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 이병철은 약관 스무살의 나이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유학이었다.
부산에서 그는 시모노세키로 가는 3,000톤 급 부관(釜關)연락선을 탔다. 배 밑바닥 2등 선실은 파도가 거센 현해탄에 접어들자 요동이 심했다. 이병철은 뱃멀미가 심해져 요동이 덜한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햇다. 그러나 선실 입구에서 일본인 형사가 그를 저지했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이병철의 신분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병철은 그때 '망한 나라의 국민은 이렇게 비참하구나'하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조선의 4무(無)의 나라였다. '나라가 없는 나라, 주권을 빼앗긴 나라, 기업이 없는 나라, 부자가 없는 나라'가 그것이다.
이병철은 일본 형사로부터 난생 처음 굴욕을 당하면서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강하고 풍복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시모노세키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20여 시간만에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 올라갔다. 도쿄의 변두리에 자취할 사글세 방을 구하고 그 이듬해인 1930년 봄 이병철은 와세다댜학 졍경과에 입학했다.
그 무렵 미국의 원가에서 금융공황이 발생했다. 1929년 10월 24일이었다. 증권시세가 폭락하면서 뉴욕의 아메리칸뱅크가 지불정지 상태에 빠지고, 은행 파산이 잇달았다. 파산한 은행의 숫자만도 1,300개에 달하는 세계적인 공황이 터진 것이다. 미국의 실업자가 갑자기 1,200만 명이나 생겼다. 이어 독일에서도 6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하는 경제불황이 시작되었고, 오스트리아 중앙은행도 파산했다. 경제공황은 영국으로 이어져 잉글랜드은행도 지불정지에 빠졌다.
금융광황은 슨식간에 세계를 휩쓸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만성적인 불황에 빠져 있던 일본경제도 단숨에 그 영향을 받았다. 공업생산이 70% 수준으로 떨어지더니, 수출이 37%나 줄어들고 수입도 40%나 격감했다. 그에 따라 물가도 폭락해서 쌀ㆍ생사 가격이 몇 달 사이에 반 이하로 떨어졌다.
일본 산업계도 대공황의 영향으로 해고나 인원정리에 착수하더니 이어 공장폐쇄로 이어졌다. 공장이 돌지 않자 갑자기 수십만의 실업자가 거리에 몰려나왔고, 일자리가 없어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까지 합치면 무려 3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양산되었다. 공장은 연일 파업이었다. 대학을 나와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런 현실을 풍자한 영화 <대학은 나와도>가 사람들 사이에 화제에 오르고 있었다.
일본사회의 분위기가 연일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좌익사상에 물들어 있던 청녅들이 연일 길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이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서적들이 인기를 끌었다.
이병철도 이 무렵, 시위대와 어울려 경시청 유치장 신세를 이틀 간이나 지기도 했지만, 그 자신은 포롤레타리아 사상과는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 그 시절 이병철은 심한 각기병에 걸린다. 요양도 해보고, 나름대로 섭생도 잘리 해보았지만 차도가 없다, 그는 귀국을 결심한다. 그것이 와세다대학 2학년 가을의 일이었다. 일본이 만주사변으로 치달을 때였으니, 그것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터였다.
이병철의 일본유학은 중퇴로 끝났으나, 불과 2년 여의 짧은 유학생활 동안 그는 대공황의 엄습도 맛보았고, 그로 인한 경기의 습속한 후퇴도 나름대로 느꼈다. 경제인에게 세계경제의 변동이 서민경제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이병철은 이 무렵 몸으로 체득했을 것이다.
이병철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던 1930년 무렵, 정주영은 송천소학교를 졸업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규학교 수업이 끝난 것이다.
열다섯 살 뒤늦은 나이에 소학교를 졸업했지만, 가가 할 일은 농사 외에는 없었다. 어린 나이에 고된 농사일을 했지만, 시골의 형편은 그날이 그날이었다. 아침엔 조밥이라도 먹을 수 있었지만, 점심은 끼니가 없어 굶었고 저녁에는 콩죽을 쑤어 먹었다. 그나마 봄이 되면 풀뿌리와 나무뿌리를 먹어야 했던 올촌 사람들은 결국 만주나 북간도로 살길을 찾아 떠나기까지 했다.
정주영은 농사일이 싫었다. 죽을 고생을 하면서 농사를 지어봤자, 세 끼조차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소학교를 졸업한 정주영에게 가장 희망을 준 것은 이광수의 소설 <흙>이었다. 그 소설은 <동아일보>에 연재되고 있었다. 구장 집에 배달되는 <동아일보>를 보기 위해 정주영은 매일 밤마다 2킬로미터 거리를 달려 그 집으로 갔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정주영은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결국 서울로 가서 출세하고 싶었던 그는 가출을 단행했다.
첫번 째 가출은 청진 쪽이었다. 그곳에서 제철소와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으므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청진까지 가는 동안 그는 철도공사판을 만난다. 일단 거기에서 돈을 벌어보기로 하고 손수레로 흙을 져나르는 일을 했다. 밥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는데 하루 일당은 25전이었으나 밥값이 32전이었다. 하루종일 열심히 일해도 밥값을 제외하면 겨우 13전이 남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 13전도 온전히 남질 않았다. 비오는 날엔 공을 쳤으므로 아예 벌이를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밥값조차 밀리기 시작했다. 더구나 고된 막노동이어서 어린 소년에겐 아직 힘이 부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힘든 와중에서도 내 힘으로 존을 벌어 먹고산다는 충족감이 있었다.
두 달쯤 일했을 때 아버지가 수솟문 끝에 그를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에게 붙잡혀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첫번 째 가출은 그렇게 끝났다.
두번 째 가출은 금강산을 가던 도중, 사기꾼에게 걸려 노잣돈만 털리고 다시 아버지에게 붙잡혀 되돌아오고 말았다.
세번 째 가출은 대담하게도 소 판 돈을 훔쳐 떠났다. 아버지가 자식을 분가시키기 위해 소를 키워 판 돈을 들고 도망친 것이다. 정주영은 그 돈으로 서울로 가 부기학원 속성과에 들어가 경리를 배우던 중 역시 서울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잡혀 결국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가출을 세 번씩이나 한 소년 정주영은 요즘 말로 하면 문제아에 가깝다. 그러나 그는 문제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소 판 돈으로 허튼짓을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33년 정주영은 나이 열아홉 살 때, 네번 째 가출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인천의 부두하역과 막노동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의 표현대로 최초의 안정된 직장인 쌀가게 복흥상회의 배달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1930년대 초 이병철은 유학생활에 실패해 귀국했고, 정주영은 네 번의 가출 끝에 최오로 월급받는 직장에 취직했다. 이병철이 세계적인 공황이 휩쓴 일본 도쿄 거리에서 도도한 세계사의 흐름을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있었다면, 정주영은 시골을 떠나 살아보기 위해 대담한 모험을 하던 때였다.
정주영은 평생을 불퇴전(不退戰)의 용기로 살아온 인물이다. 그 용기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정주영은 회고한다.
철도공사판에서 일하다 아버지에게 붙들려 300리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던 도중, 안변 근처의 과수원을 지나게 되었다. 거기에서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드린다고 사과를 몇 개 샀다. 그러나 그 사과는 싱싱하고 모양 좋은 것이 나이라 상하고 썩어 저절로 떨어진 헐값의 낙과(落果)였다. 상하고 썩은 몇 개의 사과.
정주영은 그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고 자서전에 썼지만, 그의 비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과 몇 개를 사면서도 상하고 썩은 헐값의 사과를 살 수밖에 없었던 가난한 농부의 현실. 보통 사람 같으면 너무 슬프고 답답해 절망했겠지만, 그는 절망을 발전의 기폭제로 삼은 용기의 화신이었다.
그가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했다가 돌아온 지 70년이 지났을 때, 그는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방북했다. 그의 가출시대를 하는 사람이라면, 아버지의 한 마리 소가 500마리가 되어 다시 고향을 향한다는 당시 그의 귀거래사는 그 때의 기억이 평생 그의 가슴에 얼마나 회한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버지가 애지중지 길러서 판 한 마리의 소값을 서울의 부기학원 등록금과 방값으로 써버린 자신의 불효를 그는 500배로, 아니 그보다 더한 무엇으로 갚고 싶어했던 것이다. 상한 사과 몇 개, 소 한 마리 값, 새벽부터 밤중까지 일해도 먹고 살 수조차 없었던 농촌의 현실. 1930년대 초 정주영의 모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정주영이 빈대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네번 째 가출을 한 후 인천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던 때였다. 그곳의 노동자합숙소는 빈대 천지였다. 몸이 솜처럼 피곤한데도 밤이면 빈대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정주영은 어느날 꾀를 썼다. 이불을 깔고 바닥에서 자면 빈대에 뜯기므로,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잔 것이다. 예상대로 빈대들로부터의 공격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빈대는 밥 상 다리를 타고 기어올라와 물어뜯기 시작했다. 미물이지만 만만치 않은 놈들이었다.
정주영은 다시 머리를 써서 밥상 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가놓고 잤다. 빈대가 밥상다리를 타려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익사하게 하려는 묘안이었다. 역시 빈대는 밥상다리를 타고 오르다 양재기 물에 떨어져 빠져 즉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마리뿐. 빈대들은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냈다. 사람의 피를 빨기 위해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간 다음, 누워 있는 사람을 목표로 천장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때 정주영은 깨달았다. 하찮은 빈대도 물이 담긴 양재기라는 장애물을 뛰어넘으려 그토록 전심전력으로 연구하고 필사적으로 노력해 제 뜻을 이루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못할 게 무엇인가 하는 깨달음이었다.
'뜻을 세우고 최선을 다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정주영이 빈대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빈대로부터 얻은 교훈은 그 후 그의 사업에서 난관에 처할 때마다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거북선이 그려진 지폐를 보여주고 조선소 건립에 필요한 수천만 달러의 융자를 얻어냈다든지, 한겨울 눈 덮인 골프장에서 빨간색 칠을 한 골프공으로 골프를 쳤다든지, 겨울에 잔디를 구할 수 없자 보리를 떠다가 심어 공사를 마쳤다든지 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네번 째 가출에서 얻은 빈대의 교훈. 정주영이 빈대로부터 얻은 교훈은 아이디어를 내면 어떤 일이든지 반드시 길이 있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이병철이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을 한 엘리트로서 삼성그룹을 창업한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정주영이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는데 현대와 같은 대기업의 총수가 된 것에 대해 사람들은 경이로운 시선으로 대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을 열고 이끌어가는 데 학력은 별로 관계가 없어보인다. 오히려 실제 직업전선에서 배운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지식보다 더 효용가치가 있는 듯하다.
바둑의 명인 조치훈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학교는 사람을 멍청이로 만든다." 그도 고등학교 1학년 중퇴생이었다.
반면에 이병철의 경우처럼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대기업의 총수로 성공한 예는 오히려 드물다. 그러면에서 본다면 이병철의 성공이 더 돋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풍족한 상황에서 자란 사람은 굳이 모험을 하며 일생을 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홍하상 『카리스마 vs 카리스마 이병철ㆍ정주영』한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