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을 추구(追求)하다 - 사쿠의 별 아래서
내가 체험한, 소년 시절의
“또 한 사람의 나”를 비롯하여, 생과 사의 수수께끼 등,
이 세계에는 미지의 부분이 너무나도 많다.
조금 인생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의문을 갖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지 않고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습관이나 오랜 인습에 사로잡혀 타협하기 쉽다.
하지만 내 성격은, 어떠한 문제라도, 납득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의문에 대한 답을 추구하며 결코 싫증 낼 줄 모른다.
그것은 진실을 알고 싶다는 일념이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타인과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서로 대화한다.
그것이 만약 싸움으로 발전할 것 같으면,
일단 진정하여 감정의 부조화를 가라앉히고 나서 서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납득되는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강의 흐름을 보아도 그것은 알 수 있는 것이다.
물은 환경에 따라 스스로 진로를 정하여, 마침내는 큰 바다에 도달한다.
즉 <물은 담긴 그릇의 모양과 같은 형태>라고 하는 것이다.
도시를 흘러 더럽게 되어도, 또다시 깨끗한 모습으로 돌아오며,
열이나 압력의 인연으로
고체나 액체, 또 기체로 되는 변화를 일으켜도, 물은 본성을 잃지 않는다.
우리들도, 이와 같은 마음의 바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과신이나 자기 상실을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올라갔지만
요령을 터득하지 않은 공부는, 그 효과를 나타낼 수 없었다.
하지만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시작한 검도는, 내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검도의 깊은 뜻은, 기(氣) 검(劍)체(體)의 일치이며,
어느 하나가 부족하여도, 정도가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검의 기술이 탁월하여도, 체력이 동반하지 않거나
기력(氣力), 마음이 부조화로워서는 미친 사람에게 칼을 쥐어주는 꼴이 될 것이다.
기술은 연마함으로써 몸에 익힐 수 있다.
동시에 훈련은 체력을 만들고, 풍요로운 마음도 만들어간다.
마음이 조화되어 가면 검(劍)에 의해 다른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
검(劍)은 몸을 지키기 위한 도(道)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싸움으로 감정적인 마음이 생겼을 때는,
그것은 이미 정도를 이탈한 미치광이 검법으로 전락하게 된다.
자만의 마음은, 다름 아닌 스스로의 올바른 자세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상대의 독기를 먹고 있는 것으로
큰 반작용이 되어 분노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게 된다.
스스로 인간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동물이라면 모를까 만물의 영장, 신의 자식인 인간이, 그 자각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검의 수업을 연(緣)으로 해서,
심신의 정화를 꾀하는 것이 (무술을 배우는) 본래의 모습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스포츠의 대결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도(道)를 벗어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쟁이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아욕 덩어리가 서로 부딪치는 것으로, 인간 본래의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동물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진화에의 체험이며,
만물의 영장인 인류는, 본래 대화라고 하는 조화된 법칙을 알고 있는 존재들이다.
각 나라 교육의 편향이나 사상적인 자기 보존의 사고방식이,
지구 상의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전후(戰後) 훨씬 뒤의 일이었다.
지나사변이 국민총동원으로 일본인을 규제하면서, 일본은 아수라의 양상으로 돌입한 것이다.
천황의 이름 아래 <일억 총화단결>로.
당시의 우리들 소년의 마음은, 국가를 위해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순진한 마음은 교육을 통해 잘못된 세뇌를 받은 것이었다.
이름하여 대화혼(大和魂).
이름하여
<죽음은 기러기 털보다도 가볍게, 의는 산보다도 무겁게 각오하자>
즉 국가를 위해서는,
가장 가벼운 기러기 털처럼 죽음으로 보답하며
국가에 대한 의리는 산보다도 무거운 것이다,라고 가르친 사상이었다.
군국 일본을 더럽히는 자는, 단호히 타파한다고 하는 사회정세 하에서,
나 또한, 중학을 중퇴하여 군대에 지원하게 되었다.
군대생활은 규율이 엄격한 상명하복의 생활이었다.
선배들의 기합이 들어간 교육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수학이나 물리가 정규과목이었다.
상급생 누구나, 눈에 핏발이 설 정도의 군기를 몸에 익혀갔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안 했던 나도, 시간이 지날수록 다소 요령을 익혀,
학문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극미(極微)의 세계를 배움에 따라
마이크로(Micro)에서 매크로(Macro)가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시대의 편향된 교육사상도, 거의 저항 없이 내 마음속에 받아들여져 갔다.
그것은, 부모를 위해 천황을 위해, 국가를 위해 라고 하는 유교적 사상으로
오로지 충효라고 하는,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마차를 끄는 말이 달리는 것과 비슷한 교육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가난한 아이에게는, 나라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고마운 환경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상급학교로 진학함에 따라, 기초학문의 수준은, 비행술에 필요한 것으로 바뀌어갔다.
전기공학, 자기학(磁氣學) 등 전혀 생소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집단생활을 통해
제멋대로였던 마음이 조화되고 인간적으로 진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환경에서 성장해 온 탓인지, 빈틈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져 간 것이다.
선배들에게 기합을 받게 됨에 따라, 집단의식도 마음속에 축적되어갔다.
마침내 실전훈련을 위하여, 난생처음으로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전쟁의 불길은 확대되고, 패전의 낌새는 하루가 다르게 농후해져,
고위간부와 지도층 사이에는 불안의 어두운 구름이 퍼져갔다.
내가 군대에서 얻은 것은,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희생적 정신과 행동이었다.
하지만 특정 국가의식에 지배된, 올바른 중도를 벗어난 사상에 의한 희생이,
인생의 목적이고 사명일 리가 없다.
그것은 누구에게 있어도, 진실한 자신을 살펴보기 위한 위대한 체험이라고 해야 할 것이었다.
같은 인간끼리, 사상의 차이나 민족적인 감정에 의해,
피로 피를 씻는 사투를 전개하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동물보다 못한 소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희생이 되는 것은, 약한 대중이라고 하는 이름의 인간군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오랜 역사는, 전쟁과 평화의 반복이었다.
인류가 신의 자식이라는 자각을 잊고 욕망의 포로가 되었을 때부터
사회의 혼란이 생겨 투쟁과 파괴를 반복해 왔지만
지금이야말로 인류는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처럼 문명이 발달해 버리면,
인간의 지혜가 만들어 낸 원자 에너지나 공해 등으로 인해,
스스로가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해 버린다고 하는 것을,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이 다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사택(社宅)의 방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과거의 추억을 통해, 인간이 마음을 잃어버린 대가가
얼마나 막대한 희생을 지불했는가, 하고 생각했을 때,
맹목적인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변적인 마음의 존엄을 알기 위한 도(道)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사색(思索)에의 초조함이,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었다.
유월의 신슈는, 밤이 되면 도쿄와는 달리 추위가 몸속까지 스며든다.
하루 일의 피곤함을 잊고, 조용히 사고하는 인생문제는 즐거운 것이다.
잠이 안 와 밖으로 나왔더니
거기에는 맑은 공기와 다이아몬드를 박아놓은 듯한 별이 무수히 빛나는 하늘이 있었다.
대자연의 신비... 태양, 달, 지구...
우리들도 지구라고 하는 행성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광대한 우주 속에, 나는 지금 살고 있다...
헤아릴 수 없는 별 중에도, 우리들과 똑같은 생물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상으로 조화된 고등동물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주에서 보면 아주 작은 하나의 점에 불과한 지구...
이 안에 있는 인류는 아메바보다 작은 생물이다.
그것이 투쟁본능이라는 얼마 되지도 않는 표면적인 지혜로,
자기 보존을 위한 욕망의 포로가 되어 있다는 것이 정말로 우매하게 느껴진다.
이 우주에 전개되고 있는 별 중에는,
아직 지구에 빛조차 도달하지 않는 무수한 천체가 있는 것이다.
불확정한 우리의 눈이나 귀 등의 오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들에게는, 극미의 세계나 극대의 세계를 바르게 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 점을 잊고서 작은 지구적인 판단으로 사물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쿠 고원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이, 고대에 살고 있었던 거대한 파충류의 검은 등처럼 보인다.
마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잠들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혹은 지금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멀리 보이던 도시의 네온도 지금은 완전히 꺼져있다.
정숙한 자연과 먼 논에서 울고 있는 개구리의 노래가 조화되어
내 마음은 대자연의 신비 속에 용해되어 가는 것 같다.
살아있는 자연은, 우리들의 마음에 진정한 여유를 준다.
하지만 이것은, 완전히 더럽혀진 도회지,
소음과밀의 도회지에 생활하고 있는 자의 노스탤지어 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연의 혜택 받은 환경을 버리고 도회지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만족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각각의 사람에게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스스로의 체험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마음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것일까?
고통도 쾌락도, 인생 항로에 있어서 위대한 학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방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사흘간의 모내기는 끝나고, 나에게는 다시 혼잡한 도쿄의 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으로 또, 가을의 수확까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없겠지,
가을에는, 많은 동지들과 함께 “신리”의 연구회를 겸해
심신을 단련하러 사쿠에 올 것을 생각하며, 귀경길에 올랐다.
열차는, 녹색으로 둘러싸인 산들과 논의 푸른 물결을 좌우로 하며
우에노를 향해 신슈의 길을 오로지 달리고 있다.
나는 또 차창에서 생각하고 있었다 ㅡㅡ,
대자연 속에 살고 있는 인류,
언제까지나 아름다운 자연을,
공해로부터 지키고 싶다ㅡㅡ
보다 많은 이들이,
마음을 중심으로 한 평화경(平和境)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ㅡㅡ고,
마음의 발견(현 증편) - 다카하시 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