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첫째 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2월 18일(주일)
누가복음 9:51-62
“예수를 따르는 일이란 무엇일까?”
전혀 낯선 곳을 여행하려고 할 때 어떤 마음이 들까요?
우선 여행에 대한 설렘이 앞섭니다. 낯선 여행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따라오지요. 그리고 여행지에 대한 기대를 잔뜩 품게 됩니다.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현지 식사가 맞을지, 길을 잃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걸어야 할 때 힘들지 않을까, 무슨 사고는 나지 않을까 등등 염려스러운 게 이만저만이 아녜요.
일반인에게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진 게 불과 20여 년 안팎이에요. 차를 타고 또는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다 보면 여행지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크지요. 보통 여행은 대부분 관광이 목적이에요. 최근 성지를 여행하는 교회가 많아졌어요. 그렇지만 일반적인 여행은 자기실현, 위로, 쉼, 삶의 변화를 주기 위한 목적이 있지요.
사실, 여행이란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대전환이 될 수 있지요. 단순히 가족여행, 친구들끼리 여행, 동료들끼리 여행은 즐거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여행은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지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여행에 따른 고통, 시련, 아픔의 과정을 마땅히 참고 견뎌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여행이 단순한 게 아녜요. 거기에는 자기 비움, 내려놓음, 포기, 위험, 죽음까지 따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를테면 그들은 집과 가정을 떠났어요. 재산을 포기했어요. 어떤 권리나 보호도 받지 못했어요. 이런 환경과 여건 속에서 예수님 일행은 한 마디로 떠돌이 복음 전도 여행인 거예요. 여기저기 발길 닿는 대로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거지요. 이게 1세기 복음 전도 여행의 보편적인 모습이었어요.
그러니까 1세기 복음 전도자들의 전도 여행이 바로 예수님과 열두제자의 전도 여행이라고 보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십자가의 길’이란 주제로 다룹니다. 그 여정이 곧 광야, 갈릴리 호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예루살렘 성전, 빈 무덤에서 끝나지요.
누가복음도 역시 마태복음처럼 마가복음의 구조를 따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삶을 크게 세 가지로 보지요. 곧 갈릴리에서 활동한 이야기(눅 1:1~9:50),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눅 9:51~19:27), 예루살렘에서의 최후(눅 19:28~24:55)가 그것입니다.-(“예수의 예루살렘 가는 길”, 『가난한 예수』, 김근수 지음, 동녘, P.231)
그러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여행기는 누가복음 9장 51절에서 19장 27절까지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지요. 이 여정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곧 예수님은 이제 수난을 당해야 하는 사실을 의식하지요. 결국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수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예루살렘행으로 가는 도보 여행은 참으로 힘든 여정입니다.
여기서 1세기에 떠돌이 복음 전도자들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당시 떠돌이 복음 전도자들은 다섯 그룹이 있었지요.
구브로 출신 레위족인 바나바(행 4:36), 다소의 바울(행 22:3), 구레네의 루기오,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의 젖동생 마니엔(행 13:1),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행 13:1)이 그들입니다.
그리고 열두제자 중 베드로도 종종 복음 전도 여행(행 10:32)을 했고요. 또한 유대와 가이사랴를 두루 다니며 전도 여행한 예언자 아가보(행 11:27)가 있지요. 이들은 모두 1세기에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전도 여행을 했던 떠돌이 복음 전도자들이에요.-(“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드르이 역할”, 『예수 운동의 사회학』, 게르크 타이센 지음/조성호 옮김, 종로서적, P.15)
이들의 복음 전도 활동은 복음서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태도, 특히 집과 가족과 재산과 자기 보호를 포기했던 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집과 가정을 포기했어요. 가족을 두고 떠났어요. 소유한 재산을 포기했어요. 어떤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어요.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 일행이 걸어간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여행기 출발선상에 있어요.
예수님 일행은 아직 갈릴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고 있었지요. 특히 여기서 인상적인 건 제자들을 가르치는 예수의 제자 교육입니다. 이 제자 교육을 단지 문자주의로 본다면 본문은 상당히 왜곡됩니다. 예수에 대한 오해가 생길 수 있어요.
반면 예수의 제자 교육을 비유로 본다면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엄격하게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56절까지입니다. 여기서는 예수님 일행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이야기이고요. 더불어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은 곧 예수의 수난을 예고한다고 볼 수 있어요. 그리고 57절부터 62절까지는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실 날이 되었던 거예요. 이것은 승천(昇天)의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가 승천하실 기약이 찼다는 건 예수의 삶에 커다란 전환점이 생겼음을 암시해요. 이것은 또한 예수가 지상에서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기약이 찼다’(51절)는 건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지요. 다시 말해서 예수는 수난의 길을 가겠다고 마음을 정한 거예요. ‘굳게 결심했다’(스테리조/στηρίζω)는 것은 예수의 결단을 강조한 겁니다.
그런데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곧장 가려면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야 했어요. 당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들도 으레껏 사마리아를 지나갔지요. 걸어서 사흘이 걸리는 여행길이었어요. 이 여행길에 예수님은 혼자 가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걷습니다. 예수와 함께 길을 걷는 게 무슨 뜻인지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살피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52절 맥락을 보면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 숙식(宿食)을 전제하는 듯싶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먼저 사마리아의 한 마을에 제자들을 보내어 준비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의 결심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친히 가리라‘(파님-פנים/할라크-הלך, 출 33:14)하는 표현과 같은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의 전통과 통념을 깹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 들어갔다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냉대하고 차별했지요.
둘 사이가 몹시 나빴어요. 하지만 예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푸대접하거나 차별하지 않았어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시는 것처럼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B.C 722년)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 사이에 생겨난 혼혈 민족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차별하고 푸대접했지요. 이런 민족 사이에 앙금 때문인지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어요.
이에 야고보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한다는 말을 듣고 반발합니다.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삼켜 버리라고 우리가 말하겠습니다.“(54절/직역 성경)
이 반발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가 아니라 제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환영하지 않은 이유는 복음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사이에 민족적 편견 때문이지요.
그런데 두 제자는 여전히 예언자 엘리야가 행한 방식대로(왕하 1:10, 12) 거룩한 진노를 내려 사마리아 마을 사람들에게 천벌이 임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그들은 마치 심판관처럼 행세해요. 엘리야가 한 것처럼 예수에게 심판의 불을 제안하지요.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이렇게 물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사롭지 않아요.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거부한다고 하여 보복하자는 거예요. 제자들의 발상이 가히 무섭습니다.
거룩한 전쟁이니 거룩한 분노니 하는 말이 과연 정당하다고 볼 수가 있을까요?
저는 어떤 이유라도 폭력은 정당화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십자군 전쟁도, 남미 대륙 정복도, 그리고 수많은 선교지에서 벌어진 폭력과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요.
교회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오직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지요.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했어요.
”내가 세상에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 12:47)
그렇습니다. 두 제자의 반발은 예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의 결심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수난의 길을 가는 거예요. 이런 사실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한 거지요. 오해가 자칫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지요.
우리도 예수님을 잘 알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제자란 스승의 의도를 잘 알아야만 스승의 뒤를 따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야고보와 요한은 스승의 의도를 오해한 거예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려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 않고 죽음의 길을 피하지 않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오해에도 설득당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스승이 가는 길을 제자들이 방해한 거예요. 자신을 방해한 제자들을 예수님은 꾸짖었어요.
그래요.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에게서 오늘 우리의 현재 모습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나는, 우리는 과연 지금 예수의 길을 방해하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따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57절부터 62절까지는 예수 따르기가 주제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서 제자들이 예수보다 앞서 걸어갔다면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의 뒤를 걸어갑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제자들을 초대합니다. 오늘 본문은 세 가지 일화를 통해 예수를 따르는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가난한 예수』, P.237)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거부당한 뒤,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마태복음에도 같은 병행 구절이 나옵니다. 그는 율법 학자(마 8:19)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그 사람의 신분을 밝히지 않아요. 이에 이스라엘 각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시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같은 생활을 요구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도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58절)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은 실로 비장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희생이 무엇인지 밝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배척(排斥)당했어요.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어요. 머물 집도 없었어요. 가족을 떠났어요. 재산도 심지어 보호받을 권리조차 포기해야 했지요.
이런 상황은 열두제자의 파송 이야기에서 볼 수 있어요.
예수님은 돈주머니도, 여행용 자루도, 속옷 두 벌도, 지팡이도 가지지 말라고 했거든요(마 10:8~9). 특히 이것은 1세기 떠돌이 복음 전도자들의 상황을 반영한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그와 같은 운명을 각오해야 한다고 요구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가치에 안정을 찾지 않았어요.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59절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예수를 따르겠다는 사람이 등장해요. 당시 유대인들은 장례를 아주 중요한 종교적 의무로 여겼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당시 관행을 깨는 뜻밖의 답변을 합니다.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당신은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하시오.“(60절)
당시 장례는 선행의 최고 가치로 여겼어요(토비 4:3~4, 6:15). 특히 정결례를 철저히 지켰던 제사장들조차도 가족의 장례만은 손수 치렀어요.
다른 일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일인데 예수님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예수를 따르기 위해 가족과 단절하라는 말씀이에요. 실로 예수님의 답변은 이례적인 거예요.
특히 60절에 ’죽은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할 수 있어요.
’죽은 사람‘은 은유적 표현이에요. 곧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지요(엡 2:1, 5:14). 그러니까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례 치르게 하라는 거예요.-(“제자직의 준비”, 『국제주석-누가복음(Ⅱ)』, I. 하워드 마샬지음/강요섭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P.36)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어요.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와 자매나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
결국 예수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만큼 예수 따르는 걸 삶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거예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게 그만큼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거지요.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예수를 따르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는 사람에게 가족들과 작별할 겨를조차 주지 않아요.
엘리사를 제자로 삼을 때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허락합니다(열상 19:19~21). 그러나 예수님은 62절에서 엘리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밭을 갈고 있는 상황을 떠올리며, 쟁기를 잡고 돌아보는 사람을 격언처럼 비유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맞지 않습니다.“(62절)
그렇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면 밭고랑을 고르게 낼 수 없어요. 밭고랑이 삐뚤삐뚤해지지요.
그렇듯 가족과 단절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겠지요. 그만큼 하나님 나라에 모든 것을 걸라는 뜻이에요.
이렇듯 예수를 따르는 건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서지요. 그것은 단지 내 영혼을 구하고, 내 가족의 안정을 구하려고 예수를 따르는 게 아니지요. 예수를 따르는 건 예수의 뒤를 걷는 일입니다. 예수와 같이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건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저항의 길, 죽음의 길을 가는 거예요.-(『가난한 예수』, P.240)
그렇습니다. 우리도 오늘 예수를 따르겠다고 이 자리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이 저항과 죽음의 길이라지만 그 길은 사람을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도 사람 살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빕니다.
예수를 아는 일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 따르는 일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일은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는다고, 안다고, 이해한다고 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최근 가나안 성도가 2백만이 넘는다고 해요. 그들도 예수를 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르지 않아요.
그런데 1세기 떠돌이 복음 전도자들이 척박한 환경과 험한 여건 속에서도 왜 하나님 나라를 전하려고 했을까요? 왜 집도, 가족도, 가정도, 재산도, 자신을 보호할 대책도 없이 제자들은 그저 예수를 따르려고 했던 걸까요?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거예요.
아마도 그것은 ”나를 따르시오“ 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 나라가 기쁜 소식이기에 같은 생활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그들은 거부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제자들과 똑같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삶이란 예수를 어떻게 따를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어떤 자세가 예수를 따르는 일인지 자신을 성찰하고 단련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수를 따르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기도 / 우리를 부르신 주님!
세상의 가치에 안정을 찾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뜻에 삶의 가치를 찾는 예수 따르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를 따르는 일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뇌하며 평생 예수와 함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