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뻔한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속거나 아예 그 거짓말에 스리슬쩍 속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아니 거짓말에 희열과 환희를 느끼기까지 하는 때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는 선입견이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잡았음에도 이런 때가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빗댄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은 알 수가 없다.’는 속담이 그래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사람이 성장한다는 말은 세상에 널린 거짓말을 깨달아간다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가령, 어느 아이가 산타클로스가 세상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아이는 이미 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돼서도 때로는 아이가 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고 보면, 정말이지 사람의 마음은 종잡을 수 없는 럭비공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저는 어려서 ‘전설의 고향’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대부분의 주제는 단순하게 권선징악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색다른 인물이 색다른 배경으로 이야기를 담아내는 공간이 좋았습니다. ‘전설의 고향’이 대부분 평일 밤 늦게 방영하는 까닭에, 그것을 보려고 낑낑거리며 졸음과 싸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전설의 고향의 진짜 맛은 구미호이야기였습니다. 구미호를 한다는 예고편을 보면, 그것을 보려고 며칠 전부터 목이 빠져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구미호를 하는 밤이 되면, 볼을 꼬집어가며 잠을 쫓았고 텔레비전에 목을 맸습니다. 왜 그리도 지루한 시간이 흐르지 않던가요! 마침내 텔레비전에서 ‘전설의 고향’ 타이틀이 뜨면,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고 뚫어져라 텔레비전을 쳐다봤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왜 여우가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릴까하는 의구심은 있었지만, 정말로 구미호가 사람을 홀려 간을 빼먹고 또한 사람과 결혼하여 자식까지 둘 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구미호는 저 같은 어린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에게도 인기가 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구미호의 주인공은 언제나 당대 최고 인기 미녀배우들의 몫이었습니다. 상당수의 배우들이 단역이나 조역으로 배우의 인생을 마감하는 것을 보면, 드라마의 주연으로 캐스팅되는 것도 영광일진대, 장희빈과 더불어 구미호에 캐스팅되는 것은 배우로서는 영광중의 영광이겠지요.
구미호의 줄거리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었는데, 기본형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외딴 산골에 사는 노총각이 엄청나게 예쁜 여자를 얼떨결에(!) 마누라로 얻는데, 그 예쁜 여자가 실은 사람이 되고 싶어 안달이 난 구미호로, 사람이 거의 될 뻔 했던 순간에 남자의 배신으로 사람이 못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린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왜 구미호는 꼭 암컷만이 하는가, 구미호는 겨울잠뿐만 아니라 봄과 가을에도 잠을 자는지 꼭 여름에만 ‘납량특집’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타나는가, 사람이 구미호로 둔갑하는 장면은 왜 꼭 밤에만 하는가, 왜 구미호가 활약하는 곳은 언제나 공동묘지 아니면 깊은 산속인가 하는 등의 짓궂은 의문이 있지만, 그 때 그 시절에는 구미호가 백발에 소복을 입고 입가에 피를 흘리는 그 특유의 정장(!)을 하고 등장을 하기만 하면, 머리가 쭈뼛했고 가슴이 철렁했으면서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뒤에서 구미호가 ‘간 빼먹는 것은 잠깐이면 돼!’하고 저를 잡아채고, 금방이라도 제 간을 빼먹을 것 같은 오싹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구미호를 들어 올리는 와이어가 슬그머니 눈에 들어오고, 구미호의 분장이 엉성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급기야는 그처럼 무섭던 구미호가 별로 안 무섭다는 생각을 넘어 아예 구미호로 분한 여배우가 촬영하느라 무척이나 힘이 들었겠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철이 안 들어서인지는 몰라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먹는 청양고추처럼 요즘에는 구미호를 보면서 그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