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7 재의예식다음 토 – 솔뫼 병막과 고린장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9ㄷ.10ㄴ).
예전에 합덕에서 솔뫼성지 사이에 ‘병막(病幕)’이 있었다.
병막(病幕)은 전염력이 강한 병자를 가족이나 마을로부터 격리시키는 움막이다.
‘늙는 것 자체가 병이다(Senectus ipsa est morbus)’(Fr. Terenzio Afro)라는 라틴어 속담이 있다.
그러니 ‘병막(病幕)’은 생로병사로 가는 여정에서 ‘고린장’ 역할도 겸했다.
‘고린장’은 고려장(高麗葬)에 대한 내포와 경기도 남부 사투리다.
흔히 고린장은 고려시대에 유래했다는 속설에 불과 하다고 한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는 극노인들에게, 조선시대에는 어린아이들에게 하대를 넘어 학대한 것은 사실이다.
고린장은 노망나거나 병든 늙은이를 오지 흙구덩이나 토굴에 산 채로 버려두었다가 죽으면 장사 지냈다는 풍습 또는 그렇게 죽은 이의 무덤을 뜻한다.
오늘날도 치매나 병든 노인을 찾아올 수 없는 벽지나 병막(요양원)에 유기(遷居正寢)하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까?
병막과 고린장은 전염병자나 늙은이의 외로운 무덤(임종실)이 되기 마련이다.
하필, 옛날에 솔뫼성지 입구에 병막과 고린장(?)이 있었을까?
솔뫼성지 인근 현재 지형을 보아서는 상상도 안 되지만, 1960년대 말까지 솔뫼는 지게나 지고 다니는 오지였다.
6·25 때 빨개벗은 몸에 개흙 칠하고 갯고랑에 숨어서 빨갱이를 피했다는 동민 김해관 씨의 전언에도 솔뫼 옛날 모습이 담겨 있다.
솔뫼 인근 옛 지명에 공동묘지와 6·25 때 집단학살 매장지로 뻗어들어 가는 은골(隱谷), 솔뫼 초입에 병막이 있던 비석굴(碑石谷), 솔뫼성지 뒤 우강초등학교 전후로 갯물 따라 배가 드나들던 상포(上浦)·중포(中浦)·하포(下浦) 등이 있다.
옛날 합덕과 솔뫼는 고린장과 병막으로 갈리고, 갯고랑으로 갈리고, 공동묘지로 갈린 땅이다.
솔뫼성지는 과거에 갯바람 쐬며 자라는 소나무가 산을 이루어(松山) 대낮에도 상포나 중포로 가기에 으스스한 곳이었다.
성 김대건(69世) 신부님의 숙부 김제철(68世)의 고손자였던 예산 신암면 계촌리(진말) 살던 김종록(72世, 베드로, 1917년생) 형제님은 “어릴 적 진말에 솔뫼성지 뒤편에 살던 고모 집에 가려면 솔뫼 솔밭길이 너무 무서워 담박질로 갔다.”라고 생전에 증언하였다.
이만하면 옛날 솔뫼성지 주변이 어땠는지를 알만 하다.
‘고린장과 병막’은 ‘사회적 찍어내기’를 상징한다.
조선시대 오형(五刑) 중에 멀리 내쫓아 내는 ‘유배형’이나 목숨을 거두는 ‘사형’은 사회적으로 철저히 찍어내는 형벌이었다.
형벌은 아니지만 나병이 천형(天刑)이라 불렸던 것처럼 ‘병막과 고린장’은 천형장(天刑場)이었다.
이웃에게 삿대질하거나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그 이웃을 찍어내어 병막에 처넣고 고린장시키는 것과 닮았다.
오늘의 솔뫼성지는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이사 58,9ㄷ.10ㄴ)라는 하느님 말씀의 은사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