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관
의학은 “질병이란 무엇인가”, 또 “질병은 어떻게 발생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질병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해
기본적인 관점이며, 동시에 건강、질병、발병 등 일련의 문제에 대한 견해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질병관은 사람들로 하여금 질병에 대해 각기 다른 태도와 조치를 취하게 한다.
질병관은 의학 이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그의 정확성 여부는 의학 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질병관
동서고금을 통해 질병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었으며,
아직까지 통일된 견해는 없다. 그러나 수천 년에 걸쳐 한의학에서는
이에 대하여 일관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질병은 귀신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한의학은 질병과 귀신의 관련성을 매우 강력하게 부정하고 있다. “
형체가 없으면 질병도 없다”62)고 하여 어떤 구조나 형체가 있고서
그로부터 정상적인 생리활동과 함께 무질서한 상태도 발생하게 된다
(“기와 형질이 갖추어지면 병이 여기에서 생긴다”63))고 하였다.
그러므로 질병은 전혀 신비로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질병에 대해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건강할 때에는 예방에 힘쓰고 병에 걸리면 적절하고도
적극적인 치료를 하게 된다. 전국(戰國)시대 편작(扁鵲)이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으면’64) 그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한 것과,
『소문 오장별론(五臟別論)』에서 “귀신에 사로잡혀 있는 자와는 더불어
그 지극한 덕을 말하지 않는다”65)는 내용은 한의학 질병관이 단면을 반영하고 있다.
질병은 일종의 자연과정이기 때문에 반드시 인식될 수 있으며,
그 변화도 일정한 원리에 따르게 된다. 역대 많은 학자들은 질병의
본질과 그 변화 원리를 탐구하였는데, 그와 관련하여 상한병(傷寒病)의
육경변증(六經辨證), 온열병(溫熱病)의 위기영혈(衛氣營血)과 삼초변증(三焦辨證) 등은
진단분야에서의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질병은 체내 음양의 동적 평형(dynamic equilibrium)과 오행 조화(harmony)의 실조이다
『내경』 등 문헌에서 질병에 대해 직접적으로 정의하지 않았지만,
건강의 개념에 대한 설명과 ‘불병(不病)’과의 관련을 통해 질병의 의미를 분석할 수 있다. “
이른바 평인(平人)이란 질병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질병이 없는 사람은 촌구맥과
인영맥이 사계절과 상응하고, 상하가 상응하여 왕래하고, 육경의 맥이 쉬지 않고
박동하고, 본말(本末, 오장과 지체)의 한온(寒溫)이 조화를 유지한다.
이와 같이 형육(形肉)과 혈기(血氣)가 서로 부합하면 평인이라고 한다”66)고 하였다.
즉, 인체가 외부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으면서 내부적으로 각종 활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면 건강하다고 하였다.
한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음양이라는 도구개념으로 상관되거나 동일한
사물의 상대적인 속성을 표현하였다. 건강 역시 음양소장(陰陽消長)의
동적 평형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음양이 평형을 이루고 있다”67)고도 하였다.
또 오행이라는 도구 개념으로 인체 내부 구조를 오장 중심의 장부론으로 귀결시켰다.
오행귀류(五行歸類) 방식과 생극승모(生剋乘侮) 및 항해승제(亢害承制) 원리로
인체의 생리 병리현상을 해석하고 진단과 치료에 적용시켰다. 질병은 음양의
동적 평형이나 오행 조화의 실조나 파괴로,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인체의
외부환경에 대한 적응 불량, 자신의 정신심리와 형체기능 간의 관계 실조
및 각 장부와 경락 공능 사이의 부조화 등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질병 발생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인체에 정상적인 조절 기전이 있으면 각종
생리 활동 역시 모두 일정한 역치범위에 있으며, 이는 인체로 하여금 대부분의
상황에서 자신의 동적 평형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외부 변화에 대해서도 적응할 수 있는데,
이를 건강이라고 한다. 내외 인자가 인체에 작용하여 인체의 조절 기전을 약화 또는
파괴시키거나, 그 강도가 인체가 적응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하면 인체는 자신의
동적 평형과 조화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질병이 발생한다. 이러한 내외 인자를
한의학에서는 ‘병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질병은 병인이 인체에 작용하여
동적 평형과 조화가 실조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발병관(發病觀)
질병관과 발병관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질병관은 질병이란
무엇인가를, 발병관은 질병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설명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발병관은 질병관의 내용 중에 포함되기 때문에 질병관을 구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정기(正氣)가 체내에 있으면 사기(邪氣)가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68)
한의학에서는 질병이 인체와 발병인자 사이의 상호작용의 과정이자 그 결과이며,
발병 원리가 인체 자체와 병인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전자를 ‘
정기(正氣)’라 하여, 질병에 대해 저항능력을 가진 조직구조 물질과
그 공능활동을 가리키고, 후자를 ‘사기(邪氣)’라고 하여, 각종 발병 인자를 가리킨다.
질병의 발생과 진행 여부는 사기와 정기 사이의 대립에 의해 결정된다.
일반적으로, 이 둘 사이에서는 정기가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질병 발생은 거의 모든 경우에 신체 구조의 손상, 기혈진액(氣血津液) 등
물질의 부족과 각 장부공능의 실조를 포함하는 정기의 부족을 내재(內在)
근거로 하며, 사기는 단지 질병 발생의 중요한 조건이 될 뿐이다. 이에 관하여
『소문 자법론(刺法論)』에서 “정기가 체내에 있으면 사기가 감히 침범하지 못한다”69),
『소문 평열병론(評熱病論)』에서 “사기가 모인다는 것은 반드시 정기가 허하기 때문이다”70)라고 하였다.
병이 생기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그리 한 것이다”71)
정기는 질병 과정에서 항상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데, “정기와 진기(眞氣)가
깎이는 것은 자연계가 아닌 사람이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72)라고 하였다.
대개 질병의 발생은 환자 자신에 기인하고 있다. 지나치거나 지속적인 정신적
자극、비위생적인 음식、불규칙한 생활、과로와 게으름、지나친 정신노동、
무절제한 성생활 등이 모두 정기를 상하게 할 수 있으며, 직간접적으로 질병의
발생과 진행을 일으키게 된다. 『소문 조경론(調經論)』에서 “무릇 사기는 음에서
생길 수도 있고 양에서도 생길 수 있다. 양에서 생긴다는 것은 풍우한서(風雨寒暑)의
외사(外邪)를 얻은 것이고, 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음식거처(飮食居處)와
음양희노(陰陽喜怒)로 말미암은 것이다”73)라고 한 바와 같이, ‘생우음자(生于陰者)’는
주로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질병을 가리킨다.
대부분의 질병에서 ‘인자위지(人自爲之)’를 강조하는 것은 질병 발생에 대한
생활습관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이러한 인식은 사람들이 평소
생활습관을 잘 관리함으로써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기본 원리가 된다.
체질의학적 발병관
한의학의 발병관에서는 인체의 정기를 질병의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인자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서 정기를 북돋워
자신의 면역, 즉 항병 능력을 증강시킴으로써 기대하는 치료효과를 거두게 한다.
정기위주의 발병관을 가지고 한의학은 자연적으로 질병의 발생과 진행
과정에서 정기의 다양한 구성양태를 의미하는 체질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이를 전제로 한의학에서는 개체의 생리적인 특성과 그를 바탕으로 나타나는
병증의 이감수성(易感受性)과 병증 변화의 경향성(傾向性)을 중시함으로써
구체적이고도 독창적인 체질학설을 형성하였다. 체질에 대한 관심은 질병의
발생, 진행 및 변화의 원리를 더욱 심층적으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예방과 치료에 도움을 준다.
62) 無形無患(素問⋅六微旨大論)
63) 無形質具而疴瘵由是萌生(素問⋅上古天眞論 林億注)
64) 信巫不信醫(史記⋅扁鵲倉公列傳)
65) 拘於鬼神者, 不可與言至德(素問⋅五臟別論)
66) 所謂平人者, 不病. 不病者, 脈口人迎應四時也,
上下相應而俱往來也, 六經之脈不結動也,
本末之寒溫之相守司也, 形肉血氣, 必相稱也, 是爲平人(靈樞⋅終始)
67) 陰平陽秘(素問⋅生氣通天論)
68) 正氣存內, 邪不可干(素問⋅刺法論)
69) 正氣存內, 邪不可干(素問⋅刺法論)
70) 邪氣所溱, 其氣必虛(素問⋅評熱病論)
71) 質之所生, 人自爲之
72) 使正眞之氣如削法之者, 非天降之, 人自爲之爾(素問⋅生氣通天論 王冰注)
73) 夫邪之生也, 或生于陰, 或生于陽. 其生于陽者, 得之風雨寒暑; 其生于陰者,
得之飮食居處, 陰陽喜怒(素問⋅調經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