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강 갈라디아서 서론과 인사말(1:1-5)
I. 간단한 서론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편지글입니다. AD 50-55년 사이에 에베소에서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와 비교할 때, 갈라디아서는 특정 교회나 개인의 이름 앞으로 보낸 편지가 아니라, 지금의 튀르키예 중부지역으로 추정되는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보낸 점이 독특합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켈트족이 발칸반도를 지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들어와 살다가, 로마제국에게 정복을 당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BC.25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갈라디아를 속주(Provincia)로 지정하였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지역은 그리스(헬라)화 되었다가 다시 로마화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교육수준이나 경제수준이 비교적 높았습니다. 동시에 이방의 여러 신들이나 악마를 숭배하려하지 않았고, 유일신 하나님에 관심이 많았던 차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등등의 차별을 없이하는 새로운 종교의 등장은 매우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바울의 그리스도교 전도를 “계몽”(Enlightenment)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의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설파한 바울의 메시지는 굉장한 울림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해방선언처럼 들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갈라디아 교회들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는 바울의 전도여행지들을 중심으로, 안디옥, 루스드라, 더베, 이고니온 지역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에 교회들을 세웠고, 2차 여행 때에 재방문하여 그들의 신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에베소에 머무르는 동안에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점들이 바울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를 통신수단 삼아서 교회의 문제에 대한 애정 어린 권면을 전달한 것입니다.
이 서신은 바울에 대한 여러 가지 비방들에 대한 변증적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은 재판정의 배심원들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라디아교회의 문제들이란 바울의 가르침에 대한 심각한 공격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바울의 가르침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바울의 편으로 다시 이끌어 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던 것입니다.
이제 갈라디아서 1장부터 읽어가면서, 갈라디아교회를 위협하는 이설들의 내용을 살펴보고, 바울이 어떻게 이에 대처하는지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회와 비슷한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발생하는지에 관하여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여행을 시작하겠습니다.
II. 갈라디아서 1장
1. 인사(1:1-5)
편지글에는 공통적인 구성적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편지를 쓴 사람 이름을 밝히고, 둘째, 이 편지를 받을 사람의 이름을 거명한 다음에, 셋째, 축복의 인사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정확하게 이 규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이고, 3-5절에서 긴 축복인사를 한 후에 아멘으로 인사를 마칩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른 편지에서 했던 인사말과 비교해보면, 갈라디아서의 인사말이 더 길고 상세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인사말에서조차 갈라디아 교회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자기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는 자신을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열 두 사도인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 제자 명단에 바울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도”라고 부른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만, 우리가 보통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使徒, 하여금 사, 무리 도)라는 말의 어원은 아포스톨로이(apostoloi)인데 여기서 영어의 apostle이 나왔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으로부터(apo) 보내다(stello)”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란 좁은 의미로 12사도를 말하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임무를 부여받고 보냄을 받은 파송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2명의 제자 명단에는 안 들어가지만, 자신이 보냄을 받은 “사도”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길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이 시켜서도 아니고, 사람이 맡겨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임명하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파송해서 사도로 삼은 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사람들이 시켜서(apo)”라는 것은 어떤 공동체 단체가 자기를 파송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뒤에 “사람이 맡겨서(dia)”라는 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지도자인 베드로나 야고보(예수의 동생) 같은 개인이 파송한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울을 사도로 파송한(apostello) 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입니다. 사도는 그래서 보내신 분으로부터 메시지를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신저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편지를 쓰고 있다는 말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신자는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입니다. 서론에서 잠깐 언급하였듯이 갈라디아의 교회들은 바울의 전도 덕분에 복음을 깨달은 교회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에 살고 있던 헬라사상을 가진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자유가 주는 행복을 가르친 바울 덕분에, 그들의 정신은 한층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울이 가르친 것과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는 자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다른 말을 한다면 갈라디아교회들이 배척했을 터인데, 그들은 비슷한 말을 하면서도 바울의 말을 뒤틀고 있기 때문에 갈라디아교인들이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유사(類似)하다는 것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특히 진리를 말할 때는 유사품(類似品)을 주의해야 합니다.
어쩌면 바울은 그런 문제를 암시하느라고 다른 편지와 다르게 3절부터 긴 축복의 말을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전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보통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고 하면 될 것인데, 그 뒤에 여러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선 “은혜”와 “평화”라는 인사말의 중요성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당시에 “은혜”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은혜”를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 또는 자비로운 대접 등등으로 생각합니다. “은혜가 넘친다.”고 말하면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이 나에게 큰 감동을 준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잘못한 것을 덮어주어서 모두가 다 만족스럽게 되는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은혜”의 핵심은 “악을 이기는 은혜”입니다. “악”은 강합니다. 그 앞에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릎 꿇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악의 세력은 힘으로, 때로는 유혹이나 협박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악에게 지기도하고 홀리기도 하여 굴복하게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 “악”보다 강합니다. 악에게 굴복한 사람이 악을 버리고 다시 바른 길로 돌아설 때 느끼는 감정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악의 포로에서 해방시켜주는 강한 힘입니다.
평화는 무엇일까요? 보통 “평안”이라고 번역해서 그 의미가 전도되기도 하지만, 평화는 “진정한 평화”를 의미합니다. 거짓 평화가 아니라면, 이 평화는 “죄”의 세력을 이기는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죄가 승하여 평화를 이루면, 그것은 죄의 세상입니다. 힘으로 무력으로 지배하거나, 심지어 폭력과 전쟁으로 정복해서 잠잠하게 만드는 것은 거짓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축복의 인사는 정말 “의미심장”한 인사입니다.
이제 4절 말씀에서 우린 좀 깊은 묵상을 해야 합니다. 이런 문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져 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바치셨습니다.” 개역성경의 번역도 매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문과 비교하면 그 본래 의미를 살릴 수 있습니다.
주어는 그리스도이고, 동사는 자신을 우리의 죄를 위해 “내어주다”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오늘의 악의 시대로부터 구하려고”(εξαιρεω)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말이, 이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입니다. 그래서 다시 번역하면, “그는(그리스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오늘의 악의 시대에서 구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 훨씬 부드럽지요. 요즘에 다양한 해설이 있어서 가능한 일입니다.
사실 원문에는 “대속”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죄를 위하여”하는 말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하여 넣은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를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셨으니, 대신 죄갚음을 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사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말 속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 이유가 담겨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울의 영광송(doxology) 안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감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를 위하여 예수가 자기를 내어준 것의 결과가 중요합니다. 위의 성경 어디에도 “우리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악의 시대에서 구출되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내어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악한 세력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힘입어 악한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여야 합니다. 악한 세력과 함께 어떤 일도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악한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이제부터 보여줄 것입니다.
2024년 3월 3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