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뇌사판정을 받은 고원준 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5일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고 별세했다. 빈소가 마련된 울산영락원에서 고인의 지인들이 영정사진을 설치하고 있다. 경상일보 자료사진 | ||
고원준이 지난 주 타계했다. 가족들은 고인이 숨을 거두기 전 장기를 기증, 고인이 우리사회를 위해 마지막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울산 근세사를 돌아볼 때 고인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사람도 드물다. 고인은 1943년 울산 중구 북정동에서 태어났다. 고인의 할아버지 고기업은 일제강점기 울산의 최고 거부 차용규와 함께 양조장을 경영, 나중에 이를 인수 운영함으로써 해방 후에는 울산의 대표적인 경제인이 되었다. 이후 영화관과 상가를 운영해 많은 돈을 벌었던 그는 52년 읍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읍의장이 되었다. 그는 당시 초대 읍장이었던 차용규가 55년 세무당국이 울산읍의 소득세를 높이 부과하자 이를 반대해 읍장직에서 물러나자 그를 대신해 2대 읍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64년 초대 울산상의 회장에 선임되는 등 울산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고인의 부친 고태진도 23살에 은행에 입문한 후 상업은행 상무, 제일은행 전무, 조흥은행장 등을 지낸 뒤 한국축구협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그의 집안을 명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인맥도 튼튼해 공화당 시절 총무처 장관을 지냈던 서일교는 고인에게는 고모부가 되었고 또 이 무렵 검찰총장을 지냈던 오탁근 역시 가까운 인척이었다.
이런 집안을 배경으로 고인은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을 유복하게 보내었다. 고인은 특히 70년대에는 광도상사와 진흥개발, 진흥건설을 운영하면서 복산동에 울산 최초의 아파트인 복산아파트를 건립했다. 울산 최고의 요정이었던 옥교동 상록관 터에 울산 최초의 상가아파트인 진흥상가를 지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복산 아파트와 진흥상가는 당시만 해도 울산사람들 사이에 ‘꿈의 궁전’으로 불릴 정도로 시설이 잘되어 울산의 부유층 인사들이 입주했다.
경제인 할아버지·은행장 아버지 아래 유복하게 자라
81년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울산상의회장 연임하기도
2004년 횡령혐의 구속, 건강상 문제로 치료받다 사망
재물의 허망함과 인생무상을 다시금 깨닫게 해
건설업자로 고인이 마지막으로 손을 댄 사업이 성남동에 건립했던 오션관광호텔이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숫자인 40억 여 원을 들여 건립한 이 호텔 역시 시설이 좋아 울산에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기여했지만 고인에게는 자금을 압박하는 요인이 되었다.
고인은 81년 전두환 세력이 주도한 제11대 총선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민정당 후보로 출마,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정치 입문을 두고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나 하는 것은 나중에 고인이 ‘사랑의 전화’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밝힌 취임사에서 알 수 있다.
고인은 취임사에서 “제가 처음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을 때 고민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당시 저는 사업에 바빠 정치를 할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민정당에서 저의 출마를 종용했습니다.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은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받아 들이면 더욱 큰 일이 날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때 생명의 전화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히 ‘생명의 전화’에 전화를 걸어 이 문제를 의논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38세라는 최연소의원으로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고인은 의정활동을 통해 우리나라 재벌 정책의 잘못을 여러 번 질타했고 지역 사업으로는 울산과 밀양을 연결하는 자동차 길을 개설했다.
70년대 청년회의소 운동을 활발히 펼쳤던 고인은 34세 때 경남청년회의소(JC)회장과 한국 JC 부회장직에 오를 정도로 JC 운동도 활발히 했다.
고인이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술을 좋아하고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남재희 전 의원이 쓴 <언론·정치 풍속사>에서 알 수 있다. 남재희는 이 책에서 ‘민정당 시절 국회의원들 가운데 술이 가장 강한 사람으로는 고원준과 곽정출 의원이 있었는데 이들의 술 실력은 막상막하라는 출입기자들의 평이었다’고 적어 놓고 있다.
국회에서 마당발로 통했던 고인은 술을 즐겨 마셨을 뿐 아니라 술값을 잘 내어 국회에서는 인기 있는 주당파의 한 사람이었다.
고인은 12대 총선에서는 공천에서 탈락되는 비운을 겪었다. 이때 고인을 지지해온 울산 당원들이 중앙당을 상대로 엄청난 항의를 했지만 중앙당은 고인의 지역구에 김태호를 공천해 당선시켰다.
고인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은 것이 1995년 울산시장 선거에 출마했을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 고인은 의정활동 경험과 두터운 인간관계를 내세워 올인했지만 민자당의 조직을 넘지 못해 결국 심완구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이후 고인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1997년 울산상공회의소 회장에 당선되어 활발한 경제 활동을 펴면서 상의회장에 연임되기도 했다.
울산시민들을 놀라게 한 것은 2004년 검찰에 구속되면서다. 고인은 이때 울산상공회의소와 한주 회사 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리고 이 해 가을 병보석으로 재판을 받던 중 선고를 앞두고 잠적했다. 고인이 사라진 뒤 지역에서는 일본, 홍콩 밀항설과 서울에 살고 있다는 등 각종 소문이 난무했다.
그러나 잠적 6년 뒤 일본에서 울산지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수 의사를 밝혔고 이후 울산으로 온 고인은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속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 최근에는 지병으로 구속집행이 정지되어 울산에서 집과 병원을 오가면서 치료를 받던 중 숨졌다.
필자는 고인의 행적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재판 내용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처음 고인의 재판을 맡았던 판사를 어렵사리 만났다. 그는 현재 창원 지법에서 일하고 있다. 판사는 이미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입을 다물었다. 판사를 통해 알아낸 것은 자신이 재판을 하는 동안 울산구치소에서 고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보고를 해 와 고인을 울산대학병원으로 옮기도록 했고 울산대학병원에서도 의사들이 고인이 중병이기 때문에 서울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해 이에 동의했다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고인은 서울에서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재판이 열릴 때면 앰블런스를 타고 울산으로 와 재판을 잘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고인이 판사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편지에는 고인이 앞으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삶을 마치겠다는 내용의 글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 판사는 고인이 도주한 것을 알았고 편지 발신처를 보니 원주로 되어 있어 경찰에 연락해 원주에서 가장 험한 치악산을 뒤지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통보를 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고인의 도피 과정에는 의문이 많아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인이 돌아가기 얼마 전 필자는 병원에서 고인을 만나게 되어 있었다. 고인을 만나는 일은 고인과 가까운 유모씨(64)에게 부탁했다. 고인을 만나기에 앞서 필자는 유모씨에게 몇 가지 질문 사항을 얘기하고 이에 대한 답변을 받아 줄 것을 당부했다. 그랬더니 유모씨는 고인이 동강병원 601호실에 입원 해 있다면서 다행히 고인의 건강 상태가 괜찮으니 만날 수 있도록 날짜를 잡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고인이 갑자기 작고하여 그에 대한 많은 의문은 영원히 묻히고 말 것 같다.
필자는 심완구 전 시장이 뇌물 문제로 구속될 때도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는 검찰의 발표와 심 전시장의 주장이 엇갈려 시민들이 궁금해 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시장실에서 심 전 시장을 만났더니 그는 한마디로 “내가 시장으로 있는 동안 구정물은 마시지 않았다고 시민들에게 전해 달라”고만 말했다.
고인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다. 하나는 고인이 처음 도피했을 때 얘기다. 이 때 필자는 ‘고원준은 돌아와야 한다’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이 글에서 필자는 고인의 집이 명가이기 때문에 명가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고인이 하루 빨리 돌아와야 한다고 썼다. 그랬더니 며칠 뒤 독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독자는 전화를 통해 “장 국장 글을 좀 바로 써, 고 회장 집이 무슨 명가야. 옛날에 고 회장 할아버지가 석계 계시는 우리 할아버지에게 문안을 올 때면 문밖에서 3배를 하고 들어왔다”면서 고함을 쳤다. 알고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당시 야당 활동을 활발히 했던 이복이었다. 이 전화를 받은 뒤 필자는 이복 집안이 얼마나 명가인가 하고 알아보았더니 실제로 그의 문중에서는 조선 시대 과거에 합격한 어사가 2명이나 나왔고 또 일제강점기 천석꾼으로 사돈 김창숙과 함께 군자금을 모으고 남창 3.1 운동을 주도했던 이재락이 이복의 조상인 것을 알았다.
다른 한 가지는 관상이다. 1990년대 초 필자가 근무했던 모 신문사에서 관상을 잘 본다는 사람을 불러 울산 유지들의 관상을 본 일이 있었다. 이 관상쟁이는 부산 출신으로 본인을 만나지 않고 사진만 보아도 사진 속 사람들의 운명을 잘 알 수 있다고 해 ‘사진을 통해 본 관상’ 이라는 제목으로 관상 내용을 신문에 연재했다.
그런데 이 관상쟁이가 고인의 사진을 본 뒤 고인이 귀가 잘 생겨 유년과 중년까지는 귀족처럼 잘 살겠지만 말년에는 운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을 했다. 그런데 이 무렵 고인이 95년 민선시장 선거를 앞두고 열심히 뛸 때라 이 예언을 신문에 실어야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놓고 편집 회의를 하면서 고민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원래 관상을 잘 믿지 않는 편인데 지금 생각하면 이 예언이 맞았던 것 같다.
고인의 죽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재물의 허망과 인생무상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