는 몰려왓습니다. 19시. 아직배는 별로 곺으지않은데 (막걸리 덕인가보다) 대단이 힘들었고. 쉴때라고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른 저녁을 먹으며 잠간 땀을 식히며 쉴작정을 하고 식당을 찾는데 강남이 역시 강남입니다. 도대체 1인은 받아주는 곳이 없습니다. 어찌 어찌해서 1인분도 준다는 싸구려 식당에 들어가서 된장찌개 한그릇 시켜먹고 다소 에너지
를 축적해서 다시 출발했습니다. 그때는 13살 멋 모르고 팔랑거리고 딸아갔지만 지금은 저도 어언 73의 나이이다보니 더워지치다보니 이게 늙는것이로구나하고 느낄것 같았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오는 길에도 연세지긋하신분만 만나면 혹시나하고 옛날 예기를 묻고 옛길을 물어가며 길을 걷자니 시간이 다소는 더 걸렷습니다. 또 때때로 사진도 찍고 메모도 해가며 가자니 길은 자연히 조금은 늦어졌습니다. 그러나 피난때는 잘곳 먹을것 목숨부지할것등이 어려웟지만 지금이야 돈있으면(물론 돈이 풍족하다는것은 아니지만) 먹을것 잘것 죽을것 걱정은 없이 길을 기념삼아 걷고 있으니 어찌 그때에다 비교할수야 있겠느냐. 피곤하드라도 조금 참자. 드디어 20시 여름밤이지만 제법 컴컴한데 양재역에 도착했습니다. 역 근처에서 그래도 나이드신 분께 물었드니 바로 이 지점이 옛날 말죽거리가 맞고 말죽거리 제일 남쪽쯤되는곳이라고 했습니다. 조금 더 걸어서 서초구 구민회관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의 일정을 여기서 마감하기로 하고 낮에 잠원나들목에서 구입한 막걸리 남은 것으로 구민회관 앞 의자에 홀로앉아 목을 추겼습니다. 원래는 60년전에 투숙했을만한 장소에 잠을 자고 고향길까지 가기로 했는데 생각하니 굳이 잠까지 서울 한복판에서 자야할 이유가 없을것 같았습니다. 서울한복판 그것도 비싼 강남땅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계획을 변경해서 서울 지구를 벗어날동안은 (그곳에서집까지 1시간내지 1시간 반 밖에 안 걸리니) 저녁에 잠은 집에 돌아와 자고 다음날 아침에 어제 저녁에 도착했든 지점에 가서 다음날의 행사를 하는 식으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육이오때에 말죽거리 제일끝에서 잔 사람들은 그 이 튿날 검문을 받지않고 남행길을 할수있었지만 말죽거리 중간, (아마 지금 생각하면 강남역 조금지나서 중간지점)에서 잠을 잤든사람들은 그 다음날 새벽검문에 걸려 젊은 사람들은 의용군으로 잡혀갔습니다. 우리는 말죽거리 마지막집에서 자리를 청해 잠을 잤기 때문에 그 검문을 피해서 살아 돌아올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우신조라 한들 어찌 과장이라 할수있겠는습니까? 그리고 50년 8월 14일날 서울엔 대대적이 공습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만 중간쯤에서 자고가자고 했지만 형님께서 한발자국이라도 더 내려가서 자고 가자고 햇습니다. 선견지명일지 조상들의 보살핌일지 알수가 없군요.
오늘 걸은 거리 즉 이태원서 말죽거리(서초구민회관)까지
는 약 11Km(이태원서 한남대교로 바로건너서 가는 거리가 아니고 이태원에서 보광동나룻터를 거쳐잠수교건너서 다시 한남대교쪽으로 올라와서 잠원 나들목 지나 강남대로를 걸어서 양재동 까지의 거리입니다.)
2.두번째 날(8월 14일)
오늘은 말죽거리에서 원터마을까지 가는 날입니다. 첫날 글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멀죽거리에서 자지않고 집(잠실)에서 자고 11시45분에 서초구민회관을 출발했습니다. 제 기억에 6.25당시엔 8시 전후해서 출발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구민회관을 출발해서 얼마가지 않아서 영동1교가 나타났습니다. 대로(8차선?)에 놓여있는 큰 다리입니다. 알고보니 양재천이예요. 지금은 영동1교를 건너가고 있지만 그때는 이런 큰다리는 없었습니다. 기껏 작은 목조 다리이거나 징검다리를 건넜을겁니다. 영동1교를 지나 조금 가니 시민의 숲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 양재천 수영장도 있고요. 시간에 쫏기는 몸은 아니니까 잠간 시민의 숲을 들렀드니 여의교가 나타나드군요. 여의교란 이름이 뜻밖이긴 하지만. 양재천 샛강이 시민의 숲 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드군요. 요즘 연일 비가와서 개울은 황토물이었습니다. 공사장 인부에게 물으보니 이 샛강에도 요즘은 잉어가 올라오고 임자없는 오리가 유유히 노닐고 잇는데 옛날 배고플때면 남아나지 않을텐데 요즘은 잡는사람이 없답니다. 크게 바쁜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민의숲에서 구경만하고 노닐수는 없어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조금 걸어가니 농수산화혜공판장이 나오고 곧이어 염곡사거리, 현대기아자동차,청계산입구 간판이 나왔습니다. 약 100M쯤 걸어가니 삼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 농협이 있습니다. 청계산입구라는 간판의 지시대로 우회전해서 또다시 타박타박 길을 재촉했습니다. 다행이 구름이 끼어서 걷기에 한결 괜찮았습니다. 물론 가는길 중간중간에서 좀 연세드신분을 만나면 공손히 머리 숙이고(사실은 전부가 저보다 젊은분들) 60년전 이곳의 사항 특히 원터마을을 물으며 길을 걸었는데 이 지점까지 올적에는 원터마을을 아는분이 없었습니다. 물론 떠나기 전 며칠전부터 지도를 찾기도 하고 Internet을 뒤지겨서 겨우 운터라는 글자와 대충 위치를 알기는 했지만 정확한 위치나 마을에 대한 사전지식은 얻지못한채 출발했습니다.
표시판대로 우회전을 하여 걷다가 정말뜻박에도 반가운 다리 하나를 만나게되엇습니다. 원지교라는 음각글자가 너무나 뚜렷한 약 20M정도 되는 다리를 발견한것입니다. 다리하나 가지고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하는 의문을 가지시겠지요? 피난길을 오며 메모를 했다는것은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그 당시 기록을 하면서도 둘째날 기록에 원지가 있고 원터가 있어서 그 당시에도 제가 뭘 잘 못 기록한것이 아닌가하고 의심을 가졌었고 피난길 생각이 날적마다 가끔씩 이 생각이 나곤 했었는데 오늘 이 다리를 막상 대하고 보니 오랬동안 풀지못했든 숙제를 푼것처럼 시원하네요. 물론 떠나기전 지도에 원지동이 나와긴 했지만 직접대하고 보니 대단히 기분이 좋았고 무슨 크다란 발견을 한것같이 오랜숙제를 푼것같았습니다. 원지교를 지나면서부터는 비록 그곳이 서초구이긴 하지만 산지가 나타나고 주변엔 농원들이 드문드문자리잡고 2차선길에 가끔 차들이 지나다닐뿐 크게 복잡하진 않았습니다. 시골냄새를 맡아가며 가는길에 꽃집들이 드무드문 있길래 또 그 중에 연세든 아주머니(약 60세)를 붇들고 말을 물어보았드니 자기는 이곳에 온지 십년밖에 되지 않아 잘 모른다면서 이지역이 60년대 초창기에 원주민들이 돈이 급한분들은 논밭을 팔았는데 그 분들은 재미 못보고 오히려 2차 3차로 땅을 산 외지인들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하드군요. 그리고 자기가 이곳에 들어올때(약 10년쯤전)만 해도 Double아니면 택시가 들어오지 않았답니다. 오후 1시반쯤 되었습니다. 햋살은 없지만 제법덥기시작햇고 민가도 별로없습니다. 어느 농원에 초가정자가 길가에 하나 있기에 염치불고하고들어가 아픈다리를 쉬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오른편에 두고 청계산 입구를 향해 얼마를 걷다보니 한 20가구됨직한 동리가 나타났는데 등산객상대로하는 음식점도 몇곳이 있엇습니다. 길을 물을려고 휘둘러 봐도 노인은 고사하고 한사람 집밖에 나와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렵사리 40대쯤 되어보이는 젊은분들을 만날 수 있어 이곳지리에 대해서 물었드니 목적지 근처에 다 왔는지 비교적 상세히 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이곳 전체를 원지라고 하며 한 십리쯤 가면 청계산 입구 Bus정류소가 있고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오른쪽으로 경부고속도로 밑으로 굴다리가 나있는데 그곳이 원터마을이랍니다. 아 정말 얼마나 찾든 마을인데 정말 너무 반갑고 기뻤습니다. 물론 인터넷으로 찾을수 있는곳이지만 막상 현장을 저에게는 역사적 현장인 그곳을 보게된다니 참으로 가슴 설레였습니다. 이곳에서 60년전에 그날도 저녁엔 구름이 낀 날이었는데 잘곳을 찾다가 아주 인자하게 생기신 중년의 농부인 아저씨를 만나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으며 하루저녁을 지난 기억이 아직도 새롭습니다. 60년의 세월은 너무나 많은것을 망각의 세계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동리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이곳엔 오씨들이 많이 사신다는데 혹시 그분이 오씨가 아닐가 한번 물어나 볼가 하는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때는 피난민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마당에서 자고가기도 힘든때닌데 우리는 그날 따뜻한 환대를 받고 하루를 묵어갔든것입니다. 그러고나서 수복후 이레저레 세월을 보내다가 끝내 은혜입은분을 찾아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드디어 청계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도 찾든 원터마을이 도로 표시판에 뚜렷히 적혀서 저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굴다리 입구에 표시판이 걸려있는데 굴다리 밑으로 청계산등산로이며 등산로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이 “원터마을”이었습니다. 차길왼편 즉 고속도로 왼쪽은 청룡마을이고 큰 느티나무가 서 있었고 원터마을 들어가는 입구이면서 굴다리 바로앞에는 미륵당이 있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진정하며 느티나무 밑에서 Aircon들어오는 식당에서 점식식사를 하면서 걸어오는 피곤을 풀며 휴식을 잠시나마 가졌습니다.
그 때가 오후 2시 50분. 느티나무와 미륵당을 카메라에 담은후 굴다리를 통과해서 드디어 꿈에도 잊지못하든
원터마을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변한 마을 모습은 오히려 저를 허탈하게 햇습니다. 옹기종기 붙어있든 초가집들은 간곳이없고 유원지 입구답게 2-4층 건물들이 들어서있고 분위기 마저 삭막했습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않고 동리를 한바퀴 둘러보았드니 뒤쪽으로 20여가구정도는 현대식 주택으로 바뀌긴 했지만 동리의 모습은 남아 있었습니다. 저곳중 어느 한집에서 우리가 묵어갔겠지 허탈한 한숨만 쇠고 발길을 돌릴수 밖
마침 내가 찾아간 그날이 오씨집안이 합동으로 벌초를 하다가 오전에 비가와서 벌초를 하다 들어갔답니다. 경노당에 들어가서 혹시 그분의 후손이나마 찾을가 기대했어나 문을닫고 아무도 없어 허탕을 쳤고 할수없이 청계계곡으로 올라가 막걸리 한병을 비우며 이생각 저생각을 하다가 아마 60년 전에 길을 갑자기 걸어 발이 불어터서 이 계곡에서 탁족을 했고 이 계곡물로 밥을 해 먹지않았을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3.세번째 날(8월 25일)
8월 18일 메사 분양주들의 모임이 있어 대구김서방도 참석하게되어 또 오랜만에 동서들과
여름휴가(?)도 지날겸 해서 15일부터 24일까지 쉬었다. 그리하여 8월 25일 11시 30분 원터를 출발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햋빛이 쨍하고 나는것 보다는 걷기가 좋았다. 원터골에서 판교가는 중간인 대왕저수지까지의 길은 보행자 통로가 아주 좋지않았다.
11시 45분 : 청계골(관현사)
12시 15분 : 비가 억수같이 내려 아직 점심이 먹고싶지 않았는데 비도 피할겸 대왕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먹다. 판교가는 길을 묻고 비가 다소 내리지만 출발했다.식당 아주마에게 판교 IC가는길을 물었다. 걸어가느냐기에 6.25때 이 길로 피난을 갔는데 이제 은퇴도 했고 6.25 60주년이 되어서 이 길을 걷노라고 사연을 설명했드니 식당아줌마 왈 “별놈 의 취미도 다 있네”.라 하드군요. 이제껏 걸어내려오면서 걷는사연을 들어보고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 조심 하십시오. 방송국에 연락해야 하겠습니다”등의 격려의 말씀들을 해 주었는데. 사람의 생각이 어찌 다 일치할 수가 있을가만은----
1시 00분 : 대왕저수지도착. 6.25때 보지 못한 저수지. 대왕저수지 끝이 판교IC와 고등동IC가
교차되는 삼거리이다. 길 건너에는 음식점만 즐비하고 비는 부슬 부슬내리고 ---
옛날 모습과 정서는 간곳이 없다. 어쩌면 60년전에 우리가 내려갈적에는 이근방
어디에서 물에 발 담그고 지친 다리를 쉬다갔음직한 곳이었다.
2시50분 : 쌍룡교도착
3시05분 : 중앙공원 표시판 보이고 건너편산에 정자보임(사진)
종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 옛 추억을 물으며 가다보니 목적지를 직행치
못하고 굴곡 코스를 헤메다 보니 시간이 더 걸리고 더 피곤했다.
4시 00분: 분당 사거리. 여태 여기밖에 오지 못했나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정자동 방향으로 행군. 이때 마침 병화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걷고있는 사항을 설명했드니 깜작놀라했다. 언제
나와같이 동행하자는 나의 제의를 받곤는 대답은 유보. 이번에 서울가면 종원께 한번 권해 봐야지한는 생각이 들었고 며칠후 종원이를 만나 권했드니 산이면 동행하겠는데 걷는길은 자신이 없다했고 또 며칠후는 백두대간 산행을 예정해놓 은 상태라한다.
5시 30분 : 미금역에서 식사. 된장찌개 그래도 낫선곳에 가서는 된장찌개
먹어서는 뒷탈이 없다. 혼자가면 영양가 있는 음식점에는 입장불가. 요놈들을
언제 복수(?)해줄가?
오늘 기껏걸어도 겨우 정자역박에 못 왔다. 목표는 용인의 죽전삼거리인데. 너무피곤하여
고집을 꺽고 내일을 위해 숙소를 찾았다. 모텔이 있는데 비싸기도 하지만 저녁 된장찌개집
에 갔다가 이 건물 3층에 찜진방을 권햇다. 취침도 할수있단다. 가격은 7000원 피곤한몸을 따뜻 한 목욕물에 담그고 푹 잘잤다.
오늘하루 청계산입구에서 미금역까지 걸었다. 목표는 죽전삼거리였는데.
오늘 행군거리 에게게 겨우 17.1KM.
4.네번째날(8월 26일)
원래의 계획은 죽전3거리에서 용인 이동면까지 가는것인데 어제 죽전 못피쳐 미금에서 자고
말았으니 부득불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하옇튼 가는데 까지 가보자.
찜질방에서 아침 7시에 일어나 간단히 목욕하고 8시 20분에 출발했다.
8시 50분 : 찜질방 앞 어굼터 식당에서 황태해장국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가격은 6000원.
찜질방을 나설적에 찜질방 주인(50대 후반)으로부터 차도를 딸아 가지 말고 조금나가면
탄천이 있다는 설명을 듣고 매연을 피해 탄천으로 길을 잡았드니 한결 기분이 좋았으나
내려찌는 햋빛아래서는 여전히 힘들었다. 그래도 드문드문 산보객들게 길을 물어가며 죽전
3거리를 바라고 나갔다.
11시에 죽전1동 주민세터를 발견하고 찾아들어갔다. 나의 여행동기를 얘기드리고 옛날
여기 죽전 삼거리서 자고갔다고 설명드리고 그곳을 찾아보고자 했드니 동장께서 친히
동장실로 안내를 하고 차를 대접해주시면서 용인지나 이동면까지 가는 길이 상세히
나오는 항공사진을 카피해주시고 친절히 길도 설명해주셧다. 정말 너무 감사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찾든 삼거리는 지금은 흔적도 없고 지금의 삼거리는 도시가 재 조성되며 붙친
이름이며 옛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곳이라 했다. 아쉽지만 어쩔수없이 발길을 돌릴수
밖에 없엇다. 동회(주민센터)를 떠나며 서울 잠실오면 꼭 들러라고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동장(김진태)의 명함도 받았다.
동장이 설명해준대로 탄천을 끼고 오른쪽에 경부고속도로를 보면서 그런대로 좋은 길을
걸어서 서울우유공장까지왔다. 그때가 12시 50분.
서울 우유를 지나면서 부터는 차도를 딸아 때약빛에 시달리며 면허시함장(1시5분), 기흥
구청(1시 30분)근처에 도착하여 혼자라고 두군데 식당에 거절당하고 제주방목식당에서
된장찌개로 식사(2시 30분). 이식당에서 내가 가는행사에 대해 대단히 존경스럽다고 칭찬
하며 이동면으로 가지말고 바로 용인으로 가서 양지를 들러 죽산삼거리로 가라고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시골길 갈적에는 도로의 Number를 보고 가는것이 제일 좋다고
하면서 42번 국도를 딸아가다가 17번 국도로 가라고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물론 나도
도로의 수자를 찾아 가는게 좋은줄은 알았지만 혹시나 지름길이 있지않을가 해서 묻고
또 물었는데 그것이 별로 소용이 없었다.
2시 40분 : 경전철 구갈역도착. 6.25피난갈 당시 이곳을 3일째 되는 때약빛이 내려쬐는
이 시간대에 지난기억이 또렷이 났다. 왜냐 하면 나는 6.25사변나든해 중학교
시험치러 서울올라오다가 김천서 처음으로 기차를 봤는데 이날 피난가면서
두 번째로 기차를 봤으니 그점이 기억에 또렸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그 때는 경전철은 아니었지만은.
3시 30분 원재자동 용인시청 3KM앞 정신병원앞 고개 도착. 도로 옆에 의자 5~6개 놓여
있는 작은 쉼터에서 아픈다리를 쉬었다. 마침 그때 지니고 있든 막걸리 한잔을
주-ㄱ 들이켰다. 아 이 꿀맛. 그리고 갈증도 싹 가셨다.
5시 30분경:용인시청앞 도착. 너무 피곤하다. 오른쪽 작은 발가락을 서울출발하느 24일
저녁에 다쳤는데 다리는 그래도 별로 아프지 않은데 그 놈의 발가락이 신경을
건드렷다. 그리고 허리가 생각보다 아파서 더 못 가겠다. 사실은 정자역을 출발
하면서 요통용 진통제를 먹고 길을 걸었다. 나도 많이 늙었나 보다.
6시 20분경 : 오늘은 찜질방도 없거니와 방범문제로 신경을 쓰는 단점이 있기도 한 찜질방대신 오늘은 모텔에 숙소를 잡았다. 가격은3만 5천원. 대강 짐을 풀어놓고 식사하러 나갔다. 마침 앞에 수원갈비집이 있어 망설이다 들어갔드니 이 식당은 1인분도 제공을 한단다. 사실 며칠간 영양보충을 하지 못해서 오늘 만약 이집에서 1인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지나는 대학생이라도 붙들고 들어가서 좋은일(?)도 하면서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식사후 샤워를 하고 간단한 빨래를 해 놓고 피곤한몸을 자리에 눞혔다.
오늘 걸어온길 16.2KM 6.25때 어머니께서 병약하셨다 하나 연세가 49세였다. 그래도
그때의 체력이 오늘날 73세인 나의 체력 보다는 좋았든겄같다. 그때 평균속도가
1일 70리였는데 아무래도 지금 나는 하루 70리를 걷는것은 무리인겄같다. 아니 만용
인겄같다.
5. 다섯 번째 날(8월 27일)
오를 목표는 용인시청에서 죽산삼거리까지.
7시 45분 : 용인시청앞 Feel Motel출발. 날씨는 쾌청. 불볓더위.
7시 58분 : 용인 세무서 앞.
8시 10분 : 아침식사. 된장 찌개
9시 04분 : 더미니 주유소 앞 삼박곡 bus stop.
9시 16분 신평 Bus stop옆 쉼터에서 잠간 쉬다.
10시 50분:양지 IC앞에서 죽산 백암 남곡 방면으로 우회전 17번 도로로 진입 17번
도로는 보행자 도로가 거의 없는 지방국도였다. 처음에 우측 길가 보도를 걸었
는데 차가 뒤에서 오기 때문에 위험했다. 좌측도로를 이용해서 걸어니 앞에서
오는차를 보고 행동을 할수있어서 한결 좋았다. 궁즉 통하고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드니. 차차 요령이 생겼다.
요즘 걸어면서 느낀것인데 그처럼 더워도 크게 갈증을 느끼지 못했다. 이런현상은
12시 30분 : 양지물류주식회사앞. 별로 배도 고프지않고 식사하고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가는길이 너무 더워서 더위좀 식힐겸 식사하러 보성식당이라는곳에 들어갔다. 옆에 한 식당은 에어콘도 없다. 시설에 놀랐다. 식사를 다 하고 죽산삼거리 가는길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의 내려가는 사연을 듣고 모두 놀라고 또한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12시 53분 : 오창Bus stop
1시 30분 : 행군 Bus stop. 날이 구름이 끼기 시작. 한결 걷기가 부드러웠으나 아스팔트 길만 있고 주위에 도시나 민가도 없고 매점도 극히 드물었다.
1시 40분 : 원삼 사거리. 조금 지나다 너무 더워서 남의 묘 옆 그늘에서 잠간 쉬었다.
2시 20분 : 가재월리
3시 00분 : 노동 Bus stop
3시 15분 : 증평 Bus stop
약 700M를 걸어야 터미널이다. 가는길에 막걸리 한잔을 나팔불고 터미널가서 서울행 Bus를 탔다. 이때가 4시 25분이었다.
차중에서 어느 젊은이와 말동무를 해 심심치는 않았는데 서울 다 와서 그 젉은이의 행동이 운동권출신인것같아 마음이 썸직했다.
오늘 용인시청에서 백암면 백암리까지 겨우 22.8KM.걸었다. 9월 1일을 기약하며.
6.여섯째날(9월 1일)
8월 28일부터 31일 까지 4일간 체력을 비축했다.
9월 1일 9시 10분 집을 출발해서 동서울 터미날에서 10:00에 죽산행 Bus를 탔다.
\5400. 11시 02 죽산시내 죽산 터미널 도착. 우리가 피난시 자고갔든 그처럼 기대
했든 죽산삼거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터미날에서 150m정도 서쪽) 그 자리는 시내의 작은 4거리 교차 로가 되어있고 느티나무가 있든 바로 그 자리는 건물이(상가) 들어서있다. 길가에 않아계신 노인들과 얘기 를 들으며 옛날 내가 6.25때 느티나무 앞에 있는집에서 자고 갔다니까 “그 누구누구 부자집자리”하면서 오래전에 도시 가 형성되며 느티나무를 벴다한다. 없어진 느티나무를 어이하랴. 그처럼 60년전 추억을 드 덤어 찾아왔건만은.(옛 죽산삼거리는 지금 말한 시내 한중심지를 말하지만 지금의 죽산 삼거리는 큰 도로가 나면서 교통의 중심지인 죽산 삼거리니까 혼돈치 말것)
전번 8월 27일날 백암까지 걸어왔다가 서울로 돌아갔기 때문에 다시 죽산서 차를타고 백암으로 갔다. 즉 역으로 간 셈이다. 11시 20분 백암행 시외버스를 타고 11시 45분에 27일 서울행을 탔든 그 터미널 지점까 지 갔다. 요금은 \1000.
11시50분 : 백암에서 으늘의 목표 죽산삼거리를 향해 출발. 몹시 더운 날씨여서 몇 걸음 걷지 않아도 숨이 턱턱 막혔다. 백암서 죽산까지 준고속(4차선)도로를 택하지않고 왕복 2차선 국도를 택했다. 보행자 도로마저 잘 정리되어있다. 3km쯤 왔을때 부터는 그나마 보행자 도로가 흉내만 내고 있었고 이 도로가 준고속 도로로 합쳤다 갈라졌다 하며 죽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12시20분 : 백봉리 Bus stop. 뒤편에 훠릴화학이 있다.
12시50분 : 백봉리 신대촌부락 Bus stop
13시07분 : 사은 Bus stop
13시20분 : 지내 Bus stop
13시30분 : 고안리 Bus stop 그 앞에있는 식당(들과 바다)에서 콩국수(\5000)로 점심 날씨는 무척더운데 Aircon도 없다. 한참있드니 일하는 아주머니가 보기 딱했든지 Air con을 틀어주었다.
14시35분 : 주평 Bus stop
14시50분 : 오방교차로
15시00분 : 고은리 거운마을 Bus stop. 청미천 직전이었다.
15시12분 : 한평 Bus stop
날씨가 몹시 덥다. 쉴곳이 별로 없다. 이곳 경기도 도로가 유난히 길가에 쉴곳이
없다. 마침 Wonder pool이란 수영장이 나타났다. 물론 수영장은 도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있지만 입구에 입석으로 된 표시석이 있고 그 뒤에 소나무 몇그루가 있어
그늘이 형성되 있어서 마치 오아시스나 만난듯 한 5분간 쉴수 있었다. 물론 그늘이
너무 얕아 큰 효과는 없었다.
15시50분 : 죽주산성 입구
15시57분 : 미륵당마을
16시05분 : 매산리 미륵입상 참배. \·1000시주. 시주함도없다.
마침 자가용을 타고 참배온 분이 있어 몇마디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야
느끼고 보니 부인이 하체 장애인이었다. 이 부처님이 용하다해서 들렀다
한다. 그분께 길을 물으니 친절히 가르쳐 줬고 나의 장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길을 물으면 그의 예에 없이 칭찬하면 그곳까지만 차로
태워 준다하여 사절하는데 한두마디를 더 해야 했다. 그분의 정중한 헤어짐
인사를 받고 다시 출발했다.
16시15분 : 그처럼 묻고 또 물어 찾아온 죽산삼거리에 도착했다. 이리가면 진천, 저리
가면 죽전이다. 물어 물어 찾아온 죽산삼거리! 너무 허무하다. 딱딱한 세면
콩크리트길.
원래 금일의 목표는 죽산삼거리(신도로상의)였지만 지금 시간이 4시 30분. 그대로 쉬어가기는 시간이 너무 아깝고 그렇다고 잘곳도 없었다. 할수없이 용설리 저수지까지로 목표수정을 할수밖에 없었다. 죽전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100M쯤 전진후 표시판 딸아작은 소로로 접어 들었다. 아스팔트만 되어있다뿐 완전히 시골길이었다. 중앙선도 없는 좁은 길이었다. 길폭이 겨우 3M나 될까 말까한 한적한 소로이다. 좌편엔 작은 개울 우측엔 이제 막 벼가 고개숙이는 들판이다. 옛날 그시절 고향내려갈때의 생각이 나고 그시절의 한국들판 기분을 다소는 느낄수 있었다. 옛날은 그의 하루종일 이런갈을 걸엇든겄같다. 벌써 올벼는 고개를 숙이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다. 옛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가다보니 조그마한 가게를 볼수 있었다. 용설저수지가 얼마 남지않았고 잘곳도 두곳이나 있다고 한다. 막걸리 한병 물한병 사들고 다시 출발.
17시30분 : 저수지 도착. 듣든바와 달리 입구에는 모텔도 식당도 없다. 호수가 상당히 큰데 저 건너편에 모텔이 하나있고 그 근처에 식당도 몇 개 있단다. 현지 노인께 물으니 약5Km가야 된단다. 몸은 피곤한데 이것 정말 야단났다. 돌아 갈레야 갈 수 없고 더가자니 피곤해서 쓸어질 지경이고 비도 약간 오다 그치다 한다. 정말 야단이다. 그러나 어쩌랴 갈데까지는 가 봐야지. 평일이고 날이궂어 낙씨꾼도 없다. 약 10분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작은 고개마루를 오르니 길가에 간단한 운동기구가 있고 좁으나마 의자 하나있는 작은 공간이 하나 나타나서 잠간 쉬기로하고 들어갔다. 마침 그때 한노인이 도착했다. 운동하러 온다는것이었다. 내가 내려가는 사유를 묻고 놀라면서 자기는 사실 68이라면서 조심해서 내려가시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다시 길을 물으니 더 가지말고 오든길 돌아서 저기 보이는 모텔로 가는것이 더 빠르도고 하면서 극구 되돌아가기를 권했다. 그래 그 말이 맞는 말 같아 되 돌아 가다가 아까 길 가르쳐준 노인께 저위에서 한분을 만났는데 다시 돌아갈아해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설명을 드리고 있는데 마침 운동을 마치고 그 분이 헐래벌떡 내려오고 있었다. 먼저 길 가르쳐준 노인이 운동하고 내려오는 노인보고 길을 가르쳐 드릴려면 똑바로 가르쳐 드려야지하며 나무래시며 나 보고 다시 올라 가라고 했다. 정말 난감했다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잘곳은 마땅찮고 망설이다가 결국 단을 내려 가보기로 했다. 설마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뭐” 이럼 심정으로. 이 번 길을 걸으며 느낀반데 시골분들이 조금가면 된다는 곳이 그분들도 차만 타고 다녀서 걸어가는 사람의 능력을 모른다. 5분 걸으면 된다는 곳이 시계를 재어봤드니 25분 걸렸다. 하여튼 앞으로는 오후 4시되면 욕심 부리지 말고 숙소를 잡아야되겠다고 굳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17시53분 : 한시라을도착. 행인은 없고 아주좁은 왕복 2차선도로. 고개를 넘어 한참을 걸어오니 나타난 마을인데 호수 끝에 운치가 좋고 음식점도 몇 개있고 저편 건너에 모텔도 하나 보였다. 물으니 한 5분 걸려 걸어갈수있다 하는데 도대체 믿을수가 없다. 모텔에 식당도 있단다. 호수 윗 가를 삥 돌아서 드디어 피곤한 몸을 쉴수있는 모텔에 도착. 왼걸 5분 걸린다는곳이 꼬박 25분 걸렷다. 앞으로 내려가면서 그분들이 얼마걸린다는 소리 알아서 들어야겠다.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렇게 반가울가? 옛날 6.25때 피난가며 숙소잡기보다 그렇게 쉽지도 않다. 모텔에 대충 짐을 내려놓고 식당에 갔다. 혼자왔다고 푸대접인 눈치. 그래도 어쩌랴 답답한놈이 샘물 파야지. 아양떨어가며 된장찌개 하나에 맥주한병시켰다. 갈증 끝에 맥주한잔 바로 꿀맛이었다.솔밭모텔 \30000. 저녁식사 \8000 식사를 마치고나니 7시 30분 날은 저문데 호수를 혼자 바라보고 있노라니 경치도 운치도 너무좋고 온갖 생강에 한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집사람께 전화로라도 좋은 경치설명하고 내년엔 우리 자동차로 관광오자고 전화를 했드니 전화안받음. 이럴때 전화안받으면 속상하고 무드 다 깨져버린다. 무드 깨는 일등 마누라. 핸드폰 있으나 마나. 죽산삼거리서 용설저수지까지는 이정표없는 시골길이었고 길을 걷는 운치가 있었다. 모텔에 들어와서 남방 내의 손수건 양말등 간단한
것들 빨아서 에어컨앞 선풍기를 잘 이용해서 늘어놓고 잤드니 그이튿닐 보니 두꺼운 양말외는 입을수 있도록 다 말랐다. 어떻게하냐 조금 얌채짓 해야지. 너무 피곤해서 좀 일찍 잠들다. 오늘 걸은길 16.5Km지만 실제로는 더 되는겄 같았다.
7.일곱째 날(9월 2일)
태풍곤파스의 위력이 대단했다. 서울은 대단히 심했지만 다행이 이곳 용설리 근방은 태풍이라 할수없을 정도의 비바람이 내렸고(새벽에 심했습) 아침엔 보슬비 보다 조금 강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6시47분 : 평소보다 조금 일찍 기상했다.
7시30분 : 모텔 출발. 비와 약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이정표도 표시판도 없는 왕복 2차선길, 그것도 고갯길을 걸어 당목방향으로
길을 재촉했다. 기상과 동시에 혈압약을 먹는 습관이 있어 약을 먹었는데 가도
가도 음식점이 없다. 가든이라고 어마어마한 간판을 써 붙이 음식점은 더러 보였
지만 그런집은 평일이라 아침할생각도 안하고 있었으며 설사 한다고 해도 1인은
받아주지도 않는 그런 집뿐이었다. 빈속에 약을 먹고는 대개 30분후에는 식사를
해야하는데 이것정말 야단났다.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혈압이 갑자기 많이 떨어져
쓸어지지나 않을가 겁이났다.
피난갈 때 아침식전에 안개낀 높은 산길을 힘겹게 올라서면 날망에 주막같은집이
나타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늘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길이 비록 아스팔트
깔린 2차선(편도 1차선)길이긴 하지만 예날엔 꽤 험하고 높은 고개일시 분명하다.
고개 정상에 현대식 주택이 들어섰다뿐 역시 외로히 한 채나 두채밖에 없었다. 옛
추억을 씹으며 그때의 생각에 젖어 약하지만 비바람 맞으며 고개를 넘어 약 2Km
(출발해서 4Km)쯤 오니 비로소 식당이 나타났다. 엄마손식당. 안동 사람이 경영 하는
구수한 식당이었다. 당목 삼거리(좌회전하면 진천, 우회전하면 안성)
8시45분 : 엄마손 식당 도착. 031-674-5477 정식을 시켰는데 가격은 \7000에 육류와 생선이 나오며 제 법 괜찮았다.
9시30분 : 비가 줄어들었다. 배낭이 비젖을 가봐 큰 비닐봉지를 이용해서 배낭뒤를 대강 덮고서 출발했다. 고마운 아주머니 평생 만날수는 없겠지만 지나는 객에게 따뜻한 말한마디지만 위안해주셔서 감 사했습니다.
9시40분 : 대은 Bus stop 비가 그치도 햋빛이 나다. 빛길에 걷기도 힘들지만 찌는
불볓더위길은 더 어려웠다. 그러나 오늘 날씨는 가랑비가 뿌렸다 햋빛이 났다 구름이 끼었다 하 니 한결 걷기가 수월했다.
10시00분 : 칠장사입구 표시판 도착. 잠간 임꺽정 생각하며.
요즘 수시로 허리가 아프다. 더구나 오후에 힘들때는 더 심하다. 틈만나면 허리 운동을 했고 가끔 진
통제도 먹으며 길을 걸었다.
10시07분 : 두교 bus stop. 이지점부터 다시 표시판 이정표가 자주나타났다. 지긋지 긋한 17번 도로와 진천행 표시판.
10시08분 : 드디어 충청북도. 수도권 경기도를 빠져나오기가 이렇게 힘들줄 몰랐다.
광혜원을 바라고 남행길 재촉
10시 28분 : 동주원 Bus stop 3거리.
10시 55분 : 만승교 4거리 도착. 금왕 음성IC방향으로좌회전해서 82번 도로딸아 길을 재촉함.
11시 30분 : 공단입구에서 빵 구입 \1400
12시 10분 : 공단삼거리 굴다리 앞 큰 다리 밑 그늘에 서 5분간 휴식. 워낙 고단하고 쉴만한곳이 없고 해서 이런데라도 쉬게 됨.
12시 15분 : 오류1리 Bus stop 82번도로로 금왕충주 방향으로 대소행.
12시 25분 : 수박연구소 이곳 대소 3거리에서 515번 국도딸아 대소로 나감.
13시15분 : 대소중학교 입구 장군식당시 된장찌개로 식사. 날은 무척 더 운데 Air-con 없슴. 찌개값 \5000.
13시50분 : 기회마을 아파트 Bus stop. 그기서 덕산방면으로 우회전.
14시25분 : 대소서 덕산가는길 2차선 도로(편도 1차선)인데 쉴곳도 편의 점도 없다
14시50분 : 폐가가 있는 길가 나무그늘에 않아 쉬면서 복약함. 나무그늘 이 형편없슴
15시05분 : 대우에스티
15시35분 : 가척 Bus stop
16시00분 : 덕산 시내 초입
덕산시내 초입 초평방향으로 가는 513번국도 모서리집에서 막걸리 쏘세지 구입\2100. 보통 당일목표지점을 다 와 가고 혹시나 막걸리 한잔쯤 먹어도 큰탈 없을지점에 도달했을때 막걸리와 제일 편한안주 한가지를 구입했다가 가는길 쉬면서 한 잔하면 땀흘린후 그렇게 갈증을 쉬원히 해결해주고 배가 든든한것은 없다. 덕산서 오늘 여행을 그만두자니 시간이 조금 남고 가자니 힘들어서 초평면사무소로 전화를 했드니 10KM밖에 안되니 지금와도 충분히 도착 할수 있다는 말도 듣고 또 길가의 노인들게 문의를 했드니 지금가도 두 번은 갈수 있다는 말을 듣고 초평면 으로 출발했다.
16시46분 : 옥동 Bus stop
16시55분 : 옥동 Bus stop지나 500M쯤 오니 괜찬은 쉼터가 나타났다. 목마른 김에 막걸리 한잔. 안주도 필요없고 잔도 변변찮고 때로는준비 도 안되어 나팔.
#내려오는 곳곳에 호화묘소이고 장소가 좋다하면 음식점(가든)이였다. 묘소로 국토가 점령되고 말것 같다. 그리고 음식점은 정말 끼니를 때 울려는 사람들의 음식점은 퍽 드물었다.
17시10분 : 옥동초교. 옥동초교 Bus stop
17시40분 : 하구 Bus stop
17시52분 : 드디어 꿈에도 그리든 초평면 경계표시판앞 도착. (여기서 면 인가가 있고
숙소가 있는곳도 멀지않겠지. 그 때의 내 생각)
18시05분 : 마두 Bus stop
18시14분 : 오갑리 표시석.
18시20분 : 영주원 Bus stop
18시40분 : 원대 Bus stop
18시59분 : 오갑 3거리(음성 진천 초평)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아직 초평면은 나타나지 않고 몸은 피곤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길에서 만난 행인께 물으면 얼마 안가면 초평이라고 하는데 도대채 초평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저기 정류소에서 기다리면 Bus온다는데 기다려도 Bus는 오지않고 날은 자꾸만 저물어 어두워지고 몸은 피곤하고 이것정말 난감했다. 지나가는 차를 보고 무조건 손을 들었어나 야속하게 쌩쌩달려 빼기만했다. 오후 4시되면 그날 여행을 마무리하기로 해놓고서는 또 욕심을 부리다가 이 곤욕을 치르는구나. 내가 봐 도 나란는 사람 정말 한심하다.
어쩔수 없다 쓸어질때 까지 걷자. 죽기아니면 까무라치기 아니냐.
20시00분 : 초평면 입구에들어섰다. 입구에서 미쳐 200M도 가지 않아 치안센터가
보였다. 내 생애 처음으로 무턱대고 파출소(치안센터 보다 파출소가 더 익숙)에 들어갔다.
그간의 설명을 하고 시골까지 걸어내려 가는 길이며 미리 면사무소에 문의하고 왔는데 정말 안내 가 엉터리드라 사전에 예기한것보다 훨씬멀어 이 고생을 한다라며 숙소안내를 무턱대고 부탁했다. 나는 전화번호도 모르니 숙소까지 갈수있는 택시라도 좀 불러달랬드니 내 신분을 확인하고서는
이곳은 택시를 부를려면 진천읍에서 불러와야한다며 차를 한잔 대접해주고 순찰차로 이 면에 하나 밖에 없는 모텔에 데려다 주었다. 그러나 그 모텔은 파출소로부터 1.5KM나 되었다. 순경의 말이 그 모텔에 식당이 딸려있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모텔에 들어가보니 식당은 휴업이란다. 기가차서. 배는 고프고. 할 수 없어 모텔 종업원께 식은밥이라도 한숟갈 주시라고 했드니 라면은 있다
한다. 라면이며 감지덕지지 그러면 짐을 호실에 갇다두고 오마하고 짐을 두고 내려왔드니 라면도 다 떨어졌단다. 정말 야단이다. 다행히 배낭에 빵이 두 개 있긴하지만 이대로는 안될겄같아 오만 인상 다 찡그리고 있었드니 종업원이 저기 불빛보이는 저곳이 식당인데 한 5분걸어면 된다고 안 내를 한다. 할수없지 않은가 많이 속아보아서 5분 된다는 곳이면 25분은 되겠구나 하고 출발할려 는데
마침 가는 트럭이 한 대 있는데 종업원이 이 손닌 저 식당까지 좀 태워주락고 부탁
해서 무사히(?) 식당까지 도착했다. 혼자오면 원래 괄시가많은게 이런식당이다. 노골적
푸대접을 받으며 맥주한잔 곁들여 저녁을 해결했다. 꿀맛 가격은 \9000.
초평모텔 205호실 가격 \30000. 043)532-6172
오전에 종로약국에서 부탁받은(E-Mail로)처방 두 개를 작성( 한처방은 방약합편이
없어 집사람께 전화로 방약합편 찾아서 불러달라해서)하고 잠을 잤다. 오늘 걸어온길
33KM. 이제까지 온길중 제일 많이 걷다.
8.팔일째(9월 3일)
8시00분 : 초평모텔 출발. 어제 투숙한 모텔이 초평서 시골내려가는 길중간에 있었다. 여기서
부터 걸으면 초평서 모텔까지는 걷지않은셈이된다. 모텔 출발해서 Bus stop나오니 마침
초평가는 Bus가 들어오고 있었다. 20분에 한 대가 온다든데 행운이라할까? 요금 \1050
특별한 요금이다 지금 그런것 생각할 겨를 없다. 그저 시간맞춰 차를 탄것만해도 너무감사
했다. 물론 말없이 \1100냈다.
8시15분 : 면 사무소 있는 용정리에 들어왔다. 파출소앞을 지나니 보이는 순경들이 없다. 그 옆 가게
에서 드링크 \5000짜리 하나 샀다. 파출소 들러기전에 위선 밥부터 먹기로 했다.
신초평가든 043)534-7427에서 된장찌개 \5000. 파출소 들어가 어제 감사했다고 인사.
어제는 당직밖에 없었는데 오늘은 업무개시시간이라 소장까지 계셨다. 감사의 인사드리고
면 사무소로 출발.
8시25분부터 9시20분까지 : 6.25사변때 이곳을 지나면서부터 보고싶었든 미선나무를 이번에는 꼭
보리라 마음먹고 면사무소 가기전에 길을 물었드니 생각보다 쉽게 바로 도로변에 미선나무
자생지를 바로옆 오토바이 가게를 하는 사장의 친절한 설명과 직접 나무있는데까지 가서
안내해주는 친절을 받았다. 많은 사람이 미선나무 보러 오기 때문에 퍽 귀찮을텐데 정말
너무 감사햇다. 현장에 가보니 미선나무 자생지라는 작은 비석도 서 있었다. 여러장의 사진
도 찍었다. 원래 일정때 일본놈들이 처음 발견할적에는 지구상에 유일하게 초평면 용정리에
한나무밖에 없다고 교과서 까지올려놓았고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중학입시준비할적에는
미선나무는 이세상에 충청북도진천군초평면용정리 한곳에 단 한 나무만있다고 배웠다.
그런데 현재는 괴산지구에 재배를 하고 있고 초평면에도 여기저기몇곳에 자생을 하고
있다한다. 처음 일본학자들이 발견한곳은 그 오토바이 가게에서 약 200M 떨어진 곳 산
입구였다합니다. 현재도 그곳에 표시가 있으나 현재나무는 없답니다. 미선나무가 알려
지면서 초창기는 남획하면 벌금을 물렸으나 현재는 다소 수자가 늘어나서 별로단속도 하지
않을뿐 아니라 남획하는자도 극히 드물다 합니다. 나무키는 약 1M정도인데 덤불을 형성
하는 잡초같았습니다. 그리고 부처손같은 열매집이 달려있는것이 특징이라고 그 분도 설명
을 해 주셨고 내가봐도 그 점이 특이했습니다. 물론 미선나무가 희귀적 가치가 있지 약효가
있다거나 보기좋은 관상수는 아닌것같았습니다. 작년에는 충북대 교수팀들이 현장을 방문
해서 더 연구하고 보존해야겠다고 관심을 갖고 있다합니다.
9시20분 : 면사무소 방문해서 어제 길을 전화상으로 안내한분을 물었으나 찾을수가 없었습니다. 어제
작성한 처방만 직원께 부탁을 해서 종로약국으로 Fax로 보내고 면 사무소를 출발했습니다.
초평면은 6.25사변때나 지금이나 별로 발전한것이 없다는 주위의 말과같이 아주 작은 면.
9시40분 : 지진 3거리 도착. 마침 보슬비가 내려 찰영하기가 힘들었다.
9시55분 : 충용사격장입구도착. 사격장 입구에 수양버들 한그루가 서 있고 그 밑에는 작은 도랑물이
흐러고 있었다. 내려가서 잠간 쉬여 가고 싶지만 지금 이시각은 출발하고 얼마되지도
않았을뿐만아니라 내려가서 발을 담굴려면 신발벗고 어쩌고 수속이 복잡하고 그렇다고
딱 쉬기좋게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것도 아니었다 잠간이라도 쉴려면 도로에서 풀을헤치고
내려가서 잠시라도 않을 돌도주워와야하고 신발풀고 양말벗고 어쩌고 하자면 그일도 보통
이 아니어서 어지간한곳은 쉬어갈수도 없다. 지금 심정은 옛날에는 이런곳을 보면 농군들이
풀을많이베어 내려가기도 힘들지 않지만 주위에 씽씽 달리는 차도없어 잠간쉬어가기가
좋았고 오늘 내가 이런곳을 보니 옛날 같으면 이런곳에서 지어온 밥을 먹거나 잠간 쉬어
갔을것같아 옛생각이 절로 났다. 그때 우리가 내려갈 때는 저녁해지기전에 어느동리에
들어가 내일아침까지 지어서 저녁먹고 나머지는 싸들고 (솥등 취사도구도)오다가 아침 10시
쯤 식사를 했다. 반찬타령은 물론 없고. 한참이나 옛 생갈에 잠겨서---.
사실 이 장소는 부대앞이라 쉬어갈 장소는 아니지만 그때생각을 자아내기는 좋았다.
내려가다가 부대앞의 다른 경치물을 찍었는데 초병이 눈을 날카롭게 뜨고 왜 사진째느냐고
체포할려하는것 같아 그 자리를 빨리 피했다. 초병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알수없지만 얼마나
겁이났든지 그 다음부터는 부대앞에서는 아무리 경치좋은 것들이 있어도 사진찍는건 금물
초평서 증평가는 길도 편도 1차선이며 서하보다는 평야지대여서 새로난 도로여서인지 모르
지만 가로수가 드물었다.
10시20분 : 어제 잠을 잤든 비길미 초평모텔앞
10시25분 : 서낭골 Bus stop. 조금더 가니 초평저수지가 나타났다. 저수지옆 천막친 길가폐가앞의
평상에서 잠간 쉬다. 평일이어서 좌대에 사람들은 한사람도 없고 주위에는 휴일을 기다리는
쉬고있는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비가 보슬 복슬 내려 찰영불가
10시40분 : 비가 그쳐 초평저수지 찰영했슴.
10시50분 : 두타사 보현사 안내판 보임. 증평까지 11KM
11시00분 : 두타산입구 초평저수지변 붕어마을 Bus stop. 34번 국도
11시15분 : 화산 3거리
11시20분 : 오경 Bus stop
11시44분 : 37보병사단 입구
12시30분 : 금성 Bus stop
13시10분 : 길옆 작은 시내서(작은 도랑물, 산에서 내려와서 수량은 적지만 아주 깨끗했슴) 탁족.
아이구 시원해라. 일어서기 싫었다.
13시28분 : 연탄2리 탑선리 Bus stop 정말 오랬만에 길가에 가게도 있고 정자나무도있는 곳이었다
마침 할머니 두분이 계서서 평상에 짐을 내려놓고 예기하며 사이다를(\2500) 사서 대접했 다. 나도 막걸리 한잔. 그런데 시골가게에 오래된 막걸리였다 윗물만 딸아먹었다. 나의 행군 내력 6.25때 예기들 하다가 친절히 아르켜주는 길 안내를 듣고 하직인사.
13시55분 : 증평 오창 괴산 초평 사거리
14시05분 : 연탄3리 Bus stop
14시15분 : 증평군 의회
14시55분 : 부민냉면전문점식당에서 냉면으로 식사. \5000. 043)838-7579
15시35분 : 서울행 Bus terminal도착 16시20분 증평발 서울행. 서울에 18시쯤 도착.
나는 여름에는 찬음식 특히 냉면을 먹으면 배가 좋지못한데 워낙더워서 증평서 냉면을
먹은 탓으로 증평 터미널에서 서울 도착시 까지 배가 편치못했다.
오늘 초평서 증평까지 걸은 거리는 14KM입니다
9. 구일째(9월 12일 일요일) 증평서 미원까지. 25.1KM
8시 50분 : 동서울서 증평행 Bus 승차
10시 25분 : 증평도착. 미원행 시작.
10시 35분 : 빵 구입 \800.
가랑비가 나리다. 미원가는길을 물었드니 초정으로 가면 많이 두르니까 중간에서 율리
저수지로 해서 가면 많이 지름길의 혜택을 볼것이라 했다. 일단 540번 국도를 따라 초정
방향으로 걸어갔다. 비가 제법많이 와서 걷기에 불편하고 어쩨 스글펐다.
11시 15분 : 충용아파트 Bus stop
11시 35분 : 남하 2리 표시판
11시 55분 : 덕상2리 Bus stop(까치골 입구)
12시 15분 : 기원사 입구(안내판 있슴) 비는 그치고 주로 구름 낀 날씨 간간히 햇빛이 났다. 걷기는
비교적 좋은 날씨다.
12시 35분 : 덕상 1 리 Bus stop(연정)
12시 43분 : 죽리 2리 Bus stop(원평마을 앞)(원래 죽 1 리, 죽 2 리, 라고 부르는게 원칙인데
죽 2 리는 “죽이리”로 발음이 되니 “죽 2 리”라 하지 않고 “죽리 2리”라 한듯. 원래
일죽면 이죽면도 원래는 “죽일면” “죽이면”이였는데 명칭을 고쳤다고 그 지방출신자
에께 들은바 있다.
12시 50분 : 길옆 논에서 일하시는 농부에게 식당이 어디쯤 있느냐고 물었드니 한 30분쯤 가면 주유 소가 있는데 그기서 식사도 하고 매점도 미원까지 가는데 없으니 그기서 필요한것들
준비하라 하면서 친절히 길을 가르쳐 주었다. 예날엔 10리 내지 20리를 가면 주막개념
의 집이 있었는데 요즘은 자동차로 달리니까 제법 큰 곳 절어도 면 소재지 쯤 되는곳
이라야 매점이나 식당을 찾을수가 있다. 물론 길에서 제법 떨어진(약 1~2Km) 마을을
찾아 가면 매점정도는 있을지 몰라도 길옆엔 주유소외에는 파는곳을 찾기는 힘들다.
교통문제 자동차 문화가 바뀌면서 많은것이 바뀌었음을 알수 있다. 길을 가면서 그 옛날
6.25사변때와 달리 중간 중간 10~20리 사이에 먹을곳이나 잘곳은 없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미리 길을 걷기전에 중간에 어디쯤 점심식사를 할곳이 있는지 오늘 가는
목젖지에는 숙박시설이 있는지를 꼭 확인해야 한다. 면 단위에 숙박시설이 없는곳도 종종
잇어 애를 먹기도 했다.
13시 00분 : 점심 식사. 다정식당. 043)834-0093 백반 \5,000 그 농부 말씀대로 미원면소재지에
도착할 때 까지 식당과 매점이 없었다.
13시 35분 : 율리 3거리. 여기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초정으로 갈수있으며 길을 많이 우회하게 된다.
13시 40분 : 율리 3거리에서 좌측으로 길을 잡으니 율리 저수지로 가는길인데 길 입구에 꽤 유명한
관광지인 좌구산을 들어가는 “좌구산제일문”이란 큰 문을 통과하게 됬다.
#전번 초평면 들어갈적에 혼이 나서 율리 3거리에서 어느 아주머니를 붙들고 미원가는길과 시간들을
자세히 물었다. 저 앞에 보이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면서 옛날엔 소로였는데 요즘 편도1차 왕복 2차선
도로로 확장을 했는데 어쨌든 보이는 저 산을 넘어야 하는데 오늘 들어가는데는 문제가 없을것이라
했다. 그렇지만 그 아주머지도 걸어서 그길을 넘어보지 않았다며 수월하게 말했다. 넘어야 된다는
산이 만만치 않은 높은산이다. 급하고 위급한일이 생기면 택시를 부르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섰다.
오후 2시가 넘는 시간이니 하루중 제일 더운 시간이다. 경사가 걸으면서도 느낄정도로 꽤 높은 고개
이다. 60령 고개나 그의 맛 먹는 고개일듯하다. 옛날 이길을 높고 험한길을 넘었을 때가 어렴풋이
떠 올랐다. 이길을 새벽에 걸어 넘었는데 정말 도적떼라도 만날듯하고 숲도 많이 욱어졌든걸로 기억
나며 정상에서 그야말로 딱 한 채있는 주막(?)에 들어가 쉬어간 기억이 난다. 오늘 나는 이길을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잘 딱인 길을 온갖생각에 잠기며 걸어가고 있는것이다. 몹시도 덥다.
14시 00분 : 율리저수지가 보이기 시작.
15시 05분 : 드디어 고개 정상에 도다르다. 증평과 청원군 미원면 경계에 도달한것이다. 그 정상에 오니
정상아주 경치좋은곳에 좌구정(座龜亭)이란 정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 올라 몇장사진
찍었다. 율리저수지가 저아래로 보이고 경치가 너무 좋았다. 고개를 넘어 드디어 미원땅
으로 들어섰다.
15시 15분 : 종암 2 리 Bus stop
15시 40분 : 길가 작은느티나무아래서 쉬다. 주위의 논밭에서는 농부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고 드러
몇분은 기이한듯 내 행색을 보기도 했다.
15시 57분 : 종암 3거리. 좌측으로 가면 보은, 미원이고 우측으로 가면 청주, 내수, 초정약수다. 510번
지방도로이다.
16시 20분 : 용곡 저수지가 보이다.
#구름낀 걷기 좋은날이다. 여기저기 벌초하는 제초기 소리가 들리고 간혹 버섯따는 사람들이 보인다.
처음으로 발과 어깨가 아프고 요통도 조금 있다. 요통은 어제 Mobic을 먹었드니 견딜만 하다.
16시 50분 : 길옆에 차에 치여죽은 뱀을 발견. 섬칫놀랬다. 17시에도 죽은뱀을 또 발견했다.
17시 04분 : 수산 2 리 Bus stop
17시 11분 : 여기서 미원까지 2.5Km이다. 수산 1리는 그곳 고장 본토배기 이름은 “너더리”이다.
동리입구 큰돌에 수산 1리(너더리)라 새겨놓았다. 그 비석옆에 내려오면서 접한쉼터중
가장 쉼터같은 쉼터를 만났다. 제법 큰 느티나누와 작은 정자가 있고 냉장고까지 비치되어
있다. 갈길 바쁜것도 아닌데 5분정도 쉬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
#너더리라는 동리가 있는가하면 죽일리 죽이리가 있고 율리저수지앞의 율리는 옛 이름이 즉 내려오며
불리는 이름은 “밤티”이다.
17시 20분 : 남양사 앞. 남양홍씨 시조사우(始祖祠宇)이다. 아주 호화롭게 지어놓았다. 집안의 과시겠지. 저는 저런것 별로 좋게보지 않는다.
18시 20분 : 면 사무소 도착.
사무소앞 슈퍼에 들어가 막걸리 한병사서 나팔. \1,500.
18시 30분 : 숙소를 찾아가면서 파출소를 찾았다. 옛날에 우리가 내려가면서 형님께서 무식한 인민군에
부역하는 정규복장도 입지않은 내무서직원에게 붙들려 의용군으로 끌려갈번했든 좋지않은
추억이 깃든곳이다. 유심히 그 앞을 지나며 옛 생각을 했다.
18시 55분 : 숙소찾기는 역시 힘들다. 두곳을 갔는데 한곳은 원룸으로 개조. 한곳은 휴업. 난감했다.
택시 기사들게 물어서 겨우 숙소를 잡음. \30,000. 양지모텔 297-8829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19시 20분 : 마침 E-mail을 좀 봐야할일이 있어 모텔을 나와 Mail도 보고 식사도 할겸 무작저 면사무소 쪽을 가다가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할매올갱이”라는 시골식당인데(대표 유영식 미원리 430-22 043)297-7118) 그집 주인도 14후퇴때
남쪽으로 내려오며 오만고생 다했단다. 나도 지근의 행군이야기를 자연히 하게되어 식사를
하며 죽이 맞어 이런 저런 얘기하고 내가 맥주를 사서 술도한잔 나누었다. 그런데 이 집에서
먹은 올갱이국이 정말 맛있었다. 알고 봣드니 주인아저씨가 직접 잡은 올갱이라한다. 이곳
미원에 유난히 올갱이국 집이 많아서 알아봤드니 이곳 저수지 물을 수시로 빼는데 그때
올갱이를 잡으러 가며 무척 많이 잡을 수 있고 그것을 냉장고에 저장해두었다가 사용하는데
특히 이집주인은 많이잡으며 거의 한가마니정도를 잡는다한다 그리고 시간날적에는 산에가서
직접 버섯등을 따와서 반찬으로 내어놓으니 맛이좋고 식당의 맛이 선전되는듯했다.
올갱이 국 맥주해서 저녁을 행군하고 처음으로 제일 맛있게 먹고 \9,000 E-mail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드니 이미 숙직실문도 닫혀있어서 할수없이 PC방에 들러서 mail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PC방을 방문해 보았다. 하는법을 몰라 그곳 아가씨께 용법을
물어서 목적을 달성했다. 숙소로 돌아와서 회답할 자료(처방)을 작성하고 잠들었다.
PC방 대그 \1,000.
10. 열흘째(9월 13. 월요일). 미원서 보은까지.24.5Km
7시 30분 : 기상. 견통과 요통 때문에 걱정이다. 부(婦)가 안다면 걱정할거야.
8시 30분 : 어제저녁 먹든 원조올갱이집에서 올갱이국을 아침. \6.000.
9시 00분 : 우체국 문 열자마자 어제 작성한 한약처방을 Fax로 보내고 재산세(Mesa)납부 \78,000.
9시 20분 : 슈퍼에서 빵(\700) 구입하고 미원 3거리 출발.
9시 42분 : 성대리 Bus stop(감천).
9시 44분 : 성대리 Bus stop에서 500M 전진하니 보은까지 24Km 간판 보임.
10시 04분 : 성대 2구 Bus stop 보은까지 23Km 간판 보임.
날씨는 햋빛 구름 교대로 나타남.
10시 06분 : 운암 2리(청석마을) 어깨 허리 아파서 맨손체조 했다.
10시 37분 : 운암 Bus stop(창대주유소 앞). 선들 바람이 불어 좀 견딜만 하다.
10시 46분 : 옥화 자연휴양림 입구.
10시 59분 : 드디어 보은군 간판 보이다. 청원군 미원면과 보은군 내북면 경계에 도달한것이다.
11시 07분 : 보은 20Km 영동 67Km 표시판이 보이다.
11시 20분 : 성암 3거리. 우측으로 가면 보은 영동이요 좌측으로 가면 속리산 산외.
11시 32분 : 보은까지 18Km 이정표 보임. 미원 보은간은 숙소와 식당이 더러 더러 보인다. 여전히
매점은 보기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당이 가든같은 곳으로 평일엔 영업을 잘 하지
않을뿐 아니라 역시 1인손님은 푸대접이라 사실상 없는거나 진배없었다.
11시 45분 : 내북면 소재지 도착. 청리3거리 나타나다. 왼쪽으로 가면 산외, 직진하면 보은이다.
내북면 소재지는 서하면 소재지보다는 약간 크지만 안의면보다는 작다. 그기서 우체국 직원을
만나서 가는길과 식당을 묻다. 가는길에 역시 주유소와 매점을 하는 작은 식당이 하나 있을
뿐이라고 친절히 가르켜 주었다.
12시 02분 : 화전리 Bus stop. 내북중학교 입구.
#곳곳에 호화분묘로 강산이 분묘로 장식되어있다. 부러워할것이 못된다.
12시 07분 : 한화 3거리. 보은까지 16Km.
12시 18분 : 성티리 Bus stop
12시 40분 : 내북휴계소 식당. 우체국 직원이 소개한 그 식당이다. 백반 \4,000. 물 \500.
주위에 공사장 인부들의 식사를 해 주는듯하다.
13시 15분 : 대안 3거리. 좌로가면 산외(575번 지방도로), 직진하면 영동 보은(19번 일반국도).
13시 29분 : 아곡리 Bus stop
13시 37분 : 용수 3거리. 직진하면 보은 우회전하면 수한. 상궁저수지 575번 지방도로.
13시 58분 : 이원 Bus stop
14시 25분 : 이원리 매점에 들어가 맥주한병을 사서 목을 축이고(막걸리를 먹을랬드니 이곳 막걸리병은
대단히 큰병 뿐이다.) 나이 지긋한 주인과 옛날 예기도 나누고 나의 여행예기도 하다가 다시
출발. 조금 가다가 고추밭에 고추가 너무 잘되어 빨갛게 익은 고추들이 너무 아름다웠다.
카메라에 담아 두었다.
14시 54분 : 보은 9Km 표시판
15시 06분 : 두평리 Bus stop.
15시 12분 : 보은까지 8Km 팻말 보임.
15시 26분 : 보은까지 7 Km 팻말 보임.
15시 29분 : 서지리 Bus stop 보은 거의 다 와 가니 여기서부터 은행나무 가로수가 아주 잘 되어 있다.
15시 40분 : 능성구씨 신암공묘도비(綾城具氏 新菴公墓道碑)근처의 그늘이 약간 있어서 피곤한 몸을 조금
쉬였다. 보은까지 6Km. 코스모스와 은행나무가 가로 양옆에 늘어서 조화를 이루며 너무 좋다.
15시 54분 : 봉계 2교차로.
16시 00분 : 국민방위군 의용경찰 전적기념탑.
16시 07분 ; 옛날 우리가 고향을 내려갈적에는 조금 큰도시는 폭격으로 초토화 되 있었다. 보은시내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행기 습격이 무서워 큰도시는 조금 돌드리도 우회해서 내려갔다. 보은
시내도 왼쪽으로 폐허가 된 모습을 보며 내려갔다. 그래서 이번에도 바로 들어가는 길을 피해
도시를 왼쪽으로 보면서 마침 양편에 벗나부가 서있고 폭은 3M쯤 되는길이 있어 그길로 해서
걸었다. 물어보고 확인을 하고 걸을래도 물어볼 사람이 행인이 도대체 없다. 뜻박에도 아까
낮에 내북면에서 만난 우체국 배달직원을 또 그곳에서 만났다. 그분도 반가워 하면서 내게
뭐라도 사들여야 하는데 이겄밖에 없다면서 가시다가 피곤하면 드시라고 사탕을 몇 개 주었다.
얼마나 고마운지. 나는 내가 사 들여야 할텐데 무슨 말씀을 하느냐고 인사는 했지만 너무 고마
웠다. 그분한테 옛날 우회 도로를 물었드니 지금은 그 도로는 사용하지 않아서 갈 수 없고 아까
온 길은 당국에서 만든 산책도로라 한다. 아쉽지만 할수없다. 너무고마운 그분의 성씨는 길씨다.
16시 25분 : 학림 2리 Bus stop 보은까지 4Km 표시판
16시 35분 : 산성2구 Bus stop.
16시 50분 : 중동리 Bus stop.
17시 03분 : 강산리 Bus stop.
17시 20분 : 금강 장례식장.
17시 40분 : 어디나 숙소 찾기는 힘들다. 몇사람께 물어 겨우 숙소를 찾았다. 숙소가 보이느곳 까지 와서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 잠간 쉬다가 숙소로 찾아 들어갔다. 네거리에 신호등도 없고 교통량은
제법많다. 신호가 다 죽어 교통순경을 보고 나 건너가도 되냐고 했드니 숙소앞 건널목까지
안내해주었다. 해는 아직 지지않음.
18시 00분 : 신흥장 투숙. \30,000. 숙소는 대단히 불친절하고 시설도 나뻣다.
18시 30분 : 물어 물어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다. 맥주한잔 곁들어서. \8,000. 식당이름 가미정
034)543-4445
11.열 하루째(9월 14일 화요일) 보은서 청산까지. 24.4Km
06시 50분 : 기상
07시 40분 : 가미정서 아침식사. 콩나물 해장국 \5,000. 가미정 주인이 외가가 청산이어서 그곳을 잘
아는데 그곳까지는 오늘 빨리 들어갈수 있다고 했다. 이제 현지인의 말은 안 듣기로 했다.
그저 길 만 물어볼 따름이다.
08시 15분 : 보은롯데 슈퍼에서 물과 빵을 준비하고(\1,900) 청산을 향해 출발
08시 25분 : 보은 농협앞.
08시 50분 : 수정리 앞
08시 55분 : 여기도 죽전 3거리. 속리산 영동 보은
09시 02분 : 한국레미콘 보은시내 막 벗어난 곳에 한국 레미콘이 있고 여기서부터 약 4Km정도 곧을길.
날씨는 구름이 끼어 걷기좋다.
09시 07분 : 금굴리 청록장례식장
09시 15분 : 금굴리 Bus stop
09시 25분 ; 금곡 1리 Bus stop. 옛 이름 쇠푸니. 웃기는 이름이다.
#저녁에 모텔에 들어가 빨래를 해서 선풍기 앞에 각도를 잘 조절해서 건조시키면 두꺼운 양말까지
잘 건조되어 그 다음날 착용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물론 다림질은 사치중의 사치니까 생각도
못하고. 처음엔 이 요령을 몰라 냄새나는 빨래를 지고 다니니 무겁고 불결했다. 허리 등 옆꾸리가
아파서 리리스를 복용했드니 약간 위장장애가 있는듯 했다.
09시 35분 : 금굴 교차로. 좌로가면 괴산 속리산이요 우로가면 영동 보은 IC이다. 19번 도로가 왜 이렇게
길가? 전번엔 17번 도로와 진천이란 글자가 진저리 나게 길고 멀드니.
09시 52분 : 금굴2구 Bus stop. 앞은 6차 도로가 있고 보은 IC와 영동 IC가 앞둔 장소이니 교통량이 증가
하는듯 하다.
10시 05분 : 삼승면 표시가 나오고 송죽교가 나왔다.
10시 14분 : 삼승면 들어서니 무주표시판이 나온다. 어지간히 내려온 모양이다. 무주까지 68Km. 앞으로 갈
머나 먼 길이다.
10시 28분 : 우진리 Bus stop.
10시 50분 : 우진리앞 Bus stop. 않을곳은 없지만 과수원 옆 그늘이 좋아 선채로 잠시 쉬었다.
11시 04분 : 상가리 Bus stop.
11시 19분 : 탄금 2 Bus stop.
11시 36분 : 오늘의 목적지 청산이란 글자가 표시판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갑다. 여기서 다시 3거리.
직진하면 옥천 원남 좌회전하면 영동 영동 IC
11시 40분 : 길을 가다 보니 길 양측이 과수원이다 사과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태풍
으로 낙과가 많이 보인다. 한 10M 지나치다 뒤돌아서서 과수원 길 건너편에 있는
판매처에 들러 목이 마른데 사과 하나만 파실수는 없는지요 하고 물었드니 아이고 마음대로
잡수고 가십시오. 자연히 내가 과거 피난했든 이길을 서울서 여기까지 걷고 있다는둥 예기가
되었다. 그 아주머니 말씀이 우리가 여기 있으니까 가끔 순례하는 학생들 만나는데 몇 십명씩
와도 그냥 드립니다 하면서 시원한 물도 좀 담다가고 커피도 들고 가라며 사과를 깍아주고
4~5개를 싸주고 밥도 몇 개 넣어주신다. 정말 너무 감사했다. 그 곳에서 그 아주머니가 깍아
주는 사과하나를 먹었드니 갈증도 가시고 배도 벙긋해졌다. 고맙기 이를데가 없다. 고마운
나머지 우리도 추석에 사과가 필요할것같아서 그곳에서 선뜻 사과한상자를 샀다. 택배로 16일
전에 들어갈수 있도록 배달 해주겠다 했다. 고맙기도 하지만 그 아주머니 장사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어쨌든 기분좋게 그 과수원을 출발했다. 복규네 과수원 공장주 김명규 보은군 삼승 면 서원리 146-7 043)542-6773. 사과값은 \30,000.
12시 20분 : 능월리 3거리. 좌로가면 영동, 영동 IC(19번 도로), 우로가면 상주, 원남리(25번 도로)
12시 25분 : 능월리 3거리 지나자 마자 옥천군 청성면 나타나고 망월리 Bus stop.
12시 40분 : 시골가든 도가니탕으로 점심. \7,000. 043)542-6557
13시 30분 : 능월리 Bus stop.
13시 43분 : 내도곡 Bus stop.
14시 00분 : 도곡 Bus stop. 등이 몹시 아프다.
14시 05분 : 귀곡 Bus stop. 청성주유소 앞
14시 10분 : 신그령 휴게소
14시 47분 : 석성리 Bus stop. 폐교된 청성초교 화성분교가 처량히 자리잡고 있다. 졸업생들은 얼마나
서글플가! 교문바로앞이 그늘져 있어 들어가서 잠시 쉬었다. 사람그림자라곤 볼수도 없다.
15시 01분 : 화동 bus stop
15시 29분 : 장연 Bus stop
15시 45분 : 청성면이 오른쪽으로 보이는 고개에 충혼탑이 있어 참배하고 찰영.
#옛날 6.25사변때는 지금 내가 걸어보니 참 많이 걸었다. 내려오면 통계를 내니 지금의 내 속도는
1시간 반에 4Km를 걷고 있는 셈이다. 보통 1시간에 4Km인데. 그래서 6.25때는 하루평균 70리를
걸었는데 지금은 하루 60리정도밖에 걷지 못하겠다.
16시 15분 : 청성 Bus stop
16시 16분 : 드디어 청산면 표시판이 나타나다. 요즘 한창 인기절정인 제빵왕 김탁구의 무대 청산면이다.
16시 30분 : 날씨가 무척 흐리다. 하서리 Bus stop(서원이 있다)
16시 58분 : 하서 Bus stop.
17시 40분 : 목화모텔 투숙 733-4355-6 \30,000. 모텔에서 식당을 물으니 모텔에 딸린 식당이 잘한다
해서 갔드니 주인여자가 대구 여자인데 한 55살 정도 되었고 몹시도 불 친절하고 손님도 없고
음식도 상하지 않았나 의심될정도였다. 그러나 보조하는 할머니가 많이 먹으라면서 고기도 더
갇다주었다. 주인 처사에 못마땅해 하면서 일을 돕고 있었고 주인 여자는 할머니를 몹시
험하게 다루고 있었다. 맥주를 너무 목이 말라 2병을 마셨다. 저녁밥값 \11,000.
12. 열 이틀째(9월15일 수요일) 청산서 영동까지 23Km
07시 00분 : 기상
08시 30분 : 명동칼국수 0430733-7865 선지국 \5,000 으로 아침식사해결. 목화호텔 아래식당은
어제 저녁에 아침7시부터 영업한다드니 내가 들러니까 아직 준비가 되지않았다고 해서
나와서 세집째 방문해서 겨우 아침식사하는 집을 찾아서 식사를 할수 있었다. 그것도
내가 지금 이길을 피란시 걸었든 길이고 60년만에 다시 걷는다고 사정을 듣고는 그집
주인아주머니가 나는 아침을 이렇게 더구나 혼자에게 해주지 않는데 특별히 해 준다고
했다.
08시 50분 : 어제 저녁에 약국으로부터 받은 E-mail을 봐야할텐데 볼곳이 없어 고민하다가 농협에가서
사정으로 여행중인데 급한 mail을 받았는데 볼수있는 PC방도 없어 할수없이 신세를 진다고
사정했드니 기꺼이 부탁을 들어 주었다. 모닝커피까지 대접받으며.청산농업협동조합 박영곤
전무님 이 편의를 봐 주셨다. 043)732-8009-10
09시 10분 : 청산 삼거리(“칠보단장 청산에 살리라”라고 쓴 큰 비석이 서 있었다.
09시 25분 : 판수 Bus stop. 영동IC까지 8Km, 영동까지 21Km이다. 요통약 복용
09시 43분 : 목동 Bus stop 그늘이 좋았다.
10시 15분 : 고개마루 조금 못 미쳐 그늘진곳이 있어 잠간 쉬다. 청산떠나 4Km지점이다.
10시 26분 : 드디어 영동군. 고갯마루가 영동군용산면과 옥천군 청산면과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내리막 길이었다.
10시 42분 : 무주 44Km, 영동 IC 4Km표시 팻말이 나타났다. 오늘은 햇빛이 나서 힘들다.
10시 49분 : 법화 Bus stop.
11시 09분 : 매남 4거리. 좌로가면 514본 도로로서 황간이고 우로가면 역시 514번 도로이며
심천으로 가며 직진하면 19번 도로로서 영동과 영동 IC로 간다. 뒤로가면 청산이고.
#요즘 날씨가 한낮에 더우면 29도이고 보통 27도이다.
11시 14분 : 매남동 Bus stop. 가도가도 끝이 없는 지긋지긋한 17번과 19번도로.
11시 23분 : 마금 보건진료소. 어제 오후부터 복규네과수원에서 얻은 사과를 배낭에 넣지않고 검정
비닐봉지에 넣어서 들고왔는데 오늘은 어제저녁 투숙한 모텔에서 주는 드링크 2병까지
합해서 들고 오다가 수시로 먹으며 걸었다. 배낭에 넣으면 허리가 더 아픈것 같아 무게를
분산할려고 손에 들고 행군을 했다.
#요즘 걷는 속도가 1Km에 약 20분 걸렸다. 6.25때보다 느리다.
11시 40분 : 상용 3거리. 직진하면 19번 도로로서 영동, 영동IC이고 우회전하면 514번 도로인 심천행.
11시 51분 : 상용4거리. 좌회전하면 영동IC, 직진하면 황간, 용산(514번 도로), 우회전 하면 영동, 무주이다
#입은 말라도 큰 갈증이 없는걸 보면 이(裏)는 냉한 체질인가 보다.
12시 21분 : 신항 1리 Bus stop
13시 05분 : 율리 교차로. 직진하면 영동 무주, 우회전하면 율리, 우회전하다가 영동 무주가는 길 아래로
좌회전해서 가면 황간 용산(514번 도로)이다.
13시 07분 : 율리 Bus stop
13시 45분 : 전주동 Bus stop
14시 00분 : 송천교 가기 전 오른쪽 길에서 약 30M 떨어진곳에 박달가든이 있었다. 식당을 들어서니 혼자
인것을 확인하고 반기는 기색이 없다. 1인은 도가니탕밖에는 안된다 한다. 나온 도가니탕을
대하니 얼마나 찾는 손님이 없었는지 고우고 또 고와서 도가니가 허물허물하다. 혹시 상하지 않았을가 염려가 됬지만 먹지 않을수 없었다. 값은 \10,000. 이정표를 보니 영도이 아직
7.5Km남았다.
14시 35분 : 송천교 Bus stop
14시 55분 : 영동 6Km 팻말
15시 12분 : 비탄 Bus stop.
15시 23분 : 용산면과 영동읍 경계.
15시 31분 : 영동 대학교.
15시 36분 : 영동대 Bus stop
15시 59분 : 설계리(어미실) Bus stop.
16시 20분경: 경부선 선로를 지났슬것이다. 경부선 선로를 모르고 지냈다. 옛날 60년전에 경부선철로는
기총소사가 심해서 대단히 위험해서 철길은 하여튼 딱 한번만 건너자하고 작전을 짰기 때문에 약간
둘러 가드래도 경부선을 피해서 지금 내가 걸어온 길을 택했든 것이며 건너게 된 딱 한곳의 철길을
그만 모르고 지나친 것이다. 9월 16일은 허리가 아프기 때문에 오전만 걸어서 영동과 무주 중간 지점
까지만 행군계획을 잡고서 16일 무주를 향해 걷든중 쉬고 있든 트럭 기사에게 길을 묻다가 내가 그
주요한 기차길 다리밑을 놓지고 말았다는것을 알았다. 원래 계획이 무주가는 중간쯤에서 영동으로
돌아 가기로 했기 때문에 영동으로 돌아와서 15일 16시 20분경 지났든 철로밑을 찾게 되었다.
일단 영동역에와서 청산서 내려오는길과 영동역을 경부선이 서로 만나며 조그만 굴다리를 선로가
지나는 곳을 물어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역에는 없었다. 마침 역전에 손님이 없어 주-ㄱ 늘어서있는
택시 기사에게 이길을 물으니 옆에 있는 기사가 어디라고 설명을 해주고 그 기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를 타고(\6,000) 그 지점을 갔다. 그 기사가 60년 전에 청산방면에서 내려왔다면 그때나 지금이 나 이곳을 빼고는 길이 없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주위를 살펴도 달리 다른 길은 없었 다. 청산서내려오는 현재의 아스팔트길이 60년전에 우리가 빠져 나갔든 철로밑 그 지점 약 60M앞(이 지점을 A지점이라 하자)에서 좌로 약 70M정도 구부러 져서(B지점이라 하자) 철길밑을지나 빠져나가 서 영동 시내로 들어 갔다. 60년전엔 A지점에서 좌로 구불어 지지 않고 곧 바로 좁은 철길밑으로 작 은 농로비슷한 소로가 있었다. 그때 우리는 굴다리 약 200M정도 앞에서 망을 보다가 비행기가 뜸한 틈을 타서 죽을동살동 뛰어서 다리밑을 통과했다. 가다 보니 아주 얕으막한 산이 나타나고 소나무가 듬성 듬성 서 있었다. 그때서야 뒤를 돌아보니 선로에서 적어도 3-400M는 되는 지점까지 헐레벌떡 달려왔든 것입니다. 아주 안심되지는 않아도 조금 숨을 고르다가 다시 안전지대까지 달려갔었습니다. 비로서 어머니께서는 약을 내어서 잡수셨습니다. 마침 작은 샘이 있드군요. 그때는 A지점이나 A지점 을 넘어 철로 건너편도 전답으로 되어있든걸로 기억됩니다. 지금 다시 살펴봤드니 A지점앞의 굴다리 는 지금은 길로 되 있는데 차 두 대가 겨우 지나가고 양옆으로 좁은 보도가 있었습니다. 아주 좁은 굴 다리였습다 . 예날에는 이 정도의 굴 다리면 주 통로가 될수 있었지만 지금은 이 A지점은 현재의
교통량을 소화할 주 통로가 될수 없기 때문에 A지점에서 좌로 구불어저 폭이 넓은 B지점을 택해서 길 을 내게 된것일겁니다.A지점앞 굴다리는 좁은차도와 좁은 보도가 있을 따름입니다. 지금도 일방 통행만 하고 있드군요. B지점앞의 굴다리는 2차선 도로와 넉넉한 사람보도를 설치할수 있는넓이였습니다.
17시 00분 : 목화 모텔 투숙(\30,000. 043)743-1365-6) 종업원이 내 여행성격을 듣고는 너무 친절히 잘
해 주었다.
18시 25분 : 신정골뼈해장국(745-8977)에서 얼큰이해장국을 맛있게 먹었다.맥주 한병 곁들여서 \9,000.
모텔로 돌아오는길에 모텔종업원이 너무 친절해 복분자와 알로에 드링크 2병을 사다줬다.
13. 열 사흘째(9월 16일 목요일) 영동서 무주중간 까지
06시 30분 : 기상
07시 10분 : 2차시도로 쾌변
07시 25분 : 무주로 출발
07시 35분 : 아침( 김밥천냥 745-1177 된장찌개 \3500)
07시 54분 : 농협영동중앙지점
07시 58분 : 부용 4거리. 직진하면 부용리, 우회전하면 대전 옥천 4번 도로, 좌회전하면 김천 무주 419번 도로
08시 04분 : 이수공원. 하천을 딸아 잘 정돈 되어있다.
08시 31분 ; 부용리 Bus stop
09시 04분 : 괴목리 Bus stop
영동 무주는 4차선 고속도로여서 Bus stop이 주 도로에도 있지만은 지로(支路)에도 많이 있다.
나중에 알고 봤드니 주 도로로는 Bus stop을 거의 이용치 않아 사용을 하지 않는다 함.
승객이 적어 영동무주간 직행버스가 없어졌다함.
09시 15분 : 묘동리 Bus stop
10시 15분 : 유점리 Bus stop
10시 43분 : 묵정리 Bus stop
11시 22분 : 마포리 Bus stop. 이정표를 보니 무주까지 16Km이고 영동까지는 11Km이다
계획했든대로 서울로 돌아가기로 하고 어제놓친 굴다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오든길을 뒤돌아가는데는
구태여 걸을 필요가 없다. 대중교통을 찾가가 힘들었다. 할수없이 지나는 승용차를 손을 드니 세워
주었다. 서정을 예기하고 영동까지 신세를 졌다. 힘든일 하신다며 격려까지 해주었다. 돈을 받지않겠
다는것을 마침 뒤에 중학생정도의 학생이 타고 있기에 맛있는것 사먹으라하고 억지로 \5,000을 손에
쥐어주고 감사의 인사를 정중히 했다.
11시 50분 : 어제 놓친 굴다리 찾아갔다.
13시 40분 : 영동 터미널에서 서울행 Bus 승차. 영동터미널이 너무 영업이 되지않았고 그 옆에 있는 시내
Bus터미널에 갔드니 시내버스가 무주를 완행으로 다니고 있으며 직행은 장사가 안되어 노선이
폐쇄되었다 한다. 영동무주가 고속도로옆의 Bus stop이 폐쇄된 이유를 이제 알겠다.
14시 15분 : 이 버스가 옥천을 둘러 서울로 간다. 영동터미널에 식당도 영업을 하지않아 점심을 못
먹었기에 옥천 터미널에서 구운계란과 물을 사서(\1,700) 차에서 점심을 대신해서 먹으며
서울로 왔다.
18시경 잠실 집에 도착했다.
14. 열나흘째(10월 3일) 무주와 영동사이 묵정에서 무주까지
열 사흘째 행군을 하고 상당기간동안 계속을 못하고 말았다. 그간 추석도 끼이고 미국 영순이가 오랜 만에 귀국한 관계로 휴지가간이 길게되었다. 10월 3일 아침 7시 40분에 남부터미널에서 무주행 첮차 를 탔다.
10시 05분 : 무주 터미널 도착
10시 10분 : 아침. 된장찌개 \5,000. 터미널에 있는 식당에서. 괜찮은 식당은 무주 시내로 들어가야
한다하며 거리도 꽤 되었다.
10시 25분 : 영동행 버스 승차. 10분에 식사시키고 25분에 허겁지겁 버스를 탔어니 그 상황을 짐작
할수 있을것이다. 매표소에서 마포나 묵정가는 표를 사야할텐데 미처 그런것 생각할 겨를
이 없었다. 얼핏생각나는것이 영동이어서 영동행 표를 샀다. 사고나니 과다지출이다.
매표소 아저씨가 얼른 이차 타라고 하면서 자기가 표를 차있는곳으로 가져와서 나에게
전달했다. 물론
그때 승객이 많지않고 터미널이 한가하긴 했지만. 무주영동간은 정기시외
버스회사가 적자로 도산되어 지금은 시내버스라는 이름으로 운행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충청도 전북 지역에 이같이 시내버스라는 제도로 이웃면이나 군간에 교통수단이 있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무주영동간 시내버스 요금은 \2,650.이었다.
10시 50분 : 마포지나 묵정에서 하차. 전번에 무주서 영동올적에는 준 고속도로를 걸어왔는데 이번에
내린곳은 구도로에서 내렸다. 묵정 새마을 금고앞에 정류소가 있었다. 그앞에 있는 매점
에서 빵과 물을 구입했다. \1,100. 매점 여주인이 나의 행사를 듣고(30대 후반 여성)
대단히 부러워하고 존경한다고 했다. 길을 묻다가 보면 어디어디가서 버스를 타라고 설명
을 해주는데 사실은 걸어가는 중이며 서울서 여기까지 걸어왔다하면 모두들 대단히 놀라
친절히 가르켜주고 자연히 대화가 이어졌고 자기도 학창시절 이런것 좋아했는데 자기도
한번 걸어보고싶다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사진 한컷을 부탁했다.
길옆에 노인들 몇이 앉아있는데 이분들게 찰영을 부탁할 수가 없었고 설사 부탁을 선뜻
받아주신데도 찰영을 하지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1시 00분 : 무주를 향해 출발. 여기서 무주까지는 구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구길을 딸아걸으니 약간
둘러가는경향은 있지만 훨씬 걸어가는 멋이있고 시골정취를 만끽할수 있었다.
11시 15분 : 마포 Bus stop.
날씨가 서늘하고 구름마저 끼어서 걷기는 한결 좋았다. 그러나 걷다보니 더워서 윗 상의
하나를 벗었다. 서울서 영동까지 걸어오든 추석전에는 Bus stop에서 더워서 쉴수도 없었 는데 며칠 사이에 날씨가 이렇게 시원할 수가없다.
11시 25분 : 마포마을 정자나무 찰영. 19번 국도를 걸어가고 있다. 이번고향길 대부분이 17번과 19번
국도이다.
11시40분 :학산면 표시판이 설치되있고 우측엔 고속도이며 구길주위엔 농촌정취가 물씬거리는 과수원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12시 04분 : 학산 삼거리
12시 15분 : 학산면 사무소. 옛날 대진고속도로 뚧히기전에 많이 지나든 곳이다. 기억이 생생하다.
12시 20분 : 학산면 농협
12시 37분 : 학산면소재지를 벗어나서는 4차선 준 고속도로 진입했다.
12시 52분 : 도로변 싸리나무에는 벌써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13시 10분 : 삼정리 Bus stop. 다시구길로 접어들었다. 옛날 생각하며, 농촌정취에 젖으며 걸었다.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엔 비가많이 온다고. 그곳은 어떻냐고. 여기는 쾌청. 그리고 이번
행군부터는 배낭에 작은 태극기를 꽂고 걸었다. 자동차들로부터 식별이 시웁도록 할 목적도 있고 일반 등산객과 구별도 하고싶어서이다.
13시 24분 : 봉산 교차로. 길아래 포도밭이 있다. 양 포도밭 경계둑에 잔디가 잘 자라 있었다. 벌렁
들어누어 6.25때 생각도 하고 그간 지내온 생각도 하며 잠시 쉬었다. 포도밭 옆에는
작은 시내가 있었다.
14시 15분 : 다시 준고속 도로로 들어섰다. 날은 구름끼고 차가 일요일인데도 드물어 정막이 돌것
갔기도 했다. 빵으로 간단한 요기.
14시 38분 : 압치터널이 나타났다. 저 위로는 구길이 보이고 나는 지금 고속도로를 걷고있다. 이 고속
저 위로는 구길이 가로수도 정연히 잘 되어있고 시골냄새가 물씬나고 옛 추억이 담긴곳
이다.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있다. 그러나 이곳 고속도로에서 저 산 중턱을 지나고 있는
구길 까지는 얼핏잡아 500M는 될듯했다. 사실은 조금전에도 고속도로에서 구길로 갈려
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잠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구길쪽을 향해 걷기로 했다.
물론 길은 없다. 옛날 같이 경작하는 전답이라면 둘러가도 길이 있을텐데 밭이 몇 년간을
묵엇느지 풀이 무성이 자랏고 뱀이 나올가 무섭기도했지만 “쉬 쉬” 소리 내며 뱀을 쫓으
면서 아주 힘들게 구길로 올라갈수 있었다. 암치재 정상(날망)에 올라서니 정말 이 길로
오기를 잘했다. 저 아래로는 고속도로가 보이고 날망은 구길 왕복 2차선(편도 1차)상에
있는데 이 재가 충북 영동국 학산면과 전북 무주군 무주읍과의 경계를 이루는 즉 도계
이면서 군계였다. 양 도의 표시가 있고 양군의 표시도 있으며 옛 고개길에만 있을수 있는
경치들이 너무 좋았다.
14시 51분에서 15시 10분간 이 고개의 절경을 서툰솜씨지만 카메라에 담았다. 저 아래 보이는 고속
도로는 떼양빛인데 이곳 구길은 양 옆으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잘 정비되어 경치도 좋지만
서늘한 그늘을 제공하고 있었다.
15시 44분 : 무주 3Km전. 오든길을 직진하면 무주외곽도로를 타고 안성 장계를 갈수있지만 안성까지
가기전에는 숙소가 없단다. 오늘 조금 일찍 일정을 마무리 하는것 같지만 길을 더
가다가는 숙소도 없고 몸은 피곤한데 큰 낭패를 볼겄같았다. 무주시내에 가서 숙소를
잡기로 하고 무주시내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16시 30분 : 무주군청에 도착. 군청찰영. 관광안내소 들러서 길도 물어놓고 숙소도 물어본다음 식당을 소개받이 위선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17시 00분 : 금강식당. 무주 063)322-0979. 식당이 상당히 붐볐다. 어죽을 권했다. 가격은 \6,000
관광안내소의 소개대로 맛이 좋았다. 배가곺아 한그릇 반을 먹었다 맥주도 시원스레
한잔을 했다. 어죽 한그릇 반 \9,000. 맥주 \3,000. 여행중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적이
없다.
17시 39분 : 빵 구입 \700.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혹시 매점이 개점치 않을염려가 있어
전날 저녁에 준비를 해둔다. 그리고 물은 숙소에서 한병을 담아온다. 숙소가 시원찮은
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물도 미리 그전날 저녁에 준비를 해둔다.
17시 40분 : 모텔 기린장 투숙. 모텔비 \30,000. 전화번호 063)324-5051. 혼자 TV를 보다가
내일을 위해 오늘은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17Km 걸었다.
15. 열 닷새째 날(10월 4일) 무주에서 안성까지.
06시 20분 : 기상.
어제 저녁 빨아널어놓은 세탁물이 다 말랐다. 시원히 배변. 오늘 행군이 상쾌할듯.
07시 10분 : 아침 식사. 나드리 김밥천국 063)32207011. \3,500
07시 35분 : 출발
07시 38분 : 무주다리. 날씨가 약간 쌀쌀. 비가 살작 내렸다. 장갑생각이 난다. 아침공기가 상쾌하다.
07시 56분 : 무주다리를 벗어나자말자 코스모스꽃길이 아주 장관이었다.
08시 10분 : 싸리재 터널
08시 36분 : 반딧불 축제 간판. 무주가 반딧불축제로 유명하다는것을 알수있다.
08시 50분 ; 평촌 Bus stop. 비가 제법내린다. 걷지못할정도이다. 약 15분간 Bus stop에서 비를
피하면서 쉬었다.
09시 30분 : 무주안성간 신도로로 걷고 있었다.
09시 56분 : 가옥터널 앞에서 4차선 신 도로를 걷지않고 2차선 구길로 접어듬. 터널 없슴.
10시 14분 : 무주읍에서 적상면간 구 도로에 코스모스길이 비에젖었지만 너무 좋았다.
10시 23분 : 적상면 사무소.
10시 50분 : 상사내 Bus stop. 비가와서 걷기 힘듬. 비가 약 20분 이상 계속 내렸다. 조금은 처량한
기분속에 억지 휴식을 취했다. 비가 이렇게 계속오면 오늘의 행군은 대단히 힘들것 같다.
11시 18분 : 비가 다소 소강상태여서 비를 맞으며 다시 출발했다. 달리는 차들이 물을 찌틀이며
달릴때 정말 화가 났다.
11시 54분 : 무주군 관관지도에도 나오는 리베라모텔이 좋은자리에 모습을 들어냈고 길건너에는 정자
하나가 있는데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마산 Bus stop이 그 앞에 있다.
13시 30분 : 도촌 Bus stop. 오늘은 가랑비가 오락가락. 걷기에는 최악의 날씨이다. Bus stop이
유일한 쉼터이다. 오늘 계획을 짧게 잡았기에 망녕이지.
14시 30분 : 동명파크에 투숙. 안성면에 유일한 숙소란다. 일찍 투숙을 하는셈이지만 오늘 장계까지
걷기는 무리일것 같다. 6.25때 같이 쫏기는 몸도 아니니 쉬엄쉬엄 내려가자
모텔에 일단 자리를 잡아놓고(모텔비 \30,000) 안성면 주민자치센터를 방문했다.
모텔 전화 063)323-1313.
15시 30분 : 15시부터 저녁겸 점심을 먹기위해 몇 식당을 들렀으나 혼자라고 받아주지 않았다. 겨우
한곳에 들어가 2인분을 먹겠다하고 주문을 해놓고 1인분 조금 넘게 먹고 나왔다.
약국에 들러 요통약을 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특히 안성인심 고약하다는 이야기를
농 섞어 하다가 나의 행군 얘기를 듣고 그 여 약사가 대단히 선망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격려의 말고 잊지 않았다.
16시 00분 : 빵 구입 \600.
숙소에 들어가서 양말 내의등을 빨아서 통풍잘되는곳에 널고 TV좀 보다 잘랬드니 TV마저
시원치 않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걸은길은 20.5Km이다.
16. 열 엿새째 날 (10월 5일) 안성에서 육십령 정상까지.
06시 30분 : 기상
07시 10분 : 물 구입. Family Mart 무주안성점에서 \750.
07시 15분 : 아침식사. 시골식당 063)323-0188. 된장찌개 \5,500. 식사시 옆에 식사하는 분들게
장계가기전 제비촌재를 물어도 아무도 아는사람이 없었다. 큰누님이 잘못알고 있었든게
아닌가 하면서 가다가 또 물어보지 하고 길을 떠났다.
07시 55분 : 출발했다. 구름이 끼어 걷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08시 40분 : 죽천 삼거리. 이 근방서 어느 연세드신 농부에게 물으니 제비촌재가 아니고 지보촌
이라는 동리가 있는데 이 동리로 해서 가면 함양가는 지름길이 된다고 한다. 계북면
가서 다시 물으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08시 51분 : 죽천 Bus stop. 고속도 지하차로로 직진. 여기는 대진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곳으로서
우리가 요즘 시골갈적에 달리는 길이 있는곳 옆의 구도로이다.
09시 01분 : cosmos길이 너무좋다. 약 500M.
09시 20분 : 공진 Bus stop
09시 31분 : 마암 Bus stop
09시 51분 : 드디어 장수군
09시 53분 : 주고 Bus stop
09시 57분 : 원촌 삼거리. 이곳은 예날 대진고속도나기전에 우리가 시골갈적에 자주 쉬고 가든 정자
나무가 있는 곳이다. 몇채의 집도 있고. 추억이 감도는 곳이었다.
10시 09분 : 파골 Bus stop. 구름이 많은 날씨인데 햇빛이 가끔 나온다.
10시 17분 : 외림 bus stop. 19번 국도가 대개 편도 1차, 왕복 2차선 도로이다. 고향길 많은부분이 17번과 19번 국도이다.
10시 46분 : 솔재 Bus stop. 솔재를 넘어니 계북면이다. 아주 작은 면이다. 면사무소를 들러서 찰영 하고 마침 그 앞에 있는 택시 기사에게 제비촌재를 물었드니 역시 지보촌이라는 동리가 있는데 재 이름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은 동리 이름이 동명마을로 바뀌었다고 상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전번에 초평면 들어가면서 고생한 기억이 있어 여기서 장계로 가는것
과 지보촌으로 가는것고 거리가 어떤지 물었드니 장계로 가는것이 훨씬 빠르다한다.
기사를 붙들고 내 사정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지금 지보촌을 넘어 갈수 있겠느냐고
물었드니 불확실하게 대답을 했다. 망설이다가 그래도 옛날 왔든길로 가보리라고 작정을
하고 일단 응급사항이 벌어지면 택시라도 불러탈 작정을 하고 지보촌으로 가기로 결심을
했다. 비록 기사가 상세히 설명을 해 주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그러나 내 뇌리에는
그곳으로 가는길이 무척 시골촌이고 찾기가 어려울것같아 용기가 나지않았다. 지금
기억에도 6.25때도 무척이나 고산지대에 길이 험한곳에 있었든걸로 생각이 든다. 여하튼
지보촌으로 가기로 하고 위선 식사부터 하고 가야겠기에 식당을 찾았다.
11시 30분 : 청포식당. 063)352-1318 청국장 \5,000.
11시 53분 : 지보촌을 바라고 출발. 가는길에 파출소가 있길래 길을 물었드니 또 자동차길만 아르켜
줄려한다. 그래서 할수없이 또 내려가는 사연부터 예기를 했드니 소장이 대단히 놀라면서
지보촌은 자기 구역이 아닌 장계면 관내인데 가는길을 가려켜주면서 야생동물
통로가 나타나는곳이 면계이니까 그 곳을 넘으면 지보촌이 나타나는것은 확실한데
저쪽면 동리는 솔직히 잘 모르니 가다가 물어라 한다. 그 소장이 가리켜 주는
야생동물 통로도 대단히 멀게 보였고 행인도 없는데 과연 내가 혼자 넘을수 있을가
겁이 났다.
12시 05분 : 어전4거리에서 좌회전. 완전히 시골길. 왕복 2차선. 이곳에서 또 한 노인을 만나서
지보촌을 물어보자 택시기사의 말과같이 복잡하지 않고 “똑 바로 큰길만 가면 지보촌이
나온다하고 오늘 늦지않게 지보촌에 닿을수 있다하며 안심되는 말씀을 해 주었다.
12시 40분 : 연동마을 3거리.반가워라 “함양”이라 표시된 이정표나타남. 삼거리인데 좌회전하면 함양 이다. 어디가면삼거리가 나온다고만 했지 “함양”표지판이 나온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 다. 이 표지판을 보니 탁 안심이 되었다. 정말 사람인적하나 없고 길은 왕복 2차선으로 잘 딱여있고 차도 한시간에 왕복 10대도 안되었다. 옛날 우리가 이 길을 넘을적에도 한가 하기는 했지만은 이렇게 인적이 드물지는 않았다. 아마 피란민이 많았든 탓이겠지.
12시 50분 : 거의 정상인듯한 곳에 오니 계곡은 옥수가 흐르고 좋은 장소에 정자가 세워져있고 쉼터
도 마련되 있다. 공기좋고 물 맑다. 인적은 드물고 차도 별로없고 새소리 바람소리밖에
없다. 60년전 이곳의 경치는 어떻했을가? 정말 선경이다. 걸으면서도 생각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은 다시한번 찾아봐야겠다고.
13시 15분 : 도로위에 동물이동통로가 설치되어있다. 아 이곳이 계북과 장계의 경계이구나. 날씨는
13시 24분 : 동물이동통로를 지나서 고개를 넘으니 작은 느티나무가 몇그루 서있고 쉼터가 조성되어
13시 47분 : 동명마을 표시판 보임. 지금은 큰길이 나있고 내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지만은 옛날엔
지금 이 길 보다 훨씬 위로 길이 있었고 그 곳에 집이 있엇다한다. 지금도 그 위에 몇채 의 집이있단다. 우리가 6.25때 자고 온 집은 지보촌중에서도 제일 윗집에서 자고
왔단다(큰누님의 기억).원래도 지보촌은 집이 찔금찔금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있었고
이런 마을을 합해서 지보촌이라 했다하며 지금남아있는곳도 여기저지 위에서 아래로
찔금찔금남아있다한다.
14시 21분 : 양산 Bus stop
14시 39분 : 명덕 3거리. 서상장계간은 26번 국도이다. 19번 국도는 오래동안 내가 걸어온 길인데
그 길은 장계에서 장수로 달리는 길로서 나와는 이제부터는 이별이다. 명덕 3거리에서
많이 망설였다. 장계로 가느냐? 육심령으로 가느냐? 행인들에게 물어봐도 어지간하면
육심령까지 갈수있다고도 하고 내 나이를 물어보고는 무리라고 하는사람도 있다. 내
계획으로는 육심령까지 가드래도 그기서 숙소가 있는 서상까지는 어림도 없으니 택시를
타고 서상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육심령까지 와서 다시 육심령부터 서상으로 고향으로
가리라 계획을 했다. 하지만 만약에 육심령까지 못간다면 정말 난감한 일이 벌어지고
말것이다. 할수없이 장계로 전화를 해서 모텔을 예약했다. 막상 모텔을 예약하고 나니
다시 육심령으로 한번가보고싶은 마음이 용솟음쳣다. 만약 육심령 가다 사고를 만나면
그때가서 택시를 부르든지 정 위급한 사항이 벌어지면 119라도 부르리라 마음을 먹고
다시 마음을 다잡아 먹고 장계가는것을 취소하고 육십령으로 큰 마음 먹고 발길을
돌렸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속으로 다짐하면서.
14시 25분 : 육십령으로 방향을 잡고 걸으니 처음 나타나는 Bus stop.이다. 표시판을 보니 정상
까지 3Km이다. 탁 마음이 놓인다. 지금이 2시 반인데 설마 해전에 3Km야 못 가겠나.
괜히 겁을 집어먹었고나. 육십령으로 결심을 한것이 정말잘했구나 싶었다.
15시 25분 : 육십령 오르다 빵으로 허기를 때웠다. 오르막 길이 꼬부랑 꼬부랑 보통이 아니었다.
땀을 흘리며 올라도 끝이없드니 드디어 정상이다. 넓직학 육십령 정상마당에 도달했다. 아! 그렇게 애태우고 힘들어 했든 육십령을 드디어 올랐다. 크게 소리한번지르고 정자를
카메라에 담았다. 역시 육십령에도 인적은 드물었다. 야~~호. 아직도 펄펄 힘이
16시 05분 : 경상도 쪽으로 내려와 육십령 휴게소 방문. 옛날 대진 고속도로가 나기전엔 요지중의
요지였는데, 하긴 십년이면 강산고 변한다는데.
휴게소에서 주인아주머니는 옛날(대진고속도 생기기전)부터 아는 분이여서 일단 마음이
놓였다. 오늘 서상까지 가지못한다 하드라도 설마 먹고 자고 어쩻든 밤은 사고없이지샐것
같았다. 일단 물한잔먹고 목을 축인후 잠시 주위의 경치에 취해서 바깥바람을 쐬고 들어
오지 휴게소에 딸린 식당종업원들이 사고를 깍아놓고 먹어라고 권했다. 못생긴사과들인데
맛이 너무 좋았다. 물으니 새들이 쪼아먹은 상품성이 떨어지는 것 들인데 맛은 최고라며 거듭권했다. 맛이 너무 좋고 목이마른 끝이라 너무 많이 먹었다. 사실 저는 요즘도 어느 약국으로부터 어려운 처방들에 대해 자문에 응하고 회답을 해주고있다. 어떻게 보면 “재택근무”일가요. 어제 늦게 질의를 받아서 늦어도 내일까지는 답을해줘야한다. 주로 Mail 이나 Fax를 이용해서 답을 해주고 있다. 물론 간단한것은 전화로 답을 주고 있다. 그래서 무주를 지나며 서상면에 전화를 걸어 서상면에 PC방이 있느냐고 물었드니
한곳이 있으며 필요하면 면사무소에서 이용해도 된다는 답을 들었다. 이래 저래 지금서상 으로 갈가 내일 서상가서 Fax를 이용할가 망설이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우리여기도
Computer가 있다한다. 그때에야 보니 가게 옆에 컴이 있지않는가!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반가운것은 여기 육십령에도 민박이 있다한다. 그야말로 일석이조이다. 숙소도 해결되고 컴도 이용할 수가 있으니. 크게 한숨돌리고 답을 적어 Mail로 보내고 잘걱정을 면했다.
18시 30분 : 고민하든 문제들이 해결되어서 마음놓고 저녁을 소주한잔곁들어 먹고 숙소로 향했다.
산촌의 밤은 빨리 찾아오는것 같았다. 공기가 너무좋다. 육십령 상상봉(?)에서 맘껏 좋은
공기 들여마시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것 같았다.
식대 \10,000. 민박비 \20,000. 식혜 \700. 오늘 걸어온길 안성서 육십령 까지는
20.9Km.
민박 시설이 너무 열악했다. 바닥은 따끈 따끈한데 외풍이 너무세고 화장실은 난방이 안 되어 추워서 겨우겨우 대충밖에 씻을수가 없었다.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전순익 신봉성
송석만 향우들로부터 격려의 전화가 왔다. 혼자 걸어온 길이지만 외롭지 않을수 있었다.
17. 열 이레째 날(10월 6일) 육십령에서 고향까지
06시 15분 : 고향이 가까워 지고 마지막 숙소라 생각되니 아침에 잠에서 일찍 깼다.
숙소의 시설이 열악하고 화장품 하나없고 수건도 단 하나밖에 제공되지 않았으며 칫솔도
없었다. 모텔과 민박시설이 너무 차이가 많이났다. 속담에 “서울갈적에는 눈썹도
빼놓고 간다“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길 떠날적에 화장품 별로 사용하지 않는 편이
기도 하지만 무게를 가급적 줄일려고 화장품, 칫솔 치약 면도기등은 지참하지 않았다.
07시 00분 : 아침 식사. 물도 하나 구입했다. \5,500.
07시 45분 : 육십령 출발. 공기좋고 날씨 또한 좋았다.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였다. 매우기분이 상쾌 했다.
07시 54분 : 60령 고개서 300m쯤 내려오니 안의까지 24Km, 장계까지 12Km 라는 표시판이 보임.
60년전 자갈깔린 60령 고개를 넘을때는 양길옆 숲속에 위장한 Tank들이 여기저기
있었고 인민군들이 전투태세를 갖후고 있었으며 그때 인상적인것은 아주 앳된 병사들이
더러 섞여있었으며 그중엔 18, 19세정도의 장교(소위)계급을 단 어린 장교도 보였다.
08시 30분 : 복동 Bus stop. 어릴때 가끔 들어본 복골이 아닌가?
09시 15분 : 서상면 사무소. 면사무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한참을 기다려 면에들어가는 40대 부인을
만나 사무소를 배경으로 하고 나의 사진도 한 장 찍다. 고향을 내려오면서 여러곳에서
행군하는 나를 넣고 사진을 찍을려도 찍어 줄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09시 58분 : 봉전(서상에 있는 봉전) Bus stop.
10시 06분 : 서하면장님으로부터 어디쯤 오고있는가고 전화가 옴. 이때 서상 IC앞을 걷고있었습니다.
10시 08분 : 드디어 그리든 고향 “서하면” 팻말이 나타났다. 짜릿한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너는
“서하인이야”하며 내 영혼과 육신이, 나의 자율신경이 즉갈 신호를 보내고 있는가봐요.
10시 09분 : 함양징터
10시 12분경 : 우전마을 이종범군이 오토바이를 타고 마중을 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10시 17분경 : 면장이 서하주유소 있는곳까지 마중을 나왔다. 최성봉씨와 같이. 너무 황송할 따름임.
10시 45분경 : 서하면사무소 도착. 면장께서 “이종호 회장님 서울서 고향까지 걸어오셨읍니다”하고 소개. 어떻게 소식을 듣고 찾아온 기자들과 인터부도하고 마침 리장 회의가 있어서 각부락 이장들을 만나서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잠시 그간의 예기들을 서로 나누었다.
11시 30분 : 집 사람이 원래 고향길 전 과정을 동행치는 못해도 일부구간만이라도 동행할려 했는데
6월에 산에서 다치는 바람에 동행을 못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우전들어가는길정도는 꼭
자기도 걸어보겠다하여 같이 걸어갈 작정으로 반정부락앞에서 만났다. 원래는 옛날
걸어왔든 솟사발로 걸어들어갈려 했는데 그곳에는 길이 없다 한다. 할수없이 반정앞에서
우전들어가는길을 택했다. 유감스럽게도 반정서 우전들어가는길은 중간에 길이유실되고
걸어서 비록 불타고 없어졌지만 내가살든 머나먼 여정을 거쳐 드디어 내가 살든 우리
집에 도착했다. 우리집사람과 함께. 도착시간이 13시 20분. 면장께서 그간 면사무소 일 을 다 보시고 언제 우리동리까지 먼저와 계시다가 우전 동사입구 길까지 마중나와 우리 집까지 같이 가시고 폐허가된 우리집에 가서는 찰영가지 해주었다. 길이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고맙습니다. 면장님. 정대훈 면장님
13시 30분 : 우리집을 나와 면장의 안내를 따라 주차장으로 갔다. 뜻밖에도 그곳엔 천막이 쳐져있고
동문회와 부락민들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따뜻이 맞아주시었다. 초등학교동문회에서는
천리길 걸어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라는 현수막까지 준비해놓고서. 면장님이 주최가 되어
지휘하에 환영행사를 하셨다한다. 꽃다발을 받고 산삼을 면장님으로부터 선물 받을때는
몸둘바를 몰랐다. 정성껏 마련한 다과로 막걸리 한잔을 나누며 환영의 분위기가 무르익 어졌고 마침 이때 큰누님 점순누님 영순이내외 여성이들이 참석해줘서 더욱 자리가 빛났 다. 오늘 걸은 육십령서 우전까지의 거리는 18Km이다. 서울(이태원 초등학교)서
우전까지는 319Km(약797리)였습니다.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고속도로로해서 오면
261Km(660리)리가 되는셈입니다.
15시 30분 : 동리분들이 반정 순두부집에 가서 점심을 마련해서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이렇게 해서 “천리고향길 걸어가기”의 저의 행사는 걸어내리간 저도 건강에 큰 탈이없었고 더구나 여러분들의 따뜻한 환영속에 무사히 잘 마치었습니다. 대단히 감사 합니다.
[ 후 기 ]
6.25사변당시 저는 13살로서 중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8월 13일부터 8월 25까지 13일간을 어머니, 형님, 누님, 그리고 저. 이렇게 넷이서 서울서 고향까지 피난길을 걸어내려왔습니다. 그후 때때로 그때
우리가 걸었든 그길을 그대로 걸어보자고 했지만 막상 각자의 바쁜길을 걷다보니까 실행을 해오지 못
하였고 더구나 어머니와 형님께서는 고인이 되셨으며 누님마저 금년 83세로서 도저히 고향길로 걸어
간다는것은 불가능하엿습니다. 더구나 금년이 6.25발발 꼭 60년째여서 더더구나 금년에 걸어간다면
더더욱 의의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저역시 바쁜생업에 종사하느라 시간을 낼수없었는데 마침 현직에서 은퇴를 했고 더구나 금년이 60주년이기도 했지만 저 역시 금년을 넘기면 이일을 결행한다는것은
극히 힘들것으로 판단하고 혼자남은 저라도 이길을 한번걸어보자고 용단을 내어 시작을 했든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항상 피곤에 시달리는 약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 피곤하다”라는 소리를 항상 달고 산다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역설적이라고 할가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한번 먼길 걸어볼가
저~ㅇ 피곤해서 못걷게되면 중지하지 뭐 그래 한번 해 봐. 이런생각을 하고있든것도 고향길을 걸어가게 된 동기에 보조역할을 했다 할수있을겁니다. 이 결정을 듣고는 “여보 당신, 생각해봐요. 매일 피곤
하다는 말을 달고살면서 분수에 맞는 일을 시작해야지. 당신이 뭐 이팔청춘인줄 아요. 할만한 일을
시작해야지요“ 하는 집사람의 반대에 부딛쳤고, 아들들도 ”아버지, 아버지 건강으로서는 무리예요“하고만류를 했다.
이번 고향 걷기가 별것 아닌것 같지만
“어려운 역경에서라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으면 무슨일이든 할수있다”는 교훈이 될수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또한 그 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걸어온 날자는, 걸은 날은 17일인데 중간중간 반나절 걸은 날이 있었습니다. 이 반나절 걸은 날을
하루로 치지않고 반나절 두 번 걸은 것을 하루로 계산하면 6.25때와 꼭 같이 13일이 됩니다. 이 날자에 맞후어 걸었습니다.
고향이 있기에, 저 멀리 천리 남쪽에 저를 낳고 길러준 고향이 있기에 걷고 또 걸었습니다. 옛날을
회상하며.
2010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