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말씀] 요한복음 9장 1-12절(신약 160)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 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말씀나눔]
박시호 씨가 쓴 ‘행복편지’라는 책의 부모 편에 보면 아버지의 목발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잠시 소개하며 오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딸 이렇게 세 식구가 여행을 하던 중에 교통사고가 났습니다.자동차가 언덕 아래로 구르는 큰 사고였습니다.
어머니는 상처가 비교적 가벼웠지만 아버지와 딸은 모두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특히 딸은 상처가 깊어 오랫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음에도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습니다.
사춘기였던 딸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깊었습니다.
그나마 같은 목발 신세인 아버지가 딸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교통사고 후 목발을짚어야 했던 것입니다. 딸이 투정을 부려도 그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가 나서서 말없이 받아주었습니다.
딸에게는 아버지와 함께 공원 벤치에 나란히 목발을 기대놓고 앉아 이런저런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식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 앞에서 꼬마 녀석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이 큰 길로 굴러가자 꼬마는 앞·뒤를 살피지도 않고 공을 주우려고 큰 트럭이 달려오고 있는 큰길로 뛰어들었습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가 목발을 집어 던지고 큰길로 뛰어들어 꼬마를 안고 길 건너 쪽으로 피한 것입니다.
순간 딸은 자기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가 딸을 꼭 안아주며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얘야, 이제 진실을 말할 때가 되었구나. 사실 너의 아버지는 목발을 짚지 않아도 된단다. 퇴원 후에 다 나았거든.
그런데 네가 목발을 짚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자 아버지도 목발을 짚겠다고 자청하셨단다. 너의 아픔을 같이 해야 된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아버지가 너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해서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단다. 이 일은 아버지의 회사원도, 우리 친척들도 아무도 모르고 나와 아버지만 아는 비밀이었단다"
딸은 길 건너에서 손을 흔드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의 아픔을 같이 하겠다고 자청한 아버지처럼 그 동안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소외된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는 단체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사람 모두가 싫어하는 일, 국가도 손을 미치지 못하는 일에 나서서 소외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습니다. 수많은 시간 동안 교회는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제껏 교회는 시대에 따라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교육받지 못한 이들에게 배움의 장소가 되어 주었고, 치료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에게는의료 서비스를 지원하거나, 치료 받을 수 있도록 돕는 곳이 되었고 오갈 곳 없는 이들에게 머무는 장소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소외된 사람들을 섬기며 많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광주 기독병원도 의료서비스를 통해 기독교의 섬김을보여준 단체입니다.
이 병원은 광주 제중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제중원에서 원장을 지냈던 로버트 윌슨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한센병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 의사이자 목회자입니다. 윌슨 박사는 1908년 파송받아 우리 나라에 와서 1948년 본국으로 되돌아 가기까지 40년 동안 1만 명이 넘는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그의 섬김은 한센병 환자들에게 감동이 되었으며 그들의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한번은 윌슨박사가 부임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당시에 목포에서 일하던 포사이드 의사가 영산포에서 한센병 걸린 여인을 데리고 와서 윌슨 박사가 제공해 주는 치료시설에서 돌보아 주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윌슨박사가 지원하여준 온돌방에서 죽을 때까지 지낼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죽기 전에“내 동족 같았으면 당신들처럼 이런 친절을 베풀어주지 않았을 겁니다”라며 눈물로 감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윌슨 박사를 비룻한 이 땅에 파송되었던 수많은 선교사들과 그 사랑을 이어받아 사랑으로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던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목회자 들과 교회는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 19 상황 속에서 교회는 세상의 감동이 아니라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코로나19의 집단 감염의 최초의 진원지가 종교관련 시설이었고, 연이어 발생하는 집단 감염의 근원으로 교회와 관련된 시설이 끊임없이 지목받고 있습니다. 최근 TCS 국제학교와 선교회 관련 누적 확진자가200명이 넘게 발생함으로 지역 주민들의 원성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뉴스 보도에 인근 주민들이 교회 벽에 장식된 성경 구절을 향하여 계란을 던지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론 본인들은 성경적 교육과 신앙훈련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합숙을 하고 모임을 가졌겠지만, 결과적 볼 때 비난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교회 관련 확진자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도 충장로 우체국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옷깃을 잡으며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비판의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세상의 근심이 되어 버렸을까요?
이러한 시국에 어떻게 전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전도에 관한 주제는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한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지 전도는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는 온 사회가 교회를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극히 제한된 예배를 드리고, 폐쇄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음에도 전도를 통해서 성장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는 당시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집단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여 언제 누가 어떤 모습으로 숨어들어 그들을 잡아내 죽이려 할지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새 신자를 받아드리고 환영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낯선 이에 대해 먼저 검증을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도의 대상이 확대 가족 개념이었다는 것과 그들의 선한 삶의 모습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 만큼이나 사회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증가되는 지금, 종교 단체 관련, 집단 발병 상황을 보면서 그들이 믿음의 행위라고 생각하는 것, 그들이 말하는 종교적 신념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가?
혹시 믿음이라고생각한 그들의 언행이, 신념이 아닌 아집(我執)이며, 결국전도의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또한 우리가 변질되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돌이켜 처음우리의정체성과 사명을 되찾고, 복음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맹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성전을 떠나 길을 가던 제자들은 한 맹인을 보고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합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이 질문이 제자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이들은 맹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정죄하는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질문에는 이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다 ‘죄’때문이라는 이스라엘의 정통적인 사고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장5-6절 말씀에 근거한 죄와 은혜의 연좌제에 대한 이 사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근간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다르지 않아서 ‘죄’라는 시각으로 맹인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이 맹인을 바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제자들은 날 때부터 맹인 된 그 사람을 정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정죄하는 그 사람을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맹인을 바라볼 때 당연히 죄인이라 속단하고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맹인들을 대하는 한결같은 마음은 그들의 장애는 자신 죄 또는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죄 때문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치 이사야 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그들의 장애가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사랑이 없는 정죄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이다
말씀하십니다.
지금 제자들이 지금 힘을 써야 할 부분은 ‘정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명확히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고정된 사고의 틀을 깨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에 때가 있어서 임박한 진노의 날을 고려하여 한정적인 시간에 집중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전도는 이렇게 고정된 시선을 돌려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이 고정된 사고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의 사고를 경직되게 할까요?
그것은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과,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고정관념을 유발하는 각종 습관들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고정관념과 사고의 틀을 깨신 주님은 무엇을 하셨나요?
예수님께서는 맹인 이었던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지금 맹인에게 가장 시급한 원천적인 문제가 무엇일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맹인이 절실히 바라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입장에서 맹인에게 가장 필요한 조치를 해 주십니다.
제자들처럼 맹인을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또 도와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일방적인 도움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수혜자를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인 도움은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전도행위는 중세 강대국들이 식민지 백성들을 위한답시고 강제 개종시킨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맹인을 어떻게 도와주셨나요?
진흙을 이겨서 이 맹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마치 흙으로 인간을 빚으신 창조의 사역을 떠올리게 합니다.
외적으로는 진흙을 이겨서 눈에 바른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맹인을 다시 빚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맹인은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른 예수님은 맹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말씀하셨습니다.
실로암 못은 우리가 많이 본 것처럼 연잎이 떠있고 개구리가 뛰노는 연못이라기보다 물 저장고 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히스기야 시절 앗수르의 침공을 대비하여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에서부터 수로를 뚫어서 성안의 실로암 못까지 533m의터널을 연결 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기혼 샘과 실로암 못 양쪽에서 파고들어가서 중간에 만났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두 곳의 높이 차가 30cm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로에 물이 흐르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나지 않는 수로를 만들어서 앗수르 군병들에게 노출되지 않게 한 것입니다.
터널이 완공된 이후에 이 터널을 팠는지에 대해서 “실로암 비문”에 기록하여 두었는데, 지금은 터키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이 실로암 비문에 기록된 일부를 보면 터널 공사가 얼마나 드라마틱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양쪽에서 서로 파 들어갔다. 그리고 3규빗 쯤 남았을 때에,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양쪽 편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오른쪽 왼쪽으로 점점 크게 들렸다. 벽에 틈을 만들었다. 돌을 쪼는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파들어 갔다.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쳤다. 그리고 물이 흘러내렸다. 근원지로부터 연못까지 1,200규빗을 흘러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한 터널 공사의 성공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포위 공격에도 물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실로암 못은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는 백성들이 정결예식을행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 주변에 많은 정결 욕조가 있었지만 명절 때 밀려오는 수많은 인원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따라서 명절에 정결예식에사용되기에 이 커다란 실로암 못이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바로 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정결의식을 자연스럽게 연상시킬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맹인은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까?
밝은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밝은 눈’의 표현은 하나님의 의로움과 연계하여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밝은 눈은 죄와 허물과 대조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침례가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는 의식을 통해서 옛 사람이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임을 나타내듯이, 실로암 못에서 온 몸을 담그는 정결의식을 통해서 맹인은 자신의 육신의 문제와 더불어 영적인 문제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는밝은 눈으로 보게 된 맹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에게 행하신 일들을 가감 없이 담대히 증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제자들과 같이 정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는 고정관념의 틀에 매어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제자 삼는 일, 즉,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방해하는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수많은 걸림돌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받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있는 이 걸림돌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먼저, 내가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사고와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이라는 차원에서 전도에 관한 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도에 관해 가지고 있던 우리의 선입관도 깨뜨려야 합니다.
여러분 전도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전도지 가지고 길거리에 나가야 한다거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것이 먼저 떠오릅니까? 아니면 불신자들을 어떻게든지 교회에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부담감과 걱정입니까?
이제 우리는 전도에 관한 틀을 깨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적합한 전도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전도의 모습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대의 기류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가 전도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은 그 어느 시대 못지않게 개인주의 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1인 가구의 수가 4인가구의 수를 추월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외로움에 친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정에 굶주려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 주신 것처럼 우리도 불신자의 눈높이로 보면 방법이 보이지 않을까요?
가정교회를 추구하고 신약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힘쓰고 있는 우리 교회에서
불신자 한 명을 VIP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목원들 전부 합심하여 적극적으로대처하고, 나아가 온 교회가 합심하여 그의 가족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정교회의 기본적인 정신 아닐까요?
이제부터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고 그들에게다가가서 공감과 배려 그리고 사랑으로대하며 그들의 믿음의 가족이 되어주고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빛고을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대에 따라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방식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원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말씀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 또한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들의 삶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마찬가지 우리들도 선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일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삶으로 증명해야합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향한 비방의 손길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하는 길은, 각자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요?
팀 켈러의 ‘센터처지’라는 책에 보면,
현대 교회에 필요한 전도사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팀 켈러는 유명한 인사를 동원하여 전도 집회를 열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이웃이 보기에 매력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웃이 되도록 격려해야 한다말합니다. 그는 교회 프로그램이나 봉사를 위한 제자도가 아니라 일상생활 자체가 선교적인 제자도가 되어야 한다 말합니다.
특히 관계를 이용하는 전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 충실한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특별한 이해관계나 용건이 없어도 이웃과 인사하고, 그들의 안부를 묻고, 상대방의 말에 주의 깊게 경청하고, 그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 주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와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할 기본적인 부분은 우리가 주님을 영접한 성도라면, 당연히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서2:5-6에 보면,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 할지니라 말씀하십니다.
존 스토트 목사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 ‘제자도’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이라면당연히그렇게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어떤 굴욕적인 일이라 할지라도포기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섬기심, 자신을 내어주신 사랑의 삶, 오래 참으심, 그리고 선교의 사명을 닮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제자가 되려면 세상 말로 미쳐야 합니다.
미쳤다, 바보, 멍청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의 참된 제자 인지 알 수 있습니까?
진정한 제자의 특징 중에 빠질 수 없는 요소가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3:35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제자도는 사랑의 섬김입니다.
에베소서 6:6-7에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믿지 않는 상급자라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나아가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말씀합니다.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러한 섬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롬14:18)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여러분!
세상에 감동을 주는 교회가 세상의 근심이 되어버린 지금, 다시 세상에 감동을 주고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섬겨야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부터 섬겨야 할까요?
여러분!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까운 사람,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먼저 전도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가까운 사람을 전도한다는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나와 가까운 가족들은 나의 언행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그들에게 전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식적이고 속보이는 언행은 버리고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전도는 하나님이 내 삶에 행하신 일들을 가감 없이 진술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심으로 내게 일어난 변화를 내 삶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가족이 내 삶의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인내를 가지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이 일은 내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꾸준히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제자로 인내하며 나아가다보면 높은 자리가 아니라 낮은 자리를 향해가야 되고 심지어 광야로 나가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로서 맞이하게 되는 광야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역설적이지만 광야는 주님을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강력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오히려 광야에 나감으로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고, 하나님의 일을하기에 합당한 자격이 유지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물론,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8:26-27 에 보면,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연 초에 각자 마음에 정한 VIP를 선정하여 대상자 명단을 제출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VIP를 위해, 지속적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다가가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그들의 가족이 되는 기회를 주심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전도의 결과에 대해 염려하시 마십시요! 사도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
라고 우리를 권면합니다.
전도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모든 염려는 주님께 맡기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을 지금 시작하십시오!
이 일은 무기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친분이 있는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하십시오!
심판 날,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영원한 벌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힘써야 합니다.
먼저 주님의 참 제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자격을 갖추고주신 사명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증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마음을 새롭게 하고 복음 앞에 다시 서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후로 저와 여러분의 삶에 주님의 성육신과 같은 낮아짐의 은혜와 사랑의 섬김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