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보여행, 옛길 따라 걷기 - 삼남대로 15 | |||||||||||||
아내의 친구는 잠깐에 불과한 칠원을 힘 아끼라며 부득부득 자동차로 실어주어 가족을 배웅한다. 여행 중에 지인에게 신세진 게 다섯 번째다. 평택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면 시내로 가서 여관 잠을 자야 했으니, 3만 원은 들었을 터. 밥값에 찻삯을 더하면 알뜰해도 6만 원이다. 시대가 변하여 원집도, 주막도 없는 요즘, 돈 안 드는 여행 또한 옛정과 사라지고 말았으니 10리마다 있던 원집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부가 영남대로를 다녀와서 헤아려보니 100만 원이 훌쩍 넘었고, 이번엔 아이까지 합세했으니 좀 더 들 테다. 옛길이나 우리 땅을 배우는 여행은 소비형 유람이 아니다. 특히 미래를 짊어질 청소년에게 권해야 할 여행이니 정부가 나서야 한다. 가만, 이러면 어떨까? 인터넷으로 문화관광부에 신청하여 숙박딱지를 받는다. 마을회관에서는 한 사람에 3천 원씩, 어른 둘이니 6천 원의 이용료를 달란다. 아, 아이는 안 받는다네. 이장님은 인적사항과 딱지를 보내면 문화부에서 회관의 운영비를 보조해준단다. 밥값으로는 돼지고기와 두부를 송송 띄운 찌개가 2천 원, 낮에 밥집에서 산 밑반찬과 쌀이 3천 원. 아침밥은 남은 찌개를 비벼 먹었으니 가족이 하루 먹고 자는데 고작 11,000원이 들었네! 여행자 숙소, 도보여행의 희망사항이다. 도원동의 칠원에도 원집이 있었다. 칠원(七院)은 본디 갈원(葛院)인데 왕의 행차로 이름이 바꿨단다. ‘왕이 팔도를 돌다가 이곳에서 묵다가 병이 나 살펴보니 칡 때문이란다. 다음날 왕은 마을 이름 중 칡 ’갈‘자의 갈원을 칠원이라 부르게 하였다.’라는 유래다. 그러나 당시에도 갈원이고 이후인 대동지지에도 여전히 갈원으로 적혀있으니 또 다른 사연이 있을까 알아보지만 더는 방도가 없다.
길가에는 인조가 행차하다가 물맛이 매우 좋다고 ‘옥관자’란 벼슬을 내린 우물이 있다. 인조라면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가던 중이 아닐까 싶다. 우물은 녹슨 철판을 덮고 창살을 둘러 눈꼴사나운데다 벼슬에도 걸맞지 않다. 원두막처럼 세우고 갈대나 기와를 이으면 훨씬 좋으련만. 야트막한 고개 밑에 자리한 칠원을 벗어나 도일로 향한다. 한가한 이른 아침을 태워준 333번은 동서를 가르는 340번과 만나는 네거리에서 돌아가고, 삼남대로는 도일천을 뛰어 곧게 이어간다. 4차선의 포장길은 폭만 넓혔기에 굽이는 그대로인데다 자동차도 간간하여 이번엔 가족의 탄탄대로이다. 그리 높지 않은 고개를 오른다. 대동여지도에는 칠원과 진위 중간에 대백치(大白峙), 큰 흰치가 있는데 이 고개이다. 마루의 구름다리 명판에는 ‘삼남대로 동물이동로’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더더더~ 가서 어느 고개 위에 다리가 놓여 있데? 놀랍게도 동물의 다리이다. 그렇다. 그 고개는 산이 반으로 갈라져 동물이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만들어 주었다. 동물에게도 이런 걸 베풀어 주어야 한닷! 아이 여행기의 일부인데 부부도 같은 생각이다. 무엇보다 평택시가 삼남대로임을 알고 있다는 게 더 반가웠다. 삼례에서 ‘통영별로’와 함께 온 해남대로는 보령의 오천항에서 온 ‘충청수영로‘와 칠원에서 만나 호남, 영남, 충청이 어우러져 한양으로 올라가는 삼남대로다. 고개를 내려와 왼쪽으로 급히 꺾이며 나아간다. 대백치를 넘었으면 소백치도 밟아야 하는데 가도 가도 나타나지 않는다. 아뿔싸! 찻길을 마냥 타고 있다. 정신 차려 호들갑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도대체 몇 번째야? 소백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돌아가야 한다. 앞으로도 도시로 변한 곳이 많기에 더욱 어수선해질 길눈인데 벌써부터 이러니 맥아리가 절로 풀린다. 여느 때와 달리 찐한 논총을 쏘아대는 아내와 아이에게는 내색도 못하니 되돌리는 발걸음만 스멀스멀하다. 무겁게 몇 발자국 떼는데 택시가 손님을 내리고 있다. 올라타! 돌아와 놓친 이유를 파악한다. 지도는 오른 굽이가 있는데 새로 놓은 찻길이 먹어버려 실제는 없다. 잠깐의 길 표시와 무심이 엉켜버렸다. 산자락에 둘러앉힌 동막마을의 수백 년 됨직한 당산나무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무성하여 정겨움을 준다. 마을을 지켜주는 당산나무는 길손의 이정표이기도 하다. 소백치 길머리를 두리번거리는데 꽉 막혀있는 모습이라 가슴부터 철렁거린다. 멍하니 있으니 아내가 나서 길머리를 찾아준다. 집들이 나란하여 막아선 듯이 보였으나 내게는 자라에 놀란 솥뚜껑처럼 보였다. 소백치는 짐작대로 산길이다. 험한 고개가 아니면 수레가 구를만한 폭을 유지하는데, 그런 전형적인 모습이다. 호젓함은 떨어진 기운을 추려주고도 남는다. 마루에는 진위가 한눈이다. 내려오는 흙길은 군데군데 파여 경운기 흔적조차 없다. 동막 쪽이 1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이어서인 듯하다. 진위 가는 자동차도 여기를 넘지 못하여 송탄으로 엄청 돌아야 한다. 기능을 못하면 그 길도 점차 잊혀지리.
마산리로 나와 잘 다듬은 들을 지나 개울을 건너니 진위이다. 옛길은 마산리에서 질러왔지만 바둑판 논은 찻길조차 에누리 없는 직각으로 만들었다. 들판 어딘가에 장호원(長好院)이 있었을 테다. 장호천(長好川)을 지금은 진위천으로 부른다. 대부분 이처럼 고을 이름을 붙였기에 땅이름 여행에 어려움을 준다. 수백 년을 이어온 이름을 까닭 없이 바꾸는 이유를 모르겠다. 멀리 있는 향교와 인사만 까딱하고는 고을로 들어선다. 한때 빈번한 사신과 길손의 영접으로 허리가 휘어버린 진위였으나, 지금은 서쪽으로 경부선과 1번 찻길이, 동쪽의 경부고속도로에게 사신과 길손을 물려주고 푸욱 박힌 한촌 중의 한촌이 되어 버렸다. ‘위엄을 떨친다.’라는 뜻이 진위이듯 다시금 떨쳐지길 바라며 오산으로 향한다. 진위를 벗어나며 돌아보니 경운기조차 다니지 못하는 소백치가 의아하다. 더구나 건너에는 4차선으로 넓힌 찻길이 있으니, 지금껏 배운 눈썰미로는 틀림없이 뚫려지리라는 느낌이다. 아! 그렇게 된다면 옛길의 소멸인가, 삼남대로의 부활인가? (결국, 2005년에 길이 뚫렸다. 한 장의 사진만 남긴 후회 막심한 소백치가 되었다.)
버스도 없는 길을 한동안 이으니 확 트인 4차선을 만난다. 오산과 진위의 경계겠지. 오산으로 들어서 청호역(菁好驛)이 있던 청호마을을 지나 작은 삼거리에서 왼쪽 골목으로 잇는데, 아스팔트와 달리 삼남대로는 시멘트니 체면이 엉망이다. 어쨌든 이 길만 들면 시내까지 절로 안내해준다. 도시의 골목을 읽으며 시내로 들고, 또 길이 가라는 대로 가면 장터, 더 크게 변한 시장에서 눈요기를 하다 아예 떡과 참을 챙기고는 오산천변 팔각정에 올라 허겁지겁이다. 옛 이름이 토현천(兎峴川)인 오산천을 건너고는 여러 갈래를 두고 골똘하다가 멈춰 선다. 새장터를 질러 오산여자중학교에서 중미령으로 꺾는 길, 찻길을 따라 신창동사무소 앞으로 중미령을 넘는 길이 있으나 두 경로 모두 명쾌하지 못하다. 지금까지 장성 갈재만 애를 먹었을 뿐 큰 무리 없던 삼남대로는 오산에서 갈팡질팡한다. 경부선은 소정리에서 잠깐 차지한 옛길 말고는 간섭 없다가 큰 방해를 한다. 철길은 두 번이나 바꾸며 헝클었고 지금은 세 번째 노선으로 오산을 지나기에 여느 곳과는 다르다. 더군다나 찻길도 백 살이 된 경부선을 따랐기에 옛길 흔적도 일찌감치 사라졌다. 실마리를 찾느라 여기저기 물음을 하나 시원한 답을 얻질 못하다가 ”오산여중에서 내삼미동으로 더 들어가면 중미현으로 이을 수 있다.”라는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오산여중 앞이 아니면 들어설 필요가 없기에 체념하고 신창동 쪽으로 가닥을 잡는다. 궐동지하차도를 지나니 수목원이 나타나며 성긴 머리를 풀라고 권한다. 궂은일 당번인 아내가 짐을 내려놓고 나가더니 비닐봉지를 휘휘 돌리며 나타난다. 없다는 얼음을 반강제로 털어 천 원 주고 사왔단다. 갸륵한 아내이고 거룩한 어미. 잔디에 엎드려 지도를 뒤척이다가 한줄기 빛을 발견한다. 아문센이 그랬듯, 얼음을 우적 깨며 몸을 일으켜 앉힌다. 찬찬히 아니, 뚫어지게 바라보니 수목원부터 금바위, 세교동으로 이어져 병점에 닿는 경로가 나타난다. 반짝거리던 눈으로 지도를 몽땅 빨아들이고는 쉬는 걸음을 일으키라 성화를 부린다. 영문모르는 아내와 아이는 순간의 긴장으로 낯빛이 밝지 않거늘 아문센은 별생각이 없단다. 길은 쉼을 하는 수목원 안으로 이어지나 울타리가 방해할 듯하여 수청마을에서 실개울을 따라 들어간다. 금바위마을로 함께 걷는 맑은 개울물은 마시지는 못해도 세수 정도는 끄떡없어 얼굴 땀을 씻겨준다. 걸음도 맑고 깨끗하다. 소담한 금바위를 지나자 가족을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보드랍게 펼쳐지니 오산에서 어수선했던 마음이 비로소 평상심을 되찾아 다시 재잘거리는데, 아이는 목청 높여 소리까지 한다. 내성적이라 평소에 못 보던 모습으로, 한 곡 끝나면 또 다른 노래를 불러 젖히니 오늘의 길이라는 학교는 음악을 가르치고 있구먼. 길은 경운기도 마주하지 못할 옛길 폭이다. 솜털 같은 걸음은 한 시간 남짓하여 광성초등학교 앞으로 나온다. 참 훌륭했던 옛길의 발견이다. 세교동 동사무소에서 수도꼭지를 틀어 들뜬 머리를 식히고는 안으로 들어가 시원한 선풍기 바람에 땀을 말리며 찬물을 벌컥대니 사무소는 졸지에 가족의 쉼터가 되어버린다. 걸어온 이런 길은 흔치않기에 다시금 자료를 훑어보는데, 아! 그러고 보니 고개를 넘지 않았네? 1번 찻길은 자동차로 몇 번 다녀보아 알지만 높다란 고개가 있다. 중밑마을에서 찻길 너머 반월봉 쪽으로 오르는 예정했던 경로는 가보지 않아 확인이 필요하나 역시 고개를 넘으리라 추정했고, 그 고개를 죽미령으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길은 고개가 없다. 아니, 낮은 언덕이 있었으나 수레도 거뜬하니 고개랄 수도 없다. 그렇다면, 거리도 비슷하고 고개도 없는 편한 이 길을 왜 쓰지 않고 있을까? 경부선은 고개를 송두리째 파내 지나고, 고개로 힘들어하는 찻길은 지금까지 가르쳐준 상식에 벗어나도 크게 벗어나 있다. 이거 ‘오산’이 틀린 셈의 오산(誤算)을 뜻하는지, 다섯 번 틀리기에 오산(五算)을 말하는지 헷갈리니 식힌 머리꼭지에 다시 김이 오른다. 춘향전을 보면 이몽룡이 어사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여정에 ‘중밋오밋’이라는 땅이름이 나온다. 오밋은 ‘오미’로 오산을, ‘중밋’은 중미령을 말한다. 시대별 지도를 펼쳐 짚어나가다 최근지도에서 죽미령을 발견한다. 지도는 고개가 아닌 88.9미터의 산으로 표시되어 있고 광성초등학교 뒤에 바투 있다. 가족이 넘었다는 언덕도 같은 산자락이다. 지도만 본다면 중밑 쪽을 옛길 대로로 볼 수 없다는 결론도 나온다. 춘향전의 중밋이 고개가 아닌 산 이름이라면 이몽룡은 가족이 걸어온 경로로 남원을 갔을지도 모른다. 가만, ‘중밋’과 비슷한 마을 이름인 ‘중밑’은 서로 관계가 없을까? 또 헝클어지기 시작한다. 도대체 삼남대로 옛길은 어디란 말인가? 아! 오산은 오산이다. 정말 오산이야. 여러 가지로 머리가 어지럽지만 더는 캐내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당장은 길에만 충실 하자며 다음을 재촉하니 죽미령의 의문은 숙제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찾아내겠다는 다짐으로 안방처럼 내어 준 동사무소와 인사를 나누고는 한양으로 이어나간다. (가족이 걸었던 이 경로는 택지개발로 송두리째 털려나갔다.)
동사무소 서쪽에 보이는 오뚝한 산봉우리에는 백제 때 쌓았다는 독산성(禿山城)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과 대치하게 되었는데, 물 사정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챈 왜군은 성을 포위하고 장기전을 펼친다. 이에 권율 장군은 가장 높은 곳에서 말을 목욕시키며 물 자랑을 하니 기가 질린 왜군은 퇴각한다. 이때 물이 아니라 쌀로 목욕시켰다고 한다. 그 후 산성에서 말을 목욕시킨 곳을 세마대(洗馬臺)라고 부르고 있다. 전투 이전에 재치가 번득인다. 동사무소 뒤로 이어간다. 이따금 자동차가 보이긴 하지만 시골길과 다름없는 걸음은 평촌에 닿아 경부선과 화성시 태안읍 떡전거리로 들어선다. 지금은 떡을 팔지 않는 떡전거리에서 철길과 찻길은 수원까지 나란히 뻗지만 삼남대로는 철길 너머로 이어간다. 구름다리를 건너 진원이들을 1킬로미터 남짓하여 황학리로 들어선다. 개울을 건너면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잠든 융릉을 가던 능행로다.
춘향전으로 오산을 넘어온 삼남대로는 정조의 능행로를 인계하나 얼마 잇지 못하고 공군비행장에서 막히고 만다. 평생 한두 번이나 열릴까 말까 할 굳게 닫힌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끊긴 걸음, 여기저기로 이어보려 하지만 담장만 말없이 버텨 재간이 없어 수중보로 수원천을 건너 수원고을을 들어간다. (수원천에는 수중보 말고 새 길이 생겼다.) 아스팔트인데도 흙먼지 날리는 좁은 찻길에 대황교(大皇橋)란 이름을 단 다리가 있다. 수원천은, 상류천(上柳川, 윗버드내)과 황구지천, 지금의 원천인 유천(柳川, 버드내)은 동쪽에서 흘러와 세 물줄기가 합수한다. 현재 대황교가 놓인 곳은 유천이다. 대황교는 상류천에 놓였던 다리로,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비행장을 거쳐 나왔던 상류천이니 제자리에 있는 다리가 아니다. 대황교 자리에는 오목천교(梧木川橋)가 있어야 제대로이다. 오목천교에서 1킬로미터 남짓하다가 왼쪽 굴다리를 지나면 끊겼던 정조의 발자국을 다시 이을 수 있지만 비행장 정문 앞 건널목이 고속철이 지나며 막다른 골목이 되었다. 비행장과 경부선이 꼴깍 드셔버린 구간이 되었다. 자동차 소음과 흩뿌리는 흙먼지가 범벅인 채 한달음에 세류삼거리에 닿는다. 같은 값이면 옛길이 좋겠다 싶어 시작한 도보여행. 걸어보니 옛길이 어떻게 소멸하고 어떤 필요에 의해 부활하는지, 또 그동안의 변화를 상세히 알려준다. 그러다 보니 미래의 길을 예측하는 눈도 생긴다. 등이 유난히 우툴두툴해 옴두꺼비라고 불리는 독을 가진 두꺼비가 있다. 두꺼비는 알을 품게 되면 피했던 독사를 찾아 길을 떠난다. 만나면 막무가내 싸움을 자청하여 먹히고는 독을 뿜어 독사도 죽게 한다. 그러면 두꺼비의 알이 깨어 죽은 독사를 먹이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모래를 두들기며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전통놀이가 있는데, 옴두꺼비의 사상이 녹아있는 생명의 놀이이다. 헌 집은 자식을 위해 몸을 버리는 어미 두꺼비이고, 새집은 생명을 얻게 된 자식 두꺼비이다. 요즘의 새 길은 옛길의 무엇일까? 자유촌 가족 (jayucho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