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비록 두 분이지만 연재 해달라는 요청이 있으신 관계로 약속 드린바와 같이 80년대의 풍납 현대 아파트 주변 이야기를 써 볼까 합니다. (-o-)
1978년은 풍납동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선 태양금속(지금의 풍납현대 아파트)쪽 부터 삼표 레미콘쪽이 아스팔트로 포장되었습니다.
비만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보행이 불가능 했던 곳이 비로소 사람사는 꼴을 갖춘 것이지요.
그리고 호박밭이던 지금의 한강 극동 아파트 자리에 "우일 아파트"라는 5층 짜리 서민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당시 이 우일 아파트가 제가 알고 있는 풍납동 최초의 아파트였고 그 규모 또한 상당했습니다. 1985년에 건립된 미성아파트 보다도 약 7,8년 앞선 것이지요.
아뭏든 이 아파트의 등장으로 풍납동의 상권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였죠(그 전에는 구멍가게 몇개가 전부 였습니다). 특히 우일아파트 안에 위치했던 상가건물에는 현대식 슈퍼마켓이 들어서서 명절때는 줄을 서야 할 정도 였습니다. 또 5층에는 우일유치원(예전에는 이렇게 높은 곳에도 유치원 설립이 가능)도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발전의 기미를 보이던 풍납동이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로 인해 때아닌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것은 지금의 올림픽공원(당시 몽촌토성)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올림픽 시설물이 생기면서 강북에서 올림픽 공원으로 쉽게 접근할 교량을 건설해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건설부에서는 자양동에서 풍납동 우일아파트 앞을 지나는 교량 건설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계획은 그대로 도시계획에 반영되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우일 아파트앞 큰 길쪽에 살던 주택 거주자(약... 대략 한 150 ~ 200 가구로 추산)들은 졸지에 살던 곳에서 쫓겨나야 하는 상황에 몰렸습니다.
당시는 지금 처럼 제값주고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매입하는 시대가 아니고 그야말로 껌 값주고 쫓아내는 세상 이었기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걱정이 대단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이들을 구원한 존재가 등장하였으니 그 분은 다름이 아닌 풍납 토성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풍납토성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그 중요성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아서 토성을 밀어버릴 계획을 세웠던 것이지요. 이 계획이 문화재청에 접수 되었고 문화재청(그 당시는 아마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결사적으로 이 계획을 반대 했습니다.
옥신각신 하기를 여러차례 거듭하다 결국에는 문화재(토성)을 우회 하는 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고
올림픽대교 남단 사거리가 생겨납니다.
만일 그 당시 원안대로 도로가 건설 되었다면 풍납동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요?
상상컨데 토성 초등학교, 풍납 현대 아파트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며 삼표레미콘은 자리도 모두 도로가 되었을 것이고 ....
아뭏든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동네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올림픽 대교를 이용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올림픽 대교 남단에서 올림픽 공원쪽으로 가는 길이 많이 구부러져 있음을 아실겁니다. 그것이 바로 문화재를 무회하기 위해 억지로 도로를 틀어 놓은 것이고 바로 이 교량의 건설이 현재의 풍납동 모습을 만들어 내게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1984년 물난리와 풍납 초등학교 부근에 얽힌 옛날 이야기들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첫댓글 아~~그래서 구부러져 있었구나.. 재밌어요!!재밌어요!!!
연재! 연재! 아....너무 재미있어요....옛날이야기....
이렇게 재밌는 얘기 어디가서 듣겠어요. 풍납초등1기님 고마워요. 다음이야기도 기대 됩니다
한강 고수부지에 앉아 술한잔 하면서 들으면 더 재미 있을듯....
어머나~~~~그랬군요~~잼있네요..또..없어요..?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다음 편도 기대 할께요^^
저는 그 당시 우일아파트(현 한강 극동아파트) 앞 주택가에 살았는데 방금 이야기하신대로 집 앞으로 도로가 난다고 하다가 갑자기 문화재 보호도 하지 않던 말로만 사적이었던 토성으로 인하여 지금의 위치로 대교가 건설된다고 해서 왜 그런지 궁금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