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3章 부도상옹(不到商翁)의 세 가지 보물 ① 돌연 나타난 금무외! 그 때문에 주흥은 또다시 급변했다. 여하튼 금무외의 언동은 좌중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무희들에게 흑진주를 던진 데 이어, 열 잔의 모이주(矛台酒)를 쉬지 않고 마셔 댔다. 이어 이백(李伯)의 장진주(將進酒)를 취한 목소리로 읊어 갔다. 그대여, 보게나(君不見).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것을(黃河之水天上來). 그 거센 물살은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네(奔流到海不復回). 잠선배여, 단구군이여(岑夫子丹邱生). 술을 드세나. 잔을 놓아서는 안 되네(進酒君莫停). 내 그대들을 위해 한 곡 노래하리니(與君歌一曲), 그대들은 나를 위해 귀 기울여 들어 주게나(請君爲我傾耳聽). 뿐이랴? 이어 그는 무희들 속을 뛰어 들어가 너울너울 춤을 추어 대기 시작했다. 그의 춤은 그의 생김새와 너무 흡사한 원공무(猿公舞)였다. 모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되 그들은 금무외의 영향력을 익히 아는지라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도 동조하지 않되 오직 한 사람만은 달랐다. 금무외가 무희들과 원공무를 추어 댈 때, 낭랑한 목야성의 웃음소리가 연신 들려 왔다. "프하하핫… 금 장로께서는 정말 춤을 잘 추시는군요. 나는 금 장로께 그런 솜씨가 있다는 것은 미처 몰랐소이다. 프하하핫……!" 더 이상은 볼 수 없는지 장로들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후, 장로들은 목불인견의 희극을 보다 못한 나머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새벽녘, 여명(黎明)의 으스름한 햇살이 연회석장을 비출 때이다. 넓디넓은 연회석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단둘에 불과했다. 목야성, 그리고 금무외였다. 노소 이 인(人)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한 시진 전부터 시합을 하고 있었다. 시합의 종류는 술 마시기였다. 술병은 수없이 많고 마시는 입은 두 개이되, 술잔은 오직 하나였다. 마시는 법은 지극히 간단하다. 잔 가득한 술을 단숨에 비운 다음에, 빈 잔에 독하디독한 모태주를 가득 부어 상대에게 권한다. 벌써 백 잔 넘게 마셨기에 두 사람 모두 얼굴빛이 잘 익은 대추 빛깔처럼 붉어졌다. "이제 누우시는 게 어떻소, 소가주?" "후후… 진다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아서… 그나저나 금 장로께는 연세를 생각하시어 체념하시는 게 어떠하신지?" "크으… 좋은 술을 공짜로 마시는데 내 어찌 멈출 수 있겠나?" 금무외는 먼저 잔을 놓지는 않겠다는 자세였다. 목야성이 비록 자주 술을 접하지는 않았다 해도 태생이 호주가(好酒家)의 체질이기에 천 잔 술을 거듭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 금무외 또한 남해제일의 대주가(大酒家)로 소문난 처지. 두 사람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쉬지 않고 퍼마셨다. 그리고 십야(十夜)의 달이 다시 뜰 때까지 술좌석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문득 목야성은 술이 목젖까지 찰랑찰랑 차오름과 동시에 눈앞이 샛노랗게 물들어 옴을 느꼈다. 앞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혈관 가득한 건 피가 아니라, 술이다. 목야성은 혀가 마비됨을 느꼈다. 그러나 앉아 있는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드… 드시오." 그는 수전증을 일으키며 떨리는 손길로 잔을 내밀었다. "건네는 잔을 거부함은 소… 소인배나 할 바……." 금무외의 목소리 또한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변했다. 목야성은 잔을 내밀다 말고 아득한 나락의 현기증을 느꼈다. 그는 잔을 떨어뜨리며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쨍그랑-! 거의 동시이리라. 금무외 역시 손에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잔이 쥐어져 있기라도 하는 듯이 술을 마시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다 말고 그 역시 고개를 뒤로 제침과 더불어 스르르 뒤로 넘어졌다. 쿵-! 이로써 주전(酒戰)은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끝이 난 것인가? "세상에… 한두 살 철부지도 아니시거늘, 어찌 그리 몸을 험하게 굴리십니까요?" 공손예월은 뾰로퉁히 말하며 연자탕(蓮子蕩) 그릇을 내밀었다. 목야성은 두통이 심한 듯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은 채 연자탕 그릇을 건네 받았다. "금 장로는 기상하셨느냐?" "기상하시다 뿐인가요? 아침에 정관헌을 예방하시고, 정오경에는 백매당에서 가모님과 일다(一茶)를 나누셨지요." "끄응… 그렇다면 주전에서의 패장은 그가 아니라, 나로군." 목야성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연잔탕 그릇에 입술을 대었다. 그는 연자탕을 한 모금 마신 후에 공손예월을 바라봤다. "맛이 전과 다르군. 무엇을 넣었지?" "천년자패(千年紫貝)로 인해 맛이 꽤 쓸 겁니다요." "약고(藥庫)에 천년자패는 없다고 아는데?" "금무외 노인께서 세 개의 만년자패와 한 상자의 천년자패를 예물로 갖고 오셨습니다. 만년자패는 가주님께 드릴 약재로 쓰여질 것이고, 천년자패는 소가주님께……." "후후… 금무외 노인은 칠 년 간 악양에 오지 않았지. 하기에 모든 사람이 금무외 노인이 목가를 거역할 것이라 진단하였으되, 정작 목가에 진실로 우정과 충성을 보여 주는 사람은 금무외 노인이야." "그는 강호의 늙은 생강입니다요. 강호의 생강은 늙을수록 매운 법입니다. 하오니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마시어요." 공손예월은 목야성이 금무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다분히 걱정하는 눈치였다 "프핫핫핫… 많은 돈을 들여 연회를 준비했는데, 누구도 즐거워하지 않아 기분이 안 좋았었지. 하지만 그 노인은 달랐어." 목야성은 그렇게 말하며 연자탕을 한 방울 남김없이 비웠다. '모든 사람이 금무외 노인은 소리장도의 노효웅이라고 가까워 하기를 꺼려하거늘… 소가주님은 다른 위대한 장로님들은 평가 절하하시면서도 금무외 노인을 높이 평가하시다니……!' 공손예월이 알쏭달쏭해 할 때였다. "금 노인은 지금 어디 계시지?" "실로 주책 없고 무례한 분이십니다." "왜 그런 말을……?" "지난밤 마신 술의 주독(酒毒)을 푸신다며 오색신수로 목욕을 하고 계십니다. 목가의 금지로서 누구도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오색신수(五色神水)를 놀이터로 아시니……." 공손예월이 이마에 핏대를 올렸다. 그러나 목야성의 입에서는 대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핫… 오색신수는 벌근세수(伐筋洗髓)의 영천(靈泉)! 모든 강호인이 거기서 목욕을 하기 바라지. 하지만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강호인들은 감히 그러한 말을 입에 담지 못하지. 한데 금 노인이 거기서 목욕을 하시다니… 소문 이상으로 가식이 없는 분이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소가주께서 자기와 함께 목욕하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목욕을 마친 이후 바둑을 두고 싶으시다고……." 공손예월은 금무외를 주책없고 노망난 노괴물로 평가하고 있는 처지였다. 하기에 금무외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치를 떨곤 했다. 하긴 그는 강호의 정숙한 여인이 싫어할 그런 인물이다. 목야성은 공손예월이 금무외를 혐오하는 이유를 잘 안다. '그는 첩실(妾室) 스물다섯을 거느렸으며, 첩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되 그와 동침을 하는 여자가 무려 이백 명 가량 된다고… 영웅호색(英雄好色)이라되 그는 가히 초정력가이다. 그는 마음껏 상재(商材)를 발휘해 거금을 벌고, 그 돈으로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그런 사람이다. 강호인들은 그를 부러워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시기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목야성은 다분히 그가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때 다시 공손예월의 치 떨리는 음성이 들려 왔다. "그 귀한 오색신수에 그 천박한 늙은 몸뚱이를 담그고 때를 미는 생각만 하더라도 치가 떨립……." "흐음, 그러고 보니 목욕을 한 지 사흘이 넘었군. 가서 목욕이나 해 볼까?" 목야성이 넉살 좋게 말했다. 그 바람에 말하던 공손예월은 아연해 한 나머지, 주먹 두 개가 쑥 들어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② 오색신수의 빛깔은 시각에 따라 바뀐다. 어떤 때에는 핏빛처럼 붉어지고, 또 어떤 때에는 금빛으로 반짝거린다. 어떤 때에는 무색 투명해지고, 한밤이면 취록색(翠綠色)으로 암울히 반짝거린다. 지금 오색신수의 빛은 영롱한 자색(紫色)을 띠고 있다. "자고로 남아란 물건이 좋아야 하는 법. 그러한 의미에서 소가주는 당당한 남아대장부라 할 수 있네그려." 두 사람! 금무외와 목야성은 지금 오색신수 안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금무외는 키가 작은지라 목야성의 늑골까지 차오르는 오색신수 속에서 겨우 목만 물 밖으로 드러낸 상태였다. "후후… 제가 늦게 당도하여 노야의 그것을 보지 못함이 유감이외다. 보았더라면 소생에게도 뭐라 평할 말이 있었을 텐데… 소생은 한가할 때마다 주역(周易)을 보는지라 천기(天機)를 약간 알지요." 목야성의 대답도 만만치 않다. "후후… 역경(易經)은 보나마나야. 진짜 신복학(神卜學)이란 서적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 얼굴과 발바닥에 관상(觀相)과 족상(足相)으로 기록되어 있지. 어디 소가주가 과연 영세제일거상(永世第一巨商)이 될 수 있을는지 관상이나 보아 줄까?" 금무외는 얼굴에도 누런 털이 가득하다. 하기에 그는 다분히 야만적이며 무지하게 보인다. 그는 본시 중원 출신이 아니다. 그의 눈빛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그가 흑색(黑色) 눈동자가 아니라 벽안(碧眼)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무외는 목야성의 관상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나빠!" "하하… 제 얼굴관이 나쁜가 보군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야. 세상의 온갖 악운(惡運)이며 살(煞)이 가득히 끼여 있어." 금무외는 진지하고 엄숙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서는 은은한 벽광이 강렬히 뿜어져 나왔다. "검에 맞을 천인살(天刃煞)이 끼여 있으며, 강호천지를 부평초처럼 떠돌아야만 하는 역마살(驛馬煞)이 가득하지. 그러나 천인살이며 역마살은 그리 지독하지는 않아. 마지막 살이야말로 재앙이야." "마지막 살이 어떠한 것이기에……?" "조심해야겠어!" "예?" "천하에 널린 게 하나 있지. 크크… 사내라면 의당 그것을 좋아하지. 나 또한 그것을 좋아하고! 하되 사내라면 그것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네. 천하에 널린 우물(尤物)들을……." "여… 여자 말입니까?" "후후… 소가주의 얼굴에는 도화살(桃花煞)이 흥건하군. 자네 아버지는 일생 한 여자, 자네 어머니만을 추구했지. 어떤 의미에서 자네 아버지는 졸장부라고도 말할 수 있지. 하지만 자네의 상은 다르네. 자넨 백 여자를 거느리고도 부족할 도화낭군(桃花郞君)의 관상을 가지고 있네. 물론 내가 갖고 있는 음마재앙(淫魔災殃)의 관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음마재앙의 상이오?" "하루라도 계집이 없이는 잠을 자지 못하는 불행한 병이 내게 있지. 노부가 여행을 하지 않는 건 그 때문이야. 그리고 구태여 여행을 하게 된다면 거대한 배를 이끌고 배 안 가득히 계집들을 태운 채 돌아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고. 프핫핫… 내가 어찌나 계집을 좋아하는지 하나뿐인 딸년이 날 색마로 취급하고 진저리를 치지만, 좋은 걸 어떡하겠나?" 금무외는 그렇게 말하다가 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목야성은 그가 잠시 물 속에 머리를 담갔다가 머리를 꺼내리라 기대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금무외는 수를 백 이상 세도록 머리를 쳐들지 않았다. 목야성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들어 그를 향해 다가섰다. 목야성은 그가 물 속에서 혼절이라도 한 게 아닌가 걱정하며 그를 향해 손을 뻗쳤다. 순간 금무외의 손이 그의 손을 떨쳐 냈다. 퍽-! "우욱!" 순간 목야성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믿기 힘들 정도로 강한 힘이다.' 목야성은 얼른 손목을 바라봤다. 그의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완연했다. 목야성은 손목에 벼락을 맞은 듯한 통증을 안은 채 금무외가 물 속에서 머리를 쳐들기를 기다렸다. 무려 두 시진이다. 금무외는 두 시진 내내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물 속에 머물렀다가 원기왕성한 표정 가운데 머리를 쳐들었다. "이제야 주독이 깨는군." "대단한 수공(手功)이외다." "후후… 그리 놀라운 건 없어. 내 딸년은 닷새 내내 물 속에서 머물 수 있지." "아……!" "난 본시 내공을 무시하지. 다만 내가조식법(內家調息法)을 터득할 경우, 정력이 좋아진다고 누군가 말했기에 하나의 조식법을 배운 것뿐이야." "정력이오?" "후후… 그걸 배우면 엄청나게 강해지지. 하룻밤에 스무 여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정도로!" 금무외는 오색신수로 몸 구석구석을 닦아 가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에는 약간의 가식도 없다. 실로 원색적이고 경박한 말의 연속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말만은 진솔되고 인간적으로 들리는 이유는 어찌 된 이유인지……. "그걸 배우고 싶겠지? 자네도 남아대장부니까?" "호기심이 동하는 건 사실입니다." "크크… 쉽게 가르쳐 줄 성질의 것이 못 돼. 그건 금가의 가전공부거든. 객쩍은 소리 그만하고 바둑이나 둘까?" 금무외의 바둑은 막배운 바둑이다. 기도(棋道)를 약간이라도 터득한 사람이라면 금무외의 바둑에 대해 단적으로 무시하고 둘 것이다. 목야성은 네 살 때 처음 바둑알을 쥐었다. 그는 열세 살 때 목가의 모든 기객(碁客)을 꺾었다. 그의 바둑 실력은 국수급(國手級)으로 평가되어 왔다. 하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줄창 악수를 연발할 뿐이고, 급기야 그는 완패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금무외는 바둑이 재미없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목야성을 바라보았다. "노부와 바둑 두는 게 재미없는가 보군." "후후… 머리를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이기나 지나 결과가 같은 바둑에 머리를 써서야 장사꾼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긴 그렇군. 그러하다면 내기를 걸까?" "내기 바둑이라면 생각이 달라지겠죠." "크크… 좋아. 내가 진짜 장사꾼의 심정을 이제 알겠군. 좋아, 다시 두지. 그리고 소가주가 이긴다면 내가 아끼는 세 가지 보물을 주겠네. 대신 소가주가 진다면… 크크… 목가가 경영하고 있는 천왕선단(天王船團)을 대해상가에 넘겨야 하네." "핫핫… 천왕상단이 한 달에 남겨 주는 이익은 은자 사십만 냥이고, 천왕상단 같은 상단(商團)을 만들고자 한다면 은자 이백 칠십만 냥이 들거늘… 바둑 한 판으로 그걸 독식하려 하시다니……." "어차피 내기 아닌가?" "좋습니다. 내기를 시작하죠." "그럼 판을 다시 벌이세." "후후… 그럴 필요 없으십니다. 지금 두는 바둑으로 승부를 내죠." "미쳤군. 이 형세에서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가?" "후후… 제 판단이 잘못된 것이라면 노야는 큰 이익을 얻는 게 아니십니까?" "좋아. 말인 즉 옳군." 금무외는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야성의 대마란 대마가 모조리 궁지에 몰린 상태의 바둑은 계속 두어지게 되었다. 금무외는 자신이 질 것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되 목야성이 일곱 수 두었을 때부터 사정은 달라졌다. 완전히 죽었다고 여겨졌던 목야성의 대마는 모조리 살아나는 활로(活路)를 만났고, 승승장구하던 금무외의 대마는 일거에 포위되어 필사하는 위기에 처해지고 말았다. 금무외는 어떻게든 상황을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되, 허사였다. 그는 무참히 졌다는 것을 느끼는 가운데 목야성을 바라봤다. "젠장, 날 덫에 빠뜨렸군." "후후후… 장사 하시는 분이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이치를 모르시진 않으실 텐데요." "끄응! 장계취계(將計就計)를 쓰는 게 자네 아버지를 능가하는군." 와르르-! 금무외는 혀를 내두르며 바둑판을 뒤집었다. 흰 돌 검은 돌이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다. 금무외는 씨근벌떡 화가 난 표정으로 목야성을 쏘아봤다. "내기는 내기이니, 약속대로 세 가지 보물을 주지. 그 중 첫 번째 보물은 유가밀종(瑜 密宗)의 정수인 다라패엽경(茶羅貝葉經)이야. 비급은 불태워졌고 구결(口訣)만 천하 이 인(人)의 뇌리에 암기되어 있지. 노부하고 노부의 딸년 소아(小娥)의 머리에! 자, 두 번 되풀이해서 암송할 테니… 외우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 소관은 아니야." 금무외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길고 난해한 경문(經文)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유가밀종(瑜 密宗), 범천다라패엽진결(梵天茶羅貝葉眞訣)! 그것은 대해상가의 호법진결(護法眞訣)이다. 금무외의 목을 자를 수는 있어도 그것을 훔쳐 배울 수는 없다. 누구도 꺾지 못할 것은 목가의 배짱과 금무외의 고집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금무외는 오직 한 사람 목비룡에게만 고개를 숙였던 사람이다. 그는 천자(天子)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옹고집의 소유자이다. 하되 그가 지금 목야성에게 대해상가의 창건무학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는 것이다. 이윽고 그는 세 번 암송을 끝내고 물끄러미 목야성을 바라봤다. "못 외웠기를 바라네." "유감입니다. 전 다 외웠습니다." 목야성은 빙그레 웃었다. 금무외도 묘하게 따라 웃는다. "킬킬… 그것은 행운이 아니라, 비극이야." "왜 그런 말씀을……?" "그걸 잘못 익히다간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리지. 내 키가 원래 사 척 삼 촌이었는 줄 아나?" "그… 그럼……?" "모두 주화입마의 결과이지. 크크… 나도 과거 한때에는 남해제일의 미남자로 불렸던 사람이야." 금무외가 본래부터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강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는 천축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에 걸렸었다. 그로 인해 근골이 오그라들고 피부에 금빛 털이 가득 돋아나는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여하튼 하나의 보물은 준 거야. 이제 두 번째 보물을 주지. 자, 받게." 금무외는 왼팔을 쳐들었다. 그의 팔목에는 팔찌 하나가 차여져 있다. 빛깔이 검고 광택이 없다. 그리 귀해 보이지 않는 쇠팔찌는 금무외의 왼쪽 손목에서 빠져 나와 목야성의 손목에 차여졌다. 순간이었다. "우욱!" 목야성의 얼굴은 한순간 무참히 일그러졌다. 금무외는 그런 목야성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후후… 꽤 아플 거야." "이… 이게 뭐길래 이리도 무겁습니까?" "심해한철(深海寒鐵) 가운데 가장 무겁다는 만년한철(萬年寒鐵)에다가 설화빈철(雪花殯鐵), 그리고 자금사(紫金絲). 크기는 작아도 무게가 가히 이백(二百) 근(斤), 장검 스무 자루의 무게이지." 금무외가 채워 준 것은 일컬어 패엽검환(貝葉劍環)이라는 물건이다. 그것은 이백 근 무게를 지니고 있다. 손목에 이백 근 무게를 매달고 있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다. 금무외는 그런 상태로 일 갑자(甲子) 이상을 살아왔다. 그것이 또한 금무외의 남 모르는 진실이다. "마지막 보물은 내 딸에게 있어." "딸이오?" "그래. 내 딸아이는 버르장머리가 없고 교만하기가 자네만 하지. 이름은 금소아(金小娥)라 하고! 나이는 이제 열여덟이야. 그 아이는 내가 목가의 태대장로 노릇을 하는 게 늘 불만이지." "아……!" "그 아이 성질대로 처리한다면, 당장 목가와 일대상전(一大商戰)을 벌이고자 할 걸세. 그러니 그 아이가 내 재산을 물려받는 날을 조심하게. 늙고 나약한 강호거상들과는 다른 애야. 독하고 영악스럽지. 백 사내가 못 당할 그런 여나찰(女羅刹)이란 말이야." "……." "세 번째 보물은 그 아이가 갖고 있으니, 삼 년 안에 그 아이를 찾아서 팔찌를 보여 주게. 그럼 그 아이가 알고 보물을 내줄 걸세. 크크크… 그나저나 육십사 년 만에 패엽검환을 벗으니, 홀가분하기 짝이 없군. 사실 최근 들어 그 자들이 늙고 질긴 모가지를 노리고 덤벼드는 통에 귀찮은 일의 연속이었는데……." "어떠한 자들이 감히 노야의 목숨을 노리는지……?" 목야성이 정색을 지었다. "나만 노리는 게 아냐." "……?" "자네 또한 노림의 대상이야. 아마도 조만간 그 자들을 만나게 될 걸세." "어떠한 세력을 말하시는 건지……?" "그 자들의 세력은 공전절후하지. 그 자들은 수십 년 간 강호의 암흑(暗黑)을 지배해 왔고, 수십 년 전부터 서서히 마각을 드러내어 하나의 방파로 정착을 시작했네. 자네가 대상황이 될 처지로서 그들에 대한 정보를 모른다면 몹시 유감스러운 일일세. 그들 건곤일척(乾坤一擲)을… 그리고 만악(萬惡)을 지배하고 있는 불사신마(不死神魔) 철붕비(鐵鵬飛)라는 대악마를……." "건곤일척… 철붕비……!" "크크… 알려 하지 말게. 깊이 알려 하다간 자네 아버지 꼴이 되네." "아……!" "백치 같은 녀석이로군. 자네 아비가 그 자들에게 사주를 받은 마도무사들에게 당했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찰나, 금무외의 눈에서는 무서운 노광이 뿜어졌다. 건곤일척! 철붕비! 아직 강호는 그 이름을 모른다. 어쩌면 두 이름은 목야성이 청춘(靑春)과 운명(運命)을 걸고 싸워야 할 대상일지도……. ③ "난 인중(人中)이 길지. 그것은 오래 산다는 증거. 하되 최근 들어 인중 가운데 붉은 점(點) 하나가 생겨났지. 그것은 다분히 불길한 조짐이기에 노부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 점을 빼고자 노력한 바 있네." "……." "하되, 점은 없어지지 않더군. 크크… 어쩌면 하늘이 이 늙은 오뚜기 영감탱이의 목숨을 수납해 가려 하는 것일지도! 여하튼 오늘 죽어도 후회는 없어. 인간이 해서는 아니 되는 짓까지 다 해 보며 살았으니까 말야." "……." "한 가지 걱정이라면 소아라는 맹랑한 딸년뿐이야. 하되 그년은 늙은 아비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그런 년이니 걱정하는 건 오히려 어리석은 짓이고!" 금무외는 잘 웃는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 일각에는 묘한 그늘이 만들어져 있다. 그건 인간이라면 영원히 감출 수 없는 본질적인 우수(憂愁) 같은 것이다. "여하튼 현명한 장사꾼이라면 건곤일척과 철붕비에 대해선 깊이 캐어 들지 않는 게 좋아. 그게 늙고 꾀 많은 장사꾼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고야. 사실은 그 말을 해 주려고 동해칠진주(東海七眞珠)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누워 기다리고 있는 해왕선(海王船)에서 내려 악양에까지 온 거야." 금무외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뒷짐을 진 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절대 파고들려 하지 마. 잊어선 안 돼! 그리고 말야. 언제고 내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거든… 후후… 내 시신(屍身)은 자네가 태워 주게. 그리고 남은 재가 있거든 남해에 뿌려 주게. 그 일을 자네에게 맡기지." 늙고 노련한 장사꾼의 등이 유독 구부정해 보인다. 목야성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에 휘말렸다. 앞으로는 영영 그의 뒷모습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하여간 석양(夕陽)이다. 흡사 선혈을 뿌리는 석양일까? 이 날 목야성의 망막으로 가득히 담겨지는 석양은 목야성이 지금껏 보아 온 어떠한 석양보다도 짙붉은 그러한 석양이었다. "건곤일척, 철붕비!" 목야성은 두 개의 고유명사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읊조렸다. 만남!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두 사람의 만남은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④ 연(蓮)의 열매가 검고 단단해진 것은 석련(石蓮)이라 한다. 목야성은 석련을 즐겨 먹는다. 하기에 가을 그의 식탁에는 늘 석련이 마련된다. 오늘 아침도 석련은 예외 없이 거기 있다. 그는 상아 젓가락으로 석련을 집어들다가 금무외 노인이 떠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공손예월의 약간 수다스러운 말투가 다분히 시원하다는 눈치였다. 공손예월은 대인 관계가 부족한 목야성이 늙은 추물 금무외와 오래도록 어울리다 나쁜 물이 들지 않을까 다분히 걱정하던 처지였다. 하기에 금무외가 닷새 만에 사라지자, 앓던 이가 빠진 표정을 짓는 것이다. "호호… 그 늙은 자라영감은 동정호에 정박하고 있는 해왕선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쯤 해왕선은 장강의 물줄기를 따라 나는 듯 나가고 있을 겁니다요." "유감이로군. 늦잠을 자느라 배웅을 하지 못해……." 목야성의 젓가락 사이에 또 한 알의 석련이 집혀졌다. "그나저나 그분이 오신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무슨 뜻일까? 공손예월의 뺨이 약간 붉어졌다. "누가 오기에 예월이 흥분하는지 모르겠군. 황세자라도 오느냐?" "호호호… 실로 태평하신 분이시군요. 항시 소가주님을 위해 제주(祭酒)를 드리실 분을 낳아 주실 분이 오고 계시거늘, 그것도 모르시다니요?" "날 위해 제주를 드릴 사람이라니?" 목야성은 문득 젓가락질을 멈췄다. 제주를 드린다는 것은 종사(宗事)를 잇는다는 말과 같다. 목야성을 위해 제주를 올릴 사람은 바로 목야성의 자식이 아닌가? "설마… 그녀가?" 목야성의 낯색이 하얘진다. 공손예월의 목소리가 다시 수다처럼 높아진다. "호호호… 백매당(白梅堂)에 가 보십시오. 가모(家母)님께서 소가주님을 만나 보고 싶어하십니다요. 아마도 그분에 관한 말씀을 하실 겁니다요." ⑤ 백매당의 풍취는 겨울이라야 제 멋이 난다. 가을의 백매당은 다만 음울한 숲에 불과하다. 겨울이 되면 이 숲 가득히 흰 매화(梅花)가 피어나리라. 자심매랑 능운고! 이 곳의 주인이며 목가장의 안주인이기도 한 이름이다. 그녀는 칠 년 전 목비룡이 쓰러진 그 해에 이 숲으로 숨어들었다. 그녀는 매일 두 차례 조석으로 목비룡을 찾아 병세를 돌보는 일을 제외하고는 대개 매림 안의 백매당에 머문다. 원래 그녀는 거유(巨儒)의 딸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능화석(凌華石)은 북천거학(北天巨學)으로 불리웠던 대문성(大文星)이었다. 부친과 가문의 영향을 받아 그녀는 다분히 굳강한 기질을 지닌 여인이었다. 하기에 그녀는 하늘 같던 남편이 쓰러진 이후에도 흐느끼기보다 서책에 의존하여 마음을 바로세울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스슥- 슥-! 그녀의 붓 끝에서 매화(梅花)가 피어나고 있다. 흰 화선지(畵仙紙) 위에 가득 피어나는 매화의 빛깔은 분명히 검다. 하되 은은한 묵향(墨香)은 어느 틈엔가 신비롭고 향긋한 매화 향기처럼 감미로워졌다. 검디검은 묵매(墨梅)의 빛깔은 핏빛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의 매화도는 이미 신화경(神化境)에 접어들었다. 목야성은 오래도록 서서 그녀의 매화도 그리는 모습을 내려다봤다. "……." 그녀는 하나뿐인 아들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화도를 완성할 때까지는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녀는 만사에 절도가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어떠한 경우에도 기품(氣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녀는 보통 여염집 여인네들처럼 외아들에 대해 소소하고 다정다감한 정감을 표현하지 않는다. 하기에 목야성은 다른 사람보다 모성(母性)을 그리 강하게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이해한다. 어머니가 그에게 소원한 이유는, 마음 가득 오직 한 남자(男子)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목비룡! 칠 년이나 식물이 되어 있는 천하제일의 노영웅을……! 자심매랑 능운고! 그녀의 콧등에는 가는 땀방울이 맺혔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매화도를 내려다보며 다분히 언짢은 표정이었다. "이건 태워 버려야겠구나. 소심(素心)이 드러나지 않았어. 이건 죽은 매화야!" "하지만 차가운 향기는 흐르고 있군요." "그렇게 느껴지느냐, 성아?" "예, 어머님! 소자가 보기에 이 그림은 한매(寒梅)군요." "한매! 네 말이 맞다. 하여간 이건 불살라져야 한다." "어찌하여 향기를 흘리는 그림을 태우십니까?" "이유는 향기를 흘리기 때문이야. 매화란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 꽃이다. 이 그림이 향기를 흘린다면 이미 매화이지 못하다. 넌 매일생한불매향(梅一生寒不賣香)이라는 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물론 너는 네 아버지처럼 거상의 길을 걸을 처지이니, 절개보다는 타협을 사용하며 살 운명이라 그런 말이 네겐 소용이 없겠지만 말이야." 능운고의 귀밑머리는 서리처럼 희었다. 능운고는 이미 초로(初老)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과거 한때 강호제일미녀(江湖第一美女)로 불리웠다. 목비룡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 나서 천하를 얻은 것보다 기뻐했다고 한다. 능운고는 재색겸비의 미녀였으며, 초로에 접어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고 늘 곁에 머물러 있다. 목야성의 용모가 지극히 단정함은 다분히 혈통의 영향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널 부른 이유를 아느냐?" "예, 영아(玲兒)가 오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 그 아이가 오고 있다. 그 아이는 내가 젊었을 때 네 아버지와 더불어 신세를 진 주장천(朱長天) 노영웅의 무남독녀이다. 가문이 풍지박산 난 이후 보타산(普陀山) 청련신니(淸漣神尼) 문하에 들어가 십 년 수업을 받았으며, 이 년 전 출도(出道)를 했지." "……." "본래 이 년 전에 여기 와야 하되, 사적인 용무가 있기에 이제야 오게 되는 것이다. 이 넓은 대륙에 목가의 장원 말고는 의지할 데가 없는 아이이다. 그러니 네가 따뜻이 맞이해 주어야 한다. 그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날에는 어미가 널 그냥 두지 않겠다." 주장천은 능운고가 아버지를 여윈 이후 양부(養父)로 섬기던 인물이었다. 그는 중원무림계를 이끌던 십대검호(十大劍豪)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주령(朱玲)! 그녀는 주장천이 오십 세 넘어 얻은 무남독녀였다. 목야성이 그녀를 본 건 십 년 전이던가? 당시 그녀는 청련신니의 손을 잡고 목비룡의 생일날 연회장 한 귀퉁이를 노란 궁장 차림으로 지키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도 검게 반짝거렸고, 두 볼에 파인 보조개가 몹시 귀여웠다는 것 이외에는 기억나는 게 없다. 하되 그녀는 목야성에게 있어 어떠한 여인보다도 귀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오 년 전, 능운고는 독단적인 결정으로 주령을 목야성의 정혼녀(定婚女)로 결정한 것이다. "그 아이가 외로운 나머지 강호유협(江湖遊俠)의 무리에 끼여든 모양이다. 여자란 고독이 심해지면 삐어지고 마는 그런 나약한 존재이지. 그 가련한 아이가 거칠고 난폭한 강호인들 틈에서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이번에 그 아이가 오는 대로 혼례(婚禮)를 치르도록 해라." "혼… 혼례요?" 목야성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상대는 다름이 아니라 어머니 능운고이다. 또한 그가 가장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대상은 여인(女人)이다. 어머니가 여자의 일로 그에게 큰 짐을 안기려 하고 있으니, 그가 혼비백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 아이가 너처럼 못난 녀석을 마음에 둘지 모르겠다. 여하튼 어미는 올해 안에 네놈이 혼례를 치르는 것을 봐야겠다. 그러니 앞으로 며칠 언행에 특별히 조심하고 영아를 맞을 채비를 갖춰라." 능운고는 목야성을 철부지로 여기고 있다. 그녀는 며칠 전 중앙연회에서 목야성이 금무외와 어울려 술 시합을 벌이고, 오색신수 속에서 함께 목욕했다는 등의 보고를 이미 받았다. 그러한 사실을 능운고는 몹시 역겨운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금무외는 그녀가 제일 혐오하는 그런 자가 아니던가? 한데 아들이 그런 파렴치한과 더불어 술시합을 하다니……. '못난 녀석! 언제나 어른이 될는지……!' 그녀의 눈빛은 그러한 말을 감추고 있다. 그녀의 눈에 목야성은 제 스스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쑥맥에 불과한 것이다. 방 안에는 수련향(垂蓮香)이 가득하다. 그 향기의 출처는 오른쪽 창 밖이었다. 창 아래에는 인공호수(人工湖水)가 파여 있다. 호수 위에는 졸 듯이 고요하게 피어난 수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수련의 향기는 소리 없이 창을 넘어 백매당을 가득 뒤덮은 것이다. "네 생활에 대해선 간섭할 생각이 없다. 큰일은 못해도 앞가림은 하고 사는 녀석으로 알고 있으니까." "고맙습니다, 어머니!" "하되 그 괴이쩍은 두 녀석과 어울리는 일은 삼가해야 한다." "……!" "이름이 뭔지도 기억나지 않는군. 하긴 출신이 지저분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강호소졸들이니, 내가 이름을 기억할 수 없지." 능운고는 대거와 한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어찌 두 사람의 이름을 모르겠는가? 다만 그녀는 강호제일학의 딸로, 또한 강호제일협의 양녀로서, 또한 강호제일의인의 조강지처로서 그들 두 명의 백도 비겁자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기에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고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이건 엄숙한 명령이다. 네 나이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모든 결정권은 어미가 쥐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어머니, 그 자들이 강호의 비겁자들이기는 하나 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녀석! 너와 또다시 객쩍은 이야기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피곤하구나. 네 거처로 돌아가라. 영아가 온 후 함께 보기로 하고……." 능운고는 아들을 앞에 두고도 다정히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여인들보다 정이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다. 다만 칠 년 내내 목비룡에 대한 근심과 번뇌로 모든 정념이 산산이 불타서 재가 되고 만 상태. 하기에 늘 메마르고 냉정한 표정을 짓고 무정히 말을 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물 속에서 잠자는 두 마리 용입니다. 검룡(劍龍)과 화룡(火龍)! 그들은 곧 떠오를 것이며, 그들로 인해 목가의 대한(大恨)이 풀립니다.' 목야성은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머니는 벌써 눈을 감고 불경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침묵은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그런 숭고성을 지니고 있기에 목야성은 말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⑥ 십오야(十五夜), 달빛이 가장 흥건한 날이다. 유성(流星)이 떨어져 내리는 밤하늘에도 달빛은 꽉 차 있다. 악양 거리 후미진 곳, 고풍찬연한 처마의 이층 누각 한 채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누각의 이층 다락 아래에는 금빛 편액이 걸리어 있다. <악양천서각(岳陽千書閣)> 시인묵객(詩人墨客)이라면 악양천서각이라는 현판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악양천서각은 강호의 팔대서각(八大書閣) 가운데 하나였다. 강호가 무인(武人)의 것이되, 진실로 위대한 구도자들은 문인(文人)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잔결서생(殘缺書生) 유잠허(劉潛虛)! 악양천서각의 각주인 그는 그러한 의미에서 보다 존경받아 마땅한 인물이었다. 보통 사람은 문(文)을 버리고 무(武)를 취한다. 그러나 유잠허는 창궁신걸(蒼穹神傑)이라는 강호무명을 흔쾌히 버리고 동정야학(洞庭野學)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의 적은 그가 위장(僞裝)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밤길에 그를 암습했다. 하되 그는 무공으로 적을 제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항을 포기했다. 그 덕에 그의 오른팔과 왼쪽 다리는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이 밤, 추색(秋色)이 너무나도 흥건하여 눈물이 도는 구월 십오 일의 자시(子時) 초(初). 유잠허는 산해경(山海經)을 펼쳐 놓은 채 독서삼매경에 열중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 밖에서 바람이 흘러 들어온다. 그 때마다 잘려 나간 그의 손이 없는 오른쪽 소매가 공허하게 나풀거렸다. 유잠허가 산해경 한 부분에 몰입해 들 때였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한 소년이 조심스럽게 거기 있다. 왕사(王四)라는 소년은 그가 주워 기르고 있는 고아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녀석은 졸린 눈을 비비며 서실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 괴객이 와서 사부님을 뵙고자 합니다요." "누가 이 야심한데……?" "월하객(月下客)이라면 사부님이 아실 거라고……." "아, 그분이……!" 잔결서생 유잠허는 얼른 책장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벌써 삼 개월인가?' 그는 문 밖으로 걸어 나가며 지난번 그를 만났던 때를 기억했다. '그렇군. 정확히 삼 개월이로군. 당시 그분은 다음에 올 때 월하객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겠다고 하셨지.' 그는 편립(片笠)을 깊숙이 눌러 써 얼굴을 가리고 있다. 유잠허는 외인을 멀리 물리친 다음 그와 단독대좌를 하고 앉았다. 그의 앞에 있는 자는 월하객이라는 자. 한동안 침묵이 이어진 후 먼저 입을 뗀 쪽은 월하객이었다. "그 동안 유 서생이 날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아끼지 않아 송구스러울 뿐이오." "아, 거꾸로 된 말씀이외다. 불초 소생, 대인으로 인해 필생 숙원이던 서각을 세울 수 있었고, 매달 은자 삼천 냥씩을 제공받아 고아들을 보살피고, 천하의 빈한한 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베풀 수 있게 되었으니…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소생을 일컬어 인의서생(仁義書生)이라 하되, 기실 그러한 호칭을 받으실 분은 대인이외다." "그렇지 않소. 난 다만 유 서생을 철저히 이용하고 있을 뿐이오." "하오나 그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소이다." "여하튼 우리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거래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생각하지 마시오." 월하객의 목소리는 낮고 어둡다. 유잠허가 그를 안 지 어언 사 년째였다. 그는 삼 개월마다 한 번씩 유잠허를 찾는다. 유잠허는 그에게 삼천 냥을 받고 그가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그것은 시시하다면 시시하고, 거대하다면 거대한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강호의 깊은 비밀에 대한 세밀한 정보(情報)였다. 사실 유잠허는 많은 벗을 알고 있다. 그는 문무쌍도를 거친 사람인지라 각계각층에 벗을 두고 있다. 그는 하루 다루(茶樓)에 나가 앉아 사해 친구들과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강호계의 정세를 해박하게 알 수 있다. 게다가 그는 개방( )에 많은 친구를 두고 있어 정보 수집에 지극히 용이한 처지이다. 월하객이 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유잠허의 정보였다. "오래 전부터 조사해 오던 그들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바는 있는지……?"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다만?" "그들의 발호가 보다 노골적이 되고 표면화되고 있다는 게 새로운 사실이라면 사실일는지……." "지난번 말할 때, 그들이 암중에 천여 개의 장원과 은밀히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고 하였는데… 그보다 더 가공해졌다는지……?" "그렇습니다. 그들 건곤일척부는 십 년에 걸쳐 방대한 지하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최근 들어서는 건곤일척부(乾坤一擲府)라는 이름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종사인 철붕비(鐵鵬飛)라는 자는 구름 속의 신룡처럼 진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인 바, 그가 끌어들인 마도거효(魔道巨梟) 열다섯이 그를 대신하여 세력을 확대시키는 데 선봉에 서고 있습니다." "……!" "최근에는 막북(漠北)의 대마웅(大魔雄)이 그들 조직의 제이인자로 흡수되어 기세를 더하고 있습니다." "막북의 대웅이라면……?" "대막철마(大漠鐵魔)라고 불리우는 좌옥도(左玉道)가 그올시다. 그 자가 건곤일척부의 태상호법(太上護法) 자리에 들어왔습니다. 그 자는 대막철마성주(大漠鐵魔城主)이기도 한데, 건곤일척부에 들어서며 수하 일만이천 명을 건곤일척부에 바쳤습니다." "일만이천……!" "하나같이 강호의 일급무사로 평가받을 그러한 자들입니다. 좌옥도는 나름대로 중원 정복을 꾀하고 있는 자이되, 중원에 거점이 없기에 차제에 건곤일척부를 아성으로 이용코자 건곤일척부의 총순찰(總巡察)인 철접혈녀(鐵蝶血女) 옥쌍화(玉雙花)가 초빙 의사를 보이자, 흔쾌히 응했다고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건곤일척부가 고정적인 거점을 갖기 시작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는 말인지?" "예! 그들은 정해진 거처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장소는 십만대산(十萬大山) 일대이며, 규모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방대하다고 평가됩니다. 개방에서 은밀히 조사하고 있으되, 그 곳에 간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지라 조사에 어려움이 많다고 합니다." "그 곳의 지존인 철붕비의 신상에 대한 새로운 정보는……?" "아직 없습니다. 그들에 대해 세밀한 것을 알아 내고자 한다면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써야 합니다. 그 곳의 중심 인물을 잡아 고문하거나, 직접 그 곳에 들어가 보거나……." "……." "제가 그 동안 알게 된 것은 서책에 기록해 두었으니, 가실 때 가지고 가십시오." "고맙소, 유 서생!" 월하객은 애써 나이 든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유잠허는 그 내면에 상당히 젊은 목소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월하객, 그는 유잠허에게 매달 삼천 냥이라는 거금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이 필요로 하는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 유잠허는 기질상 황금과 타협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는 신비로운 후원자가 진실로 의로운 사람이라 믿고 있기에 성심성의껏 그의 일을 돕고자 하는 것이다. 월하객은 유잠허에게 하나의 조직(組織)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그 조직은 일컬어 건곤일척부였다. 그들은 최근에야 비로소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되 그는 사 년 전에 이미 그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유잠허가 추축하건대, 월하객이 이용하고 있는 정보망은 자신 이외에도 다섯 군데 이상이 있다. 다시 말해 월하객은 실로 방대하고 치밀한 정보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미루어 강호천하의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그가 알고자 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그런 위치인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그러한 정보망을 유지하기 위해 매월 은자 이만 냥 이상을 사용한다는 것이고! 유잠허는 그가 황실(皇室)의 중요 인물이거나 백도맹(白道盟)의 비밀호법(秘密護法)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는 당금 강호 정세에 대해 개방주( 主)만큼이나 세밀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여간 월하객은 떠나며 비둘기 한 마리를 건넸다. 그것은 전서구(傳書鳩)로 길들여진 비둘기였다. 떠나기 전,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조속한 조사를 당부했다. 그에 대한 것을 알게 된다면 비둘기 다리에 쪽지를 묶어 날려 보내 달라고 말했고, 새벽이 타오르기 이전에 책 한 권을 지니고 유유히 사라져 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다음에 올 때는 한매객(寒梅客)이라는 암호를 사용하겠다는……!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