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할래야 할 곳이 없었고 돈이 있어도 먹을 것을 구하
기 어려울 만큼 모든 것이 부족한 때였다. 때문에 모든 사
람들의 눈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싸움과 시비가 그치지 않았다.
하루야마와 마쓰모도는 조금도 겁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
았다. 절망과 굶주림, 공포로 범벅된 게라마 열도에서의 1
년여에 걸친 생활은 그들에게 무서운 투지와 담력을 댓가
로 남겨주었던 것이다.
"너 이놈들, 모두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길을 비켜."
하루야마가 먼저 고함을 질렀다. 마쓰모도는 어둠속에서
손에 잡을 만한 것을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였
다.
"쓸데없는 일에 배를 축내지 마!" 하는 나무람이 쨍하고
날아들며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들고 있는 흉기들을
흔들어대는 패거리 뒤쪽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났
다.
검게 물들인 야전 점퍼의 왼쪽 소매가 호주머니에 헐렁하
게 들어가 있었다. 둘러섰던 10여 명이 뒤돌아보더니 이내
양쪽으로 비켜섰다. 사내는 아직 앳되다고 할 만큼 새파랗
게 젊어 보였다.
"기리시마 형."
누군가가 그를 보고 반겼다.
"아직까지 배들이 덜 고픈 모양이지?"
농담조의 말투였다.
"아 글쎄, 이 녀석들이."
하고 그 중 하나가 설명을 하려고 하자 기리시마라 불리
운 사내가 손을 들어 제지하며 말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이 놈 둘은 내게 맡기고 볼
일들이나 보러가라구."
침착하고 맑은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기합이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때문인지 젊은 패거리들은 머뭇거
리고만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잔뜩 긴장하고 있
는 마쓰모도와 하루야마 앞으로 다가온 기리시마는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을 대하듯 미소까지 지어 보
이며 말했다.
"두 분 형님께서는 절 따라 오십시오. 제가 한 잔 사겠습
니다."
두 사람은 갑작스런 사태변화에 어리둥절했지만 다른 도
리가 없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이 기리시마를 따라 간 곳은 이런 시대
에 이런 곳이다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호화찬란하게 꾸민
캬바레였다. 허물어지다 만빌딩의 지하실에는 울긋불긋한
색전등들이 현란하게 깜박이고 있었다.
그때는 두 사람 모두 사람들이 도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
는지 몰랐지만 귀청이 찢어지도록 시끄러운 재즈 음악이
흘러 넘치는 홀 안에서 수백명의 남녀가 서로서로 몸을 끌
어안은 채 춤을 추고 있었다. 남자들은 모두가 지아이
(GI)들이었고 짝을 이룬 것은 일본 여자들이었다.
두 사람을 입구에 기다리게 해놓고 카운터로 가 뚱뚱한
남자 한 명과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던 기리시마가 곧 남은
한 팔을 치켜들어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반쯤
은 얼이 빠진 채 기리시마를 따라 춤추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밴드가 자리잡은 뒤쪽에 비상구가 있었다. 그 안으로 들
어서니 좁고 가파른 계단이 위로 나 있었다. 두 사람은 의
사를 묻듯 서로 쳐다보았지만 누구도 망설이고 있는 것 같
지 않았다. 둘은 앞서서 두세 계단씩을 뛰어 올라가는 기
리시마의 뒤를 따라 올라갔다. 위에 사무실 같은 방이 있
었다. 우두머리인 듯한 키는 크지 않으나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소파에 앉아 있고 두어 개 놓인 책상과 걸상 위
에 세 사람의 청년들이 걸터앉아 있었다. 포장술집에서 처
음 싸움을 걸어왔던 다섯 놈들 중의 셋이었다.
"너희들이냐?"
소파에 앉은 체구의 사나이가 대뜸 반말로 물었다. 30대
후반쯤 되어보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아무 말도
못했다.
"너희들이냐고 묻고 있지 않나!"
그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사람의 기를 죽일 만큼 위압적
인 말투였다.
"예 예."
두 사람은 영문도 묻지 않은 채 얼떨결에 대답했다.
"갈 곳이 있나?"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하루야마가 무턱대고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고 말았다.
"일도 없겠지!"
단정하듯 내뱉는 말에도 역시
"네"
하고 대답했다.
"좋아! 병원에 간 두 녀석이 다 나을 때까지 일거리를 주
지. 그놈들 대신 말이야."
어쩌면 그렇게 제멋대로일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시대에
는 그랬다. 남자라면 모두가 군대에 나가 죽었거나 병신이
되어 돌아온 때였다. 남루한 차림의 사내들끼리 두셋씩 짝
지어 밤의 부둣가를 어슬렁거리는 패치고 제대로 된 사람
이 없었다. 하나같이 가족을 잃은 뜨내기들이었다.
그날 그 자리에서,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뜨내기였
던 두 사람 역시 심문과 같은 거친 질문이긴 했지만 정직
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일거리를 찾아 헤맬 것도 없이 지정된
시간 지정된 장소로 함께 갔다. 둘이서 우메다에 있는 요
정 같은 집으로 안내되어 가자 군청색으로 물들인 미군 작
업복 한 벌씩이 주어졌다. 현관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다다
미방에서 시키는 대로 누더기에 가까웠던 옷을 벗고 작업
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안쪽 큰 방으로 안내되었
다. 8조도 더 되어 보이는 넓은 방이었다.
당당한 체구의 가지하라가 정면에 버티듯 앉아 있고 좌우
로 두 사람씩이 가운데를 향해 앉아 있었다. 50줄에 들어
선 듯한 기모노의 여인이 술상을 받쳐들고 들어와 가지하
라 앞에 놓았다. 잇따라 앳된 소녀가 똑같은 술상을 들고
들어와 왼팔이 없는 기리시마 앞에 놓았다. 그러기를 거듭
하여 마지막으로 하루야마와 마쓰모도 앞에도 술상이 놓였
다. 마쓰모도 앞에는 소녀가 갖다 놓았다. 마쓰모도는 물
러가는 소녀를 한번 더 돌아보았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작은 도자기 술병 하나와 찻잔 한
개가 가지하라의 상 위에 놓여 있을 뿐 다른 사람들 앞의
상에는 그나마 큰 밤톨만큼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잔만 한
개씩 놓여 있을 뿐이었다.
모두가 단정하게 꿇어앉아 있었다. 잠시 후 가지하라가
입고 있던 야전점퍼의 지퍼를 끌어내렸다. 검은 작업복 셔
츠가 보였다. 그가 약간 불러오른 듯한 배 밑 허리춤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길이가 20센티쯤 돼 보이는 단도였다.
여섯 사람의 눈길이 그 곳으로 집중되었다.
왼손으로 옮겨 쥔 단도를 가지하라의 오른손이 마치 단단
히 박힌 것을 뽑아내듯 힘있게 뽑았다. 빛나는 것은 아니
었지만 그것은 보기에도 서늘할만큼 예리한 느낌을 주었
다. 가지하라가 네 개의 손가락으로 칼집을 단단히 거머쥐
면서 엄지손가락을 곧게 폈다. 그의 엄지손가락의 볼록한
부분이 칼날 위로 가볍게 스치는 듯했다.
두 사람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몸과 마음이 얼어불는
듯했다.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숨도 크게 쉴 수가 없었다.
칼날이 스친 손가락에서 금새 핏방울이 솟구쳐나왔다. 가
지하라가 피가 흐르는 손끝을 찻잔 위로 기울였다. 피는
거침없이 솟구쳐 뚝뚝 떨어졌다. 조금 지난 뒤 솟구치던
피는 저절로 멈추었다. 가지하라가 찻잔을 두 손으로 들어
오른쪽 줄 가까운 곳에 앉은 기리시마에게 내밀었다. 단도
도 함께 건네 주었다.
가지하라가 했던 것과 같은 순서와 방법대로 기리시마도
손가락을 베었다. 그런 다음 옆사람에게로 잔과 칼이 넘어
갔다. 하루야마가 네 번째, 그와 다다미 한 장 거리를 두
고 마주 앉았던 마쓰모도는 다섯 번째였다. 그렇게 넘기고
넘겨진 칫잔에 3분지 1 정도의 피가 찼다. 일곱 사람의 피
였다.
잔은 다시 가지하라에게 건네졌다. 그가 왼손으로 술병을
쥐고 다른 한손으로 찻잔에 모인 피를 병 속에 부어 넣었
다. 그런 다음 병을 들어 찻잔 옆에 놓인 밤톨만한 잔에
따랐다. 선홍빛이었다. 그리고 술병이 먼저의 차례대로 옮
겨지며 각 사람의 밤톨 잔을 채웠다. 하루야마는 물론 마
쓰모도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결코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엄숙함이 뼈속 깊이
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가지하라가 돌아온 술병을 상 위에 놓은 다음 잔을 들어
올렸다. 모두들 그를 따랐다.
"따라서 복창하도록!"
가지하라의 음성은 처음과 똑같이 굵고 낮았다. 깎지 못
한 수염이 구레나룻과 턱, 코 밑을 덮고 있었으나 불결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오늘의 역할에 더욱 어울
려 보였다.
"가지하라는 오늘 새 가족 두 사람을 맞이한다. 가지하라
는 조직의 이름이다. 우리는 맹세한다."
가지하라의 선창에 따라 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모두들
저마다 나직히, 그러나 힘을 주어 따라 말했다.
"나는 조직의 명령에 복종한다!"
"나는 조직의 비밀을 지킨다!"
"가족을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나의 인생은 가지하라와 함께 한다!"
복창이 거듭되면서 목소리도 합해졌다. 그날 이후 두 사
람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그 동안 두 사람은 PX 물품 암
거래, 양공주소개 등 닥치는 대로 해냈다. 다른 패거리와
대치한 채 싸움도 많이 했다.
그때마다 피를 흘리고 몸에는 하나씩 상처자국이 늘어갔
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잠잔 날이 집에서보다 더 많을 지
경이었다.
50년대에 접어들기까지 일본의 치안 당국은 관대했다. 어
지간한 폭력이나 절도행위 따위에는 아예 눈감아 버리기
일쑤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의 경제는 날이 다르
게 자리를 굳혀갔다. 군복 나부랭이들이 사라지고 제법 옷
매무새들을 찾기 시작했는가 하면 가는 곳마다 우글거리던
실업자도 없어져 갔다. 폐허가 되어 있던 도시에 새 건물
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다시 밝은 웃
음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조직이 여기저기 건설현장에서 무한정하게 필요한 골재를
수집, 공급하는 회사를 차리고 '가지하라구미'라는 간판을
내건 것도 그 무렵이었다.
하루야마와 마쓰모도는 조직 안의 그 누구보다도 민첩한
일꾼이었다. 낮에는 골재 채취장과 건설현장을 오가고 밤
에는 술집 문 앞을 지켜주었다.
두 사람이 처음 조직의 일원으로 가입하던 때의 작은 요
정그 이름은 '지즈루'라 했다. 천 마리의 학이라는 뜻
이다도 제법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마쓰모도는 이따금 그곳을 찾아가 술을 마셨다. 평소 말
이 없는 그가 거나하게 취하면 으레 꺼내는 얘기가 게라마
열도에서 있었던 일들이었다. 합판으로 만든 배에 가라앉
을 만큼 가득 폭약을 싣고 한밤의 어둠을 이용, 먼 앞바다
에 진을 친 채 함포를 쏘아대고 있는 미군함 가까이까지
저어가 배와 함께 부딪쳐 폭파해 죽는 결사대의 이야기며,
배가 고파 허겁지겁 따먹은 크고 탐스러운 버섯 때문에 죽
다 살아난 얘기, 손가락만한 달팽이 하나를 두고 대여섯명
이 먹기 위해 서로 노리고 있다 엉뚱하게 족제비가 물고
달아난 얘기들을 그는 끝도 없이 되풀이했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즐거움은 요정 지즈루에 가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조직원이 되던 첫날, 제일 마지막으로 자기 앞에 네모난
작은 술상을 놓아주던 앳된 소녀 스미꼬를 보는 것이 즐거
워서였다.
마쓰모도의 나이 서른다섯, 그 소녀도 스물다섯이 되었
다. 그녀가 어느 틈엔가 '지즈루'의 여급 중 두번째 가는
우두머리가 되어 있음을 깨달은 마쓰모도는 어느 날 갑자
기 청혼을 했다.
스미꼬도 마쓰모도가 싫지는 않았다. 배운 것은 없으나
성실하고 잔말이 없는 그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스미꼬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스
미꼬에게 있어서 이미 은퇴는 했다지만 지즈루의 여주인의
명령은 지엄한 것이었다. 전쟁으로 하루 아침에 천애고아
가 된 어린 소녀를 거두어 친딸처럼 길러 준 것이 바로 그
여주인이었기 때문이다.
마쓰모도와 스미꼬의 의중을 들은 가지하라가 이미 은퇴
하여 내심 깊숙이 들어 앉아 버린 지즈루의 여주인에게 스
미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너털웃음이 섞인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엄포였다.
스미꼬와 마쓰모도는 마침내 부부가 되었다. 중학교를 반
년쯤 다닌 것치고는 스미꼬는 아는 것이 많았고 몸가짐도
단정했다. 게이샤(일본 기생)가 갖추어야 하는 예의범절은
긴 세월 동안 그녀의 몸과 마음에 곱게 배어 있었다.
결혼 후 몇년 동안이나 아이를 낳지 못했던 그녀가 마침
내 아들을 낳았다. 마쓰모도는 새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안베라는 성씨를 가진 스미꼬의 가문에 입적, 마침내 일본
인이 되었다.
마쓰모도는 그때 조직 내에서 장물시장의 아비들을 다스
리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험과 그에 따른 위험이 있었다. 그것은 도적
들이 장물아비에게 팔아넘긴 물건들을 처분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지난 6월 중순. 이름이야 고물상조합회원들
이었지만 사실은 장물아비들로 조직된 관광단을 이끌고 마
쓰모도가 한국 관광길을 떠났다.
마쓰모도는 떠나기 앞서 며칠간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다.
스물이 갓 넘은 젊은 나이에 항의 한 마디 못하고 끌려나
온 이래로 소식은 커녕 그리워해볼 겨를조차 없이 어언 초
로의 나이가 되어 버린 지금, 준비없이 밟게 된 조국과 고
향은 설레는 기쁨에 앞서 더 큰 긴장과 불안을 안겨 주었
기 때문이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친 관광단은 귀국했으나 마쓰모도는
뒤처져 1주일을 더 머물러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고국을 다녀온 지 한달 남짓, 지금 마쓰모도 후꾸기,
아니 국적 잃은 이복기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가슴에 사무쳤던 망향의 길이 바로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
이 된 셈이었다. 하루야마는 스미꼬를 부축해 친정이라고
할 수 있는 지즈루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로부터 5개월 후. 오오사까 성을 에워싼 벚꽃들이 만개
했다. 꽃비처럼 떨어져 내리던 어느 날, 하루야마는 다니
마찌에 있는 자그마한 자기 아파트로 스미꼬와 겐지의 거
처를 옮겼다.
첫댓글 ㄳ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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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
즐독~~~!!!
즐독하고갑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았습니다..............굿!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