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기읍성 둘레길
이 상 준
살인적인 더위가 연일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언론에서는 20여 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고 야단들이지만, 나는 고향에 새로 만들었다는 장기읍성 둘레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이 둘레길은 장기면사무소에서 망해산 고석사에 이르는 전체 5.8km의 산길이다. 면사무소 입구에 세워놓은 안내판 지도에는 이 길이 장기읍성길, 정약용길, 송시열길, 희망의 길 등 4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고 그려져 있다. 한 눈에 봐도 다른 둘레길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뭔가 색다른 느낌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면사무소 담장 옆으로 난 길을 약 10분정도 걸어서 산 쪽으로 올라갔다. 저 위로 산 능선에 걸쳐진 성곽이 마치 꾸물거리는 뱀의 몸통처럼 아래쪽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 같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가장먼저 접하는 곳이 장기읍성 동문이다. 여기를 ‘장기읍성길’이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성곽은 축조한 목적과 기능에 따라서 그 명칭이 다르다. 왕궁과 종묘사직을 지키기 위한 성은 도성(都城)이고, 지방의 행정·경제·군사의 중심지에 쌓은 성은 읍성(邑城)이다. 또한 유사시를 대비하여 방어용·도피용으로 쌓은 성을 산성(山城)이라고 한다. 특이하게도 장기읍성은 산성이면서도 읍성의 기능까지 함께 갖추고 있어서 읍성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라고들 한다.
문화재 발굴조사를 막 끝내었는지 그때 사용한 듯한 검은색 차광막이 아직도 찢어진 채 성곽 돌 위에서 펄럭거린다. 읍성안내판에는 동쪽으로는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고려 현종때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고 적혀있다. 그 후로도 성곽은 쌓고 무너지고 또 쌓는 일련의 과정들이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 상처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성이 불타기 전까지 여기 동문에는 조해루(朝海樓)란 누각이 있었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조선십경(朝鮮十景)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곽위에 배일대(拜日臺)라 적힌 바위가 동쪽 바다를 보고 앉아있다. 장기현감이 매년 정월 초하룻날 조정의 임금을 대신해서 해맞이를 했다고 전해오는 유물이다.
허물어진 성곽은 서북쪽 일부만 남기고 대부분 복원이 되었다. 성안에 있던 민가들도 하나둘 철거를 하고 있었다. 멀지 않아 성내에 있던 마을들이 옛날 모습을 되찾게 되면 훌륭한 역사적 유물이 될 뿐 아니라 관광명소로도 손색이 없을 만하다.
성내를 관통하는 옛 저자거리를 따라 걸었다. 지금은 장터가 산 아래로 내려갔지만, 한때 이곳에서 장이 섰던 시절이 있었음을 길 이름이 암시를 해 준다. 이 저자거리에 대한 추억도 있다. 중학교 때 나는 장기천을 따라 10리를 걸어서 읍내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가끔 홍수가 나고 개천에 물이 불어 하천길을 이용할 수 없을 때면, 거산마을에서 동악산 옆으로 난 성냇길을 따라 학교까지 가곤하였다. 어느 해 여름날, 이 길로 같이 등교하던 친구가 길갓집 울타리 살구나무에서 설익은 살구를 몇 개 땄다. 그날은 운수가 지지리도 없었던 날인가 보다. 곧바로 주인인 듯한 청년에게 들켜 옆에 있던 나까지 뺨을 호되게 얻어맞았다. 그 기억조차도 이제는 쓴 웃음으로 넘길 만큼 고향에 대한 추억들은 이미 나에게 깊은 향수가 되었다.
옛 장기현 객관을 수리하여 마현리에서 옮겨왔다는 향교를 지나고 동악산 쪽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성곽의 서문에서 올려다 뵈는 동악산 정상이 마치 바가지를 뒤집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동악’은 맨 처음 이 지역 읍기(邑基)를 정하였던 방산마을에서 보면 동쪽에 높이 솟은 산이란 뜻으로 명명하였다고 들었다.
동악산 쪽으로 10분쯤 올랐을까. 갈대숲의 하늘거림에 더위도 잠시 잊는다. 이정표의 안내에 따라 고석사 쪽으로 난 산길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가 보다. 골바람의 느낌도 다르고 공기도 훨씬 상쾌하다. 하늘에는 구름이 온갖 모습으로 변하며 나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장맛비에 웃자란 풀들이 더 푸르고, 입구에서부터 원추리꽃, 도라지꽃들이 오랜만에 찾은 고향사람을 마중하는 듯 고개를 치켜들고 웃고 있다. 원추리와 도라지꽃은 산기슭 어디에든 핀다. 이른 봄 찬 기운이 가시고 나면, 할머니는 원추리꽃 새싹을 뜯어서 나물로 데쳤고, 도라지는 캐어서 초고추장에 버무렸다. 저 청초한 꽃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는 가난이고 아픔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옆에 ‘정약용길’이라고 표시를 해 둔 이정표가 보인다. 그렇다. 여기는 다산의 18년 유배생활의 시작지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1801년 3월, 천주교 박해사건에 연루되어 장기로 유배 왔다. 그는 약 8개월간 마현리에 머물면서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130여수에 달하는 시와 기해방예변, 이아술, 촌병혹치 등과 같은 역작을 남겼다. 적소(謫所)에 있던 다산은 틈만 나면 이 길을 걸었으리라. 그때 다산은 무엇을 생각하며 걸었을까? 탐관오리들을 계도할 묘책이라도 생각했을까. 혹은 굶주리고 병에 걸린 민초들을 구할 방도를 찾아 깊은 사색에 잠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여 년 전 다산이 걸었던 길에 지금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주변 산천들이 새롭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면 둘레길 능선은 방산리와 서촌리를 가르고 있다. 방산은 거산, 팔어실, 육송정, 괴정, 평등마을이 속하고, 서촌은 뒷내(명촌), 기일(노곡)이 속한다. 이쪽 거산마을과 저쪽 서촌마을을 잇는 흑지골 고갯길에 섰다. 정약용길은 이 흑지골 능선까지이다. 방산에서는 포항․경주로 나가는 버스가 없었다.
부득이 방산 중에서도 거산마을 사람들은 ‘흑지골’을 따라 이 능선을 넘어 뒷내(서촌1리) 신작로까지 가서 버스를 타야만 했다. 따라서 유년시절 이 고개는 낯선 세계와의 경계였다. 소년시절 이 산 고갯길은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꿈의 문턱이었고, 다 자란 성년에게 이 길은 도시로의 나들이를 위한 출입문 중 하나였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길이 흔적만 아스라이 남겨진 채 저 아래 있다. 능선에 놓인 목조 테이블에 앉아 토요일 오후만 되면 교련복 차림으로 이 고개를 넘어왔다가 일요일에 다시 쌀이며 반찬을 챙겨 넘어가던 옛 선배들의 고달픈 학창시절을 생각해본다.
흑지골 능선에서 이어지는 길은 ‘송시열길’이다. 왜 길 이름을 이렇게 지었을까. 우암 송시열은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1675년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5개월 후인 그해 6월 10일 다시 덕원에서 장기로 이배되어 이곳사람들과 호흡을 같이하며 살았다. 사실 조선조의 관리나 지식인들은 유배지에서 학문적 업적을 쌓는 일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는 물론이고 정약용과 박세당 등의 실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암도 1679년 4월 10일 거제도로 또다시 이배되어 장기를 떠나기까지 수많은 시와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라는 책을 여기서 저술하였다. 한편으로, 시대의 거물인 우암이 장기에서 약 5년간 머물었다는 것은 장기뿐만 아니라 영남지역 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낳았다. 한양에서부터 무수한 고관들과 학자들이 장기까지 찾아와서 우암에게 문안을 올렸던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 학업을 전수받기를 간청했다. 우암과 그 후학들의 영향으로 학문을 숭상하고 충절과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풍토가 지역 곳곳에서 조성되었다고 해도 결코 넘치는 말은 아닐 것이다.
말 한마디 잘못하여 평생을 유배지에서 보낸다는 송시열의 푸념 같은 자기 독배 시를 음미하며 20분정도 걸었을까. ‘배남지’가 나온다. 고갯길에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해서 ‘배나무 재’ 라고 옛 선비가 붙인 이름인데, 지역 사람들은 경상도 고어(古語) 그대로 ‘배남지’라고 불렀다.
팔어실과 서촌2리 입구를 연결해주는 이 산길은 이제 얼마 안 남은 우리네 옛 고갯길의 전형을 보여준다. 팔어실 사람들도 거산마을 사람들처럼 버스를 이용하려면 이 고개를 넘어야 했다. 길바닥이 오랜 세월 뭇 사람의 흔적으로 단단히 다져져 있다. 오래 묵은 고개일수록 이야기도 많다. 나는 아버지와 삼촌으로부터 “밤에 배남지를 넘다가 납닥발이가 흙을 퍼붓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하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실제로 이 재를 혼자 넘다가 허깨비에게 홀려 죽은 사람도 있었다. 동짓달 그믐날 밤이었다. 그날은 장날이었는데, 동백이 아재가 장터에서 술을 먹고 혼자 이 재를 넘다가 초롱불을 들고 나타난 허깨비한테 홀렸다. 온 밤 내내 가시밭길을 헤매다가 동이 튼 후에야 혼이 빠진 채로 ‘찬샘이’ 무논에서 발견되었던 그는 집에 와서 시름시름 달포가량을 앓다가 결국은 병명도 모르게 죽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로 가끔은 내가 혼자서 이 산길을 넘고 있는 꿈을 꾸곤 하였다. 그럴 때면 여우가 내 뒤를 따라와 기겁을 하고 도망치다가 잠을 깨는 게 다반사였다. 길 위에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다고 했던가. 바리바리 짐을 이고 진 우리네 조상들의 무거운 걸음과 산골사람들의 시린 삶들이 이 고갯길에 녹아있는 듯하다.
배나무 재에서 10분정도 더 가면 달봉산이다. 고향집에서 방문을 열면 멀리 이 산봉우리가 턱 버티고 있었다. 수 십 년 된 참나무들이 울창하여 옛날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무가 없고 봉우리만 우뚝 솟은 이 산을 나는 알봉산이라 불렀다. 정월 대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올라 생솔가지에 불을 붙여 연기를 피어 올리며 달맞이를 했다. 초여름부터 늦가을 까지는 인근 부락 처녀 총각들이 소를 산에다 풀어놓고, 해가 질 때까지 감자서리며 밀서리를 하던 만남의 장소이자 추억의 장소였다.
달봉산 허리를 돌아 조금 지나면 으름덩굴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공동묘지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기일사람들(서촌2리)이 묘를 썼다하여 ‘기일공동묘지’라고 부르던 곳이다. 봉분들이 온통 아카시아와 잡목들로 뒤덮여 있지만, 여기는 얼룩진 역사를 살다간 사람들의 흘러간 삶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저항을 유교사상과 풍수지리설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근대적 공중위생이라는 거창한 구호와 토지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묘지규칙이라는 것을 제정하였다. 규칙에 따라 동네마다 일정 지역에 공동묘지를 지정하고 강제로 그곳에 장사를 지내게 했던 것이다.
그런 공동묘지에는 어김없이 아카시아나무를 심었다. 아카시아나무는 뿌리가 관속을 파고들기 때문에 묘지주변에 심는 것은 금물이다. 일제의 악랄한 민족말살 정책의 한 방편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민들이 낮에는 가짜 시신을 묻어 위장 장사를 지내고, 밤에는 지관이 정해준 터에 진짜 시신을 몰래 안장시켰던, 그 서글픈 역사의 현장이 여기에 있다.
이곳을 후세들의 산교육 장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아카시아와 쑥대를 걷어내고 장미공원을 조성하면 좋겠다. 그래서 나라를 잃으면 죽어서도 마음대로 묻히지 못한다는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후세들에게 전해주면 좋겠다.
공동묘지 옆으로 내가 어머니 손목잡고 외가댁에 갈 때 이용했던 고갯길이 보인다. 이제는 산토끼나 다닐 정도로 어슴푸레하다. 고개를 넘어서 골짜기를 나가면 종달새 포르르 날아오르던 보리밭 길이었다. 길섶에 풀꽃들이 다투어 피어있는 샛길을 따라 산모퉁이 돌아가면, 초가집 옹기종기 연기 피어오르던 마을이 있었다. 마당에 피운 모깃불에서 쑥 향기 올라오는 여름밤, 외할머니 부채질에 잠이 스르륵 들곤 했던 서촌리 외갓집 정경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공동묘지를 지난 오솔길은 솔내음을 실컷 만끽할 수 있어 좋다. 누군가가 ‘희망의 길’이란 푯말을 세워두었다. 그래, 지금 나는 희망을 갖고 바다가 보인다는 망해산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문득 희망이란 단어를 곱씹으며 걷는다. 내 학창시절의 희망은 무엇이었던가?
면사무소 옆 공터에서 나락 매상을 대는 날이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6학년인 나를 데리고 읍내까지 갔다. 소달구지에 얹혀가기는 했지만, 자갈밭 길에 물을 건너야하는 험한 길이었는데도 아버지가 어린 나를 그 먼 곳까지 데리고 갔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장이 열리는 것처럼 곳곳에서 몰려나온 농군들이 저마다 매상가마니를 쌓아놓고 기다리는 사이로 하이칼라 머리에 흰 와이셔츠 차림의 판정관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짧은 대꼬챙이가 들려져 있었다. 그가 가마니더미 사이를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며 가마니를 푹푹 쑤셔댔다. 뚫린 구멍사이로 나락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판정관은 그것을 한 움큼 집어서 대충 훑어보고는 등급을 매기는 것이었다. 이 찰나 같은 순간에 한 해 동안 농부들이 흘린 땀방울의 금액이 그의 입에서 바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옆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고 있는 농군들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옥황상재에게 불려가 천당과 지옥을 판정받을 때 그 분위기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너는 나처럼 힘든 농사짓지 말고 공부해서 아까 그 사람처럼 공무원이 되어라”
수매해서 받은 돈으로 자장면을 달랑 한 그릇만 시켜놓고, 딸려 나온 단무지로 소주 한 병을 비우면서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다. 속이 불편하다고 하시며 자장면을 나에게만 먹으라고 했던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객지를 떠돌면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채찍처럼 떠오르던 그 말씀, 그것은 곧 나의 희망이고 장차 이뤄야할 꿈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내가 공무원이 되던 날, 늘 가난과 역경으로 쫒기고 시름겹던 아버지의 얼굴빛이 그날처럼 환하게 보일 때가 또 있었던가.
20분쯤 더 걸었을까. 오솔길 밑으로 갓비가 세워진 무덤이 보인다. 그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가을 추수를 끝내고, 앙상한 감나무 가지에 달랑 몇 개 남은 홍시마저도 찬 서리로 검붉게 물들 즈음이면 이 묘에 묘제를 지냈다. 어떻게 알았는지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묘제에 사용한 떡을 얻어먹기 위해서다. 애기를 업고 온 아이에게는 어른들이 두 몫을 줬다. 어떤 아이는 한몫을 더 받아낼 요량으로 아예 베개를 업고 기다리기 까지 했다. 시린 손을 입으로 호호 불며 묘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마침내 얻은 절편 반 조각과 찰떡 한쪽, 꿀맛이 따로 없었다.
무덤 쪽으로 내려가 보았다. 좌측으로 불미골 산자락이 팔로 에워싸듯 있고, 우측으로는 숨은골 능선이 외풍을 막아주고 있다. 앞으로는 천수답들이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처럼 묘소 밑 골 안까지 와 닿아있다.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장풍득수의 명당으로 짐작되었다. 묘가 단정하게 정비되어 있는 걸로 보아 후손들이 아직까지 건재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 묘제를 지내기 위해 지게 바소쿠리에 떡을 지고 나르던 묘답지기 공당할배도, 그의 아들 월연이 아재도 전부 저세상으로 갔다. 그래서 인가. 안타깝게도 묘답들은 모두 묵정논들이다.
생전에 한 번도 뵙지 못한 묘의 주인공이지만 어릴 적 얻어먹은 묘제 떡이 생각나 큰절을 올렸다. 누구의 묘일까? 비석의 앞면에는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경주이씨’ 누구의 묘라고 적혀 있지만 그의 행적을 시원하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비석은 우리에게 피장자의 공적이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비석에 새겨진 한문 글귀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비석이 허공에 대놓고 말을 하는 것 같다. 무덤 속에 묻힌 사람의 이야기를 꼭 기억해 달라고.
다시 오솔길로 들어섰다. 이어지는 능선은 ‘숨은골’ 안쪽이다. 이 골 입구 초가삼간 집에서 내가 태어났다. 빨갱이들이 숨어들었기에 이름 지었다는 숨은골, 낮에는 국군이 오고 밤에는 빨갱이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다. 제법 많은 비가 내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물꼬 살피러 골짝에 들렀다가 빗물에 떠내려 온 소의 내장을 발견하였다. 그 근원을 찾아 골짝을 타고 올라갔더니 바위 밑 작은 폭포아래에 빨갱이들이 소를 잡아먹었던 흔적이 있었다. 그곳에 그들이 유품처럼 남기고 간 쇠머리와 뼈다귀는 그해 여름 우리가족들의 훌륭한 보양음식이 되었다. 그 후에 이름 붙여진 숨은골, 지금도 빨갱이가 숨어든 것처럼 으스스하다.
지역에 빨갱이들이 많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일제시대부터 6.25후까지 산서리 월산마을과 서촌리 뒷내마을, 임중리 등에는 탄광촌이 있었다. 그곳에는 벌어먹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광산노동자들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상대적 약자인 광부와 머슴들을 우선 포섭하였다. 장기지역에 빨갱이들이 많았던 이유도 이들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날만 되면 경찰과 군인들이 임중숲에서 빨갱이들을 공개처형 하였다. 그렇게 죽은 빨갱이들의 머리는 따로 떼어 내어져 길가에 진열되었고, 그 밑에는 ‘빨갱이 누구누구 머리’ 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죽음을 피해 빨갱이들이 숨어들었던 골짜기, 우리민족 현대사에서 격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골짝 안에도 스며있다.
숨은골 능선에서면 쉬어갈 수 있는 휴게시설이 있다. 여기서 잠시 휴식을 취하면 땀으로 젖은 온몸이 시원한 바람에 이내 식어 내린다.
얼마쯤 왔을까. 우측으로 새밭골 능선이 내려다보인다. 이 산자락에는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고분들이 많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큰 굴처럼 생긴 고분들이 훼손된 채 있었지만 언젠가 목장초지를 조성하면서 많이 사라졌다. 지금도 도굴된 흔적이 있는 고분들이 군데군데 있지만, 체계적인 학술조사나 발굴계획이 없는 상태라 안타깝다. 사람들은 이곳을 ‘고래장 터’라고 불렀다. 늙고 병든 사람을 구덩이 속에 버려두었다가 죽는 것을 기다려 장사지냈다고 하여 어릴 때는 정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다. 어떻게 그런 불효가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모두 일본사람들이 우리민족을 얕잡아 보기위해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산사태가 나면 이곳에서 운 좋게 신라토기 하나쯤 건지던 시절도 있었다.
망해산에 거의 다 왔다고 느껴지는 갈림길에 서낭당이 있다. 이 길은 창지리 사람들이 고석사나 방산리로 오갈 때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마을을 수호해온 서낭당은 신령스럽던 옛 모습을 잃고 무너진 돌무덤으로 남았다. 옛날 어른들은 이 앞을 지날 때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으며 소원을 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조들이 고갯마루에 돌무덤을 만든 것은 꼭 신앙의 대상으로뿐 아니라 이정표의 기능도 했다고 본다. 실제로 태종실록에도 그와 같은 내용이 나타난다. 거리를 정확히 재어 10리마다는 작은 표시를 하고 30리마다는 큰 표시를 하는데, 돌을 쌓거나 흙을 쌓아 표시를 하자는 기록이 그것이다. 돌무덤은 또 마을끼리의 돌팔매 싸움이나 전쟁에 사용할 무기의 저장고 역할도 하였다. 특히 통영, 거제 등 바닷가 고갯길에 나타난 돌무더기들은 왜적에 대항하는 병기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평상시에 모아 둔 것들이라고 한다.
조상들이 만든 작은 것 하나라도 가꾸고 보존하는 전통을 세워야 한다. 그래야 후손들도 우리의 작은 결과물을 지키고 보존해 주지 않을까? 이곳에 안내판이라도 하나 설치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
서낭당에서 망해산 정상까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내 몸의 무거움을 비로소 알게 하는 깔딱고개가 내려다보며 말을 한다. 서둘지 말고 천천히 올라오라고.
땀범벅이 되어 어렵게 점령한 망해산, 그 이름 속에는 바다를 바라보며 원대한 꿈을 키우라는 선조들의 깊은 뜻이 배겨져 있다. 이 산을 고석사 뒤에 있는 큰 바위라 해서 ‘절뒷방구’라고도 불렀다. 밤이면 부엉이가 울고, 때로는 범이 머문다고 했지만 우리들이 솔가지로 불 피워놓고 달맞이하던 곳이다. 동쪽으로 멀리 모포앞바다의 수평선이 푸르스름하게 보이고, 백사장으로 밀려오는 하얀 파도가 마치 하늘을 날아가는 연처럼 아른아른 하다. 저 밑으로 어릴 적 꿈을 키우던 작은 고향 마을이 보인다. 고향집은 육송정(六松亭)에 아직도 있다. 마을 어귀에 여섯 그루의 큰 소나무가 있고 그 밑에 정자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여 호의 집들이 부락마다 옹기종기 있다. 뒤에는 산을 끼고 앞에는 긴 장기천을 바라보며 서 있는 마을들, 집집마다 대문이 없다.
옛날 정자를 세웠던 흔적이 망해산 정상에도 보인다. 신라 때 고석사가 창건될 무렵 이곳에 세웠던 정자인 듯 하나 지금은 흩어진 기와조각들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망해산 아래 고석사는 상서로운 전설 하나쯤 꽃피울 만큼 충분히 아름다운 산세와 역사를 지녔다. 전설은
이렇다.
신라 27대 선덕왕 7년(638년) 어느 날 이었다. 경주에 있는 궁궐 동편으로부터 세 줄기의 서광이 비쳤는데, 그 빛은 3일간 계속되었다. 신기하게 여긴 여왕께서 사자를 시켜 그 이유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사자는 서기가 발하는 동쪽으로 찾아가 보니 그 빛은 망해산 밑의 괴석에서부터 발광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사람이 소나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면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반드시 소나 말에서 내려야 했다. 이 사실을 사자는 여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곧 태사관에게 점을 치게 하여 연유를 물었는데, 태사관은 그 자리는 왕기(王氣)가 서려 서광(瑞光)이 비치고 있으므로 길지라고 했다. 태사는 괴석을 깎아 부처님을 만들어 모시고 절을 지으면 나라의 운이 길하고 백성들이 편안할 것이라고 아뢰었다. 왕은 당시 경주 분황사 주지로 있던 스님에게 명하여 그 괴석을 깎아 불상을 만들도록 지시하였는데, 다 만들고 나니 부처는 서향에 있는 궁궐 쪽을 바라보는 형상이었다. 부처를 모신 법당을 보광전(普光殿)이라 이름 짓고, 옛 바위에서 서광이 발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고석암(古石庵)이라 지었다.
이런 전설과 빼어난 단풍 덕택에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간 가을소풍은 고석사가 단골이었다. 달성 서씨들 묘가 절 남쪽 자락에 그대로 있다. 소풍날 이곳에서 노래자랑이며 씨름도 하였다. 참꽃피고 제비 오는 삼월 삼짇날에는 이웃동네 청년들이 서로 치고받는 싸움터가 되기도 했던 꽤 넓은 터였는데, 지금 보니 생각보다 좁다. 그 시절 선생님들의 얼굴과 이곳에서 뛰어놀던 친구들의 모습이 낡은 영화필름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장기읍성 둘레길은 영원한 요람에 대한 나의 꿈을 깨뜨리지 않고 있다. 이 길에는 나와 이웃들의 삶에 대한 온갖 애환과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모든 사람들이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듯 나 역시 그 품속에 안기고 싶어 이 길을 왔다.
|
첫댓글
전에 보리수필 문학여행 때
청산거사 님 안내로 장기읍성을 잠시 둘러 보았는데,
지금은 둘레길 코스로 새단장을 하였군요.
청산거사님 얘기를 들으며 그 둘레길을 걸어보고 싶네요.
수필 하단부의
'이런 전설과 빼어난 단풍 탓에...' 라는 구절은
'이런 전설과 빼어난 단풍 덕에...'로 고쳐야겠네요.
'탓'이란 명사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지적 고맙습니다, 역시 예리하십니다요~
청산거사님과 함께 장기의 옛길을 걸으며 역사와 민속과 인정을 흠뻑 감상합니다. 마치 함께 걸으며 인정스럽고 풍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합니다. 추억의 많은 부분이 저와도 공유하기에 즐겁고 흐믓하고 잔잔하고 편안한 감동이 전해집니다. 우암이 장기에서 약 5년간 머물었다는-머물렀다는?/옥황상재-옥황상제/기해방예변-기해방례변/태사관-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