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나들길 1코스(심도역사문화길, 강화터미널-갑곶돈대)
우리역사의 굴곡 넘어온 길에는 저항의 문화가 서려있고
‘지붕 없는 박물관’ 강화도는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 하는 섬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화도에는 우리 민족의 뿌리가 있고, 그 뿌리를 지키고자 했던 저항의 문화가 스며있다.
우리의 시조인 단군왕검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강화도 마니산 정상에 참성단을 만들었다.
이후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왕과 제관이 직접 찾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곤 했다.
현대에 와서도 매년 어천절(음력 3월 15일)과 개천절이 되면 참성단에서 제사를 올린다.
우리나라는 반도로 돌출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외세의 침략이 유난히 많았다.
그중에서도 강화도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수도인 송도와 서울에서 가까워 위급한 상황이 도래하면 왕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강화도는 외세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장소가 되었다.
강화도 해변에 설치된 진·보·돈대와 내륙의 강화산성 같은 유적지가 바로 그러하다.
이런 강화도를 두 발로 걸으면서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 자연생태를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는 길이 강화나들길이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적지, 산과 들녘, 산골 마을과 갯마을,
그리고 갯벌과 철새 서식지를 잇는 강화나들길을 걷기위해 남도 땅에서 먼 길을 달려왔다.
김포반도에서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 땅으로 들어선다. “언제 바다를 건넜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포반도와 강화도는 가깝다. 강화도는 먼 옛날 김포반도에 이어진 내륙이 오랜 세월동안 침강하면서 섬이 되었다.
썰물이 되면 해저의 일부가 물 위로 드러날 정도로 수심도 얕다. 너비는 불과 200~300m지만 물살은 빠르고 거세다.
이곳은 김포반도와 강화도 사이의 경계수역으로 염하수도 또는 염하라 부른다.
강 같은 해협이라 강화해협이라고도 불린다. 길이는 20km에 이른다. 제주도·진도·거제도·남해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다섯 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9개의 유인도와 17개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강화나들길은 강화읍에 있는 강화버스터미널에서 시작되지만, 우리는 강화시내길을 건너뛰고 강화산성 동문에서 출발하기로 하였다.
강화읍 관청리 언덕배기에 올라서니 성곽과 동문이 의젓하게 서 있다. 사적 제32호인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축성되어 몽고의 침입에 맞서 싸운 강화의 도성이다.
고려시대 당시에는 내성·중성·외성으로 쌓았으나, 현재는 돌로 쌓은 내성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를 지나면서 내성만 남은 강화산성은 조선시대에 개축하였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가
숙종 36년(1710)에 다시 쌓았다. 산성의 둘레는 7,122m, 높이는 약 3m에 이른다.
강화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개의 성문을 두고 있으며, 네 개의 암문과 두 개의 수문이 있다.
동문은 네 개의 성문 중 가장 늦게 2003년 복원되었다. 동문 바깥쪽은 강도동문(江都東門),
안쪽은 망한루(望漢樓)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동문은 한강을 오가는 배들이 정박하던 나루터인 갑곶진과
관아가 있던 지금의 관청리를 연결하는 관문으로 서울을 오가는 관리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동문을 지나 커다란 당산나무와 원불교교당을 지나자 솟을대문을 한 성공회강화성당 입구에 다다른다.
강화읍 주택지 뒤편 높은 위치에 자리를 잡은 성공회강화성당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로
대한성공회 초대 주교인 코프에 의하여 1900년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신부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다. 한국인이 처음 세례를 받은 것은 코프신부가 주교 서품을 받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하였다.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건물이 교회로서는 이례적으로 한옥이라는 점이다. 외관은 불교사찰양식을 하고 있고,
내부는 서유럽의 바실리카양식으로 예배공간을 꾸몄다.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양식 평면구성을 한 성공회강화성당의 한옥건물에서는 지금도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성당으로 들어서는데, 마치 절집 같은 느낌이 든다. 솟을대문을 한 외삼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내삼문이 나오고, 내삼문을 통과하면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 쓰인 편액이 붙은 성당이 나온다.
불교사찰에서 일주문-천왕문-대웅전으로 이어지는 구조와 같다. 내삼문 한쪽 칸에는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어
사찰의 종각 느낌을 준다. 동종에는 십자가와 성경이 새겨져 있다.
성당 앞 외삼문 옆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성당을 지키는 보초병마냥 늠름하게 서있다.
뒤편의 사제관도 근래에 지은 건물이면서도 앞쪽의 성당 건물과 조화를 맞추기 위해 ‘ㄷ’자형 한옥형태를 갖추었다.
성당 외삼문을 나서는데, 강화읍내와 남산 정상에 세워진 강화산성 남쪽 성루인 남장대가 한눈에 바라보인다.
성공회강화성당과 골목을 사이에 두고 용흥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용흥궁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집(잠저, 潛邸)이다. 원래는 민가였으나 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철종 4년(1853)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그 뒤 1903년 철종의 조카인 이재순이 중건하였다.
용흥궁은 좁은 골목 안에 있고, 마당이 넓지 못해 시원스러운 맛은 다소 떨어진다. 행랑채(별전)와 연결된 솟을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쪽문을 통과하자 7칸의 ‘ㄱ’자형 내전(안채)이 기다리고 있다.
내전은 너른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안방과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내전을 나와 또 다른 쪽문을 통과하면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6칸 ‘ㄱ’자형 외전(사랑채)이 자리를 잡고 있다.
사랑채답게 앞으로 돌출된 부분은 3면에 창을 달아 여름철에는 문을 활짝 열고 풍류를 즐길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내전은 살림공간이라 차분한 느낌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외전은 손님들과 교류하는 공간이라 팔작지붕을 얹어 경쾌한 느낌을 준다.
외전에서 왼쪽 쪽문을 들어서니 정방형의 조그마한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잠저구기비(潛邸舊基碑)가 있어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물던 사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비각 앞에서는 아름드리 단풍나무와 향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 25대왕인 철종은 아명이 원범으로, 11살 때 가족과 함께 강화로 와서 유배생활을 했다.
그는 영조의 고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증손자이고,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의 손자이다.
24대왕인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헌종의 대비인 순원왕후가 가장 가까운 왕족인 이원범을 발탁하였다.
철종을 왕위에 올린 순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이로써 순원왕후 집안인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강화되었다.
용흥궁 앞 골목을 빠져나오니 용흥궁공원 광장과 주차장이 있고,
여기에서 보는 측면 10칸의 성공회강화성당이 웅장해 보인다.
용흥궁공원을 지나 고려궁지로 향한다.
길가 담벼락에는 외세침략에 맞서 싸우고 있는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고려궁지로 들어서기 위해 승평문(昇平門)을 통과한다. 사적 제133호로 지정된, 7,534㎡에 이르는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무신정권시절 최우는 이령군을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이라 하였다.
이 궁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에 모두 허물어버렸다.
이후 조선 인조 9년(1631)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는 비운을 맛보야 했다.
승평문을 들어서니 정면 8칸 측면 3칸 규모의 명위헌(明威軒)이 육중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이 건물은 인조 16년(1638) 관아로 건립되어 현윤관으로 부르다가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건물 안에는 옛 강화유수가 집무를 하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명위헌 옆으로는 넓은 터가 있고, 빈 터 뒤로 외규장각 건물이 자리를 잡았다. 외규장각은 정조 6년(1782)에 건립되어
왕립 도서관 역할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행사 내용을 정리한 의궤와 왕실물품 등을 보관하였다.
현재의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되어 없어진 것을 6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거쳐
2003년 복원한 건물이다. 외규장각 앞에서니 신록이 물든 나무들 너머로 강화산성 남장대가 바라보인다.
외규장각 앞 잔디밭에서 계단 하나를 내려오면 강화부종각(江華府鐘閣)이 있다.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숙종 37년(1711) 강화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이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 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이 동종은 성문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되었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하였다. 1999년 10월, 동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관·전시하고 있다.
고려궁지를 출발하여 향교 쪽으로 가는데, 700년 된 은행나무 거목이 인간을 압도한다.
마을 골목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높이가 25m 둘레가 6m에 이른다.
700살 고목이지만 지금도 풋풋한 장년의 힘을 느낄 수가 있다.
고려후기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이 은행나무는 강화 역사의 산증인이다.
읍내변두리 골목길을 따라 가다보면 한옥마을도 만난다.
10여 채의 한옥들은 대부분 양철지붕을 하고 있어 한옥의 무게감이 떨어지는 게 흠이다.
강화여자중고등학교 정문 앞을 지나자 강화향교가 기다리고 있다.
강화향교는 성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국립교육기관으로 고려 인종 5년(1127)에 세워졌다.
그 뒤 여러 차례 옮기고 복원하였는데, 지금 있는 위치는 영조 7년(1731) 강화유수 유척기가 옮긴 것이다.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공간인 명륜당 등의 건물이 강화향교를 이루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지금은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제사기능만 남아있다.
이처럼 강화나들길 1코스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유적지를 따라서 걷게 되어 있어
‘심도역사문화길’이라 부른다. 심도(沁都)는 강화의 옛 지명이다. 심도의 '도(都)'는 39년간 한 나라의 도읍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강화도 사람들은 강화가 한때 나라의 수도였음을 상기하며 지금도 강화를 강도(江都)라고 부른다.
이제부터는 신록 싱그러운 숲길을 걷는다. 연두색으로 채색이 된 숲은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고 예쁘다.
이런 길을 걷다보니 발걸음에도 신록이 물들고, 마음속에서는 신록의 청순한 기운이 넘실댄다.
곳곳에 설치된 강화나들길 이정표가 길안내를 해준다.
길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능선으로 올라선다.
남쪽 성곽은 서문과 남장대로 연결이 되고, 북쪽으로 이어지는 성곽은 북문에 닿게 된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성곽은 뱀이 기어가듯이 자연스럽게 곡선을 이룬다.
부드러운 성곽을 따라 걷다가 뒤돌아보면 성곽너머로 남산과 남장대가 슬쩍 고개를 내밀어 미소를 보내준다.
잠시 산성길을 걷다가 다시 산허리 숲길을 따라서간다. 발걸음은 길이 이끄는 대로 맡겨둘 뿐 걷는다는 의식도 없이 나아간다.
숲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우리를 광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듯하다.
우리의 발길은 진송루(鎭松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북문에서 멈춘다.
북문은 강화산성 북쪽에 위치한 석문으로 강화산성의 다른 석문과 마찬가지로 2층에 누각을 얹었다.
정조 7년(1783)에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했으며,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단장했다.
새로 복원해 놓은 성곽을 따라 북장대로 올라간다. 돌로 쌓은 석성에도 신록이 물들어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가파른 성곽길은 올라갈수록 시야가 점점 넓어지면서 주변의 산과 바다가 조망이 된다.
북장대에 올라서자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바다로 빠져드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황해도 땅을 적시고 흘러온 예성강도 강화도 북쪽에서 임진강과 합류한 한강을 만나 서해바다로 나아간다.
한강 하류 너머로 북한 황해도 개풍 땅이 지척이다.
“아니, 북한 땅이 이렇게 가깝단 말이야?”
“그럼, 저기 보이는 산이 바로 북한 땅이야.”
일행들은 지척으로 보이는 북한 땅이 믿기지 않은 듯 고개를 갸우뚱한다. 우리에게 북한은 같은 민족이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라가 되어있다.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하루라도 빨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본다.
<강화 나들길 1코스-2>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