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의식에서 깨어난 의식으로
- 배형진 신부(말씀의 선교회)
1. 들어가면서
이 세상에는 약 70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의 의식이나 사고방식은 크게 보수적인 사람과 진보적인 사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진보적인 사람들을 무조건 싫어하고 진보적인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람들을 죽어라 싫어합니다. 진보, 보수 간에는 소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사람들은 늘 긴장하고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고 싸우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며 하루도 편한 날이 없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이나 의식은 우리 가정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님들이 한 가지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자녀들은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고 조부모들은 또 다른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한집안 식구끼리도 서로 미워하고 상처 주고 경쟁하고 다투게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의식은 이웃이나 학교, 직장, 정치에까지 퍼집니다. 학교와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친구끼리 동료끼리도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서로 불신하고 다투고 경쟁하고, 서로 억울하다며 분노하고 복수심으로 상처를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런 병폐를 치유하는데 앞장서야 할 종교 안마저도 보수 진보로 갈라져서 편안하게 종교생활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보수적이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이 아니고 진보적이라고 해서 다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이 글은 보수, 진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람들의 의식을 두 가지로 분석하면서 인간의 의식을 일깨는데 있습니다.
2. 잠자는 의식
가. 보통의식: 사울(개종되기 전)과 대사제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의 의식(요한복음 3,1-12)
왜 잠자는 의식인가? 사람들의 의식이 잠자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두뇌가 잠자고, 사람들의 마음이 잠자고, 사람들의 종교심이 잠잡니다.
사람의 두뇌는 무한한 지식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뇌의 지극히 적은 부분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제대로 사용하지 않아 무지하게 생활합니다. 전체적인 지식을 모르는 상태에서 많은 오해와 오판, 경쟁 등을 일삼게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무한히 좋은 감정들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사랑, 자비, 용서, 베풀기, 배려 등등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조건 없는 사랑이나 모든 사람들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의 무한한 감정들이 그저 잠자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심을 살펴보면 보편적인 영성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예수님만큼이나 영성적인 단계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불교신자라면 부처님처럼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유교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성인군자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한국의 토속 신앙인이라면 홍익인간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은 광신적이고 근본주의적이며 폐쇄적이고 집단 이기적인 모습으로 종교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의 종교심/영성이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사제로서 지금부터 잠자는 의식 속에서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하게 되면 일반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신비가들의 기록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명상의 집에서 명상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스승님이 계셨습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명상하는 법을 그 스승에게 배우고 있었습니다. 명상하는 법을 공부하고 나서 그것을 실습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수백 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명상실습을 위해서 자세를 취하고 명상실습에 들어갔습니다. 스승은 무대에서 자세를 취하고 명상실습에 들어갔습니다.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속에서 명상실습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저 끝 문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고양이가 강당에서 “인간들이 왜 갑자기 조용하나. 한번 건드려봐야지” 하고 가까이 있는 명상실습 중인 제자들 앞에 가서 “야옹야옹” 이라고 했습니다. 제자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양이는 화가 나서 다른 제자에게 가서 더 큰 소리로 “야옹야옹”이라고 했습니다. 그 제자도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양이가 놀래서 오늘따라 왜 인간들이 나에게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는가! 하며 흥분해서 무대 위에 앉아 있는 “큰 인간”에게 가서 “야옹야옹”이라고 했습니다. 큰 인간은/스승은 완전한 명상에 집중하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습니다. 고양이가 더 놀래서 무대에서 내려가서 가장 가운데에 있는 제자를 건드려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스승님은 고양이의 그런 모습에 제자들이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고양이와 가까이 있는 제자에게 고양이를 좀 치워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고양이와 가까이 있는 제자는 고양이를 잡아서 데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스승은 고양이를 강당에 밖에 있는 나무에 묶어놓고 오너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제자가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다시 명상실습에 들어왔습니다. 스승은 다시 명했습니다. 앞으로 명상실습을 하는 시간 동안에는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도록 하여라. 이튿날 명상에 관한 계획이 끝나고 나서 실습하기 전에 제자 한 명 나가서 고양이를 찾아서 나무 묶어놓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날마다 명상실습하기 전에 제자들이 교대로 나가서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얼마 후에 스승은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제 새로운 스승이 탄생되었습니다. 새로운 스승은 돌아가신 스승만큼 깨달음의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첫 날부터 무대 위에 올라오자마자 명상에 관한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돌아가신 스승님의 명령을 계속해서 잘 실시하라. 명상 실습하는 동안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아라.”하고 지시했습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스승님 말씀을 듣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날따라 명상계획 끝나고 나서 제자들이 두 명 나가서 고양이를 찾아서 나무에 묶어 놓고 옵니다. 그 이튿날 6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명상실습 전에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 놓고 옵니다. 스승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고 모든 제자들이 고양이를 나무에 묶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착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주일 후에 모든 제자들이 명상 실습하기 전에 나가서 고양이를 묶는 것에 몰두 합니다. 모든 제자들이 나간 것을 보고 스승님도 나갑니다. 스승님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스승님에게 직접 고양이를 묶어 놓으십시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은 직접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 놓았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 놓는 것이 중요한 행사로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에 고양이도 늙어 죽었습니다. 스승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고양이를 한 마리 사세요!” 하고 명령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나무에 묶어놓기 위해서입니다. 고양이가 필요해서 아닙니다. 제자들이 시장에 가서 아주 멋있고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를 사왔습니다. 그 날 스승은 직접 새로운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명상실습에 들어갔습니다. 제자들이 고양이를 나무에 묶는 일을 중요한 종교행사로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는 것을 청소하고 고양이의 목걸이를 은으로 바꾸고 나무 밑에 장식까지 하였습니다. 문제는 명상의 집에 있는 일반 신도들이 스승과 제자들이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는 것을 보고 고양이 안에 신이 내렸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명이나 되는 신도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우리도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을 때 가서 경배해도 되냐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에게 가서 신도들이 고양이 앞에 가서 경배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말씀드렸더니 스승님은 조금 망설이다가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지.”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제자들이 고양이를 묶어놓는 나무 밑에 책상하나 올리고 책상 위에 하얀 천을 덮고 그 주변 꽃꽂이도 하고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기 위해서 스승님은 고양이를 맨 앞에 두고 제자들은 뒤로 행렬로 따라가고 그 뒤로 고양이를 경배하고 싶어 하는 신도들이 행렬로 따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나서 신도들이 고양이 앞에 와서 엎드리고 경배하고 고양이신이여 도와주소서! 여기도 아프고 저기도 아프고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사업도 안 되고 건강도 좋지 않고 아이들 문제도 있고 남편 문제도 있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어떤 신도들은 고양이 앞에 기도하면서 치유를 받았고 어떤 신도들은 기도하는 그대로 이루어진 것도 있었습니다. 그 소문에 온 지방에 널리 퍼져서 얼마 후에 수만 명이 되는 신도들이 고양이신에게 은총을 받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이제 고양이를 나무에 묶는 일은 고양이 전례로 변화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위대한 스승님은 명상실습에 방해가 되니까 고양이를 나무에 묶어 놓으라고 한 것이 이제 종교적인 고양이 전례로 변화되었습니다. 20년이 지나자 고양이 전례에 관한 신학과 철학의 논문이 만들어졌습니다. 40년이 지나자 고양이 전례에 관한 박사 논문이 나왔습니다. 위대한 스승님은 방해가 되니까 나무에 묶어놓으라고 한 것이 사람들의 착각 때문에 종교적인 전례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집단을 살펴보면 가톨릭을 비롯해서 고양이 예절 같은 의식들이 많습니다. 그런 잠자는 의식 속에서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7가지 단계로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 신념 중심(마태 7,21-23)
신념중심이라는 종교의식은 맹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교리
입니다. 종교를 가지려고 하는 이유는 다음생애/구원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당에서 예비자들에게 사제가 세례를 줄때에 〇〇〇를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 〇〇〇를 끊어버립니까? 라고 물으면 끊어버립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종교의 원리를 내면화시키지 않고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혹은 끊어버립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은 후에는 냉담하기가 쉬운 신앙 자세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가 이런 식으로 맹목적으로 교리 중심으로 종교생활을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가톨릭교회에서 냉담 자들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다. 집단 중심
종교생활을 맹목적으로 할 때 종교집단을 활성화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잠자는 의식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세상의 종교들은 자기 종교집단을 너무 강조합니다. 그 과정에서 남의 종교집단을 비판하거나 자기 종교집단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며 구원을 받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세상이 여러 종교집단으로 갈라지기도 합니다. 종교 때문에 싸우고 경쟁하고 시기 질투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극단적인 양상으로 나타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 불교와 개신교, 교회와 타 종교 간에 경쟁하고 싸울 뿐 아니라 서로를 개종시키려고 하는 비 영성적인 모습을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근본적인 원리를 실천하지 않고 자기 집단에 이득이 되는 교리와 격식을 활성화 시키려고 하는 것은 잠자는 의식이 가지는 종교흐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종교 때문에 이 세상에 경쟁, 시기, 질투, 전쟁, 경계선이 있으면 안 됩니다.
라. 제도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 맹목적인 신념중심으로 종교집단에 들어갈 때 종교집단을 전문적으로 유지, 발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철두철미한 제도로 만드는 성향이 있습니다. 종교제도는 종교생활을 위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제도 없이 종교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종교제도를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이에 대해 도전하면 파문을 당하거나 징계를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제도중심적인 흐름을 때때로 볼 수 있습니다. 냉담 자들이나 이혼한 사람들에게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교회의 제도/법을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제도와 법을 초월해서 예수님의 자비와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 법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위해서 맹목적인 종교를 가지고, 종교 집단에 들어갈 때 종교 제도를 잘 지키고, 또 그것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법이 절대적이라고 강조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법이 중요하죠!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종교의식에는 사람이 절대적이지 법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일 때 사울은 율법을 절대적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의식에서 처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4장 5절)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사람보다 법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종교생활을 할 때가 흔히 있습니다. 법은 필요하지만 사람이 더 우선이고 절대적이다 라는 의식으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바. 형식 중심(마르코7,1-23)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할 때 전례, 예절, 의식, 격식중심으로 하는 성향이 발생됩니다. 종교생활을 형식중심으로 할 때 기복신앙에 빠지기 쉽습니다. 형식이 종교생활을 하는 데에는 필요하지만 마음이 절대적입니다. 마음으로 느끼지 않는 형식은 시간낭비가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신비가들의 기록에 나오는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이슬람교 사제 이맘이 예배 시작 30분 전에 사원의 탑에 올라가서 큰 소리로 알라신의 100여 가지 이름을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톨릭의 호칭기도처럼 말입니다. 이 외침은 옛날 마이크가 없었던 시절 마을 사람들에게 예배시간을 알리는 수단이었습니다. 사제는 알라신의 100여 가지의 이름을 정성껏 외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은 예배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마치고 사원에 예배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때마침 탑 아래에 바보 한 명이 지나가다가 탑 위에 있는 사제를 쳐다보면서 큰 소리로 비웃으면서 지나갑니다. 사원에 들어가고 있는 신도들은 바보가 사제를 보고 비웃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바보를 잡아서 왜 사제를 보고 비웃었느냐? 그 사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서 비웃었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 바보는 사제가 빈 깡통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고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신도들은 바보의 대답을 듣고 오늘따라 바보가 완전히 정신 나갔구나 라고 말하면서 사원 안으로 예배하러 들어갔습니다. 그 이후에 바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았더니 이슬람교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이었습니다. 그 분은 탑 위에서 정신없이 알라신의 100여 가지 이름을 외치는 사제를 보고 빈 깡통을 흔들고 있다고 말한 것인데, 그 이유는 알라신의 100여 가지 성격을 기도하는 그의 마음속에는 알라신의 자비와 사랑 연민과 따뜻함이 하나도 없고 입으로만 외쳐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만 형식적으로 알라신이나 하느님이나 예수님, 부처님 등등 이름을 외친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이 그 분들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의식 속에서 형식중심적인 종교의식은 사람을 그 종교원리에 마음을 가지는 데에는 방해가 되거나 부족합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형식을 많이 강조하는 편입니다. 성당에서나 수도원에서 신심단체에서 여러 가지 종교 활동을 하면서 마음보다 겉으로 보이는 형식을 강조할 때가 많습니다.
사. 외형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를 실천할 때 겉으로 보이는 건물, 의상, 신자 수 중심으로 하는 성향이 생깁니다. 사람이나 종교에 내적인 면보다 외적으로 보이는 장식, 화려한 것을 활성화 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않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에 너무 화려한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루카 21,5-6 참조.).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전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벽돌이나 콘크리트가 아닙니다. 건물, 장식, 의상은 필요하지만 마음은 절대적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이 자기 제자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죽고 나서 내 이름으로 기념탑이나 성전을 절대로 세우지 마라.”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화장하고 그 가루를 다 뿌리고 나서 조금 남은 가루를 땅에 묻어놓고 그 위에 아주 작은 스투파/탑을 세웠습니다. 그것 말고는 제자들이 부처님의 기념탑이나 사원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은 히말라야 산을 거쳐서 중국까지 가서 부처님의 설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부처님의 설법을 좋아했지만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서 그 제자에게 작은 부처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제자는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마음과 수련으로 해야 됩니다! 라고 대답해서 부처상을 만드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자꾸 그 제자에게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도저히 기도하거나 집중할 수 없다고 끝까지 설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제자가 작은 부처님의 얼굴을 만들고 그 분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처상 중심으로 하지 말고 모든 수련은 마음중심으로 해야 된다고 엄격하게 말씀하시고 나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 가는 곳마다 그 부처상을 모방했습니다. 얼마 지나고 나서 중국에서는 만 명이나 되는 부처상이 있는 성전이 생겼습니다. 잠자는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흐름은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을 활성화 시키는 성향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외적인 것을 활성화 시키는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 커다란 성당교회 건물, 복잡한 전례/격식중심적인 신심, 겉으로 보이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의상, 신자 수 중심 등등으로 외형적인 것을 활성화 시키는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
아. 전교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 교회의 전교적인 흐름을 살펴보면 먼저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 아닌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그 다음에 온 세상을 그리스도교로 개종 시키려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개종(Conversion)이라는 개념에는 유럽의 백인중심주의적인 종교(교회)의 우월 성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교회에는 백인우월주의 개념으로 이 세상을 백인의 종교로 정복하려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종교 아닌 종교는 다 영성미달이나 구원받는 데에 부족하거나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선포하는 성향이 전교라는 개념에 직, 간접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백인 종교우월주의는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비백인의 종교를 무시합니다. 그 과정에서 백인(교회)의 의식은 비 백인의 종교, 문화, 사고방식, 음식, 의상, 그리고 생김새까지 차별하거나 열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유럽교회의 우월한 모습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佛信)이면 지옥” 이라는 구호로 선교합니다. 남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고 그 속에 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진정한 선교의 모습이 아닌가요? 전교는 겉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 교회에서 교회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회심을 심어주는 데 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일반적으로 맹목적으로 서양의 백인중심 전교흐름을 따르는 성향이 있습니다. 전교는 전통적인 개념의 개종 아니라 마음의 변화와 회심입니다.
자. 목적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이 맹목적으로 위의 7가지 단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7가지 단계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을 선포합니다. 구원과 천국은 교리를 지킴으로서 얻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하느님, 예수님, 복음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입으로 믿습니다! 라고 해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예수님 말씀대로(마태오복음 25장 31절 ~ 46절) 말씀을 생활화함으로써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의 시작이며 그것이 곧 천국의 영성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교리, 전례, 제도 등을 일반적으로 강조하면서 사랑의 실천이 부족한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의 실천은 먼저 예수님처럼 소외된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일을 하지만 제도 중심 속에 안주하는 성향을 또 가지고 있습니다.
3. 깨어난 의식
가. 사도바오로와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의식(요한복음 3,19-21)
신비가들의 기록에 나오는 한 가지 예를 나누겠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산책하러 떠나셨습니다. 조금 가시다가 길가에 여러 사람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근심걱정이 가득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왜 그렇게 근심걱정이 많으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지옥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자기 갈 길을 가셨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두 번째 사람들이 길가에 무리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까이 가보니까 이 사람들도 근심걱정 중에 앉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안절부절 못하고 근심 걱정 중에 앉아 있느냐? 그들은 한 목소리로 천국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대답을 듣고 자기 갈 길을 가셨습니다. 조금 더 가시다가 세 번째 사람들이 길가에 무리로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속으로 “세 번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가? 첫 번째는 지옥 때문에 걱정하고 두 번째는 천국 때문에 걱정하는데 세 번째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걱정할까?” 하고 궁금해 하시며 가까이 다가가셨습니다. 아주 가까이 가서 보니까 이 세 번째 무리는 활기가 넘치고 행복한 얼굴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좋은 일 생겼느냐? 왜 그렇게 활기가 넘치고 행복하느냐?” 그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찾았다는 말을 듣고 그분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진리를 찾았다고? 그게 무엇이냐?”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진리를 찾음으로써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는구나, 아니 당신 같은 사람들이 이미 천국의 맛을 보고 있구나!”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고 자기 갈 길을 가셨습니다.
깨어난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 것인지 7가지 단계로 잠자는 의식 속에 있는 단계와 비슷하게 7가지 단계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신앙 중심
신앙을 신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탐구, 그리움, 목마름입니다. 이 탐구와 그리움의 중심은 진리입니다. 영성적으로 진정한 진리를 그리워하고 그 방향으로 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모험입니다. 진리 자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깨어난 의식 속에서 살 때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계기가 주어질 것입니다. 신앙은 교리와 전례, 격식, 종교법이 아니라 각자의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영성 그 자체입니다. 교리와 전례가 나쁘다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지만 으뜸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다. 개인 중심(person)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잠자는 의식 속에서와 달리 조직중심이 아니라 한 개인이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자들에게는 개인중심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교회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 복음 중심입니다. 교회는 하느님과 예수님과 복음을 가르치고 일깨워주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교회집단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성이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영성 중심으로 생각하고 실천하게 되면 이 세상에서 교회 집단들이 사라지고 사랑과 자비 평화와 일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개신교와 천주교 안에 경쟁과 싸움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교파를 초월해서 초대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때때로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보다 교파 간에 경쟁하고 싸움하려고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라. 우주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제도가 중심이지만 깨어나는 의식 속에서는 제도를 초월하여 온 우주가 중심이 됩니다. 하느님이나 예수님만큼 넓은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님은 그 사실을 그대로 이천년 전에 인류에게 일깨워 주셨습니다. 제도를 초월해서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 모든 생명에게 넓은 마음, 열려있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해 주셨습니다. 종교 때문에 경쟁하고 벽을 쌓고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에서는 때때로 광신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일반적으로 광신이나 근본주의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로마중심적인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마. 자기 자신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생활을 하기 위해서 법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성향이 있지만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개개인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법은 사람을 위해 만들었지 사람은 법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창세기 1장 26절 ~ 27절)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만들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모습이고 하느님의 상속자들입니다. 내 안에 하느님이 역사하고 계시듯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안에도 하느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을 존중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깨어난 의식 속에서 법은 양심의 법으로 변화됩니다. 양심의 법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상처를 받지 않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중심은 배려하는 법, 존중하는 법, 그리고 베푸는 법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짐승들에게 그리고 온 자연에게도 배려하는 마음, 베푸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바. 마음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생활을 형식, 전례, 격식 중심으로 주로 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을 드렸지만 깨어난 의식 속에 들어오면 모든 종교 실천의 흐름은 마음이 됩니다. 모든 기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진심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요한복음 4장 21절 ~ 24절)
깨어난 의식 속에서 예배와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침묵기도, 관상기도 그리고 알아차림의 기도입니다. 한국 가톨릭교회 안에서는 진정한 관상과 마음의 기도는 아직 적극적으로 활성화 되고 있지 않습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기도가 중심이 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 내면 중심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를 드러내는 모습이 일반적으로 외적인 중심이라면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그 모습이 내적인 중심이 됩니다. 외형적으로 보이는 종교의 화려한 건물이나 종교지도자들의 화려한 의상이나 다른 종교와 비교하기 위해서 신자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종교진리를 의식하고 깨닫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신비가들의 기록에 나오는 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축구경기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축구경기는 개신교의 펀치(punch)와 가톨릭의 용사들의 경기였습니다. 예수님은 친구들과 함께 거대한 경기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개신교와 천주교의 열렬한 응원 속에서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가톨릭의 용사들이 첫 골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큰 소리로 박수치면서 기뻐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용사들이 첫 골을 넣는 것을 보고 개신교의 펀처들은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축구경기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펀처들은 아주 강하게 용사들을 압박하고 밀고나가 얼마 후에 그들도 골을 넣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번에도 너무 기뻐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셨습니다. 예수님 뒤에 앉아 있던 젊은이가 예수님의 등을 두드리면서 “젊은이 당신은 누구 편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뒤를 돌아보시면서 “나는 누구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다만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들은 뒤에 앉은 젊은이가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자기 옆에 앉은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무신론자 입니다 가톨릭 편도 아니고 개신교 편도 아니기 때문에 무신론자입니다.” 축구경기는 1대1로 비기면서 끝났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으로 가는 도중에 친구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입니까? 가톨릭 편이요 개신교 편이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는 안식일이나 형식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좋아합니다.” 이 세상의 종교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진정한 종교의 중심은 각 사람의 내면적인 마음속에 역사하고 있습니다.
아. 전교는 자기 자신의 성화와 세상의 성화입니다.(마태 7,15-20)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전교는 사람과 세상을 개종시키면서 신자수와 종교집단을 확장하는 데에 많은 힘을 쓰게 됩니다. 깨어난 의식 속에서는 신자 수나 종교집단의 확장보다는 각자의 마음을 성화하는 데에 힘쓰게 됩니다. 종교는 입으로 전파한다고 해서 진정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종교의 원리를 실천함으로써 모범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인도에서 수녀원 밖으로 봉사하러 가실 때에 수녀님이 발로 밟고 지나간 나뭇잎이나 작은 자갈을 뒤따라가는 힌두교들이 주어서 자기 가슴에 품는 것을 흔희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왜 마더 데레사가 밟고 지나간 더러운 나뭇잎이나 자갈을 가슴에 품느냐고 물으면 그 사람들은 “자갈이나 나뭇잎이 더러운 게 문제가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가 밟은 나뭇잎이나 자갈에서 그 분의 마음과 영성을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전교는 사람이 종교의 진리를 실천하는 그 자체만으로 참다운 전교가 됩니다.
4. 나가면서
잠자는 의식 속에서는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이 구원을 통해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깨어난 의식 속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목적은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라는 표현을 듣게 되면 불교나 동양의 종교의식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의 깨달음은 하나입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동양의 깨달음과 진리가 따로 있고 서양의 깨달음과 진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깨어난 의식으로 볼 때 깨달음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신자들에게는 깨달음이라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그리스도화 하는 모습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화 하는 것은 교회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회화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교파 간에 경쟁, 시기 질투가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과 종교의 중심이 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영성, 의식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그 자체가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종교적인 진리와 깨달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게 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마음 한 공동체 한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많은 종교 집단(교파)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모습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갈라져있고 개신교 안에서도 여러 교파들이 경쟁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초대의 그리스도교 공동체 모습처럼 진정한 하느님과 예수님의 영성은 한 신앙, 한 공동체, 그리고 한 마음입니다.(사도행전 4,32-3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