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선교회헌신예배 2024. 6. 9
칭찬받는 사람 일곱
행6:1-7
오늘은 남선교회 헌신예배로 드립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어떤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모세가 그랬고, 요셉이 그랬고, 다윗이 그랬고, 다니엘이 그랬고,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먼저 제자를 세우셨습니다.
바울도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사람입니다.
저는 주님께서 우리 교회 안에 세우신 남선교회 회원들을 통해 (세상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이루어 가실 새로운 역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부흥>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대교회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성령강림 후(2:1-4) 놀라운 속도로 부흥하고 있었습니다. 12명이 120명으로, 120명이 3천 명으로, 행4:4에 보니까 남자의 수만 5천 명에 이르렀다고 되어있습니다. 행5:14에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수를 셀 수가 없어서 ‘큰 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급성장을 하게 된 비결은 사도들이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 등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단지 예수 믿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함께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교회공동체는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교회를 칭찬하게 되고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가게 되었습니다.
<문제에 직면한 교회>
교회가 부흥하면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이것들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 숫자가 늘어나다 보니 뜻하지 않은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본문에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유대인인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로마제국 각지에서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서 기독교로 회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순절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왔다가 자기네들이 살던 곳의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구브로 출신의 바나바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던 사울도 다소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히브리어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헬라어에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해외로 이주한 유대인 중에, 자신이 죽은 뒤에 자신의 유골을 예루살렘 땅에 묻기 원하는 자들이 나이 들어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복음을 받아들이고 초대교회의 일원이 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히브리파 유대인은 이스라엘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을 떠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어-더 정확하게는 아람어를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사도들은 모두 여기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면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유대인들과 헬라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디아스포라들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 사이에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한 원망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행하는 매일 구제에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가 제외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도들을 포함, 주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헬라파 사람들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해서 일어난 일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우선적으로 자신들과 가까운 히브리파 과부들을 우선적으로 돕다보니 물량이 모자라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 원망이 사도들에게까지 미쳤다는 데 있습니다. 사도들은 모여서 대책을 세웠습니다.
2~4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은 자신들이 나서서 구제와 봉사에 전념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을 다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말로 집중해서 해야 할 기도와 말씀 사역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해결 방법은 대신들의 일을 분담해 줄 충성스러운 사람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답은 이미 구약에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하나님처럼 받들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모세에게 가져왔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책임감으로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세도 지치고 백성들 속에는 자꾸 소외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조언으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제도를 세워 백성들을 돕게 합니다(출18:13~27).
사도들은 사람을 세우고 과감하게 일을 분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에게 구제와 봉사를 전담케 하고,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념키로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세울 것인가>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리고 어떤 사람을 세워야 하는가입니다.
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먼저, 어떻게 사람을 세웠습니까? 사도들은 자신들이 집사를 임명하는 대신 교인들이 직접 선출해주기를 제안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였습니다. 이것은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의 가족이나 측근들이 구제하는 사업을 독점하면 당연히 불만이 생길 것입니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을 세우기를 원했습니까? 사도들은 자신들이 사람을 세우지 않는 대신,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사역자를 세우는 데 있어서 세상적인 기준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 지위, 명예가 얼마나 높은가를 기준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첫째,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늘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주인 되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는 성도입니다(행8:26).
사도 바울은 탁월한 지도자였지만 자기 방법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전도 여행 중 아시아로 가려고 계획을 다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고, 그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임을 깨달았습니다. 과감히 자기 계획을 접고 메게도냐의 빌립보로 건너가는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얼마나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비록 마게도냐(빌립보)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을 당했지만 불평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도 실라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가 가진 전문성이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했기 때문에 여전히 교회에서도 그 방법, 그 경험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경험과 지혜가 충만한 것도 중요하지만 성령 충만한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지혜는 머리가 비상한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그 말씀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지혜를 가리킵니다.
교회와 신앙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사람은 대부분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마음도 순수합니다. 그런데 그의 믿음과 열정이 도리어 교회와 사역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유력한 두 일꾼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봉사에 대한 경쟁적 열심이 오히려 교회에 분란을 일으켰습니다(빌4:2). 이들 모두가 다 잘못된 동기에서 출발한 헛된 지혜의 폐단들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그 동기가 선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자기 명예를 드높이려고 봉사하기도 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 자기 세력을 만들기도 합니다. 스스로 믿음 좋고 기도 많이 하고 성령 충만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고집불통’과 ‘막무가내’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일을 열심히 하는데, 실제로는 아주 몰상식하게 행동하는 그런 사람들을 참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다’는 것을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을 무한 신뢰하며 그것을 막무가내로 몰아붙이는 것인 줄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 충만’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입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분별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무시하고 무조건 밀어붙이는 식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잘 설득하고 다독여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함께 일할 수 있게 합니다.
야고보서에는 ‘지혜’를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약3:13-18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하나는 ‘땅에서 난 지혜’입니다(14~16). 세상의 지혜는 이기적입니다. 그래서 시기와 다툼을 일으킵니다. 머리를 잘 쓰는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분쟁을 일으킵니다.
다른 하나는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하늘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스스로 성결하고 공동체 안에서 화평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가는 곳마다 화평을 만들어 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선한 열매들은 오직 한 가지를 이룹니다. 18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참된 화평은 의의 열매를 거둡니다. 불의와 타협하는 것은 참된 화평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불의와도 타협하고 의를 희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화평이 아닙니다.
셋째,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먼저는 가까운 가족과 교우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장로를 세울 때, 그 가정의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장로로 피택될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먼저 묻는다고 합니다.
나아가 세상 사람들에게도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회사에서, 일터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 삶의 열매를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빛이 드러나듯이 주위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전원 헬라파 사람들이 선출됨>
그 결과를 본문 5절~6절이 밝혀 주고 있습니다.
5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선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스데반을 비롯한 일곱 명을 선출하였습니다(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뒤의 다섯 명은 잘 안 나오지만, 스데반은 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되고, 빌립은 나중에 8장을 보면 전도를 열심히 하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까지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이들을 가리켜서 흔히 ‘일곱 집사’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집사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칭찬받는 사람 일곱’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의 교회 장로나 집사직의 초기 형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후에 ‘집사’라는 직분으로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행21:8입니다.
행21:8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길목에 있던 가이사랴의 빌립의 집에 잠깐 머뭅니다. 여기에서 빌립을 ‘일곱 집사 중 하나’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집사라는 직분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직분으로 인정된 것은 오랜 후의 일입니다. 빌립을 ‘전도자’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집사’가 단순히 구제사역을 담당하는 기능에 머물지 않고, 사도들과 함께 폭넓은 사역에 동역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곱 집사는 누구?> 아무튼,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 외에 평신도 지도자들로 가장 처음 뽑히게 된 일곱 명의 집사 중에서 스데반과 빌립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자세하게 언급되지 않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Stephen)입니다. 그의 순교에 대한 기록은 바로 뒤에 있는 사도행전 7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순교하던 현장에 사울이 있었습니다. ‘빌립’(Philip)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여, 마술사 시몬을 회심시켰고(행8:9-13),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전도하여 세례를 베풀기도 했습니다(행8:26-40).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성경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데, 전승에 따르면 ‘브로고로’(Prochorus)는 스데반의 조카와 ‘브로고로의 요한 행전’의 저자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후에 안디옥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니가노르’(Nicanor)는 구브로(Cyprus)출신 유대인으로서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순교했다고 합니다. ‘디몬’(Timon)은 후에 시리아의 보스라(Bosra, Syria)에서 감독이 되었는데, 마지막에는 화형으로 순교했다고 합니다. ‘바메나’(Parmenas)는 마게도니아로 건너가서 정착했는데, 후에 트라야누스(Trajan)황제의 박해 때에 빌립보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그러니까 유일한 이방인이었던 니골라’(Nicholas)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면서 주님은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계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니골라당’(Nicolaitans)을 이단으로 정죄하면서, 그것을 시작한 ‘니골라’를 집사의 명단에서 삭제하였습니다. 니골라는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영혼과 육체를 분리해서, 육체적 범죄는 구원에 영향이 없다는 교리를 내세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골라 당을 구약성경의 발람과 비교하여 경계하고 있습니다(계2:14-15). 발람이 ‘브올의 사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우상 숭배 하는 등 타락하게 만든 것처럼(민31:16), 니골라도 이단 사조를 만들어 많은 사람을 타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육체로 마친 나쁜 예입니다. 아무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판단하여 세웠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이 지속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음을 경각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니골라’가 ‘니골라당’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증거가 없습니다.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니골라는 상당히 억울할 것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선출된 7명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6명의 유대인과 한 명의 이방인). 디아스포라로 로마제국 각처로 나가 살았던 헬라파 유대인들은 한결같이 해외 현지에 적응하기 쉽도록 헬라식 이름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히브리파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아니면 ‘헬라파 사람들’이 많았겠습니까?
절대다수는 전통적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집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파 유대인이 압도적인 인적구성 속에서 선출된 7명의 집사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다수였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소수에 불과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자진하여 표를 몰아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온갖 어려움과 시련이 있었지만 수 백 년 동안 그들의 땅과 전통을 지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치러야만 했던 대가는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모두 해외파인 셈이었습니다. 그들도 엄청난 고생을 했겠지만,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나라가 가장 어려울 때에 나라를 떠나 해외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국내파들이 해외파들을 거리낌 없이 받아주기란 결코 쉬운 일일 수가 없었습니다. 헬라파가 문제를 제기하면 보통 ‘그럼 4대 3으로 하자. 우리가 조금 더 많으니까 히브리파 넷, 헬라파 셋!’ 이렇게 제안하고 뽑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전원 다 헬라파로 뽑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완전히 수용한 것입니다. 인간집단의 속성상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초대교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성숙하고, 열린 교회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것이 얼마나 잘된 일인지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훗날 기독교 복음이 로마 전 지역으로, 세계로 뻗어 나갈 수 있는 기틀이 된 것입니다.
히브리파 사람 중에서 뽑을 것을 고집했다면, 아무래도 이방인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기에 복음이 세계로 뻗어 나가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안수하는 사도들>
사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여 세웁니다.
6절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성도들이 뽑았다고 인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내건 조건에 합당한지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수함으로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점점 왕성하여>
그 결과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점점 왕성하여 갔습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문제가 해결되자 교회는 더 부흥하였습니다.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전혀 예상수 없었던 경이로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 곧 한두 명의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집단적으로 초대교회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초대교회에 일곱 집사를 세우는 과정과 자격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워 쓰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 남선교회 회원들이 ‘초대교회 일곱 집사’와 같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들이 되셔서, 하나님이 이 시대의 일꾼으로 택하여 쓰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