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운반 농구 ‘속새이’에 얽힌 사연들
(작성 중 : 농구(農具) 시리즈 제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의 농기구에는 ‘속새이’라는 것이 있다. ‘속쌔이’ 또는 ‘쏙새이’라고도 하는데, 옛적 우리 고향 사람들은 ‘ㅆ’ 발음을 잘 하지 못해 주로 ‘속새이’라고 표현했었다.
표준어로는 ‘소쿠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속새이’는 세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싸릿대(싸리의 줄기)’나 ‘대오리’로 만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짚’으로 만든 것이다.
싸리속새이
그리고 광산(鑛山)이나 치도부역(治道賦役)을 할 때 광석을 담거나, 자갈을 채집하는 ‘속새이’는 ‘철사(鐵絲)’로 만든다. 크기는 대체로 길이 70여 cm, 너비 50여 cm 정도 되었다.
이 ‘속새이’에 대해서는 경상남도 통영(統營)에서 다년간 방언연구(方言硏究) 활동을 하시는 김성재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충실하지는 못하지만, 답변을 겸하고자 한다.
외동읍(外東邑)의 경우 ‘싸릿대’로 만든 것을 주로 ‘속새이’라 하고, 짚으로 엮어 만든 것은 ‘집속새이(짚속새이)’, 철사로 만든 것은 ‘철사속새이’라고 했었다.
짚속새이
‘속새이’를 ‘소구리’라고도 했는데, ‘소구리’는 ‘소쿠리’의 경주지방 방언(方言)이다. ‘소구리’라 할 경우 ‘사리(싸리)속새이’․‘집(짚)속새이’․‘철사속새이’는 ‘사리소구리’․‘집소구리’․‘철사소구리’가 된다.
당시의 경주지방(慶州地方) 사람들은 ‘ㅆ’ 발음(發音)도 제대로 못했지만, ‘ㅍ’ 발음도 여의치 않아 ‘싸리’를 ‘사리’라 하고, ‘짚’은 ‘집’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표준어(標準語)인 ‘소쿠리’와 사투리 겸용인 ‘삼태기’와 ‘어렝이’는 물론 지방마다 제 각각인 ‘소쿠리’의 사투리들이 하나같이 일관(一貫)된 정의가 없고, 아무런 기준도 없이 혼용(混用)되고 있어 이런 말을 쓰지도 듣지도 못했던 이들은 뭐가 뭔지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철사속새이
사전에서 ‘소쿠리’는 테가 둥그렇고 앞만 트이게 ‘대오리’나 ‘싸릿대’로 만든 그릇이라고 정의(定義)하고 있으나, ‘농업과학관(農業科學館)’에서는 농산물을 담아두는데 쓰는 그릇으로 ‘대오리’로 바닥이 없이 둥글게 만들며, 주로 소채(蔬菜)와 같은 농산물을 담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두 가지의 설명이 서로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달리 보면 엇비슷하거나 다른 해석(解釋)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농업과학관’의 경우 ‘소쿠리’가 아닌 ‘대바구니’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전(辭典)에서는 ‘대소쿠리’는 ‘대오리’를 결어 만든 소쿠리, ‘바소쿠리’는 ‘싸릿대’로 만든 ‘삼태기’라고 설명되어 있고, 여기에다 ‘삼태기’는 흙이나 쓰레기 따위를 담아 나르는 데 쓰는 ‘대오리’나 ‘싸릿대’ 따위로 엮은 기구(器具)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분명한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소쿠리(대바구니)
따라서 이상의 설명을 종합하면 표준어 ‘소쿠리’는 ‘소쿠리’도 되고, ‘대바구니’도 되고, ‘삼태기’도 된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짚’으로 만든 ‘짚소쿠리’는 용어조차 등재(登載)되어 있지 않다. ‘삼태기’는 또 옛말로 ‘산태’라고 했다는 얘기를 추가(追加)하고 있다.
사전 외의 기록에서는 ‘삼태기’를 지방에 따라 ‘삼태미’라고 한다는 설명과 함께 ‘재’나 ‘두엄’을 담아 논밭에 뿌려주거나, 수확한 농산물(農産物)을 담아 나르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짚’이나 ‘싸릿대’ 또는 ‘대오리’를 엮어 만든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비료삼태기’는 농작물(農作物)에 비료를 뿌려줄 때 ‘삼태기’에 비료(肥料)를 담아 어깨에 메고 쓰는 연장이라고 부연(敷衍)하고 있다.
삼태기
(짚소쿠리, 즉 '짚속새이'를 말한다)
여기에다 ‘어렝이’는 얼멍얼멍하게 ‘통싸리(싸릿대)’로 엮어 만든 작은 ‘삼태기’로 보통 광산(鑛山)에서 쓴다고 정의하고 있고, 흙이나 모래 따위를 져 나르는 데 쓰이는 ‘질통’을 ‘삼태기’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일부지역에서는 ‘채소쿠리’라고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채’는 ‘바구니’나 ‘광주리’ 따위의 그릇을 결어서 만드는 데 쓰는 껍질을 벗긴 ‘싸릿대’나 ‘고리버들’의 가는 ‘나무오리’를 말한다.
그리고 ‘철어렁이’는 철사로 엮어 만든 ‘삼태기’로 광석(鑛石)·버력 따위를 담아 붓는 데 쓴다고 정의하고 있다. 외동읍(外東邑)에서 말하는 ‘철사속새이’를 말한다.
어렝이
(사진에서 '어렝이'라고 표시했으나, 싸리 소쿠리, 즉 싸리속새이를 말한다)
이상의 설명(說明)에서 알 수 있는바와 같이 ‘소쿠리’든, ‘삼태기’든, ‘대바구니’든 딱 부러진 설명이 없다. 이렇게 애매(曖昧)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옛적에 농사를 짓지 않았거나 모르던 양반(兩班)들과 지식인(知識人)들이 주를 이루던 중산층 이상의 서울사람들의 말에는 시골 무지렁이들, 그것도 천 여리나 떨어진 영호남(嶺湖南) 지방의 ‘농투산이’들이 만들어 사용하던 농기구(農器具)의 명칭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알지도 못했다.
그런 농기구(農器具)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중인(中人)들이나 상민(常民)들이 짓던 농사(農事)를 짓지도 않았고,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에 알 수도 없었던 것이다.
대나무 속새이
따라서 표준어(標準語)를 만들 때 자기들이 아는 명칭은 서울말이나 표준어로 만들 수 있었지만, 모르는 말이나 듣도 보도 못한 농기구(農器具)의 명칭은 아무리 국문학자(國文學者)들이라 하더라도 무슨 말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쿠리’라는 서울말도 ‘삼태기’와 같거나 비슷한 것처럼 적당히 표현하고 있고, 이 때문에 지방에서 사용하는 ‘소쿠리’에 대한 사투리도 그 영향을 받아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각종 농업박물관(農業博物館)에 근무하는 종사원(從事員)들 역시 그 시절을 살면서 이들 농기구(農器具)를 만들고 쓴 농부들이 아니고, 만들어보지도 써보지도 않은 문외한(門外漢)들이라 이름도 용도도 엉뚱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쿠리(소구리)
(일부에서 이를 '소쿠리'라고 하나, '광주리'다)
‘소쿠리’에 대한 지방사투리를 약간 살펴본다. 먼저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앞서 말 한대로 ‘소쿠리’를 ‘속새이’라고 한다. 그리고 ‘싸릿대’로 만든 것을 주로 ‘속새이’라고 하고, 짚으로 엮어 만든 것은 ‘짚속새이’, 철사로 만든 것은 ‘철사속새이’라고 한다.
전라북도 진안(鎭安) 등의 지방에서는 재료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소쿠리’를 ‘삼태기’라 하고, 충북 괴산(槐山) 지방에서는 짚으로 만든 ‘소쿠리’는 ‘삼태기’라 하고, ‘싸릿대’나 칡덩굴로 만든 것은 ‘어렝이’라 하여 구분한다.
전라남도 고흥(高興)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짚으로 만든 것을 ‘거렝이’라 하고, 대오리·싸릿대 등으로 만든 것을 ‘삼태미’ 또는 ‘삼태기’라 한다. 또한 광산(鑛山)에서는 ‘통싸리(싸릿대)’로 엮어 만든 것으로 보통 ‘삼태기’보다는 작은 것을 ‘어렝이’라고 부른다.
삼태기
(일부에서 이를 '삼태기'라고 하나, 헌 '짚소쿠리'를 말한다)
‘어렝이’는 표준어(標準語)이기도 한데, 광산의 갱내․외 작업장에서 경석(磬石 ; 경쇠를 만드는 돌)을 광차(鑛車)에 실을 때 사용한다.
본론으로 돌아간다. 사전이나 각종 문헌에서는 ‘소쿠리’를 ‘소쿠리’와 ‘삼태기’, ‘대바구니’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 용도(用度)를 설명하고 있는데, 이마저 구구각색이다.
우선 ‘삼태기’라고 정의하는 글에서는 그 용도를 아궁이의 ‘재’를 담아서 잿간에 버리고 흙이나 쓰레기를 나르기도 하고, 재나 퇴비(堆肥)를 ‘바지게’에 지고 논밭에 가서 뿌리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타작할 때 곡식(穀食)을 퍼 담거나 옮기는 데에도 사용하고, 이를 허리에 차고 밭에 씨앗을 뿌리기도 하며, 고구마·감자 등을 캐어 모으는 데에도 쓴다고 설명하고 있다.
잿거름
그리고 일반적(一般的)인 ‘삼태기’의 형태와 특징(特徵)으로는 싸릿대·대오리·칡덩굴·짚·새끼 등으로 엮어서 만드는데, 짚이나 새끼로 만든 것은 앞은 벌어지고 뒤는 우긋하게 울타리를 삼고, 위의 가장자리는 나무를 휘어 둘러서 테를 만들어 손잡이를 삼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삼태기’의 하나로서 ‘개똥삼태기가’ 있는데, 멜빵을 길게 하여 어깨에 메고 개똥·쇠똥·말똥 등 거름을 긁어 담는 데 쓴다고도 부연되어 있다. 외동읍(外東邑)에서 사용되던 ‘개똥망태’를 이르는 말이다.
개똥망태
이상의 내용을 보면, 그런대로 적절한 설명과 정의(定義)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구체적(具體的)인 용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소쿠리’가 과연 ‘삼태기’인지도 명확(明確)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문제를 해소(解消)하기 위해서는 우리고향 외동읍(外東邑)의 농기구인 ‘속새이’의 모양과 용도(用度)를 살펴보면 해답이 나온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우선 ‘싸릿대’로 만든 ‘소쿠리’를 일반적(一般的)으로 ‘속새이’라고 하는데, 주로 퇴비(堆肥)를 비롯한 거름을 담아 나르고, 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소구리’라고도 하는데, 역시 같은 말이다.
속새이(싸리 속새이)
필요에 따라서는 개체(個體)가 굵은 무나 배추, 감자와 고구마 등속의 농산물(農産物)을 담아 날랐고, 치도부역(治道賦役)을 할 때는 자갈을 채취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었다.
‘싸리속새이’는 말 그대로 ‘싸릿대’를 엮어 만드는데, ‘싸릿대’와 ‘싸릿대’의 사이가 너무 듬성듬성하여 곡식 같은 작은 개체의 농산물(農産物)이나, 모래와 흙, 재나 잿거름 같은 것은 그 사이로 빠지거나 흘러내리기 때문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싸리속새이’는 쇠똥이나 돼지똥, 개똥으로 만든 퇴비(堆肥)나 잿거름이 소쿠리에 묻어도 개울이나 논물에 흔들어 씻어버리면, 깨끗해지기 때문에 편리한 면이 있었다.
풀이나 검불 등 부피가 큰 것들도 ‘싸리속새이’에 담아 운반(運搬)하고, 길을 걷거나 개울에서 목욕(沐浴)을 하다가 급히 치부(恥部)를 가리려면, 갖고 있거나 가까이에 있는 ‘빈 속새이’로 그곳을 가리기도 했으며, 만나기 싫은 사람이나 피하고 싶은 사람이 마주 올 때는 이것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었다.
속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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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짚’으로 엮어 만든 ‘속새이’는 ‘짚속새이’라고 한다. ‘짚속새이’는 처음 만들어 새 것일 때는 곡식이나 씨앗, 가축(家畜)의 사료(飼料) 등 깨끗한 물건을 담아 나르거나 비료(肥料)를 담아 논밭에 뿌리기도 했고, 헌 것일 때는 부엌아궁이의 재, 흙이나 모래 등을 담아 운반하였다.
그리고 수명(壽命)이 다 되어 아주 낡아 볼품이 없어지면, 쇠똥이나 돼지 똥, 개똥으로 만든 ‘똥거름’ 등을 날랐고, 이들 거름을 밭이나 논보리 밭에 지게에 지거나, 소에 싣고 가서 흩뿌리기도 했었다. 짚이나 새끼에 오물(汚物)이 묻어도 크게 아까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짚속새이
그리고 치도부역(治道賦役)을 위한 자갈 채취(採取)를 목적으로 철사로 만든 ‘속새이’는 ‘철사속새이’라고 했는데, 오일장 철물점(鐵物店)에서 구입하기도 했고, 신작로(新作路) 교량 밑이나, 철교 밑 제방에 부설(敷設)한 ‘돌망태용’ 철사를 몰래 잘라내어 만들어 쓰기도 했었다.
‘속새이’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려 보려고 얘기를 시작하기는 했는데, 필자 역시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경상도 동남부 사투리 ‘속새이’는 표준어(標準語)인 ‘소쿠리’를 말하는 것이고, 이를 ‘소구리’라고도 한다.
그리고 ‘속새이’에는 싸릿대로 만든 ‘싸리속새이’, 짚으로 만든 ‘짚속새이’, 철사(鐵絲)로 만든 ‘철사속새이’가 있고, 그 용도는 위에서 열거(列擧)한 내용과 같다”고 정리할 수 있다.
돌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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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위에서 말한 ‘치도부역’과 ‘싸리속새이’와 ‘철사속새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그 시절 ‘속새이’로 자갈을 채취하여 비포장도로(非鋪裝道路)를 수선하던 ‘치도부역’의 내력과 사연(事緣)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日本)이 우리나라를 강점(强占)한 후 전국에 ‘신작로(新作路)’라는 것이 생겨났다. 새로 만든 길이란 뜻의 신작로, 이 말 속에는 한반도(韓半島)를 철저히 통치하고 수탈하기 위한 일본의 식민지통치(植民地統治)의 본질이 숨겨져 있었다.
1911년 일제(日帝)는 한국지배(韓國支配)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741km에 달하는 신작로(新作路)를 전국에 걸쳐 건설하기로 했다.
그 시절 신작로
이들 신작로는 당시 우마차(牛馬車)를 사용하는 우리 민족의 생활과는 무관하게 총독부(總督府)의 치적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전시효과와 경제·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들 신작로들은 주로 곡창지대(穀倉地帶)를 항구도시와 연결시켜 우리나라의 곡물(穀物)을 일본으로 쉽게 실어 나르기 위한 경제침략(經濟侵略)의 수단으로 건설되었다.
때문에 넓은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우리민족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피해(被害)와 고초를 겪게 되었다. 당시 왜놈 헌병(憲兵)들의 책상 위에는 언제나 지도(地圖)가 펼쳐져 있었고, 그 지도 위에 연필로 찍찍 그은 것이 신작로였다.
그래서 이를 속칭 ‘연필도로(鉛筆道路)’라고 했는데, 이 계획선(計劃線)에 걸리면 논이건, 밭이건, 집이건 그대로 헐려 아무런 보상(補償)도 없이 그냥 빼앗겨 버렸다.
왜놈 헌병
게다가 이들 신작로(新作路)의 건설은 거의 전부 인근 주민들의 강제노역(强制勞役)으로 이루어졌는데, 여기에 동원된 사람들은 식사제공(食事提供)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하고, 밤이면 길바닥에 쓰러져 잠을 자야 했었다.
이렇게 신작로(新作路)는 일제의 식민지 당시 우리 민중들의 고통(苦痛)과 한숨이 섞여 있는 길이었다. 그리고 간악한 일제는 그 신작로에 대한 치도(治道)까지 땅과 집을 뺏긴 우리 민족에게 강제로 부과(賦課)했었다.
당시의 신작로(新作路)에 대한 민중(民衆)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단면이 ‘진도 아리랑 타령’에 전해지고 있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치마끈 졸라매고 논 샀더니
물 좋고 밭 좋은 데로 신작로가 난다
신작로 난 일도 내 원통한데
치도비 물라는 고지서가 나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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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20년대 우리나라에는 아래와 같은 유행가(流行歌)가 불리어 지기도 했었다.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통치(植民統治)를 강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의 발판을 만들기 위하여 기름진 문전옥답(門前沃畓)을 빼앗아 신작로(新作路)를 만들던 횡포를 비난하는 노래였다.
볏섬이나 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구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구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구요.
얼굴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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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도부역(治道賦役)’ 얘기를 시작한다. 치도(治道)란 일반적으로 ‘다스리는 도리(道理)’를 말하나, 다른 말로는 길닦이, 즉 도로(道路)를 유지 보수(補修)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부역(賦役)이란 우리나라 전근대사회의 수취체계에 있어서 조세(租稅)·공부(貢賦)와 함께 수취의 3대지주를 형성한 세(稅)의 하나였다.
여기에서 역(役)은 크게 노역(勞役)과 신역(身役)으로 나눌 수 있는데, 노역은 인간의 노동력이 국가권력에 의해 무상으로 수탈되는 강제노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역(徭役 ; 나라에서 구실 대신으로 시키던 노동) 또는 역역(力役)이라고도 한다.
치도부역
따라서 ‘치도부역(治道賦役)’이란 도로를 유지(維持) 보수하기 위해 무상(無償)으로 부과되는 강제노역(强制勞役)이라 할 수 있다.
‘치도부역’을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서는 마을에 따라 ‘자갈부역’, ‘신작로부역’, ‘도로부역’이라고도 일컬었다. ‘자갈부역’이란 ‘치도부역’의 핵심작업(核心作業)이 자갈을 채취하여 모으거나 도로바닥에 까는 작업이기 때문에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치도부역을 나간다’는 말을 ‘치도 나간다’라고도 했었다. 물론 당시의 시골 무지렁이들은 ‘치도(治道)’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필자도 마찬가지였다. 외동읍지역의 발음으로는 ‘치도’의 ‘치’자에 악센트를 줘야 한다.
그 시절 신작로
그러면 이 강제노역으로서의 ‘치도부역(治道賦役)’제도는 언제부터 누가 만든 제도인가. 물어볼 것도 없다. 악랄한 일본(日本)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를 무력(武力)으로 병합한 후 자신들의 식민통치(植民統治)를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나아가 중국대륙(中國大陸)을 침략하기 위한 군사용(軍事用) 도로확보와 관리를 위한 술책(術策)으로 만든 제도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일제(日帝)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강제로 부과(賦課)한 ‘치도부역’의 태동과정(胎動過程)을 알아보기로 한다.
일제는 1906년(필자의 선친께서 출생하신 년도)부터 시작된 통감부(統監府 ; 1906년부터 1910년 국권피탈까지 일본의 한국 지배기관) 시절에 이어 1911년 발족한 본격적인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앞세워 미개발 상태의 한반도 내의 도로망(道路網) 건설과 개보수(改補修)사업을 시작했다.
당시의 통감부 건물
그러나 통감부(統監府) 시절의 도로공사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제1,2기의 치도공사(治道工事)는 당시의 일본 국력으로는 너무나 큰 사업에 속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1등도로는 폭 7m, 2등도로는 5m밖에 되지 않아 이를 2차선 이상으로 확장(擴張)하려면 여간 큰 부담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일제는 통감부(統監府) 시절에 실시한 28개 노선 817km, 총독부(總督府) 시절 초기의 34개 노선 2,690km를 확장 또는 연결하면서 도로에 편입되는 부지(敷地)는 기부라는 명목으로 모두 수탈했고, 이에 따른 노역은 그 토지를 뺏긴 모두 우리 국민들을 무상으로 강제 동원하여 담당케 했었다.
조선총독부 청사
그리고 해방이 된 이후에도 일제(日帝)의 관리출신인 우리나라 정부 관리들이 일제에서 배운 방식 그대로 우리 국민에게 부과(賦課)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 목적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收奪)하고, 대륙침공을 위한 전쟁준비에 무고(無故)한 우리 국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것이고, 해방(解放)된 우리나라에서는 모든 것을 일제가 수탈해 간 상태에서 6.25전쟁까지 발발(勃發)하여 국가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강제노역을 부과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6.25동란 당시에는 미군(美軍)의 탱크나 장갑차량을 비롯한 유엔군 차량이 주야로 쉴 새 없이 운행했기 때문에 도로 파손(破損)이 심했고, 노면의 자갈이 튀어나가 패는 등 자갈의 소요(所要)가 많아 전쟁 전 1년에 봄, 가을 두 번 정도 하던 치도부역(治道賦役)을 수시로 나가야 했었다.
치도부역
이하에서는 이러한 상황(狀況)에서 필자가 향리에서 겪은 ‘치도부역(治道賦役)’의 경험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해방 전에도 그랬지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주민들은 해방 이후 지금의 7번국도가 확포장(擴鋪裝) 되기 전까지 마을마다 가구마다 할당된 구간에 대한 치도(治道)를 담당하였다. 물론 그 방식은 부역(賦役)의 형태였다.
비포장(非鋪裝)도로였던 7번 국도는 일제시대(日帝時代)부터 도로가 통과하는 부락의 주민들이나 그 도로(道路)와 전혀 상관이 없는 부락민들도 집집마다 일정 거리만큼을 분담(分擔)하여 수시로 자갈을 깔고, ‘벳꾸밧꾸(도로면 요철)’를 매우는 등 유지(維持) 보수의 의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외동읍민들의 ‘치도부역’
10여m씩의 도로를 할당받아 ‘치도부역’을 했는데, 부역(賦役)을 나갈 때는 부녀자(婦女子)와 어린이 등 전 가족이 총동원(總動員)되다시피 하기도 했었다.
동리(洞里) 별로 날짜를 정해 봄과 가을 몇 차례씩 아침 일찍 ‘초백이’에 보리밥을 터지게 담고, 김치 짠지조각을 듬뿍 담은 ‘옹찰이(옹가지의 사투리)’나 바구니를 이고 지고 자기 집에서 맡은 도로변으로 나갔다.
하천바닥을 파서 ‘싸리속새이’나, 철사(鐵絲)로 만든 ‘철사속새이’로 자갈을 치면 모래는 빠지고, 자갈만 남는데 이 자갈을 자기가 할당(割當) 받은 도로변에 지게로 져 나르거나, 함석동이로 여다 일렬로 쌓아놓고 감독관(監督官)의 점검을 받았다.
이때의 감독관은 면사무소의 면서기(面書記)들로 거의가 일제 때부터 근무하던 ‘일제(日帝) 출신’ 면서기들이었다.
그 시절 면서기
(전북 태인면사무소, 가운데가 면장, 좌측은 주재소장)
그리고 필자가 살던 괘릉리 ‘샛말’의 경우 활성천(活城川)과 원성왕릉(元聖王陵) 입구에 이르기 전 괘릉천(掛陵川)까지의 구역을 맡았는데, 배정된 구역 양쪽 끝에 두 곳의 하천(河川)이 있어 가장 유리한 구역을 배정받은 셈이었다.
당시의 외동면장(外東面長)과 동네 구장(區長)이 모두 필자가 살고 있던 ‘샛말’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구간(區間)을 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
자갈이 부족하면 활성교(活城橋)와 괘릉교(掛陵橋)의 공굴다리 밑, 또는 그 아래쪽 동해남부선 철로 ‘공굴다리’ 밑 하천(河川) 바닥이나, 인근 산비탈에 있는 굵은 돌을 망치로 깨트려 자갈을 만들어 깔기도 했었다.
공굴 다리
여기에서 잠시 회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위에서 말한 ‘싸리속새이’와 ‘철사속새이’의 모양과 용도(用度)를 좀 더 구체적(具體的)으로 알아본다.
‘싸리속새이’는 앞에서 소개한 대로 ‘싸릿대’를 잘라 엮은 ‘속새이’로 주된 용도는 농작물(農作物)을 운반하거나, 거름을 운반할 때 사용하는 농기구(農器具)였다.
그리고 ‘치도부역’을 할 때는 하천(河川) 바닥에 자갈이 섞인 모래를 두어 삽 떠서 싸리 ‘속새이’에 담고 흔들면, 모래와 작은 돌멩이는 모두 ‘속새이’ 틈새로 빠져나가고, 굵은 자갈만 남게 되는데, 문제는 대개의 경우 헌 ‘속새이’로 자갈을 채취(採取)하기 때문에 ‘속새이’가 쉬 망가진다는 점이다.
하천바닥 자갈
마른 개울이라 하더라도 바닥을 파고 들어가면 물이 새어나와 자갈이 섞인 모래는 물에서 건진 것이나 마찬가진데, 이것을 ‘속새이’에 담아 치면 ‘싸릿대’나 이를 엮은 새끼 또는 칡넝쿨이 물에 불어 끊어지기도 하고, 쉬이 파손(破損)되어 몇 시간을 못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철사속새이’였다. 치도부역제도(治道賦役制度)가 몇 년 동안 시행되다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평생 동안 자손대대로 시행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약은 상인(商人)들이 철사 소쿠리를 개발하여 오일장마다 철물점(鐵物店)을 차려 보급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철사속새이’는 주로 강철(鋼鐵) 철사로 만들어 ‘속새이’가 밑으로 처지거나, 변형(變形)이 되지 않았고, 웬만해서는 파손(破損)되지 않아 이점(利點)이 많았다.
철사속새이
그러나 보릿고개 등으로 너무나 빈한(貧寒)했던 당시의 시골 서민들은 이 ‘철사속새이’를 쉬이 구입(購入)할 형편이 되지 못해 집에서 자작(自作)으로 만들어 사용하곤 했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철사속새이’를 자작으로 만들려면, 주재료(主材料)인 철사를 구해야 했는데, 이 역시 서민(庶民)들은 구할 길이 없었다. 돈이라고는 먹고 죽으려 해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신작로(新作路) 교량 밑이나, 철교(鐵橋) 밑 하천변 제방(堤防)에 부설해 놓은 ‘돌망태’를 엮은 철사를 몰래 잘라내기도 하고, 도로변 전신주(電信柱)가 넘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매어놓은 지지용(支持用) 철사 줄을 몰래 잘라 만드는 방법이었다.
여기에서 말한 ‘돌망태’는 철선(鐵線)으로 만들어진 그물형상에 돌을 채워서 제방(堤防) 등에 세굴방지를 위해 설치하는 시설물(施設物)을 말한다.
돌망태
그런데 하천변(河川邊) ‘돌망태’ 철사를 잘라내면 홍수(洪水) 때 제방이 터져 농지와 도로, 철로(鐵路)가 유실되고, 전봇대 지지용(支持用) 철사를 잘라내면 전봇대가 넘어져 통신(通信)이 두절되는 문제가 생긴다.
6.25당시 이런 짓을 했을 경우 어떻게 되었겠는가. 더 물어볼 것도 없이 이적행위(利敵行爲)였고, ‘빨갱이’의 누명(陋名)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은 조사도 재판도 없는 총살형(銃殺刑) 뿐이었다.
붕괴된 돌망태
그리고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만들었던 돌망태용 철사는 모두 연철(軟鐵) 철사여서 이것으로 ‘철사속새이’를 만들었다 해도 자갈모래를 담고 흔들면, 아래로 축 처지거나, 틈새가 제 각각 변형(變形)되어 ‘철사속새이’의 기능(機能)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했다.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신작로(新作路)에 얽힌 옛 추억을 아쉬워하는 어느 이름 모를 여인의 추억담(追憶談)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추억의 신작로
검은 아스팔트길로 매끈하게 단장된
길 위를 차들은 거침없이 씽씽 잘도 달려갑니다.
어릴 때, 흙먼지 풀풀 날리던 신작로의 추억은
우리들 가슴에 이렇게 살아 꿈틀거리는데,
곧게, 넓게 포장된 지금의 도로에선 그때의 모습은
사라진 체 추억의 흔적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옛날 아카시아 나무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신작로를 작은 걸음으로 5리나 걸어서
학교에 다니던 우리는 아카시아 꽃이 피면
향긋한 향기를 맡으며 걸었었고 달콤했던
하얀 꽃은 우리들의 간식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또 책보를 머리에 이고는
열대여섯 개씩 잎이 달린 줄기를 따서
가위 바위 보를 해서 이기면 이파리
하나씩을 떼어내던 게임을 하며 오고 갔던 길.
뙤약볕이 내리는 여름날에는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서 신작로에서 주운 크기가
비슷한 돌멩이를 모아 친구들과 함께 모여
공기놀이를 하며 더위를 식혔었고..
가끔 멀리서부터 먼지를 풀풀 날리며
차라도 달려오면 하던 공기놀이를 멈추고
얼른 한 켠으로 비켜섰었고 차가 남기고 간
연료 타는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던 우리였습니다.
어쩌다 귀한 경운기라도 지나갈라치면
위험한줄 알면서도 경운기 뒤를 잡고 냅다 달려가
올라타기도 했었고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모습으로
마음씨 좋은 아저씨의 덜컹거리는 달구지에 앉아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지나던 신작로
봄이면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여
향기로 멱을 감듯 그 향기에 젖어 걸었었고,
여름에 갑자기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딸랑 딸랑 필통소리 요란하게 내며 달리던 그길
가을이면 누렇게 익은 벼를 꺾어
참새처럼 한 알, 한 알 까먹으며 걸었었고,
겨울이면 발목까지 눈에 빠지면서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걷던 그 신작로
흙먼지 날리던 추억의 그 신작로를
꽃무늬 양산이라도 받쳐 들고 걸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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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돌아간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으면서 자갈을 채취하여 알뜰하게 쌓아둔 자갈무더기는 장마나 홍수(洪水)가 지나간 후 도로바닥이 울퉁불퉁하게 패면 골고루 깔아 노면(路面)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자갈무더기가 동이 나면 다시 날짜를 잡아 ‘치도부역’을 했다. 너무 굵은 돌을 깔아 사람이 다니기에 무척 불편했을 뿐 아니라 미군(美軍) 트럭들이 과속(過速)으로 달릴 때는 굵은 돌멩이가 튀어 날아와 행인(行人)들이 다치기도 했었다.
비포장도로 자갈길
필자를 비롯한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학생들이나 입실초등학교 재학생들의 경우 입실리 거주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학생들이 적게는 3년에서부터 많게는 6년 내지 9년씩 이 비포장(非鋪裝) 자갈길을 걸어 다녔기 때문에 뒤집어 쓴 모래먼지도 몇 말이나 되겠지만, 자동차바퀴에 튀어 오르는 자갈에 얻어맞은 일도 부지기수였다.
특히 난폭(亂暴)하기 이를 데 없는 미군 ‘지에무씨(GMC)’의 경우 머리통만한 돌멩이를 튀어 오르게 하여 아찔한 순간을 맞는 경우도 다반사(茶飯事)였다.
도로변에 채취(採取)하여 모아둔 자갈을 일제히 노면(路面)에 깔 때가 특히 위험했었다. 자갈과 돌멩이가 어지럽게 널려있고, 이들이 다져지지 않아 바퀴가 닿기만 하면 길길이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자갈길 걸어 등교하는 어린이들
당시의 내동면(內東面) 진현동(외동면 신계리와 경계한 불국사 마을), 신계리, 괘릉리, 활성리 등지의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 학생들은 이런 때마다 연안리를 지나 개곡리 대성마을 입구 갈래 길로 들어서서 말방리와 활성리를 거쳐 괘릉리(掛陵里)의 원성왕릉(元聖王陵) 앞으로 이어지는 농로(農路)를 따라 통학을 하곤 했었다.
이 길은 말방리(末方里) 마을앞 하천, 장산마을 앞 하천, 활성리(活城里) 마을앞 하천, 괘릉리의 동천강(東川江) 상류 하천, 신계리(薪溪里) 마을 앞 형산강 상류 하천 등 4-5개의 하천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여름철 홍수(洪水)가 나서 징검다리가 물에 잠겼을 때는 신발을 벗어들고, 바지가랑이를 있는 대로 걷어 올리곤 했었다.
동천강 상류 징검다리
그리고 말방리 장산마을 뒤 들판, 활성리 앞 들판, 원성왕릉(元聖王陵) 앞 들판 등 동부 외동평야를 가로질러 와야 했기 때문에 겨울에는 세차게 몰아치는 서북풍(西北風)에 날려가지 않기 위해 허리를 최대한 구푸리고, 모자를 벗어 들어야 했다.
‘치도부역’이 끝나고, 자갈이 어느 정도 다져져 위험(危險)이 사라지면 다시 7번국도를 따라 통학(通學)을 한다. 위험한 이 도로로 다시 돌아오는 이유는 이 도로를 따라 걸어 다니면, ‘나마가시’를 사 먹을 수 있는 점빵(점방 ; 店房)이 있는데다 여러 가지 볼거리도 많았고, 죽동리 등지의 친구들과 갖가지 놀이를 하며 귀가(歸家)하는 것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죽동리
여기에서 잠시 그 시절, 비포장(非鋪裝) 자갈길을 오가던 시외버스를 타고 도회지 학교로 통학하던 여고생(女高生)의 일상을 음미해 본다.
비포장 자갈길에 버스가 ‘뱃구밧구’를 넘느라 털커덩 하고 키질하면, 콩알처럼 튀어 올라 버스천정에 머리가 쿵하고 부딪히는 콩나물시루 시외버스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인다.
통학 버스
안대환(여자 이름임)
자갈길에 버스가
털커덩 하고 키질하면
콩알처럼 튀어 올라
천정에 머리가 쿵
그래도
아픈 것 보다
웃는 것이 더 급해
그만 깔깔깔 웃고
흙먼지로 분단장한 미루나무는
어라! 재밋다고 놀리며
차창가로 실실 웃고 가네.
점심시간에 열어본
양은 도시락은
어느새 지가 알아서
김치 국물을 말아 놓았고
새벽 밥 짓는 아궁이 불에
엄마가 그리도 아껴 때던
장작개비 몇 개 몰래 더 넣어
숫불 다리미에 온 몸을 실어
볼입으로 풀물 뿌려 가며
깃 세운 하얀 교복 칼라는
에어컨 없는 버스에
비지땀 식히려고
창문 잠시 열었을 뿐인데
어느새 누래져 버려서
아무리 때 빼고 광 내봐야
어쩔 수 없는 발안 촌티기
대환이, 향자, 영옥이, 영숙이, 윤정이, 용숙이
윤정이만 빼고
이름조차 촌스럽기 그지없는
그런 학생들만 타고 다니던
수원행 발안버스
안내양은 버스 철판을
지 신세 화풀이 삼아
손바닥 북 치듯 두들기며
버스 화통 삶아 먹은 소리로
오라잇 ! 하고 소리치던
새벽 발 수원행 통학버스
그 버스를 언젠 가고
한번만 더 타 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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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치도부역’ 얘기로 돌아간다. 농번기를 피해 1년에 몇 번씩 봄과 가을에 붉은 색의 부역통지서(賦役通知書)를 받고 치도(治道)를 나가야 했는데, 안 나가면 당시의 돈으로 2,000환(圜)인가의 벌금(罰金)을 부과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당시의 2,000환(圜)은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불변가격(不變價格)으로 200원에 불과하나, 당시의 가치는 하루 일당(日當)에 해당되었다. 지금 돈과 가치로 5만원 정도가 될 것이다.
1년 내내 땡전 한 푼 제대로 만져보지 못하는 서민들의 경우 벌금 2,000환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때문에 부모가 돌아가셔서 상중(喪中)에 있더라도 상복(喪服)을 입은 체 부역을 나갔고, 온가족이 출동하기도 했던 것이다.
자갈 채취
아버지께서나 형님은 건천(乾川)이 된 개울바닥 자갈을 ‘싸리속새이’나 ‘철사속새이’로 캐 모으고, 아들이나 동생은 바지게로 이를 도로변(道路邊)에 져다 날랐다.
그리고 어머니와 다른 동생들은 호미와 삽으로 자갈무더기를 차곡차곡 쌓고, 형수(兄嫂)님과 누나들은 점심바구니를 여다 나르는 등 온가족이 임무(任務)를 분담(分擔)하기도 했었다. 약은 사람들은 도로바닥에 있는 자갈까지 긁어모아 쌓기도 했고, 철길(철로)에 부설되어 있는 자갈을 훔쳐다 쌓기도 했었다.
그런데 온 동네 사람들이 개울바닥에 모여 자갈을 줍다보면 금방 동이 나 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는 개울바닥을 ‘오소리’ 굴 파듯이 파고 들어간다.
자갈 채취를 위한 굴파기
봄 부역의 경우 언 땅이 채 녹기전이라 곡괭이와 삽으로 땅속으로 비스듬히 굴을 팔수밖에 없었다. 굴속에서 쪼아낸 모래와 자갈을 ‘싸리속새이’로 담아내어 ‘철사속새이’나 ‘얼기미’로 쳐서 자갈을 골라내기도 하고, 공사용(工事用)으로 쓰는 ‘삼발이’형 채에 뿌려 자갈을 골라내기도 했다.
여기에서 다시 자갈이 떨어지면 이제는 부근 야산(野山)으로 울라가 작은 바위나 돌멩이를 망치나 괭이 뒤통수로 깨트려 운반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련한 자갈이 제일 위험(危險)하다.
칼날같이 예리(銳利)한 모서리에 고무신이 닿으면 가차 없이 찢어지기도 하지만, 자동차 바퀴에 튀어 올라 맞기라도 하면 중상(重傷)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천바닥 자갈
실제로 그런 돌에 맞아 다친 사람도 가끔 있었고, 소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들이 제일 많이 다치기도 했다. 특히 1958년 초부터 출시된 연애화(戀愛靴)의 경우 이런 돌을 밟아 기우뚱하면 여지없이 찢어지곤 했었다.
여기에서의 ‘연애화(戀愛靴)’란 까만 고무로 만든 구두형태의 고무제품 신발이었는데, 당시의 멋쟁이 학생들의 경우 거의가 이 신발을 착용(着用)하였다.
공부보다는 여학생(女學生)이나 동네 처녀들과의 교제(交際)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이 주로 신는다 하여 ‘연애화’라는 별칭(別稱)이 붙었었다.
필자도 외동중학교(外東中學校)에 다닐 때 이 ‘연애화’를 수도 없이 사 신었지만, 되도 않을 짝사랑에 목을 매었을 뿐 초등학교 선후배인 동네 처녀 몇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연애(戀愛)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자갈 채취
‘치도부역’은 가급적 자기 마을 경내(境內)에 작업구간을 지정해주기도 했지만, 도로와 접하지 않은 마을이 많아 이들 부락(部落)들은 몇 개의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엉뚱한 구역을 할당(割當) 받아 힘든 부역을 하곤 했었다.
‘치도부역’ 때는 면사무소에서 담당 면서기(面書記)가 나와 자갈무더기에 모래를 섞거나, 흙을 섞는지를 감독(監督)하고, 굵은 자갈은 망치로 잘게 깨게 하는 등 까다로운 감독(監督)을 하기도 했다.
너무 까탈을 부리면 동네 구장(區長)이 도로변 막걸리 목로주점(木爐酒店)으로 끌고 가 한나절 내내 술을 퍼 먹이면, 거나하게 취해서 비틀거리며 자전거(自轉車)를 끌고 사라지기도 했다.
면서기(面書記)도 구장도 모두 일제(日帝)에 충성하던 관리(官吏) 출신들이라 서로가 잘 통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치도부역’을 한 비포장도로(非鋪裝道路)를 신나게 달리던 아버지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오일장(五日場)에 따라다니던 딸이 그 시절의 아버지를 그리며 애태우는 글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그 겨울의 신작로
향린 박미리
신작로를 달리던 오토바이 꽁무닐 따라
흙먼지도 덩달아 장으로 가던 날,
병풍 같은 아버지 등 꼬옥 붙들고 있으면
매서운 칼바람도 비켜갔던지
겨울인데도 따뜻했던 기억만 있다.
설날에 입을 꼬까옷 입을 생각에 신났고
쌩쌩 달리던 오토바이가 재밌어서 신났던
그 겨울의 신작로를 따라 가 보면
꼬불꼬불한 시골 길만큼이나
세월에 굽어진 추억이 훤하다.
동네 시름대회 때 마다 쌀가마 타 오셨던
건장하신 모습도 오간데 없이
이제는 몸도 마음도 훌쩍 줄어드신 아버지,
세월에 당할 자 없다지만 그래도
울 아버진 여전히 바위처럼 서 계실 줄 알았다.
언니만 새 신발 사 주실까봐
멀쩡한 신발, 헌 신발 만든 것도
책값 부풀려서 더 타낸 것도
이래저래 속아 주시고도
내색을 않으신 그 마음 알아요.
그래서인지 저도 아버지처럼
밥 먹듯 눈감아주고 속아주는
속없는 부모가 되어 있네요.
가끔씩 사는 일이 버거울 때면
그 겨울의 신작로에 나가 장으로 달리던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올라봅니다.
바위처럼 든든했던 아버지 등 꼬옥 붙잡고요.
아버지!
아버지의 딸내미가 저 사느라 바쁘답시고
효도는 많이 못해 드리더라도
9988의 약속은 꼭 지켜 주실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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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에는 추석명절(秋夕名節)이 다가오면 마을로 들어오는 농로(農路)나 한길도 온 동네 사람들이 스스로 모여 정성스레 단장(丹粧)을 하곤 했었다.
그 길을 따라 명절날 큰집과 외가(外家)에도 가고, 그 길을 따라 시집간 누나가 댕댕이바구니에 명절 이바지를 이고 친정(親庭)을 찾아오고, 그 길을 따라 자식들이 학교에 다녀야 하고, 그 길을 따라 오일장(五日場) 나들이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길 닦기
길가의 풀을 베어내어 보기 좋게 만들고, 홍수(洪水)와 장마에 패인 웅덩이에는 베어낸 풀을 ‘싸리속새이’로 담아 날라 채우고 흙을 덮거나, 흙과 자갈을 바지게로 지고 와서 매우고, 튀어나온 돌은 망치나 ‘함마(해머)’로 깨트려 흙속에 파묻었다.
아이들이 뜀박질을 하다가 걸리거나, 친정 오는 누나의 발 뿌리가 채이거나, 거나하게 한 잔 하신 어른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세심(細心)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여기에서 다시 어린 시절 신작로(新作路)까지 배웅하고 마중 나오던 올케 언니를 그리는 어느 여인의 독백(獨白)을 실어 음미해 본다.
추억의 신작로
호 정
시오리 길을 육년
삼십리 길 삼년
올케는 새벽밥
먹여 밝아오는
공동묘지 까지
날 데리고 정신없이
등불 밝히고
신작로를 걸었다.
어린
시누이 학교 보내기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긴 신작로에는
전깃불도 없고
반듯한 길도 아닌
등불 만이 손에 쥔채
무서워하는 시누이를
해가 떠오를 때까지
등불 들고 달리기를!
지금도
올케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어린 시누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날들을
신작로에 눈물 뿌렸을까?
지금은
반듯한 4차선 도로에
가로등 불빛이 어둠이
깔리면
새벽을 알릴 때까지
등불이 필요 없는
도로가 되어
추억의 뒤안길 에서
올케 에게
사죄 하는 마음에 글을 쓴다.
엄마 같은 나의 진정
사랑 하고픈 올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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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참고로 일제의 통감부(統監府)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치도부역’의 강제노역을 부과하기 위하여 개최한 1908년 5월 25일의 ‘제1회 관찰사회의(觀察使會議)’와 동년 5월 30일의 ‘제5회 관찰사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을 잠시 소개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관찰사(觀察使)란 조선시대의 지방장관으로 고려시대의 안찰사(按察使)와 안렴사(按廉使)의 후신으로 고려 말에는 도관찰출척사(道觀察黜陟使)라 했다가, 조선조 세조 12년(1446년)에 관찰사로 개칭했다.
관찰사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이재학, 홍봉한, 박문수, 채제공 : 왼쪽부터)
각 도마다 1명씩 두었으며 품계는 종2품이었다.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이라고도 하며 문관직으로서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를 겸임하였다. 임기는 1년을 넘지 않았다. 지금의 시․도지사로 이해하면 된다.
중요한 정사(政事)에 관해서는 조정의 지시에 따랐으나, 관할하는 도에 대해서는 경찰권·사법권·징세권 등을 행사하였다.
관찰사의 관청을 감영(監營)·영문(營門)·순영(巡營)이라고 하는데, 관원은 도사(都事)·검률(檢律)·심약(審藥) 등 중앙에서 임명한 보좌관이 있었고, 일반 민정은 감영에 속한 이(吏)·호(戶)·예(禮)·병(兵)·공(工)·형(刑)의 6방에서 선출된 향리에게 담당케 하였다.
감영의 소재지는 경기도의 경우 서울 또는 수원(水原), 충청도는 충주(忠州) 또는 공주(公州), 경상도는 경주(慶州)·상주(尙州)·성주(星州)·달성(達城;大邱)·안동(安東), 전라도는 전주(全州), 함경도는 함흥(咸興) 또는 영흥(永興), 평안도는 평양(平壤), 황해도는 해주(海州), 강원도는 원주(原州)에 있었다.
1895년(고종 32) 관제개혁 때 이름만 남아 있다가 1896년 도 개편에 따라 각 도의 장관이 되어 1910년까지 존속되었다.
그러면 ‘치도부역’과 관련한 그때의 ‘관찰사회의(觀察使會議)’의 내용을 잠시 알아본다. 먼저 1908년 5월 25일 오전 11시에 개최된 ‘제1회 관찰사회의’ 사항이다.
이날 관찰사회의(觀察使會議)는 통감부 경무국(警務局)에서 제시한 16개 항목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그 안건들 중에 ‘치도사업(治道事業)을 시행하기 위하여 지방인민에게 대하여 부역(賦役) 또는 비용을 부과코자 하노니 그 득실 여하’라는 안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치도부역
이후 1908년 5월 30일에 개최된 제5회 관찰사회의(觀察使會議)에서도 자문사항 제12항에 ‘치도사업과 지방인민의 부역·부과의 득실여부’가 개진되었는데, ‘치도사업(治道事業)에 대한 국세(國稅)와 지방세의 충당방안과 지방인민의 반발(反撥) 문제’ 등이 제기되었다.
이때의 관찰사회의 참석자는 내부대신 임선준(任善準),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 법무대신 조중응(趙重應), 경기도관찰사 이규식(李圭植), 충청북도관찰사 이호성(李鎬成), 전라북도관찰사 이두황(李斗璜), 전라남도관찰사 김규창(金奎昌), 경상북도관찰사 이충구(李忠求), 경상남도관찰사 김사묵(金思默), 황해도관찰사 박이양(朴彛陽), 강원도관찰사 황철(黃鐵), 충청남도관찰사 양재익(梁在翼), 평안북도관찰사 유혁로(柳赫魯), 함경남도관찰사 한남규(韓南奎), 함경북도관찰사 윤갑병(尹甲炳), 한성부윤 장헌식(張憲植), 평안남도관찰사 박중양(朴重陽) 등이었다. 당시의 일제(日帝) 앞잡이들이 누구누구였는지를 기록에 남기기 위해 참석자 전원의 명단을 기술하였다.
이후 한일합방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완벽하게 찬탈한 일제(日帝)는 본격적으로 그들의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앞세워 통감부 시절의 논의를 기초로 1912년 12월 ‘도로유지수선규정’을, 1914년 4월 ‘시가지에 있어서의 도표(道標)의 위치와 1·2등 도로선’을 정했고, 1915년 10월에는 ‘도로규칙’을 개정하여 새로이 ‘수축표준과 유지수선표준 감독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였다.
그 후 1938년 4월 4일에는 ‘조선도로령(朝鮮道路令) 제15호’를 제정 공포하고, 그해 12월 1일부터 이를 시행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치도부역’을 부과하게 되었다.
당시의 조선총독부
(간악한 일제는 ‘광화문’과 ‘경복궁’의 일부를 뜯어내고, 저들의 수탈기구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건립하여 우리 민족의 정기와 역사를 단절하려 했었다)
‘조선도로령’의 특징은 조선인의 사권(私權 ; 사유재산권)을 대폭 제한하였고, 기왕의 1·2·3등 도로와 등외 도로의 구분을 없앴으며, 종전의 1·2등도로는 국도로, 3등도로는 지방도로, 시가지(市街地) 내의 도로와 등외 도로는 부도(府道) 또는 읍면도(邑面道) 등 4종으로 구분한 점이다.
앞서 기술한 대로 일제(日帝)의 ‘치도사업’의 특징은 한반도(韓半島)를 중국대륙의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前哨基地)로 삼는 것과 군사활동을 원활히 지원하고, 경제적 수탈(收奪)의 편의를 위한 도로정책이라 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관찰사회의 등을 통하여 도로관리는 도로축조(道路築造)와 유지 수선 업무 중 국도(國道)는 중앙에서, 지방도는 지방청(地方廳)에서, 부도(府道)와 읍면도(邑面道)는 관계 동리(마을)에서 시행토록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규정에 따라 지방도(地方道)는 각 읍면별, 마을별, 호수별로 치도구간(治道區間)을 정하여 그 수선을 맡도록 하였다. 1년에 봄과 가을 두 차례씩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자갈을 채취하여 깔게 하는 등 ‘치도부역’을 강제한 것이다.
금수와 같은 왜놈들의 징용으로 '어렝이'로 광석을 운반하는 여인
(일제가 정신대와 징용노동자로 강제로 끌어가 광산 지하갱(地下坑)에서
강제노역을 시키는 우리 동포들인데, 남자는 ‘훈도시’ 만 입혔고, 여성도
짧은 바지 하나만 입혀 상하반신이 모두 노출되어 있다. 개같은 왜놈들)
그리고 해방 후 일제(日帝)의 조선인 관리들로 구성된 우리나라 정부는 그들이 배운 일제의 ‘치도부역(治道賦役)’을 글자 한 자 바꾸지 않고, 우리 국민에게 그대로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점차 주민동원(住民動員)이 어려워져 1970년대에는 도로부역대(道路賦役代)라는 이름으로 자갈부설과 보수에 들어가는 경비(經費)를 걷어 자갈과 인부를 사서 유료로 도로보수(道路補修)를 하기에 이르렀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치도부역(治道賦役)’을 나가지 않아 편하긴 했지만, 어려운 살림에 잡종금(雜種金 ; 세금이외로 산림조합비, 적십자회비 등 여러 가지의 잡종금이 있었음)이 한 가지 더 늘어 경제적(經濟的) 부담이 되었다.
더구나 도로의 혜택을 많이 보는 도시지역(都市地域)이나 적게 보는 시골지역이나, 심지어 도로의 혜택을 전혀 보지 않는 산골지역과 도서지역(島嶼地域)의 주민들까지 똑같이 도로부역대를 내라고 했으니 이에 대한 불만(不滿)들이 어떠했겠는가. 모두가 ‘왜놈’들이 하던 방식이었다.
이렇게 거둔 도로부역대(道路賦役代)는 예산과는 별도로 면사무소(面事務所)에서 세외수입(稅外收入) 통장에 넣어 경리(經理)하면서 트럭 등 장비를 임차하고, 인부를 사서 직접 도로를 보수했는데 점차 도로들이 포장(鋪裝)되어 일거리가 줄자 1970년대 말에는 군청(郡廳)에서 직접 트럭을 보유하고 도로보수 전담요원(수로원)을 채용하여 연중 도로를 순찰하고, 보수(補修)를 하게 함으로써 도로부역대도 사라졌다.
도로 수로원(修路員)
반세기 전, 한 알의 자갈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채취(採取)하기 위해 망치로 돌을 깨다 손가락을 내리쳐서 봄철 내내 무논에서 형언(形言)할 수 없는 고생을 하기도 했는가 하면, 하천바닥에 굴을 파다 지반(地盤)이 무너져 생매장을 당할 뻔하기도 했고, 물이 질질 흐르는 자갈을 져 나르느라 흙물 투성이가 되곤 했던 그 시절, ‘치도부역’에 얽힌 아픈 추억(追憶)들이 너무나 아리게 되살아난다.
여기에서 다시 그 시절 ‘신작로(新作路)’와 ‘치도부역(治道賦役)’의 정경(情景)을 그리고 있는 고광직의 ‘지금도 그곳에는’을 잠시 음미하기로 한다.
그곳엔 지금도
고광직
먼 산 아지랭이 가물거리면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텃밭
하얀 옥양목 휘장으로 감싸 안은
아카시아 꽃향기 그윽한
덕숭산 줄기 초가 마을
검정고무신 흙 묻을까 벗어들고
까치발 딛던 신작로
지금도 흙먼지 날리고 있을까.
비라도 한줄기 내리고 나면
박달나무 방망이 두드리며
신작로 부역 부르는 소리
쇠스랑 호미자루 돌 부딪으며
온 동네 소문잔지 풍성했지
구성진 모내기 가락에 샛참 이고 가는
아낙네 새하얀 젖무덤
짧은 저고리 앞섶에 보일 듯 말듯
아슬했던 그 모습들 아직도 그대로 일까,
텁텁한 막걸리 한 사발에 총각김치
한입 섬툭 잘라 주린 배 달래며
가던 길 재촉하던 이름 모를 길손
어둠이 가까우니 사랑방 내어준다
만류하던 그 정겨운 얼굴 얼굴들
지금도 봄비내리고 아지랑이 가물대면
트럭을 타고 울퉁불퉁 신작로 따라
흙먼지 일으키며
그 시절 그 곳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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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새이’와 관련해서는 지방마다 한두 가지의 속담(俗談)이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예로부터 외동읍(外東邑)에서는 ‘속새이로 寶池 가리기’라는 말이 있다.
머슴들과 초군(樵軍 ; 나뭇꾼)들이 모인 초당방에서 남의 집 달서리(닭서리)를 해먹었는데, 낌새를 차린 주인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닭고기를 다먹어버리고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삼고 있다.
주인이 “자네들 우리 집 달(닭) 자바(잡아) 묵었제(먹었지)?”하고 추궁(追窮)을 하는데, 모두들 입을 모아 “무신 소리 하닝기요. 우리너 탁백이 두 되 사와가주고 한 사발이썩 묵고 일하고 있능 거 아인기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런데 방안에는 닭고기 냄새가 가득하고, 방 한구석에는 그릇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제일 윗 그릇에 닭 뼈다귀가 수북하게 담겨있는 것이 주인에게 발각(發覺)되고 말았다. 이때 ‘속새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사람덜이 시방 머라카노. 자네덜이 시방 ‘속새이’로 寶池 가룰라쿠나(가리려 하느냐). 저기 밥그럭(밥그릇)에 달빼다구너(닭뼈다귀는) 머고(뭔가)? 잔소리 하지마고 퍼떡 달깝(닭값)이나 내나라.”하고 호통을 치면 꼼짝 없이 비싼 닭 값을 치러야 했다.
속새이
이 말은 여름철에 여인(女人)들이 밭일을 하다가 너무나 더워 인근에 있는 개천에서 알몸으로 목욕(沐浴)을 하고 있는데, 마침 길가는 이웃마을 영감님이 둑 위로 불쑥 나타나서 걸어오기 시작한데서부터 생겨난 말이다.
그런데 그 노인은 눈이 어두워 여인(女人)들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지 못하고 그대로 계속 걸어오고 있다. 황급한 여인들은 벗어놓은 옷을 찾는데, 옷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입을 시간도 없고, 벌거벗은 채로 거기까지 걸어갈 수도 없다. 게다가 물이 너무 얕아 물속에 몸을 숨길 수도 없다.
여기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대쪽 둑에도 물꼬를 보려 나온 아랫마을 ‘반푼이’ 총각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국(形局)이었다.
노인(老人)은 인근마을 사람인데다 눈이 어두워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지만, 일부러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오는 아랫마을 ‘반푼이’에게 그것을 그대로 다 보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알몸으로 목욕하는 여인들
가까이 있는 것은 밭일하던 ‘속새이’ 뿐이라 그 것이라도 얼른 집어 국부(局部)를 가렸는데, 이를 두고 ‘속새이로 寶池 가린다’는 말이 생겼다.
가리나 마나 반대편 둑으로 올라온 ‘반푼이’는 찬찬히 모두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우리들의 고향 ‘속새이’는 ‘싸릿대’를 듬성듬성 엮어 만든 것이라 가려보았자 그대로 속이 다 들여다보이게 되어 있다.
‘닭서리’를 해 먹고 방구석에 치워놓은 그릇에 닭 뼈다귀가 수북하게 쌓여있는데도 닭을 잡아먹지 않았다고 우기는 것은 ‘속새이’로 ‘寶池’ 가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속담(俗談)과 비슷한 말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손바닥으로는 아무리 하늘을 가려봐도 가려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옛적에는 처녀들이나 새댁들도 조용한 골짜기 개울에서 서답(빨래)을 씻다가 날씨가 너무 더우면, 참지 못하고 저고리를 벗어 놓고 빨래를 하게 되는데, 이때도 건너편 길에 사람이 나타나면 빨래를 이고갔던 '광주리'로 앞을 가리곤 했었다.
빨래하는 처녀들
다른 말로는 ‘삼태기로 앞가리기’라는 말이 있는데,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일을 속이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비유(比喩)하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싸릿대’로 엉성하게 엮은 ‘삼태기’로 ‘寶池’를 가려봐도 보이기는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태기’는 외동읍 사투리 ‘속새이’로 보면 된다.
또 다른 말로 “‘따배이(또아리)’로 ‘샅’가리기”, “손으로 ‘샅’막기”라는 말도 같은 의미의 속담(俗談)이다. 둘 다 ‘가린다고 가렸으되, 가장 요긴한 데를 가리지 못했다’는 뜻의 말이다. ‘샅’은 물론 ‘두 다리의 사이’를 말한다.
해수욕장 알몸 아가씨들
(이들은 가릴 ‘속새이’조차 없어 그냥 도망가기에 바쁘다)
그리고 위에서 “엎친 데 덮치다” 또는 “엎친 데 덮친 격”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엎친 위에 다시 덮친다’는 뜻이다. 속뜻은 ‘어렵거나 나쁜 일이 겹치어 일어나다’라는 의미인데, ‘눈이 깔려 있는 위에 서리가 덮친다’는 뜻의 ‘설상가상(雪上加霜)’을 우리말과 우리 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여기에서 그 시절, 걷고 타고 달리던 비포장 신작로(新作路) 길을 그 아들이 대를 이어 걷고 타고 달리면서 아버지 때의 추억을 반추(反芻)하는 ‘신작로길’을 잠시 음미하고 넘어간다.
신작로 길
아버지께서 걸어갔던
그 길을 아들이 걸어갑니다.
신작로 길은 자갈과 모래로 투박합니다.
이따금 지나가는 완행버스에 뽀오얀 먼지가 일어납니다.
그 길은 여전히 그 곳에 있고
이십년이 흘러 아름드리 가로수는
아들을 반겨줍니다.
읍내로 가는 신작로 길을
아들이 자전거로 달립니다.
보름달이 훤하니 산등성이로 떠오릅니다.
고개를 넘는 자전거 바퀴가
귀신이 쫒아 올새라 정신없이 올라가고
내리막길을 덜커덕거리며 달려 내려갑니다.
신작로 가로수 잎이
바람에 차르르 차르르 소리를 냅니다.
아버지가 자전거로 내리 달린
그 길을 아들이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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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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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옛말에는 앞서 얘기한 ‘치도부역(治道賦役)’ 등과 관련하여 “면장(面長)네 부역(賦役) 가서 땀내면 3년 재수 없다.”라는 말도 있었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잦은 각종 부역(賦役)에 시달리던 시절, 일제에 빌붙어 먹던 면장(面長) 등 당시의 행정 끄나풀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당시의 경우 조선백성을 마구잡이로 학대하는 일제의 학정(虐政)에 앞장섰던 조선인 면장(面長)들은 쥐꼬리만 한 권력(權力)을 행사하여 자신의 치부(致富)에 주민들의 노역(勞役)을 사사로이 이용하곤 했었다.
조선인 일제 관리
이때 눈치 빠른 사람들은 스스로 아부(阿附)하여 작은 이익에 집착(執着)하기도 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싫지만 거부하지 못하고 ‘억지춘향’으로 노역(勞役)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때 땀을 내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견주어 하던 말이 “면장(面長)네 부역(賦役) 가서 땀내면 3년 재수 없다.”라는 말이다.
사사로운 면장(面長)네 일에 끌려와 억지노역을 하면서까지 땀을 내어 일을 하면, 일제(日帝)의 앞잡이에게 빌붙어 잘 보이려 한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고, 가뜩이나 일제에 식량을 공출(供出) 당해 제대로 먹지 못해 허약한 몸을 스스로 공 없는 일에 힘들여 몸을 축내게 되면, 이 또한 크게 손실(損失)을 당하는 일인지라 스스로들 담합(談合)하는 의미에서 지어낸 말이다.
자갈 부역
그래서 이때부터 사람들은 공 없는 일에 적당히 대처(對處)하고자 할 때 하는 말로서 자기 방어적(防禦的) 우스갯소리로 이 말을 사용하곤 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억지춘향’을 일부에서는 ‘억지춘양’이라고 표현(表現)하기도 하는데, 둘 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억지춘향’ 또는 ‘억지춘양’이라는 말은 일을 순리대로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우겨서 겨우 이루어진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춘향전(春香傳)에 나오는 것에서 기인하는데, ‘변사또’가 춘향(春香)으로 하여금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려고 핍박(逼迫)한데서 나온 말이다.
성춘향
즉 ‘억지 수청을 거부한 춘향(春香)이’라는 말이 나왔고, 이 표현이 줄어들어 ‘억지춘향(春香)’이 되었다는 것이다. 1957년에 발간된 ‘큰사전’에서도 ‘억지춘양(春陽)’이 아니라 ‘억지춘향(春香)’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쪽이 더 신빙성(信憑性)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억지춘향(春香)’이 아니라 ‘억지춘양(春陽)’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큰사전’에 대해서 ‘우리말 어원사전’에서는 ‘영동선(嶺東線)을 개설 할 당시 직선(直線)으로 뻗어 달리게 설계된 노선을 당시의 자유당 국회의원이 춘양면(春陽面) 소재지를 감아 돌아 지나가도록 억지로 끌어 들인데서 나온 말’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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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음악을 한곡 게재하려는데, 옛적 보컬그룹으로 ‘강병철과 삼태기’라는 그룹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그들이 부른 노래는 다소 요란한 느낌이 있어 다른 곡을 선곡(選曲)하려는데, 마땅한 곡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게 어울리지는 않지만, 눈감으면 가물가물 떠오르는 고향의 황토(黃土) 길, 아른아른 떠오르는 그 시절 신작로(新作路) 자갈길에서 홍타령 콧노래에 어깨춤을 추시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보릿대춤'을 그린 현진우의 ‘내 고향 길’을 게재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내 고향 길
현진우
터벅터벅 걸어온 길 어느덧 몇 해이던가
눈감으면 가물가물 떠오르는 고향 황토길
홍타령 가락 따라 막걸리 한잔 술에
주름진 울 아버지 보릿대춤아
논 갈던 그 모습은 보이질 않고
오늘도 뜸부기 우네
허겁지겁 살아온 길 어느덧 몇 해이던가
눈감으면 아른아른 떠오르는 고향 신작로
홍타령 콧노래에 어깨춤 절로 나던
주름진 울 어머니 보릿대춤아
밭 매던 그 모습은 보이질 않고
오늘도 뻐꾸기 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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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歌詞)에서 말하는 ‘보릿대춤’은 춤 동작이 ‘보릿대’처럼 뻣뻣하다고 해서 이름을 붙인 ‘허튼춤’을 말한다. 그리고 ‘허튼 춤’이란 춤추는 사람이 자기의 멋을 넣어 즉흥적(卽興的)으로 추는 여흥의 춤, 농악(農樂)·탈춤·소리 춤 등의 대동춤판 속에서 춤판에 함께 어울려 흥이 나면 흥을 담아 자기 스스로 멋을 내어 추는 개인 춤을 말한다.
보릿대춤
‘허튼춤’의 역사는 아주 오래된 듯하나, 주로 서민들이 즉흥적으로 추었기 때문에 역사적(歷史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옛날에 종교의식(宗敎儀式)이 끝난 후 오신행위(娛神行爲)로서 난장춤을 춘 데서 ‘허튼춤’의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의 춤으로는 ‘막춤’이라고 보면 된다.
옛적의 경우 무슨 ‘스텝’이란 것도 없었고, 그냥 ‘막춤’을 말하는 것인데, 우리들의 어버이들은 흥겨운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이런 ‘막춤’을 잘 추었다. 우리들 어버이들의 한(恨)서린 몸부림이기도 했었다. 춤의 모습을 새겨주시기 바란다.
‘허튼춤’의 종류에는 보릿대춤·막대기춤·도굿대춤·황새춤·어깨춤·거드름춤·두레춤·손춤 등 다양(多樣)한 것이 있고, 각종 ‘병신춤’도 이에 해당한다. ‘허튼춤’의 공통적(共通的)인 춤사위는 어깨춤을 추면서 팔을 좌우로 끄덕이는 매듭춤인 ‘좌우치기’이다.
지금의 보릿대춤
또 ‘허튼춤’ 가운데 각종 ‘병신춤’은 개인 춤으로서 독립적(獨立的)으로 추어지기도 하여 마당·방안 어디에서나 출 수 있다.
이 춤판에는 추임새가 따르게 마련인데 ‘얼씨구’, ‘좋지’, ‘좋아’, ‘얼쑤’ 등 다양하다. 반주음악(伴奏音樂)은 춤에 따라 삼현육각·외장고·구음·사물악기(四物樂器) 등을 사용하여 자유롭게 출 수 있다.
친애하는 외동향우회 카페 우희곤 카페지기님과 회원여러분!
신묘년(辛卯年) 한 해는 수많은 국제적 참사와 정변이 발생했고, 필자와 동갑인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는 등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황망 중에서도 우리 외동향우회 카페 회원님들께서는 지난 한 해 동안 알뜰살뜰 카페를 단장하시고, 이런저런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시느라 참으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특히 카페지기 우희곤님의 지칠 줄 모르는 ‘답글’ 격려와 ‘향토 시문학 좌장’ 김현섭 향우의 향토시(鄕土詩) 퍼레이드는 우리 외동읍 카페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고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서린 임진년(壬辰年)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모든 회원님들의 가정과 일터에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011. 12. 31
외동향우회 카페 회원
(괘릉리, 영지7회, 외중7회)
이 용 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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