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연(林堜)의 息營亭과 느러지(曲江) 권역에서의 인물간 교유에 대한 고찰*
[1] 서론-왕건 전적지의 브랜드전략 활성화를 위하여
[2] 느러지(曲江) 권역의 역사인물에 대한 일고찰
[3] 임연(林堜:1589~1648)의 식영정과 교유관계의 추억
1) 만휴정 이후의 林堜의 식영정에서의 삶
2) 逸翁 崔希亮(1560∼1651)과 林堜의 교유
3) 南浦 金萬英(1624~1671)과의 교유
4) 歸川 李廷夔(1612~1671)와의 교유
5) 市南 俞棨(1607~1664)와의 교유
6) 剡湖 陳景文(1561~1642)과의 교유
7) 市西 金璇(1568~1642)과의 교유
[4] 결론
[1] 서론-왕건 전적지의 브랜드전략 활성화를 위하여
영산강에서도 특히 무안 몽탄 지역에는 다른 꿈결같은 추억이 있으니 이는 왕건의 꿈이 베어있는 곳이기에 지역 브랜드가치가 매우 높은 것이다.왕건의 꿈은 그저 고려 개국의 꿈이 아니라유서깊다는 말,명승고적, 명승지라는 말은 유명하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북쩍거림’의 요소가 형성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즐겨찾은 곳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한정훈(2018:88)은 변남주의 저서를 인용하여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풍호마을로 비정되는 회진포가 통일신라시기 국제교류항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은 나주임씨가 회진임씨로 칭하여지도 한다는 점과 더불어 주목할 만 하다, 고려이전부터 회진지역이 국제적으로 많은 인적교류와 물적교류가 있었던 지역이라는 점은 나주임씨의 주요 세거지 및 나주임씨문중 및 기타 문중과의 교류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역적 가치와 브랜드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왕건의 영산강 지지기반의 확보와 장화왕후의 피택으로 나주가 일종의 왕도적 성격을 띄면서 더욱 더 번창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고려 왕조 탄생의 기반으로써 왕건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파군다리(破軍橋),몽송리(夢松里:동강면),몽탄(夢灘),앙암(仰巖)* 전 목포대 중문과 교수,목포대 호남문화콘텐츠연구소 자문위원
앙암에 왕건의 발자취가 남아있다는 것은 앙암이 영산강가에 위치한 지역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곳에서 영산강 유역 전투전략을 구상하였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며, 왕건이 꿈을 꾸었다는 몽송리 마을에서 그리 먼 지역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따라서 몽송마을을 포함하는 느러지 전망대 지역은 왕건의 흔적을 수집정리하는 브랜화 전략이 필요한 지점이다.
,등이 있음에도 아직도 고려 왕건의 주요 사적지로서의 브랜드전략이 미흡한 가운데에 있다,2018년이 고려건국 1,100주년(전라도 탄생 1,000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왕조 탄생의 주요 적전지 및 나주 및 느러지 권역(곡강권역)의 고려왕조 탄생의 시발지로서의 발양사업이 행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權近(1352-1409)의 ≪양촌선생문집·응제시·진한(辰韓)≫(제1권)에는 왕건의 업적을 칭송한 응제시가 있다.
“삼한 세 국가가 솥발처럼 대치해 있어 천리길 전쟁에 시달렸다오.
이기고 지고 힘이 서로 적수라서 합병이 좀처럼 성공을 못 봤다오.
왕공이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키니 김씨는 멀리서 정성을 바치었네 왕공(王公)이~바치었네 : 고려의 태조(太祖) 왕건(王建)에게 신라 경순왕(敬順王)이 항복한 일을 가리킨다.
이로부터 오늘날에 이르도록 우리 백성 삶의 터전 다져왔었네 “三韓曾鼎峙,千里困兵爭。勝負力相敵,兼幷功未成。王公初擧義,金氏遠輸誠。自此至今日,吾民得遂生”
”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점필재집(佔畢齋集)·시집· (詩)·금성곡(錦城曲)≫(제22권)에서 나주를 중심으로 고려왕조를 건국한 왕건의 치적과 관련사연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염백의 누선이 변한 지방을 지나가니 환호성이 이미 금성산을 진동하였네.
흥함도 알고 폐함도 알아 먼저 귀순했으니 예로부터 주민들은 좋은 인상이 있었도다 “鹽白樓舡過卞韓,歡聲已振錦城山。知興知廢先歸順, 從古州民有好顔”
” -금성곡(錦城曲) 제1수
“교활한 오랑캐 깃발이 덕진을 뒤덮었을 때 어찌 남포에 천인이 주둔한 줄을 알았으랴
가련하여라 맹덕의 배 천 척의 군졸들은 끝내 주랑의 한 횃불 티끌이 되고 말았네 “猾虜旌旗蔽德津,豈知南浦駐天人。可憐孟德千艘卒,終作周郞一炬塵。”
”
-금성곡(錦城曲) 제2수
“용손이 당일에 군함을 여기에 대고서 아침엔 구름 되고 저녁엔 비 되는 신녀를 만났네.
천재에 박씨 계집과 참으로 같은 법칙인데 행인들은 그곳을 가리켜 완사천이라 하네 “龍孫當日艤戈船,忽夢朝雲暮雨仙。千載薄姬眞合轍, 行人指點浣紗泉”
”
-금성곡(錦城曲) 제3수
“비단 빨던 강가는 혜종 외가의 고향인데 흥룡사 안에 그 서광이 어리었도다.
지금도 부로들이 남긴 덕을 사모하여 퉁소와 북 울려 추대왕을 즐겁게 하네 “濯錦江邊舅氏鄕,興龍寺裏藹祥光。至今父老懷遺德,簫鼓歡娛皺大王”
”
-금성곡(錦城曲) 제4수
朴祥(1474~1530)은 “왕건의 전함이 남쪽으로 내려가니,철원의 궁예의 왕권은 써늘한 바람이 불었다네(王建樓船下天南。鐵原王氣風凄涼) ≪訥齋先生集·古詩·七言·錦江謠 ≫(권2)
”라고 노래하였다.
왕건 및 관련 설화·전설 및 시가를 전면적으로 수집하여 느러지지역을 느러지 전망대 지역뿐이 아닌 왕건 설화 탄생지 및 왕건 고려왕조 탄생의 전적비로 브랜드하는 전략이 필요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윤소종(尹紹宗:1345~1393) 고려 후기의 문신(1345∼1393). 자는 헌숙(憲叔).호는 동정(桐亭).이색(李穡)의 문인이다. 문집으로 《동정집》 8권이 있다.
의 <앙암(仰巖)에서 이첨(李詹) 李詹(1345-1405)은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중숙(中叔), 호는 쌍매당(雙梅堂). 할아버지는 보문각제학 이달존(李達尊)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많은 시를 남기고 있으며, 유저로는『쌍매당협장문집(雙梅堂篋藏文集)』이 있다.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과 함께 지음(仰巖與李詹同賦) ≪동문선·칠언율시(七言律詩)≫(제17권)
>에는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를 읊은 한시가 있다.
“금성(나주)의 성이 남쪽 해변가에 있는데 오백 년 전에 국모가 여기에서 났네 고려 태조의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는 목포(木浦)에서 났다. 태조가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나주로 출진하던 중 목포에 대었다가 후가 빨래하는 것을 보고 불러 관계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혜종(惠宗)이다. 뒤에 그 땅에 용흥사(龍興寺)를 지었다.
한 척 배 타고 견훤이 귀순하고 만개의 깃발로 현묘께서 여기에서 출진을 맹세했네
흥룡사 밖에 서기 아직 떠있고 개계원 앞에 흰 연기가 나는구나.
성조(고려 태조)의 누선들 여기에서 맞았으니
동쪽으로 왜를 치는 오늘날 생각 그지 없어라. “錦城城在海南邊,大姒家邦五百年.一葦甄王歸命路,萬旟顯廟誓師天. 興龍寺外浮佳氣,開界院前生白煙. 聖祖樓船迎此地,東征今日思悠然”
”
윤소종과 이첨이 왜 앙암에서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를 읊은 시를 짓게 된 것일까? 앙암은 흥룡사가 있는 가야산 아래 산기슭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태조왕건이 영산강을 바라보며 전략을 짜던 곳이라 ‘앙암’이라고 이름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한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의 <동갑(同甲)인 백운(白雲) 스님의 서한을 받았는데, 이것을 가지고 온 자의 말에 의하면 지금 나주(羅州) 흥룡사(興龍寺)에 있다고 하였다(得同甲白雲師持書來者云。今在羅州興龍寺。)>(≪목은시고·시(詩)≫[제31권])시는 이 흥룡사에 대한 몇가지 사실을 전해준다.
“가지산의 사찰을 떠나자마자 혜종의 사당 혜종(惠宗)의 사당 : 혜종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맏아들로 2대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그의 모친인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가 흥룡사 터에서 임신하여 그를 낳았으므로, 흥룡사 안에 혜종사(惠宗祠)를 세워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卷35 羅州牧》
을 또 받들게 되었구려.
잘되고 못되는 건 모두 운명 탓 인연도 원래 시기가 있지 않으리까?
원숭이 매달린 가지 구름에 걸린 산이거나
고래등 물결이 태양 아래 불어 닥치는 바다거나
분명코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인지를
뒷날 다시 스님에게 물어보리이다“纔離迦智寺,又奉惠宗祠。得失皆由命,因緣自有時。猿枝雲裏掛,鯨浪日邊吹。的是安心處,他年更問師。”
”
이 시는 혜종을 섬기는 나주 흥룡사에 거처하던 백운선사가 있었으며, 이 백운선사는 목은 이색과 동갑이었으니 1328년생이며, 그는 가지사(迦智寺)를 떠나 흥룡사(興龍寺)로 이적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색이 그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그의 저서로는 백운경한선사어록(白雲景閑禪師語錄)과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이 전해지는 데, 그 중 유명한 어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법도 본래 법이 없고 마음도 본래 마음이 없어 마음과 법 두가지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참된 실상이다(法本無法,心亦無心,心法兩空,是眞實相)”
“크나큰 도는 늘 눈앞에 있다.비록 눈앞에 있으나 보기는 어려우니 만일 도의 참 모습을 깨우치려거든 소리와 빛깔과 말을 떠나지 말라(大道常在目前,雖在目前難覩,欲悟道眞體,不離聲色言語)”
둘째로 우리나라에서 느러지(曲江)와 같은 한반도 지형을 보여주는 곳이 여러 곳이 있으나,원래 曲江은 중국 서안의 ‘曲江池’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 곡강에서 벌어지는 각종 과거급제 축하연회 및 관련 민속을 지칭하는 말이다. 느러지(曲江)가 의미있는 곡강이 되기 위하여 느러지 전망대지역을 곡강시비 공원 내지는 왕건 전적 기념공원으로 조성하여 곡강을 읊은 한시를 감상하여 옛 선비들의 풍치를 느끼게 해주고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식영정 일대를 곡강시비공원 내지 한호시비공원으로 조성하는 등 왕건,최부(崔溥:1454-1504),정개청(鄭介淸:1529~1590),박순(朴淳:1523~1589),임연,이정기,진경문,유계 등 느러지 권역의 인물들의 시비공원을 조성하여 브랜드가치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또한 식영정 지역은 한호 임연의 식영정 한시 및 교유한 인물들의 한시를 수집정리하여 식영정 시비공원으로 조성함으로서 지역적 브랜드 강화전략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고는 광범위하게 식영정을 중심으로 한호 임연과 교유한 인물들 한호 임연 逸翁 崔希亮, 南浦 金萬英(1624~1671), 歸川 李廷夔, 市南 俞棨(1607~1664), 剡湖 陳景文를 중심으로 느러지권역(곡강권역)의 인물들간의 교유를 살펴봄으로써 영산강 물길을 통하여 어떻게 삶과 기쁨을 나누었는 지 살펴볼 것이다.
또한 느러지권역(곡강 권역)의 핵심어인 곡강이 중국에서 과거 급제자들의 축하연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향후 느러지권역의 명승관광 전략에 있어서 중국의 곡강 민속 또는 우리나라 과거급제자를 위한 聞喜宴 축제민속을 복원하여 보다 많은 볼거리를 제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식영정 및 느러지(曲江)가 유명해진 이유는 영산강이 오랜세월 동안 흘려가면서 만들어낸 풍경경관 그중에서도 曲江(느러지)으로 인하여 유속이 약해지는 독특성,늘상 아침저녁 안개로 뒤덥혀 만들어지는 아른아른한 몽상적인 갈대밭 풍경이 주요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일대 지역에 夢江,夢灘,夢灘江,夢湖, 夢江里,夢灘精舍(식영정을 지칭함),曲湖,梨湖,楓湖,月湖,沙湖 등 여러 가지 지명을 남겨놓았다.
임서의 사위인 歸川 이정기(李廷夔)의 ‘작은 서재를 느러지[曲江] 물가에 신축하였으니(小齋新築曲江潯)’와 ‘굽이굽이 맑은 강 보이는 것마다 산이요(曲曲淸江面面山)’라는 말과 李鍾奭(1898~1963)의 곡호정(曲湖亭)시에서 ‘아홉구비 강 물줄기(九曲溪流)’는 섬호와 느러지(曲江)을 포함하는 영산강 굽이굽이를 묘사한 말들(뒷부분 이정기 교유부분을 참고)은 모두 느러지 권역의 특히 ‘굽이굽이 맑은 강’은 느러지(曲江)를 포함한 영산강 아홉구비(九曲)를 브랜드전략화하는 데에 큰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특히 이정기(1612년~1671년)는 예조참의, 성균관대사성, 이조참의, 이조참판을 지닌 선비로 그가 약 10여년간 느러지권역인 식영정 근처 임씨가문에서 지어준 정관당에서 지내면서 느러지권역의 풍광에 대해 기록한 많은 한시들은 느러지 권역의 경관의 브랜드가치를 높여주게 될 것이다.
李鍾奭(1898~1963)의 곡호정(曲湖亭)시에서 ‘아홉구비 강 물줄기(九曲溪流)’는 섬호와 느러지(曲江)을 포함하는 영산강 굽이굽이를 아홉구비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은 영산강 아홉구비 물줄기 지역을 무의구곡가(武夷九曲歌)처럼 나주시,무안군,전남도가 협력하여 영산구곡 선정을 통한 고급관광브랜드전략을 전개하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모든 강변 경관이 어느 곳이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으나, 곡강 지역은 특히 고려왕조의 탄생의 기반을 다진 왕건의 꿈이 서려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느러지 권역은 명승으로서의 가치와 무한하게 확장이 가능한 브랜드가치를 품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향후 느러지 권역 경관을 명승으로 만들고 나아가 나주,무안 지역의 지역을 아름답게 만들려는 꿈이 지역인의 꿈이자 남도의 꿈이며,전남의 아름다운 꿈이 되도록 본고에서는 느러지권역의 설정,느러지권역 인물등에 대한 조명,그리고 몽탄 식영정을 중심으로 한호 임연과 느러지 권역에 속하는 인물의 한시 교유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느러지(曲江) 권역의 역사인물에 대한 일고찰
현재 느러지 전망대와 몽송마을은 나주시 동강면(桐江面) 옥정리에 속하여 있다. ‘동강(桐江)’이란 명칭은 중국 절강성(浙江省) 동려현(桐廬縣)에 있는 물 이름으로, 왜 곡강 부근에 이러한 중국 명칭에서 온 지명을 가지게 되었는 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후한(後漢)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이 은둔하여 낚시질한 곳이다.자릉(子陵)은 은사로 유명한 엄광(嚴光)의 자. 엄광은 우리나라에서 엄자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나라 광무제(光武帝)가 세 차례나 초빙했어도 끝내 응하지 않고 동강(桐江)에 은둔하여 낚시질로 낙을 삼았다고 전해지는 것이다.(≪後漢書·高士傳≫) 이러한 동강의 이미지는 은일적이며 신비로운 느낌을 더해주어 느러지(曲江)권역의 안개과 파도,갈매기,자유로움,신선적인 풍경 등 풍류를 좋아하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많은 관심과 방문을 받게 하고 주목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동강면 느러지 권역(곡강권역)의 인물로 최부(崔溥:1454-1504),정개청(鄭介淸:1529~1590),박순(朴淳:1523~1589),鄭可臣,陳景文,林堜,李廷夔 등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최부는 ≪漂海錄≫외에 <撫夷亭記>,<慕華館記>,<澄淸樓記>,<小心樓記> 및 약간의 상소문만 남기고 있어 당시의 교유관계를 볼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아쉬움이 있다. 최부의 ≪漂海錄≫의 표해록을 통하여 곡강 및 나주 일대 그리고 조선 전지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서인범(2002),박명숙(2011)은 최부의 표해록에 나타난 강남의 이미지를 전문적으로 고찰한 논문으로 유토피아처럼 멋진 강남의 이미지가 ≪漂海錄≫이후 강남 전고 사용의 증가-예를 들면 ‘왕자유(王子猷)의 고사 뒷부분의 유계와의 교유 부분에서 자세히 설명함으로 부연하지 않음
’등등 인용의 증가 및 팔경,구경,구곡 등 풍경을 읊은 한시의 작시의 대폭적인 증가로 나타났을 것으로 보이며,또한 곡강을 비롯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西湖’놀이 본따기 및 놀이형태로 뱃놀이 및 상당한 지역별 풍습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서인범(2002:687)은 <조선 관인의 눈에 비친 중국의 강남>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즉 사행(使行)에게 있어 북경 가는 도중에 대하는 山川만도 대단한 장관으로 여길 정도였는데,최부의 강남 이야기를 듣고는 감탄하였던 것이다.중국의 강남은 조선 사람들이 다녀온 일이 없는 지역으로 게다가 최부가 그곳 官이나 紳士들과의 접촉을 짧게나마 조선사신들에게 이야기한 점이 부러움을 샀으리라 본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성백효 번역 ≪고봉전서(高峯全書)≫(2007)중 ≪고봉 선생 연보(高峯先生年譜)≫의 명종22년 정묘(1567)10월조에 주해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유효춘은) 외할아버지 최부(崔溥)의 학통을 계승해 이항(李恒),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호남 지방의 학풍 조성에 기여하였다. ”
최부의 ≪漂海錄≫간행과 중국 표해 특히 강남을 두루 다닌 이야기들은 조선 문인들 사이에 강남 학습열풍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이며,또한 최부에게서 공부를 하려는 많은 사람들이 곡강에 오거나 느러지 권역이 이전과는 다른 최부 방문열풍을 일으켰을 것으로 보여진다. 최한선(2011:350)은 최부의 학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금남 최부의 학맥은 尹孝貞, 林遇利, 柳桂隣, 羅晊,尹衢, 尹巷, 尹行, 尹復, 유성춘(柳成春), 유희춘(柳希春), 李仲虎, 정개청(鄭介淸), 羅士忱(錦南의 外孫子), 羅德明 등 6 兄弟, 羅緯素(羅德埈의 子) 등으로 이어진다. 최부의 호남학맥은 安裕-權溥-李穀-鄭夢周-吉再-金淑滋-金宗直-崔溥(1454-1504)로 이어지는 사림의 正脈이었다.”
금남 최부의 이러한 학문적 영향력으로 상당히 많은 문인들이 느러지(曲江),이산진(梨山津)쪽으로 모여들거나 이 지역을 유람하기를 즐겨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개청은 나주 대곡동(大谷洞)에 대대로 살다가 중년에 나주의 곡강촌(曲江村)에 이주하였으니, 박순이 있던 곳과 10리 사이였을 뿐입니다. 박순이 개청에 대하여 듣고 보고 안 바가 어찌 방준(안방준)보다 상세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친애하고 마음을 허여(許與)함이 이와 같이 하였겠습니까 “介淸世居羅州之大谷洞。中年移居于羅州之曲江村。與朴淳所居相距十里間耳。淳之於介淸。所聞所見所知。豈不詳於邦俊而親愛之許與之若是乎哉。”≪대동야승·기축록속(己丑錄續)·기사년 4월 11일 유학 나두하 등의 소(己巳四月十一日儒學羅斗夏等疏)≫
”
정개청은 원래 나주 대곡동에서 거주하였는 데, 중년에 왜 나주 곡강촌 즉 느러지 권역으로 이주하게 되었을까? 정개청도 역시 곡강인인 것이다. 朴淳도 살던 곳이 정개청이 살던 곡강촌에서 10리 정도의 거리라 서술하고 있으니, 1리가 0.39킬로이니 3.9킬로미터인 것이다.박순도 곡강 지역에 살았음이 분명하며 따라서 박순도 느러지 권역의 인물인 것이다. 정개청이 중년에 곡강으로 이주한 이유는 바로 곡강(曲江)이 주는 선비적 이미지와 최부의 고향이라는 점이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식영정 교유인물의 한시에서 많이 등장하는 ‘南州’,‘曲江’,‘南湖(영산강의 남쪽 호수같은 지역)’,‘江南(영산강 남쪽)’이 주는 이미지는 강남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영암 서호면의 서호란 바로 항주의 서호가 아닌가?
≪대동야승·기축록(己丑錄)·하·정곤재 행장(鄭困齋行狀)≫에서는 정개청이 말년에 무안 엄담(淹潭)에서 살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엄담이 곡강촌에 속한 지역명인 것으로 보여진다.
“만년에는 무안(務安) 엄담(淹潭)에 살았고, 윤암(輪巖)에 정사(精舍)를 지어 도를 강론하니 배움에 뜻이 있는 원근의 선비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선생이 강의계(講義稧)를 만들고 공부를 가르칠 때 나덕준(羅德峻)ㆍ나덕윤(羅德潤)ㆍ안중묵(安重黙)ㆍ최홍우(崔弘宇)ㆍ나덕원(羅德元)ㆍ송제민(宋濟民)ㆍ나덕현(羅德顯)ㆍ정식(鄭湜)ㆍ유양(柳瀁)의 무리들이 특히 배움을 깊이 받았으며, 먼 곳에서 공부하러 온 사람으로는 남이공(南以恭)과 종실의 화천정(花川正) 이수붕(李壽鵬) 등이 있으며,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선생이 여러 사람들의 자실과 성품에 따라 힘껏 가르쳐서 반드시 귀로 듣고 마음으로 알게 한 후에야 그만두니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이라도 점차 성취되었다. 집에 있을 때에는 닭이 울면 낯을 씻고 머리를 빗어 부모의 앞에 나아가 문안하고, 나오면 처자와 종이 차례로 인사하는 등 예법이 엄정하고 집안이 엄숙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죽도 넉넉히 먹지 못했으나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반찬을 갖추어 부모를 봉양하고 향당에 처할 때는 존비(尊卑)와 장유의 차례와 경조의 예법을 곡진히 차려 온순하고 간곡한 정성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공부하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주로 나주,광주,화순쪽이었으므로 중년 이후에 아마도 거처를 곡강에서 위쪽으로 옮겼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오진아(2018)은 정개청의 학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정개청은 先祖가 귀양을 왔다가 나주에 정착한 한미한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는 견문을 넓히기 위해 上京하였다가 박순의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정개청은 이 시기를 서경덕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정개청이 박순을 통해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준다. 또한 그는 박순 덕분에 더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게 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 따라서 박순과 정개청이 사제관계를 맺었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박순이 정개청의 학문적 인도자 역할을 하며 영향을 준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정개청이 말년에 무안으로 내려가 강론하자 그의 명성을 듣고 주변의 문사들이 모여들었다.48) 그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기축옥사 당시 그를 추존했다는 이유로 禁錮된 자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는 기록에서 정개청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오진아(2018): ≪16-17세기 호남 困齋學派의 형성과 전개≫(성균관대 석사논문)
”
金璇의 ≪시서유고(市西遺稿)≫(365)애 <상사김제호를 회상하며(憶金上舍霽湖>)라는 시에 풍촌 즉 풍호마을에 살다가 몽탄으로 이사한 김제호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풍호 마을에서 오랫동안 가계가 빈한함을 싫어하여
가족들을 조각 돛배에 실고 몽탄으로 내려갔다네.
한호 형님과 땅을 차지하여 한 지역을 나누었고
조용히 어부를 따라서 긴 낚싯대를 껴안고 있다네
화포(花浦)에서 술에 취하기를 내기하느라 저녁되어 햇빛이 지는구나.
하늘이 나를 용서하지 않아 동생을 뺏어가니
두진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얼굴을 적셨던가 “楓村久厭計淸閑, 家載扁舟下夢灘。占與閑兄分一面, 靜隨漁父抱長竿。詩成花浦朝陰散, 醉賭沙湖夕照殘。天不貰吾還奪弟。”
”
여기서 “한호 형님과 땅을 차지하여 한 지역을 나누었고(占與閑兄分一面)”라고 하였으니,‘김제호’는 몽탄으로 내려와 한호 임연이 식영정 근처의 몽탄 어느 지역으로 이사하여 시서 김선처럼 신선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둘째로 花浦에 김제호와 함께 술내기를 했다는 것이니 화포라는 지역은 몽탄에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는 포구임을 보여준다.역시 김제호도 몽탄사람이며 본문에서 서술하는 것처럼 느러지 권역에 속한 인물이 될 것이다.
느러지 권역의 설정을 위하여 나주시 동강면 양지리 1구 437번지에 있었던 곡강초등학교의 위치도 매우 중요하다. 곡강초등학교는 양지리 일대의 지역 주민들에 의해 양지리도 느러지(곡강) 권역으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동강면 월송리에는 진경문을 기념하는 <剡湖陳先生景文遺蹟碑>가 1977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비문에는 “진씨는 이름이 경문이며 자가 여욱이고 호가 섬호이다.나주 곡강 사람이다(陳公諱景文,字汝郁,號剡湖,羅州曲江人也.)”라고 쓰여져 있다.이런 점에서 볼 때에 정개청,박순,진경문,최부 모두 곡강인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월송리의 진경문 유적지로 접어드는 길에 송암저수지가 있는 데,마을사람들에 의하면 비가 많이 올 때에 송암저수지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전하고 있다. 송암저수지에는 오래된 나무가 있으니 월송마을 현재 도로와 앞의 논에는 모두 뻘밭으로 과거에 물이 들어왔을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옛날에는 벽련산 기슭에 집들이 자리잡았을 것으로 보인다.따라서 월송리 앞 송암저수지 앞쪽이 과거의 섬호 지역으로 비정된다고 볼 수 있다. 월송리 진경문 유적비와 송암 저수지 사이에 ‘진주강씨 양희공파 후손 송암 세거기(晉州姜氏 良僖公派 後孫 松岩 世居記)’와 ‘晉州姜氏曲江世居亭’이 세워져 있는 데, 세거기에는 “24세손 (姜)聖秀께서 1869년 영암 후정(後亭)에서 나주 곡강(曲江) 송암촌(松岩村)으로 이거(移居)하였다”고 쓰여져 있으니 약간 후대이기는 하지만 송암마을 지역민 역시 이 지역을 느러지(曲江)권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병장 최오(崔澳:1567∼1597)의 ‘최오’에 대하여 나주 동강면 곡강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으며,‘忠臣崔澳之閭’가 동강면 월송리 송암마을에 세워져 있다.몽탄 일대에서는 많은 의병들이 순절했다. 대굴포를 지나 북상하는 왜군에 맞서 장성군 남면 마령리 백련산에 진을 쳤던 최오(崔澳) 의병장은 김충수 부부 순절 사흘 뒤인 9월 27일 지원군 없이 외롭게 싸우다 화살도 돌도 떨어져 의병들과 함께 순절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은 다음과 같이 최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 전라남도 나주(羅州) 동강면(洞江面) 곡강(曲江)에서 태어났다.1597년(선조 30) 그는 평민들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여 왜군(倭軍)의 침입에 대비하였다.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전라남도 나주 영산강(榮山江)의 지류(支流)인 몽탄강(夢灘江)을 거슬러 침범하였다. 왜적이 동강면의 곡강(曲江)을 따라 월송리(月松里)에 닻을 내리고 상륙하자 그는 의병진을 이끌고 공격하여 이들을 물리쳤다.이후 그는 왜적이 다시 침입할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을 백년산(百年山:이것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보인다.白蓮山이 맞다)으로 옮겨 방책(防柵)을 쌓는 등 대비를 하였다. 그의 의병대는 불과 5백여 명의 인원으로 7천여 명의 왜군 공격을 막아내느라 애를 썼으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그를 포함한 많은 의병들이 순절하였다.”
또 다른 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97년 8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최욱은 임신 8개월의 오씨 부인 등 가족들을 흑산도로 피신시키고 300여 명의 장정, 어린이 및 부녀자, 노인 등을 모아 거병했다. 9월 10일 왜적의 첩자들이 영산강을 거슬러 나주 동강면 월송리에서 10여 명이 내리자 최욱이 도리깨를 들고 나가 무찔렀다. 이후 다시 찾은 왜적에 대응해 매복해 있다가 활과 기름으로 왜적 선박 10여 척을 불태워버렸다. 대규모 침략이 있을 것으로 예상한 최욱은 인근 白蓮山(월송리 뒤쪽 산의 이름)으로 곡식과 무기를 옮기고 화포도 구했다. 산 위에 군사를 배치했는데, 1,000여 명의 왜적이 쳐들어오자 곳곳에 깃발과 허수아비 등 위장성세로 막아냈다.”
김예수(金禮秀:?~1593) 자는 이칙(而則)이다. 본관은 나주(羅州)이다.대제학(大提學) 김대경(金臺卿)의 후예이다.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돈독한데다 생각마저 매우 깊었다. 관직은 주부(主簿)에 제수(除授)되었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무과 급제한 선전관(宣傳官) 정봉수(鄭鳳壽)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몽탄면 사창리에 있는 우산사(牛山祠)에서 배향되고 있다.
는 2차 진주성전투에서 전사하였고 김예수의 사촌형인 金忠秀(1538~1597)는 1597년 9월 24일 대굴포 일원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순절했다. 당시 김충수는 왜적 1만여 대군이 영산강 중류 몽탄을 거슬러오며 살상과 약탈을 자행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의병을 이끌고 출전했다. 하지만 1000여 명에 지나지 않는 의병군으로 적을 이길 수는 없었다.정유재란 당시 몽탄강 유역은 목포에서 무안, 함평, 나주, 광주로 진입하려는 왜적과 이를 저지하려는 호남의병들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조총으로 무장한 수많은 왜적들에 맞서 김충수와 김덕수 형제, 최오, 정기수, 송박, 박종룡이 의병을 일으켜 조선과 이 땅의 백성들을 지키려 했다. 몽탄강 유역은 호남의병사(湖南義兵史)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의미가 깊은 곳이다. 영산강 물줄기는 국제항로로서의 중요성 고대 크고 작은 무수한 삶과 죽음의 흔적들이 얼룩진 지역인 것이다. 왕건-견헌간 전투, 임진왜란,정유재란 및 동학혁명 등 영산강을 둘러싼 치열한 삶의 죽음 영산강의 바람과 파도, 돛배에 몸을 실고 즐긴 추억과 물멍 ‘물멍’은 ‘바닷물멍’ 즉 바다를 바라보면서 감상하는 물멍과 ‘강물멍’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절벽이나 물가에 정자를 세워 바다를 바라보거나 배을 띄어 물놀이하는 것을 ‘강물멍’이라는 현대적 개념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의 기억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미있게 의미있게 풀어내는가 하는 과제가 우리들에게 주어져있는 것이라 하겠다.
월송리 강 건너편은 봉산천 입구이며 덕암마을이 있고, 뒤쪽으로 초당산과 잉어산이 있다.동강면 대지리의 건너편에 석진천(石津川)이 있으니 아마도 조선시대에 시문에 언급되는 石浦는 이 지역으로 보여진다.
정가신(鄭可臣:1224~1298)은 자가 헌지(獻之)고 처음 이름은 정흥(鄭興)이며 나주(羅州 : 지금의 나주시, 정확하게 말하면 동강면 양지리 시중촌) 사람으로, 부친 정송수(鄭松壽)는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정가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영특하여 책을 읽고 글을 지으니 당시 사람들로부터 크게 추앙을 받았다.일반적으로 정가신이 나주사람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그는 탄생지가 동강면 양지리 시중촌이며,후에 정가신의 벼슬명칭으로 이름이 시중촌(侍中村)으로 바뀌어 졌을 것이다. 이 시중촌에 ‘고려재상 문정송 설재(雪齋) 정가신(鄭可臣)선생 탄생유허비’가 세워져있다. 비문에는 정가신의 한시가 전해진다.
“해동의 남쪽땅에 금성산이 솟아있고 산밑에 내가 살던 초가삼간 그리워라
앞뒤에 내가 심은 버드나무 복숭아는
봄오면 어김없이 시를 짓기를 기대하리
고향은 삼천리밖 멀고멀어 아득한데 이 몸은 십이제왕 대도에서 노니누나
옥퉁소 부는 소리 강남꿈을 깨우나니 창밖엔 무심한 달 새벽녘이 되었구나 “海東南有錦城山, 山下吾廬草數間。巷柳園桃親手種,春來應詩主人還。家在三千里外地,身遊十二帝王城。玉簫吹斷江南夢,窓外無心月五更” 번역이 일부 잘못된 ‘應詩’부분은 다시 번역하였다.
”
이 시의 후반부 4구인 “家在三千里外地。身遊十二帝王城。玉簫吹斷江南夢。窓外無心月五更。” 구절은 거비(去非) 김지수(金地粹:1585~1639)가 선조29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서 설재 정가신의 한시 출처가 무엇인지 후에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태천선생집(苔川先生集)·附錄·事實≫(권3)
. 뿐만 아니라 정가신의 이 시의 제목이 <황제의 도시에서 고향을 그리다(皇都思鄕)>이니 여기서 ‘12제왕성’이란 북경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그가 시를 지은 지역이 원 대도인 북경인 것이다.
이미 곡강초등학교의 위치와 관련하여 양지리 지역민들에게 ‘느러지(曲江)’라는 명칭은 지역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명으로 보여진다. 또한 누대로 나주 정씨가 이곳에서 고려시대부터 고위관직을 맡았음도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이 시중촌에서 송암 저수지는 그리 멀지 않은 지역임도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누대로 벼슬을 하면서 지역적 브랜드가치가 높아지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아마도 시중촌 중심으로 나주정씨 유명인물들에게 학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몰려들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또한 이 후반 4구가 김지대(金之岱)의 <遊中華>시와 완전히 같아 한시학자들간에 정가신이 김지대의 시 <遊中華>를 페인트칠하여 칠언율시로 제목을 ‘皇都思鄕’을 재창작한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들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강남의 꿈(江南夢)’이란 영산강 남쪽인 이 지역의 ‘江南’,‘南江’,‘曲江’등의 명칭을 고려할 때에 고려중후기부터~조선 중후기까지 느러지 권역은 조선의 ‘강남’으로 대한민국의 ‘강남’의 꿈 풍류에 넘치는 선비들에게 조용하게 살고싶은 유토피아의 땅으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림> 느러지(曲江) 권역의 설정
앞서 최부의 표해록에 섬계(剡溪)에 대한 기록을 인용하였으니 표해록 이후에 이쪽 지역을 섬호로 부르는 전통이 광범위하게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대지리와 송월리 뒤쪽으로 백련산이 있고,백련산 아래쪽으로 신라산이 있고 이 신라산 아래쪽에 동강면 곡천리(曲川里)가 있으니 곡천리 역시 곡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개천이라 곡천으로 그 이름이 지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 논의된 여러 가지 점을 고려하여 본인은 느러지권역을 설정하였으며,이러한 느러지권역에는 양지리의 정가신의 시중촌을 포함하며, 동강면 몽강리가 포함되며, 사호나루터지역은 포함되지 않는다.또한 식영정은 느러지 권역의 중요 인물은 최부,임연,진경문이며, 조사를 통하여 느러지 권역의 인물로 정가신,정개청,박순,정민흥,김충수 등이 포함된다. 또한 지역출신은 아니지만 고려왕조의 왕건은 느러지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므로 느러지 권역의 인물로 포함하여 서술하며, 귀천 이정기 역시 10여년 이상 식영정 주변 정관당에서 거처하고 식영정을 중심으로 임씨문중의 인물들 및 기타 인물들과 교유하였다는 점,또한 비래각 아래의 암각 글씨를 남긴 인물이라는 점,느러지(曲江)지역의 풍물과 추억을 대대적으로 한시로 기록하여 남겼다는 점(뒷부분의 임연과 이정기의 교유부분을 참고할 것)에서 느러지 권역의 인물로 포함하였다.향후 좀더 광범위한 느러지 권역 인물들에게 대한 추가적 조사도 필요할 것이다.
[3] 임연의 식영정과 교유관계의 추억
임연(林埬, 1589~1648)으로, 본관은 회진(會津), 자는 동야(東野), 호는 한호(閑好)이다. 1613년(광해군5)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와 사간원의 여러 관직 및 승지를 역임하였다.吳以久(1597∼1655)의 ≪도림유집(道林遺集)≫에는 <息營亭懷古> ≪도림유집(道林遺集)≫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息營亭懷古>시는 ≪도림유집(道林遺集)·五言四律≫
시가 있는 데 여기에서 제목 아래 간단한 시서가 “석천 임억령 유허에 정자가 있다(林石川億齡遺墟有亭)”라고 적혀있다. ≪도림유집≫은 道林 吳以久(1597∼1655)의 遺文集으로 그가 죽은 후 208년후인 1863년(哲宗 14)에 그의 7代孫 吳泰圭 등이 편집, 간행한 것이다. 1808년(純祖 8)에 그의 후손인 先行 등이 그의 文集을 편찬하고자 다방면으로 유고를 수집하여 族叔에게 편차를 등사케 하였었는데 완성하지 못하고 화재로 없어져 버렸다. 그러므로 1860년에 그의 7代孫인 泰圭등이 다시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吳以久의 字는 徵甫, 號는 道林이다. <식영정을 회고한다(息營亭懷古)>시는 다음과 같다.
“한 기운이 순환하여 합쳐졌다가는 다시 흩어진다네
식영정 언덕에는 얼마나 여러번 세워졌을까
영웅의 호탕한 기운은 이제 아득해지고
죽은 후에 어떻게 이 날의 슬픔을 감당할거나 “一氣循環合則離, 息營亭畔立多時。英雄爽槩今冥漠, 後死那堪此日悲。”
”
이 시의 내용을 보면 한 사람의 유허 위에 다른 사람의 정자가 세워지는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 시의 내용 즉 식영정이 원래 임억령의 유허였다는 기록은 오이구의 한시 안에 林㙔와 화답시가 많음을 통하여 오이구가 나주임씨 가문과 오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시의 내용이 거짓이 아닐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에 본인은 나주 회진에 있는 백호문학관에서 전시물중 오이구와 관련 중요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백호 임제는 1587년 39세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시와 소설 등을 남겼다.그의 필적은 많이 유실되었지만 남아있는 유필을 1710년 노촌 임상덕이 임제의 차남인 임준의 사위 오이구(吳以久)의 집(영암 도림마을)에서 찾아내어 『백호필적(白湖筆蹟)』으로 펼쳐냈다.~중략~이후 2006년 나주임씨 백호공종중에서 백호 임제의 유필 130여편을 단행본으로 재편집하여 출판하였다”
林埈(1570~1627)은 자가 叔瞻이고 임준은 아들이지만 임제의 차남도 아닌 임준의 사위인 오이구에게 문중에서 귀하게 여겨지는 『백호필적(白湖筆蹟)』이 오이구에게 전해진 것은 아마도 백호 임제 사후에 임씨 가문에 불어닥친 액화로 인하여 가문의 비밀회의를 통하여 임준의 사위인 오이구 집안에 숨겼다가 임상덕 시기에 이르러 백호필적 자료를 가문에 다시 돌려주도록 요구한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은 오이구가 그의 저서인 ≪도림유집≫의 <息營亭懷古>에서 전해주는 “식영정은 임억령의 유허에 있다”는 것은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매우 중요한 사실로 보여진다.
도림유고에는 <次林尙州瑞韻二首>(70쪽),<贈林西湖>(66쪽),<次林汝瞻溪亭韻>(64쪽),<次羅僉知韻>(62쪽),<呈羅僉知二韻>(59쪽),<挽林仲瞻>(57쪽),<<呈羅僉>(51쪽)>,<呈東里>(49쪽) 등 임씨 가문의 인물과의 교유가 많아 임씨 가문관련된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또한 오이익(吳以翼:1618~1666)의 ≪石門集·칠언절구≫(권2)에 <종씨인 임서호에 차운하였다.암자에게는 승지 임연의 식영정이 있고,바위 위에는 참판 이정기가 쓴 글씨가 있다.붉은 색으로 채워썼다고 전해진다(次從氏西湖韻 巖有承旨林公息營亭。而巖上刻李參判廷夔所書。以丹塡之云)>시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종씨의 서호 운에 차운하였다. 바위에는 임연 승지의 식영정(息營亭)이 있다. 바위에는 참판 이정기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붉은 글씨로 채워져 있었다.”
李廷夔(1612~1671)가 林㥠(1570~1624)의 딸과 결혼하였으니,이정귀는 임서의 사위이고 .석문 오이익(吳以翼:1618~1666)은 식영정이 임연 승지가 지은 것과 식영정 아래 암벽 각서가 이정귀가 쓴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정기의 시문을 통하여 식영정 부근에서 거처하였으며,암각글자를 새겼으며 수많은 식영정 관련 시문을 남겨놓았으니 ≪귀천유고≫를 통한 임씨 가문과의 교유가 더욱 고찰될 필요가 있다. 오이익의 ≪石門集≫,吳以久의 ≪道林遺集≫,임담(林墰:1596~1652)의 ≪淸臞遺稿≫도 많은 임씨가문의 인물들과의 차운시,화운시를 남겨 놓았으므로 향후 역시 본격적으로 고찰될 필요가 있다.오이구의 식영정시는 다음과 같다.
“금강의 서쪽 옛 사찰 앞에
낚시터는 오랫동안 세월 속에 닫혀있구나
붉은 글씨의 각서는 외롭고 선옹은 승천하였다네.
푸른 절벽은 층층히 떨어지는 햇빛속에 걸려있구나. “錦水西邊古寺前。釣臺長鎖舊風烟。丹書寂寂仙翁去。翠壁層層落日懸。”
”
오이익(吳以翼)의 본관은 나주(羅州)이고 자는 우서(于敍). 오원(吳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언표(吳彦彪)이고, 아버지는 예문관검열 오희도(吳希道:1583~1623)이다. 어머니는 의금부도사 김복흥(金復興)의 딸이다. 오희유(吳希有)에게 입양되었다.함평군수로 있을 때 형장을 받은 자의 무고로 초산(楚山)으로 유배되었다.유배에서 돌아온 뒤 벼슬할 뜻을 버리고 깊은 산속 석문동(石門洞)에 서실(書室)을 세우고 ‘식재(息齋)’라 편액하고 석문거사(石門居士)라고 자칭하였다.
창계(滄溪) 임영(林泳:1649-1696)의 <고향에 돌아와 운자를 부르다(還鄕呼韻)>(≪창계집·시(詩)≫[제2권])에서 영산강을 노래하였는 데, 주목할 것은 봄에 회진 지역에서 은어를 잡아 은어회를 먹었다는 것이다.
“삼월의 연화가 금수 가에 아름다워라 삼월의~아름다워라 : ‘연화(煙花)’는 아름다운 봄 경치를 말하는 것으로, 원문의 ‘삼월연화(三月煙花)’는 이백(李白)의 〈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에 “벗은 서쪽으로 황학루를 작별하고 삼월의 연화 속에 양주로 내려가네.〔故人西辭黃鶴樓, 煙花三月下揚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금수(錦水)’는 영산강(榮山江)으로, 나주(羅州)의 고호(古號)가 금성(錦城)이기에, 영산강을 금천(錦川) 또는 금강(錦江)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는 창계의 고향 나주 회진(會津)을 흐르는 영산강의 봄 풍광이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와 눕는 것이 바로 풍류지.
봄 강에는 또한 은어회가 있으니 봄 ~비웃네 : ‘장군(張君)’은 진(晉)나라 때 문인(文人) 장한(張翰)으로, 그가 일찍이 낙양(洛陽)에 들어가 동조연(東曹掾)으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을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자기 고향인 강동(江東) 오중(吳中)의 순챗국〔蓴羹〕과 농어회〔鱸鱠〕를 생각하면서 “인생은 자기 뜻에 맞게 사는 것이 중요한데, 어찌 수천 리 타관에서 벼슬하여 명작(名爵)을 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수레를 명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던 데서 온 말이다. [≪晉書·文苑列傳·張翰≫(卷92)] 여기서는 가을이 올 때까지 내려가지 못하고 고향을 그리며 괴로워했던 장한과 달리 창계는 벌써 은어회가 있는 고향 회진에 내려왔다는 말이다.
괴로이 가을 기다렸던 장군을 되레 비웃네 “三月煙花錦水頭,故園歸臥是風流。春江亦有銀鱗膾,還笑張君苦待秋”
. ”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영산강 유역에서 은어가 특산물로 열거되어 있지 않아,지방 문집에서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으며, 영산강 물줄기가 매우 깨끗하여 생태계가 잘 보존되어 여러 가지 귀한 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러 가지 문헌기록을 보면 영산강에서 조기,황복,농어,붕어,은어,숭어,장어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히는 영산강 생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영산강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그림같고 아름다운 선비들의 유토피아인 영산강 생태계를 복원하기 위해 수질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또한 임연에게는 여러 가지 호와 별명이 있었는 데, ‘懶雲’,‘閑好’,‘懶雲’,‘花江老’,‘浪士’,‘釣叟’,‘南湖漁釣老’(≪逸翁文集·시·오언절구·次林承旨韻≫,권1),‘息營老’(≪石門集·五言四律·挽林承旨 堜 令丈≫,권1),‘懶叟’(≪섬호집·오언절구·題懶叟壁≫) 등 이러한 별명들은 교우관계 속에서 임연의 이미지가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최희량의 ≪일옹집(逸翁集)≫내에서 임연 또는 식영정을 언급한 한시가 많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임연의 별명이 다양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이는 특별히 최희량이 임연을 대하는 친금감이 드러난다.
“낚시질하는 늙은이가 참으로 부러워라 긴 낚시대를 한가히 잡고 돌 위에서 졸음이여(人間釣叟眞堪羨, 閒把長竿石上眠) ≪다산시문집·시·송파수작(松坡酬酢)·산정아집의 운에 또 차운하다(山亭雅集又次韻)≫(제6권)
”
낚시질하다가 조는 모습을 일옹 최희량이 아마도 여러번 목격한 적이 있을 정도로 한호공 임연은 사직후 말년에 영산강 이곳저곳에서 낚시질을 즐겼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밖에서 많은 문집에 임연과의 교유를 보여주는 한시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申楫(1580~1639)에게도 <동야 임연과 유건숙의 집에서 만났다,화설당 운에 차운하였다(與東野會于柳健叔, 次花雪堂韻)>,<동야 임연에게 보내다.임연의 호가 한호이다(寄呈林東野。堜。號閒好)>[≪河陰先生文集·시≫(권3卷)],<영산강에서 동야 임연이 회진 별숙에서 돌아가도록 송별하다(湖上,奉送林東野歸會津別墅)>[≪河陰先生文集·시≫(권3)],<船遊和呈東野>[≪河陰先生文集·시≫(권3卷)],<(和寄東野吟契)>[≪河陰先生文集·시≫(권3)],<임동야에게 차운하다(次林東野韻)>[≪河陰先生文集·시≫(권3)],<임동야가 귤을 준 것을 감사하다(謝東野贈橘)>[≪河陰先生文集·시≫(권3)] ,<再謝東野贈柑>[≪河陰先生文集·시≫(권3)], <임동야의 영회 3수의 절구에 화답하여 받들다(奉和林東野詠懷 三絶)>[≪河陰先生文集·시≫(권3)] 등 임연과의 교유시가 많이 발견된다. 편폭의 제한으로 신즙이나 기타 문인들과의 교유를 다루지 않는다.
1) 만휴정 이후의 林堜의 식영정에서의 삶
임연(林堜:1589~1648)의 본관은 나주(羅州)이며 황해도관찰사를 역임한 임서(林㥠:1570~1624)의 장남으로 1589년 7월 26일 나주군 다시면 회진리에서 태어나 1610년(광해군 2년)에 성균관 진사가 되었고, 16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여 예조정랑·지평·장령·사관·남한성 호종승·형조참의·승문원(承文院) 우승지(右承旨) 등을 거쳐 외직으로 성현찰방(省峴察訪, 경상도 청도 소재)·영암군수·진주목사·원주판관·남원부사·등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성을 지켰다. 그후 형조참의를 거쳐, 은대(銀臺, 승정원의 별칭)에 올랐지만, 9일 만에 병으로 그만 두고 돌아와 참으로 한가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다.1643년(동 21) 경에 배뫼터를 잡아 정착한 기록인 ‘복거록(卜居錄)’을 썼다. 그리고 식영정에서 요양하며 지내다가 1648년(동 26) 10월 11일 여생을 마치고 회진에 묻혔다.
그의 호인 ‘한호(閒好)’처럼 한가로움을 좋아하여 말년에 회진 지역에 경치좋은 곳을 택하여 만휴당(晩休堂)을 지었다가 손님들 접대로 그윽함과 한가로움을 더 이상 즐길 수 없었기에 다시 풍경이 좋은 영산강 가 언덕에 자리잡아 거처를 정하게 된 것이다.그곳이 바로 식영당(息營堂)인 것이다.崔希亮(1560[명종 15]∼1651[효종 3])은 나주 출신으로 임연과의 교유관계를 보여주는 시문이 꽤 있어 주목된다. <次林承旨韻 名堜。號懶雲。又稱浪士(이름이 堜인 林승지 운을 차운하다, 號는 ‘懶雲’이고 또 한 ‘방랑선비’라고 칭한다)>라는 시문에는 임연의 이와 같은 유유자적한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남녘호수에서 노인 낚시하는 데, 세상을 싫어하여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한다네.
멋진 강가에 방랑하는 선비가 있으니, 바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라네 『南湖漁釣老, 厭世無相親。花江有浪士,乃是知心人。』
. ”
여기서 ‘화강’은 아름다운 강이란 뜻이니,바로 영산강을 칭한 것이다. 최희량의 <訪花江主人 (화강 주인을 방문하다)>라는 시에서 임연을 ‘화강주인’으로 칭하였으니, 이는 영산강 주변에 임연이 매우 많은 땅을 소유하였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시문에는 自注가 붙어있어 “花江。林承旨別業(화강은 임승지의 별장이다.)”이라고 칭하였다.그러나 ‘화강’이 영산강을 지칭한 것을 고려하고 이곳에 자신의 별장과도 같은 집을 지은 점을 생각할 때에 ‘화강’을 실제로 별장의이름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왜나하면 이 ‘自注’ 역시 최희량의 후인들이 문집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교유가 있었던 최희량이 그를 ‘화강주인’으로 칭하였다는 것은 당시 나주 일대에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음을 상당히 많은 당시의 문인들이 알고 있었고,나주 출신 학자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이던 최희량이 일부러 지어준 애칭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나주 영산강 주변이 땅이 많았서도 영산강 주변의 모든 땅이 임연의 소유이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시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강으로 방랑도사님을 방문하였는데,
자하주를 술잔에 가득히 붓는구나.
잠자리 베풀어주심이 참으로 과분한데,
시로 말하려니 재주가 없어 부끄럽구나 『花江訪道士,滿酌紫霞盃。下榻慙非分, 論詩愧不才。』
.』
여기서 자하주(紫霞酒)는 보랏빛 노을을 닮은 술이다.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의 술로 불리기도 한다. 옛날 항만도(項曼都)라는 사람이 신선에게 한 번 얻어 마시고는 몇 개월 동안 배가 고프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술 이름이다. 일반적으로는 맛좋은 미주(美酒)를 뜻하지만, 보통 ‘유하주(流霞酒)’로 많이 쓴다.여기서 자하주는 영산강 일대 특히 임연의 집안에서 가양주(家釀酒)로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잠자리 베풀어주심이 참으로 과분한데(下榻慙非分)”라는 말에서 우리는 “그 지역이 그윽하고 깊지 못한 탓으로 시끄럽고 번거롭게 접대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이를 병통으로 여겨 왔다(某之營晩休。蓋爲暮景優游計耳。第以地非幽深。應接囂煩。拙者之所病也。)”는 <식영당기>의 기록의 “시끄럽고 번거롭게 접대하였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임연의 이주동기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이조판서를 지낸 후 고향땅으로 돌아와 지내면서 상당히 많은 고향친구 및 벼슬살이하면서 사귄 수많은 지인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여 주고, 술을 대접하면서 더 이상 조용하고 그윽하게 살 수 없었던 임연의 심각한 현실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자하주를 대량으로 만들어 숙성하기 위해 집안에 술항아리가 즐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이는 한호 임연의 거처의 규모가 상당히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나주임씨 문중에서 제공한 임연의 저서인 ≪閒好遺稿≫에서 식영정에 대한 기록한 한시를 통하여 임연의 식영정 추억을 살펴보기로 한다..
<식영정에서 봄날에 즉시 짓다(息營堂春日卽事)>(≪閒好遺稿≫64쪽)
『연징산 아래 조기는 살쪄가고
죽망을 늘어놓은 곳에 두루미가 날고 있네,
양쪽 강언덕에는 산꽃들이 무성하고,
가벼운 배에 짧은 노 저으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네『淵澄山下石魚肥, 竹網橫時白鳥飛。兩岸山花芳草菲, 輕舟短棹唱歌歸。』
.』
『갈대는 싹이 돋아 복숭아나무 잎새도 싹이 돗아나고
철쭉꽃은 떨어져 강물이 마치 기름같구나
복어가 조수를 타고 올라오려하니 낚시배가 서두른다네
끊임없이 시흥이 올라 방랑객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구나『蘆荻生芽挑葉抽, 杜鵑花落水如油。河豚欲上漁舟急, 詩興無端楚客留。』
.』
이 시는 식영정이 연징산 아래에 있다는 것과 식영정 아래에서 낚시를 많이 즐길 뿐만 아니라 낚시배가 많이 몰리는 특정한 계절이 있는 데, 봄에 조기와 황복이 잡힌다는 중요 정보를 제공하여 주고 있다. 또한 식영정 아래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죽망(竹網)을 펼치는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용성부백인 목장흠은 내 동년배 친구이다(龍城府伯睦孤石令公卽我同年友也)>제5수(≪한호유고≫)는 영산강 황복이 매우 중요한 특산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영산강 포구에서 황복은 병혈 병혈(丙穴): 가어(嘉魚)가 나는 동혈(洞穴)의 이름. 중국 대병산(大丙山)의 동혈(洞穴)이다. 좌사(左思)의 촉도부(蜀都賦)에 “좋은 고기가 병혈에서 난다.” 한 주에 “병(丙)은 지명인데, 여기에 고기가 나는 두 개의 동혈이 있다.” 하였다. 여기서는 영산강 황복이 잡히는 명당자리를 지칭한 것이다
을 논하는 데,
요리하려면 부드럽고 매끄러워야지 맛이 있고 갈끔하다네.
용성 부백에게 한끼 식사로 보내노니,
아마도 초췌하였으리라 생각하여 연군정 연군정(練裙情)이란 손님들의 귀여움을 받는다는 뜻이다. 남송(南宋)의 양흔(羊欣)은 양불의(羊不疑)의 아들로, 그의 아버지가 오정 영(烏程令)이 되었을 때 양흔의 나이는 겨우 12세였다. 그때에 왕헌지(王獻之)가 오흥 태수(吳興太守)가 되어 그를 몹시 사랑하였다. 한번은 여름에 왕헌지가 현(縣)에 들어갔는데, 양흔이 새 비단 바지를 입고 낮잠을 자고 있었으므로 왕헌지가 그의 비단 바지 두어 폭에 글씨를 써 놓고 돌아왔다. ≪《南史·양흔열전(羊欣列傳)≫(권36)
을 베푸노라 『錦浦河豚論丙穴, 烹宜柔滑味兼淸。寄向龍城供一粲, 應憐憔悴練裙情。』
.』
목장흠(睦長欽:1572~1641)은 자가 우경(禹卿), 호가 고석(孤石)이다.목희안(睦希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목세칭(睦世稱)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목첨(睦詹)이며, 어머니는 증병조참판 정건(鄭謇)의 딸이다.1623(인조 1) 인조반정으로 승지에 임명되고, 판결사·함경도관찰사·경주부윤 등을 거쳐 호조참판으로 비변사제조(備邊司提調)를 겸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으며, 1641년 도승지가 되었다. 성격은 강직하였고 관후(寬厚)한 덕량이 있어 사람을 대하는 성의가 화기애애하였다고 전해진다.
<강가 누각에서 즉석에서 짓다(江樓卽事)>
『몽탄의 북쪽에 새로운 거처는 편안한데
비내린 후가 꽃이 만개하여 대나무숲 거처를 둘러서 피었네.
하루종일 작은 쪽배로 이리저리 다니다가
가양주를 들고서 황복을 사기를 다툰다네 “夢灘之北新居穩, 雨後花開繞竹軒。竟日小舟來又去, 爭携村酒買河豚。”
.』
가양주란 집에서 빚은 술인데 현재까지 기록으로는 이 가양주가 자하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물론 다른 가양주도 빚었을 수가 있겠으나 현재적으로 자하주 이외에 어떤 가양주를 빚었는 지는 다른 기록이 없다.
<11월에 배만 바라다보고는 식영당으로 가서 흥을 올라 짓다(十一月將望舟往息營寓興)>
『영산강 남쪽은 겨울이어도 거의 가을과 같다네.
단풍든 강언덕 갈대밭 모래톱은 모두가 그윽하다네.
흥이 올라 혼자서 왔다가 갔다가
하루종일 태양빛 맑은 아래 배 한척만 외롭구나 “江南冬日半如秋, 楓岸蘆州事事幽。乘興獨來還獨去, 滿天明日一孤舟。”
.』
한호공 임연이 이 식영정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였는 지를 살펴볼 수 있다. 즉 다시 말하자면 식영정은 임연과 나주 임씨 문중의 선조들의 향토애와 추억이 서려있는 장소인 것이다.
<2월하순에 식영정에 머무르며 새 집을 둘러보고 게으르게 읽어나 흥이 일어나서 연징산 동부를 방문하여 정송화 벽에 적었다(二月下旬留息營看新舍,倦來起興,訪淵澄洞府,題鄭松禾壁上)>[≪閒好遺稿·시≫(62쪽)]에는 정송화라는 인물이 출현한다.
“초가집에 사느라 피곤한데 동원을 보살피지 않아 봄생각이 새롭구나
오늘 그대를 찾으니 세상을 나선 것 같구나
새 한 마리 우짖으니 봄이 늦게 오려나
노란 매화꽃은 반쯤 떨어지고 버드나무는 버들솜을 늘어트렸구나
선비의 집은 불때는 연기 따스하여 꽃이 호응하여 예쁘리라
시냇길을 서로 찾아오니 거절하지 마시게나 “經營茅屋亦勞神, 未省東園春意新。今日尋君如出世, 更憐梅塢鮮留人。黃梅反落柳垂絲, 有鳥一聲春欲遲。墨坊烟暖花應好, 溪路相尋且莫辭。”
”
鄭松禾가 누구인지를 찾아보다 ≪귀천유고(歸川遺稿)≫에서 <정송화 민흥에게 드리다.임오년 맹춘에 쓰다(贈鄭松禾 敏興,壬午孟春)>시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松禾는 자이고 敏興이 이름이다, 정민흥이 鄭介淸의 아들인지 정대청(鄭大淸)의 아들인지는 당쟁적 논란이 조금 있으나 정개청의 아들임이 틀림없다.
“평생 술을 좋아하지않아서 매번 이웃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네
산속에 거처한 이후로 어느 누가 다시 와서 권하리
꽃이 붉어져 잎이 떨어질 때에 흥이 오르다가 다시 적막해지네
이 때에 정선생 집에 가서 대취하여 멋진 달빛 아래 돌아왔다네. “平生不嗜酒, 每被傍人困。自從居山中, 誰復來相勸。花紅葉落時, 有興還寂莫。時赴鄭老家, 酪酊歸美月。”
”
어쨌든 임연과 이정기가 쓴 한시를 통하여 중요한 몇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정개청 사후 후손들은 매우 빈한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둘째 송화 정민흥은 곡강에서 살다가 연징산 총지사 부근의 동부(동굴 부근)에서 살았다. 셋째 그는 음주를 좋아하지 않아 큰 불편을 겪게 되자 고립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넷째 정개청이 대학자이었기 때문에 나주임씨 집안과는 아들인 정민흥과도 막역한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찬한(趙纘韓:.1572∼163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현주(玄洲)이다.
은 1611년 7월11일,12일 두차례에 걸쳐 정치적인 의도로 정민흥을 끌어내리려고 공격한다.
“그런데 감찰 정민흥(鄭敏興)은 위인이 거칠고 비루하여 집에 거하면서 부정한 행실이 많이 있었습니다. 본직에 제수되자 사람들이 다들 침을 뱉고 욕을 해대니, 이와 같은 사람을 대관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신해(1611) 7월 26일(계해)≫조
”
“정민흥(鄭敏興)은 정대청(鄭大淸)의 아들이지, 정개청(鄭介淸)의 아들이 아닙니다. 개청의 아들 정민복(鄭敏復)은 젊어서부터 선비를 업(業)으로 삼고 시골에서 조촐하게 살고 있는데, 민흥이 본디 무지하고 교활한 사람으로 민복을 덮어 가리고 일세를 기만하여 마치 개청의 아들인 체해왔습니다. 처음에 가설 주부(加設主簿)로 있다가 곧장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는데, 이때에도 대간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연줄을 타고서 이리저리 찾아다니어 다시 본직에 제수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수용하는 은전을 엉뚱하게 시행되도록 하였으므로, 민복은 집에 있으면서 내심 그를 비웃고,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다들 침을 뱉으며 욕을 하고 있습니다 “鄭敏興, 乃大淸之子, 非介淸之子也。 介淸 之子敏復, 自少業儒, 守拙鄕曲, 而敏興本以無知麤猾之人, 掩蔽敏復, 欺瞞一世, 若爲介淸子者然。 始以加設主簿, 直授刑曹佐郞, 其時亦被臺評, 而夤緣奔走, 又授本職。”≪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신해(1611) 7월 27일(갑자)조≫ 이 말은 정언 조찬한(趙纘韓)이 한 말이다.
”
이와 같은 조찬한의 말은 장령(掌令) 유혁(柳湙)에 의해 그 논리가 대단히 잘못되었음을 지적받는다.
“조정에서 정민흥(鄭敏興)을 수록한 것이 기실 대청이 받지 않은 은전을 베푼 일이었으니, 민흥이 벼슬에 제수된 일은 애당초 그가 개청의 아들이라고 여기고서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엉뚱하게 시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정민복(鄭敏復)을 덮어 가리고 일세를 기만하여 마치 개청 본인의 아들인 체하였다는 얘기는, 정리에 가깝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워섬긴 것이 너무도 심하여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논해야 되는 언관으로서의 뜻을 자못 잃었습니다 “朝家之收錄敏興, 實出於施大淸未受之恩典也。 則敏興除職, 初非謂介淸之子, 而不察而謬施也。 掩蔽敏復, 欺瞞一世, 若爲介淸己子之說, 非但不近情理, 又爲捃摭已甚, 殊失言官據實論事之意。”≪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신해(1611) 7월 27일(갑자)조≫
”
심지어는 광해군은 7월26일에 이미 직접 “정민흥은 바로 정개청(鄭介淸)의 아들이다. 조정에서 그를 수용한 것은 의도가 있어서 한 일인데, 전후로 그를 공박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 내가 몹시 이상히 여긴다. 탄핵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따라서 정민홍이 정개청의 아들인 것은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어진다.정민홍은 이와 같이 문헌에서 가설 주부(加設主簿), 형조 좌랑의 벼슬을 지냈음이 확인된다. 정민홍이 연징산 동부에 거주하였던 것이 확인되어지므로 그를 느러지 권역의 인물로 귀속하는 데 문제될 것이 없다.한편 신즙(申楫:1580~1639)의 ≪河陰先生文集·詩≫(권3)에 <정여성에 보내다(寄鄭汝成)>라는 시가 있다.
“옛날에 무안에서 발급한 호패를 차고 비로소 마차를 내려
정송화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네
일반 백성들은 어찌하여 모두 친하고 후덕하지 않을까
그대에게 묻노라 어찌하여 홀로 애쓰는가
말을 집의 계단에 묶어놓고 여러차례 무릎을 꿇는다네
손님을 연각에 남겨두고는 고향을 둘려보니 이를 어이할꺼나 “昔佩綿符始下車。相知惟有鄭松禾。凡民孰不皆親厚。問子如何獨切磋。繫馬堂階蒙屢屈。留賓蓮閣許頻過。分明此別無消息。回首幷州柰爾何。”
”
또한 신집(申楫:1580~1639)의 ≪河陰先生文集·시≫(권3卷)에는 <중양일에 정여성(민흥 호가 죽촌),김특립(시주,호가 제해).유건숙,임동야와 함께 남호에 배를 띄웠다.배안에서 [重陽日。與鄭汝成 (敏興。號竹村),金特立 (是柱。號霽海。),柳健叔,林東野汎舟南湖。舟中以江淸月近人分韻。得近字]>시를 통하여 정민흥의 호가 죽촌(竹村)이었음도 확인된다. 총지사 동부에서 살던 죽촌 정민흥 역시 느러지 권역의 인물인 것이다. 함께 동행하여 뱃놀이에 참여한 사람들중의 柳健叔은 바로 柳運(1580~1643)이니, <유건숙 유윤의 화설당에서 고군회 고부립에게 주다.제봉의 적손이다(柳健叔 運 花雪堂。贈高君誨。傅立。霽峯適孫)>[≪河陰先生文集·시≫(권3卷)]시를 통해 확인된다.
<풍호에서 아포로 내려가서 야지와 이별하고 몽탄에서 묵다(自楓湖下牙浦別野止宿夢灘)>(≪閒好遺稿≫49쪽)
“달빛이 평호에 접어들어 맑기가 하늘빛과 같고,
깊은 밤에 돛배를 정박하니 조용하여 바람도 없구나
여러 산들이 아득하게 멀리 얽혀있고
하나의 기운이 분명하게 넓고 아득한 가운데 있구나
범려처럼 남쪽 월나라를 떠난 것이 아니며
더욱이 서복처럼 봉래산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네
취기가 찾아와 홀로 소식의 부를 읊조리니
오랜 세월이 아득하여 달라져버린 것이 한스럽구나. “月入平湖淸若空, 駐帆深夜靜無風。羣山鬱紏蒼茫外, 一氣分明浩渺中。不是鴟夷辭越國, 還非徐市慕瀛蓬。醉來獨詠蘇仙賦, 悵望千秋恨不同。”
”
한시의 문맥으로 보아 아포(牙浦)는 포구의 이름으로 보이며 풍호의 아래쪽에 위치한 포구로 보인다. 야지(野止)와 헤어진 지역이 아포이며,아포는 아마도 야지의 거처와 가까운 곳이리라.따라서 아포는 풍호와 몽탄 사이에 위치한 포구로 보인다. 제5구에서 치이(鴟夷)를 모르면 번역이 되지 않는다. ‘치이(鴟夷)’는 치이자피(鴟夷子皮)의 준말로, 춘추시대 월(越)나라 범려(范蠡)의 별호인데, 구천(句踐)을 도와 오 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구천과는 안락을 함께 누릴 수 없음을 알고 오호라는 물길을 따라 제(齊) 나라로 가서 성명을 고치고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 불렀다 한다. [≪<史記·越王句踐世家≫]
따라서 월나라 범려처럼 월나라를 떠난 것이 아니며 더군다가 서복(徐福)처럼 봉래산을 그리워하는 것도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한호공 임연은 자신이 결코 자신의 의지로 아름다운 고향을 떠나 벼슬길로 나선 것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金璇(1568~1642)의 <석촌 임서,임후지,임숙첨,동야 임연 등 여러 친구들과 배를 타고 섬호를 방문하다(憶與石村·厚之·叔瞻·東野諸友,乘舟訪剡湖)>시에는 식영정에서 회진 사이의 뱃길을 보여준다.
“밀물을 타고서 새벽에 사호로 내려가는데
석관정과 창랑정이 그림 같도다
15년이 흐른 동안 죽은 이들이 많았으니
오늘날 남아 있는 이는 시서(김선)와 섬호(진경문) 뿐이로구나 “乘潮帶曉下沙湖, 石串滄浪似畵圖。十五年來多勿故, 今餘市剡尙霜鬚。”
”
이 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배를 타고 내려가는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창랑정을 지나 석관정을 지나 사호 즉 사호진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임씨 문중의 임서,임후지,임숙첨(林埈[1570~1627]),동야 임연은 아마도 회진에서 합류하였을 것이다.물론 한호 임연이 식영정에서 섬호로 바로 왔는 가능성도 꽤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여러가지 시문을 통하여 진경문이 풍호에 사는 것으로 생각되는 점이 있으나,이 시문을 고려해보면 진경문을 만나러 섬호로 가기 위해 반드시 사호진을 거쳐야 하며,사호진 가까이에 섬호가 사는 마을이 있었음이 분명하다.이 점에서 섬호는 이 시를 쓸 당시에 사호진 아래 즉 월송리 앞의 호수처럼 잔잔한 영산강 물가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창랑정은 앙암 건너편에 있고 그 아래에 석관정이 있으니, 석관정을 지나야 사호를 거쳐서 식영정에 도달할 수 있다. 권필의 한시에도 사호에서 뱃놀이와 술을 즐겼음을 보여준다.
권필(權韠:1569~1612)도 <구월 구일, 무안현(務安縣) 사호(沙湖)에서 술을 대하고 짓다[九月九日。在務安縣沙湖。對酒有作]>[≪석주집·오언율시(五言律詩)≫(제3권)]시를 살펴보면 전란중에 이곳 사호 나루터를 지나갔음을 보여준다.
“전란의 참상을 금일에 보노니 처량한 풍경이 고향과 다르구나.
풍진 세상에 도죽의 지팡이 도죽(桃竹)의 지팡이 : 도죽은 대나무의 일종으로 재질이 견실하여 화살이나 지팡이를 만들기에 좋다. 두보(杜甫)의 도죽장인(桃竹杖引)에 “강물 가운데 반석에 도죽이 자라니, 푸른 물결에 젖으며 적당히 자랐어라. 뿌리 자르고 껍질 벗기매 자옥과 같으니, 강비와 수선이 애석해해도 어쩔 수 없어라. …… 아, 풍진 자욱한 세상에 승냥이와 범 같은 적들이 사람을 무는 판국이니, 홀연 이 한 쌍의 지팡이를 잃으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할꼬.〔江心磻石生桃竹 蒼波噴浸尺度足 斬根削皮如紫玉 江妃水仙惜不得 …… 噫風塵澒洞兮豺虎咬人 忽失雙杖兮吾將曷從〕” 하였다. 《古文眞寶 前集》
요 강해에 국화꽃 띄운 술잔 강해(江海)에~술잔 : 강해는 강호(江湖)와 같다. 음력 9월 9일 중구절(重九節)에는 국화꽃을 술에 띄워 마시는 풍속이 있다.
이라.
옛 병영에는 고각 소리 들리고 황량한 성은 일찍 문을 닫는다.
병과가 천지에 가득한 이때 유랑하는 신세 어이 말할 수 있으랴“風塵桃竹杖,江海菊花樽。喪亂看今日,凄涼異故園。古戍遙聞角,荒城早閉門。兵戈滿天地,漂轉更堪論。”
”
전란중에 권필이 이 사호진을 지나면서 느낀 전쟁이 주는 충격과 격정을 묘사한 것이다.“옛 병영에는 고각 소리 들리고 황량한 성은 일찍 문을 닫는다”라는 3구의 내용으로 보아 근처에 옛 병영의 유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민서(李敏敍:1633년∼1688년)의 <바다에 배를 띄웠다가 저녁에 사호 사호(沙湖) : 전라도 무안현(務安縣)의 동쪽 15리쯤에 위치한 나루터이다. 《大東地志· 全羅道· 務安縣》
에 정박해서 천사의 시에 차운하다〔泛海晩泊沙湖 次天師韻〕 나주 목사를 지낼 때 지었다(泛海晩泊沙湖。次天師韻。宰羅州時)> 나주 목사를~지었다 : 이민서는 1667년(현종8)에 나주 목사가 되어 부속 도서(島嶼)를 순시하였다. 《국역 현종실록 8년 6월 25일》
[≪서하집(西河集)· 칠언절구(七言絶句)≫(제2권)]시에 사호를 방문하여 지은 시가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아마도 그가 광주목사 재임 시절에 지은 것이니 1677년에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일엽편주에 술을 싣고 거문고도 타는데 하물며 또 좋은 벗들과 함께 모였다오 함께 모였다오 : 원문의 ‘합잠(盍簪)’은 벗끼리 의기가 투합하여 즐겁게 만나는 것을 말한다. 《주역》 〈예괘(豫卦) 구사(九四)〉에 “말미암아 즐거워하므로 크게 얻음이 있으니, 의심하지 않으면 벗들이 모이리라.[有豫, 大有得, 勿疑, 朋盍簪.]”라고 하였는데, 공영달(孔穎達) 소(疏)에 “합(盍)은 회합의 뜻이요, 잠(簪)은 빠르다는 뜻이니, 여러 친구들이 빨리 옴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나를 따라 뗏목 탈 사람 몇이나 될까 나를~될까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서 공자가 천하가 어지러움을 탄식하여 “도가 행해지지 않으니 뗏목을 타고 바다에 뜨리라.[道不行, 乘桴浮于海.]”라고 한 것처럼 어지러운 세상을 버리고 차라리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멀리 떠나고 싶다는 말이다.
긴 바람에 파도 헤치니 초심에 흡족해라 “扁舟載酒又彈琴,況復良朋共盍簪。從我乘桴知有幾,長風破浪愜初心。”
”
이민서는 1677년(숙종 3)에 광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인 박광옥(朴光玉:1526~1593)의 祠宇를 增修하고 김덕령(金德齡)을 並享하였다. 이어 승지·대사간·이조참판·강화부유수를 거치고‚ 호조·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경제책으로 주로 아문과 궁가‚ 둔전‚ 토호(土豪) 등 특권층의 토지 廣占을 혁파하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단하(李端夏)·남구만(南九萬) 등과 교유가 깊었다. 선진시기와 양한(兩漢)의 문장에 능했는데 송시열은 그의 문장이 사마천의 풍격을 얻었다고 평가하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따라서 이 한시는 1677년 광주목사 재임중에 쓰여진 시로 보여진다.
이정기도 ≪귀천유고(歸川遺稿)·시·회진에서 구촌으로 돌아와 밀물이 다쳐서 사호진에서 머물며 지었다(自會津還九村潮盡宿沙津作)≫시에도 사호진이 출현한다.
“남쪽으로 건너온 1년남짓 아직 집이 없는데
강호에서 이리저리 다 나의 집이라
달이 지고 밀물이 올라와 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니
오늘 저녁은 사호 포구가 내 집이로구나. “南渡年來未有家, 江湖隨處便爲家。月落潮生船不進, 今宵沙浦卽吾家。”
”
2) 逸翁 崔希亮과 林堜의 교유
임연과 교유인물중에서 최희량을 주목하는 것은 최희량의 ≪일옹집(逸翁集)≫내에서 임연 또는 식영정을 언급한 한시가 많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다른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임연의 별명이 다양하게 등장하기 때문이다.‘閑好’,‘懶雲’,‘花江老’,‘浪士’,‘南湖漁釣老’등이 그것이다.특히 임연 선생이 식영정에 있지 않을 때에도, 최희량 자신의 費隱亭 부근에서도 한호 임연을 기다리는 모습 등이 한시에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옹유사(逸翁遺事)≫ 1613년(광해군 5년)조에는 최희량이 임연과의 교유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공(최희량)은 세상을 등진 후에 대박산 삼주 가에 정자를 짓고 ‘비은(費隱)’이라 편액하고 강호에서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는 것으로 스스로 즐겼다.그러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한 마음은 읊조리는 시구 사이에 간절하였다.교유하였던 사람은 모두 사림의 명사였는데 특히 나운(懶雲) 임연(林堜),백호 임제(林悌),송호(松湖) 백진남(白振南)과 가장 잘 알고 지냈다.한가할 때 초청하여 여러날 시구를 주고받으며 허물없는 교유관계를 맺었다”(≪임진왜란의 명장-일옹 최희량≫,287~288쪽)
<(일옹)행록>도 일옹유사에게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공은 시에 뛰어나 때로 벗들과 함께 모여 붓 가는 대로 시를 짓고 화려하게 수식하는 데 힘쓰지 않았다. 교유하였던 사람은 모두 사림의 명사였는데 특히 나운 임연,백호 임제,송호 백진남과 가장 잘 알고 지냈다. 한가한 날에 초대하여 여러날 시와 술을 나누며 허물없는 교우관계를 맺었다.그러니 무공을 세운 것 한가지만으로 공의 시대를 논할 수 없다”(≪임진왜란의 명장-일옹 최희량≫,305쪽)
<나운 목사가 진주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우스개로 지어 드림(懶雲牧晉州未歸。戲贈)> [≪일옹문집·시·칠언절구≫(권1)]
“정자의 이름을 식영정이라 잘도 지었네,
속세에 오래토록 취하여 어느날에 깰까
모래사장의 기러기 정원의 학은 스스로 오고가는 데,
몽탄강의 풀들은 또 파릇파릇하다네. “亭名好作息營亭。久醉紅塵何日醒。沙鷗園鶴自來往。莫待花江草又靑。”
”
여기서 ‘花江’이란 말이 출현하는 데, 일단 몽탄강으로 번역하였다. 단순히 꽃이 만발한 강의 의미는 절대 아니다. 일옹 최희량은 임연을 지칭할 때에 ‘花江老’로 지칭하므로 ‘花江’이란 몽탄지역의 영산강 그중에서도 식영정 앞바다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운이 삼주를 지나옴을 듣고서(聞懶雲過三洲)>[≪일옹문집·시·칠언절구≫(권1)]
“멋진 비경을 오고가는 한 조각의 배, 전해들으니 어제밤에 삼주를 지났다네.
신선같은 종적을 누가 알리요.모래사장의 하얀 갈매기에게 물어 보려 한다네. “來往蓬萊一葉舟。傳聞昨夜過三洲。仙人蹤跡誰相識。欲向沙頭問白鷗。”
”
일옹 최희량도 꽤나 한호 임연을 좋아하였는 모양이다. 근처를 배로 지나갔다 하는 데 보이지 않으니 갈매기에게 물러보려 한다니 말이다.최희량이 매우 서정적임을 보여준다.철리시(哲理詩)를 짓는 선비들을 제외하고 한시를 짓는 옛날 선비들은 한시의 시정이 풍부하여 모든 보이고 느껴지는 경물과 느낌을 한시로 짓기 위해 서정적일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생각되지만 최희량은 더욱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캐릭터의 성품의 소유자로 여겨진다.
<나운 임연이 방문하였다(懶雲來訪)> ≪일옹문집·시·칠언절구≫(권1)
“정자의 주인은 비록 나이 들었으나 강가 정자는 멋지다네.
어제 방랑 신선이 오늘 또 들리셨네.
높은 누대는 그저 바람이 세지는 것이 오래토록 아쉬울 뿐
구름이 다른 산에 머물러 자고서 돌아가지 않기를 “主人雖老江亭好。昨日遊仙今又來。高臺但恨長風急。雲在他山宿未回。”
”
<식영정에서 상인에게 차운하다(息營亭。次上人韻)>≪일옹문집·시·七言四韻≫(권1)
“술도 있고 시도 있으니 그대는 과장하지 말게나.
나의 정자는 매화가 없는 곳이 없다네.
구름이 가로걸쳐있고 바다가 띠를 둘러서 새로운 그림을 눈에 띄게 해주고
빗물은 강가를 씻어주어 이전의 모래를 하얗게 한다네.
저녁노을은 점점 먼 포구의 돛단배를 나누이게 하고
저녁 안개에 때때로 가까운 어부의 마을을 가까이 보여주네
한가로운 이야기로 가득 채우느라 돌아가기를 잊었다네.
고개 돌리려니 쓸슬한 바람이 파도를 일어나게 하는구나. “有酒有詩君莫誇。吾亭無處不梅花。雲橫海帶明新畫。雨洗河邊白舊沙。落照漸分遠浦帆。暮烟時露近漁家。淸談方飽忘歸路。回首蕭蕭風起波。”
”
<나운에게 드림(贈懶雲)>[≪일옹문집·시·七言四韻≫,권1]
“명철보신하느라 머무를 것을 알았으니,호수의 남쪽 영산강의 서쪽이라
평소의 마음으로는 속세의 피로함이 어울리지 않는다네.
유유자적함으로 푸른 바다에 사는 것을 무척이나 즐긴다네.
비녀(벼슬)를 던지고 약초를 수집하며 백이를 가까이하네.
한가로움 속에서 홀로 즐기니 궁벽함이 없구나.
바윗가에 낚시를 마치니, 달이 나지막하구나, “明哲保身知所止。湖之南也錦之西。素心不合紅塵累。逸興偏甘碧海棲。謝病乞骸疏廣受。投簪採藥伯夷齊。閑中獨樂無竆處。罷釣磯邊月欲低。”
”
‘懶雲’,‘懶叟’라는 독특한 별호가 최희량의 문집에서만 출현하는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이는 최희량이 한호공 임연에게 지어준 별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일옹문집·詩·오언절구·임연 승지에게 드리노라,당시에 임연은 남원의 태수이었다(寄贈林承旨 時爲南原倅)≫(권1)에서는 남원태수로 간 임연을 그리워하며 식영정을 되새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특히 약초를 캐러다니고 낚시질하고 마치 느리게 흘러가는 구름같은 방랑객의 모습이니 최희량이 특별히 ‘懶雲’이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으로 추측된다.
“남원태수인 임연 승지에게 보내노니 헤어진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네
식영정에 달이 뜨니 밤마다 누구를 위하여 휘영청 밝은가? “寄語龍城守。相離已經年。息營亭上月。夜夜爲誰姸。”
”
식영정이라 지었으니,임연 승지 정자의 이름이다(≪일옹문집·시·오언절구·題息營亭 林承旨亭號 )≫(권1)에서는 “봉래 제일가는 봉우리에 푸른 바다에 날다가 떨어진 듯(蓬萊第一峯。飛落碧湖中)”이란 시구는 비래봉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아마도 최희량이 비래각의 존재를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또한 ‘龍城守’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이 시는 한호공이 남원태수를 지낼 때에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
“봉래 제일가는 봉우리에 푸른 바다에 날다가 떨어진 듯
세상 바깥같은 안개와 노을이 신비로우니
당연히 이 노인네에게 속하게 할 것이라. “蓬萊第一峯。飛落碧湖中。物外烟霞秘。應令屬此翁。”
”
<방랑객을 비웃는다(嘲浪士)>[≪일옹문집·시·오언절구≫(권1)]시에도 이와 같이 친구인 임연을 생각하는 정이 가득해보인다.
“식영정에서 서로 이별한 후에 나를 방문한 때가 달빛 밝은 때였었지
초생달이 마치 거울같이 밝을 때
그대는 무슨 어명이 있었기에 오는 것이 늦어지는가? “息營相別日。訪我月明時。新月今如鏡。君何命駕遲。”
”
기다리다가 치쳐서 늦어짐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려는 배려심이 돋보인다.어명이 있어서 늦어진다면 친구사이에 충분하게 이해해야 하지 않나는 최희량의 내심이 읽어진다.
3) 南浦 金萬英(1624~1671)과의 교유
김만영은 1624년(인조2년)에 전라도 나주 귀업리(龜業里:현재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귀업마을)의 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김태흡(金泰洽)이고 모친은 나주나씨로 나원길(羅元吉)의 따님이다.부친 김태흡은 호가 송호(松湖)이다.
<비래각주인에게 드리다.주인은 임연 승지이니, 선생이 어렸을 때이니 당시 나이가 14세이었다.(呈飛來閣主人,主人卽林承旨堜。先生兒時作。時年十四。)>[≪南圃先生集·七言律詩≫(권5)]라는 시에는 김만영이 임연을 ‘비래각주(飛來閣)’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며,그가 임연을 14세의 시각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 지를 보여준다.따라서 이 시는 1638년에 지어진 것이다.임연(1689-16498)이 49세인 때이다.
“임연 승지어르신은 병이 많아 벼슬살이 그만 두시고
영산강 서쪽에 약부뚜막을 새로 열었다네.
세월 백년에 기러기는 멀리 떠있고
푸른 오동나무는 천애 절벽에 산새가 높이 둥지를 틀었구나.
문앞에는 푸른 물이 마음과 통하는 듯 깨끗하고 ≪閑好遺稿≫ 말미에 부착된 김만영의 <飛來閣主人>에는 ‘通心淨’가 아니라 ‘通神淨’으로 되어 있다.임연의 은퇴후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때에 ‘通心淨’이 옳을 것이다.
난간 밖으로는 푸른 산에 산기운이 가지런하다.
주인장이 참으로 즐기는 곳이라네,
달은 밝고 낚시하는 바위에 낚시줄을 드러웠네. “令公多病投簪笏。藥竈新開錦水西。滄海百年鴻遠擧。碧梧千仞鳳高棲。門前綠水通心淨,檻外靑山與氣齊。最是主翁眞樂處。月明磯畔一絲低。”
”
14세때에 임연과의 조우가 있었다는 뜻은 아마도 김만영이 글공부를 위하여 임연이 살던 지역으로 와서 일시 거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래서 비래각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한 한호 임연이 이 지역에서 낚시질을 즐겼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자정 나반의 만휴당운에 수창하다(酬羅子整 襻 晩休堂韻)>(≪南圃先生集·오언율시≫,권2)
“말년에 쉬는 것은 세상사이고, 높은 곳에 누워 어두움에 잠들 때라네.
바다 푸른 빛은 평평한 난간과 이어져 있고,
파도소리는 낮은 울타리로 들려오네
모래톱에 부는 사람은 갈매기의 꿈을 재촉하네.
모래사장에 떠오른 달은 학이 잠들기를 더디게 하네,
대나무숲안에 즐거움이 많으니 어찌 호숫가에서 슬퍼하리? “晩休人世事。高臥暝棲時。海色連平檻。潮聲入短籬。渚風鷗夢促。沙月鶴眠遲。箇裏多眞樂。何須澤畔悲。”
”
≪南圃集·七言律詩≫에는 <자정 나반의 만휴당운에 창수한 것을 차운하다(次酬羅子整 襻 晩休堂)>(권5)시가 있으니, 나자정은 즉 나반(羅襻)이며 태수를 지낸 적이 있다. 子整 나반(羅襻)은 羅緯素(1583~1667)의 둘째아들이다.이 시는 위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푸른 산위에 아름답게 서있고 영산강 남쪽이라.
사람이 바람과 달을 함께 가졌으니, 어울려 셋이 되었네.
세상의 이치 다 말하였으니 말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라네
한가로운 흥을 맛보러 오니 맛이 더욱 감미롭네.
수 마지기의 멋진 밭은 이미 익었음을 알겠고
아름답고 멋진 술에 조금씩 취기가 오름을 느낀다네
강 건너에는 때때로 어부가 들린다네,
마주 대하여 농사일을 말하며 잡다한 옛일을 나눈다네, “玉立靑山錦水南。人兼風月好成三。世情說盡言全苦。閒興嘗來味更甘。數畒良田知已飽。▦盃醇酒覺微酣。隔江時有漁翁至。對打農談雜古談。”
”
이 시 바로 뒤에는 閑好 林堜이 지은 原韻이 부착되어 있다.
“호수같은 몽탄강 북쪽은 느러지의 남쪽이라네.
강건너에는 쓸쓸한 집 두세 채가 있다네,
만휴당이라는 집은 쉬고자 함이니
마을은 자그마한 골짜기라 물은 오히려 달콤하다네.
기러기는 산넘어 미끄러져 지나가며 가을소리가 이르구나
갈대밭에서 물고기들이 노닐고 낚시질의 재미가 달콤하구나.
지난 일을 지금처럼 말하는 것을 어찌 참으리요.
새로 지은 시로 지난 친구들과 이야기 나눈다네. “夢湖之北曲江南。隔岸蕭然家兩三。堂以晩休身且老。村爲尺谷水猶甘。鴈拕山外秋聲早。魚戱蘆邊釣興酣。往事如今那忍說。新詩聊與故人談。”
”
<희롱하며 써서 금리의 여러 형님들에게 보내다(戲題寄錦里諸兄)>
“영산강의 은빛 붕어는 아름다워 비늘이 빛나고
고기구덩이에서 어찌 홀로 진기함을 발휘할까
서암의 낚시꾼에게 말을 전하노니
다행이도 냉이도 나누어 먹고 고사리도 캐어먹는다네. “錦江銀鯽玉生鱗。丙穴安得獨擅珍。寄語西巖漁釣子。幸分啖薺採薇人。”
”≪남포선생집·칠언절구≫(권4)
<맑게 화답하며 배를 띄우다.작은 서문을 붙이다(淸和泛舟 幷小序)>(≪南圃先生集·七言絶句≫[卷四])에는 시의 서문을 통하여 당시에 김만영이 얼마나 영산강을 사랑하였는 지 그리고 어떻게 영산강 뱃놀이를 즐겼는 지를 보여준다.
“경술년 4월초파일에 오전 조류가 비로소 잔잔해져 나는 몇 명 형제들과 작은 배를 타고서 우로포를 출발하여 배가 흘러가는 데로 맡기었다.세심정 아래에서 잠깐 정박하였다가 장춘정에서 석관정에 이르러 배를 버려두고 언덕에 올랐다. 몇 사람과 동행하며 바람이 무서워서 모두 강골짜기에 엎드렸다. 나는 홀로 바윗길를 오르내리며 때로는 잠자는 기러기를 가까이하거나 또는 손으로 맑은 물을 스치기도 하였다. 아름다운 모래사장을 거닐며 멋진 야생초를 꺽기도 하였다.바위 모퉁이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스스로 느낀 것을 읊조렸다. 생각이 거침이 없었으니 실로 옆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크게 비운 사람에게 참된 인연이 존재하는 것이다. 해가 어두워져 돌아와서 여전히 밀려오는 읊조름이 있었다.신세를 돌아보며 역시 감개무량하여 이를 따랐다.“庚戌四月初八日。午潮方平。余與昆季數人。泛小舟發尤老浦。中江容與。任其所之。小泊于洗心亭下。由藏春亭至石串亭。舍舟登岸。同行數子畏風皆伏河曲中。余獨上下巖徑。或戱押眠鷗。或手激淸湍。步芳洲而折瓊草。立石角而望天表。吟哦自得。無限意思。實非傍人所及知。而眞妙契於太虛者存焉。日晩歸來。仍成浪吟。回▦身世。亦有感慨隨之。”
”
이어서 시문을 살펴본다.
“4월 맑고 따사로운 초팔일에 아름다운 배 가볍게 금강 물결에 띄웠네.
아마도 전신이 신선의 벗이었으리라. 즐겁게 호수와 산 신선놀음을 즐기노라 “四月淸和初八日。蘭舟輕泛錦江流。前身認是神仙侶。喜作湖山物外遊。”
”
“아마도 전신이 신선의 벗이었으리라. 즐겁게 호수와 산 신선놀음을 즐기노라”라는 구절은 일옹 최희량에게는 한호공 임연이 날개없는 신선같이 보였음이 분명하다.
4) 歸川 李廷夔(1612년~1671년)와의 교유
이정기(李廷䕫)의 호는 귀천(歸川), 일경(一卿)은 자. 효종(孝宗) 때 대사성(大司成), 현종(顯宗)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이정기는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일경(一卿), 호는 귀천(歸川)이다. 아버지는 도호부사를 지낸 이제(李櫅:1589~1631)이다.이정기와 나주임씨 가문의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증명해주는 것은 이정기의 행장인데, 창계 임영(林泳)이 쓴 <고 가선대부 이조 참판 이공 행장(故嘉善大夫吏曹參判李公行狀)>이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된다.“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정기(廷夔), 자는 일경(一卿),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이란 말머리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고(先考) 휘 제(穧)는 大丘府使를 지냈는데, 젊은 나이에 司馬試에 장원으로 뽑힌 뒤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갔고, 43세에 졸하였다. 뒤에 아들인 공이 현귀(顯貴)하게 됨에 따라 직제학, 도승지에 가증(加贈)되고 부사,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참판공의 배필인 정부인(貞夫人) 羅州林氏는 관찰사 임서(林㥠)의 따님으로, 품성과 조행이 탁월하여 여사(女士)의 풍모가 있었다. 만력(萬曆) 임자년(1612, 광해군4) 5월 2일에 공을 낳았다.“考諱穧。大丘府使。蚤歲魁司馬。由大科進。年四十三以卒。後以公貴。加贈直提學都承旨。贈府使,吏曹參判。參判公之配曰貞夫人羅州林氏。觀察使㥠之女。性行卓絶。有女士風。以萬曆壬子五月二日生公。”
”
이정기의 어머니가 임서의 딸이고,따라서 林㥠는 이정기의 장인어른이 되는 것이다. 청음(靑陰) 金尙憲(1570~1652)의 <관찰사(觀察使) 임공 서(林公㥠)의 신도비명 병서(觀察使林公神道碑銘 幷序)>에서 역시 장남 임연에 대해 다음과 서술하고 있다.
“공(林㥠)은 자식 셋을 두었다. 장남 연(堜)은 계축년(1613, 광해군5)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차남 담(墰)은 생원이다. 딸은 이제(李穧) 이재(李穧:1589~?)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이실(而實).
에게 시집갔는데, 이제는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정언 연은 참의(參議) 홍서익(洪瑞翼)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직 자식이 없다. “有子三人。男曰堜。癸丑文科。司諫院正言。曰墰。生員。女適李穧文科禮曹正郞。正言娶參議洪瑞翼女。時未育。””
”
따라서 귀천유고의 한시내에서 ‘舅氏’는 林㥠(1570~1624)를 지칭하는 것이며,‘東里叔主’는 바로 東里 임위(林㙔:1597~1668)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風巖 임복(林復:1521~1576)이 임서의 부친임을 염두에 두고 한시의 내용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李廷夔(1612년~1671년)는 임서의 나이와 비교할 때에 42세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임서는 ≪石村遺稿≫를 남겼으며 호가 石村이며, 목대흠(睦大欽)의 ≪茶山集·칠언율시≫(권2)에 <섬호의 운에 차운하여 이에 백석 임서를 이별한다(次剡湖韻。仍別林白石㥠)>라고 기록하였으니,목대흠에 의해 임서는 白石이란 별호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정기는 1639년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의 벼슬을 거쳤다. 그 뒤 승지(承旨), 예조 참의(參議), 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종 초에는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를 지냈다. 1661년 인천 부사 1664년(현종 5)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주위로부터 모함을 받자 바로 사직하였다. 1666년 한성부 좌윤 겸 우부빈객(漢城府左尹兼右副賓客)이 되고, 1669년 이조 참판이 되었다. 1671년 한성부 좌윤으로 있을 때에 대기근이 일어나자 진휼청(賑恤廳)의 제조(提調)가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전력을 다하였다.
<배안에서 장인어른에게 차운하다(舟中次舅氏韻)>
“부질 없는 세상 100년동안 사람은 쉽게 늙어지고
천리를 뻗은 길 강물은 공연히 흘러가네
웃음을 참으며 줄곳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한 조각 배에 오늘날 모래사장의 갈매기를 벗하노라. “浮世百年人易老, 長江千里水空流。堪笑向來多少事, 扁舟今日伴沙鷗。”
”
이 시는 배안에서 장인어른인 임서에게 준 한시인 것이다. 이정기의 ≪귀천유고≫내의 ‘舅氏’는 모두 임서를 지칭하는 것이다.
동리 삼촌을 식영정에서 송별하며에 차운하다(次東里叔主送息營亭韻)
“높은 누정은 황혼을 뒤로하고 저수지 주변에는 버드나무로 가렸구나
향기는 위태로운 난간에서 퍼져오고 등불은 자그마한 창 넘어로 흐릿하다네.
홀로 가버리는 마음이 얼마나 마음 아픈지
다시 찾아와 그 계획을 찾으니 어그러트릴까 걱정이라네
한조각 배는 오고가며 세상난리속에 다행히도 서로 의지한다네.“高閣黃昏後,池邊柳作幃。香從危檻至,燈隔小窓微。獨去情何極,重尋計恐違。扁舟來又往,世亂幸相依。”
”
‘東里叔主’는 바로 東里 임위(林㙔:1597~1668)이니 이정기보다 15살이 위인 것이다.<만휴당에서 장인어른 임연선생이 종구인 동리 임위에서 보낸 시에 차운하여 다시 보내다>(晩休亭次舅氏寄從舅東里韻仍寄呈)>시문에서는 동리 임위를 ‘종구(從舅)’라고 칭하였으니 어머니의 종부(從父) 형제는 종구(從舅 외종숙)이다.
<외종숙인 동리공 임위에게 차운하다(次東里從舅韻)>[≪귀천유고≫56쪽]
“강가의 방랑객이 되어 평생의 모든 일에서 제외되어
조용한 가운데 조용함을 추구하니 더욱 산에서 거처하게 된다네
서로 만나 어지러운 세상사를 스스로 비웃으며
10년간 궁궐의 문앞에서 옷자락을 끌고 다닌다네
남쪽 호수의 풍경은 참으로 마음이 끌린다네
무슨 일로 조정으로 하여금 슬프게 할 것인가?
10년을 돌아보니 모두가 꿈결같구나
홀로 청총마를 몰아가니 강가에는 해가 저무는구나 “江客平生萬事除,靜中求靜更山居。相逢自笑風塵狀, 十載王門漫曳裾。南湖物色最堪憐, 何事令朝意愴然。回首十年都夢幻, 獨驅驄馬暮江邊。”
”
아마도 이정기가 무안 식영정 부근에 둥지를 튼 것이 10년이라는 사실(十載王門漫曳裾)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남호현(2016:52)는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항복한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당시의 선비들에게 어떤 충격이 되었을지 살펴보는 데에 도움이 된다.
“1627년(인조 5) 3월 3일(음력, 이하 동일), 인조가 머무르던 江都의 行宮에서 이색적인 장면이 펼쳐졌다. 조선 국왕과 관리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胡人들이 白馬와 黑牛를 잡아 조선인들과 그 피를 나눠 마시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인조가 그 피를 직접 받아 마신 것은 아니었으나, 조선 국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이러한 의식이 행해진 사실은 그 자체로 이례적이었다 남호현(2016:52):<朝淸關係의 초기 형성단계에서 '盟約'의 역할-丁卯胡亂期 朝鮮과 後金의 講和過程을 중심으로>
”
李廷夔(1612년~1671년)는 1639년 진사가 되고 164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였으니, 아마도 아마도 무안 息營亭~靜觀齋 생활은 아마도 1639년 이전으로 보여진다.
<만휴당에서 장인어른 임연선생이 종구인 동리 임위에서 보낸 시에 차운하여 다시 보내다>(晩休亭次舅氏寄從舅東里韻仍寄呈)>
“낚시터에서 헤어지며 열흘이 되지 않았다네
그리워하지만 돌아가는 나룻터에 마주 대함이 한스럽다네
만휴당의 달빛 아래 연꽃을 함께 감상해야 할 것이니
여기에 어찌 한 사람이 부족하게 되었나? “分手磯頭未浹旬, 相思猶恨隔歸津。休堂荷月須同賞, 這裡寧敎少一人。”
”
‘浹旬’이란 ‘열흘 동안’을 의미하며 ‘挾旬(협순)’이라 쓰기도 한다. 이정기의 한시에서 만휴당과 식영정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음이 주목된다.“여기서 어찌 한사람이 부족하게 되었나”는 말은 아마도 임씨 가문중 한 사람이 서거하였음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무중 유계와 원통사를 찾는 도중에 이전 운에 첩운하다(仍與武仲尋圓通寺途中上疊前韻)>시를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서 ‘武仲’ ‘俞武仲’은 즉 유계(俞棨:1607~1664)를 지칭하는 것이다.李廷夔(1612년~1671년)보다 5살이 많으나 식영정을 중심으로 매우 막역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여기서 원통사는 총지사의 ‘원통암’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총지사’는 나주임씨 문집에서 심심치 않게 출현하는 데,총지사가 나주임시의 소유이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누대에서 이별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말을 나란히 하여 산개울을 오르느라 이슬이 옷에 젖는구나
세상이 어느 때가 되어야 모두 벗어날 수 있을까
저녁 산기슭에 맑은 종소리에 의지하게 되는구나 “樓頭分手不勝悲, 並馬山溪露濕衣。世界何時都擺脫, 暮山淸磬是歸依。”
”
<이산 마을의 술자리에서 유계의 월출산 시에 차운하다(梨山酒席次武仲月出山韻)>
“부평초같은 종적은 거처할 곳이 없으나 슬프지는 않고
오늘 갈림길에서 더욱 옷깃을 잡게 되는구나
참으로 도연명이 귀거래사의 한스러움이라네
월출산의 푸른 빛이 멀리 은은하구나 “萍蹤無處不生悲, 此日臨歧更摻衣。㝡是淵明歸去恨, 月山蒼翠遠依依。”
”
<외삼촌에게 차운하여 보인다(次伯舅氏示韻)>
“관심사를 꽉 쥐려고 하지 마세요.어지러워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 같으니,
평생 뜻이 얽매이지 않았으니, 맑게 개인 하늘만이 알겠지요. “莫把關心事, 紛紛若亂絲。平生磊落志, 惟有霽天知。”
”
<길위에서 장인어른에게 차운한 것을 올리다(途上次舅氏韻)>
“맑고 깨끗한 주계는 무엇과 비교할까
오늘 어른을 모시고 멋진 거처를 방문하였네.
습성이 산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행장은 말았다가 펼쳐지는 것이라네
멋진 풍경이란 본래 험한 곳에 있으니
경치를 감상하려면 그래도 말을 타고 천천히 가는 것이 좋다네
세상에는 결국 멈출 수 없는 번거로움이 있는 것이니
품은 회포가 다 펼쳐지지 않을 것을 걱정한다네 “淸絶朱溪較孰如, 追陪今日訪仙居。不惟性癖耽山水, 自是行裝任卷舒。勝地本來 在險, 玩景還喜馬行徐。人間有累終難駐, 却恐函懷未盡攄。”
”
“스스로 행장은 말았다가 펼쳐지는 것이라네(自是行裝任卷舒)”는 말은 ≪증광현문(增廣賢文)≫의 “사람의 정이란 물과 같아서 깊고 얕음이 있고 세상의 일이란 구름과 같아서 모였다가도 흩어지느니라(人情似水分高下,世事如雲任卷舒)”라는 말에 근거한 것으로 이정기가 박학다식함을 보여준다. <귀로에 장인어른에게 차운하다(歸路次呈舅氏)>에서도 ‘朱川’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아 ‘朱溪’는 식영정 근처의 시내의 이름으로 보인다.‘朱溪’와 ‘朱川’은 동일한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아마도 운자나 평측을 맞추느라 글자를 바꾸어서 쓴 것으로 보여진다.
<돌아가는 길에 차운하여 장인어른에게 드리다(歸路次呈舅氏)>
“무슨 까닭으로 주천은 천천히 오고 가는가?
푸른 산은 겹겹이 둘러있고 강물은 휘감아 돌아가네
평생 그윽한 풍경 찾느라 지치지도 않는지 강가의 백척 누대를 세웠다네.
소나무 사립문에는 종일토록 사람들 왕래가 적고
난간 밖의 시냇물은 끊임없이 맴돌고
멀리서 이별의 정서를 생각하느라 스스로 보내기가 어렵고
초생달 맞이 하느라 억지로 누대에 오른다네 “何事朱川漫去來, 靑山重疊水縈迴。平生不倦尋幽境, 擬上溪頭百尺臺。松扉終日少人來, 檻外溪流泱泱迴。遙想別懷難自遣, 爲邀新月强登臺。”
”
“무슨 까닭으로 주천은 천천히 오고 가는가”라는 말은 주계 즉 주천이 영산강이 이산리 지역의 작은 지류로 조수간만의 영향으로 물이 빠졌다 차오르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평생 그윽한 풍경 찾느라 지치지도 않는지 강가의 백척 누대를 세웠다네”라는 말은 옆에서 장인어른인 임연 선생이 식영정을 짓느라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지켜보고서 쓴 내용으로 보인다. 이정기가 비래봉 아래 암각 글자를 쓴 사람으로 밝혀졌으니,그는 아마도 장인어른과 몇몇 일가친척들과 함께 암각바위 근처 또는 아래쪽 영산강에 배를 띄워 지켜보았을 것이다. 결혼한 후에 일정기간을 식영정 주변 아마도 정관당에서 지냈을 것으로 보여지며,이 정관당이란 당호는 이정기가 남긴 정관당기(靜觀堂記)가 전해지기 때문에 기문을 통하여 이산리 지역에서의 삶을 고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외삼촌의 만휴정에서 유계에게 차운하다(伯舅晩休亭次俞武仲韻)>
“강물이 돌아들고 산이 끝나면 평평한 교외라
황금빛 언덕의 아침 노을은 높은 정자에 천천히 다다른다네.
건물을 지은 일은 이미 잊어져 당시의 일이라
마음으로는 그래도 옛 사람들과 사귀기를 기대한다네
연꽃을 사랑하며 왼쪽에 연못 가까이있고
시구를 찾아서 바닷가 봉우리를 멀리 바라본다네
남쪽으로 옮겨야 여행길을 쫓아다니다가
강가에 다시 야윈 그대를 위해 초가집을 지었다네 “水回山盡卽平郊, 金岳朝霞䢖峻標。卜築已忘當世事, 心期還與古人交。愛蓮坐向池塘近, 覓句嚬瞻海峀遙。南渡十年隨杖屨, 臨江更結瘦公茅。”
”
‘伯舅’는 외삼촌 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외삼촌이니 큰 외삼춘을 지칭한다.그렇다면 이정기의 시문에서 ‘伯舅’로 지칭하는 인물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이 시문에서 ‘伯舅晩休亭’이란 말은 만휴당을 지은 임연을 ‘伯舅’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還息營亭翌日寄武仲(식영정으로 돌아와 다음날 유무중 유기에게 편지를 부치다)>
“사찰에 등잔을 들고서 함께 모이는 날
노을진 산 기슭에서는 함께 오를 때가 드물다네.
저녁에 강가 정자에 돌아와
홀로 여러 선비들의 유람 시를 본다네
”
호가 東里이고 별호 無悶堂이고 자가 平仲인 林㙔(1597~1668)가 이정기에게 보낸 시 1수가 ≪동리유고(東里遺稿)≫에 전한다.
<일경 이정기에게 보낸다(寄一卿)>
“아름답고 푸른 잎과 붉으레한 꽃 참으로 사랑스러운데,
서둘러 헤어지자니 슬퍼지는구나
숲사이의 적은 무리들은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가고,
저녁 노을속 슬퍼 읊조리며 시냇가에 앉아있네 “嫩綠殘紅正可憐,怱怱告別轉凄然,林間小隊看已遠,落日沉吟坐磵邊”
”
뿐만 아니라 이정기(1612~1671)가 동리 임위에게 보낸 시들도 보인다.
<이산 송설헌에서 칠석날에 대이를 송별하며 주다(梨山松雪軒贈別大而七夕)>
행락을 아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잔치자리 떠나서 또 이곳에서 벌리었네
“행락을 아는 이가 얼마가 있을까 잔치를 파하고 또 이곳에서 열렸네.
멀리 떨어진 백성들에게 은혜로운 지방행정을 펼치니
임금이 급히 현명한 인재를 불러 들이네.
하늘에 아름다운 기약이 가까우니 세상에서의 먼 이별을 재촉하는구나
바람결에 마음이 끝이 없고 은근하게 깊이 술잔을 들이킨다네. “行樂知無幾, 離筵又此開。遐民留惠政, 聖主急賢才。天上佳期近, 人間遠別催。臨風無限意, 脉脉把深杯。”
”
‘大而’는 홍명하(洪命夏, 1607~1667)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이, 호는 기천(沂川)이다. 현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효종의 신임이 아주 두터워 효종을 도와 북벌 계획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기천집(沂川集)≫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임연과 홍명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한시가 있다.≪沂川集≫(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 3646-9-1)에 <무안 이산의 임연형님에게 즉석에서 시를 지은 것을 보내다(往務安梨山林兄堜所口占)>(37,38쪽)시가 있다.
“외로운 이슬같은 남은 여생은 이미 흰 머리가 되었네요
형제간에 이별한 지 몇 년의 가을이 지났을까요
서로 감읍하며 아무 말도 못하였지요.
그저 한호공의 은혜가 마지막에는 슬픔이라 말할 뿐이네 ”孤露餘生已白頭, 弟兄相別幾經秋。相逢感泣無他語, 只說君恩到底憂。”
”
임상덕(林象德) ≪노촌집(老村集)·記·水月樓記≫(권3)에는 송설헌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누각지기의 집의 남쪽 구석에 동쪽으로 송설헌과 접해있어,앞으로는 큰 강과 수백보이다.강의 동남쪽은 기이한 봉우리가 찌르고 도려내고 깍은 듯 세워져서 하늘가에 있는 것이 영암군의 월출산이다. 누각의 경관이 강에서 보면 크고,멀리서는 월출산이 크게 보인다. “樓直宅之南隅。東與松雪軒接。前距大江數百步。江之東南。奇峯攙攢削立而際天者。爲靈巖郡之月出山。樓之觀。近者江爲大。遠者月出爲大。”
”
이정기의 귀천유고에는 귀천 이정기가 지냈던 집과 별채 이름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명칭이 출현하는 데, 그중 정관당(靜觀堂), 송설헌(松雪軒),수련당(睡蓮堂) 등의 명칭이 보인다. 이에 대하여는 향후 별도로 고찰하려고 한다.정관정이나 송설헌이나 수련당 모두 아마도 귀천 이정기가 거처하던 곳으로 보여지며 이중 송설헌은 후에 임상덕이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또한 정관당에 대해 유계가 쓴 정관당기(靜觀堂記)가 있으니 철학적 이치를 담은 기문을 보면 이정기와 유계의 깊이있는 삶의 철학과 우애가 담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무안의 명승은 남강 일대에 있으니, 내가 무안에서 약 2년 군수를 지내며 강을 따라서 오륙십리를 오르내리며 족적을 두루 펼치었다.마지막으로 이산의 석호(石湖)를 얻었는데 승달산 산언덕이 꺽어져 동쪽으로 달리어 강중앙을 뚫고 그 흐름을 타고서 봉우리와 계곡이 맑고 그윽하다.소나무와 대나무숲이 그윽하고 울창하니 내 친구인 이경 이정기가 산언덕을 개척하여 집을 지었다. 그 그 지형을 끊어서 사호 아래 이산 위쪽으로 .산은 서석산의 남쪽에서 월출산 북쪽으로 푸르게 둘러있다. 멀리서 가까이서 둘러져 있어 책상 아래 자태를 드러내는 듯 하다. 직선으로 10여보 지역에는 큰 바위가 쌓여져 봉우리가 있어 기묘하여 천연적이다,바로 집의 맞은 편이다. 낮은 소나무 10 그루가 바위틈새에 널어져 있어 모두 작은 교목이 누어있고 꺽어져있어 그림같아 참으로 절경이다.一卿 李廷夔의 편당(扁堂)을 살펴보면 ‘강’이라 하지않고 ‘山’이라 하지않고 ‘松石’으로 이름짓지 않고 반드시 ‘정관(靜觀)’이라 해야 함은 무슨 이치인가? 사물의 이치로 세상을 살펴보는 것은 사물이 없으면 즐거울 수가 없는 것이다. 사물로서 세상을 보는 것은 사물이 없으면 피곤한 것이 아니다. 사물을 아름답게 본다는 것은 사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이치로 보아야 비로서 마음속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외형에서 피곤함을 풀면 어긋나지도 않고 메이지도 않아 초연하게 되는 것이다.조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대체적으로 물이 조용하면 만물이 그림자가 지게 하며 마음이 조용하면 만가지 이치가 형체화된다.사람이 조용할 수 있으면 이치가 드러나게 되니 비록 빈궁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집밖을 나서지 않더라도 접하는 모든 상황이 기쁨이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하물며 산수의 풍경도 인자함과 지혜를 갖추어서 그 몸이 쓰여지게 해야 한다.눈으로 스치는 보이는 것이 그 어찌 쓰임이 천박하고 새로운 것일까? 혹은 어떤 것들은 반대이니 사물을 본다는 것은 우뚝하고 창연하여 깊더라도 과일은 좌우로 포개놓는 것이며 하늘에서 못위를 날라가는 도약이란 상하로 활발한 것이다.나의 이러한 기쁨이란 것은 즐거움의 귀속인 것이다.나의 눈길안에서 스치며 장애가 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다.그러나 일경(一卿) 그대의 명당은 이런 점에서 보이는가? 이런 점에서 보여진다네.그러나 조용함(靜)에는 두가지 설이 있으니 마음속에 주관이 있으면 그런 조용함도 활기찬 것이며 사물을 다스리되 사물에 구속되지 않는다. 마음속에 주관이 없으면 그 조용하다는 것도 건조한 것이며 사물을 남기되 사물에 구속되는 것이다.내가 일경 그대의 조용함이 저것에 있는 지 이것에 있는 지 모른다.일경이 웃고 대답하지 않으니 드디어 벽에다 쓰고 그 시에 화답하노라.”
<유무중이 산재를 방문하여 귀로에 율시 1수를 얻어서 보고서 차운하여 보낸다.5월(武仲來訪山齋歸路得一律見寄次韻,五月)>(≪귀천유고≫,17쪽)가 있어 자신이 살던 이산진 지역을 ‘느러지(曲江)’으로 칭한 부분이 있으니 매우 주목이 된다.
“작은 서재를 느러지(曲江) 물가에 신축하였으니
지역이 멀어서 내내 찾아오는 이가 없구나
파도의 흔적은 스스로 세상에 버림받기에 알맞고
그윽한 마음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좋아하였네
평생 친구가 없음을 한스러워하지 않으나
말년에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
사군(俞棨)을 의지하니 집안에만 있을 수 있어
대낮에 때때로 다시 산기슭에 올 수 있겠지. “小齋新築曲江潯, 地僻年來絶訪尋。浪跡自宜爲世棄, 幽情偏喜入深林。平生不恨無知己, 末路難逢會此心。賴有使君能屛務, 晝能時復到山陰。”
”
멋진 풍광을 읊은 한시로 느러지 권역의 명승 지정을 위한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나암 근처 배위에서 유무중의 운에 차운하다(羅岩船上次武仲韻)>[≪귀천유고≫,32쪽]
“굽이굽이 맑은 강 보이는 것마다 산이요
노을은 끝이 없이 어지러운 산하에 뿌려진다네
이런 나들이가 좋은 친구를 만나려 것 뿐이니
관아의 청사의 공무의 한가로움이 아니라네 “曲曲淸江面面山, 夕陽無限亂峰間。此行只爲良朋會, 不是黃堂薄領閑。”
”
여기서 황당(黃堂)은 웅황(雄黃)의 염료(染料)를 칠한 태수(太守)의 청사(廳舍)로, 보통 지방 장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굽이굽이 맑은 강 보이는 것마다 산이요(曲曲淸江面面山)”라는 말은 이정기가 여러해 거주했던 이산리 지역 근처에 있는 지명으로 보이며 전남 나주시 동강면 대지리에 신라산(新羅山:116미터)이 있으니 신라산을 羅山,또는 羅岩으로 줄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굽이굽이 맑은 강’은 느러지(曲江)를 포함한 영산강 아홉구비(九曲)를 브랜드전화하는 데에 큰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李鍾奭(1898~1963)의 곡호정(曲湖亭)시에서 ‘아홉구비 강 물줄기(九曲溪流)’는 섬호와 느러지(曲江)을 포함하는 영산강 굽이굽이를 아홉구비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은 영산강 아홉구비 물줄기 지역을 무의구곡가(武夷九曲歌)처럼 나주시,무안군,전남도가 협력하여 영산구곡 선정을 통한 고급관광브랜드전략을 전개하면 좋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정기가 유계를 지칭하여 좋은 친구라고 하였으니 유계가 그의 거처인 靜觀堂 기문을 지어준 데에서 그들 우정의 두터움을 본다. 관아의 휘황찬란한 누락이 아니어도 좋은 친구가 있다면 자그마하고 조용한 거처도 큰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니,이것이 바로 유계가 써준 정관당기의 의미일 것이다.
李鍾奭(1898~1963)의 ≪춘파유고(春坡遺稿)≫에는 <삼가 곡호정으로 걸어가 원운을 짓다.신유년 봄(謹步曲湖亭原韻,辛酉春)>라는 시가 있어 섬호 즉 느러지(곡강) 권역 월송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곡호정에 대한 쓴 시가 전해진다.
“벽옥같은 섬호에는 정자가 하나 있으니,
인자함이나 지혜로나 가장 먼저 깨어있다네.
아홉구비 강 물줄기는 지경이 멀다는 것을 알게 된다네
수많은 산언덕 기운에 지역의 영험함을 차지한다네.
빗대어서 평생토록 역사를 읊조렸고
그의 남긴 흔적은 당년에 경전을 품고 읽은 것이라
도리를 숭상한 그는 사소한 기쁨을 추구하였으니
지금까지 전해지는 풍속이 집안에 가득하다네 “碧玉剡湖中有亭, 於仁於智最先醒。九曲溪流知境僻, 萬層山氣擅區靈。寓言平生吟題史, 遯跡當年讀抱經。尙德先生瓢飮樂, 至今流俗滿門庭。”
”
≪춘파유고≫ 뒷부분의 행장을 보면 李鍾奭(1898~1963)은 고종 戊戌8월11일에 영산포읍 부덕리에서 태어나 謙山 이병수(李炳壽:1855∼1941)에게 공부하였으며 66세나이로 癸卯년 4월27일에 태어난 부덕리에서 서거하였다.이 곡호정은 영산포 지역의 林炳縉의 것이니 임병진의 부탁으로 이종석이 그의 곡호정에 원운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영산포 주변 무안 지역까지 한말의 여러 선비들과 교유하며 그들의 정자와 거처에서 차운하고 교유한 사실들을 이병수가 한시로 기록하였으므로 정자 및 거처를 중심으로 한 한말 선비들의 교유와 시회 활동을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자료가 할 것이다. 신유년이니 1861년,1920년,1981년이 신유년이니 이 시는 1920년 신유년에 쓰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종석의 또 다른 시인 <이산리의 식영정을 지나면서(過梨山息營亭)>시는 한말에 여전히 그 멋진 느러지권역의 풍광을 읊은 시인 것이다.
“바람결에 강물을 따라 높은 누대에 오르니
한줄기 기나긴 영산강은 난간을 끼고 돌아가는구나
주인이 붙잡으니 나도 취기가 오르는데
말타고 귀가길에 태양은 무슨 마음으로 저물어서 재촉하는가? “臨風隨水上高坮, 一帶長江抱檻廻。主人停我我將醉, 歸馬何心日暮催。”
”
5) 市南 俞棨(1607~1664)와의 교유
유계 선생이 학문적으로 가장 성숙하고 호서 사림들과 유대를 깊게 맺었던 때가 이때였다. 호서 사림의 거물인 송시열, 송준길을 비롯해 금산에 살고 있던 초려 이유태, 윤선거, 윤문거 등이 모두 연배가 비슷했다. 특히, 명재 윤증의 부친 윤선거와 선생은 동문수학한 사이를 넘어 평생 동안 마음을 터놓고 지냈던 친구였다. 이들이 모여 학문을 강론하고 토론했던 곳이 바로 선생이 세운 산천재였다. 선생이 39세에 예조정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산천재는 윤선거의 학문 터전이 됐고, 1669년 윤선거가 사망하자 아들인 명재 윤증이 산천재를 강학과 학문 탐구의 본격지로 삼는다. 유계 선생이 1664년 58세로 서거하자 윤증의 부친인 미촌 윤선거는 유계의 행장을 지었다. 유계 또한 생전에 윤선거의 부친인 윤황의 묘표를 지었다. 그런가 하면 윤증은 스승의 묘지명을 짓고 유계의 문집인 시남집(市南集) 편찬에 깊이 관여한 수제자였다. 윤증은 13세 때인 1642년(인조 19년)에 유계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1650년 유계가 온성으로 귀양을 가게 되자 찾아가 전송하기도 했다. 유계는 윤증에 대해 “배움에 있어 꼭 성의로 해서 게으르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俞棨(1607~1664)는 한호 식영정에서 시를 읊조린 것 뿐만 아니라 다른 나주임씨의 인물들과 교유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무주 임담의 계정 벽위에 차운하다(次茂朱林載叔溪亭壁上韻)>(≪市南先生文集·詩·칠언율시≫권4)는 임담(林墰:1596~1652)의 시에 차운하였음을 보여준다.‘무주임재숙(茂朱林載叔)’이란 임담(林墰)을 지칭하는 것이다.임담(林墰)은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구(淸臞)이며, 부친은 감사 임서(林㥠)이다.
“청계길 산을 휘감고 있어,병풍같은 산언덕 눈과 달빛이 햐얗구나.
나그네는 난간에 의지하여 흥이 차오르고,
정자 어르신은 골짜기를 좋아하여 의심할 것이 없구나
멋지고 신나는 안개와 노을이 어린 동굴이라네.
꿈에서 깨어나 인간세상의 재물의 부요함이 깨어지네.
玄洲를 그리는 마음을 오히려 비웃노니
하루종일 화로를 가까이하느라 홀로 서책만 외로웠구나. “淸溪一道抱山來。山面層屛雪月皚。客子憑闌興不淺。主翁專壑意無猜。神遊物外煙霞窟。夢斷人間錦玉堆。却笑玄洲底心事。擁爐終日獨書灰。”
”
‘錦玉之樂(비단과 옥의 즐거움)’,‘珠玉之資(주옥의 재물)’이란 말이 있으니 ‘錦玉堆’란 비단과 옥 무더기란 말이니 꿈속에서 아마도 풍요로운 부자의 꿈을 꾸었던 모양이다. 현주(玄洲)는 북해(北海) 가운데 있다는 섬 이름인데, 여기에는 신선이 살고 금지옥초(金芝玉草)가 많이 있다고 한다. 그 시구의 정서를 더듬어보면 아마도 겨울철이라 추웠을 것이고,이에 화로불을 가까이하느라 졸다가 깨어버리면서 자신이 서책을 가까이하지는 않고 재물의 풍요로움을 꿈꾸는 꿈을 꾸고 나서 아마도 매우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유계와 이정기의 시문을 살펴보면 둘의 교유는 매우 친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씨 가문의 일원과 광범위하게 교류하였음을 볼 수 있다.특히 유계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암 송시열을 데리고 직접 임연의 식영정으로 온 기록이 있음도 매우 주목된다.
<林承旨東野丈挽 戊子>(≪市南先生文集·詩·五言律詩≫,권2), <三月旣望。約山陽使君洪大而,箕城使君尹重卿,李上舍一卿會閑好江樓。泛月中流。侵曉而還>(≪市南先生文集·詩·七言律詩 131수≫[권4]),
<三月旣望。約山陽使君洪大而,箕城使君尹重卿,李上舍一卿會閑好江樓。泛月中流。侵曉而還。3월 기망일에 산양현령 홍명화, 함평현령 尹任世,상서 歸川 李廷夔는 시남 유계와 약속하고 한호 임연의 강루인 식영정에서 만나 달밤에서 강에 배를 띄우고 새벽까지 있다가 돌와왔다.>(≪市南先生文集·詩·七言律詩 131수≫[권4])
“화창한 봄날 저물기 전에 그리운 친구들이 왔다네
호수같은 강에서 멋진 날 웃음을 터트리네
천리의 나그네들이 모두 옛 친구이고 강의 물고기와 새들도 스스로 시기하지 않는다네
난간에 기대어 술을 들이키니 달빛이 술잔 안으로 들어오네
안개 끼인 파도속에서 낚시꾼에게 웃으면서 묻는다네
세상을 잊고 이렇게 사는 것이 어떠하리 “韶華未暮玉人來。湖上佳期笑語開。千里賓朋渾是舊。一江魚鳥自無猜。巡簷索句花縈筆。憑檻斟醪月入杯。乘興相將登小艇。滿衣風露夜深廻。”
”
<是月十九日。偕重卿,子秀訪閑好江樓。蓋取十九廿九皆是九。九月九日無定時之意也。是日留宿。醉後呈閑好翁。用進退韻 ‘진퇴운(進退韻)’이란 일종의 율시 격식으로 진퇴격(進退格)이라고도 한다. 한 수의 시에 두 개의 서로 비슷한 운부(韻部)인 운자(韻字)를 가지고 격구(隔句)로 압운하여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예컨대 1구(句)와 3구에서는 우운(虞韻)을 쓰고 2구와 4구에서는 어운(魚韻)을 쓰는 식이다.
(이 달 19일에 중경 윤세임,子秀 朴惟儁 박유준(朴惟儁)의 본관은 상주(尙州)이며 자(字)는 자수(子秀), 거주지는 남양(南陽)으로 1596년에 태어났으나 졸년은 미상이다
과 함께 한호 임연의 강루 식영정(息營亭)을 방문하였다.대개 19,29를 택일하는 것은 모두 9라는 숫자때문이니, 9월9일은 정해지지 않은 무한한 시간의 의미이다.이 날 숙박하고 술에 취한 후에 한호 임연선생께 드렸다.진퇴운을 사용하였다)>(≪市南先生文集·詩·七言律詩 131수≫,권4])시는 임연옹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함께 덮개가 있는 쌍두마차를 달려가 만나서 주흥을 즐기며 시흥을 나누는 모습이 생생하다. 이 당시에 李一相이 綿城(무안) 태수이었으며,윤세임(尹世任:1596~?)도 함평군수이었음을 고려할 때에 마차가 매우 화려하였음이 이해된다.
“두필로 된 펄럭이는 덮개마차로 강마을에 도달하였으니
한호 임연옹의 뛰어난 기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네.
시구가 호수와 산에 끊기는 것은 보이는 멋진 풍경 때문이라네.
바람과 달빛을 초청하여 마음을 삼으려한다네.
흐르는 달빛이 은근하여 가을이 지나려 하고
술기운이 차올라 밤이 깊어지는구나
늘그막의 삶이란 서로 의지하게 되는 것
桐鄕이 띠풀 베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라네. “聯翩雙蓋到江郊。爲愛閑翁拔俗標。句斷湖山爲眼界。招邀風月作心交。
流光曖曖三秋盡。醉興迢迢一夜遙。遲暮生涯欲相托。桐鄕還肯許誅茅。”
”
여기서 ‘拔俗標’가 어떤 의미인지가 관건이다. 이 시구에서 ‘拔俗標’는 세상에서 뽑아낸 듯 뛰어난 모범의 뜻을 가지고 있다.아래의 시문들을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 예이다.
-“세속에 빼어난 헌헌장부이었네(軒軒拔俗標)”[≪점필재집 시집·시·유수 김지경에 대한 만사(金留守之慶挽詞)[제19권]≫]
-이민구(李敏求)의 삼재 김광욱 만사(金三宰光煜挽詞) “훌륭하다 말세의 모범이었지(英英末俗標)”≪동주집(東州集)·시집·시·西湖錄10·≫
동향(桐鄕)이란 ‘주읍동향(朱邑桐鄕)’의 준말이며, 주읍이 동향의 향관(鄕官)인 색부(嗇夫)로 재직하면서 은혜를 많이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공경하였는데, 동향에 묻어 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그곳에 장사를 지내자, 백성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향(祭享)을 올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漢書·循吏傳·朱邑傳≫(권89)] 한편으로는 ‘동향’이란 선영(先塋)이 있음을 지칭한다.선정을 베푼 목민관에 대해 그가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그리워하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지명이다. 한(漢)나라의 대사농(大司農) 주읍(朱邑)이 일찍이 동향의 관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으므로, 자기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는데, 과연 그 뒤에 고을 백성들이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지내 주었던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연편쌍개(聯翩雙蓋)’란 덮개가 이어져서 펄럭거리는 쌍두마차란 의미이니,문헌에서 마차 또는 가마 등을 표현할 때에 ‘지붕이 있는 쌍두마차(雙蓋鞍馬)’, ‘줄로 이어진 쌍두마차(雙馬連絆)’,‘지레대가 있는 쌍두가마(巨槓雙馬轎)’,‘꽃을 꽃은 쌍두마차(戴花雙馬)’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꽤 고급스럽고 화려한 쌍두마차를 탔음을 보여준다.
<만휴당에서 벽위에 소옹의 ‘龍門途中’운에 차운하여 한호 임연에게 드리다(晩休堂。次壁上康節龍門途中韻。呈閑好翁)>[≪市南先生文集·詩·七言絶句≫,권4]
“푸른 산이 둘려서 휘감아 있고 물이 맑으니
살아갈 계획이 참으로 일생을 감당하겠네
하얀 달빛이 동쪽에서 떠올라
맑은 강물이 서쪽으로 흘러가 헛된 이름을 보네네
한가로운 중에 술은 익어가고 멋진 손님이 이르렀네
취하여서 시가 이루어지니 좌중이 모두 놀라네 “靑山環擁水澄明。活計眞堪了一生。白月東來開素抱。淸江西去送浮名。閑中酒熟佳賓至。醉後詩成滿座驚。收拾風光供晩景。浪濤人世笑前行。”
”
邵雍(1011-1077)의 <龍門途中> ‘明’,‘生’,‘名’,‘驚’,‘行’운을 그대로 사용하여 유계가 시작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이치와 인간의 감정이란 스스로 자명한 것이니
어찌나 친밀하여 팽생을 향하는가
움츠리고 펼치는 것이 모두 내게 있어 헤아리는 바가 있으니
눈이 닿는 곳마다 구름낀 산들이 모두 기쁨이니,
자그마한 영욕에도 놀랄 필요가 없다네
높은 제후가 보고서 깊이가 바다같다고 말하는데
30년동안 팔을 휘두르며 간다네 “物理人情自可明,何嘗戚戚向平生。卷舒在我有成算,用舍随時無定名。满目雲山俱是樂,一毫榮辱不须驚。侯門見說深如海,三十年來掉臂行。”
”
<중구절에 함평군수 重卿 윤세임(尹世任)이 감악산에 올랐다.자수 박유준[朴惟儁] 및 여러명이 함께 참여하였다.한호 임연 선배는 병으로 혼자 있다가 2수의 절구를 보내주었으니 술을 마시는 대로 화답하였다(重九日。約箕城使君尹重卿 世任 登紺嶽。朴子秀 惟儁 諸人咸與。閑好丈以病獨後。見寄二絶。酒所走和)>[≪市南先生文集·詩·七言絶句≫,권1]시는 감악산에 같이 여행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병환으로 참여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당시에 함평군수는 윤세임(尹世任),상사 박자수는 朴惟儁이며 박유준(朴惟儁)은 본관이 상주(尙州)이며 자(字)는 자수(子秀), 거주지는 남양(南陽)으로 1596년에 태어났으나 졸년은 미상이다.
“남녁땅에서 방랑한 지 10여년 하늘끝 누구와 함께 기이한 여행을 할 것인가?
오늘 사군이 도착이 또 늦으니,홀로 시냇물가에 도착하여 오랫동안 머뭇거리네.
멋진 손님을 이미 만났으니 가을이 되었다네.이 세상에 이 날을 제끼고 누구와 노닐까?
헤어질 때에서 한가로운 비를 만나서 더욱이 사찰 창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네
그대와 풍경을 감상하느라 머뭇거리며 풍교에서 석양이 드리워져 기다리기가 어렵구나.
홀로 읊조리며 개울을 향하여 앉지 말찌니 시상은 원래 말위에서 떠오르는 법
멋진 약속을 간직하고 더욱 방황하지 말찌니 세상에는 항상 만남이 어려운 법
쓸쓸하게 사찰에서 반나절 이야기를 나누고
내일 아침이면 돌아갈 생각에 각가 말을 재촉하겠지.
돌아가려는 뜻은 홀연히 어떤 것인가? 마을을 깊어 산자락에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네.
시냇물은 시눗대 죽림을 뚫고 지나서 돌길이 숲 사이로 은은하구나.
멋진 모임이란 수없이 어려움을 아나니, 좋은 날 공연히 약속이 어긋날까 걱정된다네.
손을 잡고 자그마한 누각에 올라가니,단풍잎이 점점 보이지를 않는구나. “流落南州十見秌, 天涯誰共作奇遊。今日使君來又晩, 獨臨溪水且淹留。
旣逢佳客又逢秋, 塵世誰拚此日遊。臨分偶得閑人雨, 更許禪窓一夜留。右 翌日 再疊
使君探景太盤桓, 日落楓橋待亦難。孤吟莫向溪邊坐, 詩思元來在馬鞍。右 次武仲韻
莫將佳約更盤桓, 人世從來會合難。怊悵禪窓半夜話, 明朝歸思各征鞍。武仲 右武仲聯句
歸意忽如許, 洞深山雨霏。閑 溪流穿竹細, 石逕入林微。重
勝會知難數, 良辰恐易違。武 提携登小閣, 楓葉漸看稀。一”
”
<임연의 강가 정자에서 태수를 송별하다.일경 이정기와 같이 정관당에 가서 시가 이루어졌다(林閑好江亭。別使相之行。與一卿偕到靜觀堂。有成。)>
“퉁소소리 장구소리 시끄럽게 푸른 강가에 퍼지네.
깃발들이 번쩍이며 앞 산에 펄럭인다네.
마음은 달빛 피리소리에 젖어들고 안개는 도롱이 밖으로 펼쳐지네
말발굽 사이로 수레바퀴가 흔적을 남긴다네 “簫鼓喧喧殷碧灣。旌旗閃閃轉前山。心棲月篴煙蓑外。迹滯車塵馬足間。江榭遠將歸客去。巖蹊聊伴玉人還。因過精舍拚淸晤。恰得勞生半日閑。”≪市南先生文集·시·칠언율시 131수≫(권4)
”
‘使相’이란 당송 시대에 장군과 재상의 지위를 겸임하던 사람을 지칭한다. ‘箕城使君尹重卿 世任’[≪市南先生文集·詩·七言絶句≫,권1]이란 표현을 보면 지방 수령도 ‘使君’이라고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태수는 이일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당시에 이일상이 면성태수로 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시구를 살펴보면 강정 식영정에 갈 때에 임연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유계,이정기,이일상이 함께 동행하여 이정기의 당시의 살던 집인 정관당으로 가서 함께 시흥을 시로 풀어낸 것이다. 즉 제3구는 허난설헌의 <遊仙詞31>의 “안개 덮인 달빛 피리는 사람들의 일이오(煙蓑月篴人間事)”와 비슷한 이미지이다.
<강루에서 취한 이정기를 데리고 원통사를 올라서 독경승 성해 스님을 방문하다(自江樓。携李一卿大醉。上圓通寺。訪經僧性海)>[≪市南先生文集·시·칠언절구≫,권1]
“아침에 서호를 향하여 처사를 찾으니,
저녁에 동쪽 사찰로 돌아가 고승을 찾았네
평생에 술을 좋아하니 도연명이라
온 이유를 물으니 취하여 응하지 않더라 “朝向西湖尋處士。夕歸東寺訪高僧。平生嗜酒陶元亮。爲問來由醉不應。”
”
<다음날 한호공 임연과 임위 동리공과 함께 갔다.원통암 후대에 올라 멀리 바라보며 즉석에서 읊다(翌日。閑好丈曁東里林平仲俱至。登圓通後臺。遠眺口占。)>[≪市南先生文集·시·칠언절구≫,권1]
“수많은 봉우리 위로 해는 저물고 태양이 낮게 드리웠다
눈 앞의 은은한 구름은 희미해지네
원공을 돌아보며 웃으니 게송(偈頌)을 남겨주네
무엇이 원통인지 모르겠구나 “落日天低千點峯。眼中雲靄境空空。顧笑遠公留一偈。不知何物是圓通。”
”
<일경 이정기의 운으로 정관당이라 시를 짓다(用一卿韻。題靜觀堂)>(≪市南先生文集·시·칠언절구≫,권4)
“그대를 흠모하여 높은 곳에 드러누워 와유를 즐기며
남쪽 호수같은 강의 십리 모래사장을 가로질렀다네
늘어선 민가들 푸른 병풍같은 산에 점점이 들판이 놓여있고
주렴 가득히 차가운 거울에는 달빛이 흐르네
파도가 나루터에서 일어나고 수많은 갈매기들이 가까이 날아다니고
오랜 소나무와 바위위 정자에는 그윽한 한 갈래 길이 있다네
대하여 멍하니 풍경을 바라보니
대들보같은 기둥을 올라서 잠시 머물고 싶어라 “羨君高臥得天遊。龍斷南湖十里洲。排戶蒼屛山點野。滿簾寒鏡月當流。潮生浦漵群鷗近。松老巖臺一逕幽。相對窅然觀物態。欲攀叢桂乍淹留。”
”
<임평중에게 드림(贈林平仲)>[≪市南先生文集·시·칠언절구≫(권1)]
“풍호거사 임위를 내 마음에 기다린다네
하루 저녁의 사찰에서 생각한 말을 이야기 나누네
내일이면 산문을 떠나 남북으로 헤어지겠지
상쾌한 저녁 술잔을 채우니 거절하지 말게나. “楓湖居士我心期。一夕招提話所思。明發山門便南北。淸宵滿酌不須辭。”
”
‘林平仲’은 東里 林㙔(1597~1668)이니 별호가 무민당(無悶堂)이다.≪동리유고≫(377쪽)에는 그가 “문원공 사계 김장생(金長生)을 따라 배웠고,선생(김장생)이 공을 아끼고 가르치신 것이 모두 ‘위기(爲己)’와 근독(謹獨:근엄하게 홀로 지내기)의 실제 성과이었기 때문에 공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복응(服膺)하여 암묵하에 부합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서술하고 있다.
<떠나기 전에 한호 임연이 시 10여수를 보내니 그 마지막 수에 화답하다(臨發。閑好丈送詩十餘章。就和其末篇)>[≪市南先生文集·시·칠언절구≫(권1)]
“관아의 정자에 징벌된 말들 홀연히 나뉘어서 달리네
지어진 시구들 소매에 가득히 채워서 돌아가누나.
영산강의 숲과 강물 천리나 멀고먼데
한가지로 상쾌한 시흥이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잡는 듯 하네. “官亭征馬忽分飛。嬴得詩篇滿袖歸。錦水林江千里隔。一般淸興釣魚磯。
”
<임평중이 절구 3수를 보내와 이에 제1수에 차운하다(林平仲送三絶。就次一章。)> [≪市南先生文集·시·칠언절구≫(권1)]
“외로운 구름 아래로 새 한 마리 멀리 심양이 아득하네.
산언덕의 숲들은 푸르르고 영산강을 길기도 하구나
쓸쓸하도다 님이여 공연히 몽상이 떠오른다네,
풍호의 달빛과 안개 늦가을의 햇살 “孤雲獨鳥渺潯陽。嶺樹蒼蒼錦水長。怊悵玉人空夢想。楓湖煙月晩秋光。”
”
‘林平仲’은 東里 林㙔이니 유계가 임위와 여러차례 차운한 것이 눈에 띈다.임위를 칭하면서 ‘<임평중에게 드림(贈林平仲)>’에서 풍호거사(楓湖居士)라 칭하였으니, 이 시에서도 ‘풍호의 달빛과 안개 늦가을의 햇살(楓湖煙月晩秋光)’이라 칭하였으니, 회진의 풍호나루터가 임씨가문의 중요한 활동지역이라는 사실이외에 유계가 임위를 지칭하는 별호인 것처럼 보인다.
<임 상서 임 상서(林尙書) : 임담(林墰, 1596~1652)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재숙(載叔), 호는 청요(淸曜)ㆍ청구(淸癯)이다. 병자호란 때 사헌부 지평으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총융사의 종사관이 되어 남격대(南格臺)를 수비하였다. 벼슬은 이조 판서에까지 올랐다.
담 의 정자 위에서 손자 주석이 벽에 걸린 시에 차운하기에 그 운으로 짓다(林尙書 墰 亭上 疇孫次壁上韻 爲步其韻)>[≪송자대전·시(詩)·칠언 절구)≫,제2권]시는 시문의 내용을 볼 때에 한호공 임연이 서거한 후에 송시열이 손자인 봉곡(鳳谷) 송주석(宋疇錫:1650~1692년)을 데리고 임담(林墰:1596~1652)의 정자를 방문하여 손자가 벽에 쓰여진 시에 차운한 것을 보고 같은 운으로 지은 시임을 보여준다.따라서 송시열이 임담의 정자를 방문한 것은 1652년이후의 일인 것이다. 한시의 배열순서를 볼 때에 1668~1673년 사이에 지어진 한시로 보인다.또한 임담은 한호 임연의 친동생이니 자가 載叔이고 호가 淸臞이다.임담은 수은 강황과 남곽 박동열의 문하에서 학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閒好遺稿·淸臞遺稿≫(여강출판사,1989) 해제 4쪽
.손자를 데리고 임담의 정자를 방문한 것이니 송시열이 얼마나 임담을 아꼈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월의 강남 땅 꽃은 안 피었지만 서둘러 말을 몰아 옛 친구의 집 찾아왔네.
슬프구나, 저승 간 사람은 다시 볼 수 없고
동산 가득한 소나무와 전나무에 안개와 노을이 가득하구나 “四月江南不見花,一鞭來訪故人家。怊悵九原難更作,滿園松檜鎖煙霞。”
”
≪송자대전≫에는 손자를 그리워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지은 시들이 많이 있다.<손자 주석에게 보이다(示疇孫>[≪송자대전≫,제2권],<손자 주석(疇錫)을 생각하다(憶疇孫)>[≪송자대전≫,제4권],<손자 주석(疇錫)이 섣달 그믐날에 회포 읊은 것을 차운하다>(次疇孫除夕詠懷韻)[권4],<칠석에 손자 주석(疇錫)의 운을 차해서 도원 부자(道源父子)에게 보여 주고 화답을 구하다[七夕。次疇孫韻。示道源父子求和。丙辰]. 병진년(1676, 숙종 2년, 선생 70세)>[권4],<손자 주석(疇錫)이 밤에 앉아 읊은 운에 차운하다(次疇孫夜坐吟韻)>[권4],<손자 주석(疇錫)이 밤에 앉아 읊은 운을 차운하다()>[권4],<납일에 손자 주석(疇錫)을 생각하다(臘日思疇孫)>[≪송자대전≫,제3권], 등이 있으니,옛날이나 지금이나 할아버지의 손자 사랑은 여전한 모양이다.
손자를 데리고 임담의 정자를 가는 모습은 단순히 후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유계롤 통하여 임씨 가문의 인물들과 교유가 넓어지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영보 송시열과 함께 서호 한호공 임연선배를 방문하다.이날 눈보라가 크게 일어났다(偕英甫訪西湖林閑好丈。是日大雨雪。)>[권4]시는 송시열을 동행하여 눈길을 헤치며 임연의 식영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서정적으로 그려내었다.
“천리길 멋진 약속 서로 초대하여서 서호로 말을 나란히하여 멋진 곳을 밟았구나
솓아오르는 흥취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왕자유는 배의 노를 젓고
읊조리는 마음이 먼저 흔들리니 맹호연이 다리를 건너는 마음이요
울창한 뚝방의 대나무는 겨울이면 더욱 멋지리라
불타는 듯한 강의 매화꽃은 차가우면서도 교태를 뽐내겠지.
계륜(山公)이 능히 크게 취할 수 있음을 막 비웃었는데
갈강(葛強)이 다투는 것이 마치 소산이 부르는 것 같구나 “佳期千里好相邀。並馬西湖踏玉瑤。逸興未回王子棹。吟魂先蕩孟生橋。蒼蒼塢竹當冬秀。灼灼江梅鬪冷嬌。剛笑季倫能酩酊。葛強爭似小山招。”
”
눈보라가 치는 날이었는 데도 찾아가는 모습이 정겹게 여겨지고 눈길이라 불평을 할 수 있는 데 낭만적으로 “울창한 뚝방의 대나무는 겨울이면 더욱 멋지리라 불타는 듯한 강의 매화꽃은 차가우면서도 교태를 뽐내겠지”라는 구절에서는 임연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과 끈끈한 정이 곁들여 있다. 이 시는 옛 전고를 많이 사용하여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 이에 관련 시구를 제공하여 해석을 돕기로 한다. 2구에서 옥요(玉瑤)는 아름다운 옥제품을 지칭하며 아름다운 사물을 지칭하기도 하니 여기에서는 식영정의 멋진 풍경을 지칭한 것으로 본다.제3구에서는 왕자유의 고사를 알지 못하면 해석이 어렵다. 이에 이언적(李彦迪)의 <눈 내린 날 산속의 벗에게 부치다.기축년 (1529, 중종24)[雪中 寄山中友人 己丑]>시 ≪회재집(晦齋集)·고시(古詩) 금시(今詩)≫(제1권)
를 통하여 왕자유 고사에 관한 내용을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산속의 친구에게 술 한 병을 보내노니 홀로 한 잔 하며 달빛 아래 누울 테지
왕자유(王子猷)처럼 섬계로 노를 저어 갈 수 없지만
눈 덮인 천개 봉우리 함께 못 봐 한스럽지는 않다네 “一壺聊寄山中客,獨酌遙知臥月邊。恨無王子剡溪棹,共賞千峯雪後天。”
”
이언적의 연보에 따르면 이언적은 1528년 11월 모친 봉양을 위해 외직(外職)을 요청하여 밀양 부사로 나가 1년 남짓 재직하였다.따라서 이 시는 이언적이 39세이던 1529년(중종24) 겨울(기축년)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한 뒤에 지은 시이다. 이 시에서 ‘王子剡溪棹’란 표현이 출현한다. ‘왕자’는 즉 왕자유(王子猷)를 지칭하는 데, 왕자유는 바로 진(晉)나라 왕휘지(王徽之)이니, 자유는 왕휘지(338~386)의 자이다.왕휘지가 산음(山陰)에서 살던 어느 겨울밤 큰눈이 내려 온 천지가 눈으로 덮인 것을 보고는, 멀리 섬계(剡溪)에 사는 벗 대규(戴逵:326~396)를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 즉시 조각배를 타고 떠나 새벽녘에야 대규의 집에 도착했던 고사가 있다. 그러나 대규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世說新語·任誕≫] 눈 덮인 산속으로 찾아가지 못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본 시에서는 찾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아니라 찾아갔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여진다.아래의 예로 든 왕자유 관련 한시들은 이와 같은 왕자유 고사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제공한다.
-왕자유가 섬계로 저어갈 배가 없음을 한탄하노라(恨無王子剡溪棹)
-흥을 타고도 왕자유가 노를 저어도 가지 못할지라(乘興莫回王子棹)[임상원(任相元)의 ≪염헌집(恬軒集)·시·次韓表兄韻≫(권6)]
-흥이 올라 왕자유의 노를 찾으려 하네(興到欲尋王子棹)[임상원(任相元)의 ≪염헌집(恬軒集)·시·次韓表兄韻≫(권6)]
제4에서는 맹생(孟生)을 이해하여야만 시구가 제대로 이해된다. 여기서 ‘맹생’이란 당나라 시인인 맹호연(孟浩然:689년~740년)을 지칭하는 것이다.
-맹호연이 병이 많아 찾는 친구 드무네(故人多病孟生疎)<林亨秀의 한시 ≪대동야승·동각 잡기 하(東閣雜記下)·본조선원보록 2≫(한국고전종합DB)에서 인용
>
-그대는 못 보았나 길 위에 나귀 탄 맹생(孟生)은 곤궁하여(君不見騎驢陌上孟生酸)
-가련하여라 추위 참아내는 것은 맹생의 곤궁함이여(可憐忍凍孟生酸) 서거정의 ≪사가집·사가시집·선성(宣城)이 소장한 십화(十畫)에 제(題)하다(題宣城所藏十)畵≫(제40권)
제5,6구는 해석에 그리 큰 문제가 없으나 제7구에서 역시 전고(典故)를 사용하였다.여기서는 ‘계륜(季倫)’이 누구인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산공이 술에 흠뻑 취한 곳 다시 찾아가면, 습가지[習家池 습가지(習家池) : 옛날 중국 양양(襄陽)의 호족(豪族)인 습씨(習氏)들의 아름다운 원지(園池)인데, 산간(山簡)이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을 때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사랑하여 매번 와서 술을 마시고 갔으며 이곳을 고양지(高陽池)라고 명명하였다. 《晉書 卷43 山簡列傳》
]를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소(更訪山公酩酊處, 不知能認習家池”라는 윤근수(尹根壽)의 <권공 운경진 이 양양 부사로 나가게 되어 시를 지어 전송하며(權令公雲卿出知襄陽府詩以送行 縉>)라는 시가 있다. 이 시문집은 한국고전종합DB에 실린 월정집 번역내용에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의 김영봉이 번역하며 주해한 것인데, (계륜은) “진(晉)의 산간(山簡)으로 자는 계륜(季倫)이다. 당시 사람들이 산공이라고 불렀다. 죽림칠현 중 한 사람인 산도(山濤)의 아들인데 술을 좋아하여 양양의 태수가 되었을 때 늘 고양지(高陽池)에서 노닐면서 번번이 대취하였다. 《晉書 卷43 山簡列傳》”고 서술하였다, 즉 계륜은 산공(山公)이며 슬 놀면서 취하기를 즐겨하였다는 고사를 끌어다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고사를 인용하여 임연의 식영정에 찾아가서 자신도 산공처럼 크게 취하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제8구도 역시 전고를 사용하였는 데,는 “葛強爭似小山招”에서 갈강(葛強)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야 한다.갈강(葛强)은 진(晉)나라 때 정남장군(征南將軍)을 지냈던 산간(山簡:산공 계륜의 부친)이 이 매우 아끼던 장수로서, 술에 취한 산간을 말에 태워 다녔다.[≪진서(晉書)·산도열전(山濤列傳)·산간(山簡)》(권43)] 갈강처럼 누군가 자신이 크게 취하면 부축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남들이 소산초를 지어도 상관하지 않는다(不關人作小山招)”,“시인들 부질없이 ‘초은사(招隱士)’를 읊지 말게 하라(莫遣騷人浪賦招)”,“게으른 이 몸 여기에 은거하려 하니 그대는 소산의 초청을 저버리지 마시게(欲把疏慵從此隱, 煩君莫負小山招)”등의 시구는 이러한 소산초의 고사를 인용한 시구들이다.
소산초(小山招)는 소산(小山)의 〈초은사(招隱士)〉이다. 한나라 때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문사(文士)들을 모아 사부(辭賦)를 짓게 하고는 이들을 대산(大山)과 소산,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이 중 소산에 속하는 문사가 지은 ‘초은사’는 산중 생활의 빈궁함을 극도로 형용하여 은둔의 선비들을 풍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 〈초은사〉에 “계수나무 숲 우거져 산이 그윽하니, 구불렁 뻗은 줄기 가지 서로 얽혔어라.(桂樹叢生兮山之幽, 偃蹇連蜷兮枝相繚.)”라고 하여 산중의 풍경을 잘 묘사하였다.‘갈강쟁(葛强爭)’이란 호기롭게 술을 마시기를 다투는 모습을 형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갈강(葛強)이 다투는 것이 마치 소산이 부르는 것 같구나”는 의역하면 “호기롭게 마시기를 다투는 것이 마치 유안왕의 초대같구나“가 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유계가 진나라의 여러 가지 고사를 사용하였는데 주로 죽림칠현의 분위기가 있다. 이는 한호 임연의 은사같은 삶과 관계있는 시구인 것이다.만사를 제끼고 눈보라를 뚫고 신선같은 임연을 찾아가니 서로 술에 취하기를 다투고 싶고 복잡한 세상사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당시의 정치상황이 앞서서 남호현(2016:52)을 인용하여 말한 것처럼 병자호란으로 만주족의 침입에 완전 굴복하게 되면서 유계는 척화파로 유배를 당하였으니 이로 인한 심리적 갈등과 좌절감이 임연처럼 신선처럼 연비어약(鳶飛魚躍)하려는 마음으로 나타난 것이다.이예리(2022:36)는 척화신으로 유배를 겪은 후에 굴욕을 새기며 시를 지었다고 서술한다.
“丙子胡亂 당시 청나라 군대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兪棨는 대표적인 척화신 중 한 명이다. 그로 인해 유배를 겪은 이후로도 그는 제대로 항전하지도 못한 채 화친을 맺어야 했던 굴욕을 되새기며 시를 지었다.”
또한 이예리(2022:39)[쪽수는 pdf 파일 페이지임]는 “척화죄로 林川에 유배된 兪棨는 이곳에서 1637년에서 1640년에 걸쳐 3년 가량 머무르게 된다. 그러나 「南漢日記」에서 兪棨가 기술하였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현실에 대한 답답함, 그리고 척화를 주장하다 목숨을 잃고 말았던 이들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를 근거로 兪棨의 전쟁시를 크게 ① 丙子胡亂 이후의 세태에 대한 직접적인 한탄을 표출한 시 ② 丙子胡亂의 전장을 소재로 지어진 시 ③ 절의와 충신을 숭상한 시로 구분하고 있다.
<영보 송시열과 함께 서호 한호공 임연선배를 방문하다.이날 눈보라가 크게 일어났다>시의 바로 다음에는 <제주도 가는 길에서 영보 송시열과 길이 갈라져서 시를 지어 주었다(瀛洲道上。與英甫分岐。有贈)>[≪市南先生文集·시·칠언율시≫(권4)]이라는 시가 있으니 한호공 임연의 식영정을 방문후에 헤어지게 된 것이다.이상 송시열이 식영정과 관련 2수의 시가 있음을 확인하였으니,이를 통하여 송시열의 식영정 한시를 포함하여 조선시대의 한시들을 식영정 및 무안 나아가 느러지 권역의 관광브랜드가치의 상승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일경 이일상이 (무안 군수를 지내던 俞棨의 무안현) 관아를 방문하여 3일을 지내고 돌아갔다.다음날 서찰과 시를 보내었다. 함경,대이,약수에게 배를 타도록 알려주어 풍호에서 이산으로 모여서 나를 초대하여 정관정에서 접대하였고 즉석에서 써서 가볍게 화답하였다 <一卿來訪縣齋。三宿乃歸。翌日。送書與詩。報咸卿,大而,若水將乘船。自楓湖會梨山。邀余相待于靜觀堂。臨書率和>
>[≪市南先生文集·시·칠언율시≫(권4)]
“손님을 보내고 한가롭게 자니 봄날이 길구나
책상자의 하얀 먼지는 빈 책장을 덮고 있구나
바람 앞에 관아의 버드나무는 완전히 눈이 되었고
뒷 마당의 회화나무에 비내려 반쯤 색깔이 누렇게 변하였네
대나무 누각에서 다행히도 이어지는 이야기를 끝내고
산재에서는 아직 함께 향로의 향기를 나누지 못하였네
마음속으로는 아직도 기다릴 밤이 있는 듯
머물러서 잔잔한 호수같은 영산강에 달빛이 가지런하게 되기를 기다린다네 “送客閑眠春日長。素塵箱帙掩空床。風前官柳渾成雪。雨後庭槐半褪黃。竹閣幸拚聯榻話。山齋未共一爐香。心期尙有來宵在。留待平湖霽月光。”
”
일경(一卿)은 李一相(1612~1666) 李一相(1612~1666) 자는 함경(咸卿)이고, 호는 청호(靑湖)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628년(인조6)에 17세의 나이로 알성시(謁聖試)에 병과(丙科) 2위로 급제하였다. 부제학,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대제학, 예조 판서 등을 거쳤다. 아버지는 이명한(李明漢)이고 할아버지는 이정귀(李廷龜)이며 외할아버지는 박동량(朴東亮)이다. 《南溪集續集 卷21 禮曹判書贈右議政李公神道碑銘, 韓國文集叢刊 142輯》
의 자이다.이 시에서 이일경,홍명화,약수,유계가 함께 풍호에서 이산으로 이동하여 정관당에 일행을 접대한 것을 서술하고 있다. 시의의 흐름을 보아 손님을 다 보내고 나서 유계 혼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정관당은 임씨가문에서 이정기에게 제공한 지역에 지어진 거처이며 이 정관당은 아마도 현 임복의 고택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넘어가서 이산 뒷꾸지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월 기망에 동야 한호 임연을 강루에서 만났다 한호공이 병으로 배를 타지 않아 시를 지어서 문안하였고 배를 타고 가다가 차운하였다(三月旣望。會林東野 埬 閑好丈江樓。主翁病不登舟。送詩相候。舡頭走次)>[[≪市南先生文集·시·칠언율시≫(권4)]시에 역시 유계와 임연의 우정이 배어있다.한호 임연이 병으로 인하여 함께 배를 타고 즐기지 못하였으나 한시에 담겨진 우정과 삶의 깊이가 그윽하다.
“맑은 노랫소리가 급한 피리소리가 아름다운 모래톱을 채우고
십리 멀리까지 펴쳐진 안개와 파도는 달빛과 함께 흘러간다네
멀리 그리운 분을 생각하여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윽한 곳에 수많은 꽃들이 높은 누각에 기대어 있네 “淸歌急管鬧芳洲。十里煙波月共流。遙想玉人凝望久。百花深處倚高樓。”
”
<다음날 함경 이일상·대이 홍명하·약수가 배를 식영정에 정박하고 자그마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한호공 임연이 시짓기를 재촉하여 함경 이일상이 먼저 시를 완성하고 이에 따라서 화답하였다(翌日。咸卿 이일상(李一相:1612~1666)은 자가 함경(咸卿)이고, 호는 청호(靑湖)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大而,若水。舟泊息營。因開小酌。閑好翁授簡催詩。咸卿先成。從而和之)>[≪市南先生文集·시·칠언율시≫(권4)]라는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시에는 여러 사람들의 인명이 출현하여 교유관계 및 당시의 선비들의 동선을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마지막 길에 부평초는 나그네의 슬픔을 기다리고
산으로 둘러쌓인 호수같은 바다는 조용히 빈 배를 기다리네
시상은 바람앞에 노젓는 것처럼 흔들리고
취기는 꽃 바깥의 누정에 은은하네
극포(極浦)의 저녁 물쌀은 보아하니 끝들물이라네
강을 내려가니 외로운 산봉우리가 바라보니 마치 물에 떠있는 듯
맑은 이야기는 하루종일 비밀한 내용은 없고
이 때문에 흰 갈매기를 가까이하고 싶구나. “末路萍蓬等客愁。湖山靜對一虛舟。詩情搖漾風前棹。醉興依微花外樓。極浦暮潮看欲滿。下江孤岫望疑浮。淸談竟日無機事。便欲因之狎白鷗。”
”
咸卿은 李一相(1612~1666)이고, ‘大而’는 ‘洪命夏(1607∼1667)’이다. ‘若水’는 어떤 인물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제4권에서 ‘咸卿’,‘大而’,‘若水’,‘유계’가 ≪市南先生文集≫(한국고전종합DB)의 제101수,제103수에 동시에 출현하며 제71대 남평현감인 이등(李橙)이 (1643년,계미년,인조21) 8월12일 임소에 도착, 1644년(갑신년,인조22) 4월26일 벼슬의 임기가 차서 교체된 것으로 기록이 보이는 데,시문의 시기와 매우 적합하다. 또한 ≪송자대전≫(권115)에 ‘答李若水 憕’로 보이는 간찰이 2통이 있다.≪송자대전·隨箚·卷13·目錄≫(권13)에 “李若水,名憕。延平季子時聃之子。官牧使。”라는 간단한 기록이 보인다.≪승정원일기≫인조 21년 계미(1643)년 6월 16일(무인)조에 “이징(李憕)을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징은 생졸년이 미상이니 자세한 기록이 없다.
이밖에도 <題林東野閑好丈江亭>[≪시남선생문집≫,제4권], <咸卿歸後三日。大而至。與尹重卿,李一卿。會閑好江樓。咸卿送一詩。走筆和寄。時大而承召北歸。時卽七夕也。>[≪시남선생문집≫,제7권] 등이 식영정과 관련있는 한시로 확인되었으나 편폭의 제한으로 제목만을 열거하고 줄인다.
6) 剡湖 陳景文(1561~1642)과의 교유
진경문은 동강면 월송리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그의 호는 剡湖이다. 시문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문헌에서 ‘剡溪’.‘剡湖’,‘剡浦’등으로 출현한다. 이 이름은 그가 살던 지역의 이름이 섬호이며 桐江이란 이름이 중국에서 유래된 것처럼 이 섬호라는 이름도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승현(嵊縣) 남쪽에 있고 일명 대계(戴溪)라고도 한다. 즉 진(晋)의 왕희지가 눈 내리는 밤에 대규(戴逵)를 방문한 곳이다.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剡村里)는 15세기 중엽 영해(寧海)에서 입향한 신암(愼庵) 남손(南蓀:1415~1488) 선생의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함으로써 섬계(剡溪)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섬계’라는 호나 지명은 모두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당시를 즐겨 읽음으로써 중국이 지명이 알려지게 되고 따라 쓰게되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진경문이 살았던 월송리는 錦南 崔溥의 묘소(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산 125)의 반대편에 위치하여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지도상에서 최부의 묘소 아래에 영산강2경 무안느러지(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32-24번지)가 위치한다.뿐만 아니라 그의 표해록에서 이 섬계(剡溪)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난정(蘭亭)은 누공부(婁公埠) 위쪽에 있는 천장사(天章寺)의 앞에 있었으니 바로 왕희지(王羲之)가 수계(修禊)한 곳이었습니다.~중략~섬계는 진망산 남쪽 승현(嵊縣)의 땅에 있었으니 부(府:紹興府를 지칭함)와는 거리가 100여리나 되었는데,바로 왕자유(王子猷)가 대규(戴逵)를 찾아갔던 시내였습니다.강은 네 갈래로 흐르고 있습니다. “蘭亭在婁公埠上天章寺之前,卽王羲之修禊處。~중략~剡溪在秦望山嵊縣之地,距府百餘里,卽子猷訪戴逵之溪也。” 번역과 원문은 박원호역의 ≪崔溥 漂海錄 譯註≫(고려대학교출판부, 2007) 385쪽을 취한다.
”
진경문(陳景文)은 1589년(선조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으며, 1624년 이괄의 난에도 공을 세웠다.『섬호집剡湖集』은 1648년(선조26)에 간행된 진경문의 시문집이다. 진경문 서거 6년에 그의 아들 진만귀(陳晩貴)가 유고를 모으고 정홍명(鄭弘溟)이 편집해 간행하였다. "섬호집" 상‧하권에는 임진왜란의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이 기록되어 있다
백호 임제(1549~1587)가 섬호 진경문에게 준 <수재 진경문에게 드린다(贈陳秀才景文)>[≪林白湖集·五言近體≫,권1]시가 있어 임제와 섬호 진경문 간의 교유를 보여준다.
“그대는 골격이 뻬어나고 어려부터 시를 잘짓는다 하였지
강각(식영정)에서 일찍이 만나보았으니 바위위에서 지내며 나누는 정이라
향불이 수그러들고 산 나그네는 잠이 들었구나 배가 개어서 석담(石潭)이 더욱 맑구나
시를 주려다 말을 잊었는데 숲속에서는 그윽한 새소리가 들리는구나 “憐君骨格秀。年少有詩聲。江閣夙相見。巖栖聊此情。香銷山客睡。雨霽石潭淸。欲贈却無語。林間幽鳥鳴。”
”
제1절에서는 진경문의 인물평을 서술하고 제2절에서는 강각 아마도 식영정(혹은 만휴정)에서 만남의 인연을 기억하고 서술하였으며,제3절에서는 만난 정황 즉 밤이 깊어져 시간이 지나 불길이 약하여 지고 만난 장소의 주변상황을 묘사하였으며,제4절에서는 만나서 시1수 적어주려고 했는 데 시상이 떠오르지 않다가 숲속의 새소리를 듣고 마지막 구절을 채워넣게 되었음을 서술하였다. ‘無語~有鳥鳴’이 무척이나 대조적이어서 할 말을 시상으로 이어내지 못하는 과정에 새가 지저귐으로써 새를 말을 전하여 줌으로써 시상에 쓸 말을 마무리하게 되었다는 서정이 무척이나 흥미롭다.임제로부터 시작된 임씨가문과의 인연은 한호 임연으로 이어진다.
≪섬호집·오언절구·題懶叟壁≫에는 임연을 칭하는 ‘懶叟’라는 호칭이 출현하는 데, ‘懶雲’이라는 그의 호에서 비롯된 별칭으로 보인다. <나수의 벽에 쓰다(題懶叟壁)>시는 다음과 같다.
“이제부터 나수로 호를 삼았으니,알겠네 그대 속세를 생각지 않겠구나
강과 산은 (원래) 함께 가져야 나도 땔감캐기와 낚시질을 즐기려하네. “懶以今爲號,知君世慮疎.江山須共占,余亦樂樵漁.”
”
앞서 언급한 것처럼 懶雲에서 懶叟로 변한 별칭의 변화에서 임연과 섬호 진경문은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땔감 캐기와 낚시질,약초캐기는 자연을 벗하여 사는 임연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느덧 섬호 진경문의 삶에도 각인되어가는 과정이리라, 진경문이 월송리에 살다가 풍호로 거처를 옳기게 된 것은 나주임씨 가문 그중에서도 임연의 삶이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취하여 풍호를 지나며 임자신과 연구를 짓다(醉過楓湖與子愼聯句)>[≪섬호집·칠언절구≫(64쪽)]시를 통하여서 임자신 즉 林㥠()와 교유를 보여준다.
“아득히 안개자욱한 물결은 옛 나루터와 이어지고
노을진 달빛 아래 외로운 배 출렁이네
나귀타고 지나는 사람 짧은 다리를 건너가고
들개와 차가운 다듬이 소리가 산 아래 마을에에 펴지네 “渺渺烟波連古渡, 孤舟搖漾月黃昏。騎驢人過短橋去,野犬寒砧山下村.”
”
<낚시배를 찾았다고 자중에게 보내다(寄子中索釣船)>[≪섬호집·칠언절구≫(70쪽)]
“경세제민하려는 초심은 낚시대에 기대고
“흰 기러기와 함께 하며 시모임도 마쳐려 한다네
한밤중에 바람이 조각배를 불어갔는데
갈대숲에는 안개가 짙어지니 옛 낚시터 물굽이라네. “經濟初心寄一竿,詩盟擬與白鳩完.扁舟半夜風吹去,蘆葦烟深舊釣灣.”
”
임자중(林子中)은 조선 중기의 무신 임환(林懽:1561~ 1608)의 자이다. 호는 습정(習靜)이고,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1590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보화도(寶化島)에 주둔한 이순신의 군대에 군량미를 보내고 의병을 규합하여 전투를 지휘했다.진경문이 임서 뿐만 아니라 임환과도 교유하였음을 보여준다.
<한호 임동야의 운에 차운하다(次林閑好東野韻)>(110쪽)
“느긋하게 노니는 강호의 원결(元結) 물과 구름 사이에 풍류넘치는 신세
조각배 닿는 곳마다 시구를 지어 내는구나
취중에 휘갈긴 먹글씨는 바위에 아롱지네 “漫浪江湖元次山,風流身世水雲間.扁舟到處題詩句,醉墨縱橫石盡斑.”
”
元結(719~772)은 자가 次山이며 호가 만수(漫叟),오수(聱叟),낭사(浪士),만랑(漫郎) 등 다양한 별호가 전해진다. 최희량이 임연을 원결에 비유하고 ‘懶雲’,‘花江老’,‘浪士’,‘南湖漁釣老’라는 별호를 지어주었으니 그중 ‘浪士’, ‘만수(漫叟)’,‘만랑(漫郎)’은 ‘나운(懶雲:느린 구름)’의 이미지와 맞아 떨어진다. 최희량이나 진경문이나 임연을 원결의 신선적인 삶에 비유한 것이다.“취중에 휘갈긴 먹글씨는 바위에 아롱지네(醉墨縱橫石盡斑)”는 마치 유계가 지어준 <정관당기>의 “마음속에 주관이 있으면 그런 조용함도 활기찬 것이며 사물을 다스리되 사물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그야말로 사물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활기차게 자연과 벗하는 삶,흐르는 물과 같은 삶,마음껏 영산강의 아름다운 안개와 노을 속을 날개치며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영혼의 삶이며 기러기와 벗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次閑好江亭韻(한호의 강가 정자 시에 차운하다)>(112쪽)시는 이러한 식영정의 멋진 풍경을 즐기는 임연의 삶을 부러워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조물주의 천년 비경을 훔쳐다 놓았나.
이런 강산이 있으니 이런 사람이 있구나
복사꽃 하염없이 흘러가지 말게 하오
흰 물새가 봄을 간직해두지 않았다 탓하리라. “偸他造物千年秘, 有此江山有此人。莫遣桃花渺然去, 白鷗應恨未藏春。”
”
<한호공을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으니,공이 총지사로 출타하였다(訪閑好未遇,公出遊摠持寺)>(113쪽)시에서 진경문에 의해 임연은 가도의 시에 출현하는 같은 신선적인 시인으로 묘사되었다.
“관란대 아래에서 낮에 밀물이 밀려오는 데
가도촌 옆에는 해가 기울어지려 하는구나
지팡이를 짚고 풀푸른 언덕을 찾았는데
마을사람이 멀리 총지사가 있는 산을 가리킨다네 “觀瀾臺下午潮還,賈島村邊日欲殘。一杖步尋靑草岸,村人遙指摠持山”
”
여기서 ‘가도촌(賈島村)’을 언급한 것은 가도(賈島)의 〈방도자불우(訪道者不遇)〉시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님은 약초를 캐러 나갔다네. 이 산속에 계신 것만은 분명한데, 구름이 깊어서 어딘지는 모른다네(松下問童子 言師採藥去 只在此山中 雲深不知處)”라는 내용에 근거한 것이다.가도의 시에서 언급되는 신선이 사는 곳과 같은 마을을 지칭하는 대에 가도촌의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다. 흘러가는 구름이 느릿느릿 머무는 곳, 江海의 안개와 노을 속에 살아가는 임연을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에 등장하는 약초캐러간 스님에게 비유한 것이다.
<눈속에서 한호가 배를 타고 앞강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서(雪中聞閑好舟過前江)>(166쪽)는 임연의 방문을 기다리는 섬호 진경문의 마음과 우정이 담겨져 있다. 점점 서로간에 병앓이가 심해지고 몸이 불편하게 되는 현실속에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임연이 꽤나 부러웠을 것이다.
“병을 앓아 몸이 편하지 못하고 나이들어 뼈마디가 더욱 쑤신다네
사람의 일은 뜻밖에 부침이 있고 옳고 그름도 어느새에 뒤집힌다네
신선의 배는 눈보라속에서 아득하고 시름 속에 새벽달이 기울어가네
좋은 만남 가질 길이 없으니 서글프게 물굽이 안에 서있다네”
<한호의 시에 차운하다(次閑好韻)>(168쪽)은 임연의 바람같은 인생,구름같은 자연과 벗하는 삶을 맑은 바람에 비유하였다. 편폭이 길어져 원문은 생략한다.
“높은 벼슬을 바람같이 마다하고 안개와 노을이 낀 골짜기에 누었다네
소나무와 국화는 도연명의 세갈래 길이며 강과 산은 허칠의 집이로다.
낚시대 드리우고 물새와 벗하고 시구를 얻어서 어부의 노래에 화답하네
후일에 고인의 전기에 그대를 맑은 바람이라 하면 어떻하리요! ”
≪수은집(睡隱集)·오언율시·진여욱 경문의 모정[茅亭]시에 차운하다(次陳汝郁 景文 茅亭韻)≫(권1)시는 섬호 지금의 동강면 월송리 지역에서 거처에 대해 언급해주고 있으니 그의 정자는 ‘모정(초가 정자)’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천층의 파도가 있으며 강에는 다섯 마지기의 정원이 있다네.
전갈이 참으로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어촌에 스스로 마을을 이루었네.
흰 갈매기는 밤에 꿈을 나누어주고 청산은 대낮에 문을 감싼다네
줄곳 도랑을 끊는 것은 원래에 제사용 술항아리를 원치 않는다네.“世裏千層浪。江頭五畝園。蝎𧊲眞得計。魚戶自成村。白鳥夜分夢。靑山晝擁門。向來溝斷者。元不願犧尊。”
”
모정(茅亭)이란 초가 정자이니, 그의 정자가 현재 남아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유허를 찾기도 쉽지가 않을 것이다. 임연을 자연과 벗하는 삶을 그리워하였던 섬호 진경문은 동강면 월송리에서 태어나 살았던 곡강 즉 느러지 권역의 인물이며 임연과 마찬가지로 느러지의 뛰어난 경관을 날마다 보면서 삶을 살다가 사람이 그리워 교유가 그리워서 풍호로 이거하였을 것이다.
7) 市西 金璇(1568~1642)과의 교유
金璇(1568~1642)은 1578년(戊寅)에 군장사의 담준스님에게 林子愼과 함께 공부하였다. 당시에 김선은 11세,임자신은 9세이었다. ‘子愼’은 임업(林𢢜)의 자이다.<장사의 수령인 임자신에게 드린다.‘林𢢜’은 후에 이름을 ‘임서(林㥠)’로 바꾸었다.임기가 만료되어 한양으로 돌아갔다(贈長沙宰林子愼,𢢜後改名㥠,瓜滿還京)>(≪수은집(睡隱集)·五言排律≫,권1)에서 보여주듯 임업(林𢢜)은 어릴 때의 이름이고 후에 이름을 林㥠(1570~1624)로 바꾼 것이다. 김선보다 두 살이 어리고 김선보다 먼저 운명하였으니 그래서 ≪시서유고≫에는 임서의 죽음을 회상하고 슬퍼하는 한시가 많이 눈에 띈다.한편 시서는 임연(1589-1648)보다는 한참 연장자이었음을 염두에 두고 한시의 흐름을 감상할 필요가 있다.또한 김선이 나이와 관계없이 자유럽게 교류를 하는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음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또한 자신을 위해 배를 저어주던 앙암 부근에 살던 노봉(鷺峯) 이경립을 기억하고 그를 위해 시를 지어 주었던 점을 볼 때에 매우 넉넉하고 배려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또한 시서 김선은 나주나씨 인물들 뿐만 아니라 회진지역 나주임씨 인물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 이유는 임서와 어렸을 때 공부를 같이 하여 친구로 격이 없이 어울리고 이러한 계기가 나주임씨 인물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호 임연에게 보내다(寄閑好)>(≪市西遺稿≫,345쪽)
“속세의 빚을 갚지 못하여 특별한 기약을 이루기가 어렵구나.
가을이 깊어져 경치는 쓸쓸하고 몸은 노쇠하여 병으로 온전하지 않다네
화포(花浦)는 어부의 노래에 저물어가고
사호(沙湖)는 상인의 돛단배가 느릿느릿 지나가네
어느 때에서야 내 친구를 데리고 함께 완전의 시를 읊게 될꺼나! “未償塵中債, 亂成物外期。秋殘景蕭瑟, 身老病支離。花浦漁家晩, 沙湖買䬚遲。何時携我友, 共賦步兵詩。”
”
시서 김선이 뱃길을 따라서 花浦와 사호(沙湖)를 지나 섬호(剡湖)로 가는 모습을 묘사한다.
<몽탄의 동야 임연을 회상하며(憶夢灘林東野)>
“속세의 영광스러운 벼슬에 이미 통발을 잊었고
몽탄의 여울 위에 누으니,마치 여울이 하늘로 오르는 듯 하다.
풍호의 집에 왕래하는 데에는 오직 돛단배 한척이라
사호진(沙津) 안개와 비속에 수천편의 시를 지었구나.
남쪽 이웃의 제호 노인과 외로움을 나누었고
동쪽 마을의 섬호 신선과 시통을 전하였다네
나만 홀로 병에 걸려서 성읍에 버려지니
옥소암 <憶務安玉簫庵>(288쪽)이 있으니 이곳에 연파거사로 칭해지는 김제 박개(朴漑, 1511~1586)가 걸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에는 “연파처사에게 멋진 시구가 있었다(烟波處士有佳句)”라는 글귀가 보인다.
아래에서 꿈꾸며 공연히 끌려다니네 “紅塵榮宦以忘筌, 高臥夢灘灘上天。楓宅往來唯一颿, 沙津烟雨幾千篇。南隣分寂霽湖老, 東里傳筒剡浦仙。我獨沈疴廢城市, 玉簫岩下夢空牽。”
”
이 시에서는 楓湖,沙津(沙湖津),옥소암이 출현하고 이중 옥소암은 玉簫岩,玉簫庵으로 나타나는데, 옥소암이란 바위위에 암자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풍호,사호진,옥소암은 시서 김선의 추억 속에 매우 중요한 장소로 보이며 아마도 김선(金璇)이 한호 임연과 이곳들을 같이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동야에게 준다(贈東野)>(≪市西遺稿≫,344쪽)는 임연과 병자호란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된 즐거움과 서글픔을 함께 묘사하고 있다. 병란 후에 만나서 전란 때에 이미 겪은 일들을 이미 여러차례 나누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에 달무리지고 형세가 급박하였는데
오늘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을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였네
그대여 난리 이야기를 하지 마세나
쓸쓸하게 노쇠한 이의 눈물이 옷길을 적시게되니까 “南城月暈勢蒼黃, 今日重逢夢未嘗。且莫君從亂離說, 索然衰涕却沾裳。”
”
<남간이 한호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次南磵贈閑好韻)>가 있으니 이 시는 남간 나해봉이 한호 임연에게 준시에 다시 김선이 차운한 것이다. 역시 전란의 어려움을 뚫고 고향땅으로 함께 안개와 물결에서 낚시하는 삶(烟波釣叟)을 살게 될 것을 기원하는 마음을 담았다.
“만 가지 죽을 고비를 겪고 간신히 강가의 집으로 돌아왔다네
강 언덕의 무성한 꽃과 풀들이 석양 하늘 아래 (그대로) 있구나.
누가 알았으리오 엄자릉(嚴子陵)이 다시 낚시대 잡을 줄을,
노를 저어 다시 오회의 배로 돌아오네. “萬死生還江上宅, 岸花江草夕陽天。誰知更把子陵釣,一棹重廻吳會船。”
”
“강 언덕의 무성한 꽃과 풀들이 석양 하늘 아래 (그대로) 있구나”는 엄청난 전란의 위기를 겪고 돌아왔으나 고향땅의 꽃과 풀과 숲은 그대로 있는 사실을 대비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오회의 배(吳會船)’에서 吳會란 중국 회계군(會稽郡)의 오현(吳縣)과 회현(會縣)과의 합칭이다.오회는 즉 중국의 강남지역이고 영산강 역시 남쪽의 강이므로 은근히 영산강이 중국의 강남지역과 비슷함을 비유한 것이다.한호 임연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오는 것을 엄자릉에 비유함으로 고향땅에서 유유자적한며 은일한 삶을 살기를 기원한 것이다.
<석촌 임서,임후지,임숙첨,동야 임연 등 여러 친구들과 배를 타고 섬호를 방문하다(憶與石村·厚之·叔瞻·東野諸友,乘舟訪剡湖)>
“밀물을 타고서 새벽에 사호로 내려가는데
석관정과 창랑정이 그림 같도다
15년이 흐른 동안 죽은 이들이 많았으니
오늘날 남아 있는 이는 시서(김선)와 섬호(진경문) 뿐이로구나 “乘潮帶曉下沙湖, 石串滄浪似畵圖。十五年來多勿故, 今餘市剡尙霜鬚。”
”
이 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데, 배를 타고 내려가는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창랑정을 지나 석관정을 지나 사호 즉 사호진으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임씨 문중의 임서,임후지,임숙첨(林埈[1570~1627]),동야 임연은 아마도 회진에서 합류하였을 것이다.물론 한호 임연이 식영정에서 섬호로 바로 왔는 가능성도 꽤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여러가지 시문을 통하여 진경문이 풍호에 사는 것으로 생각되는 점이 있으나,이 시문을 고려해보면 진경문을 만나러 섬호로 가기 위해 반드시 사호진을 거쳐야 하며,사호진 가까이에 섬호가 사는 마을이 있었음이 분명하다.이 점에서 섬호는 이 시를 쓸 당시에 사호진 아래 즉 월송리 앞의 호수처럼 잔잔한 영산강 물가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또한 양지리와 월송리 지역 마을사람들의 탐문을 통하여 비가 많이 오면 송암저수지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니 현재의 강가의 모습과 이전의 강가의 모습은 크게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송암저수지가 큰 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송암저수지를 끼고 위쪽까지 물이 들어와 찼으니 나무있는 지역 주변은 약간 지대가 높아 이곳이 옛날 진경문 시대의 배를 타던 포구로 보여진다. 진경문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서 여러 가지 기록을 볼 때 주로 회진 풍호 나룻터에서 오랫동안 거처한 것으로 보인다.
<贈東野>[≪시서유고≫,344쪽]는 병자호란 후에 기대치 않게 만난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남한산성에 달무리지고 형세가 급박하였는데
오늘에 다시 만나게 될 줄을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였네
그대여 난리 이야기를 하지 마세나
쓸쓸하게 노쇠한 이의 눈물이 옷길을 적시게되니까 “南城月暈勢蒼黃, 今日重逢夢未嘗。且莫君從亂離說, 索然衰涕却沾裳。”
”
<섬호가 임동야의 몽탄정이라 지은 시에 차운한다(次剡湖,題林東野夢灘亭韻)>[≪시서유고≫,267쪽]시는 섬호,임연,시서 김선이 함께 오랜 교유를 지내왔음을 보여준다.
“강산이 주인을 얻어서 더욱 맑고 그윽하고
오늘 올라와서 내려다보니 속된 생각들이 부끄럽네
어부의 피리소리는 들렸다 안들렸다 가랑비속에 미끄러져 내려가네
배젓는 노래소리는 늘어졌다 빨라졌다 저녁노을 물가에 퍼져가누나
현진의 하는 일이란 창랑가를 부르는 것이니
오랜 세월속에 한쪽 돛단배라네
높은 누정에 올라 함께 갈매기와 해오라기의 꿈을 나누니
한가하고 바쁜 마음의 자취 어느 것이 더 현명할 일일까? “湖山得主轉淸幽, 今日登臨愧俗流。漁笛去來踈雨颿, 棹歌長短夕陽洲。玄眞事業滄浪誦, 萬頃生涯一釣舟。高枕共分鷗鷺夢, 閑忙心迹孰賢不。”
”
‘현진’이란 ‘현진자(玄眞子)’의 줄인 말이며,당나라 장지화(張志和)가 남포위(南浦尉)로 좌천되어 있다가 다시 소환되었으나 다시는 벼슬하지 않고 강호에서 낚시와 술을 즐기면서 자칭 연파주도(煙波酒徒)라 하는 한편, 현진자(玄眞子)라는 책을 짓고 자호를 이에 따라 현진자라 하였으니,여기서 ‘현진’이란 장지화를 지칭하는 말이다. 장지화의 〈어부사(漁父詞)〉에 “서쪽 변방 산 앞에는 백로가 날아드니,복숭아꽃 흐르는 강물에 쏘가리가 살쪄간다네.푸른 삿갓 에 초록색 도롱이를 걸쳤으니, 비스듬한 바람결 가랑비에 굳이 돌아갈 것 없네.(西塞山前白鷺飛, 桃花流水鱖魚肥。靑蒻笠綠蓑衣晩, 斜風細雨不須歸)”라는 명구가 있다.‘漁’,‘雨’,‘踈’자가 장지화의 시와 비슷한 경계를 드러낸다.
<4월24일 지난밤 꿈에서 공직 임회를 만나다(四月二十四日去夜, 夢見公直)>(≪시서유고≫)
이 詩는 林公直이 죽고(1624년)나서 14년이 지난 후(1638년)에 꿈속에서 林公直을 만나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시서 김선이 꿈에서도 觀海公 林檜(1562~1624)을 그리워했다는 의미이다. ‘公直’의 임회의 자이고 호는 觀海이다.
“임공직(林公直)과 한번 이별한지 삶과 죽음의 14년이 지났네.
때로는 외로운 꿈속에서 작은 평상 앞에서 손을 잡았네.
석촌 늙은이 林㥠(임서)도 이제 땅에 묻고
百花翁 늙은이 林愃(임선)도 이미 하늘나라로 올라겠네.
내가 얼마나 이승의 나그네로 살른지
아침과 저녁으로 세 신선을 찾아 가네. “一別林公直, 存亡十四年。有時孤夢裡, 携手小床前。石老今埋土,花翁已上天。吾爲幾時客,朝夕訪三仙。”
”
임 공직은 임회(林檜:1562~1624)의 자이며. 호는 관해(觀海)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과 함께 1582년(선조15) 진사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같이 들어갔다.임회는 1624년에 서거하고 임서(林㥠:1570~1624)도 1624년에 서거하고,임훤(林愃1552~1610)은 1624년에 서거하였다. 이 세 사람이 먼저 서거하여 친한 친구들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에서 옛 추억을 그리며 꿈에서 자주 만나는 시서 金璇(1568~1642) 자신의 삶을 묘사하였다. 여기서 花翁은 백화옹을 줄인 것이며, 백화정(百花亭)의 정자주인인 임훤(林愃)을 지칭한 것이다. 임훤의 자는 子寬이다.김선도 방랑객처럼 신선처럼 살다가 ≪市西詩稿≫를 저술하였는 데,성격이 매우 꼼꼼하여 자신의 신변 자질구레한 일들을 모두 한시로 남겨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의 영산강 유역의 선비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반드시 참고하여야 하는 책이다.김선이 꼼꼼하였기에 그가 어떤 인물들과 교유하였는 지,또한 느러지(曲江) 지역의 임연,최희량,진경문과 어떻게 교유하였는 지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느러지 권역내의 인물은 아니지만 느러지권역의 인물들과 끊임없이 한시를 통하여 교유한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4] 결론
파군다리(破軍橋),몽송리(夢松里:동강면),몽탄(夢灘),앙암(仰巖) 등 왕건의 역사적 흔적이 담긴 느러지 권역 및 관련 지역의 한시 자원의 발굴은 나주영상테마파크의 발전과 새로운 브랜드전략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왕건을 읊은 한시의 정리는 고려왕조 이후에 번영을 누려 발전된 나주시의 역사브랜드가치를 높인다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일부 한시를 발굴하여 소개하였다. 느러지 권역의 선정이라는 새로운 테마에 직면하며 조사한 느러지(곡강) 권역은 역사적으로 무구한 역사속에 많은 인물들과 이야기를 만들어내어 전해주고 있다. 이러한 느러지 권역의 역사인물로 왕건,정가신,최부,정개청,박순,임연,이정기,진경문,정민 특히 임연,俞棨(1607~1664),이정기간의 교유 관련 수많은 한시들은 조선중기의 느러지권역의 정자와 영산강 굽이굽이 물줄기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뱃놀이를 하였는지를 보여준다. 아울러 이러한 한시자원들은 영산강에서 낚시질을 하여 어떤 고기를 잡아 어떻게 먹었는 지와 영산강 생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정개청이 곡강 지역 엄담(淹潭)과 윤암(輪巖)에서 활동은 향후 관련자료가 있는 지 조사가 필요해 보이며 정개청의 아들인 竹村 鄭敏興(자는 松禾)이 연징산 총지사 동부(洞府)에서 생활하였음을 밝힌 것이 중요한 성과로 보여진다. 또한 대유학자인 송시열이 유계와 함께 느러지권역의 식영정을 방문하고 손자인 주석이 식영정 한시를 쓰는 모습이 확인됨으로써 느러지 권역의 뛰어난 명승적 가치와 경관적 가치가 확인되어진다. 수많은 선비들이 멋진 안개와 노을로 물드는 느러지(곡강) 경관을 찾아 오고가는 역사적 모습들은 또한 찾아올 과거를 기억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가슴에 추억으로 물들여지며 과거의 느러지 추억이 재생되고 지속되도록 지속발전가능 전략과 이에 걸맞는 브랜드전략의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4대강유역개발을 통하여 오염으로 얼룩진 영산팔경이 아닌 새로운 개념의 영산강 구곡의 선정과 이에 맞는 대대적인 영산강 수질 개선을 통한 영산강 생태계의 복원을 통하여 다양한 물고기와 새들이 날아다니는 옛 영산강의 풍광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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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천수선생님 저는 일옹 최희량장군 13대손 최찬집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자료를 잘 읽어보고 있는데 위 자료를 제 카페로 가져가고 싶은데 스크랩이나 복사가 안되는군요.
어떻게 이 자료를 모셔갈 수 없을 까요.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