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날 배고프게 살아왔던 탓인지 조석 때가 되면 끼니가 걱정되어 화두(話頭)에 밥먹었느냐 고 흔하게 쓰고 있다. 즉, 과일을 따먹다, 마음 먹다, 귀가 먹다, 더위 먹다(환서병 患暑病), 돈을 떼어먹다, 겁을 먹다, 욕을 먹다, 놀고 먹다, 등쳐먹다, 뇌물 먹다(전궤 錢餽), 망쳐먹다, 까먹다, 애먹이다, 속여먹다, 말아먹다, 논밭과 집을 팔아먹다, 벼슬을 해 먹다, 시장․군수를 해 먹다, 심지어 대통령이나 장관 노릇 어떻게 해먹겠는냐는 등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자.
백제 제14대 근구수왕 8년(382) 6월 과 신라 제41대 헌덕왕 13년(821) 봄에 굶주린 백성이 자기 자식을 팔아 생활하였고(民饑賣子孫自活,「삼국사기」신라본기) 「삼국사기」와 「고려사」에서는 봄여름에 각각 큰가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서로 잡아먹었다<기민상식(饑民相食), 백제시조 온조왕33년(15) 봄여름과 제3대 기루왕32년(108) 봄여름, 제24대 동성왕21년(499), 백제본기, 고구려 제14대 봉상왕9년(300) 7월 및 제17대 소수림왕8년(378) 봄, 18대 고국양왕6년(389) 봄, 고구려본기, 고려 제31대 공민왕10년(1361) 3월 용주(평북 용천) 용주기인상식(龍州飢人相食)「고려사」세가>.
옛 중동국가에서는 전쟁때 아기를 삶아 먹은 기록이 나온다. 구약성서 열왕기 하(6장 24-29절)에 의하면 시리아와 이스라엘 간의 전쟁에서 시리아 군대가 사마리아성을 포위하자 성내 사람들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자 한 여인이 오늘은 당신 아기를 잡아서 끓여먹고 내일은 우리 아기를 잡아서 같이 먹도록 하자는 내용이 실려있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 20년(BC594) 8월에 송(宋)나라 도성을 공격해 포위한지 5개월이 지나자 도성안에서는 양식이 떨어져 사람들이 자식을 서로 바꾸어 먹고 죽은 사람의 뼈를 땔나무로 사용하였다(「사기」초세가, 「회남자」인간훈).
조선조 「숙종실록」숙종 23년(1697) 윤3월 26일 강원도 금성(金城, 현 금화)에서는 굶주린 백성이 초빈(草殯)한 것을 발굴하여 그 살을 뜯어 먹었다(飢民掘發架葬, 割食其肉)고 한다. 신라 제 33대 성덕왕 6년(707) 1월과 제41대 헌덕왕 9년(817) 10월에 굶어죽는 백성이 많았고(「삼국사기」신라본기), 고려 제 23대 고종 42년(1255) 3월에 몽골 침입으로 충남 공주시 공산성(公山城) 에서는 굶어 죽는자가 부지기수이고 어린아이를 나무에 동여 매 놓고서 떠나가는 자가 있었고 공민왕13년(1364) 1월에 서북면 군졸들이 굶어죽는자가 길에 잇달았으며 제32대 우왕7년(1381) 5월 경북 고령에서도 굶어 죽은자가 헤아릴수 없다(「고려사」세가)고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 내시부(內侍府)편에 진지(進止)란 말이 나오는데, 밥상머리에 앉아 음식을 드는 것이고, 1950-60년대에 보릿고개 시절에 아침 저녁때 동네 어른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습니까’ 인사한다. 진지(進止)의 지(止)자를 거듭 쓰면 지지가 되는데 지지(止止)는 어린아이가 기어 다니면서 방바닥에 떨어진 불순물을 입에 넣지 못하게 애기 엄마가 ‘지지야 지지’하고 그치라는 소리이다. 고려말기의 문장가로 문하시랑 평장사 문순공(門下侍中 鷄林府院君 文順公) 이규보(李奎報 1168-1241)선생이 지은 「지지헌기(止止軒記)」가 그 예가 된다. 즉, 소위 지지는 그칠곳을 알 때 그치는 것이다(夫所謂止止者 能知基所止而止者也).
죽을 먹는 것은 식죽(食粥)이고, 밥을 먹는 것은 식사<食食, 食事가 아님, 식(食)은 먹을 사(飼)로 읽음, 논어 옹야편 9장 주(注)에는 이을사(嗣)로 읽는다고 썼음>이고 자식이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을 때에는 오른손으로 먹도록 가르치며(자능식사 교이우수 子能食食 敎而右手「禮記」內則편), 밥을 먹지 못할 때에는 간을 친 염소젖을 먹는다(불능식사염락 不能食食鹽酪「예기」잡기하편)에서도 식사(食食)로 표기 하였으며, 단사(簞食, 「맹자」양혜왕하편)는 대그릇에 담는 밥(단죽기식반야簞竹器食飯也, 논어 옹야편 9장)으로 단식(簞食)으로 읽지 않고 단사(簞食)로 읽는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서 가족수를 말할 때 먹는(食) 입(口)이 몇이라는 뜻의 식구(食口)라고 부른다.
물고기를 먹는 것은 식어(食魚)이고, 고기를 먹는 것은 식육(食肉 大祥而食肉「예기」상대기편)이요, 사대부들이 먹는 것은 연식(燕食)이며, 군왕이 먹는 것은 정식(鼎食, 人君徹鼎食五分之三,「墨子」七患편) 또는 수라(水刺,「經國大典註解」에 의하면 몽골어로서 탕미 湯味를 뜻한다고 함)이다.
점심(點心)은 글자 그대로 마음(心)에 점(點)만 찍는 것으로 불교 선종(禪宗)에서는 배고플 때 조금 먹는 음식(소식점심 小食點心)이라 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이 지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점심이란 이른 새벽에 소식(小食) 하는 것이라 했으나 「태종실록」태종9년(1409) 윤4월 29일(辛未)에 흉년이 들어 대궐안 사람도 점심을 걸렀고(주점심 晝點心), 「세종실록」세종 18년(1436) 7월 16일 조에 사부(四府) 학생과 각처의 관리에게 주는 점심(點心)이 있었는데 호조(戶曹)에서 1년 간 국가에서 쓰는 쌀이 57,280섬(1섬:120근)이 소요된다고 할 때에 점심이란 말이 나온다.
「중종실록」중종19년(1524) 3월 21일(丙戌) 호조판서 안윤덕(安潤德 1457-1535)은 가뭄을 이유로 사학(四學, 한성부 중․동․남․서부의 4부학당을 일컫음)유생들에게는 반점심(半點心, 반되밥이 반점심이라 하였으니 온점심은 한되밥이다.)만 제공하자고 주장한 것으로 보면 태종부터 중종조까지 점심제공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고 현재 초중고생에게 제공하는 점심의 원조가 되겠다.
점심보다 못한 것이 요기(療飢)이다. 배고픈(굶을 기飢) 것도 병이기 때문에 배고픈 것을 치료한다(치료할 료 療)는 뜻이다. 점심보다 나은 것이 밥알이 아주 적게 들어간 것이 식죽(食粥)이고, 식죽보다 나은 것이 식사요, 식사보다 나은 것이 점심때 먹으면 오찬(午餐), 저녁에 먹으면 만찬(晩餐)이다. 오․만찬 한 끼니에 1인당 식사비로 백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식사비 30만원 이상 50만원이 든다고 한다.
조선조에 4대 사화(士禍)가 일어났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연암집(燕岩集 권10)」에 의하면 군자(君子)가 죄 없이 죽는 것을 사화(士禍)라 한다고 했다. 연산군 4년(1498)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연산군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중종 14년(1519)의 기묘사화(己卯士禍), 그리고 명종 즉위년(1545)의 을사사화(乙巳士禍) 등 50년 가깝게 선비들이 수난을 받자 그 때 인사가 “밤새 안녕하십니까” 또는 “밤새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었을 것이다. 보통 밤에 처형하니까 말이다.
그 후 선조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농사를 짓지 못해 흉년이 들자 선조26년(1593) 4월에 그 당시 감진관(監賑官) 남궁제(南宮焍)가 쌀가루 1숟가락에 솔잎가루 10숟가락 비율로 혼합하여 먹게 하였지만 실시한지 1년도 가지 못하였고<성철스님(性徹 1912. 3. 4-1993. 11. 4)은 3-40대에 16년동안 솔잎가루와 쌀가루로 생식>, 선조대왕을 수행하여 의주까지 파천(播遷)한 당시 상주목사, 우의정과 좌의정 및 도체찰사를 거쳐 영의정이었던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지은「징비록(懲毖錄)」제2권 선조26년(1593) 3월경에 장단부 동파(東坡, 현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굶주린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이튿날에 보니 즐비하게 늘어져 죽었고, 그해 12월에 유행병으로 죽은자가 노천에 짚단처럼 뼈만 부지기수로 널려졌으며 부자와 부부가 서로 뜯어먹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보다 더 비참한 내용이 이긍익(李兢翊 1736-1860)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선조조 난중시사 총록(亂中時事 摠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선조27년(1594) 여름에 굶주린 백성들이 대낮에 사람을 죽여서 서로 먹으므로 여자와 어린아이는 감히 마음대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였고 전염병까지 겹쳐서 10명중 8,9명이 죽어 동대문 수구문 밖에 쌓인 송장이 산더미 같았는데 성높이보다 두어길이나 높았고 굶주린 백성이 다투어 죽은 시체를 먹고 발길을 돌리기전에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밤새 안녕하십니까”에서 다시 “진지 잡수셨습니까”로 바뀌게 되었으리라.
8.15해방 후 치안부재 때에 좌익이다 우익이다 격돌 당시에 상대방을 밤중에 제거하였기에 “밤새 안녕 하십니까”가 되살아나고 6.25사변(한국전란)때 미국에서 구호품이 답지되자 일부 구장, 반장이 주민에게 나눠주지 않고 시장에 갔다 팔아 재미를 보았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면 “재미좋아”란 신조어가 생겼으리라.
1953년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부터 인사말이 안녕하세요, 진지잡수셨어요, 재미 좋아를 혼용하다가 1961년 5.16 쿠데타(coup d'Etat 프랑스어로 무력 등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빼앗으려고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가 일어나자 경찰서장이 육군 중위이고 도지사가 육군준장이었다.
이때 불합리한 것을 결재하자니 한가닥 양심이 있어서 손끝이 떨렸을 것이다. 그래서 손 수(手)자에 괴로울 고(苦)자를 써서 “수고(手苦)하세요”란 신조어가 생기고, 1972년 10월 유신때 너도 해먹고 나도 해먹고 먹자판이니 경찰이나 검찰 등 사법기관에 관련되지 않았나 해서 “별고 없으셨습니까” 또는 “별일 없지”하고 안부전화를 건다. ‘별일 없다’는 것은 ‘별을 볼 필요가 없다’의 줄인 말로 흥청거리는 밤문화가 없어졌다는 뜻이다.
1980년 5공화국이 들어서자 계엄령이 선포된 후 5공화국 헌법이 개정되어 계엄령선포 6개월 만에 해제되자 주위 사람을 만나면 “잘 돌아가”한다. 막혔던 것이 풀렸다는 의미 일것이고 1986~1987년에 불경기를 맞자 “어떻게 지내느냐”한다. 밥이나 굶지 않고 지내느냐는 뜻 일 것이다.
1997년 말부터 국제통화기금체제(IMF)가 닥치자 사회적 빈부격차와 계층갈등을 자아내 각 단체, 기업, 기관들이 구조조정을 하니 그 전까지는 직장을 물러나오면 주위에서 저 사람 “밥줄이 끊어졌어”하였는데 “저 사람 밥줄이 짤렸어”로 바뀌어 탯줄과 젖줄이 끊어진 다음에 잡는 밥줄이 낡아 끊어진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해서 짤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열심히 일해 짤리지 않을려면”하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얘기를 한다. 그러면 인사를 어떻게 하여야 하나.
윗분이나 초면자에게는 “애쓰셨습니다”, “욕보셨습니다”라 하고 동료나 수하자(手下者)는 “애썼네 애썼어”, “욕봤네 욕봤어”〈「禮記」檀弓上편에 욕(辱)은 ‘고맙게도’라는 의미라고 함〉라고 해야 한다고 본다.
한때 이조판서 이이(李珥,1536-1584)의 스승이었던 어숙권<魚叔權, 좌의정 함종부원군 어세겸(魚世謙 1430-1500)의 손자>이 중종 17년(1522)에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의하면 꾀꼬리 어미와 새끼를 잡아 새장에 각각 넣고 대청마루 양쪽에 서로 보게끔 바라보게 하였더니 어미새가 밤새도록 울부짖었는데 소리가 없어 아침에 보니까 죽어 있어 하인이 짓궂게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 18토막으로 나있었다는 것이다. 창자를 뜻하는 “애쓴다”, “애간장 녹인다”, “애탄다”, “애틋하다”, “애끊어질듯하다”, “애달프다”, “애처롭다”, “애를 많이 먹었어“라고 한다.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 경남 통영 한산섬에 올라 시 한 수 읊조리는 데에도 창자를 뜻하는 ‘애’자가 잘 나타나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적에 /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에서 “애”자가 있다.
말은 상호간의 의사표현이고 그 시대 풍속과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긴 그릇이다. 인사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본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고려사, 경국대전, 경국대전주해, 지지헌기, 성호사설, 예기, 사기, 맹자, 묵자, 연암집, 징비록, 패관잡기, 연려실기술, 구약성서, 태종실록, 세종실록, 연산군일기, 중종실록, 명종실록, 숙종실록, 회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