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증직贈職과 수직壽職
1. 증직
2. 수직
증직이란 국가에 공로가 있는 관인官人, 현달한 관인, 효행이 뛰어난 인물 등이 죽은 뒤에 관직이나 관계官階를 받거나, 죽기 전에 받은 그것보다 높여 받는 명예제도다. 관직이 없는 사람에게는 끼친 공로에 알맞은 관직을 부여했다. 공이 없는 사람도 자손이 종2품 가선대부 이상의 관직에 오른 이가 있으면 그의 3대를 거슬러 증직을 내렸다. 이를 3대추증이라고 한다.
수직은 80세 이상 된 노인에게 제수하던, 직무가 없는 벼슬散職이다. 경로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제도다. 이 제도는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상놈은 나이가 벼슬’이라는 말이 있다. 상인이라도 나이만 많으면 벼슬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노인을 영감이라고 한 것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옛날에 정2품 벼슬아치를 대감, 종2품 아래 벼슬아치는 영감이라고 했다. 영감이란 원래 실직 고관을 지칭하는 경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영감님이라고 존칭접미사 ‘-님’까지 붙여 호칭하지만, 속사정은 경칭이 아닌 평칭이다.
비록 명예직이지만, 증직이나 수직을 내려 받는다는 것은 대단한 명예다. 조선은 효도는 ‘백행의 근본’이란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몸과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여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몸을 세우고 도를 행하여 다음 세대에 이름을 날려서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의 마침이다’라는 『효경』의 말씀은 철들자마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금과옥조였다. 벼슬을 하면 반드시 부모가 누구라는 것을 드러냈다. 이 책도 선조들을 소개하는 자료이므로 예외가 아니다. 입신양명은 결국 부모를 드러내는 방편이라는 풀이가 된다. 증직이나 수직이 직책 없는 산직이라 해도 벼슬임은 틀림없고, 그렇게 해서 부모의 이름을 드러내게 됐으므로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는 없다. ==93쪽==
1. 증직
[표6] 증직일람贈職一覽
순 휘 생 몰 아버지 시기 증직 사유 비고
1 양돈 墩 1461~1532 자유 子由 중종 통정 동부승지 3대추증 사마
2 공영 公永 ~ 감 堪 명종 통훈 제용감 정 3대추증 통덕랑공파
3 윤 潤 ~ 공영 公永 명종 통정 참의 3대추증 통덕랑공파
4 영재 英材 1544~1584 윤 潤 선조 가선 참판 3대추증 통덕랑공파
5 사형 士衡 1547~1599 홍 洪 선조 통정 도승지 창의공신 문과
6 시진 時晉 1573~1615 사형 士衡 광해 통정 이조참의 충절 문과
7 여발 汝發 ~ 득춘 得春 광해 통정 참의 3대추증 통덕랑공파
8 무남 茂南 1616~1678 희적 希迪 효종 통훈 정악원 정 3대추증 한림공파
9 여규 汝珪 1637~1702 무남 茂南 숙종 통정 참의 3대추증 한림공파
10 득거 得擧 1664~1702 여규 汝珪 숙종 가선 형조참판 3대추증 한림공파
11 여매 汝梅 1601~ /? 시진 時晉 효종 통훈 장악원 정 3대추증 어은공파
12 염거 廉擧 1659~1707 여매 汝梅 숙종 통정 좌승지 3대추증 어은공파
13 대근 大根 1682~1753 염거 廉擧 숙종 가선 호조참판 3대추증 어은공파
14 여집 汝楫 1599~1668 시익 時益 효종 통훈 장악원 정 3대추증 중산파
15 문거 文擧 1617~1678 여집 汝楫 현종 통정 좌승지 3대추증 중산파
16 이기 履基 1648~1717 문거 文擧 숙종 가선 호조참판 3대추증 중산파
17 정기 鼎基 1644~1709 문거 文擧 숙종 통정 좌승지 3대추증 중산파
18 금옥 鈺鈺 1670~1709 정기 鼎基 영조 가선 호조참판 3대추증 중산파
19 여송 汝松 1591~1615 시우 時遇 광해 통훈 감 정 3대추증 진사공파
20 준거 俊擧 1626~1674 여송 汝松 현종 통정 참의 3대추증 진사공파
21 담 湛 1650~1711 준거 俊擧 숙종 가선 참판 3대추증 진사공파
22 극형 克兄 1733~1783 복영 復榮 영조 가선 동지중추부사 ? 쌍매당공파
23 종철 宗喆 1753~1822 정식 挺湜 정조 통훈 사헌부감찰 ? 어은공파
24 종해 宗楷 1744~1815 언 堰 정조 조봉 동몽교관 학행 어은공파
25 한복 漢福 1740~1783 응윤 應潤 정조 통훈 사복시 정 3대추증 통덕랑공파
26 종찰 宗察 1768~1834 한복 漢福 순조 통정 좌승지 3대추증 통덕랑공파
27 익환 益煥 1797~1845 종찰 宗察 헌종 가선 호조참판 3대추증 통덕랑공파
28 천수 天壽 1779~1822 종언 宗彦 정조 조봉 동몽교관 학행 한림공파
29 집하 楫河 1800~1855 천수 天壽 철종 조봉 동몽교관 학행 한림공파
30 재관 在貫 1779~1855 유엽 由燁 철종 가선 용양위부호군 학행 돈암공파
※ 이 표의 관직은 제수한 여러 관직 중 상위 품계만 밝힌 것임.
※ ‘가선’은 가선대부, ‘통정’은 통정대부, ‘조봉’은 조봉대부, ‘통훈’은 통훈대부의 약칭.
[표6]를 보면 대부분 수직壽職으로 인한 3대추증이고,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내려진 증직은 몇 분 안 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어은공사형께서는 임진왜란에 창의하신 공로로 선무원종2등공신 ․ 증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겸 지제교 경연참찬관 ․ 춘추관수찬 ․ 예문관직제학 ․ 상서원정의 관직을 내렸다. 돈와공종해에게는 돌아가신 뒤에 학행을 기려 조봉대부 동몽교관이 증직됐고, 역시 학행이 뛰어났던 한림공파의 천수天壽 ․ 취계공집하楫河 부자분에게도 같은 증직이 내려왔다.
주지하다시피 3대추증은 종2품 가선대부 이상의 관직을 얻으면, 그 경위야 어찌됐건 3대추증의 은전을 베풀었다. 추증의 규례는 가선대부에 오른 당사자의 아버지는 같은 품계의 증직이 베풀어지고, 조부는 한 단계 아래인 통정대부(정3품 당상), 증조부는 한 단계 낮춘 통훈대부(정3품 당하)가 내려진다. 이 규례는 조문화된 규정이다.
참고로, [표6]을 보면 화양공여매이 돌아가신 해가 족보에는 1655년(효종 6)으로 돼 있는데 공의 아드님 승지공염거廉擧은 1659년(효종 10)으로 나와 있다. 누군가 한 분의 기록은 오류일 것이다. 현존 문헌으로는 밝힐 방법이 없다. ==94쪽==
[표6]에 정리된 어른 가운데 상당한 부분은 다른 장에서 행 적을 소개했으므로 다시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다른 분들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어 안타깝다. 또, 기록 가운데 참의 혹은 참판, 감정監正으로만 소개하고 어느 관아 직책인지 밝히지 않은 게 더러 있다. 참판은 육조의 종2품 관직으로. 각 조曹의 2인자다. 그래서 육조의 장관인 판서를 정경正卿, 차관인 참판을 아경亞卿이라고 했다. 참의는 육조의 정3품 당상관직이다. 각 조의 차차석으로, 판서나 참판을 보좌했다. 증직일 경우,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아 호조참판 아니면 호조참의일 개연성이 높다. 감정은 제용감 ․ 선공감 ․ 사재감 ․ 군자감 같은 관이의 정正이란 직책이다. 정은 해당관아의 제2인자로 정3품 당하관이다.
[표7] 수직일람壽職一覽
순 휘 생 몰 수壽 아버지 수직 비고
1 양공신 公信 1493~1565 73 돈 墩 가선 동지 한림공파
2 득춘 得春 1578~1664 87 영재 英材 가선 동지 통덕랑공파
3 극일 克逸 ~ ? 여발 汝發 가선 동지 통덕랑공파
4 만기 萬基 ~ ? 득거 得擧 가선 동지 한림공파
5 회영 會榮 1681~1767 87 이기 履基 가선 동지 쌍매당공파
6 주우 柱宇 1685~1764 80 담 湛 가선 동지 진사공파
7 진우 鎭禹 1686~1769 84 경기 景基 통정 첨지 쌍매당공파
8 한준 漢儁 1710~1794 84 옥 鈺 가선 동지 쌍매당공파
9 육 堉 1716~1797 82 윤태 允泰 통정 첨지 한핌파
10 정식 廷湜 1729~1823 95 대근 大根 숭정 동지 어은공파
11 세표 世標 1731~1820 90 한창 漢昌 통정 첨지 쌍매당공파
12 춘해 春楷 1722~1865 94 원 垣 통정 첨지 어은공파
13 재성 在聖 1776~1857 82 형희 亨熙 통정 첨지겸 용양위오위장 쌍매당공파
14 종필 宗弼 1785~1864 80 명신 命臣 통정 첨지겸 용양위오위장 한림공파
15 재수 在壽 1808~1892 85 우화 遇華 통정 첨지겸 용양위오위장 쌍매당공파
16 재춘 在春 1807~1877 71 도수 道壽 통정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쌍매당공파
17 정환 正煥 1829~1909 81 수장 秀樟 가선 동지 한림공파
18 재근 在根① 1843~1904 62 익환 益煥 통정 첨지 통덕랑공파
19 재현 在鉉 1833~1916 83 칠환 七煥 통정 첨지 한림공파
20 재휴 在休 1823~1902 80 중환 重煥 통정 첨지 한림공파
21 재근 在根② 1866~1942 77 정환 釘煥 가선 동지 통덕랑공파
22 석중 錫中 1836~1901 66 재우 在佑 가선 돈녕부도정 쌍매당공파
23 석렬 錫烈 1827~1914 88 재광 在光 통정 첨지 쌍매당공파
24 종호 宗虎 1842~1914 72 재보 在輔 통정 첨지 돈암공파
25 언영 彦永 1842~1924 83 석원 錫元 통정 첨지 쌍매당공파
26 도영 道泳 1832~1910 79 석귀 錫龜 xhd정 첨지 쌍매당공파
27 경택 敬澤 1841~1912 72 석중 錫中 통정 중추원의관 돈암공파
※ ‘가선’은 가선대부, ‘통정’은 통정대부, ‘조봉’은 조봉대부, ‘통훈’은 통훈대부의 약칭.
2. 수직
수직이란 조선 시대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 주었던 명예직이다. 그래서 노인직이라고도 했다. 유교적인 경로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시행한 것으로, 실직은 없고 산직散職 품계를 내렸다. 이것은 세종 때부터 시작한 제도로 1481년(성종 12)에 법제화하여 『경국대전』에 명문화됐다. ==95쪽==
이 제도는 각도 관찰사가 양인 ․ 천인을 가리지 않고 70세 이상의 노인을 가려 예전의 수직 수여 여부를 조사한 후 이조에 보고하여 품계를 주도록 했다. 그러나 80이 지나도 안 내릴 수 있다. 집안에서 아뢰지 않았는데도 조정이 알아서 저절로 내려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수직은 가장 낮아도 정3품 통정대부, 그 위는 종2품 가성대부다. 이미 품계를 가진 자는 1계급을 올려줬고, 당상관은 임금의 특지로 제수했다. 관직은 통정대부면 첨지중추부사, 가선대부면 동지중추부사다. 흔히 첨지 혹은 동지라는 말로 줄여 지칭은 이 관직을 가리킨다.
[표7]은 족보에 오른 우리 선조들의 수직자 명단이다. 수직의 은전을 입었는데도 빠진 어른이 있을 수 있다. 족보에 기록된 분 가운데 매관매직이 자행되던 시기의 어른들은 이 명단에서 제외했다. 여기에는 60세에 못 미치는데도 수직으로 기재된 분이 있다. 다음은 수직을 받은 어른들의 행적이다.
1
회와공悔窩 공신公信
悔窩公 규형圭衡 회와悔窩1493(성종 24)~1565(명종 20)
남원양씨 중 맨 처음 수직에 오른 분이다. 공의 행적은 제3장에서 다뤘으므로 여기서는 수직에 오른 인과만 따지기로 한다. (p.35 참조)
족보는 행가선行嘉善으로만 나와 있다. 행직行職으로 가선에 올랐다는 뜻이다. 수직이 아닌 실제로 가선에 올랐다면 직함이 있어야 마땅하다. 수직이기 때문에 가자만 밝혔을 것이다.
성종 계축癸丑에 태어난 공은 도학이 일세에 떨쳤다. 중형인 백운공말거사와 우애가 지극했으며 하서 김인후°와 양곡 소세양°과 교유했다.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96쪽==
공의 유사遺事에 나오는 말이다. 공의 아버지 매당공돈의 묘갈에도 ‘공신은 학행이 있으며, 동지중추부사다’하고 했고, 조부 집의공자유 묘갈도 같은 내용이 들어 있으며, 증조이신 판관공연 비음기도 마찬가지로 손록孫錄에 그렇게 나와 있다. 동지중추부사임은 분명한데 수직인지 실직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문제는 가선대부까지 오르는 과정이 없다. 실제로 동지중추부사의 지위에 계셨다면 관례에 따라 3대추증이 이뤄져야 한다. 그런데 그게 없다. 아버지 매당공에게만 정3품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 증직이다. 이것은 격례에 어긋난다. 마땅히 아버지는 아들과 동격으로 종2품 가선대부, 조부는 정3품 통정대부의 증직이어야 맞다. 그런데 조부에게 내려갈 증직이 아버지에게 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대로 소개할 수밖에 없다.
[세계표12] 통덕랑공파 (13~21세). 동지공 (득춘) 가계
2
동지공同知 득춘得春
양보陽甫1578(선조 11)~1664(현종 5)
공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으므로 3대추증의 은전이 내렸다. 아버지영재는 가선대부 참판, 조부윤는 통정대부 참의, 증조공영는 통훈대부 제용감 정이다. 배위는 전의이씨, 사간 이기우李箕遇 따님이다. 2남2녀, 참의공여발汝發 ․ 여혁汝爀은 아드님, 곽준郭準 ․ 김화국金化國은 사위다. 묘는 임실군 둔남면 주천리 황둔산에 양위분이 있다.
3
극일克逸
생졸 미상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다. 참의공여발 둘째아드님이자 동지공득춘 손자다. 생졸 연대는 알 수 없다. 배위는 전주이씨, 3남을 뒀다.
4
만기萬基
생졸 미상
참판공 득거의 둘째아드님이다. 수직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다. 3대추증의 은전으로 아버지 참판공득거에게는 가선대부 오위도총부총관 ․ 형조참판, 참의공여규에게는 통정대부 참의, 증조 참봉공무남에게는 통훈대부 장악원 정의 증직이 내렸다. 배위는 해주오씨, 1남2녀를 뒀으나 아드님급汲의 무사로 절손됐다. ==97쪽==
5
삼성당공三省堂 회영會榮
참조❚(p.72) 제4장 과거 사마편
6
동지공同知 주우柱宇
명여命汝1685(헌종 5)~1764(영조 40)
참판공담湛의 둘째아드님으로 익산시 금마면 황복골에서 태어났다. 수직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됐다. 3대추증으로 아버지는 가선대부 참판, 조부 종사랑공복거復擧은 통정대부 참의, 증조여송汝松는 통훈대부 군자감정의 증직을 받았다. 성천공시우이 능창군추대사건°(1615년, 광해군 7)에 연루돼 고문 받을 때, 의금부 앞에서 단식하다가 자진하신 감정공여송이 곧 공의 증조이시다.(p.109 참조) 그때 감정공은 아들이 없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우 종사랑공여계汝桂의 맏이준거俊擧를 입계했다. 동지공은 다만 천수만 누린 것이 아니라 익산 양씨의 경제적 기반을 닦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당시 공이 일군 재산이 5천 석이었다는 말이 전한다. 그 재산은 대대로 이어져 자손들이 부를 누렸다. 온갖 고초를 겪었던 고조 성천공의 묘갈을 당시 이조판서 홍계희°로부터 받아온 것도 동지공이다.
7
오졸재공迂拙齋 진우鎭禹
성부聖敷 오졸재迂拙齋1686(숙종 12)~1769(영조 45)
배위는 전주이씨 통덕랑 이옹李顒의 따님으로 2남을 뒀다. 생원공진수 ․ 진엽震燁이 그 아드님이다. 양위분 묘는 완주군 우북면 연봉정
.
[세계표 13] 쌍매당중파 (17~28) 오졸재공 가계
동계면 구미리에서 경기景基의 외아드님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돼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님(안동권씨 선교랑 대수大受의 따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자랐다. 10살 이전부터 헛말을 안 했고, 어머니의 뜻과 다르다고 판단되면 움직이지 않았다. 자라서는 학문에 정진, 향리에서 대유大儒로 추앙을 받았다. 당시 남원양씨 문중에서는 백수공응수 ․ 삼성당공회영 ․ 안암공춘태, 그리고 오졸재공 같은 대유가 있어서 학문적 전성기를 구가했다.
공이 81세이던 1766(영조 42)년에 받은 수직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그 뒤 3년 만에 영면하셨다. 유림에서는 공을 비롯한 9위를 서룡사에 배향 했으나 배향된 지 5년 만에 훼철됐다.(p.166 참조) 배위는 전의이씨, 봉직랑 이광헌李光憲의 따님, 1남을 뒀다. 양위분은 동계면 관전리 선영에 모셨다. 공의 초상 때 진사 한치명°이 바친 제문이 전한다. 다음은 승지 김영한金甯漢의 「통정대부첨추공위진우며갈명通政大夫僉樞公諱鎭禹墓碣銘」 뒷부분이다. ==98쪽==
… 공의 5대손 석승錫升은 80의 대질大耋로서 멀리 찾아 묘에 새길 글을 내개 청하기에 여러 번 사양하다가 행장을 살펴보니 공은 낳은 지 7일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지성이 있어서 음식과 유희도 오직 어머니의 명에 따랐고, 어머니가 싫어하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하지 않았다. 10세 이전에 망언과 경거가 없어 어른과 같았다 한다. 평생토록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음을 슬프게 여기고 제사 때에 슬피 울었으며 그 달이 다 지날 때까지 술과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젊어서 아들을 기르지 못하고 연이어 아홉 차례의 슬픔九慽을 보았는데, 두 아들이 열흘 사이에 함께 죽었으니 참으로 보통의 정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 어머니의 마음이 상하실까 두려워하여 슬픈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서는 공의 나이가 이미 쇠하였으나 그 집례를 엄하게 하였고, 애훼哀毁는 지나침에 이르렀다. 노복을 다스림에는 너그러웠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부드러웠고 이웃과 친척을 두루 도왔으며 여기에 횃불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수십가가 되었다. 또한 학문을 받드니 고을의 선비가 여러 차례 천거를 했는데 공은 힘써 마다했다. 뒤에 늙음을 우대하녀 통정의 품계에 오른 은전을 입으니 아버지를 생각하여 차마 그 영화를 누리지 못하고 이마에 옥관자와 허리에 붉은 띠를 대지 않고 세상을 마쳤다. …
8
동지공同知 한준漢儁
사영士英1710(숙종 36)~1794(정조 18)
옥鈺의 넷째아드님이다. 공이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로 제수돼 3대추증의 은전이 내렸다. 아버님은 호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 ․ 오위도총부부총관, 조부 최락당공정기鼎基은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증직이다. 증조 승지공문거은 삼성당공으로 인해 이미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증직이 있었으므로 생략됐다. 배위는 장수황씨, 2남2녀를 뒀다. 통덕랑 세식세식世式은 큰아드님이고, 둘째아드님 세문세문世文은 중부仲父 한상漢相에게 입계했다. 이환규李桓圭 ․ 이한익李漢翊은 사위다.
9
첨지공僉知 육堉
언후彦厚1716(숙종 42)~1797(정조 21)
윤태允泰의 큰아드님이다. 어려서부터 학업에 정진, 성리학으로 대성하여 당시 학명이 높았던 황윤석°과 깊은 교분을 나눴다. 70이 넘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강론을 끊이지 않았으며, 틈틈이 시문을 벗 삼았다. 80이 되던 1785년(정조 9)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증직이 내렸고, 2년 뒤에 영면에 들었다. ==99쪽==
배위는 분성이씨, 7남2녀를 뒀다. 종두宗斗 ․ 종진宗鎭 ․ 종하宗夏 ․ 복진復鎭 ․ 종인宗寅 ․ 종찬宗讚, 종민宗珉은 아드님, 김흠金欽 ․ 송여흠宋汝欽은 사위다. 양위분 묘는 동계면 목과정木果亭에 있다.
10
노송공老松 정식挺湜
성연聖淵 노송老松1729(영조 5)~1823(순조 23)
[세계표 14] 어은공파 (17~22세). 노송공 (휘 정식) 가계
묵은공默隱, 대근大根의 넷째아드님이다. 효우가 지극하고, 예로써 조상을 받들었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온화한 웃음을 띠었다고 전한다. 수직으로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됐는데 남원양씨 가운데에서는 가장 높은 품계다. 3대추증으로 묵은공은 가선대부 호조판서 겸 의금부동지사 ․ 오위도총부도총관, 조부염거廉擧는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증조부인 화양공여매은 통훈대부 장악원 정에 증직됐다.
원배 도강김씨는 1남1녀를 남기고 39세로 별세하고, 계배는 청주한씨로 3남3녀를 뒀다. 큰아드님 통덕랑 종철宗喆은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이고, 그 아래로 종억宗億 화은華隱 ․ 종원宗元 ․ 종직宗稷은 모두 통덕랑, 유진호柳震號 ․ 신봉권申鳳權 ․ 황역黃櫟 ․ 이동언李東彦은 사위다. 묘는 남원군 영수동에 있다.
11
모헌공慕軒 세표世標
사칙士則 모헌慕軒 1731(영조 7)~1820(순조 20)
한창漢昌의 큰아드님이다. 천성이 인후하고 학문으로 대성했으므로 종문이나 향리에서 존경을 받았다. ‘모헌慕軒’이라는 호는 당시 대유였던 송환기°宋煥基가 내렸다. 90세의 천수를 누렸는데 생전에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수직을 받았다. 원배 풍천노씨가 32세로 별세한 반면 계배 남양홍씨도 86세의 천수를 누렸다. 1남4녀로 도희道熙는 아드님, 황득환黃得煥 ․ 박윤식朴允植 ․ 이동국李敦國 ․ 김호金鎬는 사위다. 묘는 인계면 심초리 앞 외양재.
12
첨지공僉知 춘해世標
군성君成1722(경종 2)~1865(고종 2)
원垣의 큰아드님으로 94세의 천수를 누렸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배위는 보성제씨로 여환汝煥 ․ 문환文煥, 2남을 뒀다. 양위분 묘는 순천시 서면 대구골 야망동. ==100쪽==
13
중봉공中峰 재성在聖
덕관德寬 중봉中峰1776(영조 52)~1857(철종 8)
인계면 중산리에서 득희得熙의 큰아드님으로 태어났다. 평소 『중용中庸』을 정독, 모든 사물의 이치가 중용에 있음을 역설하고 자질에게 그렇게 가르쳤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중봉中峰이라고 불렀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겸 용양위보호군이 내렸다. 배위는 경주설씨, 2남6녀를 뒀다. 큰아드님은 석귀石龜이고, 둘째아드님 석린錫麟은 종숙 재신在臣에게 입계했다. 김도연金道淵 ․ 소석춘蘇錫春 ․ 한명룡韓命龍 ․ 설귀순薛龜淳 ․ 노해수盧海壽 ․ 남유영南有欞이 사위다. 묘는 인계면 중산리 뒷기슭의 쌍분이다. 묘표는 재종손인 인영寅泳이 썼다.
[세계표 15] 쌍매당중산파 (17~26세) 중봉공(휘 재성) 가계
14
첨지공僉知 종필宗弼
양보良甫1785(정조 9)~1864(고종 원년)
명신命臣의 둘째아드님이다. 70세 되던 1854년(철종 5)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로 제수받았다. 배위는 제주고씨로 5남1녀를 뒀다. 식환寔煥 ․ 욱환頊煥 ․ 칙환則煥 ․ 모환謨煥 ․ 승환昇煥은 아드님이고, 사위는 장시덕張時德이다. 묘는 적성면 지내리 입점.
15
첨지공僉知 재수在壽
僉知公 내원乃元1808(순조 8)~1892(고종 29)
우화遇華의 아드님으로 수직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로 제수됐다. 배위는 경주김씨, 3남1녀가 있다. 만호공晩湖 석규錫奎 ․ 청암공淸庵 석원錫源 ․ 석구錫九는 아드님, 사위는 형정인形正仁이다. 묘는 임실군 임실읍 이인리 독산.
16
부호군공副護軍 재춘在春
화성化城1807(순조 7)~1877(고종 14)
도수道壽의 아드님으로 수직 통정대부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을 받았다. 배위는 김해김씨, 석인錫仁 ․ 석우錫佑 ․ 석민錫敏 세 아드님이 있다. 묘는 고창군 흥덕 송당 앞 기슭. ==101쪽==
17
매사재공梅史齋 정환正煥
공서貢瑞 매사재梅史齋 ․ 매죽헌梅竹軒1829(순조 29)~1909(융희 3)
수장秀樟의 둘째아드님이다. 1898년(광무 2), 60세에로 수직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78세이던 1905년(광무 9)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가 제수 됐다. 공은 천성이 순후하고 사람을 대할 때면 언제나 온화해서 고을 사람들이
[세계표 16] 한림중파 (16~25세). 매사재공(휘 정환) 가계
우러렀으며, 문장 또한 뛰어나서 사우士友들의 칭송을 받았다. 배위는 전주이씨, 재호在湖는 외아드님이다. 묘는 북상면 부동 뒤 비덕재에 있다.
18
첨지공僉知 재근在根①
순삼順三1843(헌종 9)~1904(광무 8)
[세계표 17] 한림공파 (16~26세) 첨지공(휘 재근①) 가계
참판공益煥의 아우 익환益煥의 둘째아드님인데 참판공의 무사로 입계했다. 공은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제수됐는데, 공의 조상이 3대추증을 입은 것으로 보면 공의 지위가 가선대부여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족보에는 증통정대부로 기록된 경위가 궁금하다. 배위는 천안전씨, 1남3녀를 뒀다. 아드님은 석모錫模, 한성교韓聖敎 ․ 이현의李現儀 ․ 최용필崔鏞弼은 사위다. 임실군 동막 뒤 기슭에 묘가 있다.
19
호계공虎溪 재현在鉉
화서化瑞 호계虎溪1833(순조 33)~1916(일제강점기)
칠환七煥의 큰아드님이다. 1903년(광무 7), 71세로 수직 통정대부 돈녕부도정에 제수됐다. 배위는 순흥안씨, 자녀는 1남2녀다. 죽산공竹山 석윤錫潤이 아드님이고, 조시용趙時鏞 ․ 강제원姜濟遠은 사위다. 묘는 구림면 사곡 남쪽 기슭.
20
농산공農山 재휴在休
성심聖心 농산農山1823(순조 23)~1902(광무 6)
중환重煥의 큰아드님이다. 부지런한 성품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예문禮文과 시서에 통달했다. 향시鄕詩에서는 여러 차례 장원을 차지했으나 과거에는 오르지 못했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받고 3년 후에 80세로 수를 마쳤다. 배위는 함안조씨, 자녀가 없어 당질인 석주錫柱를 입계시켰다. 묘는 인계면 정산 뒤 기슭에 있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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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공同知 재근在根②
화백花白1823(순조 23)~1902(광무 6)
정환釘煥의 큰아드님이다. 가선대부에 제수됐는데 3대추증의 은전은 아니다. 수직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가선대부에 오를 만한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어서 수직으로 이 글에서는 상정想定했다. 배위는 창원정丁씨, 3남2녀를 뒀다. 큰아드님 석홍錫弘은 출계했고, 그 아래는 석원錫元 ․ 석운錫寬이며, 조준제趙俊濟 ․ 김동섭金東燮은 사위다. 묘는 임실군 청웅면 구락리 원동 후풍목後風木.
22
춘당공春塘 석중錫中
경화敬和 춘당春塘1836(헌종 2)~1901(광무 5)
[세계표 18] 쌍매당도사공파 (17~27세). 춘당공(휘 석중) 가계
송은공松隱 재우在佑의 큰아드님이다. 영희전永禧殿 참봉에 제수되고, 수직으로 66세로 돌아가시던 해에 가선대부 돈녕부도정의 은전이 내렸다. 공이 가선대부에 올랐으므로 3대추증의 규례에 따라 아버지 송은공에게는 통정대부 이조참의, 조부 정환廷煥에게는 통정대부 이조정랑, 증조 제근悌根에게는 이조좌랑을 증직했다. 배위는 안동권씨로 홍순弘淳, 옥호玉壺 ․ 계순桂淳 ․ 익순益淳 등 세 아드님을 뒀다. 공은 순창에서 익산으로 이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은 거기에 세거하고 있다. 묘소는 익산시 여산면 신양동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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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지공僉知 석렬錫烈
문평文平1827(순조 27)~1914(일제강점기)
재광在光의 아드님으로 뒤에 재흥在興 앞으로 입계했다. 공은 천품이 곧고, 준수한 용모에 문명이 높았다.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받았다. 배위는 고령신씨로 원영元永 ․ 종영宗永 두 아드님을 뒀고 따님은 윤남섭尹南燮에게 출가했다. 묘는 인계면 갑동에 있다. ==103쪽==
24
첨지공僉知 종호宗虎
치문致文1842(헌종 8)~1914(일제강점기)
습암공재보在輔, 襲岩의 둘째아드님으로 구미에서 태어났다. 인륜에 어긋나가나 의롭지 못한 것을 용납하지 않았고, 모든 일의 처리는 공정무사 위주로 나갔다. 언제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1902년(광무 6), 공의 회갑을 맞아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의 가자가 있었다. 배위는 장수황씨, 황치묵黃致默의 따님으로 2남2녀를 뒀다. 필영弼永 ․ 수영秀永은 아드님이고, 한용문韓容文 ․ 송환흥宋煥興은 사위다. 묘는 적성면 서림 선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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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지공僉知 언영彦永
우경宇景1842(헌종 8)~1924(일제강점기)
[세계표 19] 쌍매당중파 (17~28세) 첨지공(휘언영) 가계
석원錫元의 아드님으로 구미에서 태어났다. 1902년(광무 6) 수직으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를 받았다. 배위는 부안김씨, 2남1녀를 뒀다. 병관秉觀 ․ 병옥秉玉은 아드님이고 사위는 홍순현洪이다. 묘는 동계면 관전리 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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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지공僉知 도영道永
僉知公 명오明五,1832(순조 32)~1910(융희 4)
석귀錫龜의 둘째아드님이다. 수직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다. 배위는 청주한씨로 자녀가 없어 병남秉南을 입계했다. 묘는 인계면 중산리 뒤 기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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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택敬澤
명중明中1841(현종 7)~1912(일제강점기)
[세계표 20] 돈암공파 (17~28세) 휘 재관 ․ 경택 ․ 종호 가계
석일錫一의 둘째아드님으로 구미에서 태어났으나 자녀가 없는 중부仲父 석중錫中에게 입계했다. 갑오개혁(1894) 이후 관직이 바뀌어 새로 생긴 통정대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수직으로 받았다. 원배 성산이씨는 이세인李世仁의 따님으로 3녀를 남기고 별세했고, 계배 남양방씨는 방영규房榮圭 따님으로 1남1녀를 뒀 다. 병익秉益은 아드님, 이교직李敎稷 ․ 최석룡崔錫龍 ․ 한규수韓圭守 ․ 복태원卜太元은 사위다. 묘는 동계면 관전리 선영에 있다. ==104쪽==
제7장 당론黨論과 당화黨禍
1. 을해당론
2. 우리 양씨의 당화
가. 귀음공의 을묘당화
나. 성천공의 을묘당화
다. 무송공의 정사상소
라. 백수공의 당론
선조 이후 척신들이 물러난 정계에 사림이 등장하여 붕당정치 시대를 열었다. 이들은 초기에 척신 정치의 청산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협치를 도모했지만, 구세력이 빠져나가자 그들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들은 인맥 ․ 학맥 ․ 혼맥의 인연 따라 끊임없이 갈등하면서 부침을 거듭했다. 인조반정을 계기로 대북파를 척결한 서인들은 잠시 숭명배청의 기치 아래 기세를 올렸지만 이들도 끊임없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1. 을해당론
조선의 당쟁사는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훈구파, 사림파, 절의파라는 파벌에서 비롯했다. 훈구파는 수양대군이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한 한명회 ․ 권람 ․ 최항 등 공신과 그 후예들, 사림파는 영남의 김종직 문인들로 초야에서 학문을 닦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부르짖은 선비들, 절의파는 김시습 ․ 남효온 등 이른바 생육신이나 그에 가까운 절의를 내세우고 현실참여를 거부한 학자들을 가리킨다.
이 파벌은 뒷날 연산조의 무오사화(1498) ․ 갑자사화(1504), 중종조의 기묘사화(1519), 명종조의 을사사화(1545)의 4대사화로 김굉필 ․ 정여창 ․ 조광조 등 명망 있는 많은 인재가 50여 년에 걸쳐 희생되는 결과를 빚었다. 이로 인해 뜻 있는 선비 가운데는 산림으로 들어가 현실에 등을 돌리거나 정계의 추이를 관망하면서 조정에서 나아갔다가 불리하면 되돌아오는 방향으로 나갔다. 전자가 절대적 은일이라면 후자는 상대적 은일, 바꿔 말하면 관료적 은일이다. 김시습 ․ 남효온 같은 이는 절대적 은일주의자다. 남원양씨 중에서는 무오 ․ 갑자사화를 목격한 귀암공배 ․ 매당공돈 형제분이 절의파라 할 만한 분이었고, 쌍매당공사민 같은 어른은 기묘 ․ 을사사화 이후 은거 생활을 하면서 후진 양성에 평생을 바친 절대적 은일주의자이다.
명종 시대를 마감하면서 척신들이 사라지고 선조의 등극과 더불어 사림들이 대거 몰려왔다. 그러나 사림들의 우호적인 국면도 잠시, 그들 사이에 대립과 반목, 갈등이 일었다. 조선 말기에 당화黨禍를 뼈저리게 목도한 이건창°李建昌(1852∼1898, 조선조의 대과 최연소 급제자. 조정에서는 15세로 급제한 이건창에게 바로 관직을 줄 수 없어서 4년을 기다렸다가 홍문관직을 제수했다)은 그의 탁월한 저술『당의통략黨議通略』을 통해 분당의 경위를 이렇게 진단했다. ==106쪽==
선조 초년에 영상 이준경이 사망했다. 그는 죽음에 임박하여 임금에게 글을 남겼는데 이렇게 썼다. “지금 사람들이 고상한 이야기, 훌륭한 말로 붕당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끝내는 이 나라에서 뿌리 뽑기 어려운 화근이 될 것입니다.” 이때 유학을 공부한 신하 이이가 있었다. 그도 도학과 재주, 꾀로써 산림 속 학자들의 영수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선조가 그를 매우 높이 여기며 아끼고 있었다. 이준경의 글은 이이를 지목한 것이었다. “조정이 맑고 밝은데 어찌 붕당이 있겠습니까. 사람이 장차 죽을 때는 그 말이 선하다고 했는데 이준경은 죽으면서도 그 말이 사납습니다.” 이때 삼사三司(사간원 ․ 사헌부 ․ 홍문관)에서 이준경의 생전 관직을 삭탈하려 했는데 유성룡이 홀로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말했다. “대신이 죽음에 임박하여 임금에게 올린 말에 부당한 것이 있으면 물리치는 것은 옳지만 죄를 주기까지 한다면 너무
조선 시대 붕당 정치 계보도(자료 : 이건창, 『당의통략』)
심하지 않는가.” 또 좌상 홍섬 등도 모두 말하기를 “이준경은 살아있을 때 공덕이 있었습니다. 죄를 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라고 함으로써 이에 의론이 중지됐다. 이준경의 유언이 있은 지 수년 후에 그 말이 맞아떨어졌다. ==107쪽== 처음 명종이 윤원형을 쫓아내고 이량을 등용했다. 이량의 큰누님은 인순황후의 어머니였다. 이때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아직 나이가 젊었으므로 이량은 과도하게 욕심을 내고 어지러운 짓을 마음대로 했다. 심의겸이 차츰 성장하고 또 귀하게 됐는데 이량의 하는 짓이 너무 방자하자 몰래 임금을 뵙고 이량의 죄를 고하여 귀양 가게 했으며 그의 무리들을 받아들여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주위에서는 어질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 전랑으로 있던 오건이 김효원을 추천하여 이조전랑 자리를 맡게 하려 했으나 심의겸이 이를 저지했다. 김효원이 젊었을 때는 윤원형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는 이조민과 매우 친하게 지내 어느 때는 심지어 침구를 가지고 가서 함께 잘 정도였다. 어느 날 심의겸이 공무가 있어 윤원형의 집에 이르러 그러한 광경을 목격했는데 오건이 김효원을 추천하자 “김효원은 윤원형의 문객일 뿐이데 그런 사람을 추천하다니.” 라고 하면서 배척하자 옆에서 김계휘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오. 그런 일은 어린 시절 일이 아니오.” 이러한 사연이 있은 뒤에 김효원이 마침내 전랑이 되고 많은 명사들과 사귀어 서로 돕게 하니 명성이 대단해졌다. 그때 심의겸의 동생 충겸을 전랑 자리에 앉히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효원이 “천관天官(이조)이 어찌 외척들의 집안 물건이냐?” 라고 말하며 저지했고, “이 사람은 어리석고 고지식해서 쓸 데가 없다.”라고 하는 등 심의겸을 헐뜯어 말했다. 이때는 인순왕후가 이미 죽은 뒤라 심의겸이 궁 안으로부터 후원자도 없고 선비의 무리들도 심의겸이 헛되게 이름난 것이라 하여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의겸을 따르던 앞서의 무리들까지도 함께 배척하자 사람들이 말했다. “김효원이 전날의 앙갚음을 한 것이다.” 박순°이 우상이 됐을 때 대간 허엽이 조그만 일로 박순을 추고推考하자 박순이 스스로 우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부터 당론이 드디어 나눠졌다. 이때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김우옹 ․ 유성룡 ․ 허엽 ․ 이산해 ․ 이발 ․ 정유길 ․ 정지연 등으로 이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김효원이 한양의 동쪽인 건천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의겸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박순 ․ 김계휘 ․ 정철 ․ 윤두수 ․ 구사맹 ․ 홍성민 ․ 신응시 등으로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심의겸이 서울의 서쪽인 정릉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인들은 대체로 명예와 절조를 숭상하려 했고 서인들은 이와 반대로 노성한 사람이 많아서 경박하게 굴지 않았기 때문에 변변치 못한 사람들도 많이 따라다녔으며 혹은 동인이나 서인의 양쪽을 다 드나들면서 서로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108쪽== 이것을 ‘을해당론乙亥黨論’이라고 일컫는다. [이덕일 역]
맨 처음 이이李珥는 중립을 지켜 아무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이에 혹자는 ‘천하에 어찌 두 가지 일이 모두 옳고 두 가지 일이 모두 그른 법이 있을 수 있느냐’ 라면서 이이를 조롱했다. 이이는 이 말에 ‘무왕과 백이伯夷 ․ 숙제叔齊의 일은 양쪽이 다 옳은 것이요, 춘추전국시대의 싸움은 양쪽이 모두 그른 것이다.’하고 했다. 이와 같이 이이는 동서분당을 화해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수포로 돌아갔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중상모략으로 시달렸다.
그 후 동인은 정인홍과 우성전 사이가 틀어져서 유성룡 ․ 김성일 ․ 이덕형 등은 우성전 편을 들어 남인이라 부르고, 이산해 ․ 이발°(재동파 파조이신 장사랑공 시경의 처부) ․ 정인홍 등을 북인이라 불렀으며, 북인들은 다시 소북 ․ 대북으로 갈라졌다. 한편, 서인은 숙종 때에 송시열과 윤증尹拯 사이에 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 이를 회니사생론懷尼師生論이라고 한다. 송시열은 회덕, 윤증은 이성尼城에 살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시비라는 것이다. 여기서 송시열 편에 선 사람들을 노론, 윤증을 두둔한 사람들을 소론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갈린 남인 ․ 북인 ․ 노론 ․ 소론을 사색당四色黨이라 한다.
이 사색당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이다. 이 당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끝없이 소진되고 끝내는 조선조의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쟁은 선조조로부터 영조조까지 170여 년 동안이 극성기였다. 이 시기 양반 계층은 자의거나 타의거나 어쩔 수 없이 당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남원양씨도 당론에 관여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 환경도 숙명이라면 숙명이었다.
2. 우리 양씨의 黨禍
붕당정치가 출발할 때만해도 남원양씨는 당론에 휘말리지 않았다. 을해당론 당시 양호재 부정공홍과 돈암공사선은 이미 저 세상에 계셨고, 쌍매당공사민 ․ 진사공사헌 ․ 어은공사형 3형제와 쌍매당공의 큰아드님인 창주공시성이 생존하셨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므로 당론의 영향권 밖에 계셨다. 다만, 쌍매당공 ․ 어은공 형제분이 노진°과 유희춘°의 문하여서 서인들과 어울렸고, 그래서 사람들이 서인 쪽으로 봤다. 게다가 어은공과 교분이 두터웠던 윤두수 ․ 신흠°申欽 ․ 고경명°高敬命 등도 모두 서인이었다.
가. 귀음공의 을묘당화
남원양씨가 당화에 휘말린 것은 1615년(광해 7) 이른바 능창군추대사건°이다. 의금부에 갇혀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위기에 놓인 소명국이란 자가 “장령 윤길°과 정언 양시진 ․ 전적 양시우 등이 전 중화부사 신경희°와 몰래 역모를 꾀하여 능창군을 추대하려고 하였습니다.” 라고 들이민 밀고가 화단이었다. 사실이라면 대역 사건이다. 조선 시대는 가끔 이런 사건이 터졌다. 위기에 몰린 자가 국면을 전환하고자 할 때 곧잘 이용하는 수법이다. 이럴 때 고변자는 으례 종실 중 하나를 지목해 왕위를 노리는 자로 구날(터무니없는 말을 만들어 냄.)하고, 적대 세력을 함정에 빠트리곤 했다. 한 번 걸려들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다. 선조의 손자이자 능창군(인조의 동생)은 이렇게 걸려들었다. ==109쪽==
소명국은 익산의 진사다. 음란하고 패악스런 일이 많았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는 상복 차림으로 아비와 다퉜고, 남의 집 여종과 놀아나다가 사람들 눈 밖에 나기도 했다. 부형과 집안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서원에서도 삭적돼 고을에 붙어있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내려가지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이란 ‘이쪽과 저쪽을 바삐 오가며 근거 없는 말을 만들어내고’ 마음을 바꾸어가면서 교묘히 일을 꾸는 것이었다.
귀음공시진의 사촌형인 성천공시우의 아버지가 진사공사헌이다. 명종 말기에 구미에서 여산으로 분가한 분이다. 성천공은 진사공의 둘째로 여산에서 태어나서 줄곧 거기서 살았다. 그는 성장하면서 학문과 행의로 고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진사가 되고 대과에 오르면서 고을의 대소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성천공은 소명국의 소행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손을 봐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어느 날, 소명국이 가까이 지내던 신경희에게 다가왔다. 신경희는 기묘명현 신상申鏛의 증손으로, 선조의 4남 신성군의 장인이자 1583년(선조 16) 니탕개의 반란으로 명성을 떨친 신립申砬의 조카이다. 그는 이러한 집안의 배경으로 1588년(선조 21)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가 됐다. 이듬해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의 제자 선홍복宣弘福을 붙잡은 공로로 6품직에 발탁돼 1591년 제용감주부가 되었다. 1593년(선조 25) 고산현감으로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같은 해 행주산성의 대첩을 제일 먼저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면천군수와 중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신경희에게 접근한 소명국은 양사兩司가 중학에서 모여 영의정을 탄핵하려 한다고 속삭였다. 신경희는 소명국이 일을 꾸미려는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이를 상소로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풍문이 좋지 못했던 소명국은 의금부로 끌려갔다. 신경희는 사촌누이가 신성군의 부인이었으므로 왕실과도 끈이 닿는 사람이었고, 소명국이 입에 올린 능창군은 신성군의 양자였다. 성천공과 신경희는 가까운 사이였다. 성천공은 소명국의 패륜적인 소행을 소상히 아뢰고 절도안치를 요구했다.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사람들로부터 치명타를 맞은 소명국은 예조판서 이이첨에게 줄을 댔다. 비록 판서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당시 의정부 정승을 능가할 만한 권력을 구사하고 있었다. ==110쪽==
능창군은 어려서부터 군왕의 자질을 타고 났다는 평을 받아왔다. 그 무렵, 세문동塞門洞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문이 있었다.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정원군의 집이 그곳이었고, 정원군의 막내가 능창군이었다. 당시 능창군은 열세 살밖에 안 됐지만 집권세력에게는 예뻐할 만한 구석이 없는 존재였다. 대북파의 지도자인 이이첨도 신경희와 가까이 지내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털어내려고 작정하던 중이었다. 음관 출신에다가 한때 세자 자리를 놓고 광해군과 줄다리기를 했던 신성군의 처가붙이가 바로 신경희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이첨과 소명국의 궁리가 맞아떨어졌다.
신경희 ․ 귀음공 ․ 성천공을 비롯한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엮였다. 그런데 이 고변에서 엉뚱하게도 귀음공시진이 올무에 걸려들었다. 귀음공과 소명국은 아무런 인연이 없는 사이였다. 귀음공은 성천공의 사촌동생, 성천공보다 열 살 아래지만 급제는 10년 가까이 빠르다. 그 만큼 정계 진출이 빨랐고, 성절사로 연경을 다녀올 만큼 역량을 인정받았다. 소명국은 자신의 불행이 성천공 때문이라고 믿었으므로 잘 나가는 귀음공도 곱게 보일 리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귀음공은 사헌지평, 사간정언 등으로 있으면서 올곧은 언론을 폈고, 고변 당시만 해도 사간정언이라는 직책으로 있었다. 사헌부는 백관을 규찰하는 기관, 사간원은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건의하거나 논박하는 부서다. 결코 임금이 가까이 두고 싶은 직무는 아니다. 부당한 정사를 맹렬하게 공박하는 귀음공이 달가울 까닭이 없었다. 소명국이 노린 것이 이 대목이었다.
모역죄로 엮이면 풀려날 길이 없다. 위기로 여긴 왕이 침착하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이다. 일은 신속하게 진행된다. 일단 용의자를 처단하고 본다. 사실 규명은 나중 문제다. 설령 무고로 밝혀지더라도 수범이나 종범 몇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고 넘어간다. 모진 형신을 받으면서도 자복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이전에도 반역의 혐의를 부정한다고 해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다.
수많은 사람이 곤장을 맞고 두만강과 압록강 주변의 극변으로 쫓겨났다. 유배는 장 1백대가 기본이다. 귀음공은 종성鍾城, 성천공은 삼수三水 유배처분이 내렸다. 평상시의 정치범은 비교적 여유롭게 수행원까지 거느리고 유형지로 가면 되지만 귀음공 같은 반국가사범에겐 삼엄하게 마련이었다. 집권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철령을 넘으라는 내렸다. 귀음공은 누적된 장독杖毒과 노독路毒을 극복하지 못하고 덕산역에 이르러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때가 43세였다. ==111쪽==
능창군은 강화도에 딸린 외딴섬 교동에 위리안치됐다. 교동은 왕족들의 단골 유배지였다. 고려 말기의 우왕과 뒷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 등은 일단 이곳에 위리안치됐다가 더 먼 곳으로 떠났고, 계유정난 때의 안평대군과 중종반정 때의 연산군이 숨을 거둔 곳이 교동이다. 능창군의 형 능양군°은 아우를 살리기 위해 모든 재산을 매각해 이이첨 등에게 하소연했으나 도로(보람 없이 애씀)에 그쳤다. 능창군이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 어떤 사람이 문과 창호를 모두 닫고 섶을 쌓아 아궁이에 불을 질렀다. 이때 17세였던 능창군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올가미에 스스로 목을 걸었다. 능창군이 숨을 거두기 1년 전, 광해군은 8살밖에 안 된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교동에 안치시켰다가 강화부사를 시켜 증살蒸殺했다. 그리고 능창군이 살았던 새문동에 다시는 왕기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집을 헐고 궁궐慶德宮을 지었다. 광해군은 능창군이 간 지 8년 후 왕위를 빼앗기고 교동으로 쫓겨났다. 이 사건으로 서인들은 움츠러들었으나, 광해군 정권과는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성천공 상소문(광해군일기 중초본, 1615년 8월 6일)
귀음공의 생전 교유는 주로 서인이었다. 서인의 주축인 이귀° ․ 김상헌° ․ 차천뢰 ․ 장유 ․ 홍서봉° ․ 이수광° ․ 이명한 등 당대의 명사들이었다. 집권 세력이 귀음공 숙청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이 같은 교유와 무관하지 않다. 공이 눈을 감은 지 8년, 이귀 ․ 장유 ․ 김류 ․ 신경희의 사촌형 신경진 등의 주도로 능창군의 큰형 능양군을 추대한 정변이 성공했다. 이른바 인조반정이다. 대북당은 무너지고, 살 판 났던 소명국은 반좌율로 처단됐다, 이 정변의 덕택으로 귀음공은 예전의 명예를 회복하고, 조정에서는 억울함을 호소한 공의 현손 학태學泰의 상소에 따라 1753년(영조 29) 이조참의를 증직했다. (p.52 ․ 180 참조) ==112쪽==
나. 성천공의 을묘당화
무고가 있기 전에 의금부는 소명국 치죄를 중도부처(벼슬아치에게 어느 곳을 지정하여 머물러 있게 하던 형벌.)쯤으로 끝내려고 했다. 누구보다도 그 자의 비행을 잘 알고 있던 성천공은 그 정도로 그쳐서는 버르장머리를 고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익산에서 올라온 유생들과 함께 그 자의 소행을 소상히 밝힌 정장呈狀을 사헌부에 제출했다. 사헌부는 시골로 내치기만 한다면 ‘연줄을 타고 흉모를 마음껏 꾸며서 국가에 화를 끼치는 변고가 반드시 없으리라 보장하기가 어렵다’ 면서, 화를 막기 위해 그 수족을 잡아 묶어 외딴섬에 정배絶島安置할 것을 건의했다. 이 제안은 가납되지 않았다. 성천공이 직접 상소문을 올렸다.
“소명국은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한 짓을 하여 행동이 금수와 같으므로 지난해 2월에 온 고을의 공론으로 인하여 삭출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금되어서 신들을 향하여 원망스런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신들이 지난번에 당초의 삭출하게 된 죄목을 가지고 헌부에 정장했는데, 지금 헌부가 잡아다가 국문하라고 올린 계사를 보니 원장元狀의 문자들을 생략해 버려 그 어세가 마치 신들이 지금 비로소 논의를 발하여 정장한 것처럼 말하였습니다. 금부로 하여금 원장을 상세히 살펴서 시행하라고 명하소서.”
소명국은 악이 받혔다. 그래서 자기를 나락에 빠트렸다고 생각되는 성천공과 귀음공, 신경희와 사헌부 장령으로 있던 신경희의 조카사위 윤길, 역시 신경희 조카사위인 신성군의 양자로 들어간 능창군을 묶어 모역으로 몰아갔다. 공은 의금옥에 수개월 갇혔다가 53세의 나이로 함경도 삼수로 유배 길을 떠났다. 성천공은 유배지에 도착하고 나서야 종제 귀음공의 부음을 접했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큰아드님여송이 공이 구금돼 있는 동안 음식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의금옥 밖에 자리를 깔고 흐느끼시다가 끝내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아직 한창인 25세 청년이었다.
유배지에서 8년을 보낸 성천공은 인조반정의 성공으로 자유의 몸이 됐다. 이 사건은 귀음공의 희생과 함께 남원양씨가 감당한 최초의 당화다. (p.52 참조)
다. 무송공의 정사상소
무송공은 화양공여매의 넷째아드님이자 능창군 추대사건으로 희생된 귀음공의 손자다. 공의 생애는 인조반정으로 북인들이 소멸되고 정권을 잡은 서인과 약세였던 남인이 각축하던 시대였다. 주지하다시피 대부분의 남원양씨 어른들은 서인들과 교유했기 때문에 서인의 부류로 지목됐다. 그런데 무송공은 철저한 남인이었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무송공이 어떤 환경에서 남인으로 기울었는지 저간의 사정을 밝혀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당시 남인 지도자였던 허목°과 서신을 교환한 문헌이 남아있는 것으로 미뤄 남인 계열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으리라는 짐작은 쉽사리 할 수 있다. (p.86 참조) ==113쪽==
서인과 남인 대결의 정점은 이른바 예송禮訟이다. 현종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장렬왕후)의 복상服喪 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두 차례에 걸쳐 대립한 사건을 말한다. 그것은 신권臣權 강화로 집권 지배층 중심의 질서를 다지려는 서인과, 왕권王權을 강화하여 새로운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는 남인의 이념적 충돌이기도 했다. 이 논쟁을 주도한 사람은 서인의 거두 송시열 ․ 송준길, 남인은 허목 ․ 윤휴였다.
인조에게는 소현세자 ․ 봉림대군 ․ 인평대군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 ․ 석린 ․ 석견의 세 아들이 있었고, 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는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고 돌아온 지 석 달 만에 죽고 말았다. 당연히 원손인 소현세자의 맏이가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전통적인 종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주화파의 지원으로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은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고 사약을 마셨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연좌율로 제주도에 유배, 첫째와 둘째는 그곳에서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가 34세의 한창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1차 예송은 1659년(효종 10) 효종의 어머니 자의대비의 복상을 서인의 뜻에 따라 기년朞年(만 1년)으로 정했는데, 남인이 이의를 제기했다. 효종은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長子나 다름없으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송시열 등 서인은 효종은 인조의 둘째왕자이므로 장자의 예는 안 된다고 반박, 결국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2차 예송은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에 시비가 붙었다. 당시 집권층인 남인은 기년으로 정했는데, 이에 대해 서인은 대공설大功(8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자리매김 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즉 효종이 둘째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다. 반면 비록 둘째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임진 ․ 병자 이후 중세 질서를 개편하는 과정에서, 대지주인 양반지배층을 중심으로 할 것인가, 지주층의 이익을 다소 누르면서 소농 중심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사회개혁론과 연결된 것이다. ==114쪽==
무송공이 정철의 관직을 회수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게 이 무렵이었다. 비록 남인이 집권하던 시절이긴 했으나 서인과의 관계는 여전히 팽팽했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정철은 한때 서인의 맹주였기 때문에 무송공의 상소는 그만큼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정철은 ‘정여립의 난’을 다스릴 때 위관으로 있었다. 이때 동인은 퇴계학파 중심의 남인과 화담 ․ 남명학파가 어울린 북인으로 갈려 상대진영을 은근히 견제했다. 정여립은 북인을 이끌던 이발과 가까웠고, 이발과 정철은 적대적 관계였다. 정여립의 난은 이발과 그 주변을 제거하기 위한 정치적 사건이라는 연구가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직전에 전개된 이 사건은 이발과 정여립 관련 인물, 그 친인척 1천여 명이 희생됐다는 사건이었다. 이 사화에서 위기를 피한 북인들이 광해군 시대를 열었으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서인들의 인조반정으로 끝내 와해되고 말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도 조선 후기까지 생명력을 꿋꿋이 지켜낸 집단이 동인의 분파인 남인이었다.
남인들은 정여립의 난 당시 서인 지도자였던 정철이 동인을 없애려고 무고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여 증오했다. 이 옥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남인들의 시각이 틀리지만은 않는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 여러 군데 있다. 여기에 활시위를 당긴 게 무송공의 상소다. 그 무렵, 마침 현종이 승하하고 13살의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남인들은, 서인을 이끌고 있던 송시열 ․ 송준길 등이 예문禮文을 오용했다고 숙종에게 아뢰었다. 숙종은 서인 세력을 정계에서 잠재우려고 남인들을 대거 기용했다. 숙종이 즉위하자마자 끌어들인 영의정 권대운權大運 ․ 좌의정 민희閔熙 ․ 우의정 허목이 모두 남인이다.
남인들은 이 기회에, 묵은 숙제였던 정철의 관직 추탈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지방 유생들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적임자로 지목된 유생이 무송공이었다. 무송공은 진사에 오른 뒤 8여 년을 학문에만 전념, 명성이 온 나라에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1677년(숙종 3) 2월 18일, 35세에 지나지 않았던 무송공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27개 군, 422명의 대표자 명의로 상소문을 제출했다. ==115쪽==
“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삼가 생각하건대, 음양陰陽이 소장消長하는 이치와 현사賢邪가 진퇴하는 기틀이 실로 비태否泰*와 형색亨塞의 기관機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도陰道가 우세하여 소인이 번성하면 비否가 되며 색塞이 되고, 양도陽道가 우세하여 군자가 성하면 태泰가 되고 형亨이 되니, 이것은 하늘과 사람이 반드시 그러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한 번 소멸하고 한 번 성장하는 데도 이치가 반드시 서로 따르는 것이며, 혹은 나아가고 혹은 물러나는 데에도 그 기틀이 일정한 형태가 없으므로 양도가 바야흐로 생기게 되는데 막는 것이 있으면 양도 또한 반드시 태泰하기를 얻기가 어렵고, 군자가 바야흐로 나아가야 되는 데 나아가게 할 수 없으면 군자 또한 반드시 그 형통함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이 지일至日에 관문을 닫는 형상*이요, 『주역』에 나타난 소이이니 임금이 삼가지 않을 수 없는 바입니다. 삼가 살피건대, 오늘날 어질고 밝은 임금님이 위에 계시고 어진 신하들이 밑에 있으니 어두웠던 천리가 비로소 밝음을 얻고, 오랫동안 굽어졌던 인정人情이 비로소 펴짐을 얻게 되니, 이때가 바로 양도가 생겨나고 군자가 나아가려는 기회이므로 온 나라 백성들이 머리와 이마를 들고서 변화의 시기가 올 것을 바란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4년이나 끌어왔는데도 아직 그대로이며 옳고 그른 것이 다 밝혀지지 않으며, 베풀고 두는 것이 다 합당하지 못하여 나라 일이 이지러져 날로 더 심해갑니다. 임금의 마음이 비록 대궐의 일에 부지런하시나 두터운 은택이 오막살이집까지는 미치지 못해서 백성으로 하여금 크게 그 소망을 잃게 하니, 이것이 어찌 까닭 없이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신들은 전하의 양을 드날리고 음을 억누르는 도리에 혹 미진한 점이 있는가 두렵습니다. 이때 만약 전하께서 크게 진작하지 않으시면 형통하고 태평한 성세를 무엇으로 말미암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형亨의 반대는 그 끝에 가서는 색이 되고 태의 반대는 그 끝에 가서는 비否가 되니 그 기세가 진실로 두려워할 만합니다. 전하께서는 무엇을 꺼리시어 아직도 진작하시지 않으십니까. 이른바 진작이라는 것은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음흉한 것을 물리치고 죄를 밝히며 정기를 배양함에 있을 뿐입니다. 이에 신들은 한 가지 어리석은 생각을 올리니, 이로써 진작하는 방법으로 삼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신들이 들으니 고 상신 정철은 바탕이 단정하고 어질지 못하며, 성격이 본시 음침하고 가벼워서 거짓을 꾸미고 없는 일을 지어 내었는데도 선조의 은혜와 지우知遇를 지나치게 입었으며,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는 성품을 억누르지 못하여 그 질투의 해독이 이에 번졌는데, 마침 기축년(1589)의 적신 정여립의 변란을 만나 그것을 기화로 삼아 드디어 어진 사람들을 일망타진하는 참극을 일으켰습니다. 당시의 모습들을 한 붓으로는 도저히 그릴 수 없으나 신들은 그중 한두 가지만 간단히 아뢰고자 합니다. 변란 보고가 처음 들어왔을 때 정철이 곧 은밀히 차자를 올려 역적들을 잡을 조처를 취한 것은 정철의 마음이 이때는 충성이 있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있다가 대각을 사주해서 대신들과 역적들의 교제가 두터웠다고 탄핵케 하고, 유생들을 사주해서 조신과 역적이 왕래가 밀접했다고 의논케 하였으니* 정철의 사건을 날조함이 이에서 차차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임금께서 좌상 이산해에게 전교하시기를, “언관들이 역적들과 서로 사귄 사람들만을 논란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 하겠다. 다만 근래 드러난 모양을 살피니 점점 여파가 번지는 듯하니, 심히 내가 좋아하는 바가 아니로다. 만약 꼭 미치지 않아도 될 사람에게까지 여파가 미친다면 그 어찌 온당하겠는가. 경은 힘써 그것을 막을지어다.” 하시었고, 유생 정암수의 상소(1589, 선조 22년 12월 14일)에 전지를 내리시기를, “역적의 변고를 틈타서 감히 함부로 모함할 계획을 꾸미니, 이것은 반드시 간사한 놈의 사주를 받은 것이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하다.” 하시었고, 조헌과 양산숙의 상소(1589, 선조 22년 12월 15일)에는 전지를 내리시기를, “이 무리들은 소를 올려 조신들을 다 배척하고, 오직 우상右相 이하 몇 사람만 칭찬하여 스스로 바른 말이라고 하나, 도리어 그 편파적인 정상을 나타낸 것이니, 가소롭다.” 하셨습니다. 당시의 우상은 정철이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보면 선조께서 정철을 의심한 지도 벌써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정철은 오히려 감히 기회를 타서 입술을 놀림에 스스로 거리낌이 없어서 널리 어금니 같은 심복들을 배치하여 두며 그물을 많이 베풀어 놓고 몰래 응견鷹犬을 시켜 어지러이 오락가락하게 하여 모략을 모조리 스스로 벌여 놓고, 유생들의 상소문까지 혹 손수 초안하되 작은 원망이 있는 사람과 높은 명망이 있는 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죄를 얽어 죽을 곳에 쳐넣었습니다. 저 최영경 같은 이는 산림에 깊이 ==110쪽==
묻혔던 이로 당시에 추앙을 받았으나, 일찍이 정철을 성질 급한 소인이라 하였고, 또 그 사람은 다만 좋은 벼슬을 하였을 뿐이요, 정사를 세우고 밝힌 일은 없다고 하였으므로, 정철이 그에 대해 원한을 품고, 그를 무고할 바를 생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중추부에서, “영남의 명사名士 가운데 역적과 작당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퍼트리고는 사람을 시켜 최영경과 원한이 있는 집에서 무고토록 하고 끝내는 뜬소문을 조작해서 최삼봉이란 말을 꾸며*, 홍천경ㆍ양천경ㆍ강현 등을 시켜 장계를 올려 옥사를 일으켰습니다. 임금께서 그 억울함을 살피시고 석방을 명령하시자 대간에 부탁하여 다시 국문할 것을 거듭 청하게 하여 드디어 말라 죽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일의 전말은 선조의 전지 가운데 다 갖추어 실려 있으므로, 신들의 자세한 말을 빌린 것도 없습니다. 저 정개청과 같은 이는 학문이 있고 몸을 공경하여 당시 추중을 받았는데, 일찍이 정철을 실상을 꾸미고 행동을 속이는 바르지 못한 사람이라 여겼고, 또 당시 사람들이 정철의 방탕함을 다투어 본받을까 근심하여 절의와 청담에 관한 설을 지어 주자의 유지遺志를 추술하여 경계시키니, 정철이 그것에 원한을 품고 함정에 빠뜨릴 바를 생각하였으나, 그 구실을 얻지 못하다가 이에 정개청이 지은 「절의론」 위에 억지로 배排 자를 더해 죄목을 만들어 드디어 먼 변방으로 쫓아 죽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의 시말은 선 정신先正臣 유성룡의 장계와 윤선도의 상소 가운데 다 갖추어 있으니 신들이 시끄럽게 지껄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 밖에 또 조대중은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았으나 뜻을 얻지 못한 사람으로서 역적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고 무고를 당하였고, 유몽정은 경개하고 강직한 사람으로서 곡식을 내어 적에게 주었다고 무고를 당하였고, 이발ㆍ이길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의 우애가 두텁고 청렴한 명망이 있는 사람이었으나 역적과 친하다고 모함당하였고, 이황종은 악을 미워하는 굳센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으나 또한 이발과 이길의 족당이라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백유양 세 부자에 이르러서는 집이 뒤집히고 알이 깨지는 것을 면치 못했고*, 이발의 80노모와 7살 난 아들도 눌러 죽이고 아울러 무찔림을 당했습니다. 그 외에 정언신ㆍ정언지 등 위로는 이름 있는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초야에 있는 현자에 이르기까지 원한을 품고 해독을 입은 자가 무릇 수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에 정철의 음흉한 계책과 잔인한 행위가 이르지 않는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간특한 무리들이 어느 때인들 없으리요마는, 정철이 한 짓은 실로 앞서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월日月이 위에 있고 귀신이 옆에 머무니, 정철이 비록 지극히 간교하나 어찌 감히 오래토록 어지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두 해가 못 되어 몸이 귀양가는 재앙을 입었고, 또 두 해가 되지 않아 뒤따라 탈직의 벌이 있었으니, 악이 쌓이면 화가 넘치는 것은 떳떳한 일인지라 진실로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임금의 마음에 뉘우치심이 여기까지 넘쳐 나와서 정철에게 그릇된 바가 되었음을 크게 깨달으시고 항상 정철을 독철毒澈 내지는 간철奸澈이라고 하시며, 그 아들을 가리켜 독종이라고 하시어 벼슬을 주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정철이 파출될 때 이르기를, “대신을 파출시킬 때에 조정에 방시榜示하는 것은 죄상을 국인들의 이목에 밝힘으로써 후세를 징계하는 것이다. 지금 정철의 파직도 옛날 사례대로 조정에 방시하라.” 하셨고, 그를 귀양 보낼 때 이르기를, “정철은 타고난 성품이 교활하고 간독하니, 배소에 이르러서도 잡인들과 왕래케 하면 무슨 죄상을 저지를지 모르니, 엄격하게 가시 울타리를 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최영경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이르시기를, “영경은 악독한 무리에게 해를 입은 것이 분명하다. 내가 놓아줄 것을 명령했으나, 끝내 방면되지 못하고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는데 스스로 =117쪽= 죽었다는 이름을 덮어 씌웠으니, 하늘과 땅 사이에 그 원한이 지극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원한을 내가 있을 때 풀어 주어 죽은 뒤 돌아가 만나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고 싶다.” 하였으며, 또 이르시기를, “정철의 일은 논하려면 입이 더러워질까 겁나니 내버려 둠이 옳겠다. 영경의 죽음에 대해서는 내가 마땅히 나라를 망친 것으로 책임져야겠다.” 하셨습니다. 이런 따위는 일일이 다 말할 수도 없으니 성조聖祖께서 이 때문에 통분하신 것입니다. 말 속에 숨어있는 뜻이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여기서 정철의 죄는 하늘이 슬퍼하고 땅에 사무치며, 만세에 이르도록 풀 수 없음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일이란 짐작할 수 없어, 정철이 죽은 뒤에도 남긴 술책이 걷히지 않아 처음에는 정철의 아들 종명宗溟이 거짓 장계를 올려 그 아버지를 신원하였는데, 오로지 참된 사적들을 매몰시키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수 천여 마디나 지어냈으며, 끝내는 정철을 도우는 자들이 따라 답하여 이로써 구실을 삼아 사람의 귀를 현혹시켰으므로 인조께서 개옥改玉하실 때에 이르러서는 관작을 추복追復하시는 조처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즉위 초에 용서함을 힘쓰고 더러움을 씻어 주어 일시의 권도를 따르게 하는 것뿐이니, 진실로 신들이 감히 의논할 바는 못 됩니다. 그러나 다만 종명이 스스로 발명한 것은 온갖 거짓으로 꾸며 내어 말이 지극히 신빙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되속이는 사람들로서야 무엇을 겁내 못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리하여 정철이 어탑 앞에서 최영경이 효우로 이름이 있는 것을 극구 아룀으로써 영경을 구하려 했다는 증거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조께서 어찌 “정철이 내 앞에서 효우로서 영경을 일컬었다는 것은 내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다만 윤해평이 그의 지극한 효도를 말했는데, 이것은 들었다.” 하시었겠습니까. 또 영경이 국청에 있을 때, 정철은 실로 알지 못했다 하여 마치 애당초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속였습니다. 그렇다면 선조께서 어찌 “영경은 산림처사로 간신들이 원망을 품었다가 틈을 타서 모함을 꾸며 드디어 옥중에서 죽었다.” 하시었겠으며, 또 어찌 이르시기를 “영경의 억울한 죽음은 천하에 이를 데 없는 원한이요, 정철의 악독한 짓은 만고에 드문 흉계일 것이다.” 하셨겠습니까. 임금이 돌아가신 연대에는 비록 멀다고 하나, 인간에 있어서 일월(日月)과 같은 말씀은 마치 어제와 같으니, 간사하고 거짓된 말은 칠 것도 없이 저절로 깨어질 것입니다. 하물며, 양천경과 강현 등은 영경을 함정에 얽어 넣었던 자들인데 잡혀 와서 문초를 당할 때마다 정철이 시켰다고 공초하였고, 복죄하고서 죽었습니다. 열 눈이 보는 바를 그 어찌 가릴 수 있겠습니까*. 종명도 여기 이르면 할 말이 없게 되었는데도 이에 감히 두 사람이 거짓으로 자복했다하니, 그 말이 궁하여 도피하였음을 알 수 있겠습니다. 그 말에 또 이르기를, “정언신이 감옥에 있을 때 정철이 실로 힘써 구원하였는데, 언신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 시론에 몰려 정철을 여지없이 꺾었다.”고 하니, 아! 인간 천하에 어찌 친히 아버지를 구해 준 사람을 보고서 아버지를 모함한 원수라고 일컬을 자가 있겠습니까. 그 말이 들어맞지 않음은 책망할 것도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이 죽을 때 정철은 마침 위관에서 체직된 지 벌써 오래 되었고, 유성룡과 이양원이 서로 이어 대신하였다고 해서 죄를 옮겨 씌우려고 했습니다.” 하니, 아! 정철이 도로 위관이 된 것은 경인년 2월이었고, 이발의 어머니가 죽은 것은 경인년 5월 13일이었으며, 성룡이 우상(右相)에 제수된 것은 같은 달 일이라 아직 위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기에 소상히 실려 있는 바요, 국인이 다 아는 사실인데도 감히 속이기를 이와 같이 하니, 기타 애매한 일과 주워들은 말은 더욱 믿을 것이 못 됨이 명백합니다. 그 말은 비록 교묘하나 그 흔적은 더욱 드러나니, 만약 지금 다시 고찰하면 환히 밝혀질 것이니, 신들이 진실로 곡진하게 늘어놓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118쪽== 인심이 격분해서 감정이 솟아남을 스스로 그치지 못함은 진실로 선조의 비답에 이르기를, “그 시비는 저절로 공론이 있을 것이니, 한 사람의 손으로 천하의 눈을 가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셨는데, 아직 백년도 되지 않아 옥석이 서로 섞여 간사하고 악독한 몸에 죄명이 더해지지 않았으니, 구천에서 그는 반드시 달게 여기고, 세상이 속아 넘어가는 것을 비웃을 것입니다. 통탄스럽지 않습니까. 이래도 내버려 둔다면 군자는 무엇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겠으며, 소인은 무엇이 겁나 함부로 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은 반드시 정철을 벌 준 연후라야 이미 무너진 기강을 떨칠 수 있고 형통한 운수를 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죄악을 지은 자는 몸이 살았든 죽었든 고금을 가릴 것도 없이 모두 다스림을 받아 주륙을 당했는데, 어찌 지나간 일이라고 하여 논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므로 멀리는 당 나라에서 이임보의 관을 쪼갰고*, 가까이는 선조 때 남곤, 심정, 이기, 정순붕의 관직을 삭탈한 것이 다 죽은 뒤에 있은 일이니, 어찌 연수年數가 오래됨을 따지겠습니까. 옛날 일을 살펴보아도 이미 앞선 증거가 있고, 오늘날을 참작해 보아도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부합될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슬기로운 판단을 내리시고, 속히 국법을 베푸시어 정철의 벼슬을 추탈하여 소인들의 감계로 삼으시면, 양도가 바야흐로 살아나는 것이 「태泰」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군자가 바야흐로 나아감이 「형亨」에 이를 것이니, 정치와 교화가 차례에 따라 순조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아! 호남에서 불행히 이런 액운이 있어 간신과 적신이 나란히 동시에 모여서 남긴 치욕을 가셔내지 못해 인정이 여전히 울적하였는데 다행히 밝은 세상을 만났으니, 불가불 한 번 그 치욕을 거두어 치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천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와서 감히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털어놓으니, 비록 글 솜씨가 없고 말주변이 부족하여 만에 하나도 뜻을 드러낼 수 없으나, 그 아뢴 말씀은 실로 종묘와 사직에 도움이 있을 것이니, 행여 전하께서는 고루하고 촌스러운 말로만 돌리지 마시고 곡진히 참고하고 헤아려서 행하신다면, 장차 천하와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들은 애타는 마음을 끌어안고 격절함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소수疏首 지평 양몽거 양석거 양여화 양여표 양민거 양해거 양명거 양대춘 양대기 양운거 양대무 양필거 양일거 양용거 외 [己丑錄續, 丁巳春生員楊夢擧等疏]
*비태否泰 : 비否는 건과 곤이 겹친 것으로 하늘과 땅이 사귀지 못함을 보이는 괘, 태泰는 곤과 건이 거듭된 쾌로 하늘과 땅이 서로 사귐을 나타낸다.
*지일至日에 관문을 닫는 형상 : 동지와 하지를 다 지일이라고 이른다. 『주역』 복復괘에 이르되, “번개가 땅속에 있는 것이 복이니, 선왕先王이 이로 인하여 지일에 관문을 닫는다.” 하였다. 동지에는 음隂이 회복하고, 하지에는 양陽이 회복된다.
*대각臺閣을 사주해서 대신들과 역적들의 교제가 두터웠다고 탄핵케 하고, 유생들을 사주해서 조신과 역적이 왕래가 밀접했다고 의논케 하였으니 : 동년 12월 2일 생원 양천회가 상소해서 정여립이 조정의 벼슬아치 누구누구와 가까이 지냈다고 논핵한 일을 말한다.
*최영경과 원한이 있는 집에서 무고토록 하고 끝내는 뜬소문을 조작해서 최삼봉崔三峯이란 말을 꾸며 : 정여립의 참모로 알려진 길삼봉이 곧 최영경이라는 낭설을 말한다. ==119쪽==
*백유양白惟讓 삼부자에 이르러서는 집이 뒤집히고 알이 깨지는 것을 면치 못했고 : 백유양이 죽은 뒤, 그 아들 진민과 흥민이 공초하기를, “아버지가 모르는 일을 아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엎어진 둥지 밑에 알만 어찌 성하겠습니까.” 하고, 맞아 죽었다.
*열 눈이 보는 바를 그 어찌 가릴 수 있겠습니까 : 증자의 말에, “열 눈이 보는 바요, 열 손이 가리키는 바니, 그 엄할진저.” 하였다. 『대학』
*당唐 나라에서 이임보李林甫의 관을 쪼갰고 : 당 현종 때 간계로 정계에 암약한 재상인데, 죽은 후 양국충楊國忠이 돌궐 장수 아포사阿布思와 작당 반역하려 했다고 무고하여 관작이 추삭되고, 관을 쪼개 함주含珠와 금자金紫를 꺼내 버리고, 서민의 예로써 장사하게 하였다.
이 상소를 받아본 숙종은 거부하는 비답을 내렸다.
“상소를 보고 여러 선비들의 말은 모두 알았다. 비록 일이 그리 됐다고는 하나 다시 따지지 말라. 일찍이 인조 때 참작하여 정한 일을 지금은 지난 지가 오래인데 고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이나 지키라.‘
인조 때 이미 결정된 것이라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2월 22일, 상소가 요구로 돌아가자 무송공 등은 다시 상소를 올렸다. 1차 상소를 윤허해 달라고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너희들의 상소는 살펴봤다. 너무 지나치다. 지난 번 비답처럼 인조와 효종 때 밝히지 않았던 일을 50년이 지난 지금 어찌 번거롭게 하느냐. 해괴하다.‘
숙종은 또 가납하지 않았다. 두 차례 상소로 정철의 관작 회수에 실패하자 1691년(숙종 17)에는 나주에 사는 정무서鄭武瑞를 소수로 내세워 정철의 관작을 추탈하라고 요구했다. 1 ․ 2차 상소와 같은 내용이었다. 이 상소에는 우리 양씨 어른 19명이 연대 서명했다. 숙종은 “발본색원한다는 말은 매우 명쾌하나, 추삭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여론에 못이긴 숙종은 며칠 후 정철의 관작을 추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상소를 올린 뒤, 무송공은 남인 당로자의 추천으로 사헌부지평이 됐다. 청환직으로 언론기관의 중견 직임이다. 조선에서 현달한 관료는 거의 모두가 이 소임을 역임했다. 1694년(숙종 20), 폐출된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고, 왕비로 있던 희빈 장씨가 취선당으로 물러났다. 남인이 몰락하고 정권은 서인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를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무송공은 벼슬살이를 접고 낙향했다. 공은 자연을 벗 삼아 소요하다가 70세로 영면했다. 성종 시대에 권신 한명회를 탄핵했던 집의공자유과 더불어 남원양씨의 기개를 떨친 언론인으로 기억할 만한 어른이었다. 공의 사후, 서인 세상과 부딪힌 공의 후손들은 그들의 보복을 받아 고단한 세월을 보낸 것으로 전한다. ==120쪽==
라. 백수공의 당론
백수공응수은 정계에 발을 디딘 적이 없다. 그래서 사색당론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고 봐야 맞다. 그러나 당시는 학자든 정치가든 당론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므로, 어느 쪽 인사와 종유從遊하게 되면 그쪽 당인으로 지목했다. 더군다나 분당 초기의 당론은 정계에서 생산돼 산림으로 번졌으나 조선 후기의 당론은 산림에서 일어나 정계로 확산됐으므로 현실과 거리를 둔 학자라 할지라도 당론에 자기 의견을 개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수공의 학문은 기호학파畿湖學派 줄기다. 율곡 이이 → 사계 김장생 → 우암 송시열 → 농암 김창협 → 도암 이재 → 백수 양응수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이다. 서인의 주류인 셈이다. 서인이 숙종 연간에 송시열과 그 문하인 윤증이 소위 회니사생론이라는 논쟁으로 인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선 이래, 백수공은 노론과 어울렸다. 백수공이 당인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노론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백수공뿐 아니라 당시 남원양씨의 대표적인 학자로 일컬어지는 삼성당회영 ․ 오졸재진우 ․ 안암공춘태도 노론과 사귀었기 때문에 노론으로 분류됐고, 돈와종해 ․ 경암종을 ․ 담재공득희은 골수 노론인 대재 유언집° ․ 미호 김원행°의 문인이었으므로 철저한 노론이었다. 백수공의 연원이 이랬기 때문에 실제 당론에서는 철저한 노론 지지파로 남인을 배격했다.
이미 진술한 것처럼 백수공은 당론에 직접 간여한 적은 없다. 그러나 스승인 도암 이재°가 학문적 논쟁을 통해 학통을 세웠으므로 당론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도 없다. 학통도 하나의 당론이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이 학문적 견해를 달리 했던 것처럼, 백수공 당시도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사람과 집승의 성품이 같은지 다른지를 따지는 이론)을 주제로 한 논쟁이 치열했다. ==121쪽==
주자학을 달리 성리학이라고도 한다. 명종 ․ 선조 연간의 거유巨儒였던 이황과 이이는 이기설理氣說에 대한 견해가 달랐다. 학계에서는 이율곡의 기발이수설氣發理隨說을 지지하면 기호학파, 이퇴계의 이발기승설理發氣乘說을 지지하면 영남학파라고 한다. 기호학파는 송시열로 이어져, 그 문하에 수암 권상하 ․ 농암 김창협 같은 거유가 나왔다. 권상하 문인에는 남당 한원진과 외암 이간이 있었는데, 두 사람은 인물성동이론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한원진은 사람과 짐승은 타고난 성품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을 내세운 반면, 이간은 같다고 봤다. 사람들은 한원진이 호서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호론湖論, 서울에 살았던 이간의 논리를 낙론洛論이라 했다.
이 호락론쟁湖洛論爭은 송시열의 문인인 권상하의 호론을 한원진이 계승한 것이고, 이재는 스승 김창협에게 뿌리를 둔 낙론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간은 스승 권상하의 주장을 반박하고, 김창협의 이론을 따른 셈이다. 그래서 호락논쟁을 한원진과 이간의 싸움이라고 했다. 이 싸움은 전국의 학계로 번져 호락논쟁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백수공은 이재를 계승했으므로 호론을 배격하고 낙론의 학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122쪽==
제8장 창의倡義
1. 임진왜란의 창의
2. 병자호란의 창의
3. 한말韓末의 의병
조선 전기의 군사 조직은 고을 수령이 책임지는 진관제鎭管制였다. 이 체제는 수령이 독자적으로 지휘하므로 이웃고을과 연대가 어려웠고 대규모 외침과 부딪치면 금방 한계가 드러났다. 그래서 을묘왜변 이후에는 수령이 자치적으로 방위군을 확보하고 있다가, 외침을 당하면 중앙에서 파견한 장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이른바 제승방략制勝方略체제로 전환했다. 이 체제가 성공하려면 신속한 보고체계와 함께, 도로가 제대로 정비돼야 병력 집결과 기동력이 가능하다. 그러나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북변과 달리 남쪽은 대체로 문관이 지휘했다. 이들의 국방 의지는 말할 것 없고, 대비도 느슨했다. 임진 ․ 병자 양란에 속절없이 당한 이유다.
창의란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위하여 민간인이 의병을 일으켜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말한다. 의병이 없었다면 조선은 그나마의 국체도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남원양씨 어른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분연히 일어섰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의 야욕에 과감히 저항했다.
1. 임진왜란의 창의
전라도의 고경명°, 경상도 곽재우, 충청도 조헌, 함경도 정문수는 국란을 맞아 과감히 일어선 대표적 의병장들이다. 고경명은 60을 넘긴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킨 호남의 중추적 인물이었다. 그의 큰아들 종후從厚는 왜군의 호남 진출 길목인 진주성으로 창의사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들어갔다가 김해부사 이종인 ․ 충청병사 황진 ․ 경상병사 최경회 등과 더불어 산화했다. 얼마 안 돼 고경명도 수천의 창의군을 이끌고 충청도 금산으로 진군, 둘째아들 인후因厚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이 기록한 당시 의병장은 전주 최호崔虎 ․ 양몽열梁夢說외 12명, 남원 양희적楊希迪 ․ 변사정°邊士貞 외 42명, 임실 오성吳誠 ․ 김성진金聲振 외 4명, 순창 양사형 ․ 한응성° 외 6명, 정읍 김제민金齊閔 ․ 송창宋昌 외 23명, 고창 서홍도徐弘度 ․ 김홍우金弘宇 외 21명, 부안 안충남安忠南 ․ 김태복金泰福 외 3명, 김제 안휘安徽 ․ 박석정朴石精 외 4명, 익산 송대창宋大昌 ․ 이서원李瑞遠 외 6명, 옥구 전용권田用權 등이다. 이 절의록에 오른 남원양씨 어른은 어은공사형 ․ 모정공희적이시다(p.44 ․ 45 참조). ==124쪽==
모정공은 지금의 삼계면 아산리에 사셨는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남원이었기 때문에 남원으로 돼 있다. 어은공과 함께 활약하다 전사한 한응성 장군은 순洵의 사위, 생원공 공이公儞의 손녀사위다. 순이 후사가 없어 처가 봉사를 했는데, 스승 조헌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