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를 품고 있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산이 가야산이다. 해발 1,430m의 준봉으로 합천, 고령, 성주, 거창의 네 군에 걸쳐있는 큰 산이다. 가야산은 우두산 또는 상왕산이라 불렀다고 하며 신라 말 최치원과 연관된 설화가 많기로도 유명하다 지금 이곳의 지명이 가야면 치인리인데 원래는 치인이었고 이는 또한 치원이 변하여 그렇게 된 것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처럼 최치원 선생으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해인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홍류동이 있다 최치원이 지었다는 시 한수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 이 홍류동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지고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너러석바위를 이리저리 감돌아 아마도 선경인 듯 그 빼어난 경치로 인하여 더욱 유명한 곳이다. 최치원의 시가 새겨진 바위를 치원대 또는 제시석 이라고 부른다. 가야산에는 정견모주라는 산신이 있어서 예로부터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동국여지 승람에 의하면 해인사 안에 정견천왕사가 있어서 대가야국의 왕후인 정견이 죽은 뒤 산신이 되어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이 머무는 가야산은 그만큼 신령스러운 산이어서 수많은 전란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래서 귀중한 팔만대장경을 이곳에 보관하게 되었던 모양이 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에도 이곳만은 화를 면하였으니 법보(法寶)를 간직할 만한 곳이라 하겠다.
해인사가 처음 세워진 것은 신라 애장왕 때라고 한다. 여러 가지 문헌들이 있어서 이를 기 록하고 있으며 비교적 통일된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해인사를 창건하기 시작한 분은 순응(順應)이라는 스님이다. 순응은 중국에 유학하면서 보지공의 제자로부터 답산기를 전해 받는다. 보지공이 어떤 분인지는 잘 모르나 이분이 쓴 답산기에 따라 해인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전 한다. 중국에서 돌아온 순응스님은 당시에 유명한 신림의 제자였는데 신림은 또한 의상의 제자 이었으므로 순응의 법통은 의상대사로부터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순응 스님과 함께 해인사의 창건을 이룩한 이정 스님이 가야산에 머물고 있을 때 신라왕실의 왕후에게 난치병이 있어 두루 의원을 구하고 여러 가지 약을 써 보았으나 어느 것 하나 효험을 얻지 못하였다. 이때 가야산에 있는 두 스님의 이야기가 전해져 신하를 보낸다. 그러나 두 스님은 왕궁으로 갈 것을 거절하고 다만 그 치료법만을 일러준다. 그러나 뜻밖에도 병을 치유하게 된 왕비는 해인사의 창건을 위하여 크게 시주를 하게 된다. 다시 말하여 왕실의 도움으로 해인사의 창건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고 하겠다. 그러나 해인사가 완전히 이룩되기 전에 순응이 돌아가게 되자 이정이 그 뒤를 이어 완성을 보게 된다. 이때가 애장왕 3년(802)이라고 한다.
해인사를 법보의 사찰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 삼보사찰이 있다. 영휘산의 통도사와 조계 산의 송광사 그리고 이곳 해인사를 이르는 말이다. 통도사에는 금강계단이 있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으므로 인하여 불보가 되었고, 송광사는 16국사가 나오시어 불법을 널 리 펴신 곳이니 승보(僧寶)라 한다.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간직되어 있으니 그로 인하여 법보사찰이 된 것이다. 법보의 근원 이 되는 고려대장경은 한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대장경을 이룬 것은 고려 현 종 2년(1011)에 시작하여 선종 4년 (1087)에 완성이 된다. 흥왕사의 대장전이 낙성될 때까 지 76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었고 정성을 다한 국가적인 사업이었 다. 그러나 처음의 이 대장경은 고종 19년(1233) 몽고병에 의하여 소실되고 만다. 이때 불 탄 곳이 대구 팔공산의 부인사라고 전하여지고 있다. 문종의 넷째 아들인 의천은 왕명에 의하여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두고 속장경조조의 작업을 시작하여 업적하기 2년 전까지 (l100) 약 9년 동안에 경판을 새기는 중요한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이 속장경은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었으며 또한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 잘 모르고 있다. 두 번째로 만들게 되는 대장경 즉 지금 해인사에 남아 있는 대장경의 제작에 는 의천이 만든 속장경이 중요한 자료가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고종 23년(l236)에 대장도감이 다시 설치된다. 이 도감에는 본사와 분사가 있었는데 본사는 강화도에 분사는 남해에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역사(大役事)는 16년이 지난 후에 완성이 된다. 고종 38년(1251) 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경판의 종류는 1516종에, 권수는 68l5권이며, 경판의 수는 81258판 이라 고 한다. 경판의 나무는 자작나무인데 일명 거제도 나무라고도 한다. 이 나무를 벌채하여 3 년 동안 바닷물에 담근다. 제재를 한 뒤 다시 소금물에 삶아 내어 그늘에서 건조시킨다. 그 리고는 경판의 크기를 맞추고 여기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뒤틀리는 일이 없도록 양쪽 끝에 세로로 나무를 붙여 손잡이를 겸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경판을 만들게 된 데에는 나라를지 키겠다는 민족의 염원이 담겨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판각하여 모셔두는 그 자체로서가 중요한 것이 아나니 그 제작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마음 이 있었기 때문에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8만개가 넘는 판각들이 한결같은 글씨체로 되어 있음도 놀랍거니와 글자 한 자를 새기고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또 한 자를 새기고 또 절을 하였다 하니 그 정성스러움은 경판의 제 작과정과 함께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단합된 힘이 한 곳으로 응집하여 이루어낸 이 대장경은 국보중의 국보라고 할만 하 다. 이러한 대장경판을 모시고 있는 판고 또한 훌륭하면서도 특출한 것이어서 경판과 함께 남은 귀중한 건물이다. 남쪽의 수다라장, 북쪽의 법보전, 동ㆍ서의 잡판고가 장방형의 일곽 을 이루고 있는 것이 장경판고이다. 해인사사적 등의 기록에 의하면 대장경판고는 세종 4년(1458)에 개건 되었다고 한다. 이때 까지 있었던 판고가 좁고 낡아서 크게 증건 하였다고 전한다. 성종 l2년(1481)에도 증건공사에 착공하고 7년 동안에 경내의 여러 건물을 함께 중수하게 된다. 현재의 판고는 이때에 제 모습을 갖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수다라 장은 대적광전의 뒤쪽에 높다랗게 축대를 쌓고 터를 마련한 일곽의 남쪽에 자리를 잡았다. 동서로 킬게 뻗은 단층의 우진각지룡으로 정면 15칸에 측면이 2칸으로 모두 30칸이 된다. 축대를 쌓을 때에 판고를 세우기 위한 자리를 다져 올렸는데 숯과 소금과 흙이 켜를 이루면 서 쌓여 있어서 대장경의 보존을 위한 배려가 땅속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적광전 뒤쪽으로 축대를 오르는 석계가 가파르다. 이 석계를 오르면 사주 문이 있고 별도 의 담장을 쌓았다. 문을 들어서면 바로 수다라장의 출입구가 있다. 중앙 간에 출입구가 열 린 셈인데 이 출입구의 문얼굴이 독특한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뚜껑을 덮은 밥그릇의 윤곽과 비슷하여서 아주 미묘한 느낌을 주고 있다. 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후문이 열려 있 고 그 문을 통하여 내정으로 들어설 수 있으며 이어서 법보 전으로 연결이 된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를 세운 2간통으로 어간의 2칸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28간이 모두 곳간 이다. 대들보는 중앙의 고주에서 합보 되었고 그 위에 종보를 건너지른 다음 동자주형의 마 루대공을 큼직하게 세우고 솟을 합장을 설치하였다. 대장경판은 판가를 별도로 세우고 시렁을 만들어 옆으로 세워서 넣어두도록 하였으며 바닥 은 그냥 흙바닥으로 하였다. 기둥은 자연석 주초 위에 둥근 기동을 세웠고 기둥머리에 주두 를 올리고 간략한 형태의 공포로 꾸였다. 초익공형의 공포는 출목이 없는 주심포로서 조선 조 초기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천장은 연등이며 별다른 장식 없이 간결하게 처리하였 다. 이 건물의 특징은 역시 창살에 있다. 주간마다 상ㆍ하로 설치한 살창은 채광과 환기를 위한 기본적인 시설이지만 그 크기를 일정하지 않게 함으로써 실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기능을 갖 게 하였다. 현대 과학으로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이 살창의 기능은 수많은 경험에 의하여 터득한 것이리라 여겨지지만 그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남벽의 살창들은 중방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쪽이 크고 위쪽이 작은데 북벽의 살창은 위가 크고 아래가 작다. 이것도 남북고가 서로 달라서 산에 가까운 북고의 북벽 살창은 주간의 위치에 따라 크기가 간(間)마다 다르다.
이와 같은 살창의 구조는 주변의 산세에 따라 어떤 조건에서도 배기와 환풍 그리고 습도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고려된 것이라 하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법보전이나 잡판고 역시 비슷 한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법보전의 중앙 출입구만은 두 짝의 분합문으로 처리하였 다. 남북고의 지붕이 우진각인데 반하여 좌우에 있는 잡판고는 정면 2칸에 측면 단간의 맞 배지붕이며 처마는 모두 부연 없는 훗처마이다. 단청은 모로 단청 이다. 해인사는 전체의 형국이 행주형 이라고 한다. 또한 바라보고 있는 안산이 매화봉 인데 이 매화봉의 형국이 화봉 이어서, 이러한 곳에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집을 지으면 불이 자주 난다고 한다. 이것은 풍수지리설의 주장이지만 실제로 해인사에서는 수많은 화재가 발생한 다. 기록에 의하면 7차례나 큰 불이 났었다고 하니 해인사실화적이라는 기록이 남을 만하다. 가 야산 해인사고적에 의하면 당시의 승통 희랑대사가 고려 태조를 도왔다고 하여 태조는 전지 를 오백 결이나 헌납하여 사우를 중건하게 한다. 그때의 규모가 얼마만한 것이었는지 모르 나 상당히 큰 규모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후 조선조 성종 14년(1488) 세조비 정회왕후 가 해인사 중건을 발원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성종 19년(1493) 덕종비 인수왕비와 예종의 계비 인혜왕후가 학조 스님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여 대장경판당을 비롯한 법당과 요사 160간을 3년에 걸쳐서 이루게 한다. 이때의 도편수는 박중석 이라고 전하는 데 지금 의 해인사와 거의 비슷한 규모로 밝혀져 있다. 그러나 이 때에 지어진 여러 건물들도 수차 의 화재에 의하여 소실되고 또 재건되고 한다 그러나 대장경판고 만은 화재를 면하고 있었 으니 이 또한 대장경의 위력이 아닌가 생각도 하여 본다. 대적광전은 해인사의 금당에 해당한다. 이 법당의 주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이것은 해인사 가 화엄종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해인사와 같은 계통의 사찰이 통일신라 시대에 여러 곳에 지어진다. 의상대사를 중심으로 그 제자들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세운 절 들을 화엄십찰이라 하는데 부석사, 화엄사, 범어사, 해인사 등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나온 것으로 역시 화엄사상을 나타내 고자 하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지금의 대적광전은 여러 차례의 화재를 겪은 뒤 순조 18년(1818)에 제월선사에 의하여 중 건된 것이라고 한다. 정면 5칸에 측면이 4간인 이 집은 조선조 후기의 다포양식으로 공포의 내부는 3출목 7포작이나 외부는 2출목 5포작이며 지붕은 팔작으로 겹처마 집이다. 이 대적광전은 순조 17년(1817) 화재를 당한 뒤 경상감사 김노경의 도움을 크게 받아 짓게 된다. 추사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은 아들을 시켜 상량문을 쓰게 하였는데 십여 년 간의 해체 수리시 상량푼이 발견되어 이러한 내용이 밝혀졌다 법당의 내부는 두개의 고주가 세워져서 높은 천장의 대들보를 받도록 하였으며 그 위에 중 도리를 쌓고 있다. 후면 고주에 의지하여 후불벽을 만들었고 그 앞에 불단을 안치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며, 고주와 평주 사이의 천장은 빗반자로 하되 불화 를 그릴 수 있도록 좁고 길게 중간 살을 넣었다. 전면의 창호는 독특하다. 높직한 창의 중 간에 판자를 끼우고 있는 모습이 중판을 중간으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그런데 이 궁판의 중심에 8각의 울거미를 짠 다음, 창살을 사각과 8각으로 중첩시키고 이어 서 방사선으로도 살을 넣어 아주 독특한 모습이다. 보통 불발기창과 비슷한 형태로 되어 있 다. 중앙간은 사분합의 출입구를 내어 개방하였고 나머지 네 간은 창으로 하여 머름을 드린 위에 각각 4분합을 설치하였다. 단청은 화려한 금단청이다. 구광루는 정면 7칸 측면 2간의 2층집이다. 대적광전과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자리 에 있는데 정면에서 보면 2층이지만 대적광전 쪽에서 보면 단층으로 보인다. 이러한 누(樓)집은 거의 모든 사찰에서 그러하듯이 대웅전이나 대적광전과 같은 주불전의 전면에 있으면서 통로의 역할도 한다. 구광루 역시 마찬가지인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통로의 위치가 동쪽에서 두 번째 간을 이용하고 있는 점이다. 대적광전과 장경판고의 중심 을 잇는 축선 상에서 동쪽으로 약간 비껴나 있는 셈인데 이와 같이 주통로를 비껴나게 한 이유는 소위 정중탑이라고 하는 3층 석탑에 연유하고 있다. 즉 구광루 밑을 통과하면서 마당으로 올라서면 바로 앞에 3층 석탑과 마주 대할 수 있도록 배려된 것이라 하겠다. 구광루는 본래 중요한 법요식이나 설법을 위한 장소로 강당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유물을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다만 동쪽의 한간은 종고루로 사용되고 있다. 이 구광루의 전면 루하주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의 특색 있는 한 면을 볼 수 있다. 기둥의 생김새가 자연목그대로여서 껍질만 적당히 베껴낸 다음 아래 렝㎏?잘라서 세워 놓은 형상 이다. 나무의 굴곡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형상의 기둥은 우리나라의 여러 건물 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데 다른 나라의 건물 특히 같은 동양권인 일본이나 중국의 건축에서 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이러한 기둥을 세울 때 집을 짓는 건축주인 주지스님이 나, 시주를 한 신도, 그리고 집을 짓는 당사자인 목수 등 이들 모두가 그러한 기둥을 세우 는데 대한 이견이 없어야한다. 한쪽에서라도 반대를 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러 한 기둥이 버젓이 서 있다는 점에서 의견의 통일을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의 일치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자연 그대로를 살려서 쓰고 싶어 하는 우리 조상님들의 심성 을 읽을 수 있다 . 이 외에도 여러 건물이 있으니 해인총림이라는 편액이 걸린 봉황문을 비롯하여 명부전, 응 진전, 삼성각, 응향각, 퇴설당, 행해당(조사전), 심검당, 궁현당, 경학원, 명월당, 응향각, 해 탈문 등이 남아 있다.
대적광전 앞, 넓은 뜰에 남렙?있는 3층 석탑은 정중탑 이라고도 부르는데 신라 석탑의 일 반형에 속하는 것으로 통일신라 말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이 대적광전의 중심 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이에 따른 여러 가지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으나 지금으로 서는 이렇다 할 정확한 자료가 나오기 전에는 현재의 상태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소위 단탑식이니 쌍탑식이니 하는 가람배치에 관하여서 일률적으로 규정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쌍탑식이라면 이 3층탑과 대칭되는 자리에 또 하나의 탑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만 지금 중심축에서 3층탑까지의 거리를 감안할 때 두 탑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지는 느낌 도 있기 때문에 쌍탑의 가능성은 오히려 희박하다. 그보다는 대적광전의 위치나 규모가 지 금과 달라서 원래의 축선이 3층 석탑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운 상태에 있다. 이 외에도 일주문 부근의 묘길상탑이 남아 있는데 최치원이 쓴 탑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부근에 있는 홍제암은 건물도 우람하지만 사명대사의 영정과 함께 허균이 쓴 비석이 남아 있어서 유명하다 사명대사의 시호가 홍재존자 였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 홍제암 인 것이다. 또한 청석탑으로 유명한 원당암을 비롯하여 백련암, 지족암, 국일암, 약수암 등 수 많은 암 자들이 있다 이곳 해인사는 대장경판으로 인하여 더욱 유명한 사찰이 되었고 또한 그만한 자격을 갖춘 명찰이었기에 대장경 판을 간직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첫댓글 방대한 자료에 감사드리며 유익한 공부를 하고갑니다 .....
숙연하게 하는 우리나라의 삼보사찰...
1)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간직되어 있는 법보사찰
2)영휘산의 통도사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불보사찰
3)조계산의 송광사는 16국사가 나오시어 불법을 널 리 펴신 곳으로 승보사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