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행장
gamusil1225 ・ 방금 전
할아버님 행장(行狀)
안종학(安鍾鶴)
公의 휘(諱)는 영환(永煥)이며 자는 명보(明甫)이시다.
안씨(安氏)의 세계(世系)는 죽산(竹山)에서 나왔으며 문혜공(文惠公)이 그 시조이시다. 원형(元衡)은 관직이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문혜(文惠)의 시호(諡號)를 받으셨고 죽성군(竹城君)에 봉해져서, 그로 인해 자손이 본관(本貫)을 죽산(竹山)으로 삼았다.
십팔세 조(祖) 면(勉)은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었고 정생(挺生)을 낳으니 본조(조선조)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내셨다. 을겸(乙謙)을 낳으니 벼슬이 영암 도사(靈巖都事)를 역임하셨고 여주(汝舟)를 낳으시니 벼슬이 직장(直長)에 이르렀다. 민(民)을 낳으시니 무과에 합격하여 훈련원 참군(訓鍊院 參軍)으로 이시애의 난에 출정하여 전사한 후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에 추증되셨다.
이때부터 처음으로 보성(寶城)에 살게 되었다. 범(範)을 낳으시니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후 학행으로 현감(縣監)직에 제수되어 청안(淸安), 진안(鎭安), 예안(禮安) 현감을 지내셨으며, 한결같이 청백으로 일관하여 세상에서 흔히 ‘안삼안(安三安)’으로 일컬어졌다. 수륜(秀崙)을 낳으시니 진사 시험에 들고 을과에 합격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 學諭)를 지내셨는데 일찍 졸하셨다. 축(舳)을 낳으시니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2등으로 합격하여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시지 않고 향리로 돌아와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과 자연인으로 유유자적하며 지내시니, 세상에서 ‘호남삼고(湖南三高)’라고 일컬어졌다. 둔암(鈍庵)이라 자호(自號)하셨다.
십세 조(祖) 중돈(重敦)은 사마시를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 제시(題試)에 세 번 수석을 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자 발표가 있기 이전에 졸하셨다. 구세 조(祖) 방준(邦俊)은 도학(道學)으로 이경(二卿)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당시 학자(學者)들이 우산선생(牛山先生)이라 불렀고, 은봉(隱峰)이라 자호(自號)했으며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시다. 팔세 조(祖) 후지(厚之)는 좌승지 경연관(左承旨 經筵官) 에 추증되셨다. 칠세 조(祖) 전(峑)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현감(縣監)을 역임하셨는데, 기평 유성증(杞平 俞省曾)은 공을 일러 호련기국(瑚璉器局), 인각봉취(麟角鳳觜)라 하였다. 육세 조(祖) 두상(斗相)은 중추부 첨지사(中樞府 僉知事)를 역임하시고 오세 조(祖)는 세현(世賢)이시다. 고조(高祖)는 창로(昌老)이시며 증조(曾祖)는 처악(處岳)이시고 조부(祖父)는 명대(命大)이신데, 모두 단명하여 일찍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권(權)이시고 어머니는 진주 강씨(晉州姜氏)인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집안 동생 업(嶪)의 아들로 뒤를 이으니 그 분이 바로 公이시다. 원래 생모(生母)는 승평 박씨(昇平朴氏-順天朴氏) 성경(聖𤀂)의 따님으로, 문숙공(文肅公) 석명(錫明)의 후손이다.
公은 순조(純祖) 임신(壬申) (1812년) 8월 10일 오야리(梧野里, 현 보성읍 우산리 귀골) 옛집에서 태어나셨으니, 바로 은봉 할아버지의 태 자리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대범한 데다 기개가 높아 큰 뜻을 품었으나 잔병이 많아 배움의 기회를 잃게 되었으며, 장성해서도 언제나 그 점을 한스러워하셨다. 그리하여 앉아 있을 때도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고, 매번 경서(經書)나 역사책을 읽으실 때에 절의(節義)에 관한 곳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두세 번 반복하여 읽으며 되새기지 않은 적이 없으셨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시며 의분에 북받쳐 손을 불끈 쥐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글을 읽다가 중요한 내용은 반드시 그 요점을 기록하여 가까이 두고 자신을 성찰하는 좌우명으로 삼으셨다.
公께서는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셨으나 집안 형편이 풍족하지 못하여 여러 차례 쌀독이 빌 정도였지만, 양친을 모시는 데 필요한 것은 구비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반찬이 부족할 때는 손수 물고기를 잡아서 봉양하기까지 하셨다. 평소에 양부모님으로부터 절실하게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여러 모로 순종해 따르며 조금도 게으른 모습이 없으셨다,
마침내 임종에 이르렀을 때 양부께서 그의 손을 잡으시고 “아, 너야말로 진정한 내 아들이구나. 내가 장차 황천으로 돌아가면, 어떻게 보답할 거나. 너는 후사가 번창하고 성대할 것이다. 나는 네가 부모상을 당하여 심신이 수척해질 정도로 슬퍼하며 상례(喪禮)의 절도(節度)를 넘는 것을 보지 못함이 한이로구나. 그러나 성현의 가르침은 모두 다 슬픔으로 거상(居喪)을 이기지 못함을 근심으로 삼고, 끝까지 무탈하게 몸을 보양하는 것을 진정한 효성으로 여긴단다.”라고 말씀하셨다.
公께서는 집안을 다스림에 있어 엄숙함과 화목함을 근본으로 삼고 자손 중에 잘못함이 있을 때는 엄하게 꾸짖으시며 조금도 용서함이 없으셨다. 그리고 일찍이 “勤(근;부지런함), 謹(근;삼가함), 恭(공;공손함), 儉(검;검소함), 이 네 글자가 내가 평소 실천하고자 애쓴 바이다.”라고 하시며 매번 광주 자사(廣州刺史) 도간(陶侃)과 같이 후일을 기약하여 오늘을 준비하셨고, 촌음을 아끼시며 사람들을 도리에 따르도록 가르치시기를 좋아하셨다.
매번 선조의 제삿날을 맞아 제수를 올릴 때에는 반드시 자신이 직접 손수 검사하고 살펴보았으며, 제삿일을 자손에게만 맡기지 않으셨다. 그리고 비복(婢僕)이 노쇠하거나 질병으로 제삿일을 맡아 할 수 없을 때에는 반드시 스스로 밤을 새워 정좌한 채 조상의 덕을 추모하셨다.
남을 지도하실 때에는 웃는 낯으로 온화하게 말씀하시며 정성을 다 하셨으며 시종여일 조그마한 사사로움도 없으셨다. 남의 선행을 보시면 칭찬해 마지 않으시며 더욱 더 권장하셨으며, 타인의 과실을 보시면 반드시 불러서 타이르시고, 옳고 그른 점을 밝혀 깨닫게함으로써 그가 반드시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바라셨다. 주변 고을의 많은 사람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고 감동하여 매번 쟁송(爭訟)이 있을 때마다 곧 “安 아무개라면 정녕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公은 젊어서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으셨다. 사람들이 公에게 벼슬하기를 권하면 “나는 나라를 빛낼 만한 학문이 부족하고, 사람을 승복시킬 만한 덕망이 부족하며, 시기를 기다릴 만한 인재가 못 된다. 가난과 부귀영화는 팔자소관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발이 닳도록 권세가의 집을 들락거리며 저자세로 비굴하게 아첨하여 요행으로 미관말직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게 어찌 내 천성(天性)을 그대로 지키며, 내가 좋아하는 즐거움으로 나의 즐거움을 삼는 것만 하겠는가? 비록 조그마한 양보로 큰 이득을 얻는다 하더라도 어찌 그게 정당한 일일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장부(丈夫)의 지조와 기개를 가진 자라면 차라리 부끄러움 없이 죽는 것이 낫다고 할 것이거든, 하물며 반드시 그렇게 할 수도 없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문을 닫아걸고 집안에 홀로 들어앉아 계셨으니, 사람들이 공의 얼굴을 볼 수 없은 것이 거의 40여 년이나 되었다.
公께서는 은봉(隱峰) 선조의 문집이 여러 세대를 지나도록 발간되지 못함이 항상 큰 걱정거리였으므로, 종친들과 함께 협의하여 책을 판각하여 세상에 널리 배포하고 전해지도록 도모하셨다.
병인양요(丙寅洋擾)의 국난을 맞아 상부에서 충의(忠義)의 숭상을 장려 기획하는 당국자가 그 여망(輿望)을 조사하기 위해 본군(本郡)을 방문하자, 본군에서는 그 해당자로서 평소 강개(慷慨)한 기질로서 중용을 행하는 자로 公이 선발되었으나, 국란이 진정된 후 유야무야 그대로 중지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이후에 이 문제는 더욱 더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관내의 유생들이 여러 차례 公이 주군(州郡)에서 보인 덕행에 대해 서책으로 간행함과 동시에, 그 가상한 미덕에 대해서 표창할 문건을 상부에 올렸으나, 그 여망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公께서 별세하시기 전에 가족을 미리 훈계·단속하시고 여러 집안일을 처리하시다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인 임오(壬午, 1880) 8월 5일이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죽전산(竹田山, 대샅 까끔)의 임병지원(壬丙之原)에 장사지냈으니, 바로 부인의 묘 왼쪽이다. 부인은 풍산 홍씨(豐山洪氏) 기락(基洛)의 따님으로 매우 현숙했으며, 남편을 섬기는 부도(婦道)에 어김이 없었으나 공보다 삼십년 앞서 별세하셨다.
삼남 일녀를 낳으니 장남은 규삼(圭三), 다음은 규태(圭台), 다음은 규백(圭白)이고, 김재복(金在福)이 사위이다. 규삼은 삼남 사녀를 낳았다. 장남은 종묵(鍾黙), 다음은 종채(鍾彩), 다음은 종학(鍾鶴)이고, 맏사위는 조규영(趙圭英), 다음은 윤상록(尹相祿), 다음은 정해봉(鄭海鳳), 다음은 이성호(李誠浩)이다. 규태는 본생가 큰형의 뒤를 잇고 삼남을 낳았다. 규백은 본생가 동생의 뒤를 잇고 일남을 낳았다. 내외의 여러 자손들은 수없이 많아 여기에 다 적지 않는다.
公께서는 타고난 자태가 청수(淸粹)하고 품행이 독실(篤實)하셨으며, 언론이 명쾌(明快)하시어, 외모에서부터 성덕군자(成德君子)의 풍모가 엿보였다. 성품이 고상하고 정직하며 아첨하는 것을 싫어하셨으므로, 여러가지로 주관하여 지도하는 일이 많으셨다.
일찍이 진주 목사(晉州牧使) 비락 김정진(否落 金靖鎭) 어른께서 입버릇처럼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안모가 세상에 쓰여졌다면 (벼슬을 했다면) 틀림없이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직간(直諫)을 함으로써, 왕도(王道)를 펴고 세상을 구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 현조(賢祖)에 그 자손이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접한 公의 아름답고 고결한 언행(言行)이 수없이 많지만, 우선 公께서 평소에 보인 겸양의 성덕을 개략적으로나마 정리하여, 당세(當世)에 公을 드높여 칭송하고 크게 빛낼 수 있는 입언군자(立言君子)의 붓을 기다리는 바이다.
호련기국(瑚璉器局) 호련은 종묘의 제기(祭器)이니, 고귀한 품격과 대임(大任) 을 감당할 수 있는 재능을 말함.
인각봉취(麟角鳳觜) 기린의 뿔과 봉의 부리로 “훌륭한” 드믄 인재를 뜻함.
부기(付記)
위의 글은 안종학(安鍾鶴)의 문집인 지봉집(支峰集)에 수록된 글이다.
안종학은 은봉(隱峰)의 십일대 손(孫)으로 철종(哲宗) 계해년(癸亥年, 1863)에 태어나서 1923년에 졸하였다. 자(字)는 운경(雲卿)이며 호(號)는 지봉(支峰), 춘정(春艇)이다.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매천 황현(梅泉 黃玹) 등과 교유(交遊)하셨으며 그 유고(遺稿)를 모아 아들인 안효순(安孝淳)이 지봉집을 발간하셨다..
위 행장은 지봉이 지은 할아버지인 영(永)자 환(煥)자의 행장으로, 은봉 종가가 몰락하고 무후(無後)하여 십삼촌 양자로 오신 할아버지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다행히 그 후손들이 번창하여 은봉 종가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위의 글을 번역하는 데에는 한문학 박사(漢文學 博士)인 자산 이광소(玆山 李光昭) 선생의 시종일관한 지도와 교열(校閱) 덕분임을 밝히며 감사드린다.
본인은 지봉의 종증손(從曾孫)으로 永자 煥자 할아버지의 오대손이다.
2023. 9.
안강섭(安康燮) 謹記
祖考學生府君行狀
公諱永煥字明甫, 安氏系出竹山以文惠公爲始祖, 諱元衡, 官門下侍中, 諡文惠, 移封竹城子孫仍貫焉. 十八世祖諱勉, 政堂文學, 生諱挺生, 官始仕本朝寶文閣直提學, 生諱乙謙, 官靈巖郡事, 生諱汝舟, 官至直長, 生諱民, 登武科以訓鍊參軍, 死於李施愛之亂. 贈宗簿寺主簿, 始居寶城, 生諱範, 俱中司馬, 以學行除職監淸安鎭安禮安,而一以淸白世稱安三安, 生諱秀崙, 擧進士登乙科以成均館學諭早卒, 生諱舳, 俱中司馬文科亞元, 除薇院烏臺而不就, 退與河西金麟厚石川林億齡優遊外服, 時稱湖南三高, 自號鈍庵, 十世祖諱重敦, 俱中司馬, 三魁舘題直赴東堂, 未唱傍而早卒, 九世祖諱邦俊, 以道學, 位至二卿而不就, 學者稱之牛山先生, 自號隱峰, 諡文康, 八世祖諱厚之, 贈左承旨經筵官, 七世祖諱峑,擧進士, 以學行官至縣監, 兪杞平省曾稱瑚璉器局麟角鳳觜, 六世祖諱斗相, 僉樞, 五世祖諱世賢, 高祖諱昌老, 曾祖諱處岳, 祖諱命大, 皆早卒, 考諱權, 妣晉州姜氏, 無嗣, 族弟 諱嶪之子爲後, 寔公也. 本生妣昇平朴氏, 聖𤀂之女, 文肅公錫命之後,以 純祖壬申八月十日生於梧野里舊第, 卽隱峰府君之胎基也. 幼而穎悟倜儻有大志, 兒時以多疾失學, 旣長常以爲恨, 坐不釋卷, 每讀書史, 輒到節義處未嘗不三復, 流涕繼以扼腕, 文義之切要者, 必書之座右以備省覽, 性至孝, 家計素貧, 或至屢空, 而供親之具, 無不贍備, 饌乏則必親漁以繼之, 失愛於所後父母, 承順多方, 小無惰容, 終至( )( )臨終, 執其手曰, 噫眞吾兒也. 吾歸泉下, 將何以報爾, 爾之後其昌大乎, 恨吾不及見居憂, 哀毁踰節, 人皆以不勝喪爲憂, 而卒無恙, 人以爲誠孝, 所格治家以肅雍爲本, 子孫有過, 嚴加譴責, 不小假借, 嘗曰勤謹恭儉四字, 吾一生用工處, 每以陶廣州, 惜分陰之, 說循循敎悔之, 每遇祖先諱辰, 薦禋之需, 必躳自檢察不委於子孫, 婢僕至其衰老, 雖病未能將事, 必終宵正坐, 以伸追遠之感焉, ( )( )之際, 言笑樂易, 盡其誠款, 洞澈無間, 見人之善稱道不已, 以勸獎之, 見人有過, 必招諭之, 曉以曲直, 冀其必改, 隣里之人, 多有觀感者, 每有爭訟, 輒曰安某得無非之乎. 自少無干進意, 或勸以仕進, 則曰吾文不足以華國, 德不足以服人, 才不足以需時, 且窮達命也. 彼熱路薰門, 頭出頭沒, 奴顔婢膝, 蠅營狗苟, 以求一資半級僥倖, 曷若全吾天保, 吾眞以樂, 吾樂之爲哉. 雖或枉尺得之尋, 豈可直乎, 苟有丈夫之志氣者, 寧不愧欲死乎, 况未必得之乎, 是以閉門獨坐, 城市之人, 不得見其面者, 四十有年. 隱峰府君文集, 累世未刊, 嘗以是爲病, 與宗黨合謀剞劂布傳於世, 丙寅海寇之變, 上司以尙忠義有規畵, 爲人望所屬者, 訪問于本郡, 本郡以公爲選, 慷慨作行, 中路聞靖亂而旋止, 自後益事鞱晦, 省內章甫累度刊公行義於州司, 俱有嘉尙之褒, 屢入齋, 望而卒未蒙恩, 觀化前, 預飾家人, 處置家事, 因以考終, 享年七十一時壬午八月五日也. 以遺命祔葬于竹田山壬丙之原. 夫人之墓左, 夫人豐山洪氏,學生基洛女, 甚賢淑事夫子無違, 先公三十年而卒. 生三男一女, 長圭三, 次圭台, 次圭白, 士人金在福其婿也. 圭三生三男四女, 長鍾黙, 次鍾彩, 次鍾鶴, 女長適士人趙圭英, 次適士人尹相祿, 次適鄭海鳳, 次適李誠浩, 圭台出系, 本生伯兄後, 生三男, 圭白出系, 本生弟後, 生一男 , 內外諸孫蕃不盡記.
公 天姿淸粹, 操履篤實,言論明爽, 望之儼然成德君子, 雅性正直, 不喜阿諛, 是以平日事率多, 否落金晉州靖鎭丈, 嘗謂人曰, 安某若爲世用, 則當有折檻牽裾之擧, 眞可謂賢祖肖孫, 其他綺言馥行之塗, 人耳目者甚多, 姑撮其大槩, 以副平昔謙謙之盛德, 而至於揄揚之張大之, 以竢當世立言君子之秉筆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