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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골매의 비행이 중단됐다. 비행을 시작한 지 21년 만이다.
8월 16일 한화 이글스는 보도자료를 통해 베테랑 투수 송진우(44)가 은퇴를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은퇴 사유는 간명했다. 2군에서 지속적인 훈련을 해왔으나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투구를 더는 선보일 수 없다고 판단,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야구팬들은 담담하게 송진우의 결심을 받아들이면서도 크게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게 송진우는 야구선수 이전에 일상이자 역사였다. 1989년 빙그레 이글스(한화의 전신)에 입단하고 올 시즌 은퇴를 결심하게 된 21년 동안 대통령은 5번이나 바뀌었고, 세계를 반으로 나눴던 거대 이데올로기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으며, 세상의 모든 것을 대신하게 될 인터넷이 출현했다.
이러한 역사의 변동기 속에서 야구선수 송진우는 우리와 함께 했다. 설령 그가 유명 야구선수가 아닐지라도 20년 넘게 한 시대를 함께 살았다면 각별한 정이 들 수밖에 없다. <스포츠춘추>에서 송진우와 고별 인터뷰를 준비했다. 한 시대를 함께 살며 우리에게 기쁨과 감동을 준 44살의 사내와의 마지막 인터뷰는 대전에서 진행됐다.
이쪽(대전시 서구 만년동) 부근에서 ‘개마고원’이라는 대형 고깃집을 운영하지 않나. 요즘 장사는 어떤가.
아, 가게. (멋쩍게 웃으며) 그거 정리했다. 대전에서 꽤 유명한 고깃집이긴 했는데 경기를 좀 탔다.
고깃집을 운영했지만, 썩 고기를 좋아했던 건 아니라고 들었다. 당신이 43살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었던 성공 배경 가운데 하나로 철저한 음식관리를 꼽는 이도 있던데.
음식을 가리는 스타일은 아니다. 뭐랄까. 스트레스받지 않고 맛있게 먹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론 시골 음식을 무척 좋아하는 편이다.
증평의 가난한 시골소년, 야구선수가 되다 11살 때 처음 야구공을 잡은 뒤 44살이 될 때까지 그는 한번도 마운드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도 은퇴를 했다. 하지만, 신은 우리에게 '기억'과 '추억'이란 영원을 줬다. 후대 야구인들은 언제까지고 '송골매' 송진우의 투구를 연구하고 추앙할 것이다(사진=한화)
고향이 충북 증평이다.
증평이라고 들어봤나? (고개를 흔들자) 청주에서 20km 정도 떨어진 정말 작은 곳이다. 내가 어렸을 때 증평에서 잘 사는 집은 많아야 한두 집이고, TV 있는 집도 몇 가구 되지 않았다.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마징가 Z '같은 만화영화를 하면 TV 있는 집으로 몰래 가서 빌붙어 보고 그랬다(웃음).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정이 넘치는 동네였다.
증평과 야구라, 서로 인연이 없을 듯싶은데.
전에도 이야기한 것 같은데, 난 어릴 때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그러다 지금은 청주야구협회 고문으로 계신 조중협 선생님이 증평초등학교 교장이실 때 야구부를 창단하셨다. 4학년 때 테스트에 통과해 야구부원이 됐는데.
됐는데?
그 이후 도망 다녔다.
도망?
당시 누나가 배드민턴 선수였다. 한 집에 두 명이 운동하면 안 된다고 해서 야구를 그만두려고 했다. 결국, 교장 선생님의 설득으로 하긴 했는데. 참, 지금 생각하면 교장 선생님이 대단하셨던 게 나중에 학교가 불이 나면서 딴 학교로 전근을 가실 수밖에 없었는데 그곳에서도 야구부를 창단하셨지 뭔가. 그런 분들이 한국 야구를 위해 일생을 바친 진짜 야구인들이다.
그때만 해도 야구 인프라가 형편없을 때다.
지금이라고 별다른가(웃음). 1977년 청주야구장이 지어졌을 때 그만한 야구장은 있지도 않았다. 정말 최고였지. 경기 대부분은 청주중학교 운동장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
여담이지만, 두 아들도 야구선수다. 아버지가 대투수라 투수가 아닐까 예상했는데 두 아들 모두 야수다. 특히나 큰아들은 천안북일고 포수다.
큰아들은 고교 2학년, 막내는 중학교 1학년이다. 큰아들 우석이는 내가 설득을 했다. “내가 봤을 때 네 포지션은 1루수밖에 없다. 포수는 누구나 하지 않고, 너만 잘하면 언제든 성공할 수 있으니까 포수를 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하던가.
지금까지 쭉 포수였는데, 이정훈 천안북일고 감독은 또 내야수를 시키겠다고 하네(웃음).
![]() 송진우의 장남 송우석 군. 천안북일고 포수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우석 군은 포수지만 왼손 타자이기도 하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때 오른손으로 스윙하는데 영 타격폼이 나오질 않았다. 우리가 또 폼 보는 건 전문가 아닌가(웃음). 안되겠다 싶어서 “왼손으로 쳐보라”고 했는데 그때까진 애가 필요성을 못 느끼는지 시큰둥했다. 중학교에 올라가니까 자기도 깨달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왼손으로 스윙하는데 폼이 기가 막히게 나오지 뭔가(웃음). 그때부터 왼손으로 치기 시작해 지금은 포수지만 왼손 타석에 들어선다.
막내는 어떤가.
막내 우현이는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날 따라 하고 싶었던지 왼손으로만 연습하더니 지금은 투·타 모두 왼손잡이가 됐다.
누가 야구에 더 소질이 있나.
예전에는 전부 막내가 괜찮다고 했는데 그거야 모르는 거고. 큰 애는 타격은 좋을 것 같다. 침착하니 영락없는 장남이다. 막내는 멋도 모르고 막 들이대는 스타일이고(웃음). 둘 다 잘 되면 좋지.
중학교 이상이면 아빠가 어떤 선수인지 알만도 하다.
자기들도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예전에는 “아빠 기록을 우리가 전부 깨겠다”라고 했는데 요즘엔 지들도 컸는지 “저, 아빠 그건 조금 어려울 같아”라고 한다(웃음). 막내는 지금도 커서 무조건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에 가겠다고 야단이다.
‘증평’의 영웅 이상군을 흠모한 147cm의 꼬마 투수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 증평초교 졸업 후 청주 세광중학교로 진학했다.
증평이 원체 작아 중학교가 없었다. 그나마 근방에 야구부 있는 중학교는 청주중과 세광중 두 곳뿐이었다. 음, 난 사실 청주중에 마음이 끌렸다.
청주중에 가고 싶은 이유라도 있었나.
그즈음 같은 증평 출신인 이상군(한화 2군 코치) 선배가 시쳇말로 ‘날아다니던 때’였다. 정말 최고였다. 나와는 학년으론 3년 차이인데 이 선배가 청주중 출신이었다. 그래서 나도 청주중에 가고 싶었는데 장학금 문제로 세광중으로 진학했다. (옛날 생각에 잠긴 듯 혼잣말로) 참, 이 선배 따라 하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글스는 송진우 자체다. 아마도 후대 야구팬들은 이렇게 그를 기억할 것이다. '이글스 역사는 송진우 시대와 그 이후 시대로 나뉜다"고.(사진=한화)
세광중에선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47cm에 불과했다. 선수단 미팅을 하면 맨 끝줄에 서 있어야 했다. 그러던 게 세광고 2학년 때 17cm나 컸지 뭔가. 이런 말 하면 그렇지만, 어렸을 때부터 야구센스는 있었던 것 같다(웃음). 언제나 자신감이 흘러 넘쳤던 선수이기도 했고.
장종훈(한화 2군 타격코치)이 세광중, 세광고 직속 후배다.
2년 직속 후배다. 걔가 팔이 아플 때 내가 병원에 데리고 다니곤 했다니까(웃음).
세광고 2학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세광고는 고교야구에서 최상위의 팀이었는데.
1982년이었지 아마. 그해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 경남고와 맞붙었다. 우리(세광고)는 그때까지 부산 화랑기, 대구 대붕기 등에서 우승했을 뿐 명실상부한 전국대회에선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우리가 8회까지 4대 0으로 경남고에 앞서며 우승을 확정 짓는가 싶었다. (짧게 한숨을 토하며) 아, 그런데.
그런데?
9회 초에 내가 조용철이라고 (손을 뻗어 올리며) 키가 이렇게 큰 경남고 타자에게 3루타를 맞으며 4대 3까지 추격을 허용했지 뭔가. 무사 3루에 안타 한방이면 동점이니 얼마나 가슴이 떨려.
그래 동점을 허용했나.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무슨 소리! 어떻게 오른 결승인데.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또 다음 타자를 스리번트 아웃으로 마지막 타자는 외야 뜬공으로 잡으며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세광고 야구부 창단 29년 만에 최초의 전국대회 우승이었을 거다. (눈을 가늘게 뜨며) 참, 그때가 어제일 같은데.
다음 해 열린 제17회 대통령배 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다.
상대가 광주일고, 상대 투수는 당대 최고의 오른손 투수 문희수였다. 6대 6으로 10회 연장까지 갔는데 1사 만루 위기에서 2루 땅볼이 나왔다. 속으로 ‘아, 병살이다’싶었는데 2루수가 4(2루)-2(포수)-3(1루)이 아닌, 4-6(유격)-3 병살을 시도하는 바람에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 실수 하나로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다.
과거 신문을 찾아보면 당신을 가리켜 ‘초고교급 투수’라고 부르던데.
당시 쟁쟁한 고교 투수들이 많았다. 광주일고 문희수, 군산상고 조계현, 성남고 이국성은 물론이려니와 동대문상고(현 청원고) 김응국도 펄펄 날았다.
‘초고교급 투수’ 대학야구를 접수하다
‘초고교급 투수’라면 고려대나 연세대에 진학할 만했다. 그러나 동국대로 진로를 잡았다. 동기생을 몇 명이나 데리고 입학했나.
(세 손가락을 펴며) 3명 데려갔다. 그리고 스카우트비로 700만 원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007 가방’ 이런 게 어딨나. 김인식(한화 감독) 당시 동국대 감독님이 보따리에 돈을 싸들고 오셨다(웃음). ‘딱’ 계약하고 나니까 건국대에서 2천만 원을 싸들고 왔더라.
동국대엔 세광고 선배들이 많기도 했다.
사실 돈보다는 그 점이 크게 작용했다. 내가 동국대에 무리 없이 입학해야지 세광고 후배들이 나중에 동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동국대는 대학 최강이었다.
백인호, 박철우 선배가 한 학년 위였다. 그때 정말 타력 하나는 끝내줬다. 1학년 때부터 3학년까지 해마다 한 번씩 우승하고, 4학년 때는 2번이나 우승했다. 준우승까지 치면 끝이 없다.
1986년 백호기대회에선가 당신이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야구장 전광판을 맞히는 대형 홈런을 때렸던 게 눈에 선하다. 비거리 150m에 가까운 엄청난 홈런이었다. 그만큼 타격에도 재질이 있던 것으로 안다.
당시 동국대 야구부가 축구장에서 연습했다. 축구장 뒤에 큰 산이 있고 그 위에 도로가 있었다. 한번은 정기 OB전에 대타로 나갔다가 타격을 했는데.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공이 산을 넘어 도로에 떨어지지 뭔가. 동국대 야구부 사상 가장 큰 홈런이었다. 대충 쳤는데 그만큼이나 나가 나도 깜짝 놀랐다.
타자로 전향했어도 좋았을지 싶다.
(담담한 어조로) 타격은 덤이었다. 대학 2학년 때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그러더라. “아플 때 팔보단 낫겠지만 원래 팔보다는 기능이 떨어질 것”이라고. 그래 하는 수 없이 수술하고 6개월 정도 ‘푹’ 쉬었다. 그리고 나중을 위해 조금 잔머리를 썼다.
잔머리라면?
타자로도 뛰고, 감독님이 오시면 공을 던지지 않다가 왔다 가시면 던지는 식이었다(웃음).
왜 그랬는가.
그때는 재활이란 게 있지도 않을 때다. 병원에서 찜질해주고 맨소래담 발라주는 게 고작이었다. 충분히 몸을 만들지 않은 상태에서 등판했다간 영원히 야구공을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언제 다시 공을 잡았나.
포수 녀석이 감독님한테 일렀지 뭔가(웃음). 얼마 있다가 본격적으로 투구하기 시작했는데 구속이 시속 144km를 넘었다. 돌아보면 그때 공이 그냥 시속 144km가 아니었다. 던지면 ‘획’하고 금방 포수한테로 날아갔다. 김상훈 SBS 스포츠 해설위원이 오죽하면 “네가 던지면 공이 한 개 정도 위로 솟구치는 기분”이라고 했겠나. 내가 봐도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지만, 공 끝이 좋았던 투수 같다.
![]() 1991년 한일 슈퍼게임 당시 송진우는 뛰어난 투구로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사진은 도쿄돔 개막전에 앞서 양국 주장인 해태 김성한(사진 왼쪽)과 세이부 이케야마 다카히로가 악수를 나누는 장면(사진=스포츠춘추) |
1991년 한일 슈퍼게임을 소개하는 일본 책자에는 당신을 “시속 145km의 강속구를 뿌리는 왼손 투수”로 명기했다.
그 정도는 아니었고. 빠른 공 최고구속이 시속 142~144km 사이였다. 슈퍼게임 때가 전성기였는데 그때 최고 구속도 142km였다. 요즘 투수들이 덩치가 좋으니까 힘으로 밀어붙이지만, 우리 때는 어디 그랬나.
스피드건에 기록되는 구속보다 타자가 느끼는 체감구속이 더 빠른 투수도 많다.
예전 신철인(히어로즈) 보라. 스피드건에는 시속 142km가 찍혀도 공 끝이 얼마나 좋았나. 내가 꼭 그런 공 끝이었다.
송골매 비행의 시작
1988년 빙그레 이글스에 1차 지명으로 입단했다.
그때 계약금으로 4천800만 원인가 받았다. 당시 빙그레 단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셨 게 기억난다.
뭐라고?
“송 군은 왜 88올림픽에서 뛰질 못했느냐”고. “혹시 어디 아파서 못 던진 거냐”고.
정말 당시 1988 서울올림픽 기록을 살펴보면 등판 기록이 거의 없다.
당시 대표팀 감독님(주: 김병우 제일은행 감독)이 어디 내보내 주셔야 말이지. 조계현이랑 나는 신나게 배팅볼만 던졌다(웃음).
서울올림픽 때문에 프로 입단도 1년 뒤로 미루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등판시키지 않았을까. 조계현은 그렇다손 쳐도 당신은 왼손 투수 아닌가.
당시 같은 왼손 투수인 김기범이 무척 잘 던졌다. 고교 때는 나와 비슷했어도 솔직히 그때는 (김)기범이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슬라이더를 얼마나 기가 막히게 던진 지 모른다. 예전 이선희 선배와 똑같은 슬라이더였다. 요즘 야구팬들은 주형광(롯데 2군 투수코치)을 연상하면 된다.
빙그레 단장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했나.
멋있는 말을 해야 계약금을 좀 더 줄 것 같아서 멋지게 한마디 했다. 그때 한 말을 지금도 안 잊어버리고 있다.
기대된다. 그게 뭐였나.
“단장님. 제가 올림픽에서 뛰지 않은 건 개구리가 더 높이 뛰려고 움츠려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뭐라던가.
뭐긴 뭐랴. 그냥 웃으시지(웃음).
빙그레와의 첫 대면은 기억나나.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1월께 계약서에 사인하고 새마을호를 타고 대전으로 내려왔는데 마침 그때 빙그레 시무식을 하고 있었다. 늦게 왔다고 감독님한테 엄청나게 눈칫밥 먹고 선참인 이강돈 선배한테도 서운한 소릴 들었다.
서운한 말이라면.
(이)강돈이형이 나랑 (장)종훈이랑 같이 있는데 대뜸 “프로에서 고등학교 선·후배는 필요 없다”고 하시지 뭔가.
그게 무슨 소린가.
(가슴을 치며) “먼저 프로에 들어온 게 선배”라는 겨. 그 소릴 듣고 내가 어찌나 허기가 졌는지. 알고 보니까 강돈이형이 내 군기를 잡으려고 그랬다는데. 그 선배 성질이 원래 깐깐했거든(웃음). 참, 그런 양반이 지금은 청주고 감독으로 주변 사람들이나 선수, 학부모들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몰러.
선참의 지시에 어떻게 했나.
뭐, 그때야 프로가 처음이다 보니까 뻘쭘하게 있었지(웃음). 물론 오래가진 않았다. 한화란 팀이 지역 특색은 없다고는 못해도 외부에서 온 선수들이 빨리 적응하는 팀이다. 나야 이곳 출신이니까 더 빨리 적응했지.
![]() 송진우는 '송골매'처럼 용맹스러운 투구로 팀에 기여했고, '회장님'으로서는 동료들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무엇보다 그는 성실한 시민이었다(사진=한화) |
빙그레 때나 지금 한화나 다이너마이트 타선은 여전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과거 빙그레는 타력도 타력이지만, 투수력이 무척 좋았던 팀이다.
사실이다. 이상군, 한희민 두 선배가 정말 잘 던졌다. 여기다 김낙기, 한용덕도 잘 던졌고, 김대중 선배도 한몫했다. 거기다 ‘점보’ 김홍명도 있었고, 장정순도 10승 투수였다. 그때가 지금보다 투수력은 훨씬 나았다. 그리고 선발이면 선발, 불펜이면 불펜 체계적으로 선수가 육성됐다.
여담으로 요즘 들어 모처럼만에 ‘리빌딩’이란 말을 들어봤네. ‘세대교체’는 들어봤어도 갑자기 ‘리빌딩, 리빌딩’해서 난 처음에 빌딩을 새로 짓는 건지 알았다니까(웃음).
프로 데뷔 첫 경기가 기억나나.
시범경기에서 엄청나게 혼났다. ‘아, 이게 프로구나’ 실감이 됐다. 하지만, 데뷔전에서 완봉을 거두며 주위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했다. (주: 1989년 4월 12일 대전 롯데전에서 9이닝 동안 4피안타 3볼넷 7탈삼진 무실점으로 승리투수 됨) 난 정말 은퇴할 때까지 마운드에서만큼은 항상 자신감 있게 공을 던졌던 것 같다.
대기록 제조기, 송진우
1989시즌부터 올 시즌까지 21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다 되짚어봤으면 싶지만, 당신이 한국프로야구의 역사라 어설프게 다뤄선 안 될 듯싶다. 다음 기회에 21년간을 천천히 돌아보기로 하겠다. 이 자리에선 21년 동안 그라운드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묻고 싶다.
아무래도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아니겠나. 처음으로 한화가 우승컵을 안았으니까. 나도 야구하면서 그때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물론 200승, 3,000이닝, 2,000탈삼진, 노히트노런도 기억에 남는다.
당신의 200승을 취재할 때가 어제일 같다. 언제 200승을 달성하나 계속 따라다닌 기억이 있다. 결국, 2006년 8월 29일 광주 KIA전에서 선발등판해 5이닝 동안 5피안타 1실점으로 5번째 도전 만에 대망의 200승을 거뒀다.
그때 홍보팀 임헌린 씨가 건네 준 청심환을 먹고 마운드에 올라갔던 게 큰 힘이 됐다. (잔잔한 미소를 띠며) 이야, 참 5번 도전 만에 200승을 채웠으니. 그런데 KIA 전병두(현 SK)가 경기 초반 너무 실점을 많이 해서 조금 싱거웠다(웃음).
![]() 200승을 기록한 뒤 기념사진(사진=한화) |
200승, 3,000이닝, 2,000탈삼진, 노히트노런은 한국야구역사에 남을 대기록들이었다. 그 가운데 3,000이닝은 20년 동안 150이닝씩을 꼬박꼬박 던져야 하는 성실함의 산물이다. 하지만, 3,000이닝을 달성했을 때 당신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않았다.
지난해 3,000이닝에서 4⅓이닝이 모자란 상태에서 한화의 4강행이 좌절됐다. 코칭스태프가 “마저 던지겠느냐”고 물어 “내년 시즌에 채우겠다”고 말했다. 왜 그렇지 않나. 팀이 4강에 떨어졌는데 모두 기분이 나겠나. 그런데 올 시즌 갑자기 불펜에서 던지라는 통보를 받았다. 개인적으론 선발로 3,000이닝을 채우는 게 나뿐만 아니라 팬들에게도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이었다. 사실 프로야구는 쇼맨십이 어느 정도 필요하기도 하고.
마침내 4월 9일 대전 두산전에서 3,000이닝을 달성했다. 하지만, 바라던 선발이 아닌 불펜에서의 달성이었다.
팀이 1대 6으로 지는 7회에 등판했다. 그 경기에서 우리가 대패한 바람에 영 기분이 나지 않았다.
200승도 200승이지만, 과연 누가 당신의 개인통산 3,003이닝 기록을 깰 수 있을까.
나 죽을 때까지 두 사람 정도 나올 것 같다.
그게 누굴까.
모르지 나도(웃음). 그냥 두 사람 정도가 나올 것 같혀.
개인 통산 671경기에 출전해 3,003이닝을 던졌다. 선발과 중간, 마무리로 모두 뛰었는데.
프로 초년생 때는 중간과 마무리에서 뛰지 않았나. 그러다 1995년 (구)대성이가 마무리로 오면서 선발로 전향하게 됐다. 당시 대성이는 공은 좋은데 선발로 성적을 내지 못하던 상황이었고, 난 좀 시원찮을 때였다. 그래서 강병철 전 감독이 우리 둘의 보직을 바꿔줬다. 그 이후 줄곧 선발로 뛰다가 불펜에서 뛰기도 했다.
어느 보직이 자신과 가장 잘 맞나.
나는 다 맞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몸이 무지하게 빨리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근육이 잘 뭉치지도 않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느 보직이든 그만의 매력이 있는 것 같다.
개인 통산 200승을 달성했을 때 “구원승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파고들면 기록에 대한 논쟁은 한도 끝도 없다(웃음). 음, 내가 만약 구원승이 없었다면 통산 103세이브도 없었겠지. 차라리 선발로만 나갔으면 200승 이상을 더 기록하지 않았을까 싶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세월과 변화와 자기관리로 승부한 사내 송진우는 강견이다. 현역 때 그는 동료 투수들과 5만 원짜리 멀리 던지기 내기를 하곤 했다. 그럴 때면 승부는 싱겁게 끝나게 마련이었다. 홈플레이트에서 담장 너머로 공을 던지는 송진우의 어깨를 당해낼 선수가 없었다. 현역시절 송진우는 멀리 던지기과 러닝을 비롯해 기본에 충실했다. 기.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름길이다(사진=스포츠춘추)
당신과 인터뷰를 한다니까 어느 야구팬이 그런 질문을 했다. “혹시 다이나믹 듀오라는 랩 그룹의 노랫말 가운데”
(채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 뭐지. “노장투수 송진우~”하는 랩 말인가.
그렇다.
4년 전엔가 동료 투수 김해님이 노래를 들려주는데 랩 중간에 “노장투수 송진우~”하는 대목이 있었다(웃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다이나믹 듀오 2집에 수록된 ‘너나 잘하세요’란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다. “까불지 마라. 야구라고 치면 나는 노장투수 송진우”라고.
(환하게 웃으며) 감사할 따름이다.
노장이란 말이 나왔으니 묻겠다. 언제부터 노장 소리를 들었나.
모르겠다. 꽤 오래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튼 오래됐다(웃음).
하도 물어보는 이가 많아 질리겠지만, 많은 이가 질문한 내용이라 지나치기 어렵다. 40대까지 현역에서 뛸 수 있던 비결은 뭔가.
체력이야 젊은 선수보다 부족했겠지만, 자신감은 누구보다 강했다. 역시 투수는 자신감이다. 훈련도 열심히 했다. ‘열심히 했다’는 표현을 말로 설명하자면 어렵겠지만, 남들 단거리 뛸 때 노장이라고 ‘털레털레’ 걷지 않고 열심히 따라 뛰었다. 다른 건 둘째치고 러닝을 통한 하체단련은 정말 게을리하지 않았다.
![]() 대투수 송진우의 서클체인지업 그립. 이 공으로 송진우는 제2의 전성기를 달릴 수 있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당신은 위기 때마다 새로운 구종 개발로 난관을 뚫었다. 서클체인지업과 백도어 슬라이더가 대표적이다.
두 구종이 내겐 큰 도움이 됐다. 1996년 15승 9패를 기록하며 성적이 괜찮았다. 아, 그런데 1997, 1998년 연속으로 6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선발로 나가기만 하면 시쳇말로 ‘뒤지게 맞았다.’ 이유가 뭔가 따져봤더니 타자들은 이제 내공이 눈에 익힌다고 하는데 난 2스트라이크 이후 마땅한 결정구가 없는 상태였다.
그즈음 프로야구 최초로 개인통산 100승도 했을 때라, ‘이렇게 던지느니 차라리 은퇴를 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1998시즌이 끝나고 미국 애리조나 교육리그에 갔는데 그곳에서 ‘제프’라는 이름의 투수 인스트럭터를 만났다.
그에게서 서클체인지업과 백도어 슬라이더를 배운 건가.
더 들어봐라. 제프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100승 투수라는 걸 알고 대우를 해줬다. 한번은 선수들을 다 모아놓고 제프가 한 선수씩 지적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힘으로만 던지니까 5회만 던지면 체력이 떨어지는 거다.” “넌 악력을 좀 길러라”하는 식으로 쭉 이야기를 하다가 내게 “서클체인지업과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져보라”고 조언했다. 사실 제프가 이야기하기 전부터 두 구종은 알고 있었다. 연습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제프의 조언을 듣고 연습을 계속했나.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포수에게 두 구종을 던지고나서 물었더니 “좋다”고 하더라. 솔직히 제프보다는 난 제이미 모이어에게서 많이 배웠다.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47살 왼손 투수 말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과거 모이어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 뛸 때 TV를 통해 자주 봤다. 당시 NHK에서 이치로 스즈키의 전 경기를 방송했는데 우리 집에서도 방송이 잡혀서 틈날 때마다 봤다. 그 선수의 공 배합이라든가 백도어 슬라이더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던지면 어떨까’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많이 했다.
서클체인지업은 구속의 가감을 통해 타자를 현혹하는 구종이라, 나이 든 투수들이 많이 배운다. 하지만, 백도어 슬라이더는 배우려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늘 해결하지 못한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
‘왜 직구는 몸쪽, 바깥쪽으로 던지는데 변화구는 코스별로 던지지 못할까’하는 것이었다. 그때 백도어 슬라이더를 배우면서 슬라이더로도 몸쪽과 바깥쪽을 차례대로 공략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원래 커브를 잘 던지지 않고 기존 슬라이더가 컷패스트볼 식으로 빠르게 꺾였기에 백도어 슬라이더를 쉽게 익히지 않았나 싶다.
백도어 슬라이더의 위력은 어땠나.
오른손 타자를 기준으로 안쪽으로 들어와야 할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휘어지니까 타자들이 꼼짝도 못했다. 볼 카운트를 유리하게 잡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 이 공과 함께 서클체인지업과 싱커 등 다양한 구종을 던지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 송진우의 포심패스트트볼(사진 참조)과 백도어 슬라이더는 그립이 똑같다. 손목과 손가락을 어떻게 비트냐의 차이다. 송진우는 싱커를 던지던 중 포크볼을 완성했다. 그의 포크볼은 롯데 손민한과 매우 닮았다. 송진우는 위기가 닥칠 때마다 좌절하거나 방황하지 않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간절히 원한다고 이뤄지는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대투수와 평범한 투수의 차이는 하나다. 평범한 투수는 "나도 저런 공을 던질 줄 아는데"로 그친 투수이고, 대투수는 "나도 저런 공을 던질 줄 아는데"하며 직접 던지고 연구한 투수다. 세상 이치도 별반 다르지 않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당신의 제구를 빼놓을 수 없다. 어느 야구해설가는 당신을 가리켜 “나이를 먹을수록 제구가 좋아지는 투수”라고 했다.
일전 (문)동환이가 내 조언을 듣고 효과를 봤다고 하던데. 우리나라는 투구연습을 시작하면 몸쪽 10개, 바깥쪽 10개 던지다가 몸 풀리면 변화구를 10개 던지는 식이다. 미국 선수들은 그렇지 않다. 몸쪽공 3개, 바깥쪽공 3개, 체인지업 3개 등을 한 세트로 묶어서 몇 번씩 다시 던진다. 왜 그렇게 하는지 아나?
글쎄.
이건 좀 어려운 건데.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건 ‘기억’이다. 가령 몸쪽으로 스트라이크를 던졌다고 치자. 다음 공은 바깥쪽으로 던졌는데 파울이 나왔다고 하자. 그럼 볼카운트는 2스트라이크 노볼이다. 이때가 중요하다. 몸쪽 코스로 계속 공을 던지다 보면 다음 공도 몸쪽으로 던지면 정확히 들어간다.
하지만, 몸쪽으로 던졌다가 바깥쪽으로 던지고 다시 몸쪽으로 던지려면 어려움이 따른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좋은 투수는 각 코스와 상황마다 투구밸런스가 머릿속에 내장돼 있다. 그것이 내장돼 있지 않으면 바깥쪽으로 던지다 몸쪽으로 던질 때 릴리스포인트가 달라지면서 안타를 허용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골프에서도 실제 스윙 전 연습 스윙을 2, 3번 하는 거다. 듣자니까 2번 정도 연습 스윙을 해줘야 뇌가 3초 동안 스윙을 기억해 바른 스윙이 나온다고 한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투수가 되려면 머릿속에 정확히 자신의 감각을 저장해놔야 한다.
정확한 감각을 머릿속에 기억시켜 두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반복 연습밖에 없다. 2004년 (문)동환이가 15패를 기록했을 때 내가 그랬다. "앞으로 2구씩 몸쪽, 바깥쪽, 변화구를 차례대로 던지라"고. 다음 해 동환이가 10승을 거두면서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나는 은퇴하는 날까지 투구 연습이 끝날 때 즈음 항상 오른손 타자, 왼손 타자 다시 오른손 타자 등 3타자를 세워두고 실전 투구를 했다. 기억을 계속 유지시켜려 그랬던 거다.
연습 때까지 그렇게 공을 많이 던졌는데도 특별히 몸에 이상이 없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조금씩 부상을 달고 살았어도 큰 부상은 없었다. 대학 때 받은 팔꿈치 뼛조각 제거수술과 2003시즌을 마치고 왼쪽 팔꿈치 관절경 수술을 받은 게 전부였다. 해마다 일본 병원에 가서 어깨와 팔꿈치 진단을 받았는데 지난해 거기서 그러더라. “어깨만 보면 젊은 투수들을 능가한다”고.
![]() 8월 26일 대전에서 만난 송진우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고 있었다, 그라면 뭐든 잘 할 수 있다는 게 많은 이의 한결같은 생각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웨이트트레이닝을 많이 했나? 요즘은 젊거나 나이 든 선수나 할 것 없이 웨이트트레이닝에 매달린다.
웨이트트레이닝은 글쎄. 언론에서도 정보를 잘못 전달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웨이트트레이닝을 통해 야구를 잘한다는 소리는 이치에 맞지 않다고 본다.
투수는 몰라도 타자들은 웨이트트레이닝이 효과가 크다고 한다.
그렇지 않다. 결국, 야구는 순간 스피드 싸움이다. (김)태균이를 봐라. 물론 걔가 살은 쪘지만 그게 다 물살이다. 진짜 근육살은 예전 심정수와 최익성이다. 그런 선수는 현역생활을 오래 할 수 없다. 몸에 문제가 생기고 만다. ‘파워, 파워’ 타령할 거면 역도선수를 영입하지. 그건 아니지 않은가. 웨이트트레이닝의 장점은 오히려 부상방지와 자신감 부여에 있다고 본다.
100일간의 번민 끝에 내린 결론, 은퇴
갑작스러운 은퇴 발표로 많은 팬이 놀라고 가슴 아파했다. 은퇴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
(담담한 목소리로) 내가 손을 들었지.
손을 들다라….
4월 28일 2군에 내려가고 100일이 지나서도 1군 승격이 안 됐다. 솔직히 2군에 온 지 보름 정도 지나니까 ‘아, 올 시즌엔 (1군에) 못 올라갈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 그런데 정말 100일이 지나도 별다른 통보가 없었다.
2군엔 어떻게 내려갔나.
이상군 코치님이 날 부르더라고. 가니까 “공이 미미하다”고 하시지 뭔가. 속으로 ‘내가 시속 140km를 던지는 투수도 아니고 새삼스럽게 무슨 미미’했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2군에선 정상적으로 훈련했나.
훈련뿐인가. 경기에도 출전하면서 실전 감각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상하게 같이 2군에 있던 이용규(KIA), 황두성(히어로즈) 기사는 네이버에 계속 뜨는데 내 기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 뭔가(웃음). ‘이거 무슨 일인가’ 싶어 혼자서 오해도 많이 했다.
당신이 언급한 제이미 모이어나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구도 기미야스(47)같은 40대 투수들은 팀을 바꿔가면서 현역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은퇴를 해도 시즌이 끝난 다음에 할까’하는 생각도 했다. ‘지금 내 컨디션이라면 조금 더 던져도 되지 않을까’하고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올 시즌 팀이 부진하며 여기저기서 ‘리빌딩’이니 ‘재건’이니 하는 말이 나올 때라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더 던진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고, 더 이루고 싶은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난 영원한 한화맨으로 남고 싶었다.
아쉬움이 컸을지 싶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1군에서 유니폼을 벗지 못한 게 가장 아쉬웠다.
가족들과도 상의했나.
2군에 계속 있다 보니까 아내도 감을 잡은 것 같았다. 아이들이야 뭐 덤덤하더라고(웃음).
은퇴 결심 후 구단에 어떻게 통보했나.
운영팀장을 찾아가 면담을 신청했다. 그리고 ‘딱’ 5분 정도 이야기한 것 같다. 팀장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하기에 “일본 가서 공부 좀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언젠가.
7월 말경이었다.
그렇다면 20일 정도 뒤에 은퇴가 발표된 셈인데.
구단 웃분들의 재가도 받아야 하는 문제라, 시간이 필요했다.
![]() 8월 18일 은퇴 기자회견장에서 송진우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한화는 9월께 그의 은퇴경기를 준비하고 있다(사진=한화) |
일본으로 지도자 수업을 간다면, 어느 팀으로 갈 참인가. 연수는 1년 정도?
구단에서 이것저것 알아봐 주고 있다. 아직 연수할 일본 구단은 미정이다. 야구 선배들 말을 들어보면 1년 연수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다. 한 2년 정도 계획하고 있다.
2년이면 너무 길지 않나.
여기 있어봤자 특별히 할 일도 없다(웃음).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나.
지금 말하는 건 시기상조 같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건 있는데 아직 이야기할 단계는 아니다.
대강의 지도자상이라도 이야기해달라. 대투수 송진우가 꿈꾸는 지도자상을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다.
(차 한 잔을 마신 뒤) 지금껏 수많은 지도자를 겪어봤다. 그 가운덴 성공한 지도자도 있고, 실패한 이도 있다. 음, 나는 나보다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운영하고 싶다. 선수들과 격의 없이 가까이 지내고, 선수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송진우가 지목한 '포스트 송진우' 류현진(사진=H스튜디오 이휘영 작가)
당신의 팬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하신 분이 있다. “만약 감독이 되신다면 빅볼과 스몰볼 가운데 어떤 야구를 지향하시겠습니까”라고.
둘 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물론 장·단점은 다 있다. 스몰볼은 희생번트 등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바람에 하위타선은 그냥 지나치는 타선이 되고 중심타자들에겐 너무 가혹한 부담을 안길 수 있다.
반대로 빅볼처럼 너무 선수를 믿으면 이길 땐 크게 이겨도 1점 차 승부에선 질 확률이 높다. 양쪽 야구스타일을 잘 섞어야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공격적인 야구를 지향할 참이다.
투수 출신 감독들은 대개 ‘지키는 야구’를 선호한다. 선발보다는 중간을 선호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어떤가.
음, 나는 롯데 로이스터 감독이 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선발투수가 적어도 6회 이상은 막아줘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전 김응룡 삼성 사장이 해태 감독이었을 때 봐라. 선발이 툭하면 2, 3회면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이게 선발인지 중간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물론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다. 스타일의 차이에 불과하다.
선발의 조기 강판은 불펜의 과부하를 부른다. 한국프로야구에선 어째서 불펜투구도 투구수에 넣지 않는지 모르겠다.
경기 승패도 중요하지만, 선발이 3, 4회를 던지다 물러나길 반복하면 선발투수들이 자꾸 도망가는 투구를 하게 된다. 차라리 로이스터 감독처럼 “위기상황을 네 힘으로 극복해라”하고 놔두는 게 팀과 투수의 미래를 봤을 때 좋다. 그래야 불펜진도 최대한 아낄 수 있다. 생각해보라. 선발이 2, 3회 던지고 물러나면 기본적으로 4일을 쉰다. 그렇게 조금 던지고 쉴 때 불펜진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겠는가. 한국프로야구는 불펜진의 혹사가 너무 심하다. (답답한 표정으로) 몇 번 우승을 하고 나면 그렇게 뛰어난 불펜 투수들이 사라지기 일쑤 아닌가.
지난 이야기들
현역시절 맞수나 힘든 타자가 있었나.
맞수라, 그런 의식은 없던 것 같다. 힘들었던 타자는 (눈을 감으며) 보자. 원래 잘 치는 타자들과 상대할 때 더 힘이 났다. (마침 생각난 듯) 그래 주로 특급 타자와는 조금 거리가 먼 타자들한테 집중적으로 맞았다. 특히나 쌍방울 김호, 현대 김인호, SK 양용모 이 세 선수한테는 정말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이상하게 그 선수들과 맞서면 제구도 안되더라고(웃음).
앞서 200승, 3,000이닝을 돌파할 후계자로 누가 될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음, 나는 돌파한다면 (정)민철이가 되지 않을까 봤는데 161승, 23942/3이닝하고 은퇴를 했고. 지금 추세로 보면 (류)현진이지 싶은데 걔는 또 해외진출 여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고.
해외진출이 나왔으니 묻겠다. 1991년 11월 4일 효고현 고시엔구장에서 열린 슈퍼게임 3차전에서 7회 1사까지 탈삼진 8개를 기록하며 일본 타선을 제압했다. 특히나 1회 2사부터 4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며 일본야구계를 경악케했다.
얼마 전 MBC ESPN을 통해 그 경기를 두 번이나 봤다. 당시 오치아이 히로미쓰(현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을 2타석 연속 삼진으로 잡았던 게 기억난다. 참, 그때가 내 전성기였지 싶다.
일본야구계에 강렬한 인상을 심은 만큼 일본진출을 고려할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몇 해 있다 선동열(삼성 감독) 선배가 주니치로 가지 않았나. 그땐 해태가 특별히 선 선배를 풀어줘서 간 거고. 나중에 (정)민철이도 가긴 했지만, 그땐 FA(자유계약선수) 규약에 따라 간 것이었다. 솔직히 난 국외진출 이런 쪽에 관심이 별로 없었다. 그런 걸 꿈꿀 시간도 없었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갔던 것 같다.
![]() 1991년 한일슈퍼게임에 참가한 빙그레 선수들. (사진 왼쪽부터) 장종훈, 한용덕, 이정훈, 송진우다. 이들이 바로 이글스의 전설들이다(사진=이정훈 제공) |
당신의 롤모델로 삼는 현역선수들이 많다. 야구소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선수가 누군지 궁금하다.
어렸을 땐 이상군 선배를 보고 많이 따라 했다. 정말 좋아하는 선수였다. 그러다 박철순 선배를 좋아하게 됐다. 프로야구 원년에 22연승을 하고 대단하지 않았나. 하지만, 그보단 허리부상으로 선수생활에 위기가 닥쳤을 때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려는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한국프로야구선수협(선수협) 초대 회장으로 많은 이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다. 그 때문에 고생도 많이 했는데.
내가 원하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본의 아니게 선수협 활동을 하면서 적이 많이 생겼다. 음, 정직하게 살았던 것도 적이 늘어난 이유 같다. 난 지금껏 살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하거나 나만 잘 살겠다고 로비같은 걸 한 적이 없다.
선수협 할 때도 혹여 나 때문에 선수들이 욕을 먹을까 더 정직해지려 노력했다. 지인들은 “지금껏 그렇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잘 살 것”이라고 위로하지만 적이 많은 건 어쩔 수 없다. (기자를 바라보며) 나도 바른길을 갈 테니 당신도 바른 기사를 써 달라. 지금이 아니라 후대 야구인들을 보고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됐으면 싶다.
알겠다. 약속하겠다. 시즌 중반께 선수협의 ‘선수노조 전환’으로 한동안 야구계가 시끄러웠다. 선수협의 상징적 존재로서 당신이 선수노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하는 이들이 많다.
일부 야구인들이 선수협의 선수노조 전환을 “시기상조”라고 하셨다. 그분들의 주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대체 언제가 적당한 시기인지 묻고 싶다. 선수협이 출범할 때 다들 우려했지만, 지금은 선수권익보호를 위해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 당장 야구판이 무너질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다들 인정하듯이 더 조용해졌다. 개인적으로 선수협이 노조로 전환한다면 긍정적인 면이 많을 것으로 본다. 지금처럼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시즌 중 규정을 바꿀 때도 혼자만이 아닌, 선수들의 의사도 들어볼 수 있게 돼 더 풍성한 논의가 이뤄지리라 본다.
마지막 인사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손을 흔드는 송진우(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대투수 송진우에게 묻겠다. 당신에게 야구란 어떤 존재인가.
(한참 생각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야구를 시작했다. 프로에 와서도 7년 정도 할 것으로 내다봤다. 원래는 은행 같은데 취직해 안정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애초 계획했던 7년보다 3배나 많은 21년 동안 현역으로 뛰었다.
2군에 있을 때 롯데 박정태 코치 등 잘 아는 후배들이, 내가 겁나게 재밌게 펑고도 받고 훈련도 하니까 “형님, 야구가 그렇게 재밌으세요?”하고 물었다. 그땐 피식 웃으면서 “인생 뭐 있어”했지만. (잠시 침묵하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이 나이 먹도록 야구장 갈 때마다 즐겁고 가슴이 설렜다면 믿겠나. 야구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마흔 살이 됐어도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하는.
당신을 떠나보내는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부탁한다.
부족한 제 은퇴를 두고 아쉽게 생각하신다니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지금껏 많은 분께 과분한 사랑을 받았고, 나 역시 즐거움을 드리러 온 힘을 다했다. 그동안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훌륭한 지도자가 돼 건강한 얼굴로 다시 뵙도록 하겠다.
이제 어디로 갈건가.
모 방송국 생방송 인터뷰가 있다. 그게 끝나면 팬클럽 회원 30여 분과 식사를 할 참이다. 그동안 날 많이 도와주신 분들이다. 일전에 자발적으로 회원분들이 200만 원을 모아 성심학교에 전달하기도 했다.
기부라면 당신도 그분들 못지않다. 아름다운 재단에 지금껏 기부한 돈이 3억 원가량으로 알고 있다.
팬들이 내게 주신 사랑보다 큰 기부도 없다.
마지막으로 팬들이 당신에게 한 말을 들려주고 싶다.
그게 뭔가.
굿바이 레전드(Goodbye Legend)라고. 그동안 수고 많았다고.
…. (그는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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