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남씨(英陽南氏) 안동입향유래(安東入鄕由來)
안동시 와룡면 중가구리의 남흥(南興)마을은 영양남씨 안동(安東) 입향조(入鄕祖)인 고려위위승동정(高麗衛尉丞同正)1) 휘(諱,돌아가신 분의 이름) 공약공(公若公)2) 이하 증손(曾孫)까지 4대6위(四大六位)의 제단(祭壇)과 현손(玄孫,손자의 손자) 전리판서(典吏判書) 諱 휘주(暉珠)3), 오대손(五大孫) 공조참의(工曹參議) 諱 민생(敏生)4)의 묘소와 재사(齋舍) 원모루(遠慕樓)와 함께 6대(六大)의 유적이 결집(結集)된 곳이므로 남씨가 일어났다는 남흥(南興)이라는 촌명(村名)의 본뜻이 이제야 표출(表出)된듯하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노력(努力) 여하(如何)에 따라 앞으로 무한(無限)의 영광(榮光)을 누릴 수 있는 계기(契機)가 마련될 것으로 생각된다.
위위승동정공(諱 公若)은 신라말엽 중국으로부터 이 땅에 기착(寄着)하여 경덕왕으로부터 영양현(현재의 영양군)을 식읍(食邑)5)으로 남씨성(南氏姓)을 하사(下賜)받은 영의공(英毅公) 諱 민(敏)의 후손인 고려조 통훈대부추밀원직부사(通勳大夫樞密院直副使) 諱 군보공(君甫公)6)의 사자(四子)중 장남(長男)이시다.
밀직공(=樞密院直副使, 諱 君甫)께서는 영양에서 생장(生長,나서 자람)하여 중년(中年)에 의령(宜寧, 현재 경남 의령군)의 별장(別莊)으로 이거(移居,이사)하였으나 위위승동정공(諱 公若公)께서는 이때에 이미 장성(長成)하였던 고(故,까닭에)로 수행(隨行,따라감)치 않으시고 영양은 의령과는
거리가 너무 멀고 또 심벽(深碧,깊고 후미짐)하다고 하여 산자수명(山紫水明,산수의 경치가 좋음)한 이곳 안동시 와룡면 서지동의 누가촌(樓可村)을 자손만대(子孫萬代)의 터전으로 잡고 옮겨
오신 후 음덕(陰德,남모르는 덕행)을 쌓고 자손(子孫) 교도(敎導,가르침)에 힘을 기울이시니 이로 인하여 관면(冠冕)7)이 대대(代代)로 이어졌으나 관향(貫鄕)은 세습(世襲,대를 이어 물려받음)된
영양관(英陽貫)을 답습(踏襲,옛 법에 따름)하셨다.8)
그 후 7백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 자손들이 번창(繁昌)하여지니 안동을 기점(基點)으로 의성, 예천, 상주, 영주, 봉화, 울진, 삼척 등지로 뻗어나가면서 조선조(朝鮮朝)에서만 문과급제(文科及第) 18명, 생원(生員) 진사(進士) 80명의 인재들이 배출(排出)되어 비록 고관대작(高官大爵,지위
높은 벼슬과 작위)은 아닐지라도 관면(冠冕)이 끊이지 아니 하였고 또한 사림(士林,조선조에 사회와 정치의 주도세력)의 추앙(推仰,높게 받들어짐)을 받은 덕망(德望)높은 학자들이 이어져서 서원(書院)에 봉향(奉享,배향)된 이도 여러분 있었으나 노림서원(魯林書院, 비지賁趾 諱 치리致利 배향)9), 이산원(伊山院, 이계伊溪 諱 몽뢰夢賚 배향)10), 구만서원(龜灣書院, 삼송당三松堂 諱 몽오夢鰲 배향)11)은 훼철(毁撤,헐어서 없앰)된 상태이고, 봉암서원(鳳巖書院, 허영정 諱 응원應元, 난재懶齋 諱 융달隆達, 유유헌 諱 급礏, 고암孤巖 諱 천한天漢)12), 공산사(公山祠, 노애 휘 태백, 운간 휘 태화, 정천 휘 태별)13)가 있다.
왜정(倭政)치하(治下)에서는 독립투사(獨立鬪士)와 우국지사(憂國之士)가 셀 수 없이 배출(輩出)되어 국권회복(國權回復)에 공헌(貢獻)하였고, 광복(光復) 후에는 많은 인재들이 각종 고시(考試)에 합격하여 고관(高官)을 역임(歷任)한 분, 정계(政界)에 진출하여 국회의원(國會議員)에 당선된 분, 종교계(宗敎界), 학계(學界), 언론계(言論界), 재계(財界) 등 각 분야에서 큰 역할(役割)로 국가발전(國家發展)에 이바지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선조(先祖)들께서 쌓아주신 음덕(陰德)의 소치(所致,비롯된 것)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려에서 조선조로 옮겨지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화중(禍中,난리 중에)14)에 벌어진
창상지변(滄桑之變)15)으로 입향조 위위승동정공(=공약公) 이하 증손까지 사대(四大)의 문적(文籍)들이 유실(遺失)되어 남겨 주셨던 유택(遺澤)은 물론 묘소마저 실전(失傳)하여 7백여년간 후손들의 여한(餘恨)일러니 1995년 봄 몇분 원로(元老)들의 발의(發議)에 전 종중(宗中)의 일치된 합의(合議)로 2년여의 고심(苦心) 끝에 현 위치에 제단(祭壇)을 봉설(奉設)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서지동의
누가촌에 입향유적비(入鄕有跡碑)를 설립(設立)하였으며 또 그 다음해인 1998년에는 청량산의
청량사 경내(境內)에 있는 삼각우총에 표석(表石)을 세우는 등 유적복원(遺蹟復元)에 전력(全力)을 쏟으니 새로워진 남흥의 경관(景觀)과 우리들의 위선지성(爲先之誠, 선조를 위한 정성)이 원근(遠近)에 전파(傳播)되어 외지(外地)에 사는 후손들은 물론 타성(他姓)들까지도 그 풍문(風聞)에 매혹(魅惑)되어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맞이할 때 우리들의 업적(業績)이 헛되지 않았다는 긍지(矜持)와 보람을 느낀다.
<참고자료>
영양남씨 안동입향유래, 영양남씨밀직공파화수회 발간, 2003, 16쪽 발췌
[편집:南時和,수의공27세,안동]
1) 안동 쪽 영양남씨의 가계의 1대인 남군보(南君甫)의 아들인 2대 남공약(南公若)의 벼슬이다.
풀어 읽으면 고려시대의 양반中 서반(즉, 무반武班)으로서 의장(儀仗)을 담당하던 위위시(衛尉寺)라는 부서에서 ‘승 (丞)’이라는 비서직(丞,종5품)을 제수받아 업무를 분장받기 前의(同正,동정) 관직이다. 옛 관직은「어느 임금때-소속-직급-직명」으로 구성된다. 겸임을 하는 경우에는 관직이 매우 긴 것이 특징이다.
2) 남공약(南公若 ; 생몰미상) 자는 子順. 본관은 영양이고 의령관 밀직공 君甫의 아들이다.
力學하여 道理에 통명하였다. 자제 둘에게 이르기를 ‘여러 서적을 대강대강 읽는 것 보다 논어 한 책을
공부하는데 요긴처로 삼아라’고 하였다. 곧고 강직한 성품으로 ‘쇠(鐵) 가운데 금(金)이요 눈(雪) 위의 대나무
(竹)’라 불렸다. 족보 등 자료상에 생몰은 미상이라고 하나, 안망실과 예천금당실의 수의공파(남시중
씨)에서 전해오는 가첩(家牒)에 의하면 공의 생(生)은 1098(숙종3:무인). 8.18. 몰(歿)은 1164(의종18:
갑신). 3.24.로 일기는 67세였으며, 후에 ‘문하시중’의 벼슬을 제수받았다. 문하시중은 종1품 벼슬로
사후에 증직된 것으로 보인다.
3) 남휘주(南暉珠, 1326~1372) 자는 岸明이고 유손의 아들이다. 1354년(공민왕 3)에 문과 급제하였다. 1356년 奇轍․權謙 등의 역모를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중랑장에 발탁되어 1371년(공민왕 20)에 전리판서에 이름.
4) 남민생(南敏生, 1348~1407) 자는 追遠이고 휘주의 아들이다. 고려조에 무과 급제하여 위위소윤으로 재임 시 이태조가 등극하니 공양왕이 원주로 은둔함으로 절의를 지키기 위해 향리로 돌아와 종적을 감추었다. 태종이 즉위하여 평해군사에 제수하니 부득이 취임하여 군교 호군을 거쳐 1406년(태종 6)에 공조참의에 발탁되었다.
5) 국가에서 왕족·공신·봉작자 등에게 지급하던 일정한 지역, 식읍제는 나라에서 공신나 봉작자에게
호수(戶數)나 지역을 기준하여 지급하였고 세금이나 부역을 받거나 토산물을 거둘 수 있는 권한
(租.庸.調)을 부여했다.
6) 남군보 : 시조 영의공 남민의 후손으로 의령관의 중시조이다. 고려 충렬왕 때에 공을 세워 시조의 후손인 남홍보는 영양군, 남군보는 의령군, 남광보는 칠성(고성)군에 봉해졌다. 수의공파 가승도의 기록에 의하면, 남민의 16세손이다. 1066(문종 20 : 병오). 5. 5. ~ 1144(인종 22 : 갑자) (78세)
자는 대우(大宇). 호는 백천(柏川)이다. 선배위는 나주 나(羅州 羅)씨로, 중랑장 만우(萬宇) 공의 따님이다. 슬하에 3남인데, 장남이 공약(公若) 공이며, 차남은 공혁(公赫) 공이며, 3남이 공익(公益) 공이다. 후배위는 김 국현(金 國賢) 공의 따님인데 아들로 진용(鎭勇)이 있다.
7) 관면(冠冕): 갓과 면류관이라는 뜻으로 벼슬아치를 뜻함.
8) 시조 영의공 이후 모두 영양관을 단일하게 쓰고 여러 파로 지내왔으나, 15세손인 원량(元良)의 아랫대인 홍보.군보.광보공께서 고려 충열왕때 시호를 받은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족보를 편찬하고 상계와 정리하면서 군보공과 광보공을 중시조로 삼아 의령관 및 고성관으로 분관(分貫)하였으나 군보공의 장남인 공약공과 후손들은 영양관을 그대로 썼다는 내용이다. 이것이 ‘영양남씨 안동파’가 밀직공(휘 군보)의 직계적자이면서도 영양관을 쓰게 되며 의령관의 후손들과 상계에 이견이 생긴 까닭이라고 본다.(편집자 註)
9) 남치리(1543~1580) : 본관은 영양. 자는 의중. 호는 비지(賁趾). 안동출신으로 유일재 김언기와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도산서원에서 ‘태극도설’의 강론을 하였으며, 식견과 학자의 자질을 인정받아 ‘계문의 안자’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1570년 이황의 장례에서 28세의 나이로 수많은 퇴계제자 가운데서도 ‘상례’(相禮, 요즈음의 장의위원장 格)로 추대되었다. 후에 역동서원에서 이황의 유문을 수습하고 여강서원에서 이황의 ‘이학통록’을 교정·편집하였다. 1578년에는 이황의 ‘계몽전의’를 교정하였다. 정구와 함께 유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퇴계의 학맥을 이었다. 노림서원은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 있던 서원이다. 1649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남치리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 퇴계 사후 10년인 1580년 38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학문의 업적을 더 펼치지 못하였다.
[※ 남치리선생의 호는 ‘비지’이다. ‘비지’는 “수레를 버리고 걸어서 간다.”라는 뜻으로 주역의 초구에 나오는 글을 인용한 것으로 초야에 묻혀 자신의 행실을 닦는다는 뜻이다. 한자의 발음이 ‘분지’로도 읽히나 그것은 잘못이다.]
10) 남몽뢰(1620~1681) : 조선중기 문신, 본관은 영양, 의성 점곡면 사촌리에서 출생하여 효종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 함양군수. 선산부사. 진주목사를 지냈다. 예제의 개혁을 상언했다가 파직당하고 전라도에 유배 중에도 미수 허목.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서인들의 의견에 반대하다가 서울로 호송되던 중 자결했다. 문장이 뛰어났고 성리학과 예학, 사학 등에 조예가 깊었다. 정치적 신념이 투철하여 절의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저술이 있으며 이계문집에 실려 있다. 이산서원은 퇴계 이황과 함께 남몽뢰선생을 배향하였으나 1868년 철훼되었다가 1996년에 복원되었다.
11) 남몽오(1528~1591) : 조선중기 학자. 호는 삼송당(三松堂), 본관은 영양.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1등 4위에 합격했으나 후진교육을 낙으로 삼아 가르치니 많은 선비가 운집하여 성취한 사람이 많았다.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류하였다. 퇴계가 지어 준 ‘再行視陶山南洞’이라는 시가 있다. 구만서원은 1596년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금인(琴軔)·남몽오(南夢鰲)·박장생(朴長生)·권호신(權虎臣)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봉화군 화천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65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12) 봉암서원 : 1825년(순조 25)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남응원(南應元)·남융달(南隆達)·남업(南礏)·남천한(南天漢)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복원하였다.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에 있다.
13) 공산사 :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1826년 건립된 사당으로 ‘남씨영모사’라고도 한다. 임란때 의병활동을 한 남태백(南太白), 남태화(南太華), 남태별(南太別) 3형제의 위패를 모시고 봉향한다. 3형제가 모두 국란을 막고자 의병에 투신한 일은 어느 가문에서도 찾아보기 드물다.
14) 역성혁명 : 타성(他姓)에 의한 왕조의 교체. 왕조에는 각각 세습되는 통치자의 성(姓)이 있으므로 왕조가 바뀌면 통치자의 성도 바뀌게 되며, 신구(新舊) 왕조의 교체는 천명(天命)을 혁신하는 행위로 보아 ‘혁명’이라 한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것이 대표적인 역성혁명이다. 성공한 역성혁명에는 지향하는 바에 따라 신하들도 개국공신과 충절공신으로 나뉘어 그들의 생사뿐만 아니라 후손에게도 절대적인 운명의 변화를 초래했다.
15) 창상지변 : 자연이나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 역성혁명의 여파로 문중에 큰 변고가 있었다는 뜻. 우리 남씨들도 조선조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개국공신도 많았지만, 고려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핍박을 받은 가문도 많았다. 특히 안동쪽의 남씨 관료들은 대체적으로 절개를 지킨 관료들이 많았으며 이로써 조선조 초기에 선조의 묘소조차 은폐할 정도로 많은 박해를 받았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