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압구정이나 동숭로를 지나는 젊은 아이들의 스케치.
힙합패션으로 입고 머리를 물들이고.. 갖가지 장신구들을 여기저기에 한 아이들..
그 사이사이에 동숭로의 이곳저곳에서 거리 공연을 하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구경하는 아이들..
길바닥에서 춤의 묘기를 결는 아이들의 모습이 곁들여진다.
# 2 건물 전경
사무실이 있는.
그 전경 위로 디제잉을 하는 판 긁는 소리가 들리고..
힙합음악을 섞어내는 리듬이 앞의 음악의 뒤를 이으며..
# 3 사무실 내부
한쪽에 마련된 턴테이블 두 개를 놓고 아미가 스크래칭을 해보고 있다. 명주와 재은이 그 옆에 서서 구경을 하며 리듬에 맞추어 건들거리고 있고.
그 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
아미,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문 쪽을 본다.
잠시 후 문이 콰앙 닫기는 소리. 아미 결국 손을 놓치고 바늘 긁히는 소리와 함께 디제잉 연습을 끝낸다.
경식이 아주 기분이 나쁜 듯 들어와 소파쪽으로 가 걸터앉는다. 그러더니 자기가 닫아 놓은 문을 돌아본다.
경식 (버럭) 뭐하구 있어. 들어와.
문이 열리면서 철수가 들어선다.
철수 아니 사람 코 앞에서 그렇게 문을 닫아버리시면
그 뒤에 있는 사람이 들어오기가 겁나죠.
(여자애들에게)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철수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영이, 여자애들을 향해 손가락을 나풀대면서 인사를 보낸다.
경식 (철수에게) 오철수씨. 일루 와 좀 앉으시죠.
철수 예. 갑니다. 가고 있어요. (소파 쪽으로 가서 앉는)
영이는 중간에 어정쩡하게 서서 어정쩡하게 보고 있고.
경식 지금 오철수씨가 우리 애들 그룹의 프로듀서라니까 말씀드리는 건데...
철수 아이. 이제까지 하던대로 말씀 놓으세요. 갑자기 왜..
경식 내가 지금 말 놓게 됐냐? 도대체 당신네들 말야.
해도 너무하잖아. 돈 가진 놈들이 상전이구 돈 없는 우리 머슴놈 들은 다 나가 죽어야된다는 거 알어. 아는데..
철수 그냥 말 올려서 말씀하셔도 괜찮겠는데요.
경식 당신들 지금 장난해?
철수 우리가요?
경식 어디서 이이상한 애 (손으로는 영이를 가르키고 있다)
낙하산으로 들이민 것도 나 이해했어.
네명이 하라면 네명이 하고. 사십명이 떼거지로 놀라면 놀고
나 다 할 수 있어.
영이는 자기 얘긴데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없이 어정어정 경식의 등 뒤쪽으로 돌아가고 있다.
경식 근데 애들 연습실 갖고 장난을 치면 어뜩하자는거야.
애들 내세워서 돈을 벌어먹을 생각이면 연습은 시켜줘야 되잖아.
철수 그래서 연습실 대안을 마련해드렸는데..
경식 그리고! 마왕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거긴 왜 찾아가.
누구 맘대로 찾아가. 그리고 뭐? 하정우더러 애들 노래 연습을
시키라고?
영이는 경식의 등 뒤에서 경식이 화내는데 따라 이리저리 표정을 흉내내거나 이상한 표정을 취하며 놀고 있다. 아미 등 아이들이 웃지도 못하고 보고 있고..
경식 (계속) 아이구 이 정신나간 사람들아. 하정우는 고장난
시한폭탄이야. 언제 왜 터질지 몰라.
내가 그놈 성질 달래가며 일하느라구 여기 머리칼 다 센 거
안보여? 당신들 이제 하정우 판 안낼거야?
철수 아 솔직히 그 문제라면 좀 신중히 검토를 해봐야 되는데..
경식 뭐가 어째. (벌떡 일어선다)
영이 (뒤에서 입모양만으로 뭐가 어째. 표정 흉내)
경식 잘 들어요. 마왕 6집은 지금 곡도 거의 다 만들어져 있어.
연습만 좀 더 하고. 다듬는 것만 끝내면 음반 낼거야.
철수 (이제 시선이 경식 뒤의 영이에게 가있다)
영이 (경식의 말을 한마디씩 입모양과 제스츄어로 흉내내고 있다)
경식 음반 낸다고. 난 지금 홍보계획도 다 짜놨고.
이번 판은 무조건 오십만장 이상. 백만장 목표야.. 그리고..
(그러다가 철수의 시선을 따라 뒤를 휙 돌아본다)
영이 마악 경식을 흉내내다가 경식과 눈이 딱 마주치고.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다. 경식, 진짜로 화가 나서 철수를 돌아본다.
경식 더 이상 길게 얘기할 거 없겠어. 나, 당신네 사장 아들 만나게
해줘. 그 인간이 지금 지 애비 돈 믿고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고
날뛰는 모양인데. 나 만나야겠어. 만나서 좀 가르쳐 줄게 있다고.
# 4 하정우 아파트
정우가 욕실에서 나오고 있다. 마악 샤워를 끝내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경식이 거실 한가운데 앉아 새양주병을 따느라고 낑낑대며.
경식 내가 그 놈 만나면 아주 모가지를 잡아 흔들어 놓을거야.
음악이라곤 쥐뿔도 모르면서 말야.
아 근데 이거 어떻게 따는거야.
정우, 장식장 쪽에서 컵을 두 개 꺼내 들고 온다.
경식 그니까 정우 넌 그냥 잊어버리면 돼. 웬 미친 놈이 와서
미친짓 하고 갔다..그러고 생각도 하지 마.
그거 진짜 미친 놈 아냐. 너한테 애들 노래연습을 시켜달래?
아 이거 왜 이렇게 안 따져어.. 안 마셔. (밀어놓으며)
소주 없어? 소주?
정우 (옆에 앉아 병을 받아 자기가 따며)
해보지 뭐.
경식 해보긴 뭘 해봐.. (하다가 다시 보는) 뭐야?
정우 애들 노래 연습.. 한번 시켜보자구.
경식 ...니가? 왜?
정우 재밌잖아.
경식 재밌어?
정우 그동안 형한테 신세진 것도 갚고. 그 애들 음반 잘 팔려야 형도
형수한테 큰소리 치지.
경식 그야.. 그렇지. 근데..
정우 노래도 못하는 애들 음반이 잘 팔리면 사기치는 거잖아.
형 사기꾼 될거야?
마개를 딴 술병의 술을 두잔에 따른다.
경식 정우야. ... 나 울까? 나 울고 싶은데.. 그냥 울어버릴까?
정우, 웃으며 술을 마시는..
# 5 연습실
네명의 아이들 주루루 서서 아아아.. 소리를 지르고 있다.
샤우팅 연습 중이다. 모두들 괴로운 표정. 소리를 지르며 한쪽을 눈치보고 있다.
그곳에는 정우가 의자를 비스듬히 놓고 퍼져앉아 다리를 다른 의자에 올려놓고, 잡지를 보고 있다.
아이들 소리가 점점 작아지는데.. 정우, 애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한손을 들어 볼륨을 올리라는 사인을 보낸다.
아이들 괴롭지만 소리를 점점 더 높힌다.
그러다가 명주가 캑캑대며 멈춘다.
정우 돌아본다.
명주 (쉬어가는 목소리로) 저는 랩하고 하모니만 할건데요.
정우 그런데?
명주 노래는 안할건데요.
정우 가수 할거라며.
명주 근데 그게 랩하고 하모니만...
정우 (다시 잡지 보며 한손을 올린다 점점 크게 표시로...)
아이들.. 다시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한다.
영이, 온갖 이상한 표정을 잡으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 시간경과
정우, 키보드 앞에 앉아서 몇 개의 음을 짚어 들려준다.
그 앞에 긴장하여 서있는 재은. 음을 듣고는
재은 (멜로디를 붙여서) 솔미솔미 솔라....(눈치보는)
정우. 무뚝뚝하게 아까의 음을 다시 짚는다.
재은 아까보다는 좀 더 많은 멜로디를 불러낸다.
청음 연습 중이다.
// 영이가 그 자리에 서있다.
정우, 다른 멜로디를 짚어보인다. 영이, 조용하다. 정우, 영이를 돌아보면.
영이 다시 한번만요. 딱 한번만 더.
정우, 다시 짚어준다. 영이 심각하게 듣고 있다.
정우, 영이를 보면.
영이 비익... (게임문제를 못 맞췄을 때의 효과를 내고는)
영이, 정우를 향해 꾸벅 절을 하더니 비실비실 애들이 서있는 자리로 돌아간다. 정우. 어이없어 보다가 그만 웃는.
# 6 건물 앞 / 밤
아이들 나오고 있다. 캑캑 마른 기침을 하기도 하면서.
아미 집에 가서 달걀들 먹어. 생달걀.
명주 춤은 언제 연습해요?
아미 내일 아침 열시부터.
아이들 우우우... 괴로워하며 한쪽 방향으로 몰려가는데.. 영이는 안 가고 그 자리에 서있다. 재은이 돌아보고
재은 안 가?
영이 반대 방향을 가르켜 보이고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보인다. 아이들 가고.. 영이 반대로 가는 척하다가 뒷걸음질로 다시 와서 건물 앞에 선다. 안을 기웃 들여다본다. 그러다 얼른 비킨다. 마왕의 맴버들이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영이 얼른 그들에게 인사를 해보이고. 멤버들도 영이를 기억하여 아는 척해주고.
그들이 들어가고 영이 혼자 남는다.
서있는데 아주 기분이 좋다. 흔들흔들 리듬을 타며 건들거리며 서있다가 춤스텝을 몇동작 해본다. 잘 안된다.
그러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돌아보면 아미다.
아미, 방금 영이가 잘 안되었던 스텝을 해보인다.
영이 따라해본다.
아미, 다른 스텝을 보이면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영이가 헤에..해서 구경하고 있자, 아미 따라오라고 손짓을 한다. 영이 그 뒤를 따르며 방금 아미가 해보인 동작을 따라해본다.
행인들이 오가는 거리를 그렇게 춤을 보여주고 따라하며 걸어가는 두 사람. 그 위로 힙합음악이 들리기 시작하며
# 7 고수부지 통로 입구 / 밤
음악이 계속되며...
들어가는 입구에 어지럽게 잔뜩 그려져 있는 그래피티들..
젊은 남자애 둘이 서서 시린 손을 불어가며 스프레이로 새로운 그림을 하나 덧칠하고 있다.
그들 뒤를 지나쳐 가는 아미와 영이.
둘 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완전히 흑인들처럼 건들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 8 통로 내부
음악이 커지며.
제법 긴 통로 양쪽에 바닥에 어지럽게 그려져있는 그래피티들.
노란 비상 등 아래에서 한떼의 힙합 그룹 아이들이 춤을 추고 있다. 한쪽에 놓여진 포터블 시디 플레이어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고.
아이들은 각자 묘기를 보이거나. 몇 명은 같은 동작을 같이 하거나..
누군가는 음악의 랩부분을 열정적으로 따라하기도 하고..
그들 사이를 걸어오는 아미와 영이. 영이 신이 나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아미 어느만큼 오더니 건들거리던 춤이 아주 본격적으로 변한다.
춤을 추며 영이에게 끼어들라고 손짓.
영이, 신이 나서 서서히 끼어들기 시작한다.
영이는 주위에서 추는 아이들의 춤을 따라하기도 하다가.. 완전히 그 분위기에 빠져들어간다.
누구도 서로 이름을 묻거나 수인사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음악과 춤과 함께 어우러지는 분위기.
# 9 고수부지 / 밤
어두운 강물이 흐르는 옆에. 아미와 영이가 움추리고 추운 듯이 서있다. 그렇게 궁상맞게 나란히 서서 강을 보고 있다가 아미가 먼저 강을 향해 아악.. 소리를 지른다. 샤우팅 연습의 연장. 영이도 옆에서 소리를 지른다. 그렇게 몇번씩 소리를 질러보다가 갑자기 영이 소리지른다.
영이 하정우우우... 야.... 너 잘생겼다.... 너두 아냐아아아아..
(그래놓고 기분이 좋아서 히이.. 아미를 돌아보는데)
아미 나 여름에 미국 가.
영이 미국?
아미 우리 가족은 벌써 다 가있어. 나도 따라가야 돼.
영이 우리 그룹은 어뜩하구.
아미 나, 시한부야.
영이 엥?
아미 힙합 하는 거 시한부라고. 엄마가 여름까지만 허락해줬어.
처음부터 반대했었거든.
영이 클났네. 매니저 아저씨두 알아요?
아미 모르지. 그래서 말인데. 노래는 영이 니가 해.
영이 (손가락으로 자기 코를 가르켜보인다) 내가?
아미 목소리는 니가 제일 나은 거 같애.
영이 말두 안돼. 난 초짜잖아.
아미 힙합은 좋아하지 않으면 안돼. 기술같은 건 두 번째야.
넌 좋아하잖아.
영이 그렇지만.. 그래두.. 그게.. 괜찮나?
아미 난 음반내는 데까지만 도와줄게. 난 평생동안 그 음반 한 장
가슴에 안고 살거야. 그러니까 너 정말 잘해야돼. 알았지?
영이 (심각해졌다)
아미 노래 한번 써봐.
영이 (다시 손가락으로 자기 코를 가르켜보인다) 내가?
아미 진정한 힙합퍼는 자기 노래를 부르는거야.
영이 멍해서 보는데, 아미 혼자 걸어간다. 우울해서 터덜터덜 걸어가던 걸음걸이가 점점 건들거려지면서.
영이 눈만 끔뻑거리며 보고 있다.
# 10 정우의 아파트 / 낮
여전히 어지럽혀져 있는 빈 거실.
그 위로 현관벨소리가 끈질기게 울리고 있다.
한참을 울리고 난 뒤에 안방에서 자다 깨어 부시시해서 나오는 정우. 술이 덜 깨서 비틀거리며 현관으로 간다.
자물쇠를 풀고 문을 연다.
그 사이로 보이는 영이의 활짝 웃는 얼굴.
정우, 반사적으로 문을 다시 닫고 절커덕 잠그고 돌아서 걸어오는데. 다시 울리는 현관벨.
정우 할수없이 다시 가서 문을 열어준다.
영이, 얼른 정우의 얼굴 앞에 불쑥 보온통을 내민다.
영이 잣죽이에요. 우리 엄마가 아빠 줄라고 끓이신건데 내가 싹싹
긁어왔어요.
정우 (한심해서 보는)
영이 드세요.
정우 (귀찮아서 받아든다)
영이 (재빨리 또 하나의 통을 내민다)
이건 동치미. 술이 안깨서 고생할 때 이 국물을 마셔봐요.
무쟈게 시원해요.
정우 너 도대체 왜 이러니.
영이 나 들어가도 되요?
정우 안돼.
영이 그럼 그냥 여기서 얘기할게요.
정우 나중에 해. 나중에 연습실에서 (밀어내려는데)
영이 나 노래 만들고 있는데요.
정우 뭘 만들어?
영이 노래. 내 노래. 한번 봐줘요. 딱 한번만. 예?
# 11 연습실
정우가 내키지 않은 채로 자리를 잡고 앉아 기타 줄을 고른다.
정우 줘봐.
그 앞에 서서 목청을 가다듬고 있던 영이,
영이 네?
정우 악보 줘봐. 노래 만들었대매.
영이 악보는 없는데요. 그냥 머리 속에 있는데.
정우 (보다가 기타 도로 내려놓고) 그럼 불러봐.
영이 목을 가다듬더니, 고개를 돌리고 팔을 돌리고 허리를 돌리고..
정우 뭐하냐?
영이 준비운동이요.
정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얼굴을 쓰다듬어 가리고) 대충 해라.
영이 (가곡을 부르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서더니 멜로디를
붙여서)
서서히 다가와. 너무 서두르지 마.
가까이 다가와. 너를 갖고 말거야.
(그리고 조용하다)
정우 (다음 소절을 기다린다)
영이 (기대에 차서 본다)
정우 뭐야.
영이 여기까진데요.
정우 (말없이 보다가) 그러니까 니가 만든 게 거기까지라고.
영이 네. ...어때요?
정우 (할말을 잃었다가) 너 거기 좀 앉아봐.
영이 (얼른 옆의 키보드에 걸터앉았다가.. 아차..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는다. )
정우 너, 왜 가수가 되려는거야?
영이 오빠가 그랬잖아요. 숨만 쉬고 살지 말라고.
정우 내가?
영이 뭐 그 비슷한 말 했어요. 나한테.
정우 그래서 숨만 안쉬고 노래도 하면서 살겠다?
영이 사실은.. (그러다가 혼자 킥킥 웃더니) 오빠 볼려구요.
정우 ....뭐?
영이 오빠 옆에 있을 수 있음 무슨 짓이래두 해요.
정우 (어이없는데)
영이 (당당한 얼굴로 보고 있다)
정우 넌. 자존심도 없냐?
영이 있어요. 많아요.
정우 넌.. (골치 아프다) 좋아하는 가수가 몇 명이나 되냐?
영이 (생각해본다) 외국 가수도 합해서요?
정우 아무나.
영이 짱 많은데..
정우 그 가수들 옆에 있을 수 있음 넌 누구한테나 무슨 짓이나
다 할 수 있다는거야?
영이 (웃음기가 없어졌다)
정우 그래?
영이 난 가수 옆에 있고 싶은 게 아니고 오빠 옆에 있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정우 그게 그 소리잖아.
영이 (시무룩해졌다) 틀린데요.
정우 너, 스무살 넘었대매?
영이 (끄덕이는)
정우 그럼 가서 니 남자친구 중에서 골라. 가서 진짜 연애를 하라고.
이게 뭐냐. 중학생도 아니고. 다 큰 처녀가.
영이, 잠자코 일어선다. 주춤주춤 돌아서더니 몇걸음 걸어간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선다.
영이 있잖아요. 전요. 머리가 나빠서 대학에도 못 갔지만요.
그렇지만 거짓말은 안해요. 왜냐면 난 비겁하지 않으니까.
오빠 노래에서 그랬잖아요.
(외우는) 우리의 비겁한 거짓말들이 오늘 너를 울리는구나.
이 차가운 도시에서 너를 혼자 버려두었구나.
정우 (말없이 보고 있는)
영이 난, 자라면서 언제나. 울고 싶을 때나 미치고 싶을 때
오빠 노래를 들었어요. 그럼 오빠 노래는 나를 살게 해줬어요.
나한테 오빠는 그냥 가수가 아니에요.
난 그냥 가수를 위해서 무슨 짓이나 하진 않아요.
(뭔가 더 말해보고 싶지만 모르겠다)
갈게요. (꾸벅 인사한다)
영이, 문쪽으로 간다. 정우 그저 보고만 있다.
영이 문을 열고 나가다가 돌아보더니
영이 저기 근데요. 그 동치미 냉장고에 넣어둬야 되요. 알았죠?
문이 닫긴다. 정우,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옆에 놓았던 기타를 집어든다. 퉁퉁 튕겨본다. 몇소절 정도 연주를 해본다. 그리고 조용히 앉아있다.
# 12 거리 / 밤
번화가.. 행인들이 지나쳐 가고 있다.
그 중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레코드 가게 보인다.
# 13 레코드 가게 안
음반을 고르는 사람들... 그 위로 서서히..노래(제목이 In the mood인가 그럴겁니다)의 전주가 시작이 되면서.. 한쪽을 보면. 거기 영이가 서서 청취용 해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어보고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아주 심취해서.. (물론 듣는 음악은 힙합)
# 14 레코드 가게 앞
아직 음악에 취해있는 영이가 가게에서 나와서 한쪽으로 걸어간다. 남아있는 가게. 그리고 잠시 후 정우가 다른 쪽에서 오더니 가게로 들어간다.
# 15 가게 내부
시디들을 주욱 훑으며 지나가던 정우가 문득 한곳에 멈춘다. 그 앞에는 ‘힙합’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힙합 코너이다.
정우 슬그머니 구경을 하려는데 저만치서 정우를 알아보고 오는 팬 여성 둘 정도. 정우 얼른 자리를 옮겨서 그들이 내미는 종이에 사인을 해준다. 그 동안 보여지는 힙합 관계 음반들...
잠시 후 정우가 다시 그 코너 앞을 지나치는데, 정우 슬쩍 주위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없는지 살피더니 후다닥, 손에 잡히는대로 여러장의 힙합 시디를 주워든다.
// 카운터
카운터의 종업원이 막 정우의 사인을 받아들고, 좋아서 정우가 내민 시디들을 계산하려다가 제목들을 본다. 의외라서 다시 정우를 쳐다본다. 정우는 좀 챙피해서 다른데를 보고 있다.
# 16 연습실
아미와 아이들이 춤 연습을 하고 있다. 원투트리훠... 낭랑한 구령이 들리며. 음악은 계속되고...
//시간경과
아이들이 쉬고 있다. 다리를 풀기도 하고. 간식을 서로 뺏어먹기도 하며. 그러다가 재은이 돌아보는 곳.
영이가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에 놓인 종이에 뭔가를 적어넣고 있다. 현재 노랫말을 적는 중이다. 잘 생각이 안나는지 잔뜩 찡그리고 있다. 으아아아.. 폭발을 하려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얼른 한줄을 써넣는다.
# 17 정우의 아파트
어지러운 거실의 한 쪽.
정우가 새로 사온 시디를 뜯어서 내용물을 꺼낸다.
플레이어에 넣고 플레이를 누르려다가 망설인다. 망설이다가 플레이를 누른다. 가만이 듣는데 저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방금 꺼낸 시디 케이스를 들어본다. 한심해서 보다가 던져버린다. 음악을 끄더니 정우가 아웃된다. 잠시 후 정우가 다시 들어선다. 플레이를 다시 누른다.
# 18 거리
다시 건널목. 파란불이 켜지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루루 건너가고 난 자리에 영이가 우두커니 서있다. 앞의 공간을 보고 있다가, 하늘을 쳐다보다가.. 노랫말을 생각 중이다.
#19 서점
제법 큰 서점의 내부. 손님들이 책을 보거나 고르고 있는 한쪽. 사전류를 파는 코너다. 진열대의 뒤로 돌아가보면 거기 영이가 퍼져 앉아서 영어사전을 펼쳐 단어를 찾고 있다. 찾았다. 부지런히 옆의 종이에 단어스펠을 하나씩 베껴쓴다.
# 20 연습실 건물 앞
정우의 지프차가 도착한다.
내리는 정우, 차에서 기타통을 끌어낸다.
# 21 연습실
문이 열리며 정우가 들어선다. 무심하게 한쪽으로 가다가 문득 멈춰서 돌아본다. 한구석에 의자 몇 개를 붙여 놓고 영이가 이상한 포즈로 구겨져서 잠이 들어있다.
정우 어이 꼬맹이
그러나 영이는 꿈쩍도 않는다. 정우, 옆의 의자를 발로 차서 소리를 내본다. 역시 반응이 없다.
정우, 할수없이 영이의 옆으로 가서 기타통으로 영이를 툭툭 찔러본다. 끄떡도 없다. 영이의 어깨를 잡아흔든다.
영이, 그제야 움찔하여 잠이 깨는가싶더니 뒤척이다가 굴러떨어져버린다. 정우, 이그..해서 본다.
영이, 덜 깬 눈으로 어리버리해서 두리번거린다.
정우 임마.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집에 가서 자.
영이, 비실거리며 일어선다. 구겨서 잔 몸이 아픈지 비틀며 찡그린다.
정우 가봐. 우리 곧 연습이야.
정우, 자기 자리로 가는데, 영이 그제야 정우를 발견했다. 아직 반쯤 감긴 눈으로 주머니를 뒤지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비칠비칠 정우에게 온다.
정우 뭐?
영이 (종이를 내민다)
정우 (얼결에 받으며) 이게 뭔데.
영이 노랫말이요. 내가 쓴 거. 다.. (하품..) 끝냈어요. 새로 썼어요.
하더니 볼일 다 봤다는 듯 비칠비칠 걸어간다. 걸어가다가 자기 앞에 벽이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닫고 다시 방향을 틀어서 문으로 나간다. 정우, 보다가 혼자 웃는다.
// 시간경과
정우의 멤버들이 연습을 위해서 악기들을 고르고 있다.
그 한쪽에서 정우가 영이의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기타 뭐하고 있어.
정우 어. (종이를 주머니에 찔러넣고.. 자기 기타를 집어들다가 문득)
야. 너 그루브한 거 좀 쳐볼 수 있겠냐?
기타 뭐?
정우 있잖아. 왜. 좀 훵키한 리듬...
기타 (어이없어서) 힙합같은 거 말야?
정우 (장난이라는 듯) 그래. 왜 요즘 애들이 하는 거 있잖아.
경식 아이 감독님 프로야 저도 너무 좋아하죠.
지난 주에도 봤어요. 그 뭐냐. 댄스가수들의 트롯 대결.
죽이든데요. 우리 정우가 거기 출연할 수 있음 저도 영광이죠.
근데.. 예. 정우가 요즘 음반 작업에 들어갔잖아요.
걔 한번 작업에 들어가면 인간 아닌 거 아시죠.
예? 아 물론 출연하면 머리는 묶어야죠. 당연한 일 아닙니까.
에에이. 저번 그 일은 와전된 거에요. 정우가 머리 안 묶는다고
방송을 펑크내다니.. 걔 그런 애 아닌 거 아시잖아요.
네.. 네...
경식이 전화하는 옆에서 철수가 수첩을 놓고 뭔가를 열심히 정리를 하고 있다.
경식 최대한 아부를 하며 전화를 끊더니 아 젠장..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경식 가수를 방송에 불러내면 노래만 시키면 될 거 아냐.
이건 꼭 코메디를 시키려구 들어. 그럼 하정우같은 놈을 델구
있는 나같은 매니저는 어떻게 먹구 살란 말야.
철수 (수첩을 보며) 다음달에 대학로에서 댄스그룹 경연대회가
있걸랑요. 일단 거기 내보내자구요.
경식 뭘 내보내. DNA를?
철수 그쵸그쵸. 그리고 뮤직비디오 말인데요. 내가 이거 잘 찍는
감독을 섭외해놨거던요. 누구냐하면 그 왜 저번에 오태우
앨범 찍은 감독 있죠?
경식 잠깐 스톱. 지금 뭔소리를 하고 있는거야. 이제 겨우 몇 달 연습 한 애들을 데리구 뭘 찍구 뭘하자고.
철수 몇 달이나 연습을 했잖아요. 그리고 벌써 곡도 네 개나 나왔고.
참 박실장님 가요 베스트 프로에 아는 분들 있죠. 음반 나오는 거하고 동시에 거기 무슨 신곡 소개같은데 내보낼 수 없을까?
경식 (어이없어) 아주 번개불에 콩을 구워먹지그래.
철수 소뿔도 단김에 빼랬잖아요. ....(생각해보다가) 근데 소뿔은
왜 빼죠. 녹용도 아닌데.
경식 (대꾸하기 싫다. )
E (핸드폰의 전화벨..)
경식 (거칠게 받아들어) 여보세요. 정우냐? 왜.
(듣다가) 문영이 말야? 걔를 왜? 어디로 보내라고?
철수, 전화하는 경식을 보고 있다.
# 23 녹음실
문이 비시시 열리더니 영이가 안을 들여다본다. 안에는 아무도 없다. 기웃거리며 들어온다. 엔지니어실 앞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녹음실 부스 내부. 그 안에도 아무도 없어 보인다.
영이 슬그머니 그 안으로 들어간다.
내부를 둘러보는 영이. 그러다보면, 마이크대가 보이고, 거기 걸쳐놓은 해드폰도 보이고.
영이, 장난기가 발동하며 해드폰을 뒤집어 쓴다. 락가수처럼 한손으로 처억 마이크를 움켜잡고, 앨비스프레슬리처럼 다리를 떨며 노래하는 흉내를 내본다. 그러다가 점점 신이 나서 아예 눈을 감더니 하정우의 노래를 락가수처럼 불러본다. (메탈 가수의 흉내를 내는 것이기 때문에 음정이나 멜로디가 정확하지 않아도 됨. 그저 악을 쓰는 흉내를 내며...)
영이 우리의 비겁한 거짓말들이 오늘 너를 울리는구나.
이 차가운 도시에서 너를 혼자 버려두었구나.
아이야. 이제 일어서. 아이야. 이제 나를 봐.
내가 있잖아. 나를 봐. 으아으아으아..
마이크를 잡고 겅중겅중 뛰고,머리를 흔들어대고, 마이크를 눕히며 온갖 폼을 잡고는 만족해서 눈을 뜨다가 정지한다.
부스 밖에서 정우가 팔짱을 끼고 영이를 보고 있었다.
영이, 얌전하게 해드폰을 벗어서 마이크대에 걸고, 조용히 걸어나가려는데, 정우가 토크백을 열어 얘기한다.
정우 그 옆에 악보 있는 거 보이냐.
영이, 돌아보면 거기 악보가 하나 걸쳐져 있다. 영이 악보를 주워들려는데.
정우 보기 전에 하나 약속해 줄 게 있는데.
영이 (악보를 집으려던 손을 멈추고 보는)
정우 그거 내가 만들었단 얘기, 누구한테도 하면 안된다.
느네 엄마아버지한테도 하지 말란 말야. 절대로. 알겠어?
영이 버엉해서 악보를 집어들어 본다. 자신이 적었던 노랫말이 아래에 적혀져있는 악보다.
영이, 멍청해서 악보를 보다가 정우를 보며
영이 오빠. 나는요.
정우 (안들렸다) 마이크 대고 말해. 뭐?
영이 (마이크 앞으로 가 서더니 마이크에 대고) 나는요. 난...
(말을 잇지 못한다)
정우 악보 볼 줄 몰라?
영이 ..그니까 이거 오빠가 만든 거에요? 내 노랫말을 가지고?
정우 (짜증내어) 그 말 하지 말랬지. 아무한테도 하지 말랬잖아.
영이 (가만이 보다가) 오빠.
정우 대충 연주해놓은 거 있으니까 들어봐.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기계를 만지는데)
영이 나요. 오빠 사랑해요.
정우 (잠깐 동작이 멈추지만 못 들은 척 하던 거 계속하는)
영이 (거의 울먹해져서) 내일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는데요.
8년 전부터 오늘까진 나, 오빠 사랑해요.
이건 진짜에요.
정우, 테잎을 들고 돌아서 다른 기계로 간다. 영이가 있는 곳에서는 정우의 등밖에는 안 보인다.
# 24 연습실
아미와 아이들이 주루루 서서 원투쓰리훠.. 음악의 전주를 듣고 있다가 춤을 시작한다.
아미와 아이들이 춤연습을 하고 있다.
경식과 철수가 옆에서 보고 있다. 여기서 연습곡은 정우가 만들어줬다는 가정하에 Nothing but a party time의 곡으로. 노래 부분은 빠진 연주 부분만으로.
경식, 귀를 기울여 음악을 듣다가 만족해서 고개를 저으며 저리로 간다.
철수, 눈을 가늘게 뜨고 영이를 보고 있다.
영이는 아주 신이 나서 앞에 선 아미를 보며 춤을 따라 하고 있다.
# 25 녹음실
사람들, 북적거리고 DNA그룹의 녹음날이다.
부스 안에서는 다른 아이들이 악보를 보아가며 각자 연습을 하는 분위기. 경식은 엔지니어 들에게 음료수를 돌리며 아주 바쁘고.
영이가 뛰어들어와 부스로 들어가려는데 철수가 잡는다.
영이 왜.
철수 이 곡 말야. 누가 만든거야? 무명씨라니. 그렇게 앨범에 이름
넣을 순 없잖아.
영이, 철수를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자기 입의 지퍼를 채우는 흉내를 내보이고 부스로 들어간다.
// 아이들 부스 안에서 노래 녹음을 하고 있다. 영이가 리드보컬.
녹음의 여러 스케치. 다시다시, NG를 내기도 하고. 아이들, 힘들어하기도 하고. 기기를 조작하는 엔지니어의 익숙한 손.
노래하는 아이들을 구경하는 이들 뒤로 정우가 슬그머니 들어서더니 뒤에 서서 구경한다.
부스 안에서 노래를 하던 영이가 정우를 발견한다. 그만 헤벌어져서 노래를 놓친다. 옆의 아이들. 뭐야 뭐야. 돌아보고.. 엔지니어 다시 조작을 하고. 영이 미안하다고 절을 해대고.. 그러면서도 정우를 보고. 그리고 한 옆에서는 철수가 가재미눈을 하고 둘을 번갈아 보고 있다.
# 26 연습실
정우의 멤버들이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
완전히 열기가 가득해서 음악에 빠져있는데..
문이 열리며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서는 영이.
뭔가 잔뜩 들고 있다. 연습에 방해되지 않게 한쪽으로 살금살금 가는 영이. 그래서 더 눈에 띄긴 하지만.
영이, 거기 테이블에 가져온 것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정우, 노래를 하면서도 신경이 쓰여서 옆눈으로 본다.
영이는 멤버들이 다 먹고도 남을만한 음식들을 늘어놓는 중이다.
족발에 보쌈에.. 야채에..
멤버들도 연주를 하며 영이에 신경을 쓰고 있다. 웃는 멤버도 있고.
영이는 아랑곳없이 보쌈하나를 맛보고 있는 중이다. 고기에 김치를 얹어 아구아구 맛나게 먹어보고 있다. 손가락을 죽죽 빨다가 정우와 시선이 마주친다. 귀여운 미소.
# 27 락 바
정우의 멤버들이 술을 마시고 있다. 악보를 서로 돌려보며 한창 토론 중이다. 경식은 옆에서 음악에 맞추어 열심히 해드뱅잉을 하는 중이고. 그리고 한쪽 의자에는 영이가 구겨박혀서 졸고 있다. 정우. 술잔의 술을 마저 단숨에 마시고는 일어서더니 영이를 그대로 잡아 일으킨다. 영이 잠이 덜 깼는데, 정우 영이를 끌고 몇걸음 걸어가서 입구로 밀어버린다.
정우 다시 돌아와 앉아 술병의 술을 따른다. 슬쩍 보면, 영이는 순순이 입구로 걸어나가고 있다.
# 28 주차장 / 밤
정우, 멤버들과 헤어져 걸어온다. 지프차에 열쇠를 넣고 열다가 문득 돌아본다. 차의 앞쪽으로 걸어가 보면, 영이가 지프 앞에 기대 앉아서 추위에 떨고 있다가 정우를 돌아본다. 정우 어이없는데, 영이는 반가워 웃더니 한손을 내민다. 정우, 보다가 손에 들렸던 열쇠를 내민다. 영이 받아채며.
영이 압수하겠습니다. 음주운전은 안되요.
그러는데, 추위 때문에 바들바들 떨고 있다. 두손을 모아 호호 불며 그저 좋다고 웃는다.
# 29 사무실
정우가 커다란 머그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와서 소파에 박혀있는 영이에게 내밀어준다. 영이, 아직도 떨고 있다. 두손으로 머그잔을 감싸 후후 마시는.
정우 집이 어디라고?
영이 부천이요.
정우 미치겠군.
술기가 남아서 얼굴을 부비고는 주머니를 뒤져서 여기저기서 천원짜리 만원짜리를 꺼낸다.
정우 거기까지 택시비 얼마나 나와?
영이 이 시간엔 총알택시밖에 없는데.. (정우 손의 돈을 건네다보며)
그거 얼마나 되는데요?
정우 (돈을 세본다. 만원짜리는 한 장밖에 없다)
영이 그걸루는 모자라겠는데요.
정우 너 정말 돈이 한푼도 없어?
영이 한푼은 있어요. 이천원 정도.
정우, 경식의 책상으로 가더니 서랍마다 빼본다. 혹시 돈이 있나해서..
영이 지금 몇시에요?
정우 (힐끗 시계 보고) 두시 넘었어.
영이 아이구 큰일났네.
정우, 대꾸도 않고 책상 위의 연필통 같은데도 뒤져보고 있다.
영이 (전혀 큰일나지 않은 얼굴로)
이건 내가 아미언니한테 들은 애긴데요. 여기 사무실 있는
건물 말이에요. 경비아저씨가 밤에는 집에 간대요.
정우 (더 찾아볼데가 없는지 둘러보고 있다)
영이 밤 한시에서 두시 사이에 집에 간대나 봐요.
근데요. 갈 때는 셔터를 다 내려버리고 간대요.
그래서 아무도 못 들어오고. 아무도 못 나간대요.
정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나서 영이를 돌아본다.
# 30 건물 입구 / 밤
정우가 부지런히 와서 본다.
실내는 모든 불이 꺼져 있어서 어두운 상태.
닫힌 유리문 밖으로 철제 셔터가 내려져있다. 밖은 어두움.
정우, 어처구니가 없어서 다른 출구를 찾아보려 하지만 소용없다.
# 31 사무실
영이가 우두커니 서서 보고 있는 곳.
정우가 화난 사람처럼 캐비넷 하나를 거칠게 열어젖히더니 거기서 담요를 한 장 꺼내어 영이에게 던진다. 영이 얼굴에 맞은 담요를 받아들고.
정우,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긴소파를 질질 끌어서 벽을 향해 붙여놓는다.
정우 넌, 여기서 자.
그러더니 일인용 소파를 질질 끌어 다른 쪽으로 간다.
영이, 담요를 안고 소파로 가서 담요를 얹어놓으며 돌아보면 정우는 다른 쪽에 자리를 잡고 이리저리 편한 자세를 잡아보려 애쓰고 있다.
영이 우리 자지 말고 얘기하고 놀아요. 네? 밤도 긴데.
정우 (영이쪽은 보지도 않는다) 자라. 자.
(외투를 이불 삼아 덮어보느라고 애쓴다)
영이 추울 땐 서로 꼭 안고 자면 디게 따뜻할텐데.
정우 (한숨 쉬어 참고) 제발 부탁인데 입 다물고 좀 잘래?
내가 오늘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아냐?
난 벌써 두시간 전에 쓰러졌어야 되는 사람이라고.
(등을 돌려 돌아눕는다)
영이, 시무룩해서 벽쪽으로 걸어간다. 스위치의 불을 내리는데, 불이 꺼짐과 동시에 정우가 벌떡 일어나 앉는다.
정우 뭐하는거야.
영이 불껐는데요. 잘래면 불 꺼야죠.
정우, 잠시 조용하다 단념하고 다시 눕는다. 영이, 자기의 자리로 간다. 벽을 향해 돌려놓은 소파의 위로 신을 벗고 기어올라간다. 거기 눕자 정우 쪽이 보이지 않는다. 담요를 덮느라고 부산스럽게 군다. 그리고..
영이 말똥말똥해서 누워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앉아 소파 등 너머 정우를 향해.
영이 자요?
정우 (괴로운 신음소리)
영이 오빠 사실은 디게 겁많죠. 그죠.
정우 (무시하기로 작정해서 말이 없다)
영이 난 락을 하는 사람들은 겁이 없는 줄 알았어요.
무대 위에서 펄펄 뛰는 거 보면 진짜 막가파들 같잖아요.
근데 오빠 보니까 쫌 웃기다.
정우 (거의 잠든 목소리) 너 조용히 안하면 복도로 내쫓는다.
영이 오빠가 힙합 쓴 거 남들이 아는 것도 겁나고.
내가 오빠를 따라 다니는 것도 겁나죠.
내가 오빠한테 결혼하자고 덤빌까봐 무섭죠.
그래서 나한테 친절하게 하지두 못하죠.
내가 안 떨어질까봐.
정우 ....
영이 근데 오빠가 제일 겁나는 건, 사실은 오빠두 날 좋아하게
될까봐 그러는거죠. 왜요? 내가 너무 이뻐서요?
아님 나보다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요?
정우는 진짜로 자는지 어떤지 아무 반응이 없다.
영이 시무룩해서 정우가 있는 쪽을 보다가 소파에 눕는다. 담요를 제대로 덮느라고 잠시 부산을 떤다.
그리고 이만치 정우가 영이쪽에 등을 보이고 구겨 앉은 곳.
정우는 어둠 속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 32 건물 앞 / 새벽
아직 어두운 기가 남아 있는 새벽에 경비가 셔터를 열고 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올라가는 셔터.
//시간경과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다. 그 앞을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차가 한 대 오더니 선다.
운전석에서 내리는 경식. 그 옆좌석에서 백기자가 내린다.
백기자는 기자용 수첩을 손에 들고 있는데. 손목시계를 본다.
경식 아침 열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오라고 그랬으니까
금방 나올겁니다. 들어가서 커피라도 한잔 하시죠.
백기자 커피 말고 딴 건 없습니까. 요즘 커피를 하두 마셔서..
경식 (기자를 안으로 안내하며) 녹차에 유자차. 소주도 있구요.
아하하하.
# 33 사무실 앞 복도
경식, 백기자를 안내해오며
경식 일단 라이브 공연으로 시작할 예정이에요.
어차피 정우는 라이브용 가수니까 말이죠.
이번에 데모 테잎 나온 거 못 들어보셨죠?
이번 건 완전히 다릅니다. 정우의 고집이 살아있으면서도
뭔가 대중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있는 거 같은 느낌 있죠.
락과 대중의 만남이라고 할까..
경식,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사무실의 문을 열려고 하는데, 안에서 문이 열리더니 영이가 나서다가 멈칫 선다.
영이는 잠에서 방금 깬 것이 확실한 모습으로 게슴츠레한 눈에 한손에는 칫솔을 들고 있다.
경식 너 여기서 뭐하는거야.
영이 (버엉해서 보다가) 여기서 잤는데요.
경식 야임마. 여기가 여관방이야. 여기서 왜 자.
하며 영이 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러다 굳는다.
거기 정우가 자다 부시시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정우 (하품을 하며) 형 왔어.
경식, 순간 자기 뒤의 백기자를 깨달았다. 경식 다짜고짜 문을 다시 닫는데. 백기자는 이미 안을 보고 영이를 보고 있다.
영이는 여전히 칫솔을 들고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서있고.
경식 (진땀이 난다) 저기 그러니까 생각해보니까 안에는 커피밖에
없는데. 요 옆에 찻집이 있거든요. 글루 갈까요?
백기자, 난처하다는 얼굴로 웃는데. 아주 흥미가 있어졌다.
# 34 건물 앞
영이가 색을 메고 달랑거리며 건물에서 나오고 있다.
버릇처럼 힙합의 리듬을 타며 걸어가기 시작하는데. 저 앞에서 기다리던 백기자가 영이를 막아선다.
백기자 안녕.
영이 안녕하세요.
백기자 (명함을 건네준다) 아가씨하고 얘길 좀 하고 싶은데..
영이 (명함을 들여다보다가 감탄해서 백기자를 본다)
아저씨 기자에요? 진짜 기자?
# 35 사무실 내부
정우, 얼굴을 부비고 앉아있고.
경식, 완전히 열이 올라서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경식 예예 스포츠 비젼에 백동수 기자요. 잘 아는 분 없어요?
학교동문이든. 술친구든 사돈에 팔촌이든 잘 아는 분 없냐고.
그 기자 입을 오늘 중으로 막아야 되는데.
아 글세. 자세한 건 알거 없고 한번 좀 알아봐줘요. 예.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수첩을 뒤진다. 그러다가 벌컥 다시 성질 이 올라서 수첩을 팽개치더니)
니가 지금 지정신이냐. 대한민국 천지에 갈데가 없어서 여기서
둘이 자? 오늘 아침 인터뷰 있는 거 알면서.
정우 깜박했어. 그리고 둘이 자다니. 말이 왜 그래.
경식 그럼 둘이 안 자고 쎄쎄쎄하고 있었냐. 밤새?
정우 (좀 짜증이 나는) 말했잖아. 차비가 없어서 잠깐 들어왓는데
셔터가 내려져서..
경식 그럼 이 망할놈아. 나한테라도 전화를 해야지.
정우 그 시간이면 형도 취해서 자구 있었어.
경식 으아아 미치겠다. 하필이면 백동수야. 차라리 안기부한테
들켰으면 좋잖아아.
(다시 수첩을 뒤지는)
정우, 한쪽을 돌아본다. 거기 영이가 얌전히 개어놓고 간 담요가 보인다.
# 36 찻집
백기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백기자 아아아. 그러니까 아가씨가 바로 DNA의 멤버였구만.
영이 네. 우리 음반 다음달에 나와요. 아저씨두 한번 들어보세요.
그 중에 첫 번째 곡이 디게 좋아요. 짱이에요.
백기자 하정우하고는 아주 친한 모양이지?
영이 정우오빠요? (수줍어지며) 네.
백기자 같은 음반사라서.. 친해졌나봐.
영이 아뇨. 그전부터 좋아했어요. 아주 오래 전부터.
백기자 아.. (왕건이다..싶은 마음을 겨우 감추며)
그렇게 오래 됐으면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겠네. 둘이 친한 거.
영이 에이. 잘 모르죠. 나혼자 계속 짝사랑한건데요 뭐.
백기자 짝사랑..
영이 그치만 괜찮아요. 사랑은 주는 것만으로 행복한 거잖아요. 그죠.
백기자 사랑..
영이 이번에 오빠 음반 나오는 것두 들어보세요. 진짜 좋아요.
이제까지 나온 마왕 중에 최고에요.
(그저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다)
# 37 도로
정우가 운전을 하는 지프차가 달리고 있다.
정우, 차 안 가득이 락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
# 38 연습실 건물 앞
정우, 차를 세우려다가 보는 곳.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에 방송 카메라를 멘 카메라맨이 찍고 있고, 그 옆에서는 리포터가 정우의 멤버 몇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멤버들은 대답을 회피하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방송리포터는 집요하다. (연예가.. 어쩌구하는 프로에서 나왔다치고)
정우, 차를 몰아 슬그머니 그 옆을 지나쳐 가면서 그들을 본다.
# 39 정우의 아파트 앞 / 밤
정우의 차가 와서 선다. 정우, 내리고.
# 40 아파트 계단
들어서던 정우가 보면. 거기 계단에 앉아 있던 철수가 정우를 보고 일어선다.
정우 이게 누구야. 꼬맹이 친구잖아.
철수를 지나쳐 올라가려는데. 철수, 정우를 막아서더니 들고 있던 스포츠 신문을 보인다.
철수 내일 아침에 전국에 깔릴 신문, 초판입니다.
정우 (받아들어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뒤적거린다)
철수 하정우. 열살 연하의 댄스가수와 밀애설.
정우 (보다가 피식 웃는다)
철수 난 웃음이 안나옵니다. 도대체 왜 그런 겁니까?
정우 뭘 왜 그래. 그리고 계속 여기서 떠들거야.
철수 아 물론 하정우씨한테는 웃기는 얘기일지 모르죠.
근데 영이한테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 영이. 그리고 우리 DNA. 이제 막 시작해야 되는 애들이
라구요. 이런 식으로 싹부터 잘라버릴 수 있습니까?
정우 (찡그려서 보는)
철수 이건 첨부터 계획하신 겁니까? 이것도 홍보전략 중에 하나였어요
정우 어이. 한국말로 해.
철수 하정우씨. 떨어져가는 별. 어떻게든 사람들 이목을 끄는 게
필요했겠지요. 이런 스캔들. 하정우씨한테는 수억짜리 홍보가
되겠죠. 것두 막 음반이 나오기 직전이니까요.
며칠 뒤에 기자회견 하실거죠. 난 그런 어린앤 모른다.
이런 극성팬땜에 내가 힘들다.
정우 아직 할말이 더 남았냐.
철수 힙합하는 가수애들까지 날 이렇게 좋아할 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런 쓰레기 음악엔 관심없다.
정우, 신문을 읽으며 서성거린다. 읽을수록 화가 나고 있다. 읽다가 말고 신문을 구겨서 팽개쳐 버린다.
그리고 분이 안 풀려서 씩씩대는데.
E (전화벨)
정우 (홧김에 집어든다) 여보세요.
영이E 오빠. 집에 있었네.
정우 (폭발할데를 찾던 중이다) 너 누구야.
영이E 영이에요. 문영이. 영희가 아니고 영이.
정우 (버럭) 너 도대체 기자들한테 뭐라고 떠든거야.
너 생각이란 게 있는 애야? 너 미쳤어?
# 42 거리 / 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하고 있는 영이.
잠자코 듣고 있다.
정우E 너 이제부터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죽을 때까지 나하고 마주치지 말란 말야. 알았어?
영이 ....
정우E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안듣겠다는거야 뭐야.
영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더니 그냥 전화기에 걸어버린다.
시무룩해서 전화통을 노려본다.
# 43 고수부지 통로 / 밤
아이들이 그려놓은 그래피티 벽화가 주욱..
사람은 아무도 없고, 조용하다. 을씨년스러운 바람만 분다.
내부를 주욱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 44 강변 / 새벽
새벽이 어슴프레 밝아오는 강변.
어디선가 원투트리훠...하는 구령이 들려온다.
보면, 영이가 강변에 혼자 서서 음악도 없이 이제까지 연습해온 댄스를 추기 시작하고 있다. 열심히 아무도 봐주는 사람이 없지만.
# 45 연습실 / 낮
아미가 몸을 푸는 동작들을 하고 있고. 그 옆에서 재은과 명주가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다.
그러는데 문이 열리며 영이가 들어선다. 말짱한 얼굴이다.
명주 너 어떻게 된거야? 신문 읽었어?
영이 엉. (하더니 들고 있던 신문을 보여준다)
재은 (조심스레) 진짜야?
영이 진짜면 좋았을텐데..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다 끝났어.
진짜가 될 수도 있었는데.
히 웃어보인다. 그러더니 들고온 커다란 종이봉지를 뒤져서 힙합 의상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아미와 아이들에게 하나씩 안겨주면서
영이 이건 아미언니꺼. 이건 명주꺼. 그리고 이건 재은이꺼.
명주 이게 뭔데.
영이 선물. 마지막 선. 물. 오늘 옷가게 관두면서 퇴직금 대신에
들고 나왔지.
재은 마지막이라니?
영이 (아미에게) 언니 미안해요. 나 이제 안나와요.
아미 뭐?
영이 매니저아저씨 한테두 전해주세요. 그동안 고마웠다.
미안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
니들두 안녕. 음반 잘 되길 바랄게.
` (벌써 문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명주 가만 있어봐. 무슨 소릴 하는거야. 누가 너보구 관두래?
매니저 아저씨가?
아미 니 맘대로 그만두는 게 어딨어. 우리 그룹은 어뜩하고.
영이 (문 앞에 서더니 갑자기 슬픈 얼굴을 하고 트롯트풍으로)
떠날 때는 마알어없이 마알 없이 떠나리라...
무대를 퇴장하는 사람처럼 인사를 보내더니 문을 닫고 나가버린다. 멍해서 보고 있는 아이들.
그 위로.
경식E 그게 마지막이었어.
# 46 사무실
경식 그러고나선 깜쪽같이 사라진거야.
얘 연락처라고는 그 옷가게 전화뿐이었는데. 거기두 관뒀대.
어뜩게 이럴 수가 있냐. 아무리 요즘 애들 지멋대루라지만
어뜩게 지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경식은 오락가락하며 흥분하는 중이고, 사무실 소파에는 철수가 시무룩하니 앉아있고. 그리고 정우가 한쪽에서 기타에 줄을 새로 끼우고 있다.
경식 (철수에게) 둘이 친했잖아. 다른 연락처는 전혀 모르는거야?
연락처를 알만한 다른 친구도 없어?
철수 있으면 벌써 찾아갔지 내가 이러구 박실장님 얼굴 보고
앉아있겠어요?
경식 하여간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다고. 보컬은 우리 아미가 하면
되고.. 그러니까 음반작업하든 거..
철수 그건 당분간 보류하기로 됐습니다.
경식 ...뭐야?
철수 첨부터 말씀드렸잖아요. 세명이 하는 그룹은 재수가 없다.
네명이 아니면 안된다.
경식 그게 도대체 누구 입에서 나온 소리야. 또 그놈의 사장
아들인지 뭔지가 한 소리지. 그치?
철수 ....아마 그럴걸요.
경식 (팔을 걷어부치며) 가자고. 내 오늘은 기필코 그 인간을 만나서
박살을 내든지 박살이 나든지 할거야. 도대체 그 사장 아들이란
작자. 이름이 뭐야. 이름은 있을 거 아냐.
철수 ... 오철수요.
경식 오철수.. 이름하곤.. (하다가 철수를 본다) 뭐라고.
철수 (우울하게) 저에요. 그 인간이.
경식 (갑자기 할말을 잃어서 철수를 보다가 정우를 돌아보고
철수를 가르키며 뭔가 말하려지만 안나온다)
정우 (기타줄을 조이며 혼자 웃고 있다)
철수 하정우선생님. 제발 부탁인데 웃지 좀 말아주세요.
선생님께서는 워낙 고상하고 고독한 락커라서 죽었다 깨도
이해못하시겠지만요. 저는 그렇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어요.
보통 사람들은 다 그러고 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다구요.
정우, 말없이 철수를 본다.
철수, 우울하게 일어서더니 우울하게 사무실에서 나간다.
경식,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 되서 물병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다. 정우, 딩딩 기타를 치기 시작한다.
# 47 락바
사람들이 별로 없는 한적한 시간.
락 음악이 들리고. 그리고 바 쪽에 정우가 혼자 앉아있다.
정우 앞에 놓여져있는 술. 정우, 들어 마시려다가 멈춘다. 술잔을 들여다보다가 종업원을 불러 뭐라 말한다. 종업원 가고. 정우, 술잔을 주욱 밀어놓는다. 새삼 뒤를 돌아본다. 정우네가 늘 앉던 자리는 비어있다.
종업원이 정우에게 콜라를 가져다 준다. 정우, 맛없게 마신다.
# 48 주차장
정우, 어슬렁거리며 걸어온다.
세워져있는 정우의 지프차. 정우, 문을 열려다가 괜히 지프차를 한바퀴 걸어서 돌아본다. 물론 영이는 없다.
# 49 정우의 아파트
거실... 비어있다.
# 50 연습실
비어있다.
# 51 사무실 건물 앞 / 밤
셔터가 내려져있다.
그리고 그 옆에 정우가 혼자 벽에 기대 서있다.
그 앞을 지나쳐가는 차의 불빛에 우울한 정우의 얼굴이 가끔 드러나보이고...
# 52 소극장 근처 / 낮
경식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들어간다.
# 53 소극장 내부
우당탕거리며 들어선 경식. 내부는 비어있다.
경식 주위를 둘러보며
경식 정우야. 하정우. 어딨어 임마.
관객석의 구석쯤에 앉아있던 정우. 기타를 퉁기고 있었다.
정우 여기.
경식, 우당탕 달려다가가며
경식 뭔 소리야. 내 핸드폰에 남겨 놓은 말, 그게 뭔 소리냐고.
정우 들었으면 알겠네. 이 극장에서 할거야. 콘서트.
경식 콘서트? 갑자기 웬 콘서트. 나도 모르게 무슨 콘서트으..
정우 이 극장 주인, 형도 알잖아. 영기형 말야.
좋다구 했어. 오늘 저녁부터 연습할거야.
경식 (답답한 마음에 옷깃을 풀어헤치고는) 정우야.
정우 어. (기타를 계속 조율하는)
경식 이런 말 하긴 싫은데., 우리 현실을 냉정하게 보자. 응?
정우 (미소만.. )
경식 솔직히 너 지금 이렇게 갑자기 콘서트한다구 해도..
그게 아무래도.. (말을 못 꺼내는데)
정우 관객이 없을거라 이거지?
경식 ...
정우 나의 저번 앨범은 실패했고. 아직 새 앨범은 안나왔고.
그런데 무슨 콘서트냐. 누가 보러 와주겠냐. 그 얘기잖아.
경식 .... 그래. 현실이 그렇다고.
정우 형. 예전에 우리 마왕 처음 시작할 때 생각나?
그땐 극장도 못 잡아서 거리에서 공연하고 그랬잖아.
경식 (물끄러미 보다가) 그랬지. 앰프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었고.
정우 그러다가 신촌에서 처음으루 무대 잡아서 했잖아.
경식 (추억에 잠기는) 그래. 그 끝내주는 공연 말이지.
그 때 관객이 몇 명 왔었는지 기억하냐?
둘이 마주보더니 동시에
정우, 경식 여섯명.
그래놓고 웃는다. 경식,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경식 그래 좋아. 까짓 어떻게 해도 여섯명 보다야 많이 오겠지.
좋아. 좋다구. 근데.. 그래도 이젠 그때의 이름없는 하정우가
아니잖냐. 그러니까아.. 약간의 홍보는 해야지. 좋아. 맡겨.
내가 누구냐. 인간 하정우와 십년을 개겨온 박경식이잖아.
그러니까..
정우 방송홍보라면 시작했어.
경식 ... 뭘 시작해.
정우 (시계를 보며) 올 때 됐는데.
경식 뭐가 와.
정우 돌아본다. 거기 입구로 들어서는 방송팀. 연예가어쩌구의 팀이다. 전에 보았던 리포터와 카메라 등이 들어서고 있다.
손님들이 카운터 앞에서 기다리기도 하고, 몇 탁자에서는 먹기도 하고. 그리고 카운터 내부에서는 점원 두어명이 손님들을 상대하고 있다.
# 56 매장 주방 내부
감자 튀김을 건져내는 손.
한쪽에서는 햄버거를 만드는 종업원이 있고.
바쁘게 일하는 분위기.
그리고 저만치에서 나오는 영이. 제복을 입고 닭이 잔뜩 쌓인 그릇을 들고 있다.
영이, 음악에 맞추어 흔들거리며 마악 튀겨낸 감자를 받아서 진열대에 쏟아넣고. 몇걸음 가다가 힙합 스텝도 좀 걸어보고. 다음 일을 한다. 그러다 흘낏 보면 종업원 아이 둘이 한쪽에 있는 텔레비젼을 보며 서있다. 영이 관심없이 튀긴 닭을 한바구니 들고 그들 뒤를 지나쳐 가다가 멈춰선다. 텔레비젼에서 들리는 정우의 노래소리. 영이, 모니터 앞으로 가서 본다. 모니터에는 정우가 라이브로 노래하는 모습이 잠시 비춰지고 있다. (혹은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이내 화면은 바뀌고 엠씨가 스튜디오에 나오더니
엠씨 하정우씨하면 정통 락커로서의 고집스러운 음악세계를 추구해온
가수죠. 그 하정우씨가 이번에 깜짝 콘서트를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얼마 전 신인 힙합 가수와 친하게 지낸다.. 뭐 이런 이야기도
떠돈 적이 있었는데요. 이성수리포터가 만나보셨다면 서요.
리포터 예. 하정우씨는 원래 인터뷰를 안하기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 하정우씨를 아주 어렵게 만나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랄만큼 솔직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보시죠.
화면이 바뀌더니 극장 안에 앉은 하정우의 얼굴이 바로 비춰진다.
리포터E 이번 콘서트의 제목이 아주 흥미롭든데요.
정우 뭐 흥미로울 건 없습니다. 제목 그대롭니다.
락과 힙합의 만남.
리포터E 하정우씨라면 정통 락. 그 중에서도 메탈 쪽을 주로 해오신
분인데 힙합 장르와 공연을 하게 된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거든요.
정우 같은 음악인데요. 뭐. 그리고 이번에 같이 공연하게 될
힙합 그룹은 제 곡도 하나 부를 겁니다.
놀라서 입을 벌리고 보고 있는 영이. 그 위로 계속되는 인터뷰.
리포터E 하정우씨의 곡이라구요? 하정우씨가 힙합곡을 쓰셨다는건가요?
정우E 예. 정통힙합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한번 와서 들어보세요.
리포터E 놀라운 일인데요.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셨는지..
// 다시 화면. 이번에는 가득차게.. 정우의 얼굴.
정우 원래 이 곡은 힙합 그룹의 한 멤버가 노랫말을 쓴건데요.
그 친구에게 뭔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서 만들게 됐죠.
리포터E 그 멤버라면 혹시 저번에 소문이 났던 그 신인가수가 아닌지..
정우 맞습니다. 신문에는 밀애중이라고 났는데. (웃음)
아직 연애까진 못갔구요.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이라고 할까요. 이번에 같이 공연하는 걸로 시작해보고
싶은데..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영이, 완전히 얼이 빠져서 보고 있다.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닭튀김 중에 하나를 들어서 뜯어먹기 시작한다. 완전히 멍청해서.
# 57 소극장 앞 / 낮
[락과 힙합의 만남] 이라는 현수막? 포스터 등이 걸려져 있고.
하정우, DNA라는 이름도 보이고..
# 58 극장 내부
아직 공연 전. 무대 장치를 하느라고 바쁜 사람들...
어디선가 기계실에서 조명 몇번 돌려봐. 등등의 소리도 들리고
조명이 이리저리 켜졌다 꺼졌다..하고..
경식이 뭔가 바쁜 듯 뛰어서 지나치기도 하고.
무대 한쪽에서는 아미와 재은, 명주 등이 브로킹 선을 맞추어 보느라 부산하고..
마왕의 멤버들이 악기들을 들고 들어서기도 하고..
그러다가 시간경과가 되면서. 극장 내부에는 아무도 없다.
인부 한명이 무대 위에 아직 놓여져있던 작업용 사다리를 들고 무대 뒤로 사라진다.
정우가 혼자 객석에 서서 무대를 올려다보고 있다.
# 59 분장실
아미와 명주, 재은이가 각자 분장들을 하고 있거나 춤 동작을 다시 외워보고 있거나...
명주가 거울을 보며 분장을 하다가 돌아본다.
명주 계속 거기 있을 거에요?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철수.
명주 우리 옷 갈아입어야 되요.
철수 아.. 예. (일어서더니 힘없이 문으로 간다)
아미 이제까지 연락없는 거 보면 안 올건가봐요.
철수 예..
재은 너무 걱정하지 마요. 우리 잘 할 수 있어요.
철수 예. 압니다.
철수 문을 열고 나간다.
재은 (아미를 돌아보며) 우리 정말 잘 할 수 있는거지?
명주 영이는 정말 안 올건가?
아미 나도 누구한테 좀 물어봤음 좋겠다.
# 60 무대
정우, 무대 위로 올라선다. 이리저리 거닐며 무대의 넓이라도 재고 있는 모습인데..
어디선가 기계실의 토크백이 열리더니
영이E 아아.. 마이크 시험중입니다. 아아..
정우,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객석은 어둡고.. 무대 위에만 시험용 조명이 몇 개 켜져있는 상태.
영이E 내 말 들립니까? 들리면 오른 손을 들어주세요.
정우 (웃고 한 손을 든다)
영이E 좋습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
내가 누군지 알겠습니까? 알면 또 한손을 들어주세요.
정우 (웃으며 나머지 손도 든다)
영이E 두번째 질문. 언젠가 나보고 다시는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을 취소하시겠습니까?
정우 (양손을 든 채 난처해서 어두운 위를 본다)
영이E 취소할거면 다리 하나를 들어주세요.
정우, 혼자 웃다가 다리 하나를 들어보인다.
조용하다. 정우, 중심을 잡느라고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지만 더 이상 말이 없다.
정우, 다리를 내리고 손을 내리고.. 그리고 기다리다가 무대에서 내려가려고 끝으로 나오는데.
영이E 왜 그랬어요?
정우, 눈을 가늘게 뜨고 보면. 객석의 저 위에 영이가 혼자 서있다.
정우 뭘 왜 그래.
영이 텔레비젼에 나와서 그런 말을 한거요. 그리고 이런 콘서트
여는 거요.
정우 (생각해보는 척)
영이 그러지 않아도 됐어요. 안그래도 난 오빠 팬인걸요.
오빠가 어떻게 해도 나 쉽게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어요.
정우 그냥 팬을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겠지.
영이 (글썽해서 보는)
정우 근데 니가 없으니까 너무 심심해서 말야. 술맛도 없잖아.
그래서 무슨 짓이든 해야했다구.
영이 보다가 치이.. 웃는데,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다.
정우, 어쩐지 머쓱하고 쑥스러워서 딴데를 본다. 역시 웃고 있다.
그 위로 락의 음악이 시작되면서..
# 61 소극장 외경
관객들이 표를 사서 몰려들고 있다.
음악은 계속되고..
# 62 극장 내부
정우의 마왕 연주가 극에 달하고 있다. 관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열광적으로 같이 박수를 치며 흔들고 있고.
광적인 정우의 노래가 끝나자 와아 박수를 친다.
정우, 마이크를 잡더니..
정우 다음은 완전히 다른 음악의 세계가 이어집니다.
여기 오신 분들 중에 아직 이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한번 이 리듬에 몸을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여러분. DNA입니다.
정우가 한손을 내밀어 안내를 하고. 와아 박수..
객석에 앉아 있는 철수. 따라서 박수를 치다가 문득 자기 옆을 본다. 거기 이쁘장한 여자가 앉아있다.
철수 (여자에게) 하정우팬이신가요?
여자 아닌데요. 그냥 지나가다 들렀는데요.
철수 네에..
무대 위에서는 DNA가 달려나와 각자 자리를 잡고 선다.
그 중에는 영이도 있다.
철수 다시 여자를 돌아보더니
철수 혹시 제주도 가보셨습니까? 거긴 실연당하고 나서 가기에 딱
좋은 곳이거든요. 공짜 숙식표가 두장 있는데. 생각없으세요?
여자 황당해서 철수를 보고, 좀 자리를 멀찍이 떨어져 앉는다.
박수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무대 위의 DNA 공연이 시작된다.
연습했던 곡이다. 그들의 발랄하고 자신있는 공연 모습.
그리고 춤을 추며 보컬을 소화하는 영이. 문득 영이 무대의 한쪽을 본다. 정우가 그 옆에서 보고 있다가 한손으로 짧게 경례를 해보인다.
영이 행복하게 다음 동작으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