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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 10.19 사건이란
여수시문화관광해설사 김옥선
1948년 10월 19일에 전라남도 여수 순천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한 파견 명령을 거부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8.15 광복 이후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제주 4.3사건과 함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 비극적인 사건이다.
1948년 봄 4월 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의 단독선거에 좌익계열과 이를 진압하던 정부 사이에서 4.3 사건이 일어나 치안이 극도로 혼란했다. 정부는 10.11일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만들면서 제주 초토화 작전을 벌인다. 이건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는 작전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병력 1개 대대 3000여 명을 급파하여 토벌 작전을 전개하려 했다. 1948년 10월 19일 아침 7시 우체국 일반 전보로 병력수송선 LST는 19일 20시 출동하라. 제주경비 사령관 김상겸 대령에게 통보필이라는 내용이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전달되자 병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10시 출정 준비를 하고 있던 부대원들에게 인사담당 선임하사관 지창수와 7명의 하사관들이 연단에서 기염을 토했다. 애국 병사 여러분 우리가 총부리를 같은 형제인 제주도민에게 겨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출병을 결사반대해야 합니다. 14연대 군인들은 동포의 학살거부와 미국 즉시 철수를 주장하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군인들의 행동에 민중들이 지지하고 합세하여 항쟁으로 발전했다. 삽시간에 여수와 순천뿐만 아니라 광양, 구례, 곡성, 고흥, 남원 등 전남 동부지역을 석권했다. 1948년 10월 26일 정부는 초강경진압을 폈다. 한국군이 여수주둔 14연대 군인들과 지역 민중이 합세한 봉기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봉기군과 가담세력뿐만 아니라 사건과 아무런 관력이 없는 주위의 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치고 당시 여수에 있는 집이란 집에는 모두 구멍이 뚫렸다고 할 만큼 포격과 사격은 엄청났다. 국회에 보고된 피해 현황을 보면 읍의 6할이 파괴되고 시내 중심의 주책 1700여 호 와 그 외 2600호가 전소되고 이재민 2만 수천 명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다.
2. 만성리 형제묘
여수 만성리 언덕에는 형제묘라 불리는 여순사건 희생자 묘가 있다. 여순사건의 부역 혐의자로 몰려 당시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수용되었던 125명의 마을 주민이 1949년 1월 3일 재판도 없이 학살되었다. 이들의 시신은 장작불에 태워져 만성리 계곡에 돌로 덮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가 지켜보았는데 5명씩 총살하여 다시 5명씩 장작더미에 눕혀 5층으로 쌓은 큰 더미 5개 125명이라고 증언하였다. 만성리 희생지와 함께 널리 알려진 이곳은 희생된 시신들을 찾을 길이 없던 유족들이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함께 있으라고 형제묘라고 지었다. 형제묘의 학살은 지역사회 연구소에서 발간한 보고서 제1집으로 드러났다. 형제묘의 125명과 총살과 화형증언자 4명이었다.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 = 최명균
증언 당시(73세) 만성리 출신 = 신용식
당시 연맹위원(덕충동 주민) = 배달막
인민대회에서 대표연설을 한 = 정기순
이렇게 4명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봄이면 형제묘에는 동백꽃이 그때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 붉은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3. 만성리 학살자 외 위령비
전라남도 여수시 만흥동에 있는 위령비는 여순사건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건립연도는 2009년 9월 13일 만흥동 149-6번지에 있다. 만흥동 마래터널을 지나 200M쯤 가면 나오는데 여순사건 때 대표적인 집단학살지였다. 위령비는 대좌. 비신. 개석. 세 부분으로 비신의 크기를 가로 120cm 세로 74cm이며 재료는 화강암이다. 위령비 앞부분은 제물 등을 올릴 수 있는 상석이 놓여있다. 비신 전면에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고 뒷면 상단부에 1948년 10월 19일 하단부에는 2009년 10월 19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애초에는 전면에 위령비와 관련된 설명문을 뒷면에는 추모시를 새기려고 하였으나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하여 비신에 새겨진 문구로 결정하였다. 희생자 위령비 뒤편에 중간 부분에 글귀가 아닌 ‘…….’ 점 6개가 찍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시 국가에서 학살이라는 단어를 허용하지 않아서 억울한 유족들의 마음을 담아 점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만성리 학살지는 부역 혐의자로 잡혀있던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수용자 중 수백여 명의 민간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집단 학살한 곳이다. 1948년 11월 초순쯤부터 여순사건 부역 혐의자들을 협곡과 같은 이 골짜기 속으로 던져 넣은 후 흙, 모래와 돌로 암매장하였다.
여수를 진압한 진압군은 이후에도 부역 혐의자들을 이 골짜기에서 계속 학살하여 총소리와 비명이 가득하였다 한다. 그래서 여수 시내를 가고자 했던 만성리. 오천 주민들은 공포의 땅이 된 이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마래산 쪽 먼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이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들이 돌을 계속에 던져 넣어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풍습이 오래되어 돌탑 무덤이 솟아오르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2019년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뒤쪽에 동백꽃을 심어 여순사건의 상징성을 드러냈다. 학살 터 앞에는 전라선 폐선 위로 레일바이크가 다니고 바다는 말이 없다.
4.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 부역자 색출
중앙동 로터리에서 언덕 하나 넘으면 있는 여수경찰서와 종산초등학교(현 중앙초등학교)는 당시 학살의 중심지였다. 여순사건이 진압되자 경찰서와 가깝다는 이유로 수도 경찰과 전남 경찰 및 여수경찰서 특수대가 국방경비대 군인들과 함께 이 학교에 주둔하였다. 10월 28일부터는 가담자 색출이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을 불러 모았다. 집에서 나오지 않는 자는 사건에 참여한 자로 간주하여 처벌하겠다는 국군의 강압적 태도에 모두 학교로 몰려들었다. 이런 현상을 여순사건이 일어난 모든 지역에서 같이 일어났다. 여수에서는 진남관, 종산초등학교, 서초등학교 등이 주 무대였다. 가장 많은 학살자를 낳은 종산국민학교에서는 연일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1948년 10월 말에서 12월 초순까지 여수지역 전체에서 잡혀 온 14연대 군인들과 가담자 들을 교실에 10여 명씩 그룹을 지어 포승줄로 묶어 수용했다. 수용 후 약 2개월간의 부역자 심사에서 특히 부산의 5연대 대장이었던데 김종원은 혐의자를 취조하는 과정에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을 자행하였는데 권총이나 일본도로 목을 치는 광란적인 학살 만행을 자행하여 백두산 호랑이라는 악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아무런 재판 과정도 없이 학살되어 암매장되거나 집단 학살된 만성리의 학살 민드래미골 학살 호명과 봉계동 학살 모두가 이 학교에 수용되었던 혐의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아직 그 규모와 내용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채 통한의 세월만 무심히 흐른다. 이 학교의 현재의 이름인 중앙초등학교는 여수 10·19 이후 1951년 9월 1일부터 사용하게 되었다.
5. 서초등학교(현 서초등학교) 부역자 색출과 손가락총.
여순사건 집안 후 진압군과 경찰은 10월 27일부터 가까운 학교로 모이게 했다. 이때 서초동 학교에는 겁에 질려 태극기를 들고 어린이부터 나이 드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두 나왔다.
동조자. 부역자를 색출했다. 당시 심사의 기준은 교전 중 인자, 총을 가지고 있는 자, 손바닥에 총을 쥔 자, 흰색 지까다비(일할 때 신는 일본식 운동화)를 신은 자, 미군용 팬티를 입은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였다. 인민위원회가 배급한 흰 고무신을 신고 있는 시민도 진압대상으로 간주하는 등 약 한 달 반 동안 진행된 동조자 색출 과정에서 지역의 무고한 민간인들이 큰 피해를 당하였다.
동조자. 부역자 심판이란 이름으로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을 손가락질 하나로 끌려나가 총살에 이르게 했다. 이를 손가락총이라 불렸다고 한다. 강제 집결지로는 동정시장, 동초등학교, 종산초등학교, 진남관, 미평과 국동의 넓은 공지로 모이게 했다. 누구라도 손가락 총에 걸리면 학교 뒤로 끌고 가 즉결 총살을 당하였다. 다 눈을 감고 이웃의 손가락질에 운명이 갈라졌다. 또한, 전 시내가 함포사격과 진압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음에도 시민들은 흐르는 눈물에 발만 동동 구르며 소리한 번 지르지 못하고 지켜봐야만 했다. 이틀을 학교 운동장에서 보낸 시민 중 일부는 즉결처형으로 죽임을 당하고 부역 혐의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학살되기도 하였다. 서초등학교에서 이루어진 부역자 심사에서 14연대 나 좌익협력에 어느 정도가 크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별도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지금은 참혹한 모습은 서초등학교에서는 알 길이 없다. 본관 건물도 허물어지고 오래된 나무도 없어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이곳에 끌려왔던 시민 중 살아남은 사람도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6. 잉구부(왼구부) 전투
14연대가 광양. 보성으로 퍼져나가던 중 순천에서 진압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한다. 그 후 진압군이 여수까지 들어오게 되는데 현재의 연등동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지형을 하고 있어 왼구부라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조선 시대부터 북쪽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왼구부길은 밑으로는 연등천(하천)이 흐르고 위쪽은 종고산 경사까지 마을 전경이 다 보이는 매복전투에서 요충지가 될만한 곳이다.
진압군은 종고산과 연등천 사이 매복한 14연대 군인과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패배하였다. 당시 진압군 총사령관이었던 송호성 준장이 매복하던 시민군에게 저격당해 차에서 떨어지고 고막이 파열되는 등 진압군 대열이 무너지면서 후퇴한 전투지로 잘 알려져 있다. 또 이때 미국 종군기자가 2명이 사망했다. 미국 종군기자가 2명이나 죽었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결국 송호성은 전투에서 지고 순천으로 후퇴한다. 이 후퇴 과정에서 미평동을 지나는데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본 장갑차에 놀라 도망하러 가고 이들은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서 즉결처형했다. 결국, 여수는 10월 24일 전투도 승리하지만 동시에 미평에서 약 마흔 명(47명)의 시민이 죽게 된다. 14연대 군인들도 묘도를 거쳐 백운산으로 빠져나간다. 26일 진압군은 마래산, 종고산, 장군산, 구봉산을 넘어 시내로 진격한다. 시민들은 하늘에서 종포 바다에서 날아드는 총탄과 총구의 불빛을 보면서 무서움에 사시나무처럼 떨었을 것이다.
26일과 27일 공격에서는 시내를 향해 무차별 공격을 하여 두 차례나 여수 시내가 불바다가 되었다. 현재 여수 시내에는 일제 강점기 시설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26일과 27일 시내 한가운데 집중포격을 받아 불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집중포격의 이유는 바로 24일 잉구부전투다. 여수항쟁에서 5차례 전투가 있었고 네 차례는 시민들이 막아냈고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다. 패배 이유는 국내 15개 연대 중 7개 연대 병력이 여수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공군이 없던 당시 국내 몇 대 없는 육군비행정찰대와 해군함대가 여수로 출동하여 하늘에서 바다에서 무차별 공격이 이루어졌다. 연등천에는 여수 시민의 추억이 있는 큰 바위가 있다 하구바구(학의바위)이다 다이빙을 즐기고 빨래하던 연등천이다. 그때의 전투를 기억이나 할까?
7. 중앙동 인민대회와 장소
1948년 10월 20일 오후 3시경 중앙동 로터리 광장에서 4만에 이르는 여수 시민이 모여 인민대회를 열었다. 서울로 치면 종로나 명동쯤 되는 중앙동 로터리는 오래전부터 여수 도심을 형성해왔다. 지역의 여론을 움직이기도 한 이곳에서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는 제주도 애국도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한 제주도 출동에 반대하며 인민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인민위대회는 이용기, 유목윤, 박채영, 문성휘, 김귀영 등 5명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보안서장에 유목윤을 임명하였다.
이용기의 인사말에 이어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⓵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⓶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⓷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 개혁을 실시한다.
⓹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력을 무효로 한다.
⓺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차단한다.
는 내용이었다. 만세삼창과 최후의 결전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인민대회로 이어지는 인민행정이 7일간 실시되었다. 인민대회는 여수 외간 지역에서 21일 22일 개최되었으며 순천지역 인민행정은 3일간 실시되었다. 그리고 여수와 순천을 비롯한 주변 지역은 광양, 곡성, 보성, 고흥, 장흥, 남원, 화순 일부와 하동 일부 지역에서도 유사한 인민대회가 열렸다.
인민대회의 포스터가 곳곳에서 붙여지고 9월 9일에 성립된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국기가 여수 시내에서 펼쳐졌다. 제주도 출동 거부 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가 시내에 붙여졌다. 미국도 즉시 철수, 제주출동 절대 반대 조선인민공화국만세 등이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진압 후 인민대회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당했다 한다.
8. 마래터널
마래터널은 1930년 12월 완공된 철도이다. 1930년대 나주, 화순, 장흥, 보성, 등에서 생산된 면화와 쌀을 수탈하여 여수역으로 가져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원래 여수보다 큰 목포항을 이용해 수탈하려 했으나 조수간만의 차이가 너무 커서 정기 연락선을 띄우기 어려워 수심이 깊고 큰 배가 들어오기 쉬운 여수 신항이 개발지가 되었다. 여수 신항은 일제가 강제 수탈지로 이용하기 위해 개발된 항이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나주, 남평, 화순, 보성, 벌교, 순천, 여수를 잇는 광려선을 1930년 12월 25일 개통된다. 이 개통과 함께 여수에서 시모노세키를 잇는 정기 여객선이 뜨게 된다.
마래터널은 위와 아래 두 개가 있는데 아래 굴은 현재 레일바이크로 이용되어 있다. 1930년에 일본의 수탈을 위해 윗 굴을 만들고 보니 경사가 심해서 기차가 올라오기 힘들었다. 결국, 1936년 12월 아래 굴을 완성한다. 이 아래 굴이 전라선이다. 이 마래터널을 뚫는 과정에서 조선인 특히 함경도 평안도에서 온 노동자도 있었고 만주에서 온 중국인 노동자도 있었는데 중국인 조동자를 꾸리라고 하는데 이들이 강제 징용되어 마래터널을 완성했다. 광주와 여수를 잇는 총 길이 160km 광려선 철도이다.
마래터널은 국내 유일의 차량통행용 자연 암반 터널이다. 640m의 길이 높이 4.5m의 터널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터널이다. 1차선의 터널로 만들어졌고 교통의 불편함이 있어 2016년 11월 터널 앞에 신호기를 설치했고 확장공사도 했다. 마래터널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의 가슴 아픈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일본 강점기에 강압 때문에 건설장비 없이 오직 손과 망치 정 만으로 만들어졌다. 일제의 한반도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우리 지역 주민들을 비롯하여 중국인 노동자 3000여 명이 마래터널 공사에 투입되었다. 마래터널에 내려오는 괴담이 있다. 돌을 들고 지나지 않으면 귀신을 본다는 괴담이다. 터널을 통과하기 전에 돌을 들고 가서 터널을 나오고 나서 돌을 던져 내려놓았다. 그 돌들은 어느새 쌓여갔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전설은 아닐까? 만흥동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침에는 벌떼같이 사람들이 일하러 가는데 돌아올 때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인즉슨 당시 마래터널을 뚫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의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남은 곡창지대이면서 면화 70%를 생산하고 있었기에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마래터널은 등록문화재 116호로 지정되어 있다. 후손들이 올바른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지길 바란다.
9. 신월동 14연대 주둔지(현 한화대피소 포함)
1948년 여순사건을 일으켰던 14연대 병영이 있었던 곳이다. 1948년 5월 4일 국방경비대는 광주 4연대에서 차출된 1개 대대 병력이 이곳에 14연대를 창설했다. 초대 연대장 이영순 소령에 이어 김익령 중령, 오동기 소령을 거쳐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이던 1948년 10월 19일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제주 출병명령에 군인들이 거부, 사건이 시작된 곳이다.
평화로운 주민 마을을 강제로 이주시킨 뒤 1942년 8월경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곳에 여수항공기지를 만들고 미평역에서 신월리까지 철도를 놓기 위해서 신근, 물구미, 봉양마을을 철거했다. 철도를 개설하려고 한 목적은 군수품을 수송하기 위한 것으로 해방 이후 일본군이 물러난 후 남양군도에 보낼 군수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는 증언으로 보아 군수품 공장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약 25m의 공장 굴뚝과 일반인이 사는 세 군데 거주지와 6개의 공장 건물터가 이를 뒷받침한다. 지금은 썰물 때 보이는 활주로 4개의 경납고, 지하지휘소, 창고 등을 볼 수 있다.
여수 지역민들은 여수 수방비행장 또는 여수해군 비행장으로 부른다. 정식 이름은 여수항공기지이며 해군 202부대였다. 수상활주로는 구봉산의 제14연대 주둔지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도로로 매립되었다. 이 비행장 공사는 일본 토목회사들이 맡아 했는데 노동자들은 전남 동부지역에서 끌려온 근로보국대들이 2개월씩 교대로 일을 했다. 이 노역에 여수 수산학교 학생들이 근로보국대 강제동원에 반대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43년 학생들도 이 노역에 동원되었는데 순천중학교 학생들이 공사장에 강제 동원되기 전 신사참배 하는 사진이 남아있다. 해방될 무렵에는 거의 90% 가까운 공정을 보이고 있을 때 일본이 항복하며 빈 건물이 되었다. 해방되고 잠시 미군이 주둔하다가 1948.5.4.일 신월리는 다시 군용기지로 편입되었다. 1개 대대 병력이 14연대를 창설하면서 박승훈 중령이 연대장 일대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사건 후 1950년 7월 25일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고 비게 되었다. 1952.12.31.일 제15 육군 병원이 설치되어 한국전쟁으로 다친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1953.7.27.일 철수하여 오랜 기간 비어있게 된다.
1962년 6.26일 뜻밖에도 보건사회부가 결핵환자 자활원으로 지정 운영되었는데 결핵 환자들이 시내음식점이나 목욕탕 등으로 함부로 출입하는 바람에 사회문제로 등장하다가 1976년 2월 20일 보건사회부에서 생활보조금을 지급하여 각지로 분산시켰다. 같은 해 7월 23일 현재의(주)한화 여수사업장이 들어서기까지 아픔과 질곡을 간직한 곳이다.
10. 보도연맹사건과 애기섬 학살
애기섬은 지난 1950년 국가권력이 여수의 보도연맹가입자인 민간인 125명을 수장시킨 슬픈 역사를 품은 곳이다.
여수 자산공원에 올라가 경남 남해 쪽을 바라보면 희미한 듯 아련하게 하나인 듯 2개의 돌섬이 보인다. 일명 엄마섬과 애기섬인데 슬픈 전설이 있다. 옛날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던 남해 원천마을에 젊고 예쁜 여자가 어린 딸을 데리고 혼자 살았다. 침입한 왜구가 이 여자의 미모에 반해 납치해갔다. 어린 딸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며불며하자 왜구가 그 어린 딸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를 본 엄마가 애끓게 통곡하며 몸부림을 치자 왜구는 이 엄마도 바다에 던지고 도망을 쳤다. 어린 딸은 엄마를 향해 허우적거렸고 엄마는 딸을 구하기 위해 헤엄쳐 갔지만 결국 둘 다 힘에 부쳐 죽었다. 이들 모녀가 죽은 자리에 생긴 섬이 엄마섬과 애기섬이다. 딸을 보호하기 위해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주는 듯한 엄마섬이 앞에 있고 엄마 치맛자락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뒤를 따르는 듯한 애기섬이 애처롭게 뒤에 떠 있는 형국이다. 슬픈 이야기를 간직한 이 섬은 비극적인 광경을 목격한 섬이 됐다.
보도연맹은 여순사건 이후 1949년에 전향한 좌익관련자들을 보호. 지도한다는 명목으로 정부가 주도하여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주민 간의 사적 감정에 따라 가입된 경우도 있고 일부 지역에서는 비료나 배급 등 각종 혜택을 준다고 유인해 가입시키거나 심지어 본인도 모르게 가입된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6.25가 발발하고 전세가 불리해진 정부가 군과 경찰을 동원 이들이 인민군에 가담할 거라며 잡아 가두고 대대적인 처형에 나선다.
당시 군경은 이곳 애기섬을 비롯해 여수 거문도와 안도, 가막만 등에서 보도연맹원을 집단총살하고 시신을 바다에 버린 거로 추정한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추정한 최소 100명 이상 200명을 살해했다는 헌병대의 진술도 있다. 희생자 수도 추정만 할 뿐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충청, 전라, 경상도까지 합해 수만 명에서 최고 20만 명 정도까지 추정하고 있다. 이런 집단 학살에 그치지 않고 망자들의 가족들을 1990년대까지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면서 연좌제를 적용하여 그 자녀에게까지 족쇄를 채웠다.
조류를 따라 먼바다로 흘러간 시신들은 결국 찾지 못했다. 이후 애기섬은 여수지역 사람들에게 바다 위의 비석처럼 지울 수 없는 지워서도 안 되는 아픔이 되었다.
11. 손양원 목사와 둔덕동 순교지
장로교 목사로서 순교한 손양원은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의성리에서 아버지 손종일과 어머니 김은수 사이에 삼 형제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부터 부모를 따라 주일학교에 다니기 시작 1913년 칠원공립 보통학교 3학년 때 선교사 맥레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호는 산돌이다.
1924년 10월 경남 성경학원에 입학했다. 부산 감만동 생애원이라는 나환자수용소 교회에서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한다. 이후 산돌은 10여 년간 밀양, 울산, 부산, 양산 등 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1935년 4월 평양 장로학교에 입학, 공부하면서 능라도 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졸업한 후 부산지방에서 복음 활동을 하면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설교하며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39년 7월 15일 여수 율촌면 신풍리에 있는 나병 환자 요양원 애양원에 전도사로 부임한다. 이곳에서 일생을 나환자들과 보내기로 하고 이름도 양원으로 고쳤고 부인도 양순으로 개명했다. 나환자의 상처 난 선과 발에 때로는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주며 언행이 일치된 신앙실천으로 나환자들을 감동시켰다. 거듭되는 신사참배도 굴복하지 않았던 산돌은 1940년 9월 25일 연행되었고 1년 6개월의 형이 확정되었다. 그때 손 목사에게 적용된 죄는 신사참배 거부와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것이다.
해방되어 1945년 8월 17일 6년 만에 출옥 애양원 교회에서 목회에 힘을 쏟는다. 1946년 3월 목사안수를 받는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일어나고 21일에는 당시 순천사범대학교에 다니던 큰아들 동인과 순천중학교 다니던 동신이 예수쟁이 친미주의자라며 인민재판에 회부되었다. 기독교 신앙만 버린다며 아들을 살려주겠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아 두 아들은 총살당했다. 10월 27일 애양원에서 두 아들 장례식에서 그는 9가지 감사라는 설교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을 나게 하시니 감사하다고 했다. 그 후 여순사건이 진압되고 아들 형제를 죽인 안재선도 체포되어 총살당해야 할 처지가 됐다. 손 목사는 규명 탄원 운동을 전개해 출감되자 양아들로 입적 손재선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다. 곧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권하는 교인들에게 나 혼자 갈 수 없다 거절하고 교회를 지키던 중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28일 새벽 여수 미평과수원에서 총살당한다. 두 손바닥에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있어 죽는 순간에도 기도했음이 밝혀졌다. 애양원 뒤쪽 바닷가 동도섬에 산돌과 두 아들 무덤이 있다. 1933년 4월 이곳에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산돌의 일대기가 출판되었으며 훗날 씨앗은 죽어서라는 이름으로 7개국어로 해외에도 소개되었다. 1966년 6월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에게 크게 감명을 주었다. 자신의 신앙을 철저히 지켜 목숨을 바친 위대한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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