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욕심없이 살았던 신화적인 인물 박태준
‘영일만의 신화’를 일군 박태준은 포스코의 영광과 역사의 부침을 모두 껴안고 떠났다. 반평생 가까이 그를 보좌했던 ‘외길 홍보맨’ 이대공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그가 포스코에 불어닥쳤던 정치 외압의 비사를 처음으로 밝힌다.
“밥은 먹었나”
“줘야 먹죠. 아직 못 먹었습니다. 사장님은요?”
“나도 아직 못 먹었네. 황경노 회장과 유상부 부회장은 먹었다고 하더군. 나갈 사람은 밥 안주고, 집어 넣을 사람만 밥 준 셈이야. 조금만 더 견디세.”
1993년 6월 지금의 서울시청 임시사무실 자리에 있었던 대검 중수부 화장실에서 이대공 당시 포항제철 부사장과 박득표 포철 사장이 나눈 대화다.
YS정권 초기, 박태준 전 포항제철 회장을 비롯한 그의 가족, 친인척, 측근들은 강도 높은 세무 비리 조사를 받았다. ‘포철 4인방’으로 불리던 황경노, 유상부, 이대공, 박득표도 핵심 수사대상이었다. 민정당 대표와 이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출범한 민자당 최고위원까지 맡으며 정치에 나섰으나 사실상 포철을 지휘하던 박태준을 노려 포철의 비자금을 전면적으로 조사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황경노· 유상부 전 회장은 구속되었고 이대공 부사장과 박득표 사장은 풀려났다.
최근 <월간중앙>과 만난 이대공 포스코 교육재단 이사장은 “정권 창출에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던 YS를 거부한 박태준 회장은 YS정부 출범 이후 측근들이 세무조사와 중수부 조사를 받으며 고초를 겪어야 했다”며 “포스코는 역대 정권 중 YS 정부 때 가장 큰 수난을 받았다”고 말했다.
박정희와 TJ
“박근혜, 말을 가려서 하고 신중하게 하는 것이 부친을 빼 닮았다”
이 이사장은 1969년 1월 13일 포항제철에 입사했다. 포항에서 나고 자란 그는 포항중을 나와 경기고에 진학해 서울로 올라왔고, 그 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들어온 첫 직장이 포철이었다. 어릴 때부터 ‘영일만의 신화’를 듣고 자란 그에게 포철은 꿈의 직장이자 기꺼이 청춘을 바칠 상대였다.
“1968년에 창립 식을 한 포철이 바로 이듬해 만든 게 ‘제철 연수원’입니다. 직원들 교육시키고 해외 연수 보내는 일을 주도적으로 하던 곳이죠. 박 회장이 교육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죠. 저는 제철 연수원의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는데 배환식 원장 바로 밑에 저 혼자였어요. 배 원장은 공화당 사무국에 있던 분으로 행정은 전혀 모르는 분이었죠. 제가 막 대학을 나온 팔팔한 청년이었으니 실무 일은 뛰어 다니면서 다했죠. 부장급 회의에도 제가 들어갔었습니다.”
포철 1기생보다 먼저 입사하신 거네요?
“제가 1월에 입사하고 그해 3월에 공채 1기인 이구택 회장 기수가 들어왔습니다. 제가 두 달 전 먼저 들어와 1기생들을 가르쳤으니 포스코의 산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에 자주 내려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포항 사무소의 실무자였으니 자주 뵈었겠네요?
“직원이 많지 않았으니 가까운 거리에서 볼 기회가 많았지요. 제철 연수원은 박태준 회장이 ‘롬멜하우스’(포항사무소의 별칭) 다음으로 지은 콘크리트 건물로 2층에 홍보센터 상황실이 있었습니다. 포항공장 전체와 영일만 바닷가가 한눈에 다 보였죠. 박 대통령도 이 상황실에 올라 흡족한 마음으로 전경을 바라보곤 하셨어요.”
그는 1973년 9월 5일, 포철의 홍보과장으로 발탁된다. 이후 각 정권이 바뀌면서 포철에 정치 외압이 들어올 때마다 포철과 박태준의 방패 역할을 했었다. 당시 언론계에서는 ‘이대공’이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93년 YS정부의 세무조사로 ‘포철 4인방’이 모두 물러날 때 퇴사했지만 1998년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으로 복귀한 후 지금까지 이사장직을 유지하며 ‘포철’의 품에 있다. 그에게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누구보다 각별하다.
“우리가 흔히 존경하는 인물을 찾으라면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링컨 등이잖아요. 이들은 공간으로나 시간적으로도 동떨어져 있지만 박 명예회장은 명확한 물증이 있는 위인입니다. 포항제철소, 광양제철소, 포항공대 등 그분이 남긴 유산이 얼마나 많습니까?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으로 있는 제가 지금 관리하는 학교만 12개나 됩니다. 이 학교를 모두 박 명예회장이 설립하셨어요.”
‘포철은 박 대통령이 만들었고 박태준은 그저 실행자였을 뿐이다’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둘 중 한 명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역사 인물로 대입을 하자면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이라고 할까요. 송복 교수가 쓴 책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읽어보니 늦깎이 말단 무장 이순신을 만나 단번에 7단계 파격 승진을 시키는 인물이 류성룡이었습니다. 류성룡이 박정희고 이순신이 박태준이죠. 류성용이 없었으면 이순신이 없었고, 박정희가 없었으면 박태준은 없었습니다.”
박 명예회장은 박 대통령에게 인간적으로는 무한한 신뢰를 보냈지만 그의 정치를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았죠?
“박정희의 유신개헌은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TJ(박태준)는 비록 나중의 일이지만 장쩌민, 후진타오, 시진핑으로 권력이 넘어간 중국의 예처럼 평화로운 정권교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명예회장님은 3선개헌에 사인하길 거부했잖아요. 당시 누가 그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일러바쳤는데 박 대통령이 “원래 그런 사람이니 내버려두라”고 했어요. 그 정도로 박 대통령은 인간 박태준의 능력, 사명감 등 모든 면에서 신뢰하고 믿어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에 시찰을 내려올 때 가족도 대동하고 오셨죠?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도 어릴 때부터 포철과 인연이 깊었다지요?
“육영수 여사께서 생전에 근혜, 근령, 지만을 데리고 오셨죠. 지금도 기억납니다. 큰딸 근혜는 항상 아버지의 뒤편에서 눈에 띄지 않게 다녔습니다. 반면 작은딸 근령은 활발하고 당차서 언제나 앞쪽에 나와 있었죠. 그런 광경은 사진으로도 잘 나타납니다. 박 비대위원장은 어릴 때부터 부친과 함께 포철을 시찰하며 산 경제 공부를 한 셈이죠.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포철의 구석구석을 보고 다녔거든요.”
박 명예회장은 박 비대위원장을 어린 시절부터 지켜본 분인데, 평소에는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지난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와의 경선 과정을 지켜보시곤 ‘말을 가려서 하고 신중하게 하는 게 부친을 빼닮았다’는 말을 하셨어요. 박 비대위원장은 2007년 경선 이전에는 명예회장을 가끔 찾아오곤 했어요.”
이 이사장이 밝힌 박정희 시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포철을 시찰 나왔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이 이사장은 28살의 청년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박정희 시대가 내 기억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의 증언은 주로 1993년 포철을 퇴사하기까지 겪었던 YS정부와 5·6공에 집중됐다.
5·6공 때의 포철 수난사
“정부의 제 2제철 분리 움직임과 장외매각은 무조건 저지하라”
“우리에게는 부과된 임무와 국가적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사명에 대해서 계속 충실하게 해나갈 것을 고인(박정희)께서도 바라고 계실 겁니다. (중략) 우리 회사가 11년의 연륜을 쌓아오는 동안 회사의 기본 성격을 잃을 뻔한 중대한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고인께서 단호한 결단을 내려주셨습니다. 앞으로는 과거보다 더 엄청난 장애 요소가 가로 놓여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제 우리 스스로 자주적으로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축적하는 것입니다.”
1979년 10월 30일, 박태준이 임원간담회에서 말한 특별 훈시 내용이다. 그는 10월 27일 꼭두새벽에 포항 숙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부음을 들었다. 정부가 대주주인 포철로서는 정치적 강풍을 막아주던 튼튼한 ‘울타리’가 사라진 셈이다. 그의 특별훈시는 ‘포철을 보호해주던 울타리가 사라졌지만 순수하게 우리의 힘으로 모든 정치적 장애물을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당부였다.
박태준은 박 대통령을 대신해 스스로 포철의 울타리가 되려고 정치에 입문한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신군부 체제에서 입법회의 제1경제위원장으로 내정됐다. 1980년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포항에 있는 박태준을 서울로 불러 올려 “내년 봄 새로 국회의 문을 열게 될 때까지 국회를 대행할 임시 입법기구로서 ‘국가보위입법회의’를 발족하는데 그 부의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박태준은 이때 “법률 제정과 같은 일은 거의 문외한이고 차라리 경제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맡겠다”며 수락했다.
1년 뒤인 1981년 11대 그는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11, 13, 14대까지 3선을 한 그는 1990년 집권당인 민정당 대표를 지낸다.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민자당 대표 최고위원 아래서 최고위원까지 맡았지만 대선 공약으로 내각제 개헌을 요구하며 갈등을 빚다 대선 직전 탈당한다.
박정희 대통령 사후 포스코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당시 박태준 회장의 정치 입문은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시해를 당하고 나니까 울타리, 우산이 없어진 셈 아닙니까? 그때부터 박 회장은 내부 경영보다 체제 안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총대를 맨 거고요. 지금까지 포스코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정권의 눈치를 본다는 말씀입니까?
“구체적으로 언급하긴 힘들지만 솔직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스코가 눈치를 본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박 회장께서는 포스코가 현실과 타협한 부분이 밝혀지면 노발대발하셨어요.”
이대공 이사장을 비롯해 윤석만, 조용경까지 포철 홍보의 3두 마차라 불린 세 분이 5공의 포철주식 장외 매각을 저지하느라 무진 애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공공연히 정부에서 포철을 SK에 판다는 말이 퍼질 때였습니다. 당시 SK 상무가 우리 수출부장한테 저녁을 먹으면서 ‘까불지 마라. 얼마 안 있으면 포철은 우리 것이 된다’고 했다는 막말까지 전해들었어요. 그때 포항에 계시던 박태준 회장이 저를 차에 태우시고 하신 말씀이 ‘정부의 제 2제철 분리 움직임과 장외매각하는 이 두 개는 무조건 저지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를 비롯해 포철 간부들이 서울 올라가서 보도 자료 만들고 발로 뛰어다니면서 언론에 배포했습니다. ‘포철이 장물이냐, 왜 장외 매각하느냐’, ‘포철 장외 매각은 5공 최대의 흑막이다’ 하면서 용감하게 치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경제기획원 차관한테서 전화가 오더군요. ‘어디다 대놓고 이런 식으로 정부 방침을 방해하느냐’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나한테 협박 전화한 내용까지 모두 신문에 공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죠. 그렇게 장외 매각을 결사적으로 저지했습니다.”
이 이사장님은 1985년 포항공대 건설본부장으로도 뛰셨죠? 당시 야당 측으로부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국민세금으로 짓는 학교니까 반발이 당연히 컸죠. 저와 김호길 초대 총장, 안병화 사장이 당시 문교부(현 교육과학기술부) 국정감사를 받았는데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야당의원들은 ‘국민 세금이 박태준 개인 돈이냐, 나라에 쓸 돈을 서울도 아니고 지방 구석에 호화판으로 짓는 게 말이 되느냐?’고 원색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저희는 박 회장의 뜻에 따라 ‘미래를 위해서는 다른 먹거리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교육이다. 교육에 대한 투자는 얼마든지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를 믿어달라’고 했죠. 결국 포항공대가 지금 우수인재들이 몰리는 세계적으로도 경쟁력 있는 대학이 되지 않았습니까?”
1992년 대선 직전에 노태우 대통령이 박태준 회장을 밀다가 나중에 민자당 대선 경선에서 박 회장을 포기시키잖아요?
“노 대통령에게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죠. YS가 그걸 알았거든요. 한보에서 받은 비자금 건이었죠. 그때 YS가 ‘노태우 약점을 잡고 있는 기둥이 세 개인데 그중 기둥 하나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것 때문에 노태우 대통령은 YS 손을 들어주었죠. 대선에 나가겠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이리저리 정치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에 박 회장은 울분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민자당 탈당을 선언한 후 YS가 대책 수립에 동분서주하다 박 회장을 찾아오잖아요? 선대위원장을 맡아 달라고요. 그때 박 회장께서 완강히 거절하셨죠?
“그때 박 회장에게도 포스코에도 위기였죠. 측근들이 어떻게 할지 의논하려고 박 회장 가족까지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1남 4녀 중 누가 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딸·사위들까지 모두 모였어요. 그리고 제가 박 회장 가족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죠. ‘언론사 정치담당과 논설위원 이야기를 죽 들어보니까 YS같이 운동권 출신이 대통령이 되면 가신하고 심복하고만 살리고, 모조리 몰살시킬 거라는 이야기를 하더라. 처음 운동권 대통령이 나오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지 어정쩡하면 안 된다’라고요. 뭔가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종용했어요.”
YS에 줄을 서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까?
“도우려면 확실히 도와야 한다고 한 거죠. 건의서까지 만들어서 박 회장에게 드렸죠. 1안은 포철 관련 모든 직책을 사퇴하고 정치에 전념하면서 YS와 경쟁하는 선택, 2안은 모든 정치적 관계를 청산하고 포철의 미래에 전념하는 선택, 3안은 YS 선대위원장을 수락하고 여당의 고위직을 유지하면서 포철 명예회장으로 남아 대외업무만 맡기로 하는 중도적 선택이었습니다. 측근과 가족들은 중도안을 선택하길 바랐지만 회장은 이 권유를 물리치고 말았죠.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민정계 국회의원 두 명에게 바로 전화가 오더군요. ‘포스코 부사장이나 잘하지 당신이 왜 가타부타 정치 문제에 개입하느냐’고요. 박태준 회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지금 YS가 대통령 되면 어떡할 거냐. 할 사람은 이분(박태준 회장)뿐’이라며 YS와 한 배를 타는 것을 결사 반대했습니다.”
YS가 도와달라고 광양까지 내려왔었잖아요?
“그랬었죠. 그런데 도와달라는 이야기 말고는 논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선지 광양까지 헬기 타고 내려온 사람인데도 박 회장은 좋은 말을 해주지 못했던 거 같아요. 그때 사진 보면 두 사람이 서로 나란히 앉아 다른 곳을 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박태준 회장은 그때 어떤 심경이었을까요?
“박 회장이 저를 서울의 롯데호텔에 방을 하나 잡아놓고 부르시더군요. 그리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YS는 5분만 말해보면 바닥이 드러난다, 이 사람이 대통령 되면 경제를 사고 낼 수 있다. 나는 절대로 이 사람 지지 못한다”고요. 외환위기를 딱 맞추신 거죠.”
YS정권과 TJ의 악연
“당시 360억 발표는 터무니없는 날조였다!!”
이대공 이사장은 메모광이다. 포철 입사 때인 1969년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정, 전화번호, 자금 출처 등을 메모해왔다. 요즘 들고 다니는 2012년 수첩에도 일정이 연필로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지금도 집에 가면 메모를 해 놓은 자료가 수북해요. 국세청 세무조사와 중수부 조사받을 때 엄청나게 빼앗겼지만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메모 습관이 아니라면 과거 일들을 지금처럼 샅샅이 기억 못합니다.”
그의 기억과 기록에 따르면 YS 정부는 포철의 세무조사를 강도 높게 진행하며 과장 이상 간부와 임원진 전원(903명)의 주민등록번호, 1989년 이후 3년 간 신상변동 내용, 은행당좌계정원장과 수표결재내용, 어음 지급 발행대장 등을 샅샅이 뒤졌다. 서울과 대구에서 수십 명의 국세청 조사국 요원이 포철에 들이닥쳐 박태준 회장의 측근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모조리 6개월 동안 출국정지 조치를 받았고 중수부 조사까지 받았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이다. 이 이사장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넥타이를 풀어헤치면서 당시 상황을 재현했다.
“중수부 조사실에 들어가자마자 제일 처음 넥타이를 풀라고 했어요. 조사받다 자살할까 봐 그런 겁니다. 제가 바로 행동을 취하지 않자 바로 육두문자가 나오더군요. “이 새끼야 니가 청와대 비서실장하고 통화하고 국정원 차장하고 통화하니 무서울 게 없다는 거야? 이런 건방진 놈”이라고요. 넥타이 풀면 허리띠도 풀게 합니다. 그 다음에는 신발을 고무신으로 갈아 신게 합니다. 원래 기결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런 명령을 하는 자체가 불법이거든요. 허리띠를 빼놓고 나니, 화장실 갈 때도 바지가 흘러내려서 붙들고 가야 합니다.
도망 못 가는 거죠. (일어나서 그 흉내를 내며) 질질 끌고 이렇게 가는 겁니다. 완전 무방비 상태인 거죠. 그 분위기가 사람 잡는 겁니다.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 다 이해 갑니다. 단 한번이라도 중수부 조사를 받아본 사람들이면 그 심정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네요?
“중수부 조사를 받던 포철 임원진들은 진짜 살얼음판 걷듯 마음을 졸이고 살았어요. 전화도 도청될까 봐 제대로 못 걸었어요. 간첩이 접선하듯이 만났다니까요. 예를 들어 ‘나 선생이 7시에 만나자’라고 하면 라마다르네상스호텔에서 만나자는 암호입니다. ‘리 선생이 9시 반에 만나자’고 하면, 리버사이드호텔 커피숍에서 9시 반에 만나는 식이었죠. 대한민국 최고 직장에 다니면서 잘 나가다 졸지에 쫓겨 나와 도망자 신세가 됐으니 가슴이 미어졌죠.
이 이사장뿐만 아니라 박득표 사장, 황경노 회장, 유상부 부회장도 다 조사받으신 거죠?
“나중에 들어보니 인간 취급 못 받기는 다 마찬가지였어요. 박득표 사장은 화장실을 자주 간다고 야단을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화장실 다녀 오면서 박 사장이 조사받는 방을 들여다봤더니 다른 불은 다 꺼지고 붉은 백열등만 켜 있더군요. 그 아래서 자술서를 쓰게 하는 겁니다.”
많이 위축이 되셨을 텐데 어떻게 그 순간을 넘기셨나요?
“분위기가 위압적이라 그렇지 저는 독실한 크리스챤이라 절대 겁을 안 냅니다. 박 회장뿐 아니라 포스코 임원 모두 자기 욕심 챙기자고 돈 먹은 것 없으니 겁 낼 게 뭐 있겠어요? 선조의 피의 대가인 대일청구권 자금을 가지고 만든 회사인데 어떻게 딴 주머니를 가졌겠습니까? 뒤져봐야 나올 게 없으니 당당했던 거죠.”
중수부에서 이사장님에게 집중적으로 캐물은 건 뭐였나요?
“제가 포철 기밀비 관리 책임자였으니 이대공을 어떻게든 잡아 넣으려고 작심했겠죠. 저는 당시 3억5000만원을 착복했다는 소문이 나 있었어요. 그때 중수부장이 김태정 전 법무장관이었는데 6개월 출국정지 되자마자 국세청이 다 뒤져서 제 금싸라기같이 보관해오던 메모와 서류들 한 드럼통을 빼앗아갔어요. 그때 제 통장에서 들고난 돈을 발견했나 봅니다.”
그 돈은 어떤 돈이었습니까?
“제가 딸 세 명,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아이들 어학연수 보낼 때 미대사관에 비자 발급을 수월하게 받으려고 잠시 통장에 서류 상으로만 빌려온 돈이었습니다. 모씨에게 1억5000만원을 빌려서 서류상으로 내 통장에 넣었다가 그날 중으로 다시 빠져 나가게 했던 거죠. 서류상으로만 왔다갔다한 겁니다. 은행에서는 이대공이라는 사람의 신원이 확실하니까 그렇게 해준 거죠. 그런데 집사람이 갑자기 그 생각이 났던 겁니다. 중수부 조사받기 전날 밤 애들을 다 불러 모으더니 언제 어학연수를 갔다 왔는지 상세하게 적게 하더라고요. 그러곤 다음날 아침 그 메모를 쭉 찢어 제 와이셔츠 주머니에 넣어줬습니다. 결정적으로 그 메모가 저를 살렸죠. 수사관이 3억5000만원의 출처를 물을 때 그 메모를 보여줬거든요. 6개월 출국금지 받은 사람을 밤샘 조사해서 나온 게 그게 전부였으니 검찰 체면도 말이 아니었죠. 자정 가까이 되니까 허리띠를 툭 던지며 “가져가!” 하더군요. 저와 박 사장은 나왔지만 황경노 회장과 유상부 부회장은 못 나왔어요. 두 사람은 결국 구속돼 6개월을 살았지만 나중에 헌법재판소에서 이겨서 무죄로 나왔어요. 누가 봐도 검찰이 무리한 수사를 한 겁니다.”
이에 대해 YS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 전 문화부장관은 “박태준이 정치를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 포철 회장이라서 탄압한 건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당시 정치 상황을 지켜보았던 한 일간지 정치부 기자는 “그때 포철 임원진들이 기업의 임원으로서 역할만 한 게 아니라 박태준 회장의 정치 보좌관 역할도 했기 때문에 비자금 조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검찰수사와 국세청 조사의 핵심은 박 회장의 비자금 문제였다. 하지만 포철의 비자금 조성은 드러나지 않자 수사 범위가 더욱 확대됐다. 협력회사 등 32개 사로부터 받았다는 56억 원, 결혼한 자녀들의 주식과 공동 소유의 부동산, 가까운 타인 명의의 부동산까지 모두 ‘박태준의 주머니에서 나간 돈’으로 규정해 박태준의 개인 재산은 총 360억으로 부풀려졌다. 그러나 1997년 7월 24일 포항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박태준이 공동 소유의 부동산까지 모두 합쳐 신고한 재산 총액은 36억4427만4000원이었다. 당시 360억 발표는 터무니없는 날조라는 게 박 명예회장 측의 주장이다.
박 회장은 당시 일본에 계셨었죠?
“6개월 출국정지 하루 전날 일본으로 가셨어요. ‘화를 면하려면 떠나시라’는 주변의 언질을 받고 가셨어요. 나중에 측근들이 겪은 고초에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1992년 대선 직전에도 박 회장은 외국에 나가 계셨죠?
“어수선한 정국에도 포철의 미래를 위해 바깥으로 눈을 돌리셨어요. 그때 이미 동남아 시대를 예견하고 싱가포르에 부서장을 보내고 베이징에도 내보내면서 인력들을 동남아 쪽으로 전진배치 했습니다. ‘중국이 앞으로 원료의 블랙홀이 된다’고 하시면서 20년 후를 정확히 내다보셨어요. 이 때문에 ‘빨리 원료를 확보해야 한다’고 하셨죠. 포스코건설을 통해 중국에 7000km짜리 고속도로 공사를 따낸 것도 명예회장이 직접 하신 일입니다. 명예회장은 1992년 본의 아닌 퇴임으로 그 뒤에 원료구매 적기를 놓쳤다며 두고두고 안타까워했어요.”
정치자금과 TJ
“노무현이 대통령 될 줄 알았다면 더 줄 걸 그랬어”
이 이사장은 인터뷰 도중 수첩에 끼워 놓은 빛 바랜 카피본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박 명예회장이 포스코에서 마지막 2년 동안 받은 월급명세서였다. 1993년 3월 11일 공식적으로 포철 회장을 사퇴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된 박 명예회장은 그해 1월 월급이 200만1230원으로 적혀있다. 1992년 11월은 194만2720원이었다.
“4반세기 대역사를 만들기 전까지는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해서 우리가 다 이렇게 따라간 겁니다. 우리 중 누구도 포스코에서 돈 번 사람 없어요. 1988년 포스코 직원 1만9419명이 발행주식 10%를 우리사주로 배정받았을 때도 박 명예회장은 받지 않았어요. 요즘 포스코 회장 연봉이 얼마나 되는 줄 아세요? 그러면 박 회장 월급명세서의 의미를 알게 되실 겁니다.”
명예회장이 평생 돈 욕심을 내지 않았다는 말씀이군요. 일본으로 유랑생활을 할 때도 빈손이었나요?
“일본으로 황급히 떠나시기 하루 전인가 이틀 전에 주변에서 박 회장의 재산문제를 제게 운운하길래 “내의도 제대로 못 챙겨 나가시는 분이 무슨 재산을 챙기느냐?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했더니 그걸 듣고 회장께서 호통을 치면서 “자네는 날 지금 두둔한다고 하는 말이냐, 내가 시간이 있었다면 돈을 챙겨나가리라 보느냐. 내게 그런 돈이 어디에 있느냐?”고 호통을 치더라고요. 그 분은 평생 집 한 채도 챙기지 않았어요. 부친이 살던 기장에 옛날 집 하나 있는 거 말고는 없어요. 둘째딸 집에 살다가 청운동에 집 지어 아들이 모시려 했다가 이번에 병원에서 갑작스레 돌아가신 겁니다. 1998년 포스코가 4반세기 대역사 임무를 완공한 후에 가장 먼저 한 일이 박 대통령이 하사했던 북아현동 집을 13억6000만원에 파신 겁니다. 그중 10억 원은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했고 나머지 3억6000만원은 논현동에 전셋집을 얻는 데 쓴 분입니다.”
박태준의 재산 문제가 불거진 건 DJ정부 때다. DJT연합으로 이뤄진 DJ정부에서 첫 총리를 맡았지만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으로 재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이를 두고도 정치공작이라는 해석부터 박태준이 이룬 명성에 비하면 ‘티끌 같은 오점’일 뿐이라는 의견 등 분분하다.
문제의 발단은 2000년 한 일간지에 실린 이 기사였다. “1993년 YS정부 때 국세청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모든 것은 박태준의 재산’이라고 밝힌 조 모씨가 증여세 20억원은 억울하다고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법원이 8억원은 억울하다고 인정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한 시민의 억울한 사정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현직 국무총리가 과거에 부동산을 취득하면서 조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일부를 조씨에게 명의신탁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7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 다시 불거졌고 언론은 ‘아무리 명의신탁 금지법 제정 이전의 일이었다 하더라도 옛날에 세금을 적게 내려고 명의를 신탁했다’며 현직 총리를 몰아세웠다. 그러나 이런 공세의 배경에는 정치적 음모도 없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왔다. DJ 대통령 만들기에 힘을 합쳤던 김종필의 자민련은 내각제 개헌 문제로 DJ정부와 결별했다. 지민련과 집권당 국민회의와의 공조는 깨진 것이다. 따라서 자민련 출신의 박태준 총리는 당시 DJ 측근들과 물과 기름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박 회장의 일본 망명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이 이사장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일본에 계실 때 평생 처음 12평 아파트에 사모님과 계셨는데 제가 엎드려 세배를 하고 일어서다 보니 박 회장 정강이 곳곳에 멍이 들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웬 멍입니까?’ 물었더니 ‘집이 좁아 일어설 때마다 자꾸 부딪힌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서럽던지 박 회장 앞에서 엉엉 울고 말았죠.”
요즘도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지만,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포철에 압력을 넣진 않았나요?
“전두환 대통령도 정권을 잡은 후 박 회장에게 “좀 도와달라”고 해서 1억을 준 적이 있어요. 그때 전 대통령을 모시던 모 비서관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와 ‘10억 정도는 줘야지 1억원이 뭐냐’고 하더라고요. 노무현 대통령도 대통령 되기 전에 찾아왔어요. 노무현 후보가 당시 울산노조까지 영향력이 크지 않았습니까? 그쪽에서 포스코까지 손을 대려 했어요. 박득표 전 회장이 당시 부사장이었을 때인데 노 후보가 와서 도와달라고 할 때 자신이 관리하던 기밀비로 200만원을 줬다고 합니다. 정치인에게는 푼돈도 안 되는 금액이죠. 나중에 박 회장이 우스갯소리로 ‘노무현이 대통령 될 줄 알았다면 더 줄 걸 그랬다’고 웃으며 말해요. 포스코의 씀씀이가 그렇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에게 준 1억 원이 정치자금으로는 제일 많다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박 회장이 육사 후배라고 그 정도 챙겨준 겁니다. 정치자금에 크게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포스코가 있는 겁니다.”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박태준이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을 때 전두환은 육사 11기로 4년제 정규 육사의 첫 4학년이었다. 그렇게 육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같은 연대에 근무한 적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 대령 박태준이 참모장이었을 때 대위 전두환은 중대장이었다. 둘은 훗날 대통령과 기업인으로 만났지만, 박태준을 정치에 본격적으로 입문시킨 사람도 전두환이었으니 둘의 인연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박태준 없는 포스코의 미래
“그분은 목숨 걸고 지켰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래, 왔어…. 난 잘 있어.”
박 명예회장이 이 이사장을 마지막으로 본 날 한 말이다. 지난해 12월 13일 작고하기 한 달 전쯤이다. 박 명예회장은 폐 수술을 끝내고 난 직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회복 중이었다. 이 이사장은 “그때만 해도 명예회장이 그렇게 빨리 세상을 하직하실지 몰랐다”고 말했다.
마침 이 이사장을 인터뷰한 날은 고 김근태 민주당 고문의 장례식이 열렸다. 그는 사무실 한켠에 있는 신문 기사를 끌어 당기며 “박 명예회장은 생전에 이 분(김근태)을 참 좋아하셨다”고 말했다. “철저한 보수주의자였지만 이념의 스펙트럼이 넓은 분이라 한겨레 창간 때도 앞장서 5억원을 기부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끌던 아름다운재단도 많이 도왔다”고 덧붙였다.
이 이사장은 인터뷰 내내 사사건건 ‘인간 박태준’을 옹호했지만 그 어떤 위대한 인물도 과오가 없지는 않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박태준 명예회장이 포스코의 회장 직을 물러난 뒤로도 계속 포스코의 ‘상왕’(上王) 노릇을 했다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소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의미 심장한 답변으로 4시간의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명예회장이 회장직을 물러난 이후로도 왜 포스코 곁에서 맴도셨냐고요? 당신은 목숨 걸고 지켰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렇게 못 했기 때문입니다. 명예회장은 포스코가 특정세력이나 기업에 경영권을 빼앗길까 가장 우려하셨습니다. 제 2제철소를 현대제철에 빼앗긴 것과 함께 이 점을 가장 걱정했습니다. 눈을 감으실 때까지 ‘포스코의 경영권을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했어요. 저는 청춘을 바쳐 박 명예회장을 최 측근에서 모셨습니다. 현재의 정준양 회장도 한국 역사상 최초로 대형 고로에서 쇳물이 터져나오는 첫 출선의 만세를 부른 세대가 아닙니다. 지금의 포스코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선사시대’ 이야기지요. 이 때문에 저는 ‘박태준’이라는 한 인간에 대한 무한한 존경과 애정을 버릴 수 없습니다. ‘포스코 43년’은 박태준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정치 외풍에 적게 흔들렸다고 생각합니다. ‘포철 1세대’로서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박태준 없는 포스코가 굳건하게 홀로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