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외사산(外四山)인 북한산(북) 관악산(남) 아차산(동) 덕양산(서)이 넓게 감싸있다.
내사산으로 주산(主山)인 북쪽의 백악(白岳) 안산(案山)인 남쪽의 목멱(木覓, 남산) 동쪽의 타락(酡酪, 낙산) 서쪽의 인왕(仁王)이 감싸안은 곳, 그 너른 품의 넉넉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왕조의 법궁(法宮)인 경복궁(景福宮)은 이곳, 서울의 중심인 백악산 남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있다.
● 개설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 연원 및 변천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 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전각은 융문당(隆文堂)을 포함하여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日人)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종합청사로 활용되다가, 1971년에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지어진 목조기와건물 모양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에 들어있던 국립박물관이,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치면서 이 건물로 이건되었다. 구 총독부청사는 1995년 8·15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 원래 있던 흥례문 권역이 2001년 10월 복원·낙성되었다.
한편, 일제에 의해 건물이 훼철되는 피해를 입은 경복궁을 복원하는 공사가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광화문>
1395년(태조 4년) 9월에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고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세종 7년)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개의 홍예문(虹霓門)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웠다. 목조건축의 양식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광화문 3개의 궐문 중 가운데 칸이 높고 크다. 이곳은 임금이 행차하는 문이며 천정에는 주작(朱雀)을 그려넣었다. 정면 좌우에는 상상의 동물이자 영물인 해태상을 설치했다. 광화문 앞으로는 궐외각사인 이조(吏曹)·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형조(刑曹)·공조(工曹) 육조의 관아들이 늘어서 있었고 이를 육조거리라고 불렀다.
한일병합 후 1927년 조선총독부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에 이전시켰고, 설상가상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68년에 전통적인 광화문의 모습을 상실한 채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그나마 도로확장을 위해 위치도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2006년 12월부터 광화문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전통적인 옛 모습을 찾기 시작했으며 2010년 8월에 완공되었다.
<흥례문>
창건된 것은 1395년(조선 태조 4)으로, 원래 이름은 '예(禮)를 널리 편다'는 뜻의 홍례문(弘禮門)이다.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이 중건하면서 청(淸) 건륭제(乾隆帝)의 이름인 홍력(弘歷)에서 홍(弘)자를 피하기 위해 흥례문으로 고쳤다고 한다.
그러다 1910년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주변이 훼손되기 시작하였고,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변 행각(行閣)이 모두 파괴되었다.
광화문(光化門)과 근정문(勤政門) 사이에 있는 경복궁의 중문(中門)으로, 2층 목조건물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주변 행각과 유화문(維和門)·기별청(奇別廳)·영제교(永濟橋)·어도(御道:임금이 드나들던 길)·금천(禁川:궁궐 안의 개천으로 御溝로 부른다) 등과 함께 복원되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을 때 원래의 지반보다 1.5m 높게 지었기 때문에 복원 때는 경복궁의 본래 모습대로 1.5m의 땅을 파내고 근정문과 같은 높이로 하였다.
<근정문>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 4년인 1395년에 지어진 건물이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 중창(重創)되었다.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근정전의 대문으로 가치가 평가되어,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근정문은 근정전 앞 금천교(錦川橋) 건너편에 있는 문으로서 정면 5칸, 측면 2칸의 중층(重層)이며,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삼출목(內三出目)의 다포집 우진각지붕이다. 3단의 기단위에 세워져 있으며 둥글게 다듬은 초석위에 기둥을 세웠다. 정면에는 계단에는 봉황 2마리가 새겨진 답도를 깔았고 양쪽으로 서수 2마리가 놓여있다. 계단의 폭마다 당초문을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근정문 행각은 경복궁이 창건되던 초기에는 단랑형 행각이었다가 고종 때 경복궁이 중창되면서 복랑형(複廊型:이중기둥)으로 확장되었다. 남행각(南行閣)의 동랑협문(東廊夾門)을 일화문(日華門), 서협문을 월화문이라 하고, 동서 행각의 동루를 융문루(隆文樓), 서루를 융무루(隆武樓)라 한다. 행각의 진주초석(陣柱礎石)은 원초석(圓礎石)이고, 중앙의 주초석은 방형초석이며, 가구(架構)는 1고주(一高柱)·5량가구(五樑架構)·단익공(單翼工) 양식이다. 근정전 남행각은 근정문 좌우로 펼쳐져 있으며 각 15칸이다. 행랑의 벽체에는 빗살창을 내었다. 동행각와 서행각은 각각 42칸이며 바깥쪽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은 둥근형으로 다듬은 돌이고 행랑의 안쪽에 있는 기둥은 네모난 돌로 다듬었다. 벽체에는 창을 내었는데 정자살창으로 만들었다.
<근정전>
● 내용
경복궁(景福宮)의 근정문(勤政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중층 우진각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1395년(태조 4)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함께 세워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지어졌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바로 앞 남쪽에 위치하여 정전으로 향하는 주출입문의 구실을 하였으며, 행각(行閣)은 문의 좌우에서 직각으로 꺾여 정전 건물을 장방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이 문의 남쪽에는 금천교(錦川橋), 홍례문(弘禮門), 그리고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光化門)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었다.
조선 후기에 중건되면서 창건 당시의 위치를 그대로 지켰으나 행각의 규모, 부출입구의 위치 등이 약간 달라졌다. 석조기단을 낮게 꾸미고 여기에 세 벌의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기단 위에 원형의 잘 다듬은 주춧돌을 놓았다.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기둥머리에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외이출목·내삼출목의 공포를 짰다.
포작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각각 3구씩 올려놓았으며 기둥머리에는 안초공(按草工: 기둥머리에 끼워 상부의 주심포를 받드는 부재)을 새겼다. 쇠서의 날카로운 곡선, 내부살미의 운궁수법 등에서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을 볼 수 있다. 지붕의 각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추녀마루에 잡상(雜像)·선인(仙人)·용두(龍頭)를 두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 매머리모양의 장식)를 놓았다.
행각은 창건 때는 단랑(單廊)이었던 것을 중건하면서 복랑(複廊)으로 꾸몄으며, 창건 때 남쪽 행랑 양끝에 있던 일화문(日華門)·월화문(月華門)도 중건하면서 근정문의 바로 좌우에 잇대어 설치하였다. 낮은 기단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는 간결한 초익공(初翼工)을 짰다.
내부의 가구(架構)는 5량(五樑)집이며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이다. 외부 벽체는 하부를 사고석쌓기로 하고, 상부에는 회벽 중앙에 빗살이 있는 창을 대었는데 창의 형태는 장방형의 모서리를 사선으로 처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동쪽과 서쪽 회랑의 앞에서 3분의 1 정도 되는 위치에 각각 돌출한 융문루(隆文樓)와 융무루(隆武樓)라는 누각이 있다.
● 의의와 평가
조선시대 궁궐 정전의 남문 중 유일하게 중층 지붕의 건물이며, 행각도 다른 건물과 달리 복랑으로 구성되어 정궁으로서의 위엄을 살린 점이 두드러져 궁궐 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사정전>
1395년 태조 때 경복궁이 창건되면서 건립되었고 '사정(思政)'이라는 편전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이곳은 경복궁의 편전(便殿)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펼치던 곳이었다. 정전인 근정전 바로 뒷편에 위치하며 사이에 사정문(思政門)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嚮五門)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건립당시에는 좌측에 가을과 겨울이면 이용하는 천추전과 우측에는 봄에 이용하는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어 쉽게 건너갈 수 있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복궁 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다시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태조 때 건립된 형태와는 달리 좌우 천추전과 만춘전이 서로 행랑으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전각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장대석으로 두른 기단을 3단으로 쌓았고 그 위에 전각을 세웠다. 사정문(思政門)을 들어서서 마당보다 약간 높게 원주(圓柱)를 세웠으며 4면의 기둥 사이는 토벽(土壁)이 하나도 없이 사분합(四分閤)의 광창(光窓)과 문만으로 짰다.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공포(拱包)로 짜여져 있고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였으며, 망새 ·용두(龍頭) ·잡상(雜像)을 배열하였다.
내부에는 어좌두었고 황금색 용상으로 장식되었으며 어좌 뒤로 일월곤륜도 병풍을 배치했다. 어좌 위로는 두마리의 용이 붉은색 여의주를 중심으로 배치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천정은 우물천장으로 장식하였다.
<강녕전>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였으며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1553년(명종 8)에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고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고,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그 후 1920년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에 창덕궁(昌德宮)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內殿)이 불타버리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을 다시 짓기위해 1920년에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강녕전을 다시 지었으며 그외 12개 전각이 복원되었다.
<교태전>
경복궁의 내전(內殿)이며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였으며 침전으로 사용한 전각(殿閣)이다. 1395년(태조 4)에 창건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건물 이름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은 오복(五福)의 하나로, 임금으로서 해야 할 이상적인 정치이념을 궁궐 건축에 반영한 유가(儒家)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강녕전의 동쪽 침전을 연생전(延生殿)이라고 지었고 서쪽 침전을 경성전(慶成殿)이라고 지었다. 강녕전은 임금의 높은 신분을 상징하기에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다.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웅장한 목조건축물이며 4단의 기단이 설치되고 가운데에는 월대를 설치하였다.
1553년(명종 8)에 경복궁에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고 없어진 것을 이듬해 중건하고, 다시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한 것을 1865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였다. 그 후 1920년까지 제자리에 있었으나, 1917년에 창덕궁(昌德宮)에 큰 화재가 일어나 내전(內殿)이 불타버리자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을 다시 짓기위해 1920년에 강녕전을 헐어버리고 일부는 내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강녕전을 다시 지었으며 그외 12개 전각이 복원되었다.
<자경전>
자경전은 경복궁의 침전이며 대왕대비가 거처하였던 대비전이다.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되었다.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88년(고종 25년)에 중건되었다. 이 곳은 익종(翼宗:追尊王)의 비이며 고종의 양모가 된 신정왕후(神貞王后)가 거처하던 곳이다. 자경전(慈慶殿)이라는 명칭은 1777년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덕궁에 자경당(慈慶堂)을 건립하면서 유래된 것이다. 헌종(憲宗)의 생모로 철종이 죽은 뒤 고종에게 대통을 잇게 하고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가능하게 하여, 조대비(趙大妃)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신정왕후를 위하여 지은 것이다.
자경전과 여기에 붙어 있는 청연루(淸燕樓)와 협경당(協慶堂), 그리고 자경전 뒷편으로 복안당, 맞은편의 만세문, 행각(行閣)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경전 좌측 담장은 꽃담으로 장식하였고 뒷마당에는 십장생이 새겨진 굴뚝이 유명하다. 자경전은 정면 10칸, 측면 4칸, 단층팔작 기와지붕, 익공(翼工)집. 장대석 댓돌 위에 사다리꼴의 높은 초석을 놓고 모기둥[方柱]을 세워서, 2익공(二翼工)의 공포를 짜고 겹처마를 들인 소박한 건물이다. 청연루는 사각형 석주를 세우고 누마루를 깐 팔작집이다. 협경당은 정면 중앙 3칸 · 상단석(上端石) 위에 모기둥을 세우고 2익공의 공포를 짰다. 만세문은 일각문으로, 2칸 판문을 달았다. 행각은 무익공(無翼工)에 3량가구(三樑架構)의 홑처마를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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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1985년 1월 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다시 지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石橋)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경회루는 중루(重樓), 팔작지붕의 2익공(二翼工) 집으로, 누마루를 받는 48개의 높직한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외진주(外陣柱)는 방형석주(方形石柱)이고 내진주(內陣柱)는 원형석주(圓形石柱)이다. 기둥 둘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졌는데 그 체감률이 경쾌하여 조화적이다. 이 석주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중루를 만들었는데, 마루 밑은 우물천장을 하여 단청을 하였고, 위쪽 마루는 외곽 퇴간부분이 가장 낮고, 그 다음 고주(高柱)와 내고주(內高柱) 사이가 1단 높으며, 내고주 안의 깊은 오간(奧間)이 또 1단 높게 만들어졌다. 이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연회를 베풀 때 품계(品階)대로 앉는 자리 구분이다.
고주와 내고주 사이에 하방을 돌리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서 문을 내리면 방이 되게 되어 있다. 마루 끝 바깥 기둥에 낙양각이 장식되고 기둥 밖으로 계자난간(鷄子欄干)이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고, 이 난간은 시각적(視覺的)으로 높은 기둥을 짧게 보이도록 끊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지붕이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가 설치되었고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이 설치되었다.
용마루를 높여 웅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지붕의 물매가 급하고, 측면 지붕에는 큰 합각의 삼각형이 생겼는데 건물 평면이 커서 시각적으로 조화되어 있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각은 화려한 단청 그림자가 연못 속에 드리워지면 그 영상이 또한 매우 아름답다.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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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
궁궐 내에는 왕세자의 궁인 동궁(東宮)을 마련하여 세자와 세자빈을 거처하게 한다. 궐내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전, 편전, 침전의 전각들을 갖추어 작은 궁궐과 같은 모습을 이룬다
https://youtu.be/1u7QREb_1p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