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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
초기불교의 열반이란?
☞ 열반의 사전적 의미는 nibban의 음역, 번뇌의 불을 불어 끈 상태를 열반이라 한다.
열반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열반과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으로 두 가지가 있으며 서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이번에는 초기불교의 열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열반에 대한 위상
초기불교에서의 열반이라는 단어가 차지하고 있는 힘의 무게는 가히 절대적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까야 안에 열반을 초기불교 최고의 경지라고 표현하는 대목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며 그 한 예로 열반의 절대적 경지를 설명한 맛지마니까야 근본법문경을 예를 들고자 합니다. (M.N. Ⅰ. 뿌리에 대한 법문 경(근본법문의 경) )
“무지하며 성스런 법으로 인도되지 않으며 바른 사람들을 친견하지 않으며 바른 사람이 법을 모르며 바른 사람의 법에서 인도되지 않은 자는 땅을 땅이라고 생각한다. 땅을 땅이라고 생각한 뒤에 땅을 나라고 사유하고 땅에 내가 있다고 사유하고 나를 땅이라고 사유하고 땅을 나의 것이라고 사유한다. 그리하여 땅을 기뻐한다. 왜냐하면 땅에 대해 완전히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나는 말한다.”
맛지마니까야 1권 뿌리에 대한 법문경에는 땅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24가지 주제들을 나열함으로 제일 마지막에 제시되는 열반이 앞에 제시된 그 어떤 것들보다 높은 위상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여기에서 땅, 물, 불, 바람은 유물론자들의 궁극적 대상이라면 빠자빠띠와 브라흐마를 유일신의 브라흐만의 궁극적인 실체로 보았던 주제들입니다.
2. 번뇌소멸이라는 심리적 측면
초기불교에서 모든 오염원을 소멸하여 청정하게 되었을 때를 일러 해탈이라 하고, 그로 인해 더이상 생사를 거듭하지 않는 즉 윤회를 하지 않게 되었을 때를 일러 열반이라고 한다. 우리가 촛불을 불어서 불을 끄듯,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통의 원인은 탐, 진, 치를 수행의 과정을 거쳐 완전히 제거(滅)한 상태를 열반이라고 합니다.
“비구여, 나는 순서를 지키며 점진적으로 여러 행의 소멸한다고 설한다. 제 1선을 구족한 자에게는 말(vaca)이 소멸하고 제2선을 구족한 자에게는 심사가 멸하고 제3선을 구족한 자에게는 희가 멸하고 제4선을 구족한 자에게는 출입식이 멸하고 공무변처를 구족한 자에게는 색상이 소멸하고... 이어 공무변처의 상이 소멸하고.... 이어 식무변처의 상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구족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상이 멸하고 상수멸을 구족한 자에게는 상과 수가 소멸하고, 번뇌가 다한 비구들에게는 탐착과 진에와 치암이 소멸한다.”
3. 무여, 유여 열반
번뇌, 갈애, 탐진치를 멸했다라는 말은 정서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든 객관적 설명을 하기에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도라는 것이, 열반, 해탈이라는 것이 언어로 표현하기에 한계가 있는 것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좀 더 객관적이고 물증적인 근거에 입각하여 해탈 내지는 열반을 설명해 낼 수 있을 때 유일신을 가진 자들을 만나게 되더라도 똑부러진 대화와 논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여열반과 유여열반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 측면의 접근이 가능하다. 하나는 남방상좌부 부파불교의 공식적 입장으로 아라한이 아직 살아있는 육신을 지니고 감수작용 등을 하고 있으면 유여열반이라고 하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많은 경전 자료들이 암시하듯 아직 번뇌를 다하지 못해 이생에서 아라한이 되지 못한 수행자이지만 나중에 열반에 드는 것이 결정된 경우가 유여열반이라는 관점이다. 각각의 예시를 아래로 옮겨 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육신을 지니고 감수작용이 남아있다는 관점의 경전의 예)
“구들아, 무엇이 유여열반계인가? 비구들아, 여기 루가 다한 ... 아라한 비구가 있는데, 그에게 다섯 감관이 아직 단절되지 않아 머무르면서 마음에 맞거나 맞지 않은 것을 경험하고 즐거움과 괴로움을 감수한다. 그렇지만 탐착과 진에와 치암은 멸진되었다. 비구들이, 이를 이름하여 유여열반계라고 한다” --------- 이띠붓따까 –여시어경 중에서
아직 번뇌가 다하지 못해 이생에서는 아라한이 되지 못하지만 열반에 드는 것이 결정된 경우의 예)
“무엇이 유여열반계인가? 여기에 비구가 오하분결을 멸하여 저 세상에서 반열반하고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이를 이름하여 유여열반계라고 한다. 무엇이 무여열반계인가? 여기에 비구가 유루를 다하여 무루를 이루고 의해탈과 지혜해탈을 스스로 증득하여 스스로 노니니, 생사가 다하고 범행이 이미 섰고 다시는 유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낸다. 이를 이름하여 무여열반계라고 한다. ------------ 증일아함
대승불교의 보살행의 바탕을 연민심으로 본 이유는 ?
☞ 보살이란 bodhisatta의 음역으로 보리살다(菩提薩多)라고도 씀, 각유정. 깨달음의 성취를 바라는 사람. 깨달음의 완성에 노력하는 사람. 깨달음을 구해 수행하는 자 등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는 말로 스스로는 불도를 구하고, 타인을 구제하여 깨닫게 하는 자. 위를 향해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를 향해서는 중생을 교화하려는 사람. 향상적(向上的)으로는 자리(自利)의 행(行)으로서 깨달음(菩提, 道)을 체득하고, 향하적(向下的)으로는 이타(利他)의 행(行)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자라고 합니다.
연민심은 탐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중생들의 고통을 보며 도와주고 싶은 마음을 연민심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연민심을 가지기 위한 전제 조건이 오온에 대한 공성을 자각해야 하는데, 연민심을 가진자가 공성을 자각하지 못하며 중생들의 고통 받는 모습에 함몰되어 스스로 또한 고통속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고통, 괴로움의 종류와 문제에 대한 사유
1. 죄를 짓고 받는 과보로서의 고통:
죄를 선으로 뒤집는 방법
☞ 죄가 되었든, 복이 되었든 내가 한 행동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받게 되는 모든 것들을 일러 보라고 합니다. 업이라는 개념이 우리 육근이 바깥 경계인 육경들에 대하여 의지를 가지고 일으킨 의지적 행동을 업이라고 할 때, 그것이 원인이 되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결과를 보라고 합니다. 이 업과 보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발생한다고 하여 업인과보라고도 합니다.
한번 엎어진 물은 주어 담을 수 없는 법이듯,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업은 좋고 나쁘고의 차원을 떠나 어찌 되었든 해결해야 될 하나의 숙제 같은 개념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것을 인지하고, 마음 깊이 참회의 과정이 있다면 그때서부터 마음과 행동의 변화는 일어나게 되고, 그것이 점진적으로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켜 생긴 선한 영향력으로 지난 업에 대한 보를 상쇄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아에 아무것도 없었던 제로의 과정을 이루어 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죄를 선으로 뒤집는 방법은 내가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결과든 피하지 말고 그대로 감내하면서 받아 낼 마음가짐을 가지고, 참회의 마음과 또 다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바른 생각으로 봉사, 기부, 그리고 맡은 자리의 역할을 충실히 해낼 때 화가 복이 되는 것이라 사유하여 봅니다.
다음 생에서 가능하다는 이유
☞ 양무제는 자신의 죽은 아내 치씨의 천도를 위해 도력 높은 여러 스님들을 모시고 기도와 자비도량참법이라는 책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책을 보게 되면 전생에 한 행동으로 이번 생에 받게 되는 과보들이 많은 예로 적시되어 있습니다. 보통 대개의 경우 전생에 무지와 탐, 진, 치의 욕심에 의해 저지른 행동에 대한 과보로 이번 생에 보기 흉찍한 괴물의 모습이나,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꺼리는 외모나 병을 얻게 된다든 내용이 많습니다. 지난 생의 잘못이든 아니든 이번 생에서 불편한 외모를 가졌다라고 하는 것은 크나 큰 외부적인 힘(성형)을 가하지 않고서는 그 변화가 어려운 것임을 볼 때, 설령 성형의 기술이 좋아 그것을 실행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완전해지기는 어려운 점도 있기에 이번 생 말고 다음 생에서 가능하다라고 하지 않나 싶습니다.
2. 양심을 지키며 진실하게 살기 위해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
☞ 내부고발자, 자기가 속한 단체의 비리나 모순등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사회나 외부에 까발리면서 그 실상과 민낯을 알리는 사람을 일러서 하는 말입니다. 한 개인이 거대한 집단과 대립의 과정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찌 되었든 힘겨운 싸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에는 이러한 종류의 문제들이 다반사로 발생합니다. 그때마다 마음에서 울리는 소리와 외부에 하는 나의 행동들이 표리부동하게 될 때 내적갈등의 고통은 온전히 본인의 몫이 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된 후부터는 하지 않아도 찝찝하고 해도 찝찝할 것 같으면 그것이 선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게 물길을 돌릴 수 있는 요령 내지 힘을 갖추는 것이 수행하는 자의 목적이라고 사유하여 봅니다.
이번 생의 말년이나 다음 생에서나 나타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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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지키키 위한 예를 세 가지 이상 들어 보세요
☞ 1. 탐이 나는 경계를 접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온당히 나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인가를 사유하여 봅니다. 가져서 목에 걸리는 것이라면 그냥 뱉겠습니다.
2. 회사 물건을 내것처럼 사용하는지 체크하기.
3. 알아차리는 이것이 늘 살아있나, 깨어있나 수시로 체크하기
3. 무상한 대상에 집착하지만 그 대상이 변함으로 받게 되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고통:
☞ 불교의 가르침인 삼법인은 무상,고,무아를 말합니다.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나라고 붙잡을 만한 것이 그 어디에도 없기에 무언가를 부여잡고 집착을 하게 될 때 그때서부터 괴로움은 발생된다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느끼는 존재, 이것이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전제가 됩니다. 하나는 상일성(常一性)이고 다른 하나는 주재성(主宰性)입니다. 상일성이란 한 가지 모습으로 영원할 것을 전제할 수 있을 때라야만이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며, 주재성이란 남은 내 마음대로 못해도 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지 않는 것이 어찌 나일 수 있겠습니까. 잘 못 보아도 한참 잘못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부수적 결과물처럼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상한 존재들에 대한 집착을 모두 소멸시켜야 벗어날 수 있다
무상하지 않은 것은?
☞ 세상에 모든 것은 다 변하게 되어 있으며 결국 성주괴공이나 이합집산등의 과정을 거쳐 처음과는 다른 모습으로 어떤 식으로든 변화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수화풍의 결합으로 생긴 물질적인 것들의 모든 특징입니다. 그러한 법칙과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무상하지 않는 것을 찾는 길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과는 반대방향입니다. 범부의 삶이 아집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서 살아가며 편안함을 얻는 방향이라면, 수행자의 삶은 그 아집이라는 것의 유지 존속이 아닌 소멸과 없앰의 과정을 거치며 편안함을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수행자의 최고 지향점은 열반이 무상하지 않는 것이라고 사유하여 봅니다.
고통의 원인 알기: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해 마음수련하기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 우리의 삶이 고통덩어리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범부들은 알지 못하고 집착하고 그 결과로 또 윤회하고 또 집착하는 돌고 도는 삶을 계속 사는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이며,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마음수련(수행)의 결과는?
☞ 부처님이 제시한 가르침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여 변하는 것들에 맞추어 유기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세파에 대한 부침도 덜하고, 또 내 의지라는 것의 힘을 써볼 수도 있게 됩니다. 무엇이 번뇌이고, 무엇이 욕망인지 모르던 것들을 수행이라는 것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직시하게 되고, 구분할 수 있게 되며, 또 그것들이 내 삶에 어떻게 작용하고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도 보게 됩니다. 아직 깊은 수행의 단계에 이르지 못해 그 깊은 측면을 뭐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을 살아가는데 훨씬 수월하고 힘이 덜 드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 수행방법의 순서를 교재를 보고 쓰고 사유해 보세요
☞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수행방법은 예비수행 5단계와 조도수행 37조도품 그리고 본수행인 9차제정으로 그 순서를 보고자 합니다.
조도수행 5단계
계본방호(戒本防護) : 앙굿따라니까야 4권 21품 에 몸과 입을 단속하여 큰 악도 짓지 말고, 작은 악도 짓지 말라.
감관방호(感官防護) : 앙굿따라니까야 1권 7품에 육근이 육경들에 대해서 벌어질 수 있는 것들을 집착을 방호하라.
정념정지(正念正知) : 육경쪽으로 향하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 육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되새김하라.
소욕지족(小欲知足) : 그 제자는 몸을 가릴 만한 법의와 배를 채울 만한 발우음식으로 만족한다. 음식이든 의복이든 적게 가지고 만족할 줄 알아라.
원리오개(遠離五蓋) : 그 제자는 세상에서 욕심을 버리고 욕심을 제거한 마음으로 지내니, 욕심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 것이다. 화냄과 성냄을 버리어 화내지 않는 마음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과 존재하는 것을 이익케 하고 동정하며 지내니, 화냄과 성냄에서 마음을 깨끗이 한 것이다.
조도수행 37조도품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선정본수행 9단계
색계4선(초선, 이선, 삼선, 사선), 무색계4선(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
마음수행 즉 오염된 마음의 극복하는 단계[선정]을 정리해보자
초선
☞ 이생희락(離生喜樂)
애욕과 불선한 법을 떠나서 사색과 사려를 갖추고, 떠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내게 되오. 그는 떠암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넘쳐흐르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충만하게 하여, 온 몸 가운데 어떤 부분도 떠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에 부딪히지 않는 곳이란 없소. ---- 사문과경 중에서
이선
☞ 정생희락(定生喜樂)
대왕이여, 나아가 그 제자는 사색과 사려가 적정해져 안으로 깨끗하고, 마음이 하나로 되고, 사색과 사려가 없고, 집중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내게 되오. 집중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넘쳐 흐르게 하고 가득 차게 하고 충만하게 하여 온 몸 가운데 어떤 부분도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에 부딪히지 않는 곳이란 없소. 대왕이여, 이것 또한 참으로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과로서 이전의 결과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욱 고상한 것이오. ---- 사문과경 중에서
삼선
☞ 사념락주(捨念樂住)
대왕이여, 나아가 그 제자는 기쁨에 대한 탐착을 떠나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되새김과 알아냄을 갖추어 지내오. 그리하여 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게 되어, 담담히 바라보고 기억을 갖춤은 즐거운 삶이다. 라고 성자들이 말하는 세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내게 되오. 그는 기쁨에 대한 탐착을 떠난 즐거움으로 이 몸을 넘쳐 흐르게 하고 가득 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여 온 몸 가운데 어떤 부분도 기쁨에 대한 탐착을 떠난 즐거움에 부딪히지 않는 곳이란 없소.
대왕이여, 이것 또한 참으로 눈에 보이는 사물의 결과로서 이전의 결과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욱 고상한 것이오. ------------ 사문과경 중에서
사선
☞ 사념청정(捨念淸淨)
대왕이여, 나아가 그 제자는 즐거움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어, 또 안심과 근심도 이미 과거에 소멸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담담히 바라보면서도 기억을 갖추어서 청정한 네 번째 선정을 구족하여 지내게 되오. 그는 순결하고 순백한 마음으로 이 몸을 채우고 앉아 있소. 그리하여 온 몸 가운데 어떤 부분도 순결하고 순백한 마음에 부딪히지 않는 곳이란 없소.
대왕이여, 이것 또한 참으로 눈에 보이는 사문의 결과로서 이전의 결과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더욱 고상한 것이오. ---------- 사문과경 중에서
위의 선정의 단계 중 구체적으로 경험한 것을 써 보고 사유해 보세요
☞ 저의 수행주제는 들고나는 호흡을 관하는 아나빠나사띠의 수행을 합니다. 문지기가 성문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구별하여 도둑을 잡듯, 들고 나가는 호흡의 길이가 길고 짧음을 지켜보고 있으면 몸을 의식하던 의식, 느낌등이 점점 옅어지고 오로지 지켜보는 힘이 점점 더 커지게 됩니다. 이때 안면의 호흡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색을 띈 입자가 되어 눈앞에 응집을 하게되는데 집중된 호흡에서 색을 가진 에너지들 모여 덩어리를 이룹니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생긴 빛덩어리들과 호흡을 계속 주시하면 이 빛은 점점 밝아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것들로 변화하면서 또 다른 것을 수행자에게 부여합니다. 이 과정이 깊어지면 불쑥불쑥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던 생각이라는 것도 현저하게 줄어들고, 오로지 수행주제와 그 수행주제를 지켜보는 것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도 또한 집중력이 더 강해지면 수행주제와 그 수행주제를 지켜보던 것이 하나가 됩니다. 전자의 것이 이분이 되어 좀 거칠고 힘이드는 수행이라면 후자는 단일이 되어 거친느낌이 많이 사라지고 잔잔합니다.
수행 사유 : 많은 시간, 깊은 수행을 하지는 못합니다. 세속에서 이런 저런 역할들을 하면서 맡은 역할에 따라 시간을 나눠어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길고 짧고, 얇고 깊음을 떠나 잠깐의 오프시간을 갖게 될 때 지쳤던 일상으로부터 떨어짐도 가능하고, 또 반조도 가능하고, 또 지켜보고 살아낼 힘을 얻는 것도 가능해 집니다. 수행이란 우리는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 멈출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영원히 움직여야하고, 또 같이 어울려야 하는 것이 생명체의 특성이기에 지친 삶에서 잠깐의 휴식으로 힘을 얻고, 또 그 힘으로 다시 살아갈 원동력을 얻는 것 그것이 수행의 목적인 것 같습니다.
네 가지 선정[사선]보다 고차원적 경계를 정리해 보자
의성신 : 마음의 생각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몸이라는 뜻으로 오온에 의해 구성되는 몸이 아닌 의온(의온)에 의해서 구성되는 몸이다. 이 의성신은 불보살의 경우와 범부 중생의 경우가 다르다. 중생의 의성신은 잠자다 꿈속에 나타나는 몸처럼 정혈(精血)의 연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의성신이라 하지만 업력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사람이 죽은 다음, 다음 생의 몸을 받을때까지의 중유기간 곧 영가로 있는 상태도 의성신으로 본다. 그러나 불보살의 경우 중생을 교화 제도하기 위한 원력으로 의성신을 나타낸다고 한다. 특히 부처님의 경우는 여의불 혹은 수락불이라고 한다.
신족통 :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천이통 :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불가사의하고 자유 자재한 능력
타심통 : 남의 마음속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숙명통 :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자유 자재한 능력
천안통 : 세간 일체의 멀고 가까운 모든 고락의 모양과 갖가지 형과 색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있고, 자기와 남의 미래세에 관한 일을 내다볼 수 있는 신통한 능력.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의 수행적 속뜻을 써보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유해보세요
☞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란 부처님이 말씀하신 이 세상 모든 것은 무상하고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어서 괴롭다라고 하신 사성제입니다. 이 괴로움을 여의는 것이 수행이고, 그 과정속에서 괴로움의 종류와 움직임을 하나하나 보아 그것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그것이 사성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대처가 아닌가 사유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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