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집을 그려주게>
도시생활에 지친 사람들은 언제나 자연을 꿈꾼다.
늘 곁에 둘 수 없기에 커진 꿈이다.
옛 글 속에도 이런 꿈의 조각들이 남아 있다.
바쁜 벼슬길에서도 한가로운 '귀거래'를 꿈꾸었다는 건 일종의 회귀본능과도 같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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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뒤에는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있고,
앞으로는 시냇물이 흘러가는 집, 온갖 꽃들이 피어 있고,
둘레에는 대나무 숲에서 스스스 대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집을 그려주게.
정면으로 마루를 터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 뵈게 하고,
넓은 마당엔 패랭이꽃과 금선화가 피어 있고,
또 울퉁불퉁한 괴석과 해묵은 화분이 열을 지어 서 있는 그런 집을 그려서 내게 보내주게.
동편 서재에는 천 권의 책을 놓아두고,
공작 꼬리가 꽂힌 구리병으로 실내를 환하게 꾸며 주시게.
까짓 것 그림인데, 호사를 더 부려야겠네.
그 귀한 박산 향로를 구하기 힘든 비자나무 탁자 위에 하나 쯤 떡 얹어주시게.
서편 부엌에선 애첩이 나물국에 동동주를 걸러 술상을 준비하는 모습을 그려주고,
나는 서재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고 있겠네.
자네와 다른 벗 하나가 양 옆에서 히히덕거리며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활짝 웃고 있어야 내 마음이 좋겠군.
우리의 복장은 두건과 비단으로 만든 실내화를 신고,
도복을 입고 있는 복장으로 해주게.
그렇지만 허리띠는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한,풀어진 모습으로 그리는 것이 좋겠네.
박산 향로에선 모락모락 한 줄기 향연이 피어 오르고 있어야겠지.
참, 마당에는 학 두 마리를 그려주는 것을 잊지 말게.
녀석들은 심심함을 견디다 못해 애꿎은 돌 이끼를 쪼아대고 있었으면 좋겠고,
그 한 곁에서 하인 녀석이 마당에 떨어진 꽃잎을 쓸고 있는 모습을 그려주게.
허균이 1607년 정월에 평양에 가 있던 화가 이정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세상 사는 일이 하도 팍팍하다 보니,
허균 그도 이런 뜬금없는 생각이라도 하면서 한 시절의 스산함을 걷어내려 했던 모양이다.
이정이 그림을 그려주면 그것을 방 벽에 걸어 놓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환해지고 웃음이 머금어지는 그런 놀이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허균은 이 그림을 받지 못했다.
평양에 가 있던 이정이 이 편지가 도착하고 나서 며칠 안되어 갑자기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사망 원인은 술병이라고 했다.
죽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이었다.
넓지는 않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 가는 방.
환한 햇살이 물밀 듯 들어와서 삶의 그늘을 지워 주는 방.
별다른 장식은 없어도 내 읽고 싶은 책은 갖춰두고,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방.
향을 피워 정신을 맑게 하고,
세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지만,
천지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아득한 옛 선인들과 만나고,
천고를 벗으로 삼아 마음껏 노닐 수 있는 방.
사람들아, 나의 거처가 누추하다고 말하지 말라.
정말 누추한 것은 더러운 명예를 쫓아 다니는 일,
이 한 몸이 죽고나면 이름도 함께 썩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여 세상에 살다 간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는 일.
평생을 명예를 쫓다 간 결국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손가락질만 받다가 죽는 것이다.
쑥대 지붕 아래에도 우주를 덮을 큰 자유가 있다.
도연명도 무릎을 겨우 들일만한 좁은 집에서 비바람도 가리지 못할 구차한 살림을 살았다.
그러나 보라.
그의 이름은 백대의 세월에도 지워지지 않고 뭇 사람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대저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이정이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뜬 뒤,
허균은 더러운 세상을 뿌리째 뒤엎어 보겠다고 반역을 꿈꾸다
쉰 살의 나이에 능지처참을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정에게 편지를 보낸 지 11년 뒤의 일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용휴의<구곡유거기〉란 글에도 자신이 꿈에 그렸던 동산의 모습이 나온다.
나는 일찌기 한가지 생각을 한 일이 있다.
굳이 깊은 산, 인적이 끊긴 골짜기일 필요는 없겠고,
도성 가운데 한 곳 궁벽하고 조용한 곳을 골라 몇 칸 집을 엮어야지.
방안에는 거문고와 책, 술동이와 바둑판을 갖춰 두고, 석벽을 울타리로 삼겠다.
땅을 조금 개간해서 좋은 나무를 심어 예쁜 새들을 깃들게 해야지.
나머지 땅에는 남새밭을 일궈 이것으로 술 안주를 만들겠다.
또 콩 시렁과 포도나무 시렁을 만들어 그늘을 지워야지.
처마 앞에는 꽃과 수석을 열 지어 놓겠다.
꽃은 얻기 어려운 것을 찾는 대신 사계절 새로운 꽃이 이어 필 수 있는 것을 구해 놓아야지.
바위는 가져오기 어려운 것 보단 작으면서도 비쩍 말라서 괴기한 것을 가져 오겠다.
마음 맞는 벗 한 사람을 이웃에 두고,
그 거처하는 집의 규모나 위치는 대략 서로 비슷하게 해서,
대나무를 엮어 문을 달아 서로 통하게 해 놓고 왕래해야지.
난간에 서서 부르면 소리가 마치기도 전에 신발이 이미 섬돌에 다다를 것이다.
비록 비바람이 심하다 해도 상관이 없으리니 이 같이 즐기며 늙어갔으면 좋겠다.
생각 속에서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서울에서 살던 이용휴, 그도 종내 이렇게 늙어가지는 못했다.
예나 지금이나 도심에서 근간을 이루며 바쁘게 사는 사람들에겐
소박하다면 소박하기 그지없고,
야무지다면 야무지기 짝이없는 '꿈'인 듯 하다.
..................................................한국한문학<허균의편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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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효경아~~ 잘보았다,, 우리아들이 아토피로 고생을하거든,,,도움이많이됐다. 잘 메모했다가 실천하도록해야겠다, 아랬글도 감동적이다야~~가슴이찌리릿~전율이올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