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징 칸돌마 보살 - 공산 치하에서 ‘좇’ 수행의 맥을 지켜낸 몽골의 어머니 - 글· 김선정
공산국가가 되기(1921) 이전의 몽골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티벳이나 부탄처럼 온 국민이 밀교를 신봉하는 열렬한 불교국가였다. 성인 남자 3명 중에 하나가 승려였고 승려가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였다. 세계 최대의 제국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그 강렬한 에너지를 불교에 쏟아부었으니 밤하늘 고비사막의 별처럼 헤아릴수 없이 많은 대 마스터들이 나왔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최발싼은 그 엄청났던 몽골의 불교를 아주 흔적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쓸어버렸다. 돌징 칸돌마는 장구한 세월에 걸친 공산의 그 처절하고 캄캄했던 암흑기에 몽골 탄트라 수행법의 중요한 한 맥을 지켜서 이어주었기에 그 어떤 위대한 마스터들보다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어려웠던 시절에 찾아온 인연
내가 돌징 칸돌마 보살을 친견하고 ‘좇’이며 ‘좇치’같은 용어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4년 겨울이었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빈민국들을 떠돌면서 ‘지구상에 지속되고 있는 이 많은 인간들의 어려움을 잠시도 잊지 말자! 아무리 어려워도 쉬운 길보다는 보살도로 나가는 길을 선택하자!’는 서원을 세웠고 나름대로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몽골에 들어 왔지만 체제가 붕괴된 직후 극도의 혼란과 물자부족을 겪고 있는 몽골에서 승려의 아내로 더구나 젖먹이의 어미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에 부치던 때였다.
방과 후에도 스님과 함께 밤을 새며 일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상주했고 조금만 인연이 있어도 거기 기대어 시골에서 찾아와 몇 날이고 몇 달이고 묵고 가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면 맨바닥에서 옷을 덮고 자는 사람들이 부엌바닥은 물론이고 통로 까지 가득 차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더러운 신발을 결코 벗으려고 하지 않는 그 많은 몽골사람들과 부대끼며 수도꼭지가 하나밖에 없는 조그만 집에서 기어 다니는 젖먹이를 키우는데 물과 전기와 난방이 동시에 끊어지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몽골사람들은 나의 어려움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들보다 뭔가를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몹시도 부러워했고 일거수 일투족을 늘 동물처럼 구경당하며 살아야 했다.
채소라고는 감자 뿐인데 그것도 귀한 탓에 냄새가 역한 양고기만 먹자니 오랫동안 인도에서 채식을 하던 몸이 적응을 못하고 몇 달이 가도 설사가 그치질 않았다. 그러다가 혹독한 몽골의 겨울이 깊어지자 결국은 쓰러져 날짜가 어찌 가는 줄도 모르고 고열을 내면서 속수 무책으로 앓고 있었다.
어느 날 아띠야라는 학생의 어머니가 내가 아프다는 소리를 듣고 나를 위해 기도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아띠야는 우리집에 상주하는 학생 중의 하나였는데 공부도 잘했지만 가사일에 엉거주춤한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요리며 빨래, 청소 등을 익숙하게 잘해서 나를 크게 도와 주었다.
아띠야가 가사일을 잘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주 집을 비우고 집에 있어도 경전을 읽거나 수행만 하기 때문에 가사일을 주로 장남인 아띠야가 해왔기 때문이었다. 아띠야를 승가대학 학생으로 출가시킨 후 딸을 데리고 시골에 있는 스승한테 가서 살고 있다는 소릴 들었다.
반자락을 쓰고 금강경과 다마루를 치며 의식을 행하는 돌징 칸돌마 처음 보는 아띠야의 어머니는 50대 초반으로 여느 시골 아낙처럼 때가 고질고질한 델(전통 몽골옷)을 입고 있었지만 단정한 자태에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로 인상이 고요하고 매우 정갈하였다. 이마를 붉은 띠로 동여매더니 때묻은 비단 보자기를 풀어 티벳어로 쓰여진 경전을 펼치고 무명을 손으로 누벼서 만든 감 안에서 인두골로 만든 커다란 다마루(의식용 손북)를 꺼냈다.
낡은 오색 비단에 아름다운 은장식들이 달린 다마루는 박물관의 진 열장에서 꺼내온 듯이 고색창연하였다. 다마루를 치며 음률을 넣어 경전을 암송하는데 경전을 그렇게 아름다운 음률로 암송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가슴에 사무쳐오는 노래 같기도 하고 달램 같기도 한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랫만에 고통을 잊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거푸 며칠을 와서 그렇게 경을 읽고 지성으로 기도를 한 탓인지 병세가 정말로 많이 호전이 되었다.
감사해 하는 내게 아띠야 어머니는 수행이 미약한 자신의 기도 덕이 아니라 스승인 돌징 칸돌마께서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한 덕이니 함께 한 번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돌징 칸돌마의 기사가 실린 영자신문을 보여주었다.
유럽의 티벳불교 수행 공동체인 족첸 커뮤니티를 이끌고 있는 남케노부 린포체(환생이 확인된 큰스님)가 제자들과 몽골에 와서 돌징 칸돌마에게 ‘좇’의 수행법을 전수받은 내용으로 84세된 돌징 칸돌마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었다.
살아 남은 거목
‘좇’은 확실한 스승을 만날 수 있고 계율만 철저히 지킨다면 승속과 남녀를 불문하고 매우 효과적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몽골의 독특한 탄트라 수행법이다.
그 기원은 탄트라의 대 마스터로 티벳불교의 뿌리를 심은 인도인 빠뜨마 쌈봐바와 티벳에서 태어난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칭해지는 여성 마스터, 마직랍된마를 거쳐 내려온 티벳 닝마파(故派, 赤帽派)의 오래된 수행법이다.
돌징은 그토록 무섭게 불교를 탄압했던 혹독한 공산치하에서 온갖 어려움을 견디며 비밀리에 ‘좇’의 수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돌징 칸돌마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돌징은 몸과 마음과 영혼의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상담에 응하고 법력으로 그들을 치유해주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제자가 되어 ‘좇’의 수행법을 전수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산정권이 무너지기 훨씬 이전이었지만 경찰도 그냥 묵인 하였다.
1990년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마침내 불교에 자유가 오자 러시아의 소수민족으로 살고 있는 브리아트 몽골 공화국을 두 차례나 방문하여 불법에 목마른 브리아트인들을 위해 대법회를 열었다. 돌징 칸돌마가 행하는 이적들로 인해 모여든 시주금 전액으로 브리아트에 대탑(大塔) 불사를 일으키고 돌아왔다. 남케노부 린포체에 의해 유럽의 불교계에 알려지자 브리아트와 러시아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유럽사람들도 찾아와 제자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내가 느끼고 있던 몽골의 불교는 너무나 긴 세월 동안 계속된 공산정권의 붉은 불에 거의 다 타버려서 재만 남은 시커먼 숲을 대하는 듯이 황량하고 서글펐었다. 그런데 그 잿더미 속에 그런 거목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 너무나 반갑고 기뻐서 눈물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스승은 남편을 섬긴 아낙으로 자식을 넷이나 낳은 어머니라는 사실이, 자식 낳기를 말썽처럼 저질러버린 나에게 특별한 희망과 기대를 주었다.
‘좇’과 ‘좇치’들의 수행 ‘쨔르쨔’
돌징 칸돌마가 살고 있는 빨찌짠의 겔(몽골 전통가옥) 돌징에게는 아버지가 둘이 있었다. 부모들은 모두 ‘좇’을 수행하는 ‘좇치’들이었다. 돌징이 서너 살 되던 해에 수행이 어느 경지에 이른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제자와 결혼해서 셋이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는 끊임없이 안거 수행에 드시는 아버지를 시봉했고 아버지는 새아버지와 어머니를 계속 지도하였다. 돌징이 기억하는 그들의 생활이란 끊임없이 불공의식을 행하고 경을 읽고 공부하며 수행을 하는 것이었다. 돌징이 9살이 되던 해에 그녀의 제일 중요한 스승이 된 이시갸쵸 스님으로부터 봐주라 요기니의 수행법을 전수 받고 집을 떠나 한 달 동안 수행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좇치’가 되려면 ‘쨔르쨔’를 수행해야 했다. 120일을 단위로 인적이 전혀 없는 높은 산과 황야와 묘지, 시체 버리는 곳 등을 떠돌며 행하는 수행법이다. 상당히 힘도 들고 위험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몇 명씩 모아서 보내다가 스승이 때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제자는 혼자서 보낸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좇치’로 입문한 돌징은 스승의 허락으로 13살이 되던 해에 다른 13명의 선배 ‘좇치’들과 첫 번째 짜르쨔 수행을 떠났다.
몽골에는 고기와 유제품 외에는 먹을 것이 거의 없어서 승려들에게도 고기가 주식이지만 ‘쨔르쨔’를 행하는 기간 동안 ‘좇치’들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우유차와 소량의 밀가루과자, 쌀밥, 유제품 등을 오전에만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묵언을 해야하며 끊임없이 입에 진언을 달고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제발로 걸어다녀야지 말을 타서는 안 된다. ‘쨔르쨔’의 첫 번째 7일과 세 번째 7일은 마이한(몽골의 이동식 텐트)을 치고 한 장소에 머물며 하루 4회의 불공의식을 올린다. 진언을 외우고 다마루를 치는 소리가 7일 내내 밤낮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나머지 기간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는데 같은 장소에서 하룻밤 이상 지내지 않는다.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으로 곧장 걸어가지 않고 뱀처럼 지그재그로 돌면서 도달한다. 도달하고 나면 북쪽을 향해 한쪽 다리를 들고 서서 다키니의 춤을 추어 올린 후 남쪽과 북쪽을 향해 기도문을 염송하고 10방의 신들에게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수행할 수 있는 허락과 축복을 구한다.
아침에 떠날 때도 곧장 걸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역시 뱀처럼 지그재그로 돌아서 나온다. 한 번의 ‘쨔르쨔’를 행하는 동안 ‘좇치’들은 120개의 강과 내를 건너고 산을 오르며 각각의 강과 내와 산으로부터 돌을 한 개씩 모아서 ‘쨔르쨔’가 끝나면 성스러운 장소를 택해 오보(한국의 서낭당과 비슷한 기능의 돌무더기)를 하나씩 쌓아야 한다. 수행 중인 ‘좇치’들은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른다.
이 붉은 띠는 닝마파의 수행자들이 의식을 행할 때 머리에 쓰는 반자릭아라는 황금관을 상징한다. 반자릭아에는 만달라의 5불이 모셔져 있다. 반자릭아를 쓰거나 붉은 띠를 두르는 것은 스승과 불보살을 머리 위에 고이 모시고 순간마다 몸과 마음을 닦아 순간마다 보살의 마음이 되고 순간마다 보살의 몸이 되고자 명상하기 위함이다. <불광 1999년 9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를 북쪽으로 벗어나 눈이 시린 백색의 겨울 광야를 40km쯤 달려서 ‘빨찌짠’이라는 마을로 들어섰다. 여느 몽골의 마을들처럼 엉성한 판자로 엮은 높은 바람벽들이 등에 등을 대고 줄지어 이어지고 그 안으로 넓은 마당에 둥근 겔과 초라한 판자건물이나 축사들이 지어져 있다.
돌징 칸돌마도 판자벽으로 마당을 둘러친 겔에 살고 있었다. 겔은 땅에 마루를 깔고 나뭇살로 엮은 벽을 세우고 우산살 같은 지붕을 덮은 다음 양털을 다져서 만든 두터운 펠트로 싸고 다시 흰 광목으로 싸서 만드는 이동식 조립 가옥이다. 아득한 과거로부터 살아왔고 현재까지도 몽골 유목민들의 삶을 담아주는 변함 없는 주거형태이다.
국내외에 이름 높은 대 마스터에게 법당이나 기도실이 따로 없었다. 겔의 가운데 놓인 쇠난로에 제자들이 장작과 말린 소똥을 태워 요리도 하고 난방도 하였다. 겔의 제일 안쪽 중앙에 버터등잔을 밝힌 초라한 불단 위로 그을음이 앉은 액자 속에 돌징 칸돌마에게 법을 전한 스승들의 뿌연 흑백사진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 옆으로 침대가 놓여 있는데 침대머리에는 경전 보따리들이며 의식용구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돌징 칸돌마는 그 침대에 앉아 수행도 하고 제자들에게 경도 설하고 의식을 행하며 끊임없이 찾아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맞아 세상사의 온갖 고뇌와 고통의 소리들을 경청하고 상처받은 정신과 육신의 병을 치료해 준다.
나 역시 가슴 가득한 회의와 고뇌를 극복할 수 있는 빛을 기대하며 돌징 칸돌마의 겔을 찾아든 것이었다. 몽골의 하늘처럼 짙푸른 비단수건 ‘하닥’을 양손에 받쳐들고 다가가서 올리니 그것을 받아 목에 걸어주며 힘차고 부드러운 두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싸 끌어당기며 서로의 볼과 볼을 교대로 스쳐댄다. 정답기 그지없는 몽골의 인사법이다.
그녀의 때에 절은 옷에 티벳 노스님들의 승복에서 나던 냄새가 섞여 있다. 향냄새, 버터등잔, 양고기, 오래된 경전들의 냄새가 모두 복합된 그 그립고도 독특한 냄새! 거기에 스님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종류의 따스함과 편안함에 가슴 속의 서글픔이 확 풀어지는 듯, 단속할 겨를도 없이 눈물이 솟구쳐 흘러내렸다. “야나! 야나!(어쩌나 어쩌나) 쏠롱쓰 사람이 몽골에서 고생이 너무 심한 거야! 저런 가엾어라!” 몽골어로 한국을 쏠롱쓰라고 한다. 무지개라는 뜻이다. 척박하고 거친 몽골의 자연에 비하면 한국은 정말이지 자연이 무지개처럼 아름답고 부드럽고 달콤한 나라이다.
돌징 칸돌마는 공산시절 휴양소의 요리사로 일할 때 거기에 왔던 ‘호이트 쏠롱쓰(북한)’사람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몽골의 음식과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매일 물고기 잡던 이야기를 아주 재미있게 묘사해서 겔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웃게 했다. 나도 눈물을 단 채로 아이처럼 웃었다. 돌징 칸돌마가 헤쳐온 고난에 찬 험난한 인생 앞에 내가 겪고 있는 고생은 어린애의 투정이었다. 공산혁명의 붉은 영웅으로 추앙된 수쿠바타르를 비롯해서 수많은 혁명 영웅들이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독립투사들로 승려이거나 독실한 불자들이었고 심지어 스탈린의 앞잡이로 몽골불교의 말살을 총 지휘한 최발싼조차도 원래는 승려였다. 때문에 소련 공산당의 도움으로 1921년에 ‘몽골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나서도 승려들과 돌징을 비롯한 모든 수행자들은 아무런 위기의 조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소련은 몽골을 이름만 공산국이 아닌 진정한 소련의 공산 위성국으로 포섭할 절대적인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몽골의 정치 지도자들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으로 불러들였으나 아무리 교육을 해도 이미 심오한 불교철학을 공부한 이들에게 공산이론이 먹혀들지가 않았다.
더구나 혁명의 주체세력이 되어야 할 소위 피지배 계급이 현생의 고난을 지배계급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업장으로 여기며 오히려 지배계급에 해당하는 고위 승려들을 지극히 숭앙하고 있었다. 현재 티벳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큰스님들을 지극히 숭앙하며 믿고 따르는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몽골에서 불교를 없애지 않는 한 인민혁명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소련은 당시 중세 상태에 머물러 있던 몽골에 신문물을 적극 공급하면서 그 힘으로 스탈린의 노선에 거스르는 몽골의 정치 지도자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암살하고 숙청함으로써 서서히 제거해가는 한편 무지한 사람들에게 높은 지위와 권력을 주고 무지한 하층민의 자제들을 공산주의자로 교육함으로써 몽골인의 손으로 몽골의 불교를 없앨 정책을 진행시켜 갔다.
소련의 비밀경찰로 일하고 있던 사촌동생이 어느날 돌징에게 “이제 곧 상상도 못할 무서운 일이 일어날테니 누이는 서둘러 결혼을 하고 불교용구를 모두 감추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충고했다. 그 말을 믿었다 해도 돌징은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사촌동생의 말대로 무시무시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수만 명의 스님들이 학살되고 강제 노동 수용소, 공장, 학교 등으로 분산되고 모든 절이 파괴되고 불태워졌다. 엄청난 양의 금속제 불상과 불교용품들이 소련으로 실려가 무기제작에 쓰여졌다. 아무도 불교를 믿어서도 안 되고 불교용품을 지녀서도 안 되고 불교의 흔적조차 남겨서는 안 되었다. 공산당은 후세들이 불교와 몽골의 역사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몽골의 문자조차 금지하고 러시아의 문자를 쓰게 하였다. 돌징은 의식과 기도에 필수 적인 다마루(손에 잡고 흔들면 끈에 매달린 공이가 북의 양면을 치는 의식용 손북)나 염주조차 지닐 수 없었고 경전을 암송하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경전과 의식의 전 과정을 암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밤마다 마음 속으로 그리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의식과 수행을 계속하였다. 최하 10년 이상의 수용소 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스님들은 불교를 포기했다는 증거로 나이의 고하를 막론하고 결혼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수용소로 다시 보내는 등 가지 가지로 압박과 고통을 가하였다.
돌징도 결혼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라서 20세 연상의 승려와 결혼을 했다. 그도 역시 좇을 수행하는 좇치였다. 결혼을 하고나니 차라리 비밀을 지키며 수행하기가 훨씬 수월하였다. 그들은 서로 도와가며 함께 수행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을 조직 속에 묶어서 철저히 관리, 감시하는 소비에트 제도 속에서 비밀리에 수행을 한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징은 휴양소의 요리사로 일했는데 주방일은 고된 육체노동의 연속이었다. 밤이 되면 너무나 피곤했지만 단 하루도 수행을 거르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자 돌징의 남편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남편의 제자와 다시 결혼해서 셋이 살아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처럼 돌징도 새 남편과 함께 전 남편을 시봉하게 되었다. 공산당은 청나라의 식민정책이었던 불교 때문에 몽골의 인구가 줄고 국력이 약화되었다고 하면서 인구를 늘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출산을 장려하였다.
돌징은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수행이 깊어가면서 법력이 드러나자 여전히 공산치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돌징을 찾았고 심지어는 당 간부들조차 비밀리에 돌징을 찾아왔으며 그녀는 ‘칸돌마’ 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파란은 처절한 것이었다. 지금도 살아있는 막내딸은 나면서부터 정박아였고 출중했던 두 아들은 다 자라서 차례로 죽었다. 둘째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고 나서 남편도 얼마 안 가서 세상을 떠났다. “수행한 법력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었으면서 왜 자신의 문제들은 해결하지 못했나요?”라고 묻는 내게 “그래 맞아요. 많은 사람들을 도우면서도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어요. 나는 부처님께 수도 없이 절을 하며 간절하게 기도했지요. 먹지 않고 자지 않고 산에 가서 기도도 하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인과의 작용은 그렇게 미묘한 것이라서 간절한 기도나 수행으로도 어떻게 극복해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닥쳤던 그 많은 어려움들이 부처님께서 나를 아끼고 사랑하신 방법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선 누구도 참으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행복하고 즐거운 것을 기다리지도 말고 믿지도 말아요. 그건 다 가짜고 텅빈 거예요. 살아가는 모든 행동의 초점을 그저 수행에만 모아야 합니다. 이렇게 귀한 인간의 몸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일은 수행입니다. 내일 당장 죽게 될지 모르니까 오늘, 지금 당장 일분을 아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돌징 칸돌마 보살은 ‘오늘 지금 당장’이라고 그렇게 강조하였지만 나는 당장은 불가능하고 좀 정리가 되고 안정도 되고 몽골말도 배운 다음에 ‘빨찌짠’을 다시 찾아 정식으로 왕(관정식 내지 사제간의 전수식)을 받고 ‘좇’ 수행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부엌 세간도 거의 없었고 편안하게 누워서 잘 수 있는 침대조차 없어서 바닥에 방석을 이어 깔고 자야 했다. 냄비며 대야 등 살림도구를 어렵사리 구해 놓아 봐야 누가 가져가는지 금방 다 없어지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견디며 살던 때였다.
돌징 칸돌마를 만나고 돌아와 함께 사는 푸루밧 스님께 좇치들이 사용하던 다마루를 구해 달라고 졸랐다. 얼마 후에 스님은 정말로 멋진 다마루 두 개를 구해다 주었다. 초심자용 나무 다마루와 수행이 경지에 오르면 필요해지는 인두골 다마루였다. 내 것이 아띠야 엄마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멋있는 것이라서 여간 신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몇 달 후에 아띠야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돌징 칸돌마가 며칠 전에 돌아가셨는데 제자들 중에 아무도 스승의 독경을 녹음해 두지 않아서 모두들 내 테이프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돌징 칸돌마를 친견하러 갔을 때 의식을 행하며 경을 암송하는 것을 녹음해 두었는데 그 테이프를 복사하기 위해 빌리러 온 것이었다. 85세라는 고령이었지만 혈색도 좋고 기운도 왕성해 보였었다. 늙으니까 추운 것이 힘들고 무릎이 좀 아픈 것 외에는 아픈데가 없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내일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지금 당장’이라고 여러 번 강조를 했건만 이렇게 좋은 세상이 왔는데 그렇게 빨리 가시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돌징 칸돌마의 수제자 중에 하나였던 아띠야의 어머니는 그 후 아예 빨찌짠에 눌러 살면서 다른 여성 제자들과 함께 절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돌징 칸돌마의 법을 완전히 전수한 제자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좇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승속간에 더러 있어서 몽골 사람들은 화급해 지면 ‘루찡’을 행하는 ‘좇치’들을 찾는다. <불광 1999년 10월>
첫댓글방생을 자주하면 전쟁이 없답니다. 자기가 몸담고있는 나라에 전쟁이라니.. 생각만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게됩니다. 그러면 共散主義 치하에서 불법을 수호하기란 자신의생명을 담보로 하는것입니다. 돌징 칸돌마의 대보살정신력앞에 우리가 어떻게 이생을 살아야할지를... 말해주고 있는것같습니다.()()()
첫댓글 방생을 자주하면 전쟁이 없답니다. 자기가 몸담고있는 나라에 전쟁이라니.. 생각만해도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게됩니다. 그러면 共散主義 치하에서 불법을 수호하기란 자신의생명을 담보로 하는것입니다. 돌징 칸돌마의 대보살정신력앞에 우리가 어떻게 이생을 살아야할지를... 말해주고 있는것같습니다.()()()
처절한 삶속에서 피어낸 아름다운 한송이 연꽃이군요. 눈물겹습니다.
몽고불교가 큰 시련을 겪었었군요... 티벳이나 우리나라는 비교도 안되는 군요...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