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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성 탐랑성 북두의 제일성인 탐랑성은 천추생기궁으로 오행은 목(木)이다. 주로 총명, 문필, 부귀, 관직 등을 관장하는 별이다. 탐랑성이 있으면 귀한 자손이 나와 문장이 뛰어나며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된다. 끝이 뾰족한 탐랑을 문필봉이라하고, 끝이 약간 원형이면 귀인봉이라 한다. | ||
제2성 거문성(토성) 북두의 제2성 거문성은 천의제왕궁으로 오행은 토(土)다. 천을궁이라고도 하며 주로 총명, 문필, 부귀, 건강장수, 재물을 관장한다. 거문성은 일자문성 또는 정승을 많이 배출한다하여 정승사라고도 한다. | ||
제3성녹존성(토성) 천기절체궁으로 오행은 토다. 주로 질병과 패절을 관장하는 기운으로, 녹존성이 주변에 있으면 일이 안풀리고 온갖 재앙이 끊임이 없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좋은 혈은 존재하는 법이다. | ||
제4성 문곡성(수성) 주로 문장, 예능, 음탕, 도박, 사치 등을 관장하는 기운이다. 문곡성이 있는 곳에서는 문재는 뛰어나나 음행으로 관재 등을 당해 패가망신하기 쉽다. 그러나 터가 좋으면 예술과 연예 방면에 크게 두각을 나타낸다. 소위 끼가 많은 인물이 난다. | ||
제5성 염정성(화성) 오행은 화(火)다. 타오르는 불과 같은 성격으로 폭력과 폭압, 형살 등을 관장한다. 이러한 산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은 기가 세다. 터가 좋은 군왕지지에 염정성이 있으면 독재자가 되기 쉽고, 보통자리라면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가 된다. 그러나 터가 나쁜 곳에 염정성이 보이면 폭력이나 억압을 당하게 된다. | ||
제6성 무곡성(금성) 북두의 제6성인 무곡성은 합양복덕궁으로 복덕, 연년이라고도 하며 오행은 금(金)이다. 주로 무관, 장군, 재물, 여자들의 성공 등을 관장한다. 무곡성 정기를 받는 곳은 부귀장수하고 큰 재물을 얻는다. | ||
제7성 파군성(금성) 주로 절명, 패망, 형벌, 악질 등을 관장하는 기운이다. 험하고 사나운 파군성이 가까이 있는 곳은 단명은 물론 온갖 재앙이 끊임이 없다. 자료는 형산정경연교수의 홈페이지 : 정통풍수지리학회(http://poongsoojiri.org)에서 복사해 왔습니다. |
천문(天文)은 지리(地理)에 영향을 미치고, 지리는 인사(人事)에 영향을 미친다고 하였습니다
제1성이 보이는 집들은 박사를 많이 배출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날마다 일어나서 저런 뽀쪽한
삼각형을 보면 정신이 집중되고 목표를 찾고 등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문필봉이라고도 하고 학자를
많이 배출한다고 합니다.
제2성의 일자문성을 매일 바라보면은 중심을 잡고 어떤 원칙을 지킬려고 노력할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제4성처럼 물결이 치듯 마음도 물결이 일면 감정에 치우친 생활을 할 것이라 생각이 또한
듭니다. 그래서 제2성이 보이면 정승이 많이 배출된다고 합니다. 역대 총리, 정승들은 저산을 다
가지고 있다합니다.
마지막으로 제6성 무곡성은 재물과 연관을 많이 합니다. 저 산을 매일 바라보는 사람은 마음도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 할 것입니다. 그러니 재산모으는 것도 잘 할 것입니다. 소안도 땅금뫼가
전형적인 무곡성입니다. 비동리 비서리 사람들이 부자들이 많지요. 비자리 돈많이 번 부자들을
한번 보세요. 집의 뒤쪽(주산)이 땅금뫼가 철모를 엎어논 듯이 보이고 있고 대문이 땅금뫼로
꽉 차있을 겁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산세는 제1, 2 , 6 성입니다. 우리사는 주위에 위 3성이
있으면 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면 이러한 산들이 언제부터인가 다가옵니다.
속리산에서 뻗어오는 한남정맥이 맹사성고택, 외암리, 추사김정희 고택, 남연군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비오는 남연군 묘 주차장에는 벚꽃이 장관을 이룹니다. 간단히 목을 축이고 횡간리 임원진을
기다립니다.
날씨를 원망하며 비옷을 입고 남연군 묘에 갑니다. 남연군(南延君,?~1822)은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본관은 전주이고 본명은 이구 입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이 후사가 없어 남연군이 그의 양자가 되었다 합니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하면서 구(球)로 개명하였다 합니다.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세손 병원의 둘째 아들이자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입니다. 이로써 영조로 이어지는 왕족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정조 이후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후사 없이 이들 왕들이 죽자 안동김씨에 의해
서 왕들이 옹립되던 시기에 대원군이 대망을 품을 기틀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 고종의 아버지는 우리가 드라마에서 어떤인물인지 많이 봤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인물입니다. 대원군은 1820년 (순조 20년)태어나서 1898년(광무 2년)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합니다.
남연군 묘 가는 길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신도비라는 것은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입니다.
그런데 비석을 한번 자세히 살펴보면 유명조선국 현록대부 남연군 겸.... 이렇게 나갑니다.
이묘를 1845년경에 썼는데 1616년경에 명이 점점 쇄약해 지고 청나라가 세워집니다.
1845년이라면 명나라가 망하고도 200여년이 지난 청나라 시기입니다. 그런데도 조선사대부는
명나라가 있고 조선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 말로 뼛속까지 친명 뭐 그런뜻이 되겠죠.
씁쓸합니다. 이런 신도비는 우리나라 곳곳에 지금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어디가서 비를 볼때
자세히 한번 봐 보세요.
아뭏든 이신도비를 보고 묘를 올려다 보면 묘가 웅장합니다. 과연 2대천자지기란 이런곳인가
하고 올려다 보게 됩니다.
2대천자지기, 만대영화지기 -
흥선군은 선친 남연군의 묘를 이장함에 명당자리를 지관 정만인에게 청합니다. 한양에서 3백리
경기연천에서 5백리길인 덕산고을에서 이 두 지기를 추천받은 흥선군은 당연히 2대천자지기를
택합니다. 위 두곳의 명당이 존재한다면 자신이 쓴다면 어떤곳에 묘를 써야 할까요?
가야산의 산세는 가야산 서편 봉우리위에 두 바위가 문기둥모양 솟아있는 석문산이 주봉이 되어
좌우와 산의 맥이 이어 뻗어내려 청룡과 백호가 되어 병풍을 둘러놓은 듯하다 합니다.
가야사에 자리 잡고 금당 뒤 가야사의 금탑이 우뚝 서 있는 이곳이 2대천자지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폐사도 아닌 절에 그것도 금탑에 묘를 쓰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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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입니다. 그 옆에 칼이 보입니다. 대부분 장군이나 무인들 초상화에서는 칼은 칼집 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집무실인지 책상옆에 칼을 빼어 옆에 두고 있습니다. 이 초상화만 봐도 대단합니다. 저칼에 얼마나 많은 이의 목이 달아났을까요.
한편, 그의 대망은 안동김씨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다시 강화하는데 있었습니다. 정만인 지관으로부터 추천받은 2대천자지기에 묘를 쓰는 과정은 드라마틱합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전해져 옵니다. 흥선군은 이때의 나이가 20대 초반입니다. |
흥선군은 먼저 가깝게 지내던 김병학의 집으로 가 난 그림을 그려 주고서 가보로 전해오는
단계석벼루를 얻은 후, 영의정 김좌근 대감댁을 찾아가 선물로 줍니다. 명품 벼루를 얻은
김좌근은 곧 충청 감사에게 가야사 터를 흥선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로 쓰는 데 협조하라는
편지를 써 주었다 합니다.
그리고 그 후 덕산현감으로 하여금 가야사의 중들을 절에서 쫒아내어 폐사로 만듭니다.
그 후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흥선군은 가재를 팔아 2만냥을 얻어 그 반을 절의 중에게 뇌물로
주어 절을 불사르게 합니다. 천년거찰 가야사는 하룻밤에 잿더미로 변합니다.
그러나 금탑만은 홀연히 남아 있었다 합니다. 한편, 불지른 중은 수덕사로 가는 길인 사동일에서
갑자기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가야사를 불지른 흥선군은 다음해 세형과 함께 선친묘소를 찾아
민가에 머무릅니다. 결국 불지르고 바로 묘를 쓰지 않고 구광지라고 해서 1년여를 근처에 가묘를
쓰고서 금탑을 부수고 금탑에 묘를 씁니다.
경기도 연천에서 가야골까지 5백리길의 남연군 무덤을 옮겨 장사지내는 면례는 왕실답게 새로
만들 상여에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동원되어 중계하여 엄숙히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그 상여는 박물관으로 가고 모조품이 묘 근처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망을 이루기 위하여 마지막 금탑에 묘를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 금탑은 공민왕 7년 세워졌
다고 전해집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그날 밤 흰옷을 입은 금탑의 신이 위 3형제의 꿈에 나타나
대로하여 꾸짖기를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빼앗으려고 하는가
만약 끝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 묘를 이장하면 너희들은 폭사할 것이다. 그리고 망할 것”이라고
하였답니다. 이 꿈 이야기를 들은 흥선군은 과연 진실로 대길한 터이다. 운명이란 하늘에 달려
있거늘 탑신이 어찌 우리에게 화를 미칠 수 있겠는가. 하며 벌벌떠는 형들을 뒤로하고 다음날
직접도끼로 금탑을 내리쳤다고 합니다.
이때가 1845년 그는 이렇듯 대망을 품고 집념이 강하면서도 치밀하였습니다. 곧바로
선친의 묘를 금탑자리로 옮기지 않고 가야사를 폐사로 만들고 금탑을 허물고 그 구실들을 마련
하고 흥선군은 재면례 한지 7년 되는 1852년 (철종3년 )에 둘째아들 재황 고종을 낳고 1863년
12월 조선의 26대왕 고종이고 흥선군은 대원군에 봉해 집니다.
그후 흥선대원군은 가야사 금탑에 대하여 미안함을 느껴는지 고종이 즉위한지 몇 달 후 가야골에
상가리에 한양에서 도편수를 보내 2년만에 은덕에 보답한다는 보덕사를 창건하여 장남 재면의
이름으로 부처님께 바쳐 지금까지 전하고 있습니다. 남연군 묘앞에 보이는 땅은 절에 귀속하게
하고 민묘는 이장케 하였다 합니다.
묘앞의 요석입니다. 묘 오른쪽에 있어서 왕이 옥쇄를 찍을때처럼 똑같은 모습이었다 하는데
일제에 의해 훼손되어 있습니다. 정자국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 남연군 묘와 관련하여 1868년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이끄는 차이나 호에 탄 백인 말레이닌
한국천주교인 등 일당은 상해를 출항하여 충청도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상륙. 남연균 묘소를
굴총합니다. 이들은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임금의 조부묘에 묻힌 재물의
약탈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묘는 석회로 워낙 단단하게 봉해져서 날이 밝자 도주했다고 합니다. 왕을 만들어준
부친의 묘를 도굴하려했다는 보고를 접한 대원군의 노여움은 어느정도 였을까. 어떻게 아버지
를 지금의 자리에 모셨습니까?
이후로 조선의 역사는 변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풍수에 조예가 깊었던 흥선군은 이 묘의 발복이 3대를 넘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종묘사직
을 위해 자기의 묘까지 명당에 잡아 그 발복으로 조선의 왕업을 대대손손 연장하고자 했다
합니다. 당시 그가 묘 터로 잡은 곳이 고양군 공덕리(현재 서울 마포구 공덕동)였습니다.
사후 흥선군은 생전의 뜻에 따라 이곳에 묘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 묘는 1906년 조선의 국운번창
을 염려한 일제의 계략에 의해 파주군 대덕리로 이장됐고, 1966년 다시 남양주시 지곡리로
이장돼 현재에 이른다 합니다.
묘의 주인에게 인사를 드립니다. (소안향우회 잘되게 해달라고요.)
저 가운데 장명등은 고관대작들만 묘에 씁니다. 그런데 저기로 보이는 좌우 사방에 보이는 땅은
이무덤의 소유자가 주인이었다 합니다.
사진을 찍고 용을 따라서 위로 올라 갔습니다. 거기도 일제에 의해 용맥을 끊은 자국이 보입니다.
답사를 마치고 옥녀식당에 내려와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옥녀식당이란 이름을 봐도 주위에
옥녀봉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무곡성처럼 생겼는데 여자의 긴머리가 어께까지 흘러 내려온
형상을 한다합니다. 마치 제6성처럼 옥녀머리처럼 생긴 봉오리를 말합니다. 옥녀는 아직 못
봤습니다만 이식당은 장사가 잘 되겠습니다.
그 옥녀식당에서 박정수 고문님께서 답사에 같이 참석하시어 격려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맹씨행단으로 가는 마을 어귀에서 구도 김성국총무님이 구괴정에서 시 한수 읊으고 먹을 막걸리
를 메고 갑니다.
조선사를 통틀어 황희와 맹사성에 비견할 만한 뛰어난 재상은 없다 합니다. 세종대왕의 뛰어난
업적뒤에는 이 두 정승이 보필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안정 속에 문화적 융성이 가능했던 것이라
합니다.
철저한 선비이자 뛰어난 재상이었던 맹사성 선생의 생가는 충남 아산시 백방면 중리 설화산
(雪華山) 아래에 있습니다. 사적 제109호로 지정된 생가는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는데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 맹씨행단이라고 부릅니다. 충청남도 도목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는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00여년으로 높이가 35m에 둘레가 10m나 되는 것으로 맹정승이 심은
것이라고 합니다. 맹씨행단은 설화산의 정기가 집중된 북향집 명당입니다.
설화산에서 중심맥으로 낙맥하여 북쪽으로 내려온 주룡이 평평하게 터를 잡은 곳에 대청마루
하나, 안방 하나, 건너방이 하나뿐인 일자형의 작은 가옥이 맹정승의 생가입니다. 일국의 재상이
살았던 집으로 보기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고 소박합니다.
이은하의 노래 중 최진사댁 셋째딸을 달라면서 칠복이가 6칸대청에 무릅꿇고서 머리조아리는데
6칸 대청이면 맹시행단과 비교해 봐도 엄청난 규모의 부자임에 최진사는 틀림이 없습니다.
본래 이곳은 고려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지어 살던 집이었다고 합니다. 최영 장군과 친분이
두터운 맹정승 할아버지가 이어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최영장군의 황금보기를 돌같이 하라. 그리고 조선의 대표 청백리 맹사성이 왜 그런 재물관을
가졌는지 궁금하지요. 이 다리밑의 수로에 그 답이 있지 않을 까요. 그렇습니다.
수관재물이라 했습니다. 시골 동네 가면 부잣집들은 다들 마당에 우물이 있지요.
그렇다면 부잣집이니까 우물이 있을까요. 우물이 있으니 부잣집일까요.
발췌해온글 읽어 보시죠.
"맹사성의 호는 부처라는 뜻의 고불(古佛)이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관은 이곳 지명의 신창
이다. 맹씨는 신창 맹씨 단본으로 원시조는 중국의 성현 맹자라고 한다. 맹자의 39대손 되는
당나라 사람 맹승훈이 신라 진성여왕 때 당의 한림원 오경박사 자격으로 유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머물게 되면서 우리 나라 맹씨의 연원이 되었다.
신창 맹씨 본관이 시작된 것은 맹자의 51대손 되는 맹의가 문무를 겸비하여 나라에 큰공을
세우자 고려 제26대 충선왕이 그의 출생지 지명을 따 신창백이란 작위를 수여하면서부터 라고
한다. 맹의의 아들 맹유는 고려 충숙왕 2년에 태어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이부상서를 지냈다."
"그는 경서에 만능했고 특히 주역에 능통하여 후진들에게 강학을 하면서 보냈다. 행단이라는
뜻이 강학을 하던 자리라는 뜻에서 생겼다고 하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황희가 오랫동안 영의정을 하였기 때문에 맹사성은 한번도 영의정을 못해 보았다. 그러나 세종
시대를 풍미했던 두 명재상이 있었으므로 역사상 가장 영화롭고 안락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효성이 지극한 맹사성이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몇 번 벼슬을 내놓았지만 세종은 한번도 그의
사직을 받아주지 않았다. 만년에 가서야 벼슬에 물러나 낙향한 그는 79세를 일기로 온양 자택에
서 칩거하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긴 것은 옥피리 하나뿐이었다. 맹사성
선생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는데 항상 타고 다니던 검은 소는 그가 죽은지 사흘동안 굶다
죽어 고불 묘 옆에 묻혔다. 이 묘를 흑기총(黑騎塚)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자리하고 있다.
"설화산의 모든 정기가 이곳에 집중되는 듯하다. 집터 양쪽에서 흘러나온 물이 금곡천과 합해져
금성환포 해주고 있다. 청룡 백호는 크고 장엄하게 감싸주었다. 요즈음 백호쪽 산을 헐어 골재
채취를 하고 있는데 보기에 흉하다. 안산은 태화산에서 뻗은 백방산으로 마치 신선과도 같으나
집터보다 높아 약간 위압감을 준다. 안산이 높아 혈을 위압하면 제1인자는 못나오고 2인자가
된다하였는데 맹정승이 영의정을 못하고 만년 좌의정만 한 것이 이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발췌해온 글)-
기념사진도 찍고
북향집에 대하여 박재관 부회장님으로 부터 설명도 듣고요.
이중으로 담을 쳐 놓은 뒷문 구괴정으로 가는 길에 신현유 미라회장님으로 부터 설명도
들었습니다.
맹사성, 황희, 권진 3정승이 나무 3그루씩 9그루를 심고 이 정자에서 막걸리 드셨던 곳입니다.
최금호 감사님이 3정승이 심었었던 그 나무 밑에 있습니다.
맹사성이 이정자에서 읊었었던 강호사시가 입니다. 참고로 보길도 세연정을 짓고 어부사시사를
읊었던 윤선도도 있습니다만, 가와 사의 차이입니다.
탁료는 막걸리, 계변은 정자의 앞에 시냇가가 있어서 금린어를 안주삼아서 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소안향우회에서도 막걸리를 그래서 드십니다. 정승이 되어 시한수를 읊습니다.
삼상당 3정승이 이 정자에서 국사를 논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합니다.
내려오는 길에 배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다음은 마지막 답사지 외암리 민속마을로 향합니다.
저산이 설화산입니다.
산들이 대단합니다. 일자문성, 탐랑성이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외암리 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반촌입니다. 현재 65가구의 주택이 밀집된 마을로 옛 모습을 간직한 기와집과 초가집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1978년 충청남도 지정 '민속 마을'로 선정되었고, 1988년 전통건조물 보존지구 제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충남 아산시와 천안시 경계인 설화산 밑에 위치하고 있는 외암리 민속마을에는 약 5백년 전에
이 마을에 강씨와 육씨가 먼저 정착하였다합니다. 이후 명종 때 장임랑을 지낸 예안이씨 이정
일가의 이주로 자손이 번성하여 예안이씨의 집성촌이 이루어지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합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장승과 열녀문이 있고, 다리 건너에는 좌측으로 물레방앗간이 있으며,
물레방앗간 뒤쪽의 약간 높은 대지에 초가로 된 육각정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최근에 관광객을
위하여 새로 만든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을은 전체적으로 동서로 길게 뻗어 있으며 집의 향은 대개 서남향입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물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무릇 물이 없는 곳은 사람이 살
곳이 못된다. 산에는 반드시 물이 있어야 한다. 물과 짝한 다음이라야 바야흐로 생성하는 묘함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물은 반드시 흘러오고 흘러감이 지리에 합당해야 만 비로소 정기를 모아
기르게 된다. ........ 물은 재록을 맡아 큰 물가에 부유한 집과 유명한 마을이 많다. 비록
산중이라도 시내와 간수(澗水계곡의 물) 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대를 이어 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라고 하여 산과 물이 만나는 곳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외암마을의 물은 마을을 감싸 돌고 있어 지리적으로 볼 때 유리한 위치에 입지하고 있다.
하천이 흐르는 원리에 의하여 퇴적사면에 위치하고 있어서 새로운 경지가 형성되며 물의 피해가
적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퇴적사면은 물이 범람할 때 부유물질이 쌓여 유기물이 많아 토양이
더 비옥해지며, 농토의 면적도 점차 넓어진다." (발췌해온 글)
이 돌담길을 걸으며 고향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냇가 꼬랑이 참 인상적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참판댁이 건재고택이 가장 집이 크고 풍수적으로 좋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 집 뒷쪽으로 돌아가서 용이 그집의 가장 중심점으로 들어 간것을 보았을 겁니다.
변산 내소사에 가시거든 대웅전 뒷쪽으로 가셔셔 용이 대웅전으로 들어간것을 보면 감동할 것
입니다.
그리고 남근석을 찍지 못해서 못보여 드리네요.
저랑같이 보신분들은 이해 할 것입니다.
이렇게 답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외암리마을 주차장에서 목을 축입니다.
이주차장에서의 마지막 막걸리는 여행의 백미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포옹으로 답례
이렇게 해서 비오는 날 답사가 끝났습니다.
봄의 한자락에서 명당들의 기를 받기에는 조금은 날씨가 도와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소안향우회 임원진들과 함께 했던 4월 22일은 평생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재경소안향우회의 전설이 될 것입니다.
함께 해주시고 찬조해 주신 고문님 임원진 여러분
그리고 이글을 읽으시는 향우회원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2012.5.2 정종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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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친구좋은정보 감사하다.....
건아 13일 서울오는감?
스마트폰으로 수정하고 저장을 눌렀는데 사진이 모두 삭제되었네요.
에휴 빠른시일내에 사진다시 올려야 겠습니다.
스마트폰으로는 앞으로 수정하지 마세요.``
총회준비에여념이없을텐데지난4월22일각마을회장님과향우회간부들을대동하고단합대회겸총회사전준비를한정종출사무국장을비롯행사를주관해주신김원금회장님께감사를드립니다
재경소안향우회의미래를미덥고든든하게여기면서 다시한번 감사를드립니다
박고문님 감사합니다.
저런 천자지기가 나올확률은 대통령이 나올 확률 이겠죠! 묘만 잘쓰면 천자가 나올까요. 산세가 좋은 곳에 살면 부자가 될까요.
설마 그렇게 믿는 분들은 없겠습니다.
항상 성실하라 그리고 심성이 모든 것을 누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면 태어나서 죽는데 묘는 예로부터 자신이 쓰는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화장을 한다합니다. 화장을 하면 " 폭파"를
한다고 해서 자손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후손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다 합니다. 그래서 선진국일수록 화장을 선호 한다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대안이 화장이라 하고 화장을 많이들 하십니다.
집은 맹씨행단처럼 명당에 집을 짓고 외암리처럼 마을이 번성을 한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요즘 전원주택이다. 귀농주택이다 해서 많이들 들로 산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몇년후 덩그러니 흉가로 방치된채 홀로 남은 주택을 주위를 둘러 보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맹씨행단처럼 명당에는 못 잡는다 하여도 마을이 번성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느 정도 모여서 살아야 된다 합니다.
옛날 유명한 집성촌들은 지금까지 유지되면서 마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마을을 둘러보면 외암리 마을처럼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자리를 잡아
수백년 이어져 와서 그 가문이 흥한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문장쓰시느라.고생 했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