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용강서원(龍岡書院)
글·송은석(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개요
용강서원은 대구시 달서구 이곡동(선원마을)에 위치한 조선후기에 건립된 서원이다. 이 지역을 동서로 관통하는 선원로를 기준으로 북쪽의 와룡산(295m) 남쪽, 좀 더 정확히는 성서 이곡동의 선원초등학교 서편에 자리하고 있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에게는 ‘허씨재실’로 잘 알려져 있다. 서원 뒤편에는 ‘김해허씨 현감공파 사세팔위(四世八位)의 제단’과 와룡산의 영험이 서려 있다는 연못과 샘도 있다.
와룡산은 대구의 좌청룡이자 성서지역의 랜드마크이다. 와룡산을 끼고 있는 이 지역은 불과 이십 여 년 전만해도 전원풍경을 간직한 농촌지역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도시개발이 본격화됨에 따라 지금과 같은 모습의 신도시 지역으로 탈바꿈을 했다. 이곡동(梨谷洞)은 배나무 골짜기[배실]라는 동명 외에도 ‘선원(仙源)마을’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선원’이라는 별칭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선원 김상용 선생이 명명한 것이다. 김상용은 생전에 이곡이라 불렸던 이 지역을 둘러보고 5언율시 하나를 지었다. 그 시에 ‘이곡역선원(梨谷亦仙源)’ 이라는 구절이 있어 선원마을의 명칭 유래설을 뒷받침해준다. 마을 이름 때문일까? 선원마을은 아직도 도시와 전원의 모습과 전통이 공존하고 있는 마을이다.
용강서원
용강서원(龍岡書院)의 역사는 「충열사(忠烈祠)」라는 사당에서 시작되었다. 「용강서원기」에 의하면 용강서원은 1696년(숙종22),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과 그의 종제인 낙암(洛庵) 허복량(許復良)을 봉향하기 위해 지금의 달서구 장동(갈산)에 「충렬사」란 이름으로 처음 창건했다고 한다. 1804년(순조4)에 충렬사는 성서 와룡산 아래 현 위치로 이건 되어 「용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용강서원」은 훼철되고 말았다. 그 후 1920년에 후손들에 의해 용강서원 옛터에 문중 재실인 「용강재(龍岡齋)」가 다시 건립되었다. 이처럼 ‘충렬사→용강서원→훼철→용강재’를 거쳐 지금과 같은 용강서원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90년의 일이다. 용강서원을 복설할 당시 그때까지 존치되었던 용강재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그 주위에 사당과 강당을 복원해 지금의 용강서원의 모습을 갖춘 것이다.
용강서원은 외삼문인 지지문(知止門)을 들어서면 잘 가꾸어진 뜰을 사이에 두고 정면에 강 당인 숭현당(崇賢堂)이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반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 정도 툇간을 두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좌측으로부터 2칸 온돌방인 사의실(思義室), 2칸 대청인 숭현당, 1칸 온돌방인 수덕헌(修德軒)으로 구성된 중당협실형 구조이다. 숭현당의 전면 6개의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 있으며, 대청에는 「용강서원중건상량문」, 「용강서원중건기」, 「용강서원기」, 「용강선원기」, 「석재」 등의 기문편액이 걸려 있다.
숭현당 뒤편에는 별도로 담장을 둘린 사당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내삼문인 상의문(尙義門) 안쪽에 위치한 충렬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풍판을 단 겹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전퇴가 없는 폐쇄형 사당건물이다. 충렬사에는 상무헌·낙암 양 선생의 9대조인 고려문하시중 충목공 허유전을 주벽으로, 상무헌·낙암 양 선생을 동·서에 종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숭현당 동편에는 1920년에 건립된 용강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용강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에 반 칸의 툇간을 두고 있다.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온돌방이 있는 중당협실형 구조이다.
이외에도 용강서원 경내에는 「용강서원정비」와 「충목공유적비」 그리고 「김해허씨 현감공파 종회」건물 등이 있으며, 용강서원 충렬사 뒷 담장 너머 일원에는 김해허씨 사세팔위(四世八位) 제단 및 제단비와 연못, 샘 등도 있다.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의 후손 김해허씨
가락국(駕洛國), 다시 말해 가야의 건국신화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구지가’와 ‘6개의 황금알’ 그리고 금관가야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이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고대건국신화이다. 수로왕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이했다. 이후 수로왕과 허황옥은 10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2째 아들은 허황옥의 청으로 왕성인 김씨가 아닌 허씨로 대를 이어 가게 된다. 이러한 연유로 우리나라의 허씨(김해허씨, 양천허씨, 태인허씨, 하양허씨)는 모두 허황옥의 후손이다.
김해허씨는 허황옥의 35세손이자 가락군에 봉해진 ‘허염(許琰)’을 시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가고 있다. 본관을 김해로 삼은 것은 허염의 후손들이 김해를 중심으로 세거한 탓에 김해를 본관으로 삼은 것이다.
지금의 성서지역에 김해허씨가 세거를 하게 된 것은 김해허씨 성서 입향조인 ‘허승립(許承立)’이라는 인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임난 때 선산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후, 선산에서 우거를 했다. 이후 1622년 다시 가족을 거느리고 선산 도개를 떠나 자신들의 근원처인 김해로 가던 중, 이곳 성서 갈산리(葛山里·현 장동) ‘중마’라는 곳에서 잠시 머물게 되었다. 이때 허승립은 이 고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속이 마음에 들어 김해를 포기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성서에 정착한 김해허씨는 입향조인 허승립의 손자 대에 이르러 2명의 걸출한 인물을 배출했다. ‘상무헌(尙武軒) 허득량(許得良·1597-1637)’과 ‘낙암(洛庵) 허복량(許復良·1602-1637)’이다. 사촌 간인 이들은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문인이자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었다. 이들은 병자호란(1636) 때 대구에서 창의하여 광주(廣州) 쌍령 전투에서 맹활약을 했으나 모두 전사했다.
한편 용강서원 충렬사에 주벽으로 모셔진 ‘허유전(許有全·1243-1323)’은 상무헌과 낙암의 9대조이다. 「고려사열전」에 의하면 그는 고려 원종 말에 문과급제를 하고, 1314년(충숙왕1)에 가락군에 봉군되었으며, 1321년(충숙왕8)에 정승을 역임한 인물이다. 정계를 떠난 허유전은 노년에 원나라 티베트로 귀양 간 충선왕의 편지를 한통 받게 된다. 이에 허유전은 충선왕의 환국을 위해 8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원나라로 들어갔지만 당시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덕분에 후일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참고로 상무헌 허득량의 후손은 선원마을과 배실[이곡], 낙암 허복량의 후손들은 망정(望亭)마을과 갈산동에 주로 살고 있다.
참고글 클릭 ☞ http://cafe.daum.net/3169179/Dbvq/18
이상끝...
2014년 10월 29일
송은석(유교칼럼니스트)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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