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관기 6장
(판6:1)“주의 목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칠 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겨주셨더니”
: 이스라엘이 행한 악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율법을 범하는 등의 범죄만이 아니라, 특별히 우상숭배와 관계가 있다(10절).
(판6:10)“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너희가 거하고 있는 아모리인의 땅에 있는 아모리인들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음성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더라.”
이스라엘이 이방신들을 섬기게 된 데에는 그들 주위에 있는 백성들로부터 ‘문화적인 영향’을 받아 그들의 신들을 따라 섬기게 된 것이다.
(판2:12,13)“이집트 땅에서 그들의 조상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 조상의 주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 즉 그들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주를 진노케 하였으며 (13) 그들이 주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타롯을 섬겼더라.”
그리고 이스라엘이 숭배한 우상들 중에는 오늘날 ‘성모 마리아’로 대체된 ‘아스타롯’을 포함하고 있다. ‘아스타롯’은 예레미야에서 ‘하늘의 여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렘44:18,19)
(렘44:18-19)“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여왕 앞에 제물로 술을 붓던 일을 그만 둔 뒤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부족하고 칼과 기근으로 진멸을 당하였음이니라. (19) 또 우리가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여왕에게 술제물을 부었을 때, 우리가 우리의 남자 없이 그녀에게 과자를 만들어 경배하고 술제물을 부었더냐?" 하더라.”
이처럼 마리아를 숭배하는 카톨릭의 기원은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313년)에 앞서 훨씬 더 이전으로 한참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성경버전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고(창3:3), 그들이 드리는 ‘미사’는,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의 동기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창4:4,5) 참 흥미롭게도 창세기 3장 3절은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고, 성모 마리아로 불리는 ‘하늘의 여왕’ 앞에 무릎 꿇고 경배하는 무리들이 카톨릭이다. 이런 관점에서, ‘아스타롯’의 또 다른 변형인 ‘마리아’를 숭배하는 로마 카톨릭과 그리고 그들과 연합하는 개신교 종교 세력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악을 행하고 있는 자들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족속들을 몰아내고 멸절시키도록 명령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될 것을 차단하시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많은 불신자들이 죄에 대해 단호하시고 이방인들을 무자비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인해 실족하고, 주 하나님을 매우 ‘잔인한 신’ 정도로 여기는 불신의 늪에 빠져드는 것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끝장내실 때에는 어떠한 기회를 다시 부여해 준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을 때, 또 다른 기회를 그 악인에게 부여해주는 것이 무의미해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하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조차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계속되는 불평과 불신으로 인해 그들을 멸절시키시고 모세를 통하여 다시 시작하실 의지도 있으셨음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며 이방신들까지 섬겼다면, 이들이 행해야 했던 종교적 의식이나 봉사가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교회와 성당, 절의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도 집안의 모든 제사들을 챙겨가면서 세상의 복을 바라는 종교인이 있다면 아마도 같은 상황일 것이다. 이스라엘은 너무나 종교적이었고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방신들까지 섬길 정도로 그렇게 악을 행했다.(판6:25절 참조)
(판6:25) “그 날 밤 주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아비의 어린 수송아지, 즉 칠 년 된 둘째 수송아지를 취하여 네 아비가 가지고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를 베어 내고”
주의 목전에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했다는 것은, 이들이 다른 민족들을 침략해서 착취하고 약탈하고 살인하고 강간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참석하는 ‘엄숙한 집회’와 경건한 ‘종교생활’이 가지고 있는 죄의 심각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죄인들이나 불신자들에 대해서도 분노하시지만, 이스라엘이나 교회에 대해서도 얼마나 분노하고 계시는지 종교인들은 자각하지 못한다. 자신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벗어나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말씀들을 교회에 적용해보면, 오늘날 이 땅의 교회들과 기독교계, 그리고 그 지도자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고, 이 우상숭배자들로 변질되어 버린 종교 집단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그 생생한 음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릴 것이다.
재판관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주께서 이스라엘이 배교하고 범죄하면 그들을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시는데 그들로부터 고통받는 기간들이 상이하다는 점이다. 이 기간들을 비교해보면, 각각의 시기에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의 무게가 어떠한 지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들이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 그 기간을 정확하게 산정하여 다루신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공평하신’ 분이시다.
(11절)“주의 천사가 와서 아비에셀인 요아스에 속한 오프라에 있는 상수리 나무 아래 앉았더니 그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인들로부터 숨기려고 포도즙틀로 밀을 타작하더라.”
: 포도즙틀로 밀을 타작하는 것은 정상적인 용도가 아닌 다른 용도로 변경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칫솔로 페인트칠하는 것과 같은 식이다. 기드온이 왜 포도즙틀로 밀을 타작해야 했는지, 여기서 성경 독자들은 어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야만 한다. 밀과 포도의 수확 시기는 각각 다르다. 아마도 이맘때면 포도즙틀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고. 숨어서 밀을 타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이다. 밀은 본래 ‘타작마당’에서 타작한다. 포도즙틀에서 포도즙을 짜는 모습은, 우선 수확한 포도송이들을 포도즙틀에 집어던져 넣고, 착즙기가 없었던 그 시기에는 발로 밢아서 포도즙을 짜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앞으로 재림하시게 되면, 자신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흘려주신 피를 거룩하지 아니한 것으로 간주하여 구원받기를 거절함으로써 주님을 모독한 원수들을, 포도즙틀에 던져진 포도송이들처럼 그렇게 대우하실 것이다. 주님의 발에 짓밟혀 멸망당할 이 불신자들은 말 그대로 존 스타인벡의 저서명처럼 ‘분노의 포도송이들’이다.
(사63:3) “나는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고 백성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아무도 없었도다. 나의 분함으로 그들을 밟고 나의 진노함 속에서 그들을 짓밟으리니 그러면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서 내가 내 의복을 모두 얼룩지게 할 것이라.”
(계19:15)“그의 입에서는 예리한 칼이 나와서 그것으로 민족들을 칠 것이요 또 철장으로 그들을 다스릴 것이며,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즙틀을 밟으실 것이라.”
(계19:13)“피에 적신 옷을 입었는데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더라.”
(12절)“주의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기를 "너 힘센 용사여,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자”
: KJV 성경의 영어 표현은 순서가 뒤집어져 있다. 주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힘센 용사가 될 수 있다. 영어를 한글로 옮길 때, 모든 것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지만, 문맥을 어색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영문 번역의 순서를 그대로 유지해서 이런 의미도 전달될 수 있도록 살려주면 좋을 것이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만 해도 이 정도 레벨인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셔서 그 와 ‘한 몸’이 되셨다면, 그 능력은 어떠하겠는가? 구원받았다면 누구나 기드온과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고작 자기 자녀들의 대학 입시의 합격을 위해 학교 철문에 엿을 붙여놓고 빌고 있는 다른 우상숭배자들과 나란히 그 옆에서 기도하고 있는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광경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영적인 신분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영적 갓난아기들이 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들은 주로 그런 것들이다.
(15절)“기드온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오 나의 주여, 내가 무엇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서 가난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 하니”
* 기드온의 착각
: 기드온은 ‘무엇을 가지고(wherewith)’ 이스라엘 구원할 수 있겠느냐고 주께 물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내가 너와 함께(with)’ 하시겠다는 말씀이었다. 다시 말해 “기드온, 너는 나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기드온의 질문은 ‘how’의 문제였고, 주님의 대답은 ‘who’의 문제였다. “기드온 네가 너의 땀과 힘을 가지고는 할 수 없으나 내가 너와 함께 하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구원에 관한 질문은, 영생을 상속 받으려면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고(막10:17절),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요3:4절)
(막10:17)“그 후 주께서 길에 나가시니 어떤 사람이 달려와서 주께 무릎을 꿇고 묻기를 "선한 선생님, 내가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라고 하니”
(요3:4)“니코데모가 주께 말씀드리기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나이까?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태에 두 번째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 있나이까?"라고 하니”
그러나 하나님께는 누군가를 구원하시는 것이나. 영생을 얻게 해 주시는 것, 거듭나게 해주시는 것이 너무나 쉽다.(막10:27, 요3:16).
(막10:27)“또 예수께서 그들을 주시하며 말씀하시기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아니하느니라. 이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함이라."고 하시니라.”
(요3:16)“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문제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명의(名醫)’가 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암보다 치명적인 죄의 전염병에 감염되어 있으면서도 치료 받기 위해 수술대에 오르기를 거부하는 말기암 환자와도 같은 완고한 죄인에게 있다. 주님께로부터 수술을 받기위해서는 그에 앞서서 먼저 말씀의 MRI로 검사를 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동안 감춰져있던 자신의 모든 더러운 겉과 속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다. 니코데모가 두려워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요3:19,21절)
(요3:19-21)“이것이 정죄라. 즉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빛보다는 오히려 어두움을 더 사랑하니 이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 (20)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며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혹 자기의 행위가 책망받을까 함이라. (21) 진리를 행하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자기의 행위를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하시더라.”
이 말씀은 주님께서 니코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에 대해 전해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유념해본다면, 주님께서 판단하시는 니코데모의 영적 상태가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복음 4장에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손가락질을 받는 삶을 살아왔으나 빛으로 나아온 한 사마리아 여인이 회심한 사건이 다루어지고 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은 그렇게 어두움에 머물러 있는 ‘경건한 종교 지도자’와 빛으로 나아온 ‘다섯 남편을 둔 여인’이 대조되고 있다.
(21절)“그때 주의 천사가 자기 손에 있는 지팡이 끝을 내밀어 그 고기와 누룩 없는 빵에 대니 바위에서 불이 일어나 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사르더라. 그런 후 주의 천사가 그의 목전에서 떠나니라.”
: 오늘날 교회의 감독들, 목사들은 성도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드린 물질들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고, 그 물질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밀려드는 헌금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마침내는 풍요로운 재정과 이 곳 저 곳 문어발식으로 비즈니스를 확장하여 몸집이 비대해져 버린 교회는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닌가? 십자가만 걸어놨을 뿐이지 중소기업이나 대형 프랜차이즈 가맹점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이렇게 피, 땀, 눈물을 흘려서 일구어놓은 교회를 내려놓고 은퇴를 하자니 밤잠이나 오겠는가? 자식들 앞으로 어떻게든 교회를 물려줄까 고심 끝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이다. 우선 장차 태어날 자식의 이름을 ‘하나’라고 작명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이가 장성하면 은행 창구에서 이름이 불릴 때, ‘하나님’으로 불릴 것이고, 신학교 나와서 전도사로, 부목사로, 목사로 세워서 교회를 물려주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 셈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놓고 멀리 보는 안목과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어야 이 레드오션의 기독교계에서 끝까지 생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주께서 제물을 받으시는 증거는 주로 불살라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고 남아있다면 하나님께서 그 드려진 제물들을 받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다. 주님께선 카인이 드린 제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셨다. 아벨의 제물이 불살라졌다는 언급은 없으나 성경의 다른 책들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제물을 어떻게 받으시는지 확인함으로써 기록이 생략된 말씀의 행간을 읽을 수 있다. 이런 부분은 받을 수 있는 자는 받고, 소화가 안 된다면 받지 않으면 된다.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은 불분명한 부분들을 놓고 소모적인 논쟁들을 이어갈 필요는 없다. 다만 성경의 다른 기록들에 비추어 볼 때 유추하여 알 수 있는 진리들도 있다. 이와 같은 또 다른 사례를 든다면, ‘사과나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선악과’는 실상은 ‘포도나무’이고,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실 때 입혀주셨던 ‘가죽옷’은 ‘양가죽’이라는 것도 창세기에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성경을 애독하는 독자라면 성령께서 조명해주시는 진리의 빛을 통해 충분히 짐작하여 알 수 있는 사실들이다.
(창4:4-5)“아벨도 자기 양떼 가운데서 첫배 새끼들과 그 살진 것을 가져왔더니, 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더라. 그러므로 카인이 몹시 격노하고 안색이 변하더라.”
하나님의 종으로 자처하는 사역자라면, 21절에서 주의 천사가 기드온이 바친 제물에 대해 취한 자세를 유념하여 살펴봐야 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헌금이나 재정에 대해 사역자가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제물을 직접 받는 주의 천사도 드려진 제물에 대해 지팡이만 갖다 대고 사라졌다면, 성도들의 섬기는 손을 통해 주님께 드려진 제물에 대해 교회의 사역자는 그 물질들의 ‘수취인’도 아니고 다만 ‘택배 배송’을 맡은 자로서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겠는가? (성경에서는 ‘청지기’라고 말씀하는데, 요새는 주인 행세를 하는 ‘머슴들(청지기)’이 많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게 ‘배송기사’라는 표현이 더 와 닿을 것이다.) 평생을 일구어 놓은 교회의 사역을 내려놓기가 아쉬워서 자기 자식에게 교회를 세습해주기 위한 절차에 관해 법률자문을 구하러 다닐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두고 홀연히 사라질 생각을 해야 한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아름다운 퇴장’이다. 주님의 종으로 자처하는 자에게 주님의 말씀 외에 주장해야할 권리가 무엇이 있으며 애착을 가져야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는 삯꾼 목자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고 있는 주님의 제자들과 주님의 종들 가운데 오늘날 기독교계의 리더들이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호사(?)를 누려본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그들이 ‘주’라고 부르는 그 분을 포함해서.
(32절)“그러므로 그 날로 그가 기드온을 여룹바알이라 하며 말하기를 "그가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렸으니 바알로 그를 대적케 하라." 하였더라.”
: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바알의 제단을 무너뜨리고, 하나님께 참다운 경배를 회복하는 성도들은 ‘여룹바알’이다. 마귀는 이런 성도들을 대적하고 미워한다.(딤후3:12)
(딤후3:12) “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박해를 받을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