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산성 (칠곡군)
인조 17년(1639),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李命雄)은 4월에 경상감영에 부임하여 성을 쌓
기 시작하여 이듬해 4월에 준공을 보았다. 내성이 완성된 지 60년이 지난 숙종 26년(1700)에 외성
을 축성했으며 당시의 관찰사 이세재(李世載)의 장문에 따라 수축된 외성은 성벽 길이 3,754보, 여
장 1,890첩, 문루 하나, 암문 셋, 군기고를 비롯한 창고, 그밖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가야 주산성 (고령군)
가야 주산성은 높은 북쪽과 낮은 남쪽의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북쪽의 정상부는 해발
310m 내외이고 남쪽은 해발 180m 내외이다. 고령 주산성은 주산 정상부에서 6부 능선을 가로 지르
며 쌓았고, 정상부에는 내성을, 그 남쪽에는 외성을 쌓았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711m 정도이고, 외
성의 전체 둘레는 1,035m이다. 외성이 내성의 북벽과 서벽에 잇대어 축조되어 산성 전체의 일주 둘
레는 1,351m 정도이다.
검산성 (영양군)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 한말에 의병장 김도현(金道鉉)이 쌓은 산성으로, 지금은 흔적
만 일부 남아 있다.
검산(劒山)의 정상에서 남쪽을 향하여 서쪽과 남쪽에 축벽을 쌓아 올렸는데, 서쪽의 경사면에는 토
석으로 200m 가량 성벽을 쌓았으나 모두 무너지고 흔적만 극히 일부 남아 있다. 남쪽은 자연 지형
을 이용하여 석축벽을 쌓았으며, 동쪽은 절벽이다.
축성 연대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성이며 축벽 상태도 조잡하고 많이 퇴락되었으나 한말에
나라를 위하는 항일을 위하여 개인 재산을 들여 구축하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성이다.
견훤산성 (상주시)
견훤이 축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국내에서 보기 드문 산국시대 산성이며, 길이는 약 650m,
면적 35,702㎡이다. 계곡을 이룬 곳은 높이 쌓아 성벽의 높이가 15m 이상이며 자연암석 위에 쌓은
지점은 4~5m로,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너비는 4~6m인데, 완전한
벽면이 6m인 것으로 미루어 당초에는 6m 내외로 축성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화강암을 고르게 쌓아
올려 벽면 안팎이 평평하다.
성벽의 네 모퉁이는 천연암석에 의지하여 쌓았으며, 동쪽과 서쪽의 남북 끝 부분에 둘레 33m, 너
비 5m, 높이 9~10m로 말굽형의 돌출된 망대(望臺)를 설치하였다. 현재 동쪽의 두 곳은 원형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고, 서쪽의 두 곳은 파손되었으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경주월성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둘레 2,400m. 사적 제16호. 현재 부분적으로 성벽과 성안의 건물
지가 있다. 이 성은 모양이 반달 같다 하여 반월성(半月城)·신월성(新月城)이라고도 하며, 왕이 계신
곳이라 하여 재성(在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안이 넓고 자연경관이 좋아 궁성으로서의 좋은 입지조건
을 갖추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01년(파사왕 22)에 쌓은 것으로 둘레는 1,423보(步)라고 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궁성으로 월성을 쌓은 뒤 금성(金城)에서 이곳으로 도성을 옮겼음을 알 수 있
다.
이 성은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되었으며 나라가 커짐에 따라 부근 일대가 편입되기도 하였는데,
특히 문무왕 때 안압지(雁鴨池)·임해전(臨海殿)·첨성대 일대가 편입, 확장되는 등 신라의 중심지였
다. 동서길이 900m, 남북길이 260m이며 성 안의 면적은 약 19만3845㎡나 된다.
성벽의 동·서·북면은 대체로 흙과 돌로 기초를 다져 쌓고 그 위를 점토로 덮었으며, 남면은 절벽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거의 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경잡기 東京雜記≫에 의하면 29
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인하여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 다시 왕이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원래 월성 안에는 남문과 북문격인 귀정문(歸正門)·북문·인화문(仁化門)·현덕문(玄德門)·무평문(武
平門)·준례문(遵禮門) 등의 문과 월상루(月上樓)·망덕루(望德樓)·명학루(鳴鶴樓)·고루(鼓樓) 등의 누
각, 왕이 정사를 돌보던 남당(南堂 : 都堂),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사신을 접견하던 조원전(朝元
殿), 삼궁(三宮 : 大宮·梁宮·沙梁宮)을 관할하던 내성(內省)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
고, 1741년 월성 서쪽에서 이곳으로 옮겨 만든 석빙고(石氷庫, 보물 제66호)만 남아 있다.
동쪽의 명활산성(明活山城), 서쪽의 서형산성(西兄山城, 일명 仙桃山城), 남쪽의 남산성(南山城),
북쪽의 북형산성(北兄山城)이 나성(羅城)으로 호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석탈해가 원래 호공(瓠公)
의 거주지인 이곳을 거짓꾀를 부려 호공을 몰아내고 차지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경주읍성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북부동 00축조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동경통지(東京通志)》의 기록으로 보아 1
012년(현종 3)에 축조하였으며 고려 폐왕 우(禑) 가 무오년(戊午)에 개축하였고, 높이는 12자 7치’
라고 되어 있다.
고려시대부터 경주는 지방행정체제를 갖추었으므로 읍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위가
4,075자이고 높이는 12자인데, 성내에 우물이 80개소나 있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징례문(徵禮門)은 읍성의 남문인데, 임진왜란에 불탔으나 숭정(崇禎)
임신년(壬申)에 중수하고 동·서·북의 3문을 차례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지금은 거의 헐리고 약 50m만 남아 있는데, 가로 40∼50cm, 세로 20∼30cm의 잘 다듬은 돌로 축
성되어 있다.
성문은 동쪽에 향일문(向日門), 서쪽에 망미문(望美門), 남쪽에 징례문, 북쪽에 공진문(拱辰門)이
있었는데, 당시 징례문에는 봉덕사(奉德寺)의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을 달아놓고 매일 울렸다고 한
다.
축성한 석재의 돌더미 속에서 귀중한 석물(石物)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절에 있던 석탑부재 등을
사용한 것 같다
고모산성 (문경군)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姑母山)에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출토된 유물로 보아 470년경에 처음 축조한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을 반복
하였다. '경북팔경' 중의 하나인 진남교반(鎭南橋畔)을 사이에 두고 어룡산(魚龍山)과 마주보고 있는
천연 요새이다.
서쪽과 남쪽은 영강이 감싸고 있고 동쪽에는 오정산(810m)에서 뻗어내린 험한 산등성이가 있다.
따라서 서쪽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만 쌓는 편축식(片築式)으로, 나머지 삼면은 지세에
따라 성벽 안팎을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성벽을 쌓았다.
성의 규모는 길이 약 1.6㎞, 성벽높이 2~5m, 너비 4~7m 정도이다. 옛 성벽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
지고 남문지와 북문지, 동쪽 성벽의 일부분만 남아 있다.
서문지에서 3.8m 간격으로 설치된 배수구와 배수로 2개소를 발견했으며 배수로는 바닥에 돌을 촘
촘히 깔고 양쪽에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전체길이 10.8m 정도 된다. 또 서문지 부근 지하에는 약 1,
500여 년 전의 요새로 짐작되는 목조 건축물과 유물이 매장되어 있다. 이 목조 건축물은 남북 길이
12.3m, 동서 길이 6.6~6.9m, 높이 4.5m 규모의 3층 구조(상층 2.1m, 중층 1m, 하층 1.4m)로, 창고
나 지하 요새, 저수지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후기 이인좌의 난 때 신필정(申弼貞)이 정희량(鄭希亮)을 막았고, 을미사변 때에는 이강년이
의병을 일으켜 격전을 치른 곳이다. 또 6·25전쟁 때에도 중요한 방어 거점이었다
고모산성 (울진군)
경상북도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백수산(柏樹山)에 있으며 일명 '할미산성'이라고도 한다.
1597년(선조 30) 평해군수 겸 조방장(助防將) 윤열(尹悅)이 축조하였으며 돌을 쌓아 이룬 석성(石
城)으로, 둘레 약 500m이다.
성의 초입인 서문지(西門址)에서 남쪽으로 성벽이 이어진다. 성벽은 내탁법(內託法)으로 축조하였
고, 성벽 바깥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성 안에는 폭 3~4m의 내부 회곽도(廻郭道)가 조성되어 있
다.
서문지에서 14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망루지로 추정되는 높고 편평한 대지가 있는데, 그 아래 조
금리의 하조금마을이 있다. 서문지 주위에 다수의 와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가까이에 초소
용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고령 주산성 (고령군)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리에 있으며 대가야읍 뒤쪽의 해발 311m 주산(主山) 정상부와 능
선에 쌓은 대가야의 토석혼축산성(土石混築山城)으로,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의 성벽은 해발 270∼290m의 9부 능선을 따라 긴 타원형으로 쌓았고, 외성은 내성의 남북 양
쪽 끝에서 시작하여 산 아래쪽으로 해발 160m 정도의 6부 능선을 따라 5각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쌓
았다. 주산 정상부에는 주산성비(主山城碑)가 있다.
에 잇대어 축조되어 산성 전체의 일주 둘레는 1,351m 정도이다.
신라본기에는 673년(문무완 13년) 9월에 성을 쌓았다고하며 지리지에는 이름만 있고 장소는 없지
만 현재는 이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고성 산성 (의성군)
경상북도 의성군에 있는 흙이나 돌로 축조한 전통 시대 방어 시설.산성은 높이 210~370m 사이에
위치하고 있지만, 의성군의 최동단에 있는 금학리 산성터의 경우 782m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최서단의 봉정리 비봉산성 터가 579m, 최남단의 수정리 금성산성이 531m로 그 뒤를 잇고 있
다.
산성의 규모는 대체로 길이나 둘레가 1㎞ 이하인 것이 대부분이지만 상화리 산성터는 2㎞, 봉양리
산성터는 2.5㎞에 이르며 수정리 금성산성의 경우 무려 4㎞에 달하여 큰 차이를 보인다.
성벽의 높이에 있어서도 산성으로 기능할 당시의 높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
며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원형을 잃은 상태이다. 치선리 산성터와 병방리 산성터는 일부 구간의 성
벽 높이가 3~6m정도로 비교적 잘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외 대부분 산성은 1m 내외의 높이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고소산성 (김천시)
성벽의 위용은 여전하다. 일부 성벽의 높이는 여전히 5m 이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형태도 온전
하다. 부채꼴 모양으로 계곡을 둘러싼 성벽의 형태는 적에 대한 감시는 물론 공격에도 유리해 보인
다.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에 따르면 고소산성의 남아있는 성벽 대부분은 돌로 만들
어졌다. 토성인 감문산성과 토성·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는 달리 대부분 돌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
이다.
골짜기 형태를 그대로 살려 축조한 점도 독특하다. 물론 남쪽 성벽의 경우 자연경사면의 흙을 파
내 조성해 돌로 만든 동편 성벽과는 구별된다.
고소산성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고소산성은 교통로에 대한 감시기능과 유사시 군사와 백성이 대피
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은 산 속에 방치돼 있지만 김천시 감문면 문무리에서 상주시 공성
면 이화리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해 있다. 삼한시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감문국과 사벌국의 국경
인 셈이다.
한편 오랜 세월 탓에 산성유적 상당수가 훼손됐지만 전문가들은 산성의 복원에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최근 정부와 지자체의 지역 관광콘텐츠 개발 붐으로 자칫 잘못된 산성유적 복원이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영남지역 산성을 연구한 조효식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무리하게 산성을 정비·복원하는 것
은 반대”라면서 “원형을 간직하는 복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밝혔다.
관문성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에 있는 경주로 들어 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지역인 경주평야의 남동쪽에 자
리한 산성이다. 곧 673년(문무왕 13) 9월에 축조된 북형산성(北兄山城)과 함께 영일만과 울산만으
로 상륙한 왜적이 경주로 들어 올 수 없도록 방어하는 구실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722년 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고 하였
는데, 모화군은 지금 관문성이 자리한 곳이었으므로, 이때 처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삼국
유사』에는 “각간 원진(元眞)이 3만 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6,792보 5척이다”
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 크기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동해를 향해 쌓
았다. 곧 동해 쪽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서 우박천(牛朴川)을 사이에 두고 양쪽 높은 산에
축조하였다. 반월성(半月城)의 둘레가 1,023보인 반면 관문성의 길이는 6,792보 5척이어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렀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졌고, 문터로 추정되는 흔적이나 창고터, 병사(兵舍)터 등만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다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경주 남산성(南山城)의 성벽과 비슷하여,
축성술은 남산성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을 보이며, 경주 주변의 여느 성곽과 달리 산과 산을 연결하
여 길게 성벽을 쌓은 특수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알려져 있다.
관문산성 (점촌시)
『삼국사기』에는 “722년 10월에 모화군(毛火郡)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고 하였
는데, 모화군은 지금 관문성이 자리한 곳이었으므로, 이때 처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삼국
유사』에는 “각간 원진(元眞)이 3만 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쌓았는데 길이가 6,792보 5척이다”
고 기록되어 있다.
성벽은 가로 40∼50㎝, 세로 20∼30㎝ 크기의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동해를 향해 쌓
았다. 곧 동해 쪽에서 침입하는 왜적을 막기 위해서 냇가인 우박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 높은 산에
축조하였다. 경주의 반월성의 둘레가 1,023보인 반면 관문성의 길이는 6,792보 5척이어서, 후세
사람들은 ‘신라의 만리장성’이라고 불렀다.
금돌산성 (상주시)
신라 때 김흠이 쌓았다고 전하며, 전체 길이는 20㎞로, 높이 4m, 너비 3.6m의 성벽이 축조되어 있
다. 현재 일부분이 복원되었다. 백화산을 사이에 두고 금강과 낙동강이 흘러 신라와 백제의 격전지
이었다.
금오산성 (구미시)
구미시 남통동, 김천시 남면, 칠곡군 북삼읍(北三邑) 사이의 구미시에 속하는 금오산에 있는 고려
및 조선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 약 3,500m. 남문 ·서문 ·중문 ·암문(暗門) 및 건물터가 남아 있
다.
높이 977m의 금오산의 정상부를 테뫼형으로 두른 내성(內城)과 외성의 이중구조로 되었으며, 천
연의 암벽이 태반을 차지한다.
남고루산성 (경주시)
경북 경주시 황오동 대능원의 남쪽 입구에서부터 동쪽으로 황오동 고분군을 둘러싸면서 다시 북
쪽으로 북천에 이르는 방어용 시설물인 토루이다.
경주시의 개발로 대부분 파손되고, 지금은 일부에 흔적만 남아있다. 신라의 고분군 또는 반월성(半
月城)과 연관성이 없는 점, <고려사>의 1012년 경주에 축성했다는 기록과 <동경잡기(東京雜記)>의
고려 현종 때 전라·충청·경상 3도의 군졸을 동원하여 북천의 석축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 그리고 현
재의 위치·두께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때 읍성의 수재를 막기 위해 쌓은 제방이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1993년 부분적인 조사를 통해 성벽의 기초 석축과 인공적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방어시설인 해자
가 확인되어, 고려시대 읍성의 외성일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남미질부성 (포항시)
포항시 흥해읍 남쪽 평지에 돌출된 구릉지를 이용하여 축조한 토성(土城)이다.
흙을 이겨서 쌓은 성벽 둘레는 약 2㎞이다. 성 안에는 남성리 못산마을이 있고, 이 마을 서쪽 구릉
지에 성주의 무덤인 듯한 고분이 7∼9기 정도 있으며, 못과 우물이 1개씩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504년(지증왕 5년) 9월에 주민들을 동원하여 파리성(波里城)·미실성(彌實城), 진덕성
(珍德城) 등 12개의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미실성이 지금의 남미질부성에 해당된다.
동국여지승람 권22 흥해군 고적조에는 고려 태조 13년 북미질부성의 성주 훤달과 남미질부성
의 성주가 함께 항복하여 왔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고려 초기에는 이 성이 흥해군 일대를 다스리
는 중심 성곽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성곽은 축성 당시의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후대에 행정구역 또는 산 이름을 따서 임
의로 붙이는 경우가 많고 출토된 유물을 통하여 축성연대를 짐작한다. 그러나 남미질부성은 축성 당
시의 이름이나 축성연대가 확실하고 포항지역에 남아 있는 성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사실
이 확인되었다.
504년(지증왕 5)에는 파리성(波里城)ㆍ미실성(彌實城)ㆍ진덕성(珍德城)ㆍ골화성(骨火城) 등 12
개의 성을 쌓았다고 하나 지금은 전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남산신성 (경주시)
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성의 규모가 약 3,750m가 되므로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보다
삼국사기의 본기(本紀)에 기록된 2,854보(步)가 옳은 것 같다.
거의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지고 돌도 유실되었으나, 몇몇 곳에는 아직도 옛 모습이 남아 있어 그것
으로 미루어 보아 세로 20cm, 가로 50cm 정도의 가공석(加工石)으로 축조하고, 높이가 약 2m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 때는 고구려와 백제의 급박한 침입에 대처하고, 문무왕 때는 당(唐)나라와의 싸움에서 도성
을 수비하기 위한 요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91년(진평왕 13)에 축조되었고, 663년(문무왕 3)에는 성 안의 세 곳에 장창(長倉)을 설치하여
무기와 군량미를 저장하였다.
장창터에는 당시의 초석들이 남아 있고 땅 속에서는 숯으로 변한 쌀알이 출토되었다. 679년(문무
왕 19)에 크게 증축하였으며, 현재의 성터는 그 당시의 것으로 추정된다.
2011년 7월 28일자 문화재청 고시에 따라 '경주남산성'에서 '경주 남산신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
다.
노고산성 (고령군)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노리에 있는 가야시대 산성해발 361m의 노고산(老姑山) 정상부에 산성이
축조되어 있다
노고산성은 정상부에 약하게 솟아 있는 두 개의 산봉우리를 연결하여 만든 테뫼식의 토석 혼축성
이다. 성벽은 가파른 능선면을 정지하여 석축을 쌓고 폭 20m 내외의 대지를 만들었는데 대부분 유
실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동·서·북은 석축이고 남쪽과 동쪽의 일부는 토석 혼축으로 되어 있다. 평면
형태는 장란형에 가깝다. 성의 둘레는 800m 정도이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졌고 남쪽의 일부에만 성벽의 아래 부분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크기 25~35㎝
내외의 할석을 횡으로 쌓았는데, 이 성벽으로 추정해 볼 때 높이는 3m 이상이다. 비교적 평탄한 성
안에는 우물자리가 2곳 남아 있고,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는 망대로 추정되는 곳이 한 군데 있다. 또
한 성안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있다고 하지만, 현재는 확인이 어렵다.
성벽 안쪽으로는 삭토로 인해 조성된 폭 5~10m 내외의 회랑도가 길게 이어진다. 성곽 내에는 삼
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토기편과 기와편이 출토되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경징옹
편은 6세기의 것으로, 고배편은 신라식 토기로 7세기를 전후한 시기이다.
노고산성 안팎에서 대가야시대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으며, 맞은편에는 대가야시대의 백리 고분군
이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노고산성은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산성임이 분명하다. 이후 신라에 의해
재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성벽은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축성한 것으로 전해진
다.
독용산성 (성주군)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에 위치한 독용산성은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의 줄기인 해발 955m의 독
용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의 둘레는 7.7km(높이 2.5m, 폭 1.5m)에 이르며, 산성내 수원이
풍부하고 활용공간이 넓어 장기 전투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포곡식 산성(包谷式 山城)으로 영남지방
에 구축한 산성중 가장 큰 규모이다.
그리고 성의 축조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500년전 성산 가야 때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임진왜란을 피하던 중 발견되었다고 한다.
명활산성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47호.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405년(실성왕 4) 4월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
어보면 그 이전에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둘레 약 6,000m, 지정면적 960,000㎡이다.
문경관문 (문경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으며 주흘산(主屹山, 1,106m)을 넘어 중원의 연풍(延豊)으로
빠져나가는 산골짜기 천험의 요지에 3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고, 관문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1708년(숙종 34)에 세운 제1관문에는 ‘主屹關(주흘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
칸에 협문 2개가 있는 누각은 팔작지붕으로, 높이 3.6m, 너비 3.4m, 길이 5.4m의 홍예문(虹霓門)과
좌우의 성벽이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며,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
가 설비되었고, 오른쪽에 커다란 수구문(水口門)이 설치되었다.
제1관문에서 3㎞ 떨어진 곳에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과 중성(中城)이 있다. 중성은 1594년(선
조 27)에 축성된 것이며, 제2관문의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좌우 협문이 3개 있으며 팔작지붕
이다. 또 숙종 때 북적(北賊)을 막기 위하여 소백산맥을 넘는 험로 중의 하나인 조령(鳥嶺)에 산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제3관문, 즉 조령관이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좌우 협문 2개가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제1관문 이외 제2·3관문은 허물어져 축대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제2관문을, 1977년 제3관문
을 각각 복원하였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은 적의 진로를 차단함에 있어 험준한 조령을 막지 않고 충청북도 충주 탄
금대(彈琴臺)에서 왜병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고 말았다.
그 뒤 조정에서는 이 실책을 크게 후회하여 조령에 관문을 설치할 것을 꾸준히 논의해 오다가 숙종
때 비로소 3개의 관문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세 관문의 성안에는 군사들의 진지(鎭址)·군창지(軍倉址) 등이 지금도 남아 있으며, 경상감사가 교
대할 때 교인(交印)하였다는 교구정지(交龜亭址)도 남아 있다.
반월성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문천길 47 (인왕동) 부근에 있으며 서기 101년 파사왕 22년에 신라의 왕성으로
축성되어 신라가 망하는 서기 935년까지 궁궐이 있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하여 '신
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렸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하여 '재성'이라고도 하였으나 조선시대부터 반
월성이라 불렀고 월성의 성은 돌과 흙을 섞어 싼 토석축성인데 길이가 1,841m이며, 성내 면적이
193,585제곱미터이다.
백화 산성 (상주시)
경상북도 상주시 모동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일명 ‘금돌성(今突城)’이라고도 한다. 소재지
로부터 서쪽으로 약 6㎞ 지점에 높이 932m의 백화산이 있고, 이 산의 정상에서 좌우로 에워싼 능선
을 따라 20㎞ 규모의 석성이 축성되었다.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되어 외성은 백화산 어귀에서 협곡의 능선을 따라 뻗쳐 있고 외성에
서 보문곡(寶門谷)이라는 골짜기를 따라 2㎞쯤 올라가면 타원형의 내성이 정상 부분을 에워싸고 있
다.
부산성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인 경주 서쪽에 자리한 해발 729.5m의 부산(富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깬돌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은 석성이다. 부산은 주
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五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 하므로,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
고도 불린다.
부산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 까지 침입하자, 문무왕이 도성(都城) 서쪽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경주 남
산에 장창(長倉)을 건립하면서 함께 쌓았다.
산성은 661년(문무왕 1)에 쌓기 시작하여 3년만에 완공하였다.산성 밖의 지형은 4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에 적합한 천험(天險)의 요새이며, 산성 안은 평탄하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하
기에 알맞다. 성벽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安山岩) 석재를 안팎으로 쌓아 올리고 그 사이에 잡석을
채우는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조하였다. 성벽은 현재 대부분 무너져 돌들이 산허리에 널려 있지만,
성 안에는 남문(南門)터,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軍倉)터, 주암사(朱巖寺)터 등의 건물터와 함께
군사 훈련을 시켰던 연병장(鍊兵場)터, 연못터, 암문(暗門)터, 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주암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절터 바로 북쪽에는 지맥석(持麥石)이
라고 불리는 넓고 평평한 큰 돌이 있다. 이 돌은 10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로,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었고, 그 뒤 술을 빚어 군사들에게 준 곳이어서 지맥석이라 불리게 되었
다고 전한다. 한편 부산성은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향가「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의
주무대로 알려져 있다.
북형 산성 (경주시)
경주시 강동리에 쌓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산천조(山川條)에 의하면 형산(兄
山)은 안강현(安康縣)의 동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그것을 북형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북형산에 성을 쌓은 것은 나당전쟁이 치열했던 673년(문무왕 13) 9월이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국
원성(國原城)·소문성(召文城)·이산성(耳山城)·주양성(走壤城)·주잠성(主岑城)·만흥사산성(萬興寺山
城) 등도 함께 쌓았다.
그뒤 북형산성은 신라시대의 3사(三祀), 즉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 중에 중사로 취급되
었다.
비봉산성 (영주시)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읍내리 산29번지 일대의 비봉산(해발 43m) 남서쪽 산록에 위치하고 있
다.
이 신성의 규모는 남북 약 335m, 동서 약 460m로 전체 길이는 약 1, 350m이며, 성내 면적은 약
26,000평에 달한다.
상주읍성 (상주시)
상주읍성의 흔적을 기초로하여 시가지를 그린 그림으로 성을 개발하고 있으며, 시내에 4대 성문의
위치는 나타나고 있다.
서형 산성, 선도 산성, 서악 산성 (경주시)
경주시 서남쪽 선도산(仙桃山) 정상에 있다. 서형산성(西兄山城) 또는 서악산성(西岳山城)이라고
도 한다. 정확한 축성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三國史記)》에 593년(신라 진평왕 1
5) 둘레 2000보의 서형산성(西兄山城)을 개축(改築)했다는 기록과 673년(신라 문무왕 13)에 증축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가파른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북쪽과 동쪽에만 따로 성벽을 쌓았다.
성곽의 구조는 포곡식(包谷式)과 테뫼식이 혼합된 형태이며, 둘레는 약 2.9㎞이다. 성벽은 흙과 돌
을 섞은 토석벽으로 아래쪽은 넓고 위쪽으로 갈수록 좁게 쌓았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치열한 전
투가 벌어져 의병이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성 위쪽에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 제65호)과 성모사유허지(聖母祀遺墟址)가 남아 있다.
성산성 (성주군)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신부리에 있는 산성으로 성산성 부근이 군특수기지가 들어서서 산성이 연
결도로로 사용됨으로써 중요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상실되었다.
속문 산성 (김천시)
김천시 감문면 백운산 정상부의 속문산성(俗門山城) 은 고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군사 거
점으로 활용됐다. 속문산성 곳곳에는 방어목적의 성벽과 함께 군대와 백성들이 머물렀을 법한 공간
이 남아있다.
학계는 속문산성을 삼국시대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김천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구전은 다르
다.
구전에 따르면 속문산성은 김천의 고대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최후의 방어 거점이
다. 감문국은 1천700여년 전(231년) 신라에 병합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왕모산성 (안동시)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는 고려시대 산성으로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주민들이 축성한 성이며, 왕모산성이란 명칭은 공민왕의 모친이 이곳에 피난하였다 하여 붙
인 이름이라고 한다.
용산산성 (경산시)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산리 산 15 외용성면과 남산면의 접경에 위치한 해발 435m인 용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둘레 약 1.6km, 높이 2.3m 너비 3.2~3.6m의 규모로 돌을 쌓아 만든 산성이다.
경사가 완만한 동쪽면과 남쪽면은 돌을 쌓았으나 북쪽면과 서쪽면의 급경사지에는 석심토축을 한
테뫼식 산성으로, 동쪽면은 성벽 아래 다시 돌을 쌓아 이중 성벽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은 대부분 붕
괴되어 지금은 약 50m 정도만 남아 있다.
동서남북 4곳에 같은 형식으로 지은 성문의 흔적이 있는데, 긴 장대석을 깔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성문벽을 만든 것으로 보아 각 문지의 너비는 동문지 약 4.4m, 서문지 3.4m, 남문지 4.2m, 북문지
2.7 m로 추정된다.
성지에서는 신라시대 말기부터 조선시대까지의 기와조각과 토기조각이 발견되었으며 이 것으로
추측되는 결과는 가야시대에 이 지방에 도적이 성행하자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쌓은 성으로 후대까
지 군사적인 요새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장기읍성 (포항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에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등의 문헌 기록에 의하면, 둘
레는 2,980척(약 1,392m)이고, 높이는 10척인데, 성 안에는 우물 4곳과 연못 2곳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둘레는 약 1.3㎞이고, 성벽의 높이는 약 3.7∼4.2m이며, 두께는 아래부분이 약 7∼8m, 윗
부분이 약 5m이다.
동쪽·서쪽·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고, 수구(水口) 1곳, 치성(雉城) 12곳이 있으며, 성 안에서는 우물
5곳과 연못 3곳이 확인된다.
이 읍성은 산 위에 위치하여 산성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곧 읍성은 해발 252m 동악산(東岳山)에
서 해안쪽인 동쪽으로 뻗은 해발 약 100m 산 정상의 평탄면에 축조되었는데, 동쪽과 서쪽이 긴 마
름모꼴 모습이다. 산 위에 읍성이 자리한 것은 서쪽으로 연이은 산이 가로막고 있고, 남쪽과 북쪽으
로는 주변 고을이 떨어져 있어, 유사시에 구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오랜 시간 동안 농성하면서 시간
을 벌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011년(현종 2)에 여진족이 해안으로 침입할 것을 대비하여 흙으로 쌓았다. 그 뒤 1439년(세종 2
1)에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서 돌로 다시 쌓았으며, 동해안의 주요 군사기지 및 관아로 사용하였
다.
읍성의 축조 방식은 평지 읍성, 소구상(小丘上) 읍성, 산성 읍성 등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장기읍
성은 산성의 기능을 갖춘 고려시대의 읍성으로, 매우 희귀한 사례이며 해안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
료로 주목된다.
주산성 (고령)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읍 연조리 산1번지와 중화리 산3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백두대간의 일맥인
가야산에서 뻗어나온 문수봉, 미숭산의 줄기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 형성되었다고령 주산성은 북고
남저의 지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는데, 북쪽의 정상부는 해발 310m 내외이고 남쪽은 해발 180
m 내외이다.
고령 주산성은 주산 정상부에서 6부 능선을 가로 지르며 쌓았고, 정상부에는 내성을, 그 남쪽에는
외성을 쌓았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711m 정도이고, 외성의 전체 둘레는 1,035m이다. 외성이 내성
의 북벽과 서벽에 잇대어 축조되어 산성 전체의 일주 둘레는 1,351m 정도이다.
자연적인 지형의 굴곡을 따라 쌓은 부정형의 석성으로 급경사를 이용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
벽은 대부분 유실되어 있는데, 석재는 자연석과 장방형의 할석을 사용하였다. 자연석과 할석을 섞어
매단을 횡으로 평평하게 쌓았고 상·하단은 층단식으로 쌓았는데, 돌과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보강하였다. 석벽 축조 방법은 대부분 내탁법(內托法)을 채택하였으나, 내성 서벽의 일부 구간에는
협축법(夾築法)을 사용하였다.
고령 주산성 안에는 대가야시대 토기가 발견되고 있어 대가야시대의 산성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
와 함께 인화문 토기 등 신라 토기와 기와, 전돌, 숫돌 등도 함께 출토되었다. 고령 주산성은 대가야
시대 왕궁을 방어하기 위한 배후 산성으로, 유사시 피난하여 항전하기 위한, 즉 대가야의 산성 방어
를 위한 주성(主城)이었을 것이다.
대가야가 멸망한 이후에도 고령 주산성은 신라가 백제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신라 외곽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 산성으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673년에 이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은 새롭게
산성을 축조한 것이 아니라, 대가야시대 이래 전해오던 산성을 수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량산성 (봉화군)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으며 공민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천생산성 (구미시)
경상북도 구미시 장천면 신장리에 있는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 면적은 61,874㎡이며 신라시조 박
혁거세(朴赫居世)가 처음 쌓고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가 왜적을 맞아 싸웠다고 전해오는 이 산
성은 현재 칠곡군과 인접되어 있다.
청도읍성 (청도군)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동삼리, 동천리와 접해있으며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서 쌓은 것이
었다.
조선시대 선조 때 부산에서 서울을 향하는 주요 도로변 성지를 일제히 수축하는 과정에서 청도군
수 이은휘가 석축으로 다시 쌓은 것으로 1590년(선조 23)에 착수하여 1592년(선조25)에 준공하였
지만원래의 성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1.88km, 높이가 1.7m, 성가퀴(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600첩이었다. 산성과
평지성과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네모꼴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협축벽이다.
임진왜란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의 읍성철거정책으로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성터 하부의 축조형태는 알 수 없고, 여첩의 구조도 붕괴되어 조사할 수 없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다.
화산 산성 (군위군)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에 있는 이 성은 조선 숙종 35년(1709)에 병마절도사 윤숙이 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병영을 건설하고자 쌓은 산성이다
학가 산성 (예천군)
경상북도 안동시(安東市) 북후면(北後面) 신전리(薪田里) 산69번지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학가산(鶴駕山, 870m)의 정상 부근에 있는 산성으로 계곡을 둘러싼 산줄기를 따라 쌓은 포곡식(包
谷式) 산성이다. 경사가 급한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내외 협축법(內外夾築法)으로 쌓았는데, 아래쪽
은 비교적 큰 돌로 쌓고 위쪽은 작은 돌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를 하였고 높이는 2~4m이며 길이는
약 2,000m이다.
흑응 산성 (예천군)
경북 예천에 있는 해발 100m의 흑응산 정상에 흙과 돌을 섞어 쌓은 산성으로, 내성과 외성 이중으
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은 덕봉산성 또는 봉덕산성으로도 불린다.
현재 남아있는 성벽의 둘레는 1,900m, 높이 3∼4m이며, 내성 안에는 우물 2개와 연못 1개가 잘 남
아있다. 군수품을 저장하던 창고로 보이는 자리에는 농한기에 머물 수 있도록 간단하게 지은 집이
있고, 산 정상에는 성황당이 남아 있다. 성 안에서 민무늬토기·신라토기 조각이 발견되고, 고인돌 3
기가 남아있다.