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공연히 어깨가 아프고 기침이 나왔다. 처음에는 감기인 줄 알고 동네 약국에서 3일분 감기 약을 지어먹고는 그대로 서울 종로에 있는 직장에 다녔다. 일산에서 전철로 출퇴근하기에 가까운 거리가 아니어서 인지 몸이 여전히 나른하고 힘이 너무 들어서 하루는 집에서 가까운 내과 병원을 찾았다.
그랬더니 이게 무슨 일일까? 결핵이라는 거였다. 내가 깜짝 놀랬더니 선생님은 요즘 약이 좋아서 결핵은 잘 낫기도 하고 약만 먹으면 가족들에게 전염되지도 않으니까 너무 무서워하지 말고 보건소에 가서 무료 진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보건소에서 한달 반분의 약 한아름을 타다가 열심히 먹으며 직장만은 쉬지 않았다.
그런데 약을 먹는 동안에는 기침이 멈추었으나 약을 다 먹고 나면 다시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6남매 중 네 번째인 나는 어릴 때부터 특히 언니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 왔는데 이 때도 언니들이 앞장서서 나를 일산에 있는 큰 병원으로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게 했다. 병원에서는 검사가 끝나자 일주일 후에 오라고 하였다.
그 날부터는 어쩐지 마음도 편치 않고 몸도 더 아픈 것 같아서 아예 직장에 나가지 않고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던 내가 오랜만에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마치 중환자라도 된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는데 일주일 후에 오라고 하던 병원에서 닷 세만에 전화를 걸어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하였다. 병원의 그 연락이 무엇을 뜻하는 지 나는 몰랐다. 그러자 의사 선생님은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했는데 왜 혼자 왔느냐?”고 좀 언짢게 말하고는 한참동안 망설이더니 “아무래도 암 같다”고 하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우선 폐암만은 확실하니까 다른 부위도 한번 정밀 검사를 해 보라고 해서 위 내시경도 하고 자궁 검사도 해 보았으나 다행히 다른 곳에는 아직 전이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병원에는 폐를 전문으로 보는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추천서를 받아 암센터로 유명한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병원에서는 젊은 의사가 나를 맡았는데 그 분은 무엇이 그렇게도 바쁜지 마음이 불안한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혀 돌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할 수 없이 친정이 있는 부평의 성모자애병원으로 옮겨갔다. 거기에서는 내가 가지고 간 여러 가지 검사 결과를 보고 그 자리에서 즉시 입원하라고 하였다.
2천년 1월이었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소 내 병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알았고 또 한 두 달에 나을 병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건축현장에서 목공일을 하는 남편을 만나 아들 둘을 낳으면서 열심히 살아보려고 애썼지만 나보다 일곱 살이나 위인 남편은 목공 재주가 훌륭한 데도 사람이 너무 물러서 일을 하고도 노임을 제대로 받아오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것을 모두 내 탓으로 돌리고 나 때문에 무슨 일이 잘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이때 남편과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9 남매 중 일곱 아들과 딸이 둘이었던 시댁에서 시아주버님 세 분이 한결같이 나를 아껴주시고 형님들도 나를 많이 위로해 주었던 덕분으로 그 때마다 그런 대로 참고 넘길 수 있었다.
나는 다니던 직장을 아주 그만두고 그 동안 남편 모르게 가입해 두었던 암 보험 등 모두 세 가지 보험의 혜택으로 어렵지 않게 장기입원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경위를 알게 된 시댁 아주버님들이 모두 병원에 찾아와서 기특하다고 칭찬해주시고 병원비도 적지 않게 도와주실 때 평소에도 내 주변에 참 좋은 분들이 많구나 하는 고마운 생각을 했지만 새삼 시댁 어른들이 얼마나 귀한 분들인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아무튼 나는 입원 후 15일간 줄곧 온몸 검사를 철저하게 받느라 시간을 다 보냈는데 먼저 병원에서는 찾아내지 못했던 암 세포의 전이 상태가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달 전부터 아프던 오른쪽 어깨뼈에도 이미 전이되어 있었고 골반 뼈와 자궁에도 전이되었으며 늑막에는 물이 가득 고였고 심장에도 물이 찼다는 것이다.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 길고 지루한 투병생활의 개막이었다.
그즈음 큰언니가 하루는 인천 성은교회 정규병목사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내 병실을 찾아왔다. 친정 아버님은 지금도 예수를 믿지 않으시지만 어머님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셔서 나도 학교 다닐 때는 믿음 생활을 했지만 결혼 후 믿지 않는 가정에서 남편의 반대로 교회와 인연을 끊은 지 오래됐는데 언니가 목사님 내외분을 불시에 모시고 와서 처음에는 약간 당황했다. 최규병목사님 내외분이 처음 내 병실을 찾아 오셨을 때만해도 그저 한번 들러주신 것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두 분은 그 후 한 주일에 한 번 아니면 두 번씩 매 주 찾아 오셔서 찬송도 불러 주시고 성경도 읽어 주시고 그리고는 좋은 말씀을 해 주셨다. 사모님은 나에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묻고는 다음에 오실 때에는 꼭 그것을 사 가지고 오셨다. 목사님은 “당신은 틀림없이 병을 이겨낼 사람인 것을 주님이 약속 하셨으니 마음을 늘 편안히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기만 해요”라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저는 오직 목사님 내외분이 참 고마운 분들이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병세가 많이 좋아져서 일산 집으로 돌아와 있었는데 2000년 7월 집을 이사하면서 얼마나 무리했는지 오른쪽 엉덩이뼈가 아프고 다리 전체가 쑤셔서 견딜 수가 없어 다시 병원을 찾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다시 핵의학 사진이라는 것을 찍더니 이번에는 코와 목에도 암이 전이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심장에 고인 물을 수술해야 산다고 해서 그 어려운 심장 수술까지도 받아야 했다.
수술 후에는 왼쪽 유방 위 정맥에 고무 호스를 연결해 주었는데 이 곳에서는 계속 피고름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방사선 치료를 받아 머리카락은 다 빠지고 피부는 까칠까칠하니 할머니 피부처럼 되어갔다.
내가 다시 병원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알고 최목사님 내외분은 나를 또 찾아 주셨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나는 나도 모르게 사모님 손을 잡고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때 목사님은 나에게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할 수 있는 의학적 치료는 다했으니 나머지 당신 생명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어떻겠느냐”고 말씀해 주셔서 나는 얼른 목사님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며칠 후 목사님 내외분은 나를 태워서 어디론가 멀리멀리 갔는데 그 곳이 바로 초락도기도원이었다.
오시면서 사모님은 우리가 여러 번 가본 곳이니 무서워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찬송하고 기도만 하라고 일러주었다.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 기도원에서는 대성회가 한창 열리는 중이라 목사님 사모님 전도사님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렇지 않은 분들 가운데는 나와 같은 환자들이 많아서 “역시 아픈 사람들이 오는 곳이구나!” 하는 안도감이 먼저 생겼다.
원장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고쳐주실 것을 믿고 기도만 해요” 라는 말씀도 저에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금식을 막 시작하려고 하는데 간호사 출신인 제 바로 밑 여동생이 찾아와서 금식하기 전에 병원에 가서 한번 더 진찰을 받아보라고 하길래 믿음이 돈독한 동생 말이라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런데 나는 약만 한 보따리 가지고 기도원으로 돌아왔지만. 나중에 들은 동생 말에 의하면 담당 의사의 말이 “언니는 이제 가망이 없으니까 언니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주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울러 가슴에 달아놓은 고무 호스도 뗄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9월 1일부터 ‘21일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병원에서 가지고 온 약은 풀지도 않았다. “믿음이란 그런 것인지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되더군요.”
그리고 금식 중에 나는 다음과 같은 체험을 했다. 제일 먼저 도대체 모든 냄새가 그토록 싫어서 24시간 풀어 보지 않았던 마스크를 풀어 버린 것이다. 공기라고 할까. 산소라고 할까. 아무튼 숨쉬기가 그렇게 편하고 좋은 것이었다.
그리고 숨이 차서 찬송가 한 절을 계속 부르기가 힘들었는데 한 곡을 다 불러도 괜찮은 것이었다. 목이 잠겨서 말하기도 싫었는데 목이 탁 트였다. 가슴에 매달려 있는 고무 호스에서는 쉬지 않고 피고름이 흘러 내렸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호스는 말라붙었다.하루는 잠을 자고 나니 호스가 저절로 빠져 있었다. 그런데 피가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소변을 보면 거품도 아니고 덩어리도 아닌 주황색 물체가 변기에 떠있었다. 그렇게도 아프던 어깨도 아프지 않고 쑤시던 다리도 쑤시지 않게 되었다.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쁜 일은 남편의 변한 모습이었다. 지금껏 다정하게 얘기해 본 기억조차 거의 없을 만큼 사이가 안 좋았고 한 때는 헤어질 생각까지 했던 남편이 기도원으로 나를 찾아 주었고 그리고는 나에게 “내가 정신차릴께! 이제부터는 내가 돈도 벌고 당신을 걱정시키지도 않을 거야. 보험도 들겠어.”라고 말하고는 실로 오랜만에 내 손을 꼭 잡아 주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 길로 대구의 공사현장으로 가서 하루건너 나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남편은 전화할 때마다 자기가 먼저 “교회에 나갈 테야!” 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직 교회에 나가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벌써 예수를 믿고 있는 듯이 보였다. 나는 초락도기도원에서 내 모든 병의 마지막 마무리를 한 셈이다.
죽는 것으로만 알고 준비하던 가족들 앞에 건강한 얼굴 기쁨의 찬 얼굴을 보여준 것이 마치 개선 장군처럼 자랑스러운 것은 이것이 모두 초락도기도원에서 받은 폭포 같은 성령님의 은혜임을 알기 때문이다.이제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을 병을 치유 받아 새생명을 얻은 체험자로서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를 증거하며 살아가려 한다.그래서 나는 남편을 필두로 하여 친정 아버님 큰 형부 둘째 언니와 형부 등 내 가족 친척부터 먼저 전도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할 것이다.
이런체험을 통해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가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깨닫게 했다.그리고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외침으로써 죽음 앞에서 육체의 질병 고통으로 몸부림 치는 많은 사람들에게 밝은 빛을 따라갈 수 있는 길을 인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