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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자락길 소식 스크랩 소백산 자락길의 이야기거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
포르투나 추천 0 조회 21 12.02.23 09: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 - 소백산 자락길

지역

탐방로명

코스

테마

주관단체

경북 영주

충북 단양

소백산 자락길

소수서원-순흥향교-죽게구곡-초암사-발밭골-비로사-삼가호-금선정-죽령옛길-단양 용부원리-죽령역-대강면소재지(34㎞)

복합형

(역사문화+생태)

(사)영주문화연구회

구간

(구간명 예시)

구간

예상거리

(시간)

볼거리

먹거리

쉴거리

Ⅰ.향교길

(사색의길)

소수서원-순흥향교-순흥호-삼괴정

3.8㎞

(56분)

금성단, 순흥호, 한스빌, 배순정려비, 삼괴정

선비촌 저자거리

구비도라, 선비촌

Ⅱ.죽계구곡

(예술의길)

배점분교(삼괴정)-죽계구곡-초암사

3.3㎞

((50분)

배점분교, 죽계구곡, 초암사

소백산장

Ⅲ.달밭골길

(숨겨둔길)

초암사-순흥달밭골-성재-풍기달밭골-비로사-삼가 주차장

5.0㎞

(77분)

산촌생활, 움(토굴), 계곡비경

산골민박

소백민박

Ⅳ.시거리길

(휴식의길)

삼가주차장-삼가분교-욱금-삼가호

3.7㎞

(55분)

삼가호

소백민박, 삼가닭집

소백민박, 영전팬션마을

Ⅴ.십승지길

(지혜의길)

삼가호-장생이마을-고바리-임실-히여골

4.0㎞

(58분)

금선정, 십승지(임실), 인삼밭, 창원황씨집성촌

황토식당

Ⅵ.온천길

(과수원길)

히여골-장수골-우이실-풍기온?-터서리-희방사역

5.4㎞

(80분)

과수원, 풍기온천, 찰방역터, 비트로시스, 무쇠다리터

용바우산장, 소백산불고기

풍기온천

Ⅶ.죽령옛길

(체험의길)

희방사역(소백산역)-느티쟁이주막터-죽령주막

2.8㎞

(42분)

죽령, 느티쟁이주막터, 소혼교

죽령주막, 죽령휴게소

Ⅷ.용부원길

(긍지의길)

죽령주막-용부원리(버들마)-보국사지-샛골-죽령분교-용부사-죽령터널 입구

3.9㎞

(50분)

보국사지,

Ⅸ.장림말길

(다짐의길)

죽령터널입구-용부원리(매바우-음지마)-장림리-대강초교

4.7㎞

(80분)

(루프식철로)

죽령역, 산신당,

또아리굴

갈매기식당

 

 

향교길(사색의길)

소수서원-순흥향교-순흥호-삼괴정

 
? 소수서원
 

1. 소수서원 문성공묘와 강학당 보물 지정

2004. 4. 1 소수서원의 문성공묘(文成公廟)와 강학당(講學堂)이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402호와 1403호로 각각 지정되었다.

 

이 두 건물은 서원 창건 당시에 건립된 조선중기의 건물이며, 문성공묘는 안향을 모시는 사당이고, 강학당은 강론을 하던 집으로 소수서원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모두 임진왜란 이전 건물로서의 역사성 및 전통 건축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되었다.

 

2. 소수서원의 유래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곳 출신의 대학자인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숙수사지에 사당을 세워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그 다음 해에 학사를 건립하여 ‘백운동서원’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다. 백운동서원이라는 이름은 중국 주자의 백록동서원 이름을 본 딴 것이라 한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 안보를 추가하여 배향했고,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건의로 명종 5년(1550)에는「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인조 11년(1633)에 소수서원의 설립자인 신재 주세붕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대원군의 서원 철폐 정책에서도 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지금도 매년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도산서원, 병산서원, 양동서원, 도동서원과 더불어 전국 5대서원으로 손꼽힌다.

 

3. 소수서원 문성공묘(보물1402호)

‘문성공묘’는 안향(시호 문성공)을 모신 사당이다. 문성공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오량가(五樑家) 맞배집으로 낮은 장대석 기단 위에 둥글게 다듬은 주초를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건물의 좌측과 뒤편에 장대석 축대를 쌓고 사방 돌담을 두른 후 정면에 외단문을 설치하고 우측에 협문을 달았다.

 

4. 소수서원 강학당(보물1403호)

강학당(강당)은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소수서원의 가장 중심 건물로서 소수서원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명륜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수서원의 중앙에 우뚝 자리하여 전후좌우 건물들을 거느리는 듯 서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추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위엄을 갖추었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반 건물 마루바닥에 연동천장을 이루었고, 정면 1칸, 측면 2칸의 온돌방 뒷면엔 반 칸의 마루방을 달았다. 강당 사방둘레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깔았다.

 

5. 문성공묘와 강학당의 공간 배치

문성공묘는 사당이기 때문에 서쪽으로 치우쳐 조용히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건물 배치는 맨 윗자리에 사당을, 그 아래에 강당을, 강당 앞에는 뜰을, 뜰 앞에는 동재와 서재를 마주 두게 되는데, 소수서원은 사당이 강당 서쪽에, 뜰이 강당 동쪽에 자리하며, 동재(일신재)와 서재(직방재)가 한 채로 되어 있음이 특이한 구조이다. 이는 강학을 강조하며 강당을 더욱 돋보이도록 하기 위한 배려가 아닌가 한다.

 

강학당 바로 뒤의 일신재는 공부의 효과가 매일매일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요, 직방재는 공부의 효과가 직방으로 나타나게 한다는 뜻이다.

 

? 주요 지명

 

속수(涑水)?속순이?속시이

백운동 서남쪽, 비봉산 동쪽에 있는 큰 마을이다. 배점리 뒤실에서 흘러오는 내가 죽촌에 이르러 죽계천에 합하는 모양이 마치 중국의 산서성에서 발원하여 섬서성에 이르러 황하에 합하는 속수와 같다 하여 그 이름을 따다 썼다고 전한다.

옛 기록에 부(府)의 북쪽에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수리가 좋으며, 참판 이계로(李啓魯)가 여기서 났고, 사족(士族)이 많이 산다고 전해진다.

 

원단촌(院壇村)

소수서원이 있는 마을은 원촌(院村)이며, 금성단이 있는 곳은 단촌(壇村)이라 하여 두 곳을 합하여 원단촌이라 불러오고 있다.

 

청다리?제월교(濟月橋)

청다리 마을 앞에 있는 다리를 말한다. 길이가 15m로 다리가 높고 아래의 물이 깊어서 푸르게 보인다고 ‘청다리’라 불린다. 1967년 8월 개축하였다.

 

예부터 백운동서원(소수서원)에는 학자와 청년들이 많이 모여서 학문과 덕을 닦았다. 그런데, 이곳에는 숲이 우거지고 시냇물이 맑아 학자와 청년들은 때때로 이곳에서 기생을 불러서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서로 정이 들어 사생아를 낳기도 했는데 양쪽 모두 사생아를 기를 형편이 못돼 사생아들을 청다리 밑에다 버렸다. 당시에 자식이 없고 후손이 귀한 집에서는 이러한 아이를 많이 주워 길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어린이들을 달랠 때에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너의 어머니는 청다리 밑에서 고운 옷과 맛있는 음식을 해놓고 기다린다"라고 한다.

 

청다리라는 말도 꽃같이 젊은 기생들과 인연이 깊은 의미를 상징한 청(靑)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청다리 옆에는 제월교(霽月橋)라는 오래된 돌비가 서 있는데, 이 비는 퇴계 이황이 이름 지어 세웠다고 한다.

 

선비촌

소수서원 입구에서 단산 쪽으로 1km쯤, 죽계수 너머에 조성된 공간으로 영주 일대 고택 12채를 원형대로 재현했다. 지역문화재인 해우당?두암고택 등 기와집과 선비가 살던 초가, 마을 공동공간인 정자, 물레방아, 곳집 등 전통 마을을 꾸렸다. 1만7천4백평에 부속건물까지 76채가 있다.

 

바느레

‘바느레고분군’이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순흥 청다리에서 죽계(竹溪) 오른편으로 냇물을 따라 산기슭으로 1km쯤 들어가면, 오른편에 남북으로 열린 골짜기가 있는데 이 골짜기를 ‘바느레’라 불러오고 있다.

 

죽계구곡(예술의길)

배점분교(삼괴정)-죽계구곡-초암사

 

? 마을수호신으로 환생한 대장장이 배순(裵純)

 

1.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

영주에서 순흥을 거처 초암사(草菴寺)로 가는 길에 배점저수지가 있고 그 안쪽으로 골의 크기에 맞춰 알맞게 자리 잡은 배점마을이 있다. 배순은 이 마을에서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소수서원이 있었지만 배순은 천민 출신이라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10여리 길을 매일같이 걸어와 강학당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유생들의 글 읽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공부의 전부였다. 퇴계 선생이 이를 가상히 여겨 안으로 불러들여 유생들과 같이 글을 읽게 하였고, 그로 인해 배순은 성리학의 거성 퇴계 선생의 유일한 천민 제자가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천민 배순의 가상한 열성도 열성이지만, 틀을 과감히 배격한 큰 학자의 용기 있는 큰 가슴을 느낄 수 있다.

 

2. 음덕을 알고 의리를 실천하는 배순

천민이지만 배순은 선생의 운명을 당하여 쇳곳[鐵]으로 상(像)을 만들어 모셔 두고 삼년상복을 입었으며, 선조대왕 승하 시에도 매월 초하루, 보름[朔望]에 장만한 음식을 들고 뒷산에 올라 북쪽 궁성을 향해 곡을 하면서 제사[哭祭祀]를 3년 동안이나 지냈다. 그 슬픈 소리(소문)가 궁 안에까지 들려 나라에서는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 후에도 배순은 대장간에서 좋은 물건을 정성껏 만들어 주민들에게 양심적으로 공급하여 칭찬이 자자했다.

 

이런 연유가 마을사람들에게 각인되면서 사람들은 마을 이름에 배순의 이름을 넣어 배점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원래 이름은 평장리(평장개)이다.

 

행실이 착하고 특히 타작을 할 때도 제사를 모실 곡식은 다른 마당에서 청결하게 따로 타작하여 보관할 정도로 어버이에 대한 효행과 조상 모시는 정성이 함께 지극하였다고 한다.

 

3. 하늘도 알아보는 충신

78세의 생을 마치는 날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큰비가 갑자기 쏟아졌으며, 앞들에는 까마귀 떼가 가맣게 모여들어 천하의 효자요, 충신인 배순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 날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기 집을 보니 모두 화염에 휩싸여 타고 있었고, 그 화염에 싸여 남편이 하늘로 등천하는 것을 보고 황망히 집에 와보니 집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였으나 사랑방에 부군이 평상시 누운 체 운명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배순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배충신’으로 높여 부르고 있다.

 

4. 죽어서는 마을수호신

배점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600년가량이나 되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곳을 삼괴정(三槐亭)이라 부르며, 여기에는 최근 이전한 배순의 정려각이 있다. 원래는 배점초등학교 운동장 서편에 있던 것을 학생들의 활동에 지장이 있다 하여 남쪽 도로변 저수지 근처에 옮겼던 것을 최근 다시 이곳에 이전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만고의 충신이며 효자인 배순을 동신(洞神)으로 모셔서 해마다 정월 보름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5. 국망봉과 배점의 지명 유래

마을 뒤를 막아선 초암사 뒷산은 배충신이 매월 삭망(초하루와 보름)으로 한양을 바라보면서 선조께 3년 동안이나 제사를 모시던 장소라 하여 나라‘국’자 바랄‘망’자를 써 국망봉(國望峰)이 되었고, 배충신의 대장간 점포가 있었던 마을은 배점(裵店)이 되었다.

 

? 죽계구곡

 

1.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죽계천

영주 시내에서 순흥방면으로 약 십분 정도 달리다 보면 ‘충절의 고장’이라고 자칭하는 애환의 고을 순흥면이 나온다. 순흥의 중심부인 읍내리를 지나 소백산 국망봉 쪽으로 약 3~4분 정도 더 올라가다 보면 퇴계 선생이 빼어난 경치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죽계구곡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국망봉 청정수가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처럼 해맑게 흘러 그 신선함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할 것이다.

 

소백산 국망봉으로부터 흘러나온 실개천이 순흥 땅을 감돌아 이어지면서 아람드리 소나무 숲은 하늘을 가리고, 소반에 옥 구르는 듯한 맑은 물소리가 국악의 한 소절을 읊으며 소수서원을 휘감아 영주로 이어지는 개울이 바로 죽계천이다.

 

2. 죽계구곡의 개관

죽계구곡은 소백산 계곡 중 가장 큰 계곡에 속한다.

고려후기의 명현이며,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계곡이며, 신필하?주세붕?이퇴계 등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들이 남아있어 더욱 잘 알려진 계곡이다.

죽계구곡은 월전계곡을 빠져나온 개울물이 초암사 앞에서 제1곡을 이루고, 시내를 따라 배점마을 삼괴정을 조금 못 미치는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2㎞ 구간에 분포되어 있다. 이 죽계구곡은 영조초에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처음 정하였고, 후에 이퇴계가 다시 확인하였다. 죽계구곡은 각 구비의 바윗벽에 ‘竹溪一曲’ ‘竹溪二曲’....... 이렇게 새겨있었으나 일부는 잘 알아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3. 죽계의 아홉구비

중국의 주자학의 원류인 주희가 즐기던 계곡을 무이구곡이라 칭하였는데, 신필하와 이황은 죽계계곡의 비경 아홉구비마다 각각의 이름을 붙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경의를 표현했다. 신필하는 계곡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랐고, 이황은 소수서원에서부터 거리를 잰 점이 다르다. 퇴계 설을 따르면 죽계구곡의 1곡은 백운동 취한대, 2곡은 금성반석, 3곡은 백우담, 4곡은 이화동, 5곡은 목욕담, 6곡은 청련동애, 7곡은 용추비폭, 8곡은 금당반석, 그리고 9곡은 중봉합류가 된다.

 

4. 죽계의 풍광

지금 죽계구곡으로 발길을 들여 보면, 선현들의 감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늘 콘크리트바닥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선현들의 감동을 뛰어넘어 더 큰 위안과 치료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계곡 밑바닥이 훤한 맑은 물, 하늘 가린 울창한 숲, 그 사이의 하얀 바윗돌, 이들의 합창으로 빚어놓은 죽계구곡은 어느 지점에서든 주저 없이 발을 담그도록 유혹하고 있다. 한여름에도 물은 차가워 발이 시릴 정도이기에 말마따나 신선이 되는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여름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죽계구곡을 찾고, 가을 사람들은 계곡물 위에 떠도는 한 잎 붉은 낙엽을 잊지 못해 죽계구곡으로 간다. 겨울 등산객은 살짝 얼어붙은 얼음 밑을 흐르는 계곡물에서 색다른 생명력을 배우는 곳이 또한 죽계구곡이라고 할 수 있다.

 

5. 죽계별곡은 죽계구곡의 노래가 아니다.

보통은 안축의 죽계별곡이 순흥의 죽계구곡을 노래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다. 고려 경기체가의 대가 안축은 죽계구곡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소수서원을 지나 조금 더 하류로 내려오는 사현정 마을 출생이다. 안축이 마을 앞을 흐르는 죽계천에서 늘 시심을 일깨우고 시상을 다듬어 죽계천이 죽계별곡 속에 녹아 있지만, 안축은 조선조 신필하?이퇴계에 의해 죽계구곡이 명명되기 훨씬 이전의 고려조 사람이기 때문이다.

 

달밭골길(숨겨둔길)

초암사,순흥달밭골-성재-풍기달밭골-비로사-삼가 주차장

 

? 퇴계 이황이 걸었던 숨겨둔 길

소백산 한 가운데 감추어 두었던 길이다. 그동안 등산객 출입이 통제 되었던 길이 이번에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처녀지인 셈이다. 그만큼 이곳은 자연 그대로이다.

퇴계가 풍기 군소로 있을 때, 이곳을 걸었던 기록이 전해진다. 그는 소수서원에서 출발하여, 국망봉 아래에 있던 석륜사(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이 있던 사찰이었는데, 1948년 공비소개령으로 순흥면 태장리로 옮겨져 있다.)에서 사흘을 머물면서 소백산을 기행했다. 그리고 하산을 하며 달밭골을 지나 비로봉으로 갔다.

 

? 주요 지명

 

달밭골?월전동(月田洞)

초암사에서 500m쯤 국망봉 쪽으로 올라가다가 시냇물 건너편에 골짜기로 들어서면 달밭골로 가는 길이 있다. 좁은 골짜기(쇠자우골)를 돌아들어서면 완만한 경사로 마치 들판처럼 활짝 열려 펼쳐진 골이 나타난다.

 

달뙈기만한 밭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달밭골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는데, 그 보다는 국망봉과 초암가의 바깥 골짜기라는 의미가 더 설득력이 있다.

‘달밭골’은 옛날 화랑도(花郞徒)들이 무술을 익히던 훈련장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현재엔 요양하는 사람이나 무속인들이 머무르고 있다. 순흥 달밭골과 풍기 달밭골 사이의 ‘성재’라는 고개엔 옛 성터가 있고, 조금 내려와서 비로봉가는 길 옆에는 사고(史庫)터도 있다.

 

시거리길(휴식의길)

삼가주차장-삼가분교-욱금-삼가호

 

? 비경의 정안동계곡

 

1. 정안동(靜安洞)계곡

정안동계곡은 소백산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계곡이다.

 

풍기에서 시가지 뒤쪽으로 난 개울을 따라 얼마를 가다보면 삼가저수지가 나타난다. 여기를 조금 지나 소백산 들머리랄 수 있는 삼가동(삼거리, 시거리)에 이르러 소백산국립공원 매표소를 지나자말자 골짜기는 셋으로 갈라지게 된다. 동편의 가장 크게 보이는 계곡이 잘 알려진 비로사 계곡이고 서편 조그만 마을을 지나 있는 작은 골짜기가 당골이다. 그리고 기도원을 지나는 가운데 작은 마을이 정안동이요. 정안동 뒤 골짜기가 유명한 정안동계곡이다. 즉 비로봉 서편에서 연화봉 동쪽에 걸쳐 제각기 뻗어 내리던 수많은 골짜기가 바닥에 이르러 한데로 합치면서 하나의 동천을 이룬 것이 정안동계곡인 것이다.

 

이 계곡은 등산객이며 산채나 약초를 캐는 사람마저 발길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다. 이따금 심마니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을 뿐 사방에 인적이 없어 으스스한 계곡이다.

 

2. 숨어 있는 냉혈계곡

정안동계곡은 세간의 눈을 피해 숨어있기에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숫처녀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 계곡은 초암(월전)계곡과 더불어 계곡의 수석미가 소백산일대 여러 계곡 중 첫손가락으로 꼽힌다. 워낙 깊은 협곡일 뿐만 아니라 기도원에서 통제를 하기에 사람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그런 점이 한편으로는 계곡을 원시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장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띄엄띄엄 화전민들이 살고 있어서 더러는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으나 인적이 끊어진지 50년이 지난 지금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때문에 이 계곡은 여름 한 철 우거진 숲과 합세하여 가끔 이곳을 찾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냉각시켜 주는 냉혈계곡이다.

 

3.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계곡 입구는 아직도 옛 화전민촌을 증명하는 두어 채 허름한 인가가 썰렁하게 남아 스산한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고 있다. 이들은 평안도 쪽에서 정감록을 신봉하기 위해 전국 십승지를 찾아 나서다가 그 중 일승지인 풍기 금계동까지 남하한 감록촌 사람들로 최근까지도 상투를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개울을 거슬러 약 2㎞ 가량 올라가면 골짜기가 차츰 좁아지면서 머루, 다래넝쿨에 덮인 속으로 숨어 흐르는 정안동계곡의 순진한 참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 개울은 경사가 급해지면서 크고 작은 폭포를 이루어 흐르게 되고 감싸지는 산자락과 선문답을 하게 된다. 다시 한 구비를 돌아서면 동천이 활짝 열리면서 개울 바닥은 온통 큼직큼직한 바위로 드넓게 깔리는 바위 벌판을 맞게 된다.

 

에누리를 많이 해서 값싸게 매겨서도 신선의 놀이터쯤은 되어 보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냇물은 냇물대로 흰 잇빨을 헤벌리고, 질서를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바위들은 자연스럽게 나름대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그 위에 형형색색의 색깔로까지 마무리하고 있으니........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왠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 머리카락이 쭈빗쭈빗거린다는 그 곳은 천고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며, 인간이 숨겨둔 마지막 비경일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 주요 지명

 

샘밭골[泉田谷]

욱금리 마을 입구에서 비로사 방향으로 약 500m 쯤 가면 길 왼편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샘밭골’ 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마을 산 아래 밭둑가에 물맛이 좋은 샘이 있었다 하여 ‘샘밭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풍기북부초등학교 삼가분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교되었다.

 

금계바위

샘밭골 삼가교 다리에서 개울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왼편으로 긴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높은 곳에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이 봉우리가 마치 닭 형상과 같다 하여 ‘금계바위’ 라 불러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이 금계바위 닭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에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 보석이 탐나서 바위에 올랐다가 갑자기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져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일제시대 이 바위 아래에 금과 중석(重石)을 캐는 광산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았다고 한다. 이 금계바위 아래 고개를 넘어 가면 금계1리 용천동 마을이 있다.

 

비로봉(毘盧峰)

달밭골 마을에서 등산로를 따라 약 3㎞쯤 올라가면 소백산의 주봉인 해발 1,439m의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데, 이 산봉우리를 ‘비로봉’이라 불러오고 있다.

 

영전마[靈田洞]

영전고개를 너머 내리막길로 약 400m쯤 가면 길 왼편 언덕진 곳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영전마’ 라 불러오고 있다.

이 곳에 신라 문무왕 9년(669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전사(靈田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영전마’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 이곳에 있던 삼존불상의 본존불은 1949년 동부6리 영전사 풍기포교당으로 옮겨져 봉안해 놓았다.

 

농바우

영전마을 맞은편 산 중턱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마치 옷을 넣어두는 농(籠)을 닮은 형상이라 하여 ‘농바우’ 라 불러오고 있다. 돌 두개가 포개어져 있다.

 

삼가저수지

영전마을 앞으로 1979년에 완공된 넓은 저수지가 있는데. 이 곳을 ‘삼가저수지’라 불러오고 있다. 원래 이 저수지가 있었던 곳에는 ‘욱금리’ 본 마을이 있었는데,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수몰되고 말았다.

 

욱금(郁錦)

뒤치골 입구에서 삼가리 방향으로 약 600m쯤 가면 갈림길이 있고, 그 곳에서 오른편 작은 다리를 건너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욱금’이라 불러오고 있다.

이 마을이 금계동 마을 위쪽에 있다 하여 ‘웃금계’ 라 불렀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이 변하여 ‘욱금’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십승지길(지혜의길)

삼가호-장생이마을-고바리-임실-히여골

 

? 금성정 계곡

고통편이 발달하지 않았던 20여년 전쯤에 이곳은 희방계곡과 함께 영주 최고의 명승(名勝)이었다. 길게 이어진 노송(老松) 아래로 제마다의 모양을 뽐내는 기암괴석(奇巖怪石) 그리고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의 조화가 너무 아름다운 이곳에 비로봉 계곡에서 불어오는 골바람. 그래서 풍기군수를 지내던 퇴계선생도 이곳에서 절경을 노래했었다.

 

신선 될 재주 없어 삼신산을 못찾고

구름 경치 찾아 시냇물을 마셔 보네.

얼씨구 풍류 찾아 떠도는 손아

여기 자주 찾아 와서 세상 시름 씻어 보세.

 

이 절경에 세워진 정자가 금선정(錦仙亭)이다. 금선정은 물가에 병풍처럼 드리운 큰 바위 위에 선녀처럼 앉아 있다.

 

원래 이곳은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즐겨 거닐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 300m 뒤 산허리에 금양정사(錦陽精舍)가 있다. 이곳은 퇴계의 제자인 황준량이 독서를 하던 곳이다. 하지만 그는 퇴계보다 일찍 타계(他界)했다.

 

‘죽령의 밑 금계의 위에 돌아가고자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퇴계는 그의 제자인 황준량이 죽은 뒤 행장을 직접 쓰며 이 금양정사를 떠올렸다.(퇴계는 일생동안 네 사람의 행장을 썼다. 퇴계의 스승인 농암 이현보, 충제 권별, 매제 이언적, 그리고 제자인 금계 황준량이다.)

 

황준량과 퇴계의 만남은 이현보 때문이다. 황준량은 이현보의 아들인 이문량의 사위이다. 그래서 17년 맏인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데, 퇴계를 만나면서 비로소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등 여러 성리학의 글을 접하게 되고 주자의 글을 읽게 된다. 책상 앞에 앉으면 밤낮 없이 계속하여 독서와 사색에 잠겨 침식을 잊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이 혹 건강이 상할까 염려하면

“글을 일고 공부함은 마음을 다스리고, 기(氣)를 기르는 일인데, 어찌 독서함으로 병이 생기겠는가. 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으나, 그것은 명이요, 공부의 죄가 아닐 것이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학문하는 자세는 신령현감, 단양군수, 상주목사로 고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밝은 지혜와 청렴한 자세로 한결같은 치적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20여년의 벼슬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었을 때, 염습에 쓸만한 천이 없었고, 널에 채울 옷가지가 없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효성과 우애가 두터워 언제나 물건이 생기면 먼저 어버이께 드리고 동기들에게 나누어주었고,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알면 늘 힘껏 도왔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는 그의 죽음에 더 애석해 했으리라. 공자의 제자 안연이 3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공자는 “하늘이 망쳤다. 하늘이 나를 망쳤다.”고 거듭 말하고, 통곡하며 “안연은 나를 아버지같이 보았는데, 나는 아들로 대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아마 퇴계도 공자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손수 제문을 짓고, 또 행장을 썼을 것이다.

 

“???슬프다. 금계가 이에 이르렀는가. 성주에서 풍기까지 몇 리나 되기에 연로에서 ???중략??? 하늘이 이 사람을 어찌 그렇게도 빼앗는가. 참인가. 꿈인가. 참 황하여 목이 막히네. ???중략??? 슬프다. 금계여!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려우네. 끝이 났네. 끝이 났네. 슬프고, 슬프도다.”

퇴계와 금계를 만날 수 있는 이곳을 찾기는 너무나 쉽다. 동양대학교 앞으로 난 길을 따라 비로사 쪽으로 가면 첫 번째 사거리가 나온다. 왼쪽이 풍기 시내 쪽으로 가는 길이고, 맞은 편이 비로사 쪽, 오른 편이 금선정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1㎞ 못미처 금선정이 있다.

 

? 주요 지명

 

용천동(龍川洞)

동신당이 있는 마을에서 오르막으로 약 500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용천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이 곳에 용천사(龍泉寺)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용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문경 가은현(加恩縣) 양산사(陽山寺)에 있던 고려 태조 왕건의 진영(眞影)을 고려 우왕 5년(137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인하여 이 곳 용천사로 옮겨 봉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후, 중종 임금 때 군수 임제광(林霽光)이 사당을 중수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자, 당시 풍기군수 퇴계 이황이 다시 사당을 지어 봉안하려다가 이임하게 되자, 선조 9년(1576년)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마전현(麻田縣)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십승지(十勝地)

신라 도선대사의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의하면, 스님이 우리나라 지세를 살피기 위해 7년 동안이나 전국을 누비고 다녔는데, 당시 시중을 들던 제자 신엄(信嚴)이 최고의 명당 터를 물었더니?소백산 아래 두 강 사이로 돋아 있는 풍기 금계동은 훗날의 안전을 도모할 터이다?라 하여 전국 십승지 중 제일로 꼽은 곳이라 전해오고 있다.

 

장선이?장생이

금계중학교에서 삼가리 방향으로 약 500m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길 왼편에 길게 이어진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장선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 지형이 마치 긴 배(船)와 같다 하여 ‘장선이(長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온천길(과수원길)

히여골-장수골-우이실-풍기온?-터서리-희방사역

? 신기의 영약, 풍기 인삼

 

1. 인삼의 역사와 인기도

인삼(人蔘)은 식물학적으로 五加科 人蔘屬(Panax-희랍어로 만병통치)에 속하며, 뿌리를 약용으로 이용하는 여러해살이 음지성식물이다.

신라 26대 진평왕때 당 태종에게 인삼(산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순수한 선물로, 물물 교환 교역품으로 이용되다가 고려 중엽부터는 의무적인 공물이 되면서 해마다 중국에서 요청하는 인삼의 량은 늘어나고 국내 수요량도 증가하는 반면, 생산량은 해마다 줄게 되자, 나중에는 삼을 납세토록 함으로써 백성들은 농사철에도 산을 헤매게 되어 폐해가 컸으며, 산삼을 캐지 못한 사람들은 소나 집을 팔든가 심지어 처자를 노비로 팔아서 삼을 국가에 납부해야할 지경이 되니 온 가족이 산삼이 나지 않는 곳으로 야반도주까지 하였다고 한다.

 

2. 풍기인삼의 재배 역사

산삼산지 중 하나이던 풍기지방도 어려운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을 간파한 주세붕(조선 중종) 풍기군수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풍기읍 금계동 임실 마을에 시험 재배한 것이 이 지역 인삼재배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인삼재배 기술을 문헌상으로 나타내기가 힘들고 또 공공연히 재배할 수도 없는 실정이어서 그 내력만 구전되다가, 200여년이 지나 재배삼이 통용되던 때 ‘영남지방에 재배삼이 많으며 왕가에서 이 삼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그 후 평안도 관찰사 등 전국에서 인삼재배법을 배워 갔다고 전한다.

 

3. 인삼 7효설

인삼의 효능으로는 다음과 같이 "人蔘七效設"이 있다.

① 保氣救脫(보기구탈) : 원기를 보하고 허탈을 구한다.

② 益血復脈(익혈복맥) : 혈액생성을 왕성하게 하고 맥을 고르게 한다.

③ 養心安神(양심안신) :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정신을 안정시킨다.

④ 生津止渴(생진지갈) : 체액을 보충하고 갈증을 해소한다.

⑤ 補肺定喘(보폐정천) : 폐의 기능을 보하며 기침을 멈추게 한다.

⑥ 建脾止寫(건비지사) : 위장을 튼튼하게 하고 설사를 멈추게 한다.

⑦ 托毒合蒼(탁독합창) : 체내의 독을 제거하고 종기를 삭힌다.

 

이외에도 인삼은 허약체질, 항암작용, 항당뇨작용, 알콜해독 및 숙취해소, 노화방지와 성기능 회복, 동맥경화 예방, 혈압조절, 피부미용효과, 골다공증치료효과, 산후조리 등 인체의 모든 기능에 효과가 있다. 말하자면 만병통치약이다.

 

4. 인삼 보관법

① 수삼은 0~5도의 온도에 항상 냉장 보관을 해야 한다. 보통 15일이 지나면 부패되기 쉬우므로 구입 후 반드시 2주일 이내에 복용하는 것이 좋다.

② 직삼, 곡삼, 홍삼, 미삼, 태극삼 등은 통풍이 잘되는 건조한 곳에 두도록 한다.(습해서 곰팡이가 생겼다 해도 약효는 변함없단다)

③ 농축액이나 인삼 분말 등은 기밀용기에 넣어 건조한 음냉소에 보관한다.

 

5. 인삼의 종류(가공 형태에 따라)

① 수삼 : 재배한 인삼을 경작지에서 수확한 후 특별히 가공하지 아니한 상태의 인삼을 수삼(水蔘)이라고 하며 건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삼(生蔘)이라고도 한다.

② 백삼 : 수삼을 햇볕에 말린 것을 백삼이라 하는데, 말린 형태에 따라 직삼(直蔘), 반곡삼(半曲蔘), 곡삼(曲蔘)으로 구분한다.

③ 홍삼 : 수삼을 겁질을 벗기지 않은 상태로 증기로에 쪄서 말린 것을 홍삼이라고 한다.

④ 태극삼 : 수삼을 끓는 물에 찌거나 데쳐서 말린 것을 태극삼이라 부른다.

 

? 주요 지명

 

희여골[白洞]

남방골 입구에서 북편으로 약 300m쯤 가면 산 아래에 큰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희여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 뒤편 산 중턱에 하얀 바위가 둘[東虎岩?西虎岩] 있는데, 이 바위들이 마치 흰 호랑이를 닮았다 하여 백호(白虎)의 백(白)자와 호랑이 꼬리가 이끼 야(也)자와 흡사하다 하여 ‘희야골[白也洞]’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이 변하여 ‘희여골[白洞]’로 불리어지고 있다.

이 마을은 약 500년 전 창원황씨(昌源黃氏)들이 이주해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으면서 ‘생거백동(生居白洞), 사거묵동(死居墨洞)’이라 하여 살아서는 풍기 백동에, 죽어서는 순흥 묵동에 묻힌다고 전해오고 있다.

 

장수동

백신1리 새터마에서 중앙선 굴다리 아래를 지나서 약 1km쯤 가면 산 아래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장수동’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인동장씨(仁同張氏)가 처음으로 이 곳에 마을을 이루어 살았다 하여 ‘장씨동’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이 변하여 지금은 ‘장수동’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매봉재 아래 광산에서 중석을 채광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을을 지나다녔다고 한다.

 

속개?속계(涑溪)?속포(涑浦)

희여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두 냇가 사이에 마을이 있다. 남원천 전구교를 건너가면 큰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속계ㆍ속포’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마을이 남원천 냇물가에 있어 빨래하기에 좋은 마을이라 하여 세탁할 속(涑)ㆍ개울 계(溪)자를 써서 ‘속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마을은 배가 떠가는 행주형국(行舟形局)으로 돈을 벌면 반드시 이 마을을 떠나야 잘 살 수 있다고 하여 양계업으로 많은 돈을 모은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죽령옛길(체험의길)

희방사역(소백산역)-느티쟁이주막터-죽령주막

 

? 죽령에 얽힌 이야기

 

1. 죽령과 대나무

‘죽령(竹嶺)’이라는 글자 그대로 라면, 이곳에는 대나무가 많아야만 한다. 그러나 대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가 없다.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 조목 선생은 대강면 장림에서 죽령 고개를 넘으며, "장림 무장림, 죽령 무죽령"이라 읊었는데, 이것은 장림에는 긴 숲이 없고 죽령에는 대나무가 없음을 노래한 시다.

 

2. 죽령과 퇴계

명종3년 가을, 단양군수 퇴계가 그의 형(온계)이 충청감사로 제수되매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죽령마루에서 쉬고 있을 때 노수(路需)를 실려 뒤따라 온 단양아전을 심하게 꾸짖어 물리쳤다 한다. 정작 그의 행장에는 몇 권의 책과 괴석 두어 덩이 뿐이었다 한다.

죽령옛길의 잔운대와 촉령대 그리고 소혼교는 풍기군수 퇴계가 고향 예안을 오가는 충청감사 온계를 마중?배웅하던 곳이다. 형제분이 마주앉아 물과 바위를 벗 삼아 회포를 풀던 곳이다. 동편을 잔운대, 서편을 촉령대, 건너던 다리를 소혼교라 명명하였다.

 

3. 주세붕의 이현보 마중

조선조 중종때의 명신 농암 이현보가 고향 예안으로 가는 길에 신재 주세붕이 술과 안주를 조랑말에 싣고 죽령 마루턱에서 이농암을 맞이하여 시와 술로 회포를 나누었다는 사연이 두 분의 문집에 전한다.

 

4. 상원사동종과 죽령

안동에서 만들어진 동종이 왕명에 의해 상원사로 옮겨가기 위해 죽령에 닿았을 때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땅에 꽉 붙어버렸다. 별 방법을 써도 효과가 없었으나, 운반책임자인 운종도감이 종의 36개 젖꼭지 중 한 개를 떼어내 종이 원래 있었던 안동에 묻어주고 난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사람들은 고향을 하직하는 서러움의 표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 희방사 절 이름과 월인석보

희방사는 영주 소백산에 자리잡은 신라 고찰로,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 두운조사가 왕명을 받아 창건하였다.

 

영주에서 죽령을 넘어 단양으로 가는 길목(지금은 옛 도로가 되어버린)에 죽령검문소가 있고 그 오른쪽으로 난 언덕배기 길을 2㎞ 가량 올라가면 장엄한 희방폭포가 앞을 막아선다. 그 폭포를 조금 지나면 산중턱에 희방사가 조용히 앉아 있다. 그래서 6.25 동란에 소실되기는 했어도 ?월인 석보?(목판은 비록 6.25 동란에 소실, 영인본은 소실 직전 규장각으로 이동) 같은 중요한 보물을 간직할 수 있었다.

 

희방사는 한자어로 기쁠희자, 모방자 '喜方寺'라 쓴다. '기쁠 喜'가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기쁨을 주는 사찰'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듯하다. 조선시대 때 희방사에서 찍은 책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하고 학술적 가치가 빼어난 것은 1568년에 간행한 {월인석보}(月印釋譜) 이다. 세종대왕이 만든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을 그의 아들 세조가 합쳐서 한 책으로 만든 것이 {월인석보}이다. 희방사에서 간행한 {월인석보} 앞머리에는 그 유명한 훈민정음 언해본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특히 가치롭다. 이 책의 끝머리에 간행처를 기록했는데 희방사가 '池叱方寺(딧방사)'로 표기되어 있다. 같은 절에서 1569년에 간행한 {칠대만법}(七大萬法)의 간행 기록에도 '池叱方寺(딧방사)'로 되어 있다. 그런데 1592년에 이 절에서 간행한 {은중경언해}에는 절의 이름이 '其方寺(기방사)'로 적혀 있다. 이 절의 이름으로 '희방사'(喜方寺), '딧방사'(池叱方寺), '기방사'(其方寺)라는 세 가지가 있는 셈이다.

 

? 주요 지명

창락(昌樂)

백신2리 버스승강장에서 죽령 방향으로 약 700m쯤 가면 국도 좌우변에 큰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창락’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은 조선시대 관원들이 지방으로 출장시 말(馬)을 갈아타는 창락역(昌樂驛)이 있었다 하여 ‘창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창락역은 영주 죽동(竹洞)ㆍ평은(平恩)ㆍ창보(昌保)ㆍ안동 옹천(甕泉)ㆍ안교(安郊)ㆍ선안(宣安)ㆍ예천 유동(幽洞)ㆍ통명(通明)ㆍ봉화 도심(道深) 9개 역(驛)을 관장하였으며, 종6품의 찰방(察訪)ㆍ역리(驛吏) 23명ㆍ지인(知人)18명ㆍ사령(使令) 10명ㆍ역노(驛奴) 21명ㆍ역비(驛婢) 11명 및 역마(驛馬) 16필을 거느린 인근에서 가장 큰 역(驛)이었다고 한다.

 

원냉기

창락리 버스승강장에서 왼편 포장길을 따라 약 500m쯤 가면 봉산기도원이 있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곳을 ‘원냉기’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 이 곳은 죽령을 넘나들던 길손들이 쉬어가는 주막이 있던 곳으로서 ‘원행교’라 불렀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이 변하여 ‘원냉기’라 불리어지고 있다.

 

무쇠다리[水鐵里]

희방사역 앞 개울가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을 ‘수철리’라 불러오고 있다.

희방사 연기설화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때 계림부(鷄林府) 호장(戶長) 유석(兪碩)이 호랑이로부터 자기 딸을 구해준 두운대사(杜雲大師)에게 보답하고자 마을 앞개울에 무쇠로 만든 다리를 놓아주었다 하여 ‘무쇠다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 무쇠다리가 있던 곳에는 1942년 중앙선이 개설되어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주점골(酒店-)

희방사역 오른편 산길을 따라 옛길로 약 700m쯤 가면 오른편에 옛집 터가 있는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 곳을 ‘주점골’이라 불러오고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곳은 옛날 죽령을 넘나들던 길손들이 쉬어가는 주점이 있었다 하여 ‘주점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이 곳에 주전(鑄錢)을 만들었다 하여 ‘주전골(鑄錢谷)’이라 불렀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오는 동안 발음이 변하여 ‘주점골’로 불리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용부원길

(긍지의길)

죽령주막-용부원리(버들마)-보국사지-샛골-죽령분교-

용부사-죽령터널 입구

 

장림말길(다짐의길)

죽령터널입구-용부원리(매바우-음지마)-장림리-

대강초교

 

1. ‘다자구야 들자구야’ 전설

또한, 죽령 산신당에는 그 옛날 할머니의 기지로 도둑(산적) 잡던 다자구 할머니의 "다자구야 들자구야" 외침이 지금도 들리는 듯하다.

 

죽령이 중요한 관문인만큼 산적들이 횡횡하였는데 부사가 퇴치하질 못해 골치를 썩힐때 어느 할머니가 자청하여 산적의 소굴로 들어가 잃어버린 아들 이름을 부르는 척 ‘다자구야’, ‘들자구야’라고 산적들의 잠들은 동태를 알려 주어 관군들이 산적을 소탕하게 하였다는 전설이다.

 

2. 죽령 술도가

죽령 양쪽 어귀 마을에는 높고 험준한 죽령을 넘기 위해 하룻밤을 쉬면서 짚신을 고쳐 신고 말을 갈아타던 마방이 있었다. 객고를 달래주던 주막거리가 번창했음은 물론이다. 풍기읍 창락에는 인삼을 원료로 하는 〃인삼 막걸리〃가 있는가 하면, 단양군 대강면 장림에는 지금도 "소백산 술도가"라는 양조장이 있다. 700여년 역사의 술도가였으니 그 내력이 보통이 아니며, 술맛 또한 좋기로 소문이 난 곳이다. 특히, 1994년 한국문화재단이 주최한 전통주류품평회에 충북지방 대표로 초대되어 우수 민속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3. 모죽지랑가와 기생 두향

두향은 단양군수 퇴계 이황과의 깊은 애정을 나눈 기생이다. 두향이 풍기군수로 ?겨 가는 퇴계를 보내는 마음이 또한 모죽지랑가와 함께 죽령기슭에 묻어 있다.

 

향가?모죽지랑가?의 마지막 종장은 <님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에/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함께 잘 밤인들 있으리까.>라고 되어 있다.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이나이다. 나으리.?하고 울며 퇴계에게 말하였던 두향의 별사는 바로 ?모죽지랑가?에 나오는 내용을 한 소절 인용하였던 것이다. 두향은 퇴계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하였던 득오곡의 향가를 빗대어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9개월의 사랑은 비록 짧았으나 아득히 깊어 이를 모죽지랑가의 초장을 인용 <지나간 봄이 그리워서/모든 것이 울며 시름하는구나.>라고 비유하였으며,?눈 깜짝할 사이나마 다시 만나 뵙고 싶지만 그러나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 그 어디에도 다북쑥이 우거진 마을에 함께 잘 수 있는 밤이 있겠는가.?하는 탄식을 통해 ?다북쑥마을?이 상징하는 이 지상에서의 황촌(荒村)에서는 영원히 또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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