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경남도교육청이 각 급 학교에 공문을 보내 '독서인증제'를 시행하라고 했다. 도교육청에서 말하는 '독서인증제'란 "필독도서와 권장도서를 읽고 나서 평가 받아, 그 결과에 대해 인증 받는 독서교육 프로그램"을 말한다. 도교육청은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을 기르고 메타 지식을 확보하게 하여 학문 간의 통섭과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있고, 양서를 필독도서·권장도서로 정하여 학생들에게 책읽기를 권장함으로써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는 데 있다"고 하며, 초·중·고에 "필독·권장도서 독서인증을 모두 받은 학생에게 독서인증서 발급할 것"과 "필독도서는 교과 독서활동을 통과한 학생에게 독후활동 자격 부여하고, 독후활동 한 다음 독서 인증할 것", "권장도서는 독후활동을 한 학생에게 독서 인증할 것"이라고 했다.
공문이 내려간 뒤 현장에서 아이들 독서 지도에 관심이 있는 많은 교사가 술렁이며 애써 가꾼 도서관이 독서 실적 관리실이 될 판이라고 한다. 실적 보고를 강요하면 학교는 경쟁적 성과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며 그 실적을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할 수밖에 없고, 제대로 된 독서 환경 조성이 아니고 실적 쌓기가 일과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경쟁적 기록 부풀리기가 예상되고, 대학 입시에의 불가피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대로는 안 된다면서 교육청은 이 사업이 지니는 순기능과 불가피성을 투명하게 펼쳐 놓고, 전문가 그룹은 이 사업이 지니는 문제점과 역기능을 내놓고서는 모두가 모여서 토론을 해보자고 했다. 교육감은 지난 5일 어린이날 한 방송에 출연해 "강제로라도 책을 읽혀야 한다."는 뜻의 말을 했다. 공문과 함께 그런 말로 ‘독서 인증제’가 기사화되었다.
기사 제목을 보고 느낀 것
일반 사람들이 그냥 기사 제목만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책을 많이 읽자는 좋은 뜻이라 강제로라도 읽히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겠지. ‘인증제’하려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 ‘책을 많이 읽히자’는 큰 뜻은 같다. 인증제를 반대한다고 해서 ‘책을 읽히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제목만 보고 소문이나 뉴스만 들으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 요즘은 더욱 제대로 알아보지 않으면 정 반대의 주장을 가질 수 있다. 흥분하거나 감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댓글을 다는 사람도 많아졌다. 얼마 전 ‘일제고사 사건’도 그렇다. 시험을 치지 말자는 게 아니고 ‘일제 고사’를 치는 것에 반대하거나 학부모들에게 의견을 물어본 것인데도 몇몇 언론에 자꾸 반대하는 이들을 ‘시험을 치지 말자’는 의도로 주장한다고 사설이나 기사에서 비판하니까, 그 속사정을 잘 모르는 보통 사람들 생각을 흩뜨리게 한다. 이런 기사가 상당히 ‘정치’적이랄 수 있다. 그래서 미디어 시대에 오히려 더 제대로 잘 보고 읽고 해석하고 분석해서 알아야 현혹되는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도교육청에서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을 기르고 메타 지식을 확보하게 하여 학문 간의 통섭과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있고, 양서를 필독도서·권장도서로 정하여 학생들에게 책읽기를 권장함으로써 자기 주도적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는 데 있다”고 한다. ‘메타 지식’ 참 어려운 말이다. 폭넓은 지식, 여러 곳으로 뻗어나가는 지식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자기 주도적 학습능력’이란 말을 참 자주 쓴다.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힘을 기르게 할 모양인데 ‘스스로’하려는 자율과 즐거움이 있어야 하는데, ‘강제’하는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 싶다. 또 결국 ‘책 읽는 것’이 즐거움보다는 ‘학습능력’을 높이는데 목적을 두고 있으니 읽을 책 내용도 어떤 것이지 짐작이 간다. ‘필독도서, 권장도서’는 아이들이 정하지 않는다. 어른이 고르면 아이들은 정해진 대로 읽는 것이다. 이러고도 ‘창의성’이 길러질까. ‘창의적인 인재’를 기르는데 있다고 밝혀 두었지만, 논리에 맞는가. 책을 고르는 기쁨과 즐거움이 막혀 버렸다. 책을 잘 고르도록 시행착오를 겪으며 익히는 것이 교육이 아닌가.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일까.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제도가 효과보다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반대한다. 늘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책과 자주 만나니까 ‘현실에 맞는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기사는 내용을 파고 들어가서 잘 살펴봐야 한다. 교사라면 더욱더 따져봐야 한다. 일반 사람들은 학교 사정을 모르니까 ‘책 읽어야 한다’는 큰 뜻에 공감하는 수준에 머무르기 쉽다. 그래서 비록 ‘강제’로라도 읽히는 게 막연히 ‘도움’이 될거라 여길지 모른다. 앞으로 일어날 영향, 어느 쪽이 더 효과 있는지 잘 따져야 한다.
지금 학부모 세대는
지금 학부모들의 어린 시절에는 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책이라고 해봐야 참고서 학습서 뿐 문학 작품은 많지도 않았다. 있어도 요즘 아이들과 같이 시험에 쪼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런 작품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지금 우리 어른 삶을 보자. 지금 우리 어른들은 평소 책을 즐겨 있는가? 늘 일하느라 바쁘다는 넋두리를 댈 수 있지만, 바쁘지 않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가? 아이들 때문에 마지못해 읽는가, 그렇게라도 해오고 있는가? 아이와 상관없이 책 읽는 것이 내 삶의 즐거움이 되고 있는가? 우리도 어릴 때 읽으라고 해서 읽기 시작했다. 언제부터 내 스스로 책을 골라 읽게 되었는가? 지금은 스스로 책을 골라 사서 읽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 기회도 언제든지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지금 그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럴까? 가정마다 거실에 책장이 있는가. 책장에는 일하기 위해 필요한 책 말고 여러 문학이나 과학, 음악, 미술, 예술에 따른 책이 있는가. ‘학습’에 도움 될 것이라고 사 놓은 ‘전집’류, ‘학습’백과류 말고, 창작 문학작품, 시집 따위가 있는가?
강제로 읽혀서 그것이 몸에 베여 지금까지도 생활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책에 대한 즐거운 추억이 드물다. 스스로 찾은 즐거움을 오래가고 꾸준하다. 우리가 정말 배우고 익혀야할 것은 ‘책 읽는 것’자체 보다는 ‘책 읽는 즐거움’, ‘스스로 책을 고르고 손이 가도록 하는 마음’이 먼저일 것이다. ‘책 읽는 것’을 강제할 수 있어도 ‘책 읽는 즐거움’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 ‘즐거움’을 느끼고 깨치게 하면 ‘책’은 자연스럽게 읽게 된다. 그게 교육이고 그런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 ‘인증제’를 해야 할 사람은 어른들이고, 교사들이다. 우리가 하지 못한 것들을 아이들한테 해주고 싶은 마음이야 알겠지만, 우리 아이들이 커서 ‘책 읽는 것’이 일하는데 필요한 학습 책을 읽는 수준밖 되지 않는다면 참 재미없을 것이다.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일하는 기계는 되지 않아야겠지.
얼마 전 신문에 여러 나라 아이들 공부 만족도인가 즐거움을 조사한 기사에 우리나라 매우 낮은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삶에 대한 행복도나 만족도도 낮았다. 공부를 그렇게 많이 한다는데 왜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할까? 어디서 우리 나라 학생이 세계 몇 위나 몇 등했다는 기사를 보면 조금은 화가 난다. 행복하지 못한 1등은 불쌍할 뿐이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행복하게 공부했으면 좋겠다. 행복하게 책을 읽고 즐겼으면 좋겠다. 검사 받는 공부와 책읽기는 더 이상 공부와 독서가 아니다. 언젠가 내 스스로 선택할 기회가 왔을 때 정말 공부와 책읽기를 즐길 수 있을까, 포기할까, 손 놔버릴까?
담당 장학사는 무슨 생각으로 추진했을까
교육청에서 이런 ‘공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과 토의 토론을 거쳤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폭넓게 의견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독서지도에 따른 담당 장학사나 연구사가 몇몇 아는 사람 의견을 정리해서 ‘업무 추진’ 기안을 만들었을 것이다. 공문을 내려보내면 각 교육청이나 학교별로 알아서 실시해서 보고를 받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게 까지 사회 문제가 될 것이라고 짐작하지 못하셨겠지. 담당 장학사 처지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내려오는 공문 가운데 하나인데 이걸 가지고 여러 사람 묻고 토의할 것까지 뭐 있겠느냐고 여겼을지 모른다. 이렇게 일을 하면 그 많은 일을 어찌 다 하겠냐고 속으로는 답답함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일을 빨리 처리해야하는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한다면 장학사 본연의 전문성을 펼치는 기회는 언제일까 싶다. 시켜서 점검하고, 조사하고, 통계내어 보고하는 일이 ‘장학사’ 일의 대부분가 된 지 오래다. 참 못할 일이고 안타깝기만 하다.
교육에는 수치로 통계 낼 수 있는 게 있지만, 낼 수 없는 것이 더 많고, 내어서는 안 될 것도 있다. 대부분 일을 수치로 낸 결과로 확인하려고 하니까 모순이 생긴다. 수치로 나타낼 수 없거나 나타내서는 안 될 일을 하면 결국 내용보다는 결과에 집착하여 그 결과를 멋들어지게 만드는 ‘요령’만 는다. 이런 현상은 현장 선생님들이 거의 다 안다. 시범학교, 연구학교의 필요성과 효과를 의심하고 기대하지 않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결과’를 꾸미는 능력만 키울 뿐이다. 그게 교직 사회에 ‘일’ 잘하는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것도 ‘능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우리는 교육을 말하는 것이지 일반 회사와 같은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교사들에게 이동이나 승진 점수에 도움되니까 한다. 자기 학교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은 그것보다 뒤에 있다. 아이들을 앞세워 얻는 점수일 뿐이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는 선생님들도 많은데 그런 선생님들 삶이나 이야기는 언론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교육 전문 담당 기자들이 꼭 찾아서 기사를 썼으면 좋겠다. 그게 ‘심층 취재’가 아닌가. 전문성을 살리는 길이기도 하겠다.
학급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침 10분 독서, 독서 토론, 독서 말하기, 독서 골든 벨 같은 활동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학급이 많다. 선생님이 의욕을 가지고 자신 있게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선생님들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필요해서 하니까 확신을 가지고 하니까 몸이 피곤해도 마음은 즐겁다. 그런 선생님들이 많다. 그런 학급이 드러나지 않게 많고, 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행착오를 겪는 학급도 많다. 이러는 가운데 ‘인증제’하라고 하면 이제 행사를 치르는 일로 여겨지게 되고 ‘책 읽는 즐거움’보다 ‘책 읽고 난 결과’를 내는 ‘일’이 돼 버린다. 실적이 낮으면 한 흔적을 억지로라도 만들어낼 것이다. 교사들은 알 것이다. 이런 흔적 내는 일이 얼마나 많이 해왔는지, 또 얼마나 해야 하는지. 하지 않고 했다 하고, 도움이 되었는지 아직 그 열매가 여물지도 않았는데 발전했다는 성공 사례가 시범학교, 연구학교 보고서에 실리는 형편을 짐작한다. 형식만 다를 뿐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새 교육감 공약이 학교 행사를 많이 줄이겠다고 했는데 또 다른 행사를 만드는 꼴이다. 예전 교육청 행사가 많다는 비판은 교육청이 학교를 도와주고 지원하기보다는 지시하고 의무출전, 강제 동원되는 형태가 많았기 때문이다. 행사가 많아도 참여하고 싶은 학교만 하거나, 교사 회의를 거쳐 참여여부를 정하면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행사를 많이 참여시켜 수치화할 수 있는 실적이 되니 끊임없이 행사에 의무출전, 강제 동원이 되는 것이다. 참여가 적으면 왜 그런지 살펴보고 다음해는 줄이거나 하지 않거나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데 안타깝다. 참여율이 낮으면 높이는 방법만 연구하는가 보다. 그래서 결국 의무 참여로 공문으로 나오기도 한다. 참여가 적은 행사에는 ‘의무 참여’밖에는 없는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사실 이런 행사들 때문에 정작 교과서대로라도 제대로 가르칠 겨를이 없다. 깊이 있게 내용을 다룰 여유도 모자라고, 재구성해서 재미있게 가르칠 기회도 빼앗는다. 이미 뜻있게 열심히 하는 학급활동을 ‘업무’로 만들어 버리는 꼴이 많으니까 답답하다. 창의성을 죽이는, 의욕을 꺾는 이런 지시 같은 행정공문이 많다. 이런 것이 ‘학습권 침해’가 아닌가. ‘수업을 잘 해도 표가 나지 않고 고만고만해도 되고 공문을 드러나 보이니까 수업을 희생하더라도 제시간, 없던 실적도 만들어 내야하는 현실’을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잘 고쳐지지 않을 것이라고 교사를 알고 있다. 교육청에서 만들어 내는 행사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결국에는 학급에는 ‘학습권 침해’가 되는 현실, 이런 부분을 우리 학부모, 언론들이 봐주고 알아야 한다. 그런 현실을 제대로 보고 알아야 비판과 대안이 제대로 나오지 않겠는가. 무엇을 위해 행사를 하는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책은 강제로라도 읽혀야 한다.’는 말에 ‘책’이란 말을 ‘밥’, ‘성금’, ‘불우이웃돕기’로 바꿔보자. 먹지 않는 밥을 억지로 먹여야할 때도 있겠지만 밥을 강제로라도 먹여야 할까? 내지 않는 성금을 강제로 내게 해도 되겠는가? 불우이웃돕기를 강제할 수 있겠는가? 밥 먹는 것, 성금 내는 것, 불우이웃돕기는 해야 하고 권장하는 것이 좋은 일이다. 권장할만한 일이지만 여기에 ‘강제로’ 하도록 한다면 뭔가 어색하다. 결국 먹게 하고, 성금 내게 되고, 불우이웃 돕는다 해도 그것의 주체는 시킨 사람이지 본인이 아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가지 않으니 소화도 쉽지 않고, 낸 돈 아깝고, 불우이웃을 불쌍한 ‘불우 이웃’으로 남게 되는 게 아닌가. 나중에 자기 스스로 할 기회가 있을 때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일 정도로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아도 기다려줘야 한다. 얼마나 많은 매체들이 아이들을 유혹하는가. 오락 게임, 인터넷, 텔레비전……. 어른들이 만들어가고 분위기를 만드는 모습이 보여야지, 아이들을 어른 입맛에 요리저리 시키면 안 될 일이다. 교육청에서 하나하나 자세한 것까지 지시하면 학교에서는 따르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창의적으로 나설 수 없고 의욕도 없어지는 것이다. 수동적인 사람이 되고 길들여지는 학교가 되는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을 펼칠 기회도 죽는 것이다.
학교에서 책을 읽는 힘을 북돋워주거나 즐거움을 느끼도록 행사를 이끌고 상을 주지만 이것이 기록되어 내 진로에 어떤 영향력이 있다고 하면 참여하는 아이들 마음이 달라진다. 또한 부모님들도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책은 보고 익혀야 할 과제나 학습도구가 되어버린다. 이런 피해는 교사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교육청에는 ‘책을 많이 자주 읽도록 해라’는 것까지만 하면 됐지 도서를 정해 인증제를 하라는 방법까지 하라고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공문 전달식 지시가 결국 교사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게 공문대로만 따라하게 하는 ‘시키는 대로 잘하는 인간’을 만든다. 주체적이지 못하고 늘 윗사람이나 어떤 유행에 따른 지시적인 일만 잘하는 교사를 우리는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앞날은 시키는 대로 잘하기보다 스스로 창의 있게 해나가는 사람이 필요하다. 교사들 삶이 창의성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보다는 해야 하는 책임감과 의무감만 강조하게 된다.
인증제가 강제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 뻔한 책 행사, 많이 읽은 아이, 골든 벨, 독후감, 독후 그림 따위가 행사가 벌어질 것이다. 사실 이런 행사는 인증제를 하지 않아도 평소에 많이 한다. 2. 책은 읽지 않고 문제만 외워 시험 치는 아이들도 조금씩 늘어날 것이다. 3. 인터넷에서 감상문 베껴 쓰거나 줄거리를 따와서 내는 아이들도 생길 것이다. 4. 문제 풀이식 대회에는 잘 외우고 기억 잘하는 아이들이 유리하고, 결국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독차지 할 것이다. 5. 권장도서나 인증도서 선정에 특정 출판사가 뽑히는 문제점이 나올 것이다.
이렇게 했으면 한다.
1. 사서 교사 보충이 절실하다. 2. 교사들도 책 읽을 수 있는 시간과 대회는 없을까? 3. 수업 연구대회(이것도 반대 하지만)에서 독서 활용 수업 주제를 주자. 4. 항시 수업 공개 학급처럼 독서 지도를 잘하는 반 사례를 만들면 어떨까 5. 학교 도서관을 오후 밤늦은 시간에도 열자. 이때 기간제 사서, 비정규직이라도 쓰자. 6. 교사전문 도서관이 없다. 교육청에서 교사들이 책을 볼 수 있는 도서관이 있었으면 좋겠다. 7. 도서관, 책에 따른 교사 연수를 넓혀 나갔으면 한다. 책을 잘 읽어주는 선생님, 학급에서 책을 재미있게 읽도록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도록 연수 기회를 폭넓게 만들자. 지금 이런 연수는 있는데 자율 연수이다. 좀 더 많은 선생님에게 연수비를 지원하자. 8. 학부모 연수도 필요하겠다. 9. ‘교육 뉴스’에 책이나 작가 소개, 책과 가까이하는 학급, 사례, 이 주에 가장 많이 본 책과 같은 프로그램 같은 것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이런 부분들이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지원 형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