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소개
전라남도 강진군의 서남부에 위치한 면. 면적 64.81㎢, 인구3,616명(2004년 현재). 면 소재지는 항촌리이다. 본래 강진군 지역으로 보암면(寶巖面)이라 해 덕산(德山)·유자(柚子)·보동(甫洞) 등 26개 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백도면의 일부를 해남군 북평면에 편입시키고, 3개 면을 병합해 백도와 보암의 이름을 따서 도암면이 되었다.
그 뒤 1974년 옛 백도면 관내인 용월리 등 7개 리를 분할해 신전출장소에 배속시키고, 도암면에서 분리하였다. 1990년 봉황마을이 해남군 옥천면에서 편입되었다. 북부와 서부는 산지이며, 동부와 동남부는 강진만과 접해 해안 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져 구름 북쪽에 서기산이 위치하고, 북동부에서 남서부를 향해 만덕산·석문산·덕룡산 등이 연결되어 면의 중앙부를 횡단한다.
석문천과 봉황천이 북쪽에서 남쪽을 지나 강진만으로 흘러들며,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옥천천의 상류가 있는 하천 유역에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해안선의 길이는 38.5㎞에 달하고, 가우도와 복도 등의 섬이 있다.
주요 농산물로 쌀·보리·고추·무·배추·마늘·수박·참깨·감 등이 생산되며, 특히 강진만 연안에서는 김·고막·바지락 등이 많이 생산된다. 석문산에서 규석이 생산되고, 이를 원료로 하는 유리 가공공장이 있으며, 고령토가 생산된다.
교통은 완도와 장흥을 잇는 18번국도가 북쪽으로 면을 지난다. 문화유적으로는 만덕리에 정다산 유적과 백련사 등이 있고, 천연기념물인 동백림이 있다. 정약용이 이곳에서 학문을 대성했으며, 초당·옹달샘·연못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관광객이 많다. 만덕리의 보동 및 귤동 촌락은 고려 말의 유신 윤박(尹博)이 성촌해 600년을 자작일촌으로 내려오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항촌(項村)·덕서(德西)·계라(桂羅)·지석(支石)·강정(江亭)·덕년(德年)·만덕(萬德)·학장(鶴掌)·용흥(龍興)·신기(新基)·석문(石門)·봉황(鳳凰) 등 12개 리가 있다.
보암(도암)의 유림운동
강진신문(2003. 4. 3)
보암은 현 도암면의 예전 명칭이다. 유림들이 지역민의 선구적 역할을 하여온 내력을 조사해 보았지만 정확히 이것이다 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1888년 4월에 조직한 보암방의 조약과 1918년 3월에 조직한 성인을 본 받기로 약속하여 만든 문서에 의미가 집약이 되어 있기에 내용을 발췌한다.
◆보암방약
보암의 방약은 목리의 사학(12,500가구가 사는 향에 세운학교)에서 조직하고 향약의 우두머리는 윤창일, 향음주등의 연회석상에서 주인의 예를 돕는 사람에는 오한규와 윤풍호이고 참여인원은 100여명이었으며, 글로 엮은이는 김한섭이었다.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만민을 가르치는데는 앎, 사랑, 통함, 의리, 진실, 알맞음의 6덕과 효도, 우애, 화목, 인척을 친애, 신임, 남을 돕기의 6행과 예의, 음악, 활쏘기, 말타기, 글쓰기, 셈하기의 6예로하고 인재를 선발하는데는 과거 응시자를 초대하여 수령이 잔치를 베풀어주고 잘못을 가리는 형벌은 효도하지 않은자, 화목하지 않은자, 친척을 사랑하지 않은자, 어른을 공경하지 않은자, 신임이 없는자, 남을 돕지않는자, 말을 만들어 내는자, 남을 괴롭히는자에게 벌을 내리고 그 목적은 사심 없이 사람을 사랑하는 즉, 사람이 자기 수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적이상 혹은 법칙에 좇아 확실히 의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 능력을 갖추게 해서 처음으로 고기잡기, 사냥, 농사, 목축을 가르치고 8괘와 문자를 만든 복희와 주나라 정치가인 문왕과 교육자인 공자처럼 지위와 재능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 하였다.
◆모성계안
모성계안은 당시의 군수이던 조병우와 직원을 맡은 김영준이 서문을 짓고 지석출신인 윤삼하(1852-1938)가 발문을 지었으며, 참여자는 지석7, 덕년9, 강정5, 계라4, 덕서5, 영파9, 항촌6, 석문7, 만덕1, 영관4, 백화3, 수양2, 벌정5, 노적2 등 총70명이다.
서문의 조병우는 「만세토록 공을 갚아야할 사람과 하늘의 제와 땅에 사를 지내 주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공자(552-479BC)인데 그는 모든 천체를 포함하는 우주와 같으므로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되 천지의 신령께 글을 읽어 고한들 누가 잘못한다고 하겠는가 하고 김영준은 왕희지(307-365)는 절강성에 있는 난정에서 353년 3월3일에 계의 모임을 갖었고, 백거이(772-846)는 낙양현 용문산에 있는 향산에서 구로회의 모임을 갖었고, 송나라때 문언박은 서경의 유수때 하남성 북쪽에 있는 낙양에 살던 사마광(1019-1086)등과 함께 13인의 모임을 결성하니 백거이의 구로회를 모방한 것이며, 70세 이상의 뜻으로 명칭을 기영회라하고 사마온 공(1019-1086)은 진실하고 솔직하는 뜻으로 진솔회를 조직한 것이다고 하다.
발문을 적은 윤삼하는 사람이 아프고 병이 들었거나, 근심이나 걱정으로 견딜수가 없게 되면은 반드시 하나님이나 부모님을 부르는 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심정이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할 바른 길인것이다.
오늘 성인을 본받자는 계를 조직한 것은 그것들을 증험하는데 보탬이 될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극도로 풀리어서 흩어지게 되면은 함께 모이기가 몹시 힘이 들고 곤란하게 된다. 이미 폐지 되었거나 없어져버린 법령과 예속 그리고, 지키고 따라야할 준칙을 바로잡아서 우리의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들이 하루라도 공자님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끝을 맺었다.
위의 내용대로라면 어진이를 본받아 오늘을 올곧게 살아가되 내일의 후손에게 물려주자는 것이다. 끝으로 도암 유림문동의 본거지는 한천동, 다산초당(17세기), 항촌(18세기)이다. 그중에서 항촌은 윤정기(1814-1891)가 살았기 때문이라 하는데, 항촌에서 가장 먼저 살아온 윤씨는 1392년에 설립된 의흥친군의 십위에 딸린 장수중에 으뜸인 상장군과 통훈대부(정3)에 오르고 순창현감을 지낸 13세 윤연이며 문과에 합격하였다.
이상의 정황으로 보아 1금당, 2항촌, 3군자의 구천에 의미는 조정에 등과한 인물순위에 따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