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제23조 ①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②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 ③ 공공의 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
제119조 ① 대한민국의 경제 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지난 4·11 총선 때도, 연말 대선을 앞둔 현시점에서도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와 관련한 우리나라의 사회적 합의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제1조, 23조, 그리고 요즘 유명해진 119조 1, 2항이다.
우리나라 헌법은 대체로 부의 창출을 위한 개인과 기업의 활동을 인정하지만, 이윤 추구 활동을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가가 경우에 따라 통제하거나 규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적어도 산술적인 차원에서는 평형감각을 갖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논자들은 경제민주화에 관한 이 선언적인 헌법 조항을 인정하되 다르게 해석한다.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정당이나 경제단체에게 경제민주화는 파이를 크게 키워 모든 국민을 중산층으로 만듦으로써 소비 욕구를 상향 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민주노총 등 진보진영에게는 재벌 해체를 통한 시장 배분이나 경제적 소비수준의 평등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헌법적 선언 조항을 뛰어넘는 각론상의 논의가 필요하다. 진보적인 진영이 주도해야 할 경제민주화 아젠다가 박근혜 캠프가 주창하는 슬로건이 되어 가고 있는 이 부자연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경제민주화에 관한 성경적인 지침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성경은 경제문제의 근본인 의식주를 국민의 기본권과 행복추구권으로 보는 입장에서 경제민주화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 온 이웃의 화급한 쟁점인 교육과 고용 문제도 결국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중간 과정일 뿐이다. 의식주 권리는 공기나 물과 같은 만민이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에 관한 권리라고 보아야 한다. 성경은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땅에서 얻어지는 소출을 향유하는 데서 조금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신 15:11) 성경의 경제는 야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사회적 표현일 뿐이다. 돈 자체에 대한 무한한 추구나 축적은 성경의 세계관과는 매우 낯설다.
윤리학의 연장인 ‘성경 경제학’
오늘날 ‘경제’라는 용어는 최소 비용을 통한 최대 생산성 추구 활동을 의미하지만 성경에는 그런 경제 개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성경은 수요·공급을 통해 자기 조정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주의적 시장을 통해 이뤄지는 경제활동을 전제하거나 지지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대부분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에 목적을 두는 생존 경제(subsistence economy)를 상정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공동체의 존속을 위한 대의명분에 종속된 경제였다. 그렇기에 경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는 시험 영역이었으며,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심판과 저주를 경험하게 하는 신앙적 진실성의 시금석이었다. (신 28:1~19, 20~68) 신명기 28장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체결된 언약과 그것의 조항인 토라를 준수했는가에 따라 경제적 번영 또는 몰락을 천명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토라에 순종하는 경우 경제적 번영과 땅에서의 영속적 정착을 보증하신다. (신 28:1~14) 이 단락이 예시한 경제적 번영은 인구 증가, 가축의 다산, 농작물 풍년, 호의적인 기후 조건, 금융상의 우위성 확보 등이다. 반면 공동체가 하나님의 토라를 준수하지 않았을 때는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된다. (신 28:15~68) 이 단락이 상정하는 저주와 심판은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출애굽 이전의 노예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신명기 28장은 십계명의 준수에 실패한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가나안 땅의 상실과 열국에 흩어지는 이산과 유랑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못한 실패가 어찌하여 가나안 땅의 상실로 이어질까?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인 자유농민으로 규정하는 계명을 배척한다는 것은 경작권을 가진 자유농민의 권리박탈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왕과 지배층의 신민이 아니라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께만 배타적으로 소속된 자유민이 왕과 지주의 노예가 되는 순간 그 땅을 지키고 관리할 언약 보존의 주체가 사라지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멸망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경제학은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생존을 경제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한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유농민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므로 가나안 땅을 영속적으로 차지하도록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경제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학의 대전제는 모든 토지가 하나님께 속해 있고, 그 토지의 경작권은 공동체 구성원에게 분여한다는 사상이다. (레 25:23) 이것은 땅에서 발생한 소출은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모세오경의 율법, 예언자들, 시편과 잠언서 등 모든 구약성경이 그리는 이상 사회는 하나님의 선행적(先行的)인 은총 위에 세워진 계약 공동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한 자들이 실천하는 이웃 사랑과 공생의 ‘모듬살이’다. 이 계약공동체주의의 대전제는 생산수단인 토지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하사하신 선물(기업)이라는 사상이다. 땅이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계약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땅의 소출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경제활동의 중심에는 ‘공동체적 돌봄(헤세드=인애)’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바로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을 위한 자원의 배분과 활용을 통한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위한 살림살이를 뜻했다. 영어 이코노미(economy, 경제)의 헬라어 오이코노모스(οἰκονόμος)는 집안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청지기를 가리키는 말[οἴκος(집)+νέμω(분배하다, 경영하다)]에서 유래했다. 어원이 같은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는 ‘가정 살림살이’, 대가족 전체의 결속을 위한 살림살이를 의미했다. 이런 정의에 따르면 특정 기업이나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 결과 양극화가 심화하고 빈부 격차가 커진다면 그것은 반(反)경제다. 성경적인 경제는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해치는 특정 집단의 무한정한 이윤 추구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경의 주요 관심은 불의한 사회구조, 법, 관습, 그리고 강한 자들의 탐욕 때문에 가난케 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이었다. 메시아에게 임한 거룩한 성령이 하시는 첫째 과업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것의 구체적 내용은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하고 갇힌 자들을 해방하는 일이었다. (눅 4:18~20)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경제활동은 이스라엘 계약 공동체의 사활이 달린 중요한 일이었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등 모든 예언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에서 소멸되지 않도록 각별히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대변했다. 오늘날의 의미로 말하면 사회 구성원들에게 삶의 토대를 이룰 일거리를 나누고, 일거리를 갖지 못하는 경우에는 실업수당이나 복지 장애 수당을 지급해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자긍심을 고취해 주는 일에 앞장섰다는 말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몫의 경작지를 가지도록 도와주고 보살피는 것이 예언자들의 중심 활동이었다. 이처럼 가난한 자들의 공동체 잔존이 하나님의 지대한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배려를 강조하는 구절들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빈번히 발견된다.
1. 모세오경과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 하나님은 땅 없이 방황하는 외톨이들의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보금자리 없는 떠돌이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창 12:1~3; 12~16장)
-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보금자리를 찾아 주신다. (출 3:6~13)
- 하나님이 땅을 선물로 주신 목적은 그 땅에서 야웨의 율례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시 105:44~45; 참조. 레 18:24~28 거민을 토해 내는 땅의 인격적 반응)
- 신약에서 맥락 없이 인용된 신명기 15장 11절[가난한 자들은 땅에서 항상 그치지 않겠고(마 26:11; 막 14:7; 눅 12:8)]을 올바르게 해석하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이 땅의 소출로부터 결코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임이 밝혀진다.
- 신명기 15장의 안식년, 면제년 법은 노예화가 된 이스라엘 자유농민에게 또 다시 출애굽 사건을 재현하는 구원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한다는 증거다.
2. 예언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 이사야는 ‘공평과 정의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포도원’을 노래하며 전토와 주택을 독점하는 지주들을 향해 화를 선포한다. (사 3, 5장)
- 종교적 절기와 금식의 참된 의미는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는 환대의 실천이다. (사 58)
- 종교와 정의는 탄젠트적 상응성(종교가 썩으면 정의가 사라지고, 종교가 바로 서면 정의도 세워진다)이 있으며 자비(체데크)를 하수처럼 흘려보내는 세상이 오래 존속된다. (암 5:24)
- 야웨께서 바라는 바는 오므리의 율례(바알 종교의 지주제도)를 파기하고 일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다. (미 6:6~8, 16)
- 예레미야는 면제년 법을 시행하지 않는 도성의 종말을 예언한다. (렘 34장)
3. 성문서와 가난한 자들의 보금자리
- 시편은 땅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집이다. (시 9:9, 12, 18; 10:9, 12, 18; 40:17; 41:1; 69:29, 33; 70:5; 72:4, 12~13)
- 잠언은 예언자의 기상으로 가난한 자와 하나님의 특별 친연 관계를 강조한다. [13:23; 14:21, 31; 15:16; 19:1, 17; 21:3; 22:2; 28:6, 8; 29:7; 대조. 잠 6:9~11 (가난을 게으름 탓으로 돌림)]
- 느헤미야서는 가난한 자들의 아우성을 듣고 거룩한 평탄 정치, 채무 탕감, 인신 해방을 선언한다. (느 5장)
이런 이유로 성경은 개인이나 기업의 이윤 추구의 자유를 극한으로 존중하는 자기 조정적인 시장보다는 하나님의 주기적 개입과 간섭을 통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에 치중하는 경제를 제시한다. 경제활동의 중심에는 가난한 자들의 생존권 보호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신뢰 유지를 돕고자 하는 신적 의지가 작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상정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작동되는 자기 조정적인 시장’을 믿지 않는다. 고전주의 경제학자들로부터 존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까지 소위 주류 경제학자들이 생각하는 자기 조정적 시장 사상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시장주의자들은 개인의 이기적인 활동이 공공선이 되는 그런 시장, 하위 단위 경제주체들의 이기적인 활동이 더 넓은 공공선을 창출한다는 이념을 신봉하면서, 국가(또는 사회, 공동체)의 역할을 감축하는 데 전력투구해 왔다. 하지만 성경의 경제학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것을 도와주는 재화와 용역의 공동 향유를 의미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경제는 칼 마르크스보다 한 세대 앞선 19세기의 사상주의 사상가들이었던 앙리 생시몽(1760~1825), 로버트 오웬(1771~1858) 등 소위 공상적 사회주의부터 시작해서 칼 마르크스의 평등주의적 정치경제학, 그리고 20세기의 칼 폴라니의 시장을 통제하는 ‘사회 우선’의 사회보호형 경제학에 이르는 사회적 지향이 강한 경제학 전통에 가깝다. 성경의 경제는 하나님 앞에 사는 거룩한 백성(암 카도쉬, 출 19:6)의 번영과 유지에 그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거룩한 백성”은 열방 백성들과는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이라는 말이다. 왕이나 제후의 신민(臣民)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께 직접 책임을 지되, 어떤 인간 제왕이나 지배체제 아래 노예화될 수 없는 자경·자영·자작 농민을 가리킨다. (왕상 4:25; 비교. 삼상 8:11~18) 그들은 야웨 하나님께 언약 준수의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땅을 경작하고 그 소출을 먹는 자유를 천부불가양(하늘로부터 받았으나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의 선물로 받았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자기 땅을 경작하는 사람만이 자유민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인 땅을 소유한 목적 자체도 생물학적인 존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토라를 구현하고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시 105:44~45)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경제는 이스라엘 자유농민들의 ‘인권과 자유 옹호 경제학’이었다. 경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유지되는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안에 규제되고 조절되는 사회 내적 활동이며 야웨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수호하도록 위임받은 자경·자작·자영 농민들의 공동체 보호 활동이었다. 따라서 성경에는 오늘날 같은 경제 이해, 즉 부의 무한 창출, 혹은 중립적이고 보편적인 화폐로 계량화되는 생산성 추구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에 가장 자주 나타나는 경제 관련 계명이나 예언은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압제하여 언약 공동체를 와해시키려는 지배 계층을 경고하거나 탄핵하는 것들이다. (사 3, 5장) 물론 성경에서도 시장, 고용, 빈부 격차, 초보적인 금융, 생산성 개념, 조세, 사회복지 등의 개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의 압도적인 경제적 관심은 가난한 자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산업이 거덜 나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즉 언약 공동체를 유지하고 존속시켜 가나안 땅을 영구적으로 경작하도록 하는 데 있었다. 현재 이스라엘의 애국가이기도 한 시편 “형제가 연합하며 동거하는 것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는 구약성경의 이상적 사회를 노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부터 내리는 은총과 혜택이 가장 밑바닥 구성원들에게까지 확산되는 과정을 노래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자기 스스로 가치를 갖고, 인간 욕망을 충족시키는 재화와 용역을 마음대로 사고파는 데 사용되는 신격화된 화폐, 즉 맘몬(마 6:24)을 숭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구약성경은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어떻게 번 돈이며 어떻게 쓴 돈인가를 더 중요하게 본다. 세리와 창녀가 번 돈은 하나님의 성전에 헌물로도 바쳐지지 못했다. 거룩한 백성 공동체의 윤리성을 타락시키거나 희생시키면서 번 돈은 어떤 가치도 갖지 못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조폭이나 창녀들, 부동산 투기꾼이나 사악한 금융 공학적 조작, 주가 조작이나 불법 상속, 탈세나 위법 조작, 뇌물 수수 등으로 획득한 재산이나 소득은 구약 경제에서 보면 국내총생산(GDP)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성경의 경제는 예수와 사도들의 급진적인 상호부조, 유무상통하는 오순절 성령 감화 경제에서 결실을 맺었다.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과 나눈 초대교회는 성경의 경제학을 구현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 준다. (행 2:44~47; 4:32~34) 이렇듯 사도행전은 구약의 가난한 자들의 ‘인권과 자유 옹호 경제학’을 급진화시켰다. 사도 바울도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갈 2:10),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중략)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3~4, 9)처럼 하나님 나라의 나눔과 상호부조 경제학을 주창한다. 그는 부유한 아가야 지방의 그리스도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도록 하는 일을 사도인 자신의 핵심적 과업으로 설정한다. 사도 바울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 공동체의 창립과 운영이었다. 아울러 그는 성만찬을 통해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 한 몸을 이루는 교회를 구성하려고 분투했다. (고전 11:20~22)
이런 급진적인 언약 공동체 중심의 구약 경제학은 5세기까지 상당 부분 유지되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가이사랴의 바실, 암브로시우스, 크리소스톰, 어거스틴과 제롬 등) 하지만 중세 가톨릭교회가 시작되면서 교회가 세상 권력과 종교 권력으로 기관화하면서 성경의 급진적인 공동체 경제학을 망각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자들이 일부 교부와 성경의 공동체 이상 중심의 경제적 원리를 천명했으나 유럽 기독교문명에 뿌리내린 이교적인 토지제도와 계층화된 계급 경제, 인간의 노예화 경제체제를 극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서구 기독교문명권은 경제에게 영적 세례를 주는 데 실패한 이후 사실상 이교도적 문명으로 퇴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출현했다.
이 세상의 주류 경제학은 중립적이면서 신적 위력을 갖는 화폐로 계량화되는 무한 성장, 부의 축적을 꾀하는 기업 혹은 개인들을 중요한 경제주체라고 본다. 이런 경제학에서 지배 계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비참과 가난에 허우적거리는 것을 원할지도 모른다. 시민들이 정치가들의 지배 행위를 감시할 정도의 여유를 갖지 못할 만큼 바쁘고 고단하게 살기를 원할 수도 있다. 정치와 경제의 지배자들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생계 문제는 개인적인 분투로 해결하라고 압박한다. ‘기업프렌들리정책’으로 엄청난 자산 규모를 확보한 한국의 기업들은 투자 환경의 불확실성을 구실 삼아 고용 창출에 나서기보다는 노동시장 유연성만을 끊임없이 고집한다. 언제든지 해고 가능한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극히 싼값으로 노동력을 사고 싶다는 것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은 끊임없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경제문제를 경제 전문가의 손에만 맡겨서는 안 되고, 사회 전체의 유기체적인 건강도와 지속가능성을 권념하는 하나님 나라 시민들의 중심 과업으로 여겨야 한다. 인간 공동체의 번영과 존립을 위협하는 경제는 이미 경제가 아니며 경제활동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을 초월해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요약컨대 하나님 나라 경제학은 공동체에 소속할 자유와 그 터전을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들을 공동체 안에 묶어 놓는 데 투신된 경제학이다. 이것은 모세오경, 예언서, 시편과 잠언서, 복음서, 바울서신에 나타나는 공동체 경제학이다. 성경 경제학의 대전제는 공동체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선물인 땅으로부터 오는 소출을 누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모두 다 자기 포도원과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사는 사회를 궁극적으로 지향했다. (왕상 4:25) 어떤 가난한 사람도 땅의 소출로부터 영구적으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신 15:7~11)가 경제와 반경제의 경계선의 지표석이었다. 특히 신명기 15장 11절의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고”라는 구절의 의미는 가난한 자가 땅으로부터 끊어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즉 땅의 소출을 향유하는 데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성경 경제학은 무한 성장 경제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존속과 공동 번영을 위한 경제학으로, 사회의 가장 연약한 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데 최대의 관심을 갖는 경제학이다. 경제활동이 ‘인류문명사회’의 기관의 존속과 번영을 위한 윤리적 정치적 고려를 완전히 일탈해서는 안 된다. 경제는 사회, 즉 인간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포용력 있고, 연대심 넘치는 통일체를 위한 부분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적 경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항하는 반(反)경제적인 무한 자유주의를 추구하는 기업의 횡포에 항상 위협당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 대기업은 경제 발전의 향도요 견인차라고 칭송되어 왔으나 실제로는 성경적인 의미의 반(反)경제활동에 연루된 적이 많았다. 천문학적 회계 부정, 탈세, 위법 및 불법 상속, 주가조작, 부동산 투기, 정경 유착, 노동자 학대,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자본의 해외 은닉 등 숱한 범죄에 기업들이 깊이 연루되어 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모집단인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기여하기보다는 자신이 홀로라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다. 어찌하든지 시장의 바다에서 살아남으려고 하기에 최악의 불경기를 대비하는 마음으로, 고용 창출보다는 비자금을 통한 정치권, 법조계, 언론 등에 로비를 하거나, 아니면 스위스나 영국 등의 해외 비밀은행 구좌에 예치했다.
고용 없는 성장의 결과 대기업들은 계량화된 화폐 경제 기준으로는 엄청난 부를 창출했을지 모르나 인류 공동체의 모듬살이를 위협하는 실업문제, 환경 파괴, 국제적인 자원 약탈, 국제적 빈부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거의 기여하지 않았다. 대기업들은 오히려 노동의 값어치를 쉼 없이 감각시키는 반인간적인 체제에 안주하고 있다. 투입 대비 생산량으로 계측되는 생산성이라는 신화를 신봉하며 ‘평생 고용’을 통한 인건비 지출은 생산성을 위협하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제활동 자체를 인간의 삶을 위한 대의명분에 종속시키지 않는 한, 즉 경제가 그 자체의 자율적인 원리로 움직이는 ‘자율 왕국’의 영역이 될 때 인류 공동체라는 ‘사회’는 치명상을 입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공동체의 붕괴를 보고서도 태연자약하다. 기업의 경제활동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평화로운 모듬살이에 기여해야 한다. 경제(이코노미, 오이코노미아)는 집, 즉 생존 공동체 전체를 위한 살림살이이기 때문에 그 말 안에는 인류가 생존을 위해 취하는 긴밀한 상호적 계약 상태가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공동체적 삶이 무너지는 것은 ‘경제’가 무너지는 것이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우애와 협동, 운명 공동체적인 유대를 강화하는 것이 경제활동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특정 기업이 순이익을 수조 원 남겼다면 그 혜택을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분여할 때 그것이 참된 생산성인 것이다.
김회권 교수 숭실대 기독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