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한 세상을 치료할 치료법, 도가사상과 유가사상
박윤찬
목차
여는 말
1. 도가vs유가
2. 그들이 꿈꿨던 삶
3. 그들이 꿈꿨던 사회
결론-혼란한 세상을 치료할 치료법
여는 말
‘제자백가’ 라는 말을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자백가는 중국 대륙이 혼란스러웠던 춘추 전국 시대에 출현한 수많은 사상가들을 일컫는 말로, 동양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춘추 전국 시대란 어떤 시대인가? 수많은 나라들이 나타나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나라들이 서로 끊임없이 싸우며 피로 피를 씻는, 그야말로 배틀로얄이었다.
당연히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백성들이 죽거나 고통받았고, 몇몇 사람들은 자연스레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고통받지 않고 세계가 평화로워지는가’ 라는 생각을 한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훗날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그 중에서도 철학반에서 집중적으로 파고든 것은 도가사상과 유가사상이다. 도가사상은 ‘도’ 라는 것이 존재하며, 만물의 탄생과 순환을 주관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으로, 삶을 사는 것도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도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유가사상은 사람의 본성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라는 네 가지 가치가 있다고 하며, 이것을 실현하고 더 나아가 이것으로 나라와 세상을 이롭게 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 이 두 가지를 비교해보며 유가 사상과 도가 사상은 어떤 사상인지 자세히 알아보며 혼란한 시대에 그들은 어떤 처방을 내렸을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도가 사상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이전에 적었던 도덕경 비평글에 더 자세하게 나와 있으며, 해당 부분은 도덕경과 제 비평글의 내용을 요약해 적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에 썼던 도덕경 비평글 <도를 아십니까?> 를 참고해주시면 매우 감사합니다.)
1. 도가와 유가는 어떤 사상인가?
먼저 도가 사상은 위에서도 설명했듯 ‘도’ 라는 궁극 진리가 존재하며 그것이 만물의 탄생과 순환을 주관하는 근원이라는 사상이다. 도가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노자의 저서 <도덕경> 에서는 도를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무(無)’ 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거대한 없음이라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건 지극히 정상이다. 궁극 진리로서의 도는 길고 짧음, 작고 큼 같은 양극의 성질을 모두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애초에 무언가를 이름 붙이고 규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분법적 사고의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인간의 사고로는, ‘양극의 조화’ 를 이루는 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자기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듯, 도 또한 자신만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위 문단에서 말했듯 도는 이름 붙일 수 없으며, 양극의 성질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또한 도는 만물의 근원이며, 만물과 함께 끝없이 순환한다.
또한 도덕경 8장에는 도를 물에 빗대어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도 또한 모두가 꺼리는 낮은 곳으로 흐른다. 모든 생명이 물로 이루어져 있고 물로 삶을 지탱하지만, 물은 자신 덕분에 생명이 유지된다고 생색내지 않으며 자신의 공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이다. 노자는 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지만 그것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 내용은 2장에서 설명할 도덕경의 핵심 개념인 ‘함이 없는 함’ 과도 연결된다.
유가 사상은 다른 철학사상들처럼 궁극적인 진리를 탐구하는 형이상학보다는 어떻게 해야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정치철학에 더 가깝다. 물론 후대에 주자가 유학의 진화형인 성리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내면서 형이상학적인 요소가 생겨나긴 했지만,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초기의 유가사상은 상술했듯 정치철학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네 가지의 가치가 있는데,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 이다. 이것을 각각 해석하면 어진 마음,의로움,예의바름,앎 이다. 그러나 유교에서 인의예지의 의미는 이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2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유가사상의 대표적인 철학자 맹자는 이 인의예지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한 것이다. 공자와 주자 또한 사람의 본성에는 인의예지의 씨앗이 들어있으며, 그것을 피워내냐 피워내지 못하느냐는 본인의 몫이라고 이야기한다. 조선시대 청소년들의 교과서였던 논어,맹자,대학,중용은 그것을 피워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인 셈이다.
2. 그들이 꿈꿨던 삶
도가사상과 유가사상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뚜렷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두 사상 모두 전쟁이 끊이지 않던 혼란한 시대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도가사상과 유가사상은 각각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있는지 한 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2-1. 도가의 인생관
도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 중 하나는 바로 ‘무위(無爲)’ 다. 뜻을 풀이하면 ‘함이 없다’ 는 뜻이며,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먹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무위도식(無爲徒食)’ 의 무위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어떻게 최고 가치로 치지?’ 라는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는 원래 의미와 좀 다르다.
모든 생명은 살기 위해 숨을 쉰다. 이것은 ‘함’ 이다. 또한 우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을 한다. 이것 또한 ‘함’ 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숨을 쉴 때 ‘아 숨 쉬어야지’ 라고 의식하면서 숨을 쉬는가? 아니다. 반면 사람들이 일을 할 때는 대체로 의식하면서 일을 한다. 의식을 하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물론 일을 오래 해서 의식하지 않고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워서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 다.
행동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행동에 꾸밈이 없다는 뜻이다. 노자와 장자는 겉으로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행동들을 전부 의미없는 것으로 보았다. 드러내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은 일을 억지로 꾸며내며, 항상 조바심 속에서 산다. 그러나 무위를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쓰지 않으며, 그 행동이 거침없다. 조바심을 느끼지 않으며 부끄러울 것도 없다.
또한 도가에서 ‘무위’ 못지않게 자주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불완전함, 정확히는 ‘의식’의 불완전함이다. 그 누구도 완벽한 존재는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모든 인간은 ‘나’ 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고 감각한다. 그러나 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기에 내가 하는 생각들이나 내가 내리는 판단 또한 완전한 판단이 아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 판단 또한 완전하지 않다.
이는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적용하는 대상이 나인지, 아니면 타인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첫 번째 해석은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과신하면 안된다’ 이다. 상술했듯 나의 생각이나 내가 내리는 판단은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판단만을 믿으며 주위의 의견들을 무시한다면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다른 사람의 평가를 신경쓰지 말라’ 이다. 나의 판단이 불완전하듯, 다른 사람의 생각과 판단도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평가에 지나치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도가에서 중요시하는 가치 중 하나는 바로 관점의 변화이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위 문단에서 말했던 ‘의식의 불완전함’ 과도 관련 있는 말인데, 보통 사람들은 좋고 나쁨, 길고 짧음, 작고 큼 등의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1장에서도 말했듯 도는 서로 상반되는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이른바 ‘반대의 일치’, ‘양극의 조화’를 이룬다. 또한 이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작음이 있기에 큼이 성립하고, 나쁨이 있기에 좋음이 성립한다. 그렇기에 어느 한 가지 상태를 절대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변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을 모두 요약하자면, ‘다른 사람의 행동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말라.’,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과신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한 가지 단면으로 타인을 규정하지 마라. 인간의 의식은 불완전하기에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판단, 행동이 완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라.’ 정도로 요약해볼 수 있겠다.
이전에 썼던 도덕경 비평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도를 따르는 삶은 ‘알잘딱깔센’ 을 실천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알아서’ 하며, 그럼에도 ‘딱’ ‘잘’하고, 오점 없이 ‘깔끔하게’ 행동한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센스있게’ 보인다. 타인의 반응이나 평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낮추지만,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2-2. 유가의 인생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잘못된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겸손하게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옳고 그른 일을 분별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실마리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실마리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은 지(智)의 실마리이다.”
-맹자
유가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가치는 계속 말했듯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1장에서 이에 대해 설명할 때 이 인의예지는 각각 원래의 의미보다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먼저 각각의 가치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 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인이다. 인은 유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질, 즉 인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논어> 의 안연편 22장에서 공자의 어린 제자인 번지가 공자에게 인에 대해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라고 답했다. 공자는 타인을 위해주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 더 나아가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맹자는 인을 ‘다른 사람을 아끼는 마음’ 이라고 하였다.
의는 유교에서 두 번째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의는 떳떳함, 마땅함을 의미하며,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지 않는 것 또한 의(義)의 덕목이다. 맹자는 ‘잘못된 일을 부끄러워하는 마음’ 에서 의가 피어난다고 말했다.
예는 유교의 네 가지 덕목 중 하나이자 유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치이다. 인과 의는 구체적인 실체가 없는 가치이기에 그것을 드러내는 행위가 아니면 의미가 없는데, 이것을 드러내는 행위가 바로 예인 셈이다. 예란 인과 의를 마음속에 깊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행동할 때 겉으로 드러나는 올바름을 말한다. 공자,맹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예가 일상의 행동 이외에도 제례나 의식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는 사회적 질서나 문화를 겸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지는 지혜로움을 뜻하며, 배우고 깨달아 아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논어의 첫 구절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일 만큼 유교는 배움과 앎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지의 진정한 의미는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맹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지의 실마리이다’ 라고 하였다.
1장에서도 말했듯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이 인의예지의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피워낼지 피워내지 못할지는 본인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많은 유학자들은 인의예지를 피워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논어> 와 <맹자> 에서는 인의를 실천하는 최고의 방법은 효(孝)라고 말한다.
맹자는 인은 곧 부모에 대한 효도이고, 의는 곧 형제에 대한 공경이라고 말한다.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넓혀나가는 것이 바로 인의의 실천이라는 것이다. 공자의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공자 또한 효를 인의 근본이라고 보았다. 인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인데, 자신을 제외하면 태어나서 가장 먼저 사랑하게 되는 것이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또한 공자는 효와 봉양의 차이는 공경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라고 말했다.
유교에서 인의예지와 충효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바로 ‘중용(中庸)’ 이다. 중용은 쉽게 말해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모자라거나 지나치는 것이 없는, 모든 상황에서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치이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전체적인 상황을 보고 이것이 지나친지 모자란지 그 적절함을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용> 에서 공자는 사람들이 중용의 도를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아까도 말했듯 중용은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인식의 문제에만 치우쳐서 실천을 가볍게 여겨 ‘지나침’ 이라는 잘못을 저지르고, 어리석은 사람은 앎이 부족하기에 중용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도, 실천할 방법도 알지 못해 ‘모자람’ 이라는 잘못을 저지른다. 사람은 살면서 걸어가야 하는 중용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걷는 의미를 알고 걸어가는 사람은 아주 적다. 자신이 걷는 그 길에 주의를 기울이고 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온 것들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라. 해야 할 일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말고, 행동에 인,의가 드러나도록 예를 갖춰 행동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이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를 공경하는 것이 인,의를 실천하는 첫걸음이다. 마지막으로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이것이 적절한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3. 그들이 꿈꿨던 사회
인생관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잠깐 잊혀져 있었지만, 도가사상과 유가사상을 포함한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들은 ‘어떻게 해야 이 혼란한 시대를 멈출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사회참여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도가와 유가의 정치철학에 대해 한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3-1. 도가의 이상사회
<도덕경> 17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가장 높은 것이 있음을 아랫사람은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가까이하거나 멀리 보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무서워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는 깔보는 것이다.’
‘일이 잘되어 끝날 때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나는 스스로 그러하다고.’
이것은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타입을 알 수 있는 구절로, 이 구절을 해석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지도자들 중 제일은 민중들이 그 존재만 알거나 존재조차도 모르는 지도자이다. 그 다음은 민중들에게 친근하거나 칭송받는 지도자이다. 그 다음은 민중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이다. 그 중 최하급은 민중들이 무시하고 욕하는 지도자이다.’
이는 2장에서도 말했던 도가사상의 핵심 가치인 ‘무위’ 이다. 노자와 장자는 최상의 지도자는 ‘무위의 위’ 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한다.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지만 그것을 가지고 생색을 내거나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처럼, 무위의 정치를 펼치는 지도자 또한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 자신이 해야 하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경> 18장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대도가 무너지니 인과 의가 생기고, 지혜가 나오니 큰 거짓이 생겼다. 부모 형제끼리 사이가 나쁘니 효도와 자애가 생겼고, 나라가 어지러우니 충신이 생겼다.’
이는 유가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인 인의예지, 더 나아가 모든 윤리적 규범 자체를 신랄하게 까버리는 문장이다. 도가사상에서는 이러한 윤리적 규범들이 생겨난 이유가 모순적이게도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각해보자. 도둑질을 하면 벌을 내려야 한다는 법이 만들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와 맹자가 끊임없이 인(仁)을 강조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 사이에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람들이 서로를 아끼고 존중했다면 공자와 맹자가 인(仁)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도가사상에서는 이러한 윤리적 규범이 존재하는 사회는 미완성된 사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도가에서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과연 어떤 사회일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이전에 썼던 비평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렇다. 사람들이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 운송수단이 있지만 사람들이 떠나지 않기에 쓸 일이 없고, 무기가 있지만 전쟁과 침략이 없기에 쓸 일이 없는 사회.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더 가지려 하지 않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사회. 누가 정치를 하는지, 애초에 통치자가 있긴 한 건지도 모를 정도로 민중들이 정치와 무관한 사회. 윤리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덕목이 규칙의 형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3-2. 유가의 이상사회
사실 초기의 유교는 사실상의 정치철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자와 맹자의 입장에서는 지금 직면해 있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형이상학적인 접근보다는 현실적, 실용적인 접근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가의 정치철학은 현대의 관점으로 생각해봐도 급진적인 부분이 보인다. 도가의 정치철학이 수술이라면, 유가의 정치철학은 극약처방인 셈이다. 이렇듯 중용과 성리학 등장 이전의 유교는 관직에 나가거나 나라를 다스리게 될 사람들에게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고 어떻게 정치에 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학문이었다.
유가에서 말하는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지도자의 상은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유학의 대표적인 교과서인 <대학> 의 핵심 구절 중 하나이다. 지금부터 이 문장 하나를 씹고 뜯고 맛보고 분석하며 유가의 정치철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수신’ 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다는 뜻이다.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은 끊임없이 욕구를 채워야 한다. 그런데 이 욕구를 채우는 과정에서 감정이 지나치거나 모자라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마음의 균형과 조화를 잃게 된다. 사람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므로 몸과 마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당연하다.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 몸은 어느새 욕망에 빠져버리게 된다. ‘수신’ 은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서 몸이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못하게끔 하는 것이다.
다음 ‘제가’ 는 집안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집은 사회생활을 배우는 학교라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로 가족이 어떤 사람이냐, 집안 분위기가 어떠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과 사회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에 집안을 바르게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군자는 집안에서 부모님께 효도하기에 임금을 섬길 수 있고, 형을 공경하기에 어른을 섬길 수 있고, 아이들을 사랑하기에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대학>
‘치국’ 은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고, ‘평천하’ 는 천하를 태평하게 한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성군이라고 평가받았던 왕들은 모두 백성들을 생각했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대학> 에는 혈구지도(絜矩之道) 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뜻을 풀이해보면 내 마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뜻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항상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성군이라고 불렸던 이들은 모두 혈구지도를 실천했던 사람들이다. 반면 민중의 소리를 무시했던 지도자들의 결말은 항상 좋지 않았다.
<대학> 의 첫문장은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으로, 뜻을 풀이하자면 ‘대학의 길은 착한 본성을 밝히는 데 있고, 백성과 함께 하는 데 있으며,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무는 데 있다.’ 여기서 대학의 3가지 핵심 개념이 나오는데, 각각 명명덕(明明德), 친민(明明德), 지어지선(止於至善) 이다. 먼저 명명덕(明明德)은 밝은 덕을 밝힌다, 즉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밝힌다는 뜻이다. 친민(明明德)은 백성과 함께한다, 즉 백성들을 본래의 착한 본성으로 되돌아가게 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지어지선(止於至善)은 지극히 선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뜻으로, 어떤 경우에도 최선의 경지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위 문단에서 말했던 명명덕(明明德)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밝힌다. 즉 내면에 있는 인의예지의 씨앗을 피워낸다는 뜻이다. 이 명명덕을 자신에게 하는 것, 즉 자신의 선한 본성을 밝히는 것이 수신이다. 이것을 나라와 백성들에게 하면 치국이 되며, 온 세상에게 하면 평천하가 된다.
유가의 최종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속에 가진 선한 본성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왕이 나라를 인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이 서로를 인으로 대하고, 왕이 이익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백성들도 이익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서로를 대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온 세상 사람들의 선한 본성을 밝히려면 먼저 지도자가 선한 본성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혼란한 세상을 치료할 치료법
지금까지 도가와 유가는 각각 어떤 사상인지, 도가와 유가의 인생관은 무엇인지, 도가와 유가가 생각하는 이상사회는 어떤 형태인지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다시 여는 말에서 던졌던 질문을 가지고 와보자. ‘혼란한 시대에, 과연 그들은 어떤 처방을 내렸는가.’ 도가와 유가, 두 명의의 처방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먼저 도가 사상은 ‘도’ 라는 궁극 진리를 상정해놓았다. 이 ‘도’ 라는 궁극 실재에 대해 끊임없이 강조하며 도의 본질은 무엇인지, 도를 따르는 삶은 무엇인지, 도를 따르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가 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했고, 그렇기에 도가 사상, 특히 도가의 정치철학은 어느 정도 급진적인 측면이 있다.
도가에서는 항상 관점의 변화를 강조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절대적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완벽한 존재는 없기에 모든 인간과 인간의 의식은 불완전하다. 그러니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과신하지 말고, 타인의 말과 평가에 신경쓰지 말라고 말한다. ‘무위’ 는 도가에서 제시하는 인생관과 정치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자신의 일이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여기며 하는 것이 바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다. 이것은 개인의 일상에서도 적용되며 정치에서도 적용된다.
반면 (초기의)유가 사상은 개인의 인격 수양과 좋은 정치를 펼치는 것을 하나의 연장선상으로 보았다. 애초에 초기 유가사상 자체가 선한 본성을 밝힌 사람들이 나라를 다스려 춘추전국시대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둔 사상이기 때문에 도가 사상과는 달리 조금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유가에서는 인간의 마음 안에 선한 본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씨앗을 피워내느냐 피워내지 못하느냐는 본인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렸다고 말한다. 유학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작은 선의 씨앗을 피워낼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학문인 것이다. 이 선한 본성은 네 가지 형태로 드러나는데, 각각 인,의,예,지이다. 사람을 사랑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예의를 갖추며 행동을 조심하고, 옳고 그름을 구별하고 실천하는 것이 인의예지를 실천하는 삶이다. 이렇게 선한 본성을 밝히는 과정을 자신에게 적용하면 수신이고, 나라에 적용하면 치국이며, 천하에 적용하면 평천하가 된다.
이렇듯 두 사상은 명확하게 대비되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사상은 한 가지 공통점으로 연결되는데, 바로 두 사상 모두 그 시대의 사회문제들을 지적하며 그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시한 그들의 치료법이라는 사실이다. 접근 방식도 달랐고, ‘마음’을 보는 시선도 달랐고, 인생관도 달랐고, 정치관도 달랐으나,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마음은 같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전쟁이 끊이지 않고 백성들이 고통받는 춘추전국시대는 끝났지만, 제2, 제3의 춘추전국시대가 전 세계에서 생겨났고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과연 혼란스럽지 않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도 도덕경,장자,논어,맹자 같은 책들이 꼭 읽어야 할 철학고전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아닌 것 같다. 3-1장에서도 말했듯, 도덕적, 윤리적 규범이 강조되는 사회는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참 많은 책들을 읽었다. 도덕경,장자,논어,맹자,대학,중용. 무려 6권이나 된다. 이 책들을 읽고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 사회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한번 성찰해보게 되었다. 특히 도덕경과 장자를 다시 읽으며, 나는 ‘그때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덕경에서 얻었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가슴속에 새기며, 아직도 내 안에 선한 본성이 남아 있다고 믿으며, 그 본성을 끝까지 잃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