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의 아픈 역사, 그 안에 자리한 둔율동 성당
설사에 잘 듣는 정로한征露丸, 일본제국주의의 불순한 꿈은 중국과 러시아를 정복하고 더 나아가 아시아 전체를 정복하는 데에 있었다. 그래서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치르는데, 일본군들이 러시아의 추운 날씨와 나쁜 물 때문에 설사가 심해서 군인들이 연일 죽어나게 되자, 설사를 멈추게 하는 약을 일본왕실 주관으로 공모 독려해서 만든 약이 바로 정로한이었다. 그래서 러시아露를 정복征하는 약이라는 뜻으로 설사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름의 약명, 征露丸정로환이 된 것이다.
일제는 아시아 제국 건설을 위한 첫 번째 순서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삼았다. 다음 단계의 정복사업을 위한 전초기지로써의 발판을 다지기 위해 한반도에 항만 건설, 철도 부설, 도로 개설, 광산 및 산림 개발, 하천 개수, 발전소 건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근대적인 '개발' 사업을 일으켰다. 개발의 이유와 목적이 모두 일제의 야욕에서 비롯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는 한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하였다고 평가하는 역사관을 우리는 식민사관이라고 부른다. 사실 균형있는 극토발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에서 보이는 친일본 성향의 왜곡된 합리주의도 이에 속하는 아류에 불과하다. 한국의 경제발전이 박정희의 공이었다는 주장도 이러한 오류의 연장선상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잘못된 역사의식과 편견들을 바로잡는 교육과 역사 ‘바로 잡기’가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군산에 가면 특별한 집중력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옛 중심가에 근대역사박물관을 세우고 바로 그 옆으로 위치하고 있는 시모노세키 은행 군산지점이었던 건물을 ‘군산 근대 미술관’으로,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을 ‘군산 근대 건축박물관’으로 그리고 구 군산세관을 ‘호남 관세전시관’으로 활용보존하고 있는 일들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한눈에 역사와 문화를 비교 분석할 수 있도록 하여 근대역사의 아픈 흔적을 돌아보고 미래를 위한 올바른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한 눈으로 군산의 첫 번째 성당인 둔율동 성당을 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역사
군산은 1899년 5월 1일 일제의 요구로 대한제국에 의해 개항하였지만 1905년에 일제의 세관이 들어서면서 통관의 모든 권한은 일제가 독점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보듯이 군산은 일제강점기에 가장 많은 피해와 상처를 입었던 지역 중의 하나이다. 그랬던 이유가 호남의 비옥한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한 목적에 있었다. 1933년 군산항의 쌀 수출량은 약 220만석이었다. 전국 총수출량이 770만석이었으니 군산항의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는데, 군산항의 물동량 중 쌀이 무려 73%를 차지하였다. 쌀은 전쟁물자의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일제의 침략전쟁을 위한 전쟁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수탈당한 것이다. 농지 수탈과 이를 통한 식민지 경영 토대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일제는 토지조사업(1918 ~18)을 통해 한반도의 모든 경지와 택지 및 산림과 기타 토지에 대한 대대적이고 정밀한 조사를 하여 지적도를 작성했다. 일제의 소유체계를 확립하고자 하는 목표로 이루어진 일이긴 하나 측량결과로 1 : 50,000의 기본도가 작성된 것은 일부 성과적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많은 소작인을 양산하였고, 무엇보다도 적지 않은 토지가 일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착취와 수탈의 추진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토지개량주식회사 등 2대 기관을 통하여 이루어졌고, 군산에 조선은행과 시모노세키 은행의 지점이 들어선 까닭은 그만큼 군산에서의 수탈 규모가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처럼 농촌지역의 생산 거점을 수탈하기 위한 토지구획정리사업 등은 자연스럽게 시가지의 급격한 정비로 이어졌으니 일본인 거주지역이 팽창하게 되었고, 이에 일본식 건물들과 서양식 절충형의 건축물들이 대거 들어섰으니 군산에 근대건축물들이 특히 많은 이유가 바로 그러하였다. 항구를 만들면서 항구로 연결시키는 철도부설을 계기로 단시일 내에 대도시로 발달한 신흥도시로써의 군산이 그런 모양새로 변화하였는바·목포, 청진, 진남포, 성진, 웅기, 신의주 등이 그런 도시들인데 북한의 도시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군산과 목포 특히 군산이 그 흔적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건축물 특징
대한제국의 말기와 일제 강점기 동안에 이루어진 근대건축의 흐름은 대체적으로 신고전주의 양식이었다. 덕수궁의 석조전이 르네상스 양식에 가까울 뿐, 그 외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등이 모두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이 두 건축물과 함께 대표적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꼽히는 건축물이 구 군산세관이다. 그 당시의 다른 지역의 세관 건물들이 다 철거당한 터라 유일하게 남은 군산세관 건물은 매우 기념적인 위치에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의 특징은 절충형의 건축물이 많은 점이다. 조선은행 군산지점이나 시모노세키 은행 군산지점 등은 신고전주의 양식인 듯 하지만 르네상스 양식의 분위기를 덧붙이는 경우에 해당한다. 다른 지역의 건축물들도 대부분 이러하다. 이런 절충형의 기조에서 성당 건축물들도 자유롭지는 못하다. 건축기술의 부족이라는 이유도 있고, 재정의 부족한 상황도 이유가 되어 이런 절출형의 건축물들이 특히 교회 건축물에서 왕성하여 지금까지도 한국에서의 교회건축 기조로 자리하고 있다. 둔율동 성당도 그 맥락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미군이 점령한 군산 비행장
군산의 상처와 아픔은 그에 그치지 않는다. 일제의 패망 이후, 일제가 만든 비행장을 미군이 접수하면서 계속 이어진다. 군산의 공항은 대한민국 공항 중에서 유일하게 미군이 관장하고 있는 공항이다. 미국 태평항공군 제 7공군 소속 제 8전투비행단이 주둔하고 있다. F16 기종의 2개 비행단과 패트리어트 미사일 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당연히 미군부대와 미군들의 사고로 인한 사건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건이 탄저균 노출사건이다. 주한미군 부대 중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생긴 예고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산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은 미군부대 근처 부대찌개는 웃을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 점령기에 건축된 둔율동 성당
미군이 전략적 차원에서 군산 비행장을 접수하자 군산에서는 부대찌개가 유행을 한다. 1954년에 시작하여 1955년에 완공을 한 둔율동 성당은 바로 그 시점에 군산에 등장한 대표적인 근대건축물이다. 규모에 있어서나 외형의 특징에서 새로운 건축물이 등장한 셈이다. 그러나 중세시대의 고딕양식을 택하려 한 점, 즉 근대의 건축양식을 택하지 않은 점은 지금 와서 볼 때 무척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의 군산 시민들은 고딕양식의 둔율동 성당을 바라보면서 이제 일본이 아닌 서양의 힘이 점령하게 되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군산 종교의 역사 : 천주교와 개신교
개신교의 초기 선교를 주도한 곳은 알렌·언더우드로 대표되는 미국 북장로교와 아펜셀러·스크랜튼으로 대표되는 미국 감리교였다. 이후 호남의 선교는 아펜셀러의 지원을 입은 미국 남장로교가 시작하였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 조직한‘장로회 미슌공의회’를 통해 선교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였다. 단 인구 5천명이 넘는 개항장이나 도시는 공동으로 선교할 수 있고, 5천명 미만 되는 지역은 한 선교부에서 점유하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호남 선교는 미국 남장로교의 소위 '7인의 선발대(Seven Pioneers)'라고 부르는 이들이 시작하게 되어 1894년 3월에 레이놀즈 선교사와 드류 의료 선교사 일행이 군산으로 오게 되었다. 이것이 군산 개신교 역사의 시작이다. 1894년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때이며, 1886년 한불조약에 의해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얻은지 8년이 지난 후였다. 무임승차한 개신교가 신흥도시들을 바탕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데 비해서 천주교는 여전히 농촌을 중심으로 하는 공소들에 의존하고 있었다. 특히 군산 지역에는 당시 개신교 신자가 한 명도 없었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비록 산골의 공소에 거주하였지만 100여명에 이르고 있던 때였기에 더욱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군산 둔율동 성당의 홍성호(돈보스코)가 수집 정리한 군산지역의 천주교 역사에 의하면 1839년 기해박해 이후부터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들어 공소가 만들어졌는데 군산 지역에는 모두 25곳(임피 15개소, 옥구 1개소, 함열 9개소:함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임피면과 서수면으로 함열의 일부가 군산에 편입됨)이었으며 모두 100여명이었다. 세부적으로는 아래와 같다.
임피 : 사옥개(군산시 내흥동), 감동이, 막김이, 덜뜸이, 세동(새동), 서당골(성산면 도암 리)
서수 : 흥법(서수면 취동리 점촌), 관운정이(서수면 마룡리, 왈운정, 가는쟁이), 창감(장 감), 내동(서수면 취동리), 옥하, 마룡, 축동
성산 : 마골(성산면 도암리 마동), 고살미(성산면 고봉리), 산골(성산면 산곡리),
회현면 : 칠거리(회현면 고사리)
나포면 : 숯골(나포면 나포리)
해방 이후 성장하기 시작한 군산 지역 개신 교회는 현재 총 600여 교회, 41개 교파가 다양한 모습으로 분포되어 있다. 천주교는 둔율동 성당을 모본당으로 시작하여 현재는 13개 본당으로 성장하였다. 군산 지역에서의 신앙의 역사는 개신교보다 먼저 시작하였지만 선교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는 개신교에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뒤쳐진 현실이다.
둔율동 성당의 설립과 성당 건축
“둔율동성당은 1954년 7월 17일 성당신축을 계획하고 225평에 현 군산 본당 성전 신축에 따른 부지공사에 착수하였고, 1955년 3월 24일 성당신축허가를 받고 성전 건축을 시작하였다. 성당 건축을 위한 벽돌은 장항제련소에서 개발한 슬러시벽돌과 내화벽돌이 이용되었으며, 슬러시 벽돌의 강도는 너무 강했고 겉면이 날카로와 벽돌을 나르던 신자들이 손을 많이 다쳤다. 1955년 8월 17일 김현배 교구장 집전으로 성전 축복식 및 낙성식이 있었다. 성전은 연건평 145평(건평 126평), 종각높이 92척(약 28미터), 외장은 내화벽돌조였으며 성전 바닥은 나무마루로 준공하였었다. 성전 안의 좌우측과 후미의 2층지지를 위한 기둥이 있었으며 제대를 신자석 보다 가로길이를 작게 하고 그 크기를 2층지지를 위한 기둥과 일직선상에 있게 건축하는 등 바실리카양식을 일부 응용하였으며, 성전 외관은 고딕양식에 따른 창문, 종탑부 창호, 장미창, 성전입구, 종탑을 설치하여 서양 성전 건축양식 중 고딕양식에 충실하였다. 기존 성전의 경우 지붕을 2중으로 건축하여 신자석 채광을 받으려고 하였고 성전 제대부근 좌우를 건축하여 제대의 사제에게 채광을 주려 하였다. 그러나 전기보급 이후인 1955년에는 굳이 공사비가 많이 드는 2중 지붕을 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기존의 전통적인 건축방식에서 벋어나 일체형 사각방식으로 건축하였던 것이다. 대신 창을 길게 하여 고딕양식을 살리면서 스테인-글라스로 창에 설치하여 경건하고 성스러움을 살린 것이다.”(본당 의 자료 중에서)
2017-02-15,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서울 해병대사령부 초대교회」를 포함한 총 3건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군산 둔율동 성당」을 포함한 총 5건은 문화재 등록을 예고하였다. 문화재 지정의 이유로, 군산 최초의 성당 건물이며 고딕식 건물일 뿐 아니라, 성당의 신축과 관련하여 계획수립에서 준공에 이르기까지 당시 주임신부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던 내용이 잘 기록된 ‘성전신축기(聖殿新築記)’가 성당 내에 잘 보관되어 있어 당시 건축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문화재 지정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문화재 지정 요청을 두고 본당 차원에서 작성한 자료에서 보더라도 사실 건축의 특징과 형식뿐만 아니라 보존상의 문제점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직접 본당 자체의 지적사항을 보면 아래와 같다.
“둔율동 성당은 군산 최고의 교회건축물이고 전주교구 내에서도 고딕양식으로는 가장 오래된 성당건축물인 점을 장점으로 들 수 있다.
- 전형적인 고딕양식으로 종탑, 갤러리 창, 종탑부 창호, 장미 창, 출입구 구조 및 외벽의 붙임기둥과 수평 띠로 이뤄져 있다는 점. 내부 마루를 인조석으로 변경
- 바실리카양식으로 내부 기둥을 이용한 2층 발코니가 있었으나 바실리카양식의 기둥과 2층 철거”
「군산 둔율동 성당」으로 1955년 준공 당시에는 붉은 벽돌로 마감하였지만 이후 벽돌 외부에 인조석을 덧대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였을 뿐 아니라 내부의 마루도 나무 대신에 인조석으로 변경하였고, 고딕 양식 건축물의 중요한 요소인 기둥의 철거 및 바실리카식의 두 단계로 이어지는 이중 지붕 구조가 사라졌기에 사실 원형은 외부에서만 찾아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입구의 종탑 모양새에서만 찾아볼 정도이다. 원래의 계획대로 지어지지 못한 아쉬움에다가 그에 더하여 건축 후의 철거 및 개조 등으로 도저히 고딕양식으로 부를 수 없는 현재의 모양새는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지금이라도 문화재로 지정되면 더 이상을 훼손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을 뿐이다.
조욱종 신부(부산교구/교구건축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본당의 교우 차원에서 지역교회 역사를 쓰고 있는 홍성호(5대째 군산지역에서 신앙을 지켜온 후손)의 기록을 높이 평가하고 싶어서 그의 자료 중, 공소시절의 자료를 인용, 게재하고 싶습니다. 그의 자료는 다른 교회사 자료에서 발견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아서 더욱 의미있습니다.
부록 : 둔율동 성당의 홍성호 돈보스코가 수집 정리한 자료 중에서 교우촌(공소) 부분 발췌
교우촌(공소) 시대
기해박해 이후 군산지역에 교우촌들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이전인 1800년을 전후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시작하면서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나 군산지역을 한정해서 그 부분에 대한 고증이 불가능하고, 군산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본격적이고 대규모의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기해박해 이후라 봄이 타당하다.)
1839년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내포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남부의 산지와 전라도 북동부 산간지역 및 경상도 서북부 산간지역으로 이주하지 시작하였고 현재의 군산지역으로도 박해를 피해 배로 이주해와 교우촌을 형성했다.(현 성산면 산곡리 산골 교우촌이 군산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으로 판단되며, 산골교우촌을 중심으로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군산지역의 교우촌은 주로 옹기가마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농업과 겸업하는 경우와, 숯가마 또는 수공업에 의한 특산물을 만드는 경우, 산간오지의 담배농사 등으로 생활하였고, 이러한 생활은 교우촌 공동작업을 통한 소규모 공동체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1880년대 전라도의 교우촌이 약 500여 지역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교우촌 중 군산지역의 교우촌은 임피 15개소, 옥구 1개소, 함열 9개소(함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임피면과 서수면으로 함열의 일부가 군산에 편입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피의 사옥개(군산시 내흥동), 감동이, 막김이, 덜뜸이, 세동(새동), 서당골(성산면 도암리)
서수에 흥법(서수면 취동리 점촌), 관운정이(서수면 마룡리, 왈운정, 가는쟁이), 창감(장감), 내동(서수면 취동리), 옥하, 마룡, 축동
성산에 마골(성산면 도암리 마동), 고살미(성산면 고봉리), 산골(성산면 산곡리),
회현면의 칠거리(회현면 고사리)
나포면의 숯골(나포면 나포리)등이 전해지고 있다.
교우촌의 지명이 전해지는 이유는 당시 사제들이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했다면 ‘그곳에 공소를 열었다!’고 하여 공소가 설립된 것으로 보았고, 그곳이 바로 교우촌이었던 것이다.
사제들이 성사가 집행 된 지역을 표기하면서 공소가 설립되었다고 하면서 교우촌의 지명이 전해진 것이고 사실은 교우촌이나 공소는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1886년 조불조약 이전에는 박해에 대한 보안을 이유로 사제들이 교우촌에 대한 자료를 파기했으며, 신자들 역시 같은 이유로 교우촌을 숨겼기에 교우촌에 대한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교우들은 평소 때는 흩어져서 살고 있다가 공소가 개설되어 사제가 방문하면 인근의 교우들이 모였으며 대략 군산인근에 살고 있던 교우들은 100여명이 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사제가 방문한 교우촌의 공소개설은 교우 중에서 지도자급 교우의 집으로 공소회장 또는 유력인사의 큰집을 이용하고, 흩어져 생활하고 있던 교우들이 모일 수 있는 교통까지 고려해서 개설된 것으로 사려 된다.
1882년에는 임피 사옥개(현 군산시 내흥동)와 막김이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1883년에는 임피 덜뜸이에, 1884년에는 임피 감동이와 회현에 칠거리 그리고 나포면에 나포공소(교세 통계자료에는 1886년)가 설립되었다.
1885년에는 성산 산곡리에 산골공소(대야성당 자료, 교세통계자료에는 1896년)가 개설 되었고 공소회장은 신사문 회장 이었다.산골공소의 1900년대 중 후반까지 김씨(김광태신부 부친)와 성씨(성승록의 부친) 두 집안이 지키고 있다가 군산 시내로 이사 나오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화전식 농업, 옹기가마, 숯가마 및 수공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었다.
나포의 신자들은 숯을 만들거나 왕골, 갓(조선시대 양반들이 머리에 쓰던 관모) 등을 만들어 파는 수공업으로 생활했으며, 얼마 전까지 나포에 숯골이 있었다. - 충남 아산지역이 갓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갓과 왕골이 조선후기 나포의 특산물로 대표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포지역 교우촌의 신자들은 충남 아산 또는 아산 인근지역출신 교우들이 이전하여 설립한 교우촌이 아닐까 판단되며, 이런 이유로 1791년 이존창의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사 때 같이 가지 못하였다가 기해박해 때 나포지역에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특히 나포지역은 동학도들이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선택 된 동학군의 이동로중의 하나로 동학군은 나포에서 배를 이용해 충청도 서천으로 올라가 공주를 공격하였으며, 나포에 다다른 동학군들은 나포의 많은 주민들을 동학군으로 받아들여 공주 관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천주교 나포지역의 교우촌 피해는 알 수 없다.
다른지역의 교우촌 신자들은 공동작업이 필요한 담배농사와 옹기가마를 주요 생산 및 생활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담배농사는 이익이 크고 개간한 산에서 농사를 할 수 있어 교우촌에서 많이 하였다. - 교우촌에서 담배농사로 큰돈을 벌어들인 신자들도 많이 있었고, 전주본당(현 전동성당) 건축 때 보두네 신부도 담배를 싼 시기에 매입해서 비싼 시기에 파는 방식으로 건축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옹기가마는 교우촌의 주요 생산수단이었으며 교우촌간의 연락까지 가능한 사업으로 상당히 성행하였다. - 옹기가마운영은 돈이 없고 기술도 없는 교우들이 생업과 신앙생활의 지속적 영위를 위해 운영했으며, 외국인 사제들은 교우촌 교우들의 옹기가마 운영을 지원하고 유약에 관한 사항 등 옹기 기술 및 옹기가마 운영에 대한 사항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1800년경부터 1900년까지 전라도의 옹기촌은 약 30여곳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군산지역은 칠거리, 내동, 흥법, 마골, 관운정이, 산골, 고살매, 축동 등 군산지역 곳곳에 옹기 교우촌이 산재해있었다.
군산은 흙이 좋아 여러 교우촌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했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산림법’이 제정 되 벌목을 제한하자 옹기가마의 에너지원인 나무(화목)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옹기가마를 주로 하는 교우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옹기산업이 쇠퇴하면서 옹기가마를 주업으로 하던 교우촌의 교우들은 교우촌을 떠나 군산항이나 이리역의 일용잡부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특히 1923년부터 시작된 약 3년간의 대흉작으로 산속의 교우촌에 먹거리 부족현상에 따른 기근과 군산항 내항의 증설(뜬다리 부두 건설) 등으로 군산항에 많은 인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군산 인구가 증가햐였고 이를 기회로 교우촌의 신자들도 군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으며, 이리역의 설립으로 갑자기 기차를 이용한 쌀의 집합지로 이리가 발전하면서 역의 잡부가 필요하게 되었고 인근의 교우촌 특히 이리 북부와 동부지역의 교우촌에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익산 동남부 지역인 세실공소(현 익산공단 남부지역)는 내포의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후손들이 거주하기도 하였다.
1857년 군산시 성산면 산곡리 산골 교우촌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하던 정복조는 부안군 주산면 덕림리 무내미로 가마를 옮기고 1857년 무내미공소(현 부안 덕림공소)를 개설하고 전교에도 활발하게 하여 무내미공소를 부안천주교의 발상지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산골공소는 1850년대 군산지역 교우촌의 중심이었다고 보이며,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산골공소를 중심으로 인근으로 교우촌이 분화 또는 이동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산골공소는 지속적으로 교우들이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어 1890년대 신부님들이 쉬어가던 근대적의미의 산곡공소가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옹기가마는 흙이나 나무 등이 고갈되거나, 토착하고 있던 마을주민들과의 분쟁이 발생하면 옹기가마를 옮겼으며 그러다보니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거나 과거에 교우가 운영하던 옹기가마터를 수리해 이주하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